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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정환 시인

부흐고비 2021. 8. 11. 08:13

마포 강변 동네에서 / 김정환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아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번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하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사랑노래 (하나) / 김정환
날마다/ 그대 이리도 거리끼는 것은/ 우리들 사랑에 섞인/ 액체 때문일 거다 아마 그 어쩔 수 없음의 어마어마한 액체/ 멀리서/ 나는 그대의 가장 초라한 곳을 벗긴다/ 가난에 찌든 화려한 영혼을 보듯이/ 그대의 가장 부끄런 눈물을 들여다본다/ 헐벗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대 몸 속의/ 가장 순수한// 그리고 이제는 스스럼없는/ 그대 몸 바깥의/ 모든 세상의 헐벗음과 만난다/ 모든 습기와/ 모든 절망과/ 그대 몸 바깥의/ 가장 치열한// 그대는 그대의 내장을 감추지 않고/ 나는 나의 내장을 감추지 않고//

사랑노래 (둘) / 김정환
눈이 내린다 거세게, 내 뺨에 부딪히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지워질 듯, 도시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바깥은 이별보다 가깝다 사랑이여, 눈은 눈보다 가깝다, 육체여/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 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 내 몸을 파묻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말살하듯, 네 육체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사랑노래 (셋) / 김정환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비오듯 태양이 타네요/ 찌는 듯한 더위를 저에게 주셔요/ 8월도 한나절 어느 한많은 광복절 같은/ 기쁨의 절정을 저에게 주셔요/ 그대가 또한 제게 바랐던 것은/ 아픔의 절정, 깨달음의 절정, 만남의 절정, 분단되어 있음의 절정/ 그리고 참음의 절정이었겠으나/ 지워지지 않아요 그대를 만난 여름, 자갈밭 뜨거운 땡볕./ 제 끝에 묻은 채로 있을 그대의 신선한 입김은/ 그리고 제 발목에 새겨진 샌달 끈 자욱/ 그대는 혹시 몹시 지루해도 하실 겨울 해 긴긴 밤을 내내/ 제가 저 혼자 남은 온기로 지워내야 하듯이/ 부서지지 않아요 그대가 제게 빼앗겨버린/ 그대의 은밀한 신음이 밴 공기는/ 태양이 타는데/ 먼 데서 가까운 데서 태양이 타네요/ 찌는 듯한 불볕 더위를 저에게 주셔요/ 그 활활 타오름의 세례를 저에게 주셔요/ 그대와 다시 만날 눈물 뒤범벅/ 아아 가르쳐 주셔요 그대/ 앙칼진 사랑의 무기를/ 태양이 타는데/ 그대와 진정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사랑노래 (넷) / 김정환
그대는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의 어두운 골목과/ 차지해야 될 또 하나의 존재의 침범과 불안의 식량을/ 알고 있는 그대가 내게 해드린 사랑이란 말은/ 칼날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어와/ 피묻은 그대의 얼굴을 나는 가슴 속에 파묻고/ 나의 가슴은 그대를 받아들인 아픔으로 찢어진다/ 그대 칼날의 찌르는 사랑과 찢어지지 못하는 삶이여// 그대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말의 강한 자의 횡포와/ 소유본능과 파괴근성과 서로의 살이 닳아빠지는 꿈의 상실을/ 알고 있는 그대가 그러나 내게 해드린 사랑이란 말은/ 칼날처럼 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나의 심장은 치명적인 그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 그대 치명적인 칼날의 사랑과/ 그대를 위하여 살아남는/ 나의 노래여.//

사랑노래 (여섯) / 김정환
입고 왔던 모든 옷 챙겨 빨아놨다는/ 그대의 흐느낌도 묻었을 편지가 왔다/ 따뜻한 내장까지 비추던 그대 투명한/ 환속에 빨래/ 일상의 빨래, 햇빛에 바싹바싹 오그라지고/ 헤어짐의 손끝에 아직 남은 그대 몸살의 향기에/ 나는 기진하여, 남은 사랑으로 습기차 지낸다/ 그대가 남겨 주고 간 온 하루에/ 그러나 나의 일상은 피와 땀이다/ 달뜬 소근거림도 묻었을 빨래/ 그러나 나의 사랑은 참호전이다/ 두 발이 썩고/ 두 팔이 썩고/ 표적을 겨눈 두 눈이 썩는//

