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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두석 시인

부흐고비 2021. 8. 10. 08:44

낡은 집 / 최두석
귀향이라는 말을 매우 어설퍼하며 마당에 들어서니 다리를 저는 오리 한 마리 유난히 허둥대며 두엄자리로 도망간다. 나의 부모인 농부 내외와 그들의 딸이 사는 슬레트 흙담집, 겨울 해어름의 집안엔 아무도 없고 방바닥은 선뜩한 냉돌이다. 여덟 자 방구석엔 고구마 뒤주가 여전하며 벽에 메주가 매달려 서로 박치기 한다. 허리 굽은 어머니는 냇가 빨래터에서 오셔서 콩깍지로 군불을 피우고 동생은 면에 있는 중학교에서 돌아와 반가워한다. 닭똥으로 비료를 만드는 공장에 나가 일당 서울 광주간 차비 정도를 버는 아버지는 한참 어두워서야 귀가해 장남의 절을 받고, 가을에 이웃의 터밭에 나갔다 팔매질당한 다리 병신 오리를 잡는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시인 / 최두석
물길은 말길과 통하고/ 말길은 숨길과 통한다// 물길이 제대로 열려야/ 모든 생명이 고르게 숨쉴 수 있다// 말길이 제대로 열려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 우리 몸 어디에 생채기가 나도/ 피가 스며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디나 몸속에는 실핏줄이 통하고 있다// 세상의 물길과 말길과 숨길은/ 몸속 핏줄과 통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시인이란 자신의 말길을 열어/ 세상의 물길과 숨길과/ 은밀히 소통하는 자이다.//

어떤 시인 / 최두석
격정으로 출렁이는 파도보다/ 바위의 침묵이 그리운 날/ 우뚝 솟은 바위산을 오르네/ 암봉을 타며/ 바위의 침묵을 쪼아/ 연꽃 피워 부처를 미소 짓게 한/ 옛적 석공을 생각하네// 바위의 완강한 침묵보다/ 파도의 출렁이는 말이 그리운 날/ 파도소리 거친 바다로 가네/ 알몸으로 파도를 맞으며/ 청아한 피리소리로/ 거친 파도 잠재워 세상을 화평케 한/ 옛적 악공을 생각하네// 그러다가 지상의 방방곡곡/ 암반을 뚫고 해맑은 샘이 솟는 곳/ 시내가 흘러 유유히 강이 되는 곳/ 강이 흘러 바다와 뒤척이며 만나는 곳/ 성지인 듯 순례하네/ 세상의 온갖 목마름을 적시는/ 간절하게 귀한 말을 찾아.//

 

시인과 꽃 / 최두석
말이 씨가 된다고 믿고/ 씨앗의 발아를 신뢰하는 농부처럼/ 마음속 묵정밭 일구어/ 꽃씨를 뿌리는 이가 있다// 가뭄과 장마를 견디고/ 꽃나무가 잘 자라/ 환하게 꽃술을 내미는 날/ 그는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길 / 최두석
세상 모르고 당당히 가던 길 있었지/ 가파른 비탈이지만 의연히 걷던 길 있었지/ 사명감에 골똘히 앞만 보며 치닫던 길 있었지/ 외로움에 칡뿌리 씹으며 터벅거리던 길 있었지// 이제는 되짚어 갈 수 없는 그 길들/ 가시덩굴 우거진 풀숲에 숨어 있지//

눈길 / 최두석
금촌까지 이십 리/ 차는 눈길에 막혀 오지 않고/ 간혹 미끄러져 비칠대며/ 나는 눈사람이 되어 걷는다/ 길가 앙상한 코스모스도/ 눈꽃으로 새로이 만발하고/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 임진강가/ 길이 끊겨 더 갈 수 없는 곳으로부터/ 자주 안경알을 닦으며/ 되짚어 돌아오는 것이다/ 무작정 막다른 곳 까지 갔다가/ 후퇴하며 다시 시작하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하나/ 도무지 가름할 수 없는 세월/ 세밑의 어느 날/ 잿빛 하늘 자욱히/ 함박눈 춤추며 내리는데/ 뚜루루루 끼룩// 기러기떼는 보이지 않고/ 울음 소리만 날아간다//

그 놋숟가락 / 최두석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굽이굽이 오솔길 안내하던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칭찬도 했지// 이어서 저녁 먹는 시간/ 나는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금례 누님 자리의 숟가락을/ 몰래 얼른 입속에 넣고는 놓았네// 그녀의 이마처럼 웃음소리 환하던/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이/ 그 숟가락으로 스스럼없이 밥 먹는 것/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았네// 지금은 기억의 곳간에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놋숟가락/ 짚수세미로 그리움과 죄의식 문질러 닦아/ 눈썹의 새치도 비추어보는 놋숟가락.//

누님 / 최두석
너무 똑똑한 양반이라 벌이도 없는, 남편 모시고/ 정순이 누나, 수의를 지어 생계 꾸리니/ 윤달이면 준비성 많은 노인들의 주문이 쇄도해 바쁘고/ 그 틈에 큰어머니 수의도 미리 지어 두고// 간경화증 남편 청춘에 이별한/ 정님이 누나, 한복 바느질과 하숙으로 삼남매 기르고/ 중등학교 시절 의지할 곳 없던 나는/ 거기에 살며 더러 친구들도 데려다 하숙시키고// 시집간 지 일년 만에 잉태한 채 죽은/ 정희 누나, 큰어머니 잦은 눈물의 샘이 되고/ 그 뒤 매형은 주유소를 차려 돈벌이 제일 잘하고/ 새로 색시 얻었지만 아직도 사위 노릇 지극하고// 육이오 전쟁통에 종두를 못 맞아 곰보가 된/ 정옥이 누나, 4H니 전화 교환원이니 안간힘이다가/ 사귄 청년 운전 면허 따게 해 사고 몇 번 치르고/ 이제 숙련된 그는 영업용 택시를 몰아 가장(家長) 구실하고// 대학의 과사무실에서 만난 선배 은숙이 누나는/ 자취하는 내 쌀 걱정, 추운 걱정 도맡더니/ 지금 아내가 되어 있다.//

경주남산 할매부처 / 최두석
아마도 석공의 어머니가 모델이 아닐까/ 웃고 울며 한세월 살아본/ 아이도 두엇은 낳아 길러본 여인네의 표정이 살아있다/ 그 손맛으로 무친 나물 백반 한 상 간절히 얻어먹고 싶다/ 시고 떫고 달고 맵고 짠 세상살이의 맛을/ 칼로 자르듯 끊어내기보다/ 두루 보듬어서 우리고 삭히는 부처가 있다는 게 고맙다.//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 최두석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거쳤던가/ 하지만 각별하게 따스했던 눈길과 손길마저/ 얼마나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가/ 경주 남산 바위에 새긴/ 수더분한 모습의/ 관음보살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람하거나 정교한 조각이 아니라서/ 더욱 정겨운/ 보살이 쥐고 있는 정병은/ 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이들이 어루만진 손길로 반질거린다/ 그 정병을 기울여 약물을 마시면/ 어떤 마음의 병도 나을 것 같다.//

미소 / 최두석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지장보살을 먹다 / 최두석
곡식이 귀한/ 두메산골 아낙들에게/ 나물은 보살이었나 보다/ 하여 풀솜대를/ 지장나물이라 불렀나 보다// 가시로 찌르거나/ 삶고 우려도 독이 잘 빠지지 않는/ 질긴 나물도 많은데/ 날로 씹어도 부드러운 풀솜대는/ 나물로 보릿고개를 넘던 이들에게/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온몸을 던져 중생을 구한다는/ 지장보살로 보였나 보다// 산길을 가다/ 풀솜대를 꺾어/ 풋풋하게 싱그러운 맛 음미하며/ 나물 먹고 보살 부르는/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검룡소 / 최두석
기분이 우중충하여/ 궂은 추억만 불러내는 날이면/ 기분전환을 위해 생각한다/ 검룡소의 맑고 시원한 물맛을/ 만회할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한 후회가/ 울적한 슬픔으로 가라앉을 즈음/ 마음을 추스리려고 떠올린다/ 한강이 발원하는 검룡소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샘물을/ 솟구쳐 암반을 세차게 타고 내려/ 시내가 되는 모습을/ 먹고 싸고 마시고 씻는/ 일상사를 온전히 의탁한/ 한강의 주민으로서/ 세상을 사느라 맡은 배역이/ 누추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한강 천삼백 리를 거슬러/ 태백의 금대봉 골짜기를 오른다/ 서해 용이 승천하러 오른다는 전설의/ 검룡소를 찾아가/ 시원의 약물 마시며/ 오장에 스민 병을 다스린다.//