최고의 사랑은 / 김정환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全敎組)의 아내/ 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 어쩔거냐고, 일순 기차는/ 덜컹대고 그 틈에/ 핑 돌던 것이 흩뿌려/ 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 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 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 세상은 영화처럼/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자급 자족에 있지 않고/ 평화는 농촌 풍경에 있지 않고/ 사랑은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오늘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몸과 몸을 섞듯이/ 몸을 섞으며 덜컹덜컹 달리듯이//

좋은 꽃 / 김정환
이렇게 생생할 수야 전생의 그대, 욕망의 흔적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지쳐 흐려진 내 이생의 눈망울을 때리는/ 그대 잎사귀의 원색,/ 그 순결한 운명에 짐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충동을/ 피 흘려 지금은 다만 그대를 건드려보기 위한/ 손가락의 마구 떨림과 그대의 그 아직도 의연한 자태 사이/ 내 비인 주먹과 그대의 그 복수심 같은 아름다움 사이/ 숨이 막히는 공간 속에 갇혀서/ 나는 와들들 떨려 그대의 그 진한 향기도 참지 못하고/ 그대도 아아 조금씩 눈물 반짝이며 흔들리며 섰나니, 그대의 꽃잎/ 자꾸자꾸 벗어버리는 고운 살결 같은/ 그대의 경련 벌써 끝없이 들키고 있음!// 설운 몸, 수습하기도 전에/ 경미한 흔들림으로 그대가 내 발에 흘린/ 그대의 향기 그 피비린 맛에/ 나도 막강한 설레임만으로/ 그대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앙칼진 복수심으로 내 눈을 때리는/ 아름다운 꽃,/ 좋은 꽃,//

가을 / 김정환
늦가을은 새파란 내게/ 친근한 주름살 같아요/ 난 아직/ 내 평생 가을이 몇 번 남았는지/ 세지 못해요/ 하지만 여기까지/ 얼마만큼 왔는가는 알 수 있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예요/ 늦가을은 빨간 고추를/ 말리지 않아도/ 새빨간 풍선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도/ 새파란 내게/ 친근한 주름살 같아요/ 난 알고 싶어요/ 내 나이가/ 몇 천년이 쌓여 이리/ 푸른 가슴 부푸는지/ 그렇게 내 젊음이/ 역사를 또 몇 년/ 쌓아가야 하는지//

가을에 / 김정환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향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잖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늦가을 노래 / 김정환
저문 날, 저문 언덕에 서면/ 그래도 못다한 것이 남아 있다/ 헐벗은 숲속 나무 밑, 둥치 밑에/ 스산한 바람결 속 한치의 눈물 반짝임으로/ 마지막인 것처럼,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그래도 손에 잡힐 듯/ 그리운 것이 있다/ 살아남은 것들이여 부디/ 절규하라 계절이 다하는 어느 한숨의 끝까지/ 우리들 사랑노래는 속삭여지지 않는다/ 기억해다오 어느 외침의 미세한 부활과/ 절망과 거대와/ 그리고/ 어떤 질긴 사랑의 비린 내음새를. 안녕.//

겨울, 너에게 / 김정환
그대, 만남의 설레임 속 은밀한/ 기쁨의 내장까지 시리고 시린/ 아리고 아린 겨울 입맞춤의 바람, 그 깨물어대는/ 송곳니여/ 그대, 내 몸살의 이마에 와닿는/ 상긋한 서릿발의 내음/ 끝으로/ 침묵이여 사랑이여/ 좀더 싸늘해다오/ 싸늘함의 진도를 알고 싶다/ 싸늘함의 끝장을 보고 싶다/ 이 모든 살아있음의 한계를/ 두려운 사랑의 입맞춤으로/ 사랑의 온몸 더듬기로.//