물맛 / 최두석
절에 가면 스님의 설법을 듣기보다/ 물맛을 보는 버릇이 있다/ 얼마나 맑고 시원한지 맛보며 그 절집의/ 수행의 분위기를 가늠해본다// 폐사지에 가서도 남은 탑이나 축대보다/ 샘이나 우물의 자취를 먼저 살핀다/ 정갈한 샘이 솟고 있으면/ 아직 그 절의 기운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 수돗물로 몸을 씻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생수를 마시며/ 샘도 우물도 없는/ 대도시에서 속되게 살면서/ 절간에 가서는 진정한 생수를 찾는다// 목마름을 적시는 물맛을 보며/ 경전 구석에 박힌 지당한 말씀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는 말에 대한/ 갈증을 대신 달래보곤 한다.//

무량사 -나희덕에게 / 최두석
만수산 무량사에 가거든/ 영산전과 부도밭 사이를 걸어요/ 온 생애를 길에서 보낸 자의 발걸음/ 잠시라도 흉내 내면서// 얼마나 세상이 못마땅했으면/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영정마저 잔뜩 이마를 찌푸리고 있을까/ 영산전에서 벙거지 쓴 영정을 보고// 생애의 마지막 인연이 수습된/ 부도밭으로 가서/ 부도의 깨진 자국 어루만져요/ 상처 많은 사내의 흉터를 만지듯이// 얼마나 많은 강과 시내를 건넜을까/ 탁류를 거슬러 맑고 차게 자신을 지키려/ 스스로 유배의 길로 내몬/ 떠돌이 시인 김시습// 만수산 무량사에 가거든/ 영산전과 부도밭 사이를 걸어요/ 온 생애를 길에서 보낸 자의 영정과/ 사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소월에게 / 최두석
이 아늑하게 따스한 햇살 속/ 금잔디 위에/ 흰 고무신 신고 나와 놀기를/ 도토리 옴돋아 눈여겨보다가/ 어린 떡갈나무 눈여겨보다가/ 바야흐로 벙그는 진달래 꽃망울에/ 그윽이 입맞추기를/ 온갖 나무들 물 마시는 소리/ 새잎 내미는 소리/ 환하게 들으며/ 아지랑이 가물대는 산길 따라/ 느긋이 사뿐히 걸어가기를/ 그냥 어미 잃은 멧새알 하나/ 이웃 멧새 둥지에 옮겨넣기를//

엉또폭포 / 최두석
가슴에 야심을 품고/ 거칠 것 없이 사는 이여/ 제주에 가거든/ 엉또폭포엔 가지 말게나/ 무슨 폭포가 물 한 방울 없느냐고/ 속은 게 분하다는 듯이/ 투덜댈 게 분명하니// 세상의 변방에 살면서/ 바래버린 꿈을 아쉬워하는 이여/ 제주에 가거든/ 바닷가만 걷지 말고/ 엉또폭포에 다녀오게나/ 가서 일 년 중 며칠/ 폭우가 쏟아질 때나 드러나는/ 장쾌한 위용 상상해보게나// 혹시 모르지/ 운이 좋으면 암벽 위를 나는/ 송골매까지 만날 수 있을지.//

천지연폭포 / 최두석
서귀포 천지연에서는/ 오리도 물닭도 논병아리도/ 사람을 피해 날아가지 않는다/ 짐짓 가까이 다가와 사진 찍기 좋게/ 자세를 잡는 녀석도 있다// 심지어 사람을 아주 꺼리는 원앙까지/ 평화롭게 자맥질을 하고 날개를 말린다// 새에게 축복의 땅이/ 사람에게도 축복의 땅이라 말하며/ 폭포는 원시의 날처럼 힘차게 떨어지고/ 늘푸른나무 숲 위로 무지개가 뜬다.//

겨울 폭포 / 최두석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머금어보았는가/ 얼어붙은 마음에/ 어설픈 햇살 받으며/ 벙어리 눈물 흘리다가/ 다시 얼어붙고 마는/ 고드름으로 빼곡한 가슴 보았는가/ 함성으로 세차게 흘러/ 거침없이 융융한 강이 되고 싶은데/ 키 넘게 눈 덮인 첩첩산중에/ 굳센 얼음기둥 세우고서/ 숨죽인 채/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삼켜보았는가.//

아우라지에서 / 최두석
진달래 꽃잎 띄우고/ 그리움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겨울 골짜기에 얼어붙었던/ 슬픔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리움은 슬픔을 만나/ 깊어지고 넓어지고/ 슬픔은 그리움을 껴안아/ 강이 된다고 넌지시 일러주며// 하염없이 일렁이는 물살은/ 어디로 아득히 흘러가는가/ 여울을 지나 소를 지나/ 다시 오지 않을 생애의 한 굽이를/ 소용돌이치며 돌아//

다시 경포에서 / 최두석
안개비 속에/ 뿌옇게 흐린/ 경포 호수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고여 거울이 되지 못하는 물은/ 썩게 마련이라고// 출렁이는 마음속/ 뿌연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삼 생각한다/ 불혹이란/ 자기 몫의 외로움을 겸허하게/ 견디는 일이라고// 무리를 잃고/ 뻘흙 위 갈숲에서/ 병을 다스리는 새여/ 네가 물을 차고 솟구치는 날/ 숭어가 고니로 변해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완성되리라.//

수승대 / 최두석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수승대에 들러 맨 먼저/ 곤혹스럽게 떠오른 속담이다/ 당시에는 호랑이가 살았을/ 덕유산 위천 계곡/ 바야흐로 물에 드는 거북바위를 두고/ 퇴계가 붙인 이름이 수승대搜勝臺란다/ 그걸 증명하는 퇴계의 한시가 새겨져 있고/ 그 위아래 옆 뒤에/ 바위를 둘러 빼곡하게 새겨진 이름들/ 자리를 다투듯 획의 크기를 다투듯/ 형제와 부자가 함께 새겨진 이름들// 그 이름의 주인들 다 한 때는/ 위세부리며 떵떵거리던 자들이리라/ 술동이는 기본이고/ 기생까지 데리고 와 시회를 열고/ 석수장이를 시켜 잘난 이름을 새겼으리라/ 아무래도 훗날을 알 수 없는 퇴계 이선생이/ 신통할 것 없는 시로/ 쓸 데 없는 짓을 한 탓이리라// 바위틈에 뿌리내린 솔의 기품에/ 멀리 미치지 못하는 시들/ 바위에 붙어 자라는 이끼보다 못한 이름들/ 아 함부로 바위에 시를 새기지 마라/ 아 외람되이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마라.//

가천 암수바위 / 최두석
남해도 가천마을에 가면/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다랑이논 사이로/ 만삭의 암바위를 거느리고/ 근사하게 잘생긴 수바위가/ 무람없이 불끈 서 있는데/ 예로부터 착박한 땅에 뿌리내린 섬사람들이/ 무엇을 빌었는지 증언하며 서 있는데// 이 바위가 영험한 숨은 이유는/ 파도가 은근히 뒤설레는 밤이면 바다로 내려가/ 앞물을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멸치 새우 가자미 등이 떼 지어 몰려와/ 다투어 산란을 하기 때문이란다//