제설작업 / 김정환
살아도 오히려 힘에 또 겨울/ 벅찬 아픔과 감동의 시대였니라/ 연병장에 엄청나게 쌓인 눈산더미를 보며/ 일요일 제설작업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넉가래를 밀면/ 우리 힘만으로는 암만해도 모자랄 것 같은/ 눈은 지금도 쌓이며 넉가래 끝에서/ 묵직한 사랑의 감동이다/ 시력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얀 반짝임. 눈물./ 살아도 내사 다는 못 살고 돌아갈 시대/ 80년대까지 이렇게 산사태로 밀려오는 눈을 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밀어도 밀어도 80년대까지 밀려드는 눈은/ 우리 자라다 만 키의 어깨를 넘칠 듯, 넘칠 듯/ 우리 서툰 넉가래질을 덮쳐 삼킬 듯,/ 그러나 눈발 속에서 아이가 운다 배가 고파서/ 살려주셔요 소리같이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마셔요/ 소리같이 윙윙대는 눈보라 현수막 흩날리는 전쟁구호/ 뒤에 저희들이 있다는 듯이/ 은 아직도 쌓이고, 넉가래질은 서툴고/ 땀에 흐려진 시야 주먹으로 닦아내면/ 담벼락에 엉겨붙은 하얀 잔설/ 풍경엔 핏자국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엔 피와 살기가 묻어 있다/ 온통 하얘지는 세상에 일렬종대/ 그대는 아직도 고통에 갇혀 지내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밀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 노래 / 김정환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와서/ 나는 저 비인 개천에 당장/ 붉덩물 흘러 넘치는 것 봅니다/ 비에 씻겨지면서 바라봅니다/ 홍수에 넘치는 사랑 속에서/ 아우성과 이름모를 울부짖음과/ 인파의 아비규환 속에서/ 거품의 이빨과, 회오리바람과 소용돌이가 씻겨져 내리고/ 그날 그 우뢰 같던 함성소리가/ 씻겨져 내리는 소리 들립니다/ 말하시오 무엇이 우리를/ 죽어 피 토하며 배앝은/ 한 떨기 꽃이 되게 합니까/ 그리고 누가 이렇게 늦은 4월에 살아 남아/ 살아 남은 한 떨기 꽃을 바치게 합니까/ 무덤 앞에 꽃을 드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습니다/ 이런 날 다시 내리는 비는/ 이젠 적셔줄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투명한 아픔과/ 희망의 뿌리를/ 젖은 생선같이 싱싱한/ 우리네 삶의 뿌리./ 흐느끼지 마시오/ 눈물은 더 이상 아무도 잠재워주지 못합니다//

눈물노래 / 김정환
그대 슬픔의 아랫도리를 적시는 물기./ 아랫도리에 고인/ 그대 슬픔의 물방울./ 아랫도리를 넘치는/ 그대/ 슬픔의/ 홍수/ 속에서/ 하늘은 마냥 맑습니다/ 푸르릅니다/ 변치 않고 언제쯤/ 사랑의 결실도 이렇게/ 푸르겠지요/ 저렇게 저렇게/ 마냥 하늘은 벌써부터/ 푸르기야 푸르지요마는//

지울 수 없는 노래 / 김정환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醍?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몸서리치는 노래 / 김정환
우리들의 사랑법은/ 시대의 가장 여린 풀잎으로 이 땅에 눕기./ 안타깝기. 서로 보듬기. 가장 몸서리칠 태풍의 예감으로/ 치떨기. 우리들 가장 여린 허리의 흔들림 덕택으로/ 서로 껴안기. 강하고 무딘 것들을 위해/ 미리/ 몸서리쳐주기.//

휴식노래 / 김정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생계비 키를 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 노동자들의 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리고/ 뼈가 시린 추운 날씨 솟구치는 고향생각/ 쉴 새 없는 기아수출 야간작업 특별잔업/ 하여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백열등 밑에서 헝겊더미 속에서/ 힘을 내라 흥부야 착한 흥부야/ 노동자들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재봉틀에 손마디 문드러지는 달밝은 밤/ 졸림과 절망과 깜깜함의 밤이 지나면/ 피흘려 싸우는 나라, 태양의 세상이 온다/ 그때는 눈부신 노동으로 온다/ 그때는 우리 그 착한 눈물과 땀과 피/ 그 황홀한 얼룩짐 밟으며 온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집채만한 파도처럼, 산더미만한 해일처럼//

길의 진리 / 김정환
길은 스스로 많은 길을 걷는다/ 역사와 더불어, 역사의 흐름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너머 여기까지 오기도 했다/ 시간은 숱하게 흐른다. 그러나 길은/ 밑바닥으로 기다가 어느 날 솟구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은 스스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어느 날 폭발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은 그렇게 길 너머 길의 희망에 이른다/ 희망은 그렇게 희망 너머 희망의 자유에 이른다/ 침묵이 그렇게 침묵을 너머 길의 진리에 이르고/ 진리가 진리의, 혁명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길은 완벽하다.//