만남에 대하여 / 최두석
만나고 싶다/ 다혈질 인정 많은 친구여/ 그대의 눈물에 흥건히 젖어/ 나는 변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치밀하고 열심인 친구여/ 사실은 멱살이라도 잡고/ 땀방울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지만/ 끝내 별일 없이 헤어질지라도//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내가 아는 모든 이여/ 혹은 미지의 사람이여/ 만나고 싶다/ 온갖 허위의 허물 벗어버리고// 그대의 속내에/ 보름밤 쥐불처럼 호기심 불타는 것/ 이 폭력과 정신병의 세상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우렁 색시 / 최두석
나의 선조는 최치원이 아니고/ 차라리 우렁이라 할까/ 끊임없이 생수 솟구치는 둠벙/ 둠벙에 깊이 잠겨 사는/ 주먹만한 우렁이라 할까// 세상에서 가장 순박하고 억센/ 총각이 짓는 논을 골라/ 풍년 나락이 넘실대는 논고랑을 기어나와/ `이 농사 거두어 누구랑 먹고 살지'하는/ 총각의 혼잣말에 응수한/ 목소리 해맑은 우렁이라고나 할까/ 총각이 주머니에 넣었다가/ 부엌 물덩이에 담가 두었더니/ 살며시 밥 짓고 바느질한/ 우렁에서 나온 색시라 할까.// 어느날 들에 밥고리 이고 나갔다가/ 너무 예쁜 죄로 원님에게 들켜/ 우렁 색시는 원님의 첩이 되었지만/ 이미 농사꾼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나의 선조라 할까// 내 시 또한 최치원에게서/ 혹은 그를 추종한 천년 문학 전통에서/ 별로 배운 바가 없으니/ 내 시의 뿌리도 차라리 우렁 색시라 할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입에서 입으로 끈덕지게 전해 내려와/ 어린 날 누님의 목소리로 내 귀에까지 들어온/ 우렁색시 이야기 같은 것이라 할까.//

나비와 개구리 / 최두석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나비를 만나면 슬프다/ 비 피할 집 없이/ 어디론가 날아갈 기척도 없이/ 흠씬 젖어 있는 제비나비를 보면/ 내 숨겨둔 날개가 젖은 듯/ 후줄근해진다//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개구리를 만나면 기쁘다/ 좋아라고 만세 부르듯/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당개구리/ 번들거리는 초록 피부를 보면/ 내 살갗도 촉촉이 젖어/ 생생해진다.//

꿩 가족 / 최두석
강과 뼝대가 잘 어우러진/ 동강 가수리 콘크리트 포장도로/ 먼저 까투리가 주위를 살피며 도로를 건너간다/ 다음 장끼가 등장하여 어험스럽게 걷는데/ 꺼병이 아홉 마리가 연이어 나타나/ 달음질로 잽싸게 도로를 가로지른다/ 어미 까투리는 풀숲에 숨어 새끼들을 부르고/ 아비 장끼는 마지막 꺼병이가 풀숲에 드는 것을 보고 뒤따라 자취를 감춘다// 새끼를 돌보는 까투리의 조심스러운 몸짓과/ 장끼의 의젓한 태도가/ 눈시울이 젖도록 정겹다// 꿩 가족의 삶터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나는/ 잠시 운전대를 놓고 그들의 안녕과 행운을 빈다.//

현등사 곤줄박이 / 최두석
운악산 현등사 보광전/ 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 새가 깃들여 산다// 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곤줄박이 한 쌍의 비상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곤줄박이는 알 품고/ 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 기꺼이 노래하고//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새 날아간 자취 더듬듯/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되새긴다.//

달팽이 / 최두석
임진강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문산천, 초병의 총구가 무심히 햇빛에 빛나는 유월 어느 날, 기슭에 수양버들 한 그루, 그 아래 화강암 돌비 하나. 너무 한적해서 간혹 물거품을 터트리는 냇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달팽이 무리, 그 달팽이 무리가 뻘흙 위로 상륙한다. 굼실굼실 기슭의 수양버들 밑둥으로 기어오른다. 제각기 등에 집을 진 채 동둑으로 뻗은 밋밋한 가지를 타고 달팽이의 느릿한 행렬이 이어진다. 마침내 가지 끝에서 온몸을 집 속에 감추고 굴러 떨어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달팽이는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쥐고 떨어진다. 버들가지 속잎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아래 풀밭에 떨어진 놈은 다시 물을 찾아 굼실거리고 돌비 위로 떨어진 놈은 당장 깨져 죽는다. 달팽이의 시신이 널어 말려지는 돌비, 돌비에는 핏빛 글씨로 ‘간첩사살기념비’라 씌어 있다. 그때 초병이 걸어와 돌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의 군화 밑에는 굼실거리던 달팽이 몇 마리 깔려 있다.//

까마귀 / 최두석
쌓인 댓잎 위에서 주워든 새털/ 공중에 띄워 입김으로 불어 올리기/ 홀연히 일어난 회오리 바람/ 바람 속에서 솟구친 까마귀 몇 마리// 까마귀들이 원무를 추다 사라진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언 땅을 디딘 발등으로 내린 눈은 발자국이 되어 뒤에 남았다. 밭머리 수숫대들은 모갱이 잘린 채 섰고 수숫대로 비껴 본 구석방에서 어머니는 자꾸 허리 아팠다. 구들이 타도록 관솔불을 지펴야지, 벌겋게 달아 오른 솔방울을 생각하며 건너간 들판의 한쪽에서는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떼죽음했다.// 쌓인 눈 위에 흩어진 독약.//

노루귀 / 최두석
봄이 오는 소리/ 민감하게 듣는 귀 있어/ 쌓인 낙엽 비집고/ 쫑긋쫑긋 노루귀 핀다/ 한 떨기 조촐한 미소가/ 한 떨기 조촐한 희망이다// 지도에 없는/ 희미한 산길 더듬는 이 있어/ 노루귀에게 길을 묻는다//

심봉사 -아버지가 죽었을 때 하던 일 중단하고 꼬박 삼년상을 치렀다는 한 양공주의 삶에 대하여 / 최두석
해방 조국에 돌아온 일가족이/ 굶어 죽는 꼴 볼 수 없어/ 심청이가 외국 뱃놈과 거래하듯/ 몸을 판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밀가루 포대로 산 남자는/ 흑인 로이 대위/ 남동생을 통역으로 취직까지 시킨/ 대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위가 귀국하던 날/ 그녀는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떨어졌다/ 거울 뒷면 수은을 긁어 먹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둥이 아이를 데리고/ 진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동두천으로/ 그녀는 이른바 양색시였다/ 미군들은 미제 물건을 뒷거래한 돈으로/ 그녀를 데리고 살았다// 삼단 같은 머리채 성긴 백발로 변하고/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으되/ 한반도 미군 철수는 도무지/ 꿈도 꾸지 않는 할머니,/ 누가 그녀의 생애에 돌을 던지랴/ 이 땅의 심봉사인 사내들이여.//

풍뎅이 / 최두석
지금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풍뎅이들아 미안하다/ 철모르던 시골아이의/ 기억의 헛간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만/ 다만 놀이로/ 수많은 너희들의 목을 비틀었구나// 참나무 수액을 빠느라 정신없는/ 너희들을 붙들어/ 다리를 분지르고 목을 비틀어/ 땅바닥에 뉘어 놓고서/ ‘핀둥아 핀둥아 갈미봉에 비 몰려온다/ 마당 쓸어라’ 노래하며/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면/ 땅바닥을 헛되이 맴돌던 분망한 날갯짓이/ 뒤늦게 눈에 아프구나// 심심하면 못 견디는 인간으로 태어나/ 놀이에 정신이 팔려/ 너희의 고통을 목숨을/ 장난의 재물로 삼았구나/ 이제 유심히 참나무를 살펴도/ 잘 눈에 뜨지 않는 풍뎅이들아.//

장화홍련 / 최두석
눈동자 속에 가득한 꽃/ 그 중 장화홍련薔花紅蓮을 읽는다// 부러진 가로수 가지에서 안개가 피어나고 무진의 거리를 장화가 걷는다. 몇 군데 가게를 들러 미래의 아기옷을 사들고 문을 여는 순간 비칠 쓰러졌다. 홍련은 마구 뛰었다. 어느 낯선 민가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기다리던 장쇠는 이미 칼을 거두었다. 안개가 덮여 왔다. 자욱히 숨막히게 그녀의 치마가 바람에 날려다녔다.// 교회의 쓰레기 처리장에서는/ 장미가, 연못에서는/ 연꽃이 썩는다/ 내 눈동자도 썩어들어간다//