막걸리 / 김정환
그 중년 여자는 내내 중앙청 타령이었는데/ 무교동 어느 술집에선가/ 이러지 마요 손님,내 중앙청은 아직도 쌩쌩하다요/ 물건도 물건 나름이지 그걸 가지고 얻다 대요 손님./ 그 중년 여자는 내내 중앙청 타령이었는데/ 나는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 아니라도/ 탁한 막걸리 마실 때마다 그 여인 생각난다/ 생각난다,막걸리 구역질 속에서 떠오르는 그녀의 몸둥아리 중앙청/ 그러나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 고향 어디엔들 있으랴/ 평소에 별빛처럼 아롱진/ 영롱한 아름다운 우리네 생활이 어디 있으랴/ 아아 소갱 바가지 막걸리,곪아터진 고름 질질 흐르는/ 한가운데서 끈끈하게 살아 숨쉬는/ 비린내 싱싱한 우리네 삶밖에/ 무엇이 도 남아 있을수 있으랴/ 그날도 슬플 것은 영영 없었다/ 그녀의 그 냄새 묻은 몸짓은/ 그녀의 그 새우젖 묻은 치마폭은/ 다만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 그때서야 잃어버린 것들의 귀중함을 알며/ 잃어버린 상태의 치열함을 살아가는/ 어떤 '의미 찾기'였을 뿐이다/ 원효대사처럼/ 나는 그 여자가 토해낸 중앙청과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그날도 취할 리야 영영 없었다//

최대포집 / 김정환
중학교에 갓 들어가고 나서/ 까까머리 쓰다듬으며 다른 학교에 들어간 까까머리/ 상규네 집 앞에서 물벼락 맞은 곳/ 흠씬 젖었어도 상규녀석은 체전 성화 마라톤을 뛰다가/ 신문에 얼굴 나왔다고 거저 좋아하던 마포골목/ 최대포집/ 그때 바께쓰를 든채로 어마 이를 어쩌지 하며/ 누나같이 하얗게 웃던 노란 한복/ 아아 그 최대포집// 빚장이를 피해 야간도주를 했다는/ 내 옆자리 상규는 소식 모르고/ 지금도 만나면 누이 같을까/ 그러나 그 누이는 간데 없고/ 그 누이가 자랐을 입걸은 아줌마와/ 아줌마의 억센 팔뚝 노릇을 하는 가시나/ 그때 내 나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추억은 힘이었을까/ 억척스러운 사랑이었을까 앙칼진/ 슬픔이었을까 추억은 성년식이었을까/ 목메인 이별 아아 추억은/ 잃어버린 것들을 삶의 뼈대이게 한다/ 산전수전의 생애/ 버팅기는 슬픔의 뼈대/ 돼지갈비 굽는 연기에 눈물 글썽이는/ 아아 추억과 노동의 최대포집//

독재, 생애, 눈물, 광경, 음악 / 김정환
어느 독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눈물의 생애다/ 스스로를 키우며 원인(原因)보다 촉촉한 미래를 향해/ 몸을 뻗는 누구나 세례 요한 다음에 오고 눈물의/ 생애를 육화한다. 썩지 않고 온습(溫濕)한 생애, 전망은/ 눈물이 눈물을 씻어내는, 생애 이상의 어떤 것./ 독재여 그것을 어찌 형용(形容)하겠는가.// 생애를 위해 죽다…… 이 동어반복은 영원의/ 가상현실보다 위대하다. 광경은 언제나 지금의/ 광경으로 겹쳐진다. 음악이 흐르면 생애는 또한/ 영원에 겹쳐진다. 육체가 흐르고 육체의/ 다중성(多重性)이 흐르고 이상하지 음악은 제 혼자 흐르고/ 그 안에 나의, 역사의 모든 광경이 묻어난다./ 모종(某種)의 생애가 흐른다. 그것은 죽음의 생애이다//

모내기 / 김정환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 흙 파먹고 농사나 지으리라/ 모를 심는다/ 살기 위해서 모는 벌써 심기 시작한 내 손아귀를 벗어나/ 논바닥에 물을 댄 진흙창 속에서/ 그 질펀질펀한 땅 속으로 뿌리 내리기 위해서/ 한줌에 다섯 개, 여섯 개씩 뭉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뿌리의 안스런 엉켜 있음./ 그래도 모는 그 허공같이 공허한 진흙창 속에서/ 공중곡예를 하면서 뿌리 내린다/ 바람이 불수록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모는 진흙창 속에서 살기 위해서/ 다섯씩 여섯씩 뿌리 내린다/ 연약한 뿌리가 꺾이지 않게/ 세 손가락에 빗대어 직각으로/ 사정없이 푹 꼽아줘야/ 사정없이 사랑해 줘야 산다는/ 모./ 그러나 논물 밑에 젖은 땅, 젖은 가슴이 푹신푹신 숨쉬며/ 흙묻은 손으로 나를 사랑해 주소,/ 사랑해 주소, 나를, 그대의 땀방울 맺힌 근육으로 하는/ 논바닥, 논바닥 아아 땡볕에 드러나/ 타는 갈증 갈라질 논바닥/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모의 털난 뿌리를 쥐어잡고/ 진흙의 몸끝에 대기만 하면서/ 부끄럽게 살짝 대기만 하면서/ 나는 이제야 알겠다 모가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하면서/ 이쪽 바람에도 쏠리고 저쪽 소문에도 넘어지고/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는 것은 모의 재주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나의 잔꾀가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거대한 땅의 우매한 갈증,/ 우매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모는 단숨에 두세 줄 쯤 건너/ 허공 같은 바탕 위에/ 벌써 굳건히 서 있다/ 뜨지 않고 눕지 않고 똑바로 서 있다/ 등이 타는 뙤약볕 밑에서/ 올해도 농사는 땅의 억센, 포옹의 힘에 달려 있다.//

별, 기타 / 김정환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별이 튀어나와/ 두 손은 그것을 붙잡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은하수 깔리는/ 은하수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손가락 사라져/ 노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장대비 내리는/ 장대비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너는 사라지고/ 두 팔은 그것을 껴안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어깨는 겯는/ 어깨를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그러나 사랑한다고 했다 -한강 1 / 김정환
꽃 한 송이를 피우기보담은/ 종일 한강에 나가서/ 한강이 한강인 채로 한강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황홀히 부활하는 순간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종일 보고 있으면 한강은 내 앞에서/ 노을에 발그레 상기된 고백의 몸짓으로 자기는/ 반포 아파트의 화려한 고층빌딩을 비추는 화장 짙은 강 표면이나/ 제3한강교 밑으로 흐르는/ 세월의 배 지나간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바로 내 발끝 앞에서 바삐 흐르는 강물은 나를 보고/ 나는 강물을 보고/ 나는 흐르며 잠시 눈물 반짝이는 강물에게 나도/ 그대가 생각해주는 만큼 순진한 놈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이 앞에서/ 모든 흘러감은 운동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생활의 때는 타락에 속하지 않는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도회지 깊은 밤, 쾌락과 배설의 찌꺼기, 껍질, 똥, 오줌,/ 담배꽁초, 껌종이가 흐르고/ 모든 버려지고 업수임 받고 가라앉는 것들의 슬픔은 강으로 흐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로 종일을 서 있으면/ 슬픔은 신비스럽게 오래된 아픔의 무게가 되어 고이고/ 움직이지 않고 처연한 강 중심의 바깥에서부터/ 물결은 철썩, 철썩여대면서/ 한강은 고요하지만 거대한 몸부림, 용트림의 털끝, 가장자리쯤에서/ 조금씩 조금씩 구역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로/ 무끄러워함과 배앝아냄은 아주 귀한 운동이다./ 물결은 배신을 배앝아내고 오염된 생선을 배앝아내고/ 혼인빙자 간음의 씨앗을, 네 발 달린 사산아의 두개골을 배앝아낸다.// 그리고 흐르는 강과 생활에 바쁜 내가 사랑하는 사이로/ 그렇게 오래오래 서 있으면/ 강물은 점점 얕아지면서/ 익사한 비명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그러나 아아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강바닥의, 흙가슴의, 그리움의 온기가 느껴지고/ 웅덩이는 군데군데 모여서/ 네게 줄 것은 내가 견뎌온, 내게 남은 것은/ 몽땅 그대에게 드릴/ 아픔이 남겨준 아름다움뿐이라고 한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보담은/ 늙고 찌든 젖가슴에 봄비 촉촉히 적시는/ 아주 오래된 위안을 구하러 온 나에게/ 강물은, 저는/ 업수이 여겨보는 것처럼, 얕은 흐름의 동요이거나/ 아니면 달빛 반짝이는 물 표면의 정지가 아니라/ 어떤 아픈 전설 같은, 그러나 아주 생생한/ 기억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일사후퇴, 동학당 시절보다도 아주 먼/ 그러나 아직도 서로 사랑하는사이로.//