아라홍련 / 최두석
옛적 아라가야의 땅 함안에 와/ 고혹적인 연분홍 연꽃 앞에서/ 꽃의 숨결 호흡하네/ 고려 때의 연못을 발굴하면서 수습한/ 씨앗을 싹 틔웠다는 이야기 속의 꽃/ 현대판 전설의 꽃 가까이 보며/ 칠백 년 동안 기약 없이 기다리던/ 씨앗은 땅속 어둠에 묻혀/ 어떻게 잠자고 숨 쉬었을까/ 꿈결처럼 아득히 아릿하게 그려보네// 지상의 햇살 누리며 시 쓰는 자로서/ 지면에 발표는 되었으나/ 가뭇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시편 가운데/ 몇십 년 몇백 년을 묻혀 있다/ 발굴되어 새로 꽃 피울 시를 상상하네/ 숨구멍이 막힌 씨는 썩는다네/ 말에 숨구멍 만드는 이가 시인이라면/ 곳곳에 은밀하게 숨구멍이 있는 시라야/ 오랜 세월 움틀 날 기다리는/ 씨가 되리라 생각하네.//

세한도 / 최두석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가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나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용문사 은행나무 / 최두석
지상의 약속 같은 금빛 이파리로/ 이 땅에서 가장 경건하고 풍성하게/ 세례를 베푸는 나무가 있다/ 온몸이 옹이투성이인 나무// 망한 나라를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실감 날 정도로 우람하여/ 나무의 수많은 곁가지의 나이테에/ 나의 나이의 눈금을 맞추어보기도 하고// 신화 속 생명나무처럼/ 천 살이 훨씬 넘었는데도 해마다/ 예닐곱 가마의 실한 열매 맺어/ 갓 구운 햇은행을 성찬으로 맛보며/ 나의 게으르고 무기력한 나날에 대해/ 고해하고 참회하기도 하는데// 단풍이 꽃보다 아름다워/ 낙엽의 세례를 받으며/ 기운을 얻으려 찾는 나무가 있다/ 옹이조차도 당당한 기품이 되는 나무.//

면앙정 참나무 / 최두석
우뚝 솟은 줄기와/ 활개치듯 뻗어나간 가지가 늠름한/ 면앙정에 있는 참나무를 보며/ 서 있는 자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송순이 낙향하여 면앙정을 지은/ 깊은 속내는 헤아릴 수 없으되/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고자 하는 그의 뜻이/ 참나무에게서 느껴져서이다// 아무래도 자리와 자세가 함께 어울릴 때/ 기품있는 나무가 되리라/ 자신에게 걸맞은 자리에서/ 성심껏 일하는 자라야/ 세상에서 떳떳할 수 있으리라/ 정자 마루에 앉아 참나무를 바라보며/ 내세울 공 없는 과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내가 서 있을 자리와/ 살아갈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이팝나무 꽃 그늘 / 최두석
애정이 예전과 슬며시 달라지고/ 양처보다는 현모가 되려 애쓰는 아내가/ 꽃구경 가자고 했을 때/ 맨 먼저 왜 이팝꽃이 떠올랐을까/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힘들게 살아온 아내가/ 모처럼 부부여행을 제안했을 때/ 나는 왜 소복이 쌀밥 같은 꽃을 피운 채/ 모내기 하는 들녘을 바라보는 이팝나무가 떠올랐을까// 꽃이 일시에 구름처럼 피면 풍년이요/ 꽃이 주춤주춤 빈약하게 피면 흉년이라는/ 이팝나무 꽃그늘에서 새삼/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간절히 잡고 싶었을까// 농사가 생업인 사람들이 대대로/ 정자나무로 아끼고 당나무로 섬겨온/ 이팝나무 환한 꽃그늘아래 서서 새삼// 쌀밥 먹는 게 소원이던 시절을 회상하고 싶었을까//

둥구나무 / 최두석
둥구나무가 둥구나무인 것은/ 마을에 뿌리 내리고 살며/ 길 떠나는 이를 멀리 배웅하고/ 돌아오는 이를 먼저 반기기 때문이다// 둥구나무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를/ 팔 벌려 다정히 맞이한다/ 좀처럼 등을 돌리지 않는다// 숲속의 팽나무나 느티나무는/ 둥구나무가 되지 못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야/ 그늘이 넓고 깊은 둥구나무가 된다.//

사스레피나무 / 최두석
낭창낭창한 가지에 윤기 흐르는 촘촘한 잎/ 고향 뒷산에서 보던 녀석을 상가에서 본다// 출세한 기관장의 이름이 붓글씨로 적힌/ 국화 조화의 배경으로 짙푸르게 꽂혀 있는 녀석// 겨울에도 생생히 푸르러 땔감으로도 신통치 않던/ 놈의 가치를 근래에야 알아 가지째 자르는 모양이다// 남도의 숲에서 잘려 단으로 묶여/ 원예시장의 값싼 상품으로 이리저리 팔려가는 모양이다// 상품이 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이 세상에서/ 놈의 족속은 도대체 무슨 행운을 붙잡은 것인가// 나는 문상 온 고인의 생애를 뒷전에 두고/ 자꾸 사스레피의 얄궂은 운명의 행로를 가늠해본다.//

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 / 최두석
새 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가 내쉬는 숨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신다/ 그네를 뛰고 공을 차던 아이가/ 반백이 되어 돌아와 행하는/ 봄맞이 의식이다// 이조의 태조 이성계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나무/ 방방곡곡 제법 돌아다녀본 뒤에 보아도/ 이 땅에서 가장 웅숭깊은 그늘을 거느린 나무/ 그 그늘 아래서 글을 익힌 게/ 은근히 자랑스러운 나무// 오물오물 움질움질/ 새 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의 숨결이/ 나의 숨결이 될 때를 기다린다/ 나무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때를 기다린다//

참나무의 노래 / 최두석
후여 후련히 날아오르라/ 가슴을 에인 상처가/ 쑤시고 아려 흘리는/ 수액에 취한 딱정벌레여// 잎새에 달빛 환한 밤/ 잎새에 맺힌 이슬 마시고/ 달을 향해 달빛을 타고/ 후여 후련히 날아오르라// 무릇 참나무로 태어나/ 비탈에 서 있는 자/ 상처 입지 않고 말끔하게/ 살아갈 수 없거니// 쑤시던 자리가 가려우니/ 이제 아무는 것인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아물 수는 있는 것인가// 후여 후련히 날아오르라/ 상처에 기생하는 딱정벌레여/ 날아오르다 날아오르다/ 황홀히 추락하여 영면하라.//

대청봉 눈잣나무 / 최두석
힘내자/ 너그러워지자/ 온몸으로 말 건네는/ 대청봉 눈잣나무/ 된바람 칼바람/ 폭설의 눈보라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살아갈 생애이지만/ 여름 한 철/ 무릎으로 기어가/ 가슴으로 뿌리내리며/ 구부러진 온몸으로/ 힘내자 너그러워지자/ 나직이 말 건네는/ 대청봉 눈잣나무//

울릉도 향나무 / 최두석
향나무야/ 울릉도 통구미의 향나무야/ 아스라한 벼랑의 바위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이 땅의 변방에서 살다 간/ 어떤 강인한 넋의 자취인 듯/ 온몸을 용틀임하듯 틀어올려/ 의연히 태양을 우러르고/ 파도를 굽어보는 향나무야/ 네가 견딘 눈보라와/ 네가 바라보는 별을 생각하며/ 마음 다지는 자 있어 묻나니/ 부러 남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높고 가파른 자리 골라/ 살아가는 연유는 무엇이냐.//

느티나무와 민들레 / 최두석
간혹부러 찾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타고 나는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새 꽃씨로 변해 나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 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떠올린다.//

동두천 민들레 / 최두석
어디에 발 뻗고 누우랴. 칼잠 자는 사람들 불편한 잠자리 탓하는 소리 들리는 듯한 동두천 남산모루 공동묘지. 첩첩한 무덤 틈새 비집고 어설프게 자리잡은 작은 무덤, 무덤 위에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송이.// 민들레야, 동두천 민들레야. 너에게서 키 작은 양공주의 굴욕과 자존심을 느끼는 것은 다만 신경과민일 뿐이라고 말해다오. 박토에 뿌리내려 밟혀도 짓밟혀도 다시 돋는 끈질긴 생명이라고 계속 우기다가 살랑대는 봄바람에 보란 듯이 꽃씨를 날려보내렴.// 그렇지만 양키의 어지러운 군화발이 반도에서 사라지는 날, 우리가 우리의 살림을 주장하는 그날이 오면 너는 그냥 전설로 남아다오. 이 땅에 태어난 막다른 길로 쫓기고 몰리다가 자살한 양공주, 그녀의 이름이 민들레였다고 속삭이며 담뿍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렴.//

산수유 / 최두석
산수유 한 줌 따 발라 먹으며/ 묵은해 보내는 내게/ 경계하듯 우짖는 직박구리야/ 너의 혀에도 산수유가 떫고 시니?// 순 속의 붉은 열매 쪼아 먹으며/ 산수유꽃 환한 꽃그늘에서/ 짝 찾을 날 기다리는 직박구리야/ 네게도 무슨 후회할 일 있니?// 열매는 선물로 베풀고/ 가지마다 무수한 꽃눈을 단 채/ 추위를 견디는 나무의 마음을/ 직박구리야 너는 짐작이나 하니?//

매화와 매실 / 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 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 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 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 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 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 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 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 봄에는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여름에는 매실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투구꽃 / 최두석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 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운 배를 움켜 지기도 한다// 솔나리 / 최두석
간혹 외톨이라는 느낌에 시달릴 때/ 불현듯 떠오르는 꽃이 있다/ 화사하면서도 해맑은 솔나리// 하루 종일 걷고 걸어야 오를 수 있는/ 공룡능선이나 남덕유 암봉에/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인 양 피는 꽃// 옛적 선녀를 떠나보낸 나무꾼이/ 지게를 벗어 던지고/ 오르고 올라 만난 꽃// 하여 꽃 피는 철이 오면 늘/ 세상일 벗어 던지고 산을 오른다/ 선연한 분홍 꽃빛으로 마음을 물들이려.//

숨살이꽃 / 최두석
산길 가다가 좋은 꽃밭 만나면/ 살살이꽃이 어디에 숨어 있나/ 숨살이꽃이 어디에 숨어 있나/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다/ 마치 산삼 찾는 심마니처럼// 깊은 산 희미한 산길 가다가/ 멧돼지 가족이 파헤쳐놓은 꽃밭 만나면/ 녀석들도 살살이꽃 혹은 숨살이꽃 찾아/ 밤중에 주둥이로/ 쟁기질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고/ 늙은 무녀의 목쉰 노래로/ 귓가에 맴돌며 피는 꽃/ 상처에 문지르면 살이 돋아 살살이꽃/ 가슴에 문지르면 숨이 트여 숨살이꽃// 산길 가다가 그윽한 꽃내음 맡으면/ 향내가 숨결에 스미고/ 핏속에 번지는 느낌이 좋아/ 잠시나마 그 꽃을 두고 살살이꽃 혹은/ 숨살이꽃이라 여기기도 한다//

개별꽃 / 최두석
숲 그늘이 짙어지기 전/ 봄맞이하듯 피는 풀꽃이 있다// 조촐하고 수수하지만/ 별을 우러르며 소망을 빌거나/ 별빛을 가슴에 품으며 그리움을 견딘 자/ 한 번쯤 무릎 꿇고/ 눈여겨볼 만한 꽃이다// 원래 소망은 낮은 자리에서 조촐해야/ 마음의 그늘에 뿌리내려/ 꽃피울 수 있으므로.//

찔레를 보면 / 최두석
찔레열매 보면 찔레꽃 떠오르네/ 절로자라 피우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생생하며/ 얼마나 그윽한 향내 풍기는지 보이네/ 꽃향기의 축제가 열린/ 무르익은 봄날의/ 잉잉대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보이네// 찔레꽃 보면 찔레열매 떠오르네/ 서리 맞고 눈 맞으며/ 추위와 허기를 견디는 새들에게/ 기꺼이 양식이 되는/ 열매가 품고 있는 여문 씨앗이 보이고/ 까치 뱃속을 통과한 씨앗이/ 볕바란 언덕에서 움트는/ 찔레의 일생이 보이네//

구절초 / 최두석
계절이 바뀌는 산등성이에서/ 단풍잎 응시하며 피는 꽃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시간 앞두고/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 소리 따라/ 아련히 맑은 향내 풍기다가/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꽃이 있다.//

망초꽃밭 / 최두석
고향길 모퉁이 산비알밭/ 가슴팍 헤치고 부는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는 꽃무리/ 고가메댁 호미 들고 어디로 갔나/ 고가메양반 두엄 지고 어디로 갔나/ 지금 감자알 굵어지고/ 초록 완두콩 여물어 갈 무렵/ 밭둑까지 우거진 망초 꽃무리/ 벌 나비 불러 흠뻑 흐드러지나니// 바람결에 들었던가/ 고가메양반 서울 가 청소부 되었다는 말/ 쓰레기 치워 고물 주워/ 먹고 살 만하다는/ 구불구불 눌러 쓴 볼펜 글씨/ 그 누가 편지 한 통 받았다던가/ 편지 받은 이마저 동네 떠나고// 이제는 동네라고도 말할 수 없는/ 헛헛한 고향, 빈집에 바람보다는/ 빈 밭에 바람보다는/ 무수한 꽃망울/ 무성한 망초꽃 우줄거려 좋아/ 내 마음 꽃송이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나니/ 일찍이 망초꽃, 아메리카에서/ 물 건너 온 사연 잊어도 좋으리/ 양키의 기병대에 잿더미 된/ 인디언 마을 옥수수밭/ 망초꽃밭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잠시 잊어도 좋으리.//

탱자꽃 / 최두석
내 하는 짓 못마땅하여/ 마음 속에 가시를 세우는 이여/ 그대와 나 사이의 울타리에/ 탱자꽃 피네/ 촘촘한 가시 틈새에서/ 젖빛 뽀얗게 흐르는 꽃이 피네// 가시를 피해 너울너울/ 호랑나비 날아와 춤을 추다/ 알을 낳네/ 탱자잎 먹고 살진 애벌레/ 무럭무럭 자라 번데기가 되고/ 다시 호랑나비 되어 날아오르네// 내 하는 짓 못마땅하여/ 마음속의 가시를 벼리는 이여/ 그대와 나 사이의 울타리에/ 탱자가 익네/ 촘촘한 가시 사이에서/ 탱탱한 탱자가 금빛 향내를 풍기네.//

며느리밥풀꽃 / 최두석
입 안에 밥알 두 톨 물고 있네/ 가난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입 안에 밥 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고난의 세월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조붓한 입 안에 밥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흙에 떨구는 땀방울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대꽃 6 -우금치에서 / 최두석
진터의 불빛 수십 리, 길마다 봉우리마다를 점령하면서 동학군은 공주로 진격해 갔다. 이윽고 우금치, 총포의 일본군은 보국안민, 기폭을 겨냥하였다. 예닐곱 날의 피 부른 공방전 이때 손은 산봉우리를 향하여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분노보다도 운명보다도 더 무거운 그 바위를, 비틀리면서 미끌리면서 정강이뼈가 삐이면서. 마침내 이 바위가 산봉우리 가까이 아슬한 경사로 밀어 올려지고 있을 때 날아온 총알 몇 발은 바위를 다시 골짜기로 굴려 버렸다. 동학군은 남으로 패주해 가고 아무도 없는 우금치, 손만 남아 또다시 바위를 굴려올렸다. 번번이 골짜기로 되돌아가야 되지만 발바닥 물집 터져 피 고이고 아물다가 되터지고 이러기를 백여 년! 깃발도 함성도 없는 오늘도 여전히 힘살 부풀어.//

대꽃 7 -바위 / 최두석
물찬 은어가 영산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지느러미 스치는 바위, 노령 산줄기 하나 강물에 부딪쳐 일렁이는 금당마을의 바위, 어느 날을 기다려 바위는 자라기 시작했다. 담장의 호박이 자라듯이 그러한 속도로 몸 저리며, 그러면서 자기 몸 깊숙이 핏줄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강물은 몸 부른 바위를 감돌아 몇 십 삭의 나날을 흐르고 이윽고 바위에 균열이 왔다. 점점점 떨어지는 바위틈으로 비가 내렸다. 쏟아졌다. 천둥 번개 엇갈리던 폭우 몇 달, 강물은 거센 아우성으로 흐르고 마을의 집이 한 채 두 채 무너졌다. 강물에 돼지가 떴다. 바위 몸조각도 격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몸조각 하나 둘 셋 넷 다섯……마침내 바위가 낳고 있던 아이조차도, 겨드랑이에 날개 돋친 아이조차도 강물에 휩쓸려갔다.//

대꽃 8 / 최두석
이루어진 지 스무 해쯤 되어 보이는 대숲에는 삼십대의 상인도 오십대의 품팔이도 들어가 섰습니다. 철모르는 어린이도 섞였습니다. 대숲이 술렁거리더니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걱이는 행진의 걸음마다 외마디 외침이 폭발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귓속으로 파고드는 이 소리는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소리가 부딪친 전방 바리게이트에서는 돌연 총포가 난사되었습니다. 이에 대나무들은 쓰러지며 대꽃을 피웠어요./ 한 송이 피면/ 또 한 송이 거품 뿜으며 피고/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우르르우르르 무리져 피는/ 피다가 모두 죽는/ 대꽃.//

선인장 / 최두석
오존주의보가 내려/ 창문을 닫은/ 고층아파트 베란다에/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선인장 가시 틈새로/ 참새의 혀 같은 꽃이 핀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 이루지 못할 꿈의 빛깔로/ 선연하다.//

헌화가 / 최두석
이루지 못한 꿈이/ 얼마나 사무쳐서/ 새가 나는가/ 두루미처럼 목이 길고/ 깃이 흰 새 한 마리/ 구름 뚫고 하늘을 난다/ 부리에 꽃을 문 채/ 울음 소리 삼키며/ 산 넘고 강 건너/ 외로이 묵묵히/ 갈 길 간 이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바치러//

명이 / 최두석
요즘에는 별미의 나물이지만/ 예전에는 섬사람들 목숨을 잇게 해서/ 명이라 부른다는/ 울릉도 산마늘잎 장아찌/ 밥에 얹어 먹으며 문득/ 세상에는 참 잎도 많고/ 입도 많다는 것 생각하네/ 세상의 곳곳에서/ 기고 걷고 뛰고 날며/ 혹은 헤엄치며/ 하염없이 오물거리는 입들/ 과연 잎 없이 입 벌릴 수 있을까 생각하네//

냉잇국 / 최두석
노모가 텃밭에서 캐온 냉이에/ 묵은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을 먹으며/ 경칩을 맞는다/ 얼었다 녹았다 하는 땅에/ 깊이 뿌리내려 추위를 물리친/ 냉이의 생태를 음미하며/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바라본다/ 콩을 심고 메주를 띄우고/ 냉이를 캐고 다듬은 손을 잡아본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잠시도 쉬지 않는 손을 잡아본다/ 밥 먹다가 뭐하냐는 핀잔에/ 나를 기른 손을 놓으며 새삼/ 힘내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상큼한 봄내음의 냉잇국을 먹으며/ 어머니의 등을 휘게 한 세월과/ 나의 발등을 붓게 하는 계절을/ 되새기고 응시한다.// 의심 많은 새는 알을 품지 못한다 / 최두석
점봉산 곰배령 오르는 길에/ 연령초꽃 함초롬히 피었기에/ 향내 맡으러 다가가는데/ 근처 덤불 속에서 부비새가 포르르/ 인기척에 놀라 황망히 날아갔다// 새가 날아오른 자리 유심히 살피니/ 둥지와 품던 알이 있어/ 어미새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파르스름한 새알의 온기도 느껴보고/ 사진도 두어 장 찍었는데// 그 둥지에서 어미새가 다시 알을 품었는지/ 새끼를 몇이나 길러냈는지는 모르나/ 나 문득 하던 일 손 놓고 싶어질 때면/ 파르스름한 새알을 떠올리며 되뇌인다/ 의심 많은 새는 알을 품지 못한다고//

장승 / 최두석
동구에 서서 품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퉁방울눈 굴리며 풀어나갈 일이 많다는 다짐이다/ 눈비 맞으며 지켜내야 할 숨결이 소중하다는 믿음이다.//

노래와 이야기 / 최두석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는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정간보(井間譜) : 조선 세종이 창안한 악보. 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율명(律名)을 기입함.

함동정월 / 최두석
살크당 다로당 이 가야금 음정에 서슬이 있어요. 쓸데없이 투트당거리고 뜯고 튕기면 어떻게 해. 바쁘고 어려웅깨 얼릉얼릉 해볼랑께 될 거여. 악보만 외았제 장단만 맞췄제 아무것도 아니데, 밤나 악보로만 외아 가지고 널 뛸라나? 손끝만 가지고 어깨힘만 가지고 산조 탈 수 있간디. 안 되아. 아 제대로 탈라면 그냥 땀이 착 흘러. 그러니께 산조에는 모든 희로애락 인간 이야그가 다 들어 있단 말이야.// 소매 든 김에 춤추드라고 내 이야그까장 하라고? 내가 긍께 명색이 가얏고 문화잰디 물 나는 지하 셋방 신세여, 아들 딸덜은 모다 어리도 뿔뿔이 읎어졌어. 하여간에 징한 세월이여. 도무지 울도 웃도 못해. 사람얼 사는 길로 움직이게 둬야 할 거 아냐. 된통 보쌈당히서 광풍에 불려왔고만. 내 앞에서는 왜 하나도 쓸모 없는 일만 닥치는 지 말도 못해. 되는 일로도 힘드는데 아닌 일만 일삼으니 엉망진창이제.//
* 전라남도 강진 가야금 문화재의 이야기

타잔 / 최두석
내 빈약한 힘살을 비웃듯이/ 너는 빤스만 걸친 몸으로/ 총을 든 악한들과 싸운다/ 토요일 밤이면/ 사자와 표범과 악어들이 출몰하는/ 식민지 자손들의 안방 한구석에서/ 결국 이기는 싸움만 한다// 원숭이 치이타와 코끼리 록키/ 소년 자이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너는 잽싸게 줄을 탄다/ 그리하여 정글이 없는 한반도의 아이들도/ 너를 따르고 싶고/ 빨래줄로 흉내를 내다/ 목졸려 죽은 아이도 있었다// 둥둥 북치는 아프리카/ 근대화를 통해 빚수렁에 빠진 한국/ 창조도 진보도 있을 수 없는/ 아프리카 토인들의 역사/ 일제의 식민사관/ 타잔 너는 미국의 차관과 결부되어/ 수입되고 상연되고// 밀림의 평화를 위한다지만/ 밀림의 법칙은 약육강식/ 국제 간 불변의 공식인 것을/ 이 땅의 아이들은 알 수 없지, 그러므로/ 너는 너를 출생시킨 나라/ 미국의 이미지를 위해 싸우는 줄을/ 아이들은 통 알 수가 없지.//

광화문 이순신 / 최두석
이순신의 생애와/ 동상을 세운 조각가의 삶은 다르다/ 조각가의 삶과 동상을 세우게 한/ 정치인의 삶은 다를 것이다// 온갖 차량이 분주히 맴도는 거리에/ 낡은 무기 큰 칼을 짚고/ 침묵으로 서 있는/ 광화문 이순신이여/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맡겨진 일은/ 인간 이순신의 삶에 닿아 있는가/ 조각가의 예술에 닿아 있는가/ 아니면 정치인의 이념에 관계되는가// 너무도 당당하여 오히려 서글픈/ 당신의 등 뒤에는 오색단청/ 광화문이 굳게 완강히 닫혀 있고/ 정치는 그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멀뚱멀뚱 쳐다보며 길을 가는/ 시민들 앞에서/ 당신은 무슨 낡은 이데올로기를 지키려고/ 네거리에 서 있는가/ 광화문 이순신이여.//

마라도 바다국화 / 최두석
뿌리로 검은 바위 끌어안고/ 난바다 거센 파도 소리 삼키며/ 모진 바람에 고개 숙여/ 잔디처럼 바닥을 기다가도/ 꽃만은 그윽이 푸른 가을 하늘/ 마주 보며 피우누나// 내가 아는 눈빛 맑은 여인/ 세상살이 온통 허무해져/ 바다에 몸을 던지러 왔다가/ 바다국화 꽃 피우는 모습 보고는/ 마음 다잡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는구나.//

술배소리 / 최두석
멸치야 갈치야 날 살려라/ 너는 죽고 나는 살자/ 에야 술배야/ 가거도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를/ 밥상머리에서 환청으로 듣곤 한다// 벼야 조야 배추야 시금치야/ 콩아 닭아 김아 마늘아 날 살려라/ 너는 죽고 나는 살자/ 놓인 밥과 반찬에 따라 가사를 바꿔 부르며/ 숟가락 젓가락을 들곤 한다// 그토록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 소화가 되겠느냐 핀잔하는 이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이에게 권하고 싶다/ 술배소리 음미하며 한 끼 먹어보라고/ 그래야 음식마다 맛이 새롭고/ 먹고사는 일이 더욱 생생하게 소중해지므로.//

농섬 / 최두석
황사바람 뿌옇게 부는 토요일, 고온리 사람들 창자 울리는 푹격기 폭음 들리지 않는 날이다. 고온리를 쿠니로 들은 양키들, 이른바 쿠니 사격장이 쉬는 날이다. 며칠전 `사격장을 아메리카로'라고 외치며 철조망을 넘어가 과녁 위에 누웠던 주민들 몇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고 시위 재발 대비해 사격장 한 켠에 백골단 진치고 있는 날이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휴일에만 출입할 수 있는 드 넓은 갯벌에는 도요새 게구멍을 파고 남정네들 낙지를 잡고 아낙네들 조개를 캔다. 물 들면 물살에 몸을 적시다가 썰물 때면 갯벌 위로 떠오르는 섬. 온갖 바다새 물새 알 낳아 품던 무성한 숲은 신기루가 되고 이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벌거숭이 섬. 농섬에서 쇳덩이를 캐는 사람도 있다. 섬에 쏟아지는 하고많은 폭탄, 폭탄이 박아 놓은 쇳덩이다. 육이오 때부터 폭격이 그치지 않는 농섬. 필리핀이나 괌의 미군기까지 날아와 전쟁연습하는 농섬. 폭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며 새삼 식민지가 무엇인지 묻는 농섬. 너를 귀머거리 벙어리라 여기며 등 돌리는 자 누구인가. 너의 간절한 외침 파도 소리에 실려 오는데 귀에 말뚝 박고 태극기를 높이 흔드는 자 누구인가.//

가투 / 최두석
콩꽃 떨기마다 이상한 나방이 射精을 하고 다녔다. 그때 나는 국어 선생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이념의 말이 교과서 구석에 씌어 있었다. 지면을 응시하자 낱말은 괴성을 지르며 교실을 울리고 멀리 운동장 미루나무 이파리에 머물렀다. 구름은 정말 한가롭게 지나가고 학생들의 한 떼는 교련 시간이었다. 엎드려 쏴! 찔러, 길게 찔러. 이파리는 사살되어 무참히 찢기우고, 고개를 돌렸을 때 교과서의 활자는 뻔뻔하게 그대로 박힌 채였다. 그 해 농부들이 수확한 콩은, 껍질은 탱탱하고 의연했지만 모두 가투였다. 나는 가투의 의미를 가르칠 뿐이었다.//

담양장 / 최두석
죽장의 김삿갓은 죽고/ 참빗으로 이 잡던 시절도 가고/ 대바구니 전성 시절에// 새벽 서리 밟으며 어머니는 바구니 한 줄이고 장에 가시고 고구마로 점심 때운 뒤 기다리는 오후, 너무 심심해 아홉 살 내가 두 살 터울 동생 손 잡고 신작로를 따라 마중갔었다. 이십 리가 짱짱한 길, 버스는 하루에 두어 번 다녔지만 꼬박꼬박 걸어오셨으므로 가다보면 도중에 만나겠지 생각하면 낯선 아줌마에게 길도 물어가면서 하염없이..... 그런데 이 고개만 넘으면 읍이라는 곳에서 해가 덜렁 졌다. 배는 고프고 으스스 무서워져 한참 망설이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멀고 캄캄 어둠에 동생은 울고 기진맥진 한밤중에야 호롱 들고 찾아나선 어머니를 만났다. -- 어머니는 그날 따라 버스로 오시고// 아, 요즘도 장날이면/ 허리 굽은 어머니/ 플라스틱에 밀려 시세도 없는 대바구니 옆에 쭈그려앉아/ 멀거니 팔리기를 기다리는/ 담양장.//

신발 / 최두석
신을 잃어버린 꿈을 꾸고 나서/ 새삼 살아오면서 닳아 없앤 신들과/ 습관처럼 자주 잃어버린 신들을 생각한다/ 불깡통 돌리며 쥐불 놓던 날의 먹고무신/철길 걸으며 휘파람 가다듬던 날의 운동화/ 최루탄 맞고 도망가다 잃어버린 구두를 떠올린다/ 이미 걸어온 길 때문에 계속 걸어온 길을 되새긴다/ 또한 어떻게 신발끈을 조이고/ 부끄럽지 않게 앞길을 가나 생각한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이없이 신을 잃고 헤매다가/ 어디서 남녀로 짝짝인 흰고무신 얻어 신고/ 어기적거리다가 꿈을 깬 날 아침에.//

놀부전 / 최두석
아니 볼 수 없다. 오장 칠보를/ 논두렁에 구멍 뚫기, 패는 곡식 이삭 자르기/ 말리는 놈 밀어 놓고 발꿈치로 탕탕 차기/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흥부의 박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놀부의 성질이 고쳐진 것도 아니다/ 흥부 재산 가로채 부자가 되고 나자/ 왈짜패는 새삼 몰려들어 충성을 맹세하고/ 그가 탄 마지막 박에서 나온 개똥은/ 나라 곳곳에 즐비하다// 흥부야, 곤장 품팔이 가는 흥부야/ 네 눈동자 속에 나타나 보인다/ 잔디밭에서 무참히 끌려 간 친구의 얼굴이.//

샘터에서 / 최두석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 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개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 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 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에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인천 자유공원에서 / 최두석
인천 사람들이 연애를 할 때면/ 으레 들르는 자유공원/ 황해의 황홀한 일몰을 구경하다/ 은근히 손목을 끌어쥐는 곳/ 특히 한미수교백주년 기념탑 으슥한 그늘에서는/ 돌연 입술을 맞대기도 하는/ 추억의 공원// 아,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솜사탕을 사 먹으며/ 새점을 치고 관광사주를 볼 자유인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푸드덕거리는 날개에 둘러싸여 사진 찍을 자유인가/ 이 땅의 자유는 실로 연애의 자유에서/ 과연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공원은 그러한 소중한 자유를/ 더글라스 맥아더라는 자가 주었다고/ 가르친다/ 망원경을 들고 우뚝 서서/ 그가 상륙했던 월미도를 바라보며/ 맥아더의 동상은 설교한다/ 자유는 미국이요 미국은 곧 자유라고// 그렇지만 자유가/ 민족의 분단처럼 외부에서/ 일방적인 선물로 주어질 성질의 것인가/ 도대체 자유라는 게/ 부두에 무심히 쌓아올려지는/ 수입 쌀이나 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기관총이나 미사일 같은 것인가.//

철원평야 / 최두석
내 마음속에 구름 모이고 흩어지는/ 철원평야 같은 너른 들판이 있어/ 때로 폭우 쏟아져/ 한탄강 같은 강물이 격류로 아우성치기도 하고/ 때로 폭설이 내려/ 지상의 모든 길이 끊기는 눈나라가 되기도 하는데/ 폭우 속에서도 백로는 알을 품고/ 폭설 속에서도 두루미는 새끼를 기르나니/ 나 세상일에 하염없이 슬퍼질 때/ 부엉이 되어 찾아가 밤새워 우나니//

교과서와 휴전선 / 최두석
물 붓기는 아니라 하지만/ 천차만별 중구난방인 학생들 마음에/ 고루 스미도록/ 교단에서 진실 말하려면/ 얼마나 하염없는 인내가 필요한가/ 윤선생은 오래 기다리다 결국/ 교원노조 운동으로 교단 떠날 요즘에야/ 다음처럼 수업준비 하였다// 먼저 묻는다/ 왜 한강에 배가 들지 않느냐고/ 강이 깊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구에 휴전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라는/ 확실한 목소리 들으려면/ 스무 고개 넘어야 하리라// 임진강 만나 밀물로 역류하다/ 썰물 타고 굽이치는 한강, 강물에/ 보이지 않는 휴전선 있듯/ 밤낮 붙들고 씨름하는 교과서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독재 권력이 독재 유지 위해 설치한/ 교과서 속 지뢰밭/ 앞으로의 숙제로 찾아보라고 말한다// 교과서에서 통일은 어떻게 될 수 있나/ 물어보라, 물어보고 침묵의 혹은/ 거짓의 완강한 벽을 느꼈을 때/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허구한 날 사지선다형 문제에/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로/ 청춘을 갇혀 있게 하는 것/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교과서 만든 교육 개발원은/ 남아도는 미국의 밀가루와/ 옥수수 차관으로 수립되었고/ 사지선다형 문제는/ 차관으로 미국 유학 간 자들이/ 수입해 왔다고 말한다/ 휴전선 만든 주범은 미국이지만/ 휴전선 뚫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반짝이는 혹은 의아해하는/ 눈빛 온몸으로 느끼며/ 이런 말 하는 선생을/ 수상쩍게 보는 놈 있다면/ 녹슨 철모 뒤집어쓴 그의 머리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달래강 / 최두석
임진강이 굽어 흐르다 만나는 휴전선, 그 달개비꽃 흐드러진/ 십 리 거리에서 부모 없이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고스란히 다 맞고/ 바라본 누이의 베옷.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이의 가슴 언저리./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 하고 집에 간 누이는/ 저녁 짓고 해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덤불숲 헤매다 반달이 지고 점점점 검게 소리쳐 흐르는 강물,/ 그 곁에 누워, 오빠는 죽어 있었다./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하여 흐르는 강물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뇌었다는 말,/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래....."//

전길수씨 / 최두석
문산에서 경의선 따라/ 염소들 한가히 풀 뜯는 철길 걷는다/ 수수가 바람에 우줄거리고 메밀꽃/ 꿀벌을 부르는 철길 걷는다/ 마침내 노반도 침목도 사라진 철길은/ 임진강 십 리 앞에서/ 칙칙폭폭 소리도 없이 여우굴로 접어든다// 여우굴에서 십오 년째 버섯을 기르는 전씨는 오 년 전 북한쌀이 판문점을 넘어오던 해에 철거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변함없이 계속 볏짚에 깻묵과 닭똥을 버무려 양송이를 길렀다. 남북 합의는 언제나 깨지기 마련이고 복구공사 착수 후에 옮겨도 충분하다고 계산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재벌 왕초 정주영이 북행길에 올랐을 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싶어 옮겨갈 땅까지 빌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요즘 자신이 성급했음을 후회하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굴 속은 사철 양송이 재배의 최적지, 굴을 미리 포기하는 것은 인절미 두고 보리개떡 찾는 격이라고 말한다. 통일만 된다면 이까짓 버섯이 문제냐고, 언제라도 털고 일어서겠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은 막무가내 인정하려 않는다. 경의선 기차를 이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감옥에 가야 한다고 침을 튀긴다.//

김통정 / 최두석
팔만대장경 옻빛 관목을 시리게 들여다보다가 잠든 밤 꿈 속에서 솟구친 나의 욕망은 서남해안을 흰 돛배로 헤매더니 파도 건너 제주도 애월면 고성리, 청상과부집 장독 밑에서 지렁이로 꿈틀거렸다.// 지렁이는 꿈틀거림으로 뭉클뭉클 자라나서 어느 날 문풍지에 스미는 달빛을 타고 과부의 방을 침범했다. 억센 불가항력의 사내로// 여자의 허리가 굵어질수록 새벽과 더불어 사라지는 사내의 행방이 궁금했다./ 하룻밤은 궁금의 긴 실오라기 끝 바늘을 사내의 옷깃에 꿰었다.// 다음날 사내는 장독 밑에서 커다란 지렁이로 죽어 있었다. 누리의 흙을 붉게 적시면서…… (그런지 몇 달 후 여자는 온몸에 비늘 돋친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김통정)//
* 1980년 《심상》에 발표한 등단작

전태일 / 최두석
달 없는 어둠 속을 검게 숨죽여 흐르는 강물, 별들은 모두 선잠 깬 듯 깜박거린다. 한사코 그늘에서 그늘로만 옮겨 디디며 살아온 자의 생애가 오늘밤 급한 여울을 이루며 흘러 내린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물살이 한줄기 도도한 강물로 흐른다. 문득 물결을 타고 어룽더룽 두꺼비 한 마리 헤엄쳐 오른다. 무겁게 알 밴 몸이 물살을 따라 흐르다가 다시 자맥질하며 거슬러 오른다. 마침내 기슭으로 기어올라 엉거주춤 뒷발에 한껏 힘을 주고 두리번거린다. 가슴을 벌럭이며 결연히, 어찌할 수 없는 천적 독사를 찾아나선다. 그리하여 드디어 온몸으로 잡아 먹힌다. ……이제 며칠 후면 독사의 뱃가죽을 뚫고 수백 마리 새끼 두꺼비가 기어 나오리라. 독사의 살을 먹으며 굼실굼실 자라리라.//

정여립 / 최두석
천하에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지당한 말을 너무 일찍 한 탓에 정여립은 살해되고, 더불어 천여 명이 죽고 다치면서 당쟁은 불 붙고…… 이제 사람들은 다 잊어버린 사건이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금산의 모악산 골짜기, 파뿌리 할머니의 입을 통해 억센 장사로 되살아 난다. 힘차게 바위를 굴려 성을 쌓는다. 누이는 삼씨를 뿌려 어느새 천 벌의 옷을 다 지어가고 그들의 어미는 뜨거운 팥죽으로 딸을 유혹한다. 어미의 뜻을 짐작한 누이는 부러 내기에 져서 죽고…… 할머니는 마치 오누이의 어머니인 양 한숨을 쉰다. 목숨내기가 어찌 그리 장난같을까. 한숨은 저녁 어둠에 스며 자욱히 퍼지고 정여립이 정말로 모반했을까 의심하는 오늘날, 실상 그가 진짜 반역자였으면 싶다.//

최민식 / 최두석
날 때부텀 가난 구뎅이에 빠진 사람이 있거덩. 가들은 구걸하는 어매 등에 업히가 거리에서 자라고 걷게 되믄 알아서 지 묵을 걸 찾아야 되는 기라. 혹은 지 건강을 다 바쳐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이 있지. 가들은 나이 묵으믄 더 팔 수 있는 건강도 없어가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한다꼬. 가들의 땀에 쩔은 생활을 찍고 있으믄 살과 뼈로 이롸진 빈곤의 몸통을 덥썩 만져보는 것맹키로 섬찟한 기라.// 내는 사진 작업 할라꼬 현실적 고통을 차라리 즐깄거덩. 어떤 어렵음도 사진의 거름이 된다꼬 여깄으니까.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 카는 오기로 넘몰래 미소짓곤 했지. 쌀 사놓으믄 연탄 떨어지고 연탄 들라노면 쌀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기라. 아픔맹키로 우리를 깊게 하는 기 없고 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거는 없어. 내 생애는 젤로 낮고 더럽은 땅을 입맞추믄서 흐르는 물로 남을 기야.//

 



최두석 시인
1956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의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릉대학교(현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1991~1997)를 거쳐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1997~)로 재직하면서,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7년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제3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대꽃》《임진강》《성에꽃》《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꽃에게 길을 묻는다》《투구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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