가로등 / 김정환
기다림이 쌓여/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기다림보다 길고/ 기다림보다 강한/ 가로등 하나/ 그 밑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등불이 내려/ 몇 십년 기다려 왔던 것이/ 또 몇 천년 기다려 갈 것을/ 충혈된 눈동자로 비춘다/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쓰린 세월은 더욱 쓰라리고/ 아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 그 밑에/ 아아 평생이 보일 뿐이다/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그 밖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마장동 시외버스 정거장 / 김정환
오늘처럼 영하 15도의 날씨가/ 몰인정한 두 뺨을 갈길지라도/ 떠나갈 것은 떠나야 하고/ 다다를 곳에는 다다라야 한다/ 산다는 것은 추위보다 더 춥고/ 그러나 슬픔보다 더 뜨거운 체온/ 가난에 찌든 얼굴들이 반짝인다/ 생생한 비린내가 코끝에서 쨍하다/ 오늘처럼 영하 15도의 맵찬 날씨가/ 더 야멸찬 두 뺨을 갈길지라도/ 두고 갈 것은 두고 가야 하고/ 찾아갈 곳은 찾아 떠나야 한다/ 가자, 잠시 머물면서/ 질긴 생계 걱정과 위대한 삶의 뜻이/ 복작거리며 한데 어우러져/ 전쟁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추운 날 마장동 시외버스 정거장.//

비 / 김정환
따스하게 마주 닿던 이마와 이마 그 사이/ 쏟아졌던 기쁨이 오늘 빗금 장대비 내리는/ 이별은 그런 것이어서 좋다 등과 등 사이/ 그것만이라도 작은 이별이 큰 이별을/ 낳았고 큰 기쁨을 낳지 않았다 대신 이별은/ 이토록 공허를 적셔오는 지상의 장마 홍수/ 하늘 끝에서 가슴속까지 차오르는 삶과 꿈/ 발 밑에서 척추뼈로 물오르는 식물의 성장/ 아아 나는 새로 살리라 수액을 이별로 흘려/ 보내고 껍질을 벗고 뿌리 두 팔을 뻗으리라/ 이별은 비 개이고 더 투명한 역사여서 좋다//

봄비, 밤에 / 김정환
나는 몸이 떨려/ 어릴 적, 내 여린 핏줄의 엉덩이를 담아주시던/ 어머님 곱게 늙으신 손바닥처럼 포근한 이 비는/ 이젠 내 마음 정한 뜻대로/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산은 거대한 짐승을 가린 채 누워 있고/ 봄비에 젖고 있어 나는 몸이 떨려// 그러나 새벽이면 살래살래 앙칼진 개나리를 피워낼/ 이 밤, 이 비의 소곤거림은/ 혹시/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유채꽃밭 / 김정환
내가 그대의 허망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대가 나의 미망(未亡)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 그대는 내 앞에서 그대의 몸가짐을 흐트리며 출렁이면서/ 그대의 마음도 눈이 부시게 흔들리고 싶을 때/ 그러나 그대가 일용의 양식으로 머금고 배앝아 낸/ 입술에 배인/ 고운 피, 거친 숨결이/ 나는 보일 것도 같애 반란으로도 모자란, 학살로도 모자란/ 그대는 아직도 동용하지 않는 한라산 슬하에서/ 이제껏 조바심내며 출렁거리며 바람에 몸 식혀 왔나니/ 아아 그대가 내 앞에 마련해논 광대한 벌판은 벌써 미쳐버린 색깔로/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마침내 강심장으로 돌아온 사랑 앞에서//

구두 한 짝 / 김정환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는 못, 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씻음에 대하여 / 김정환
아침 숲 속 안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씻겨져 내리는 귓가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대의 자그마한 비명 소리 듣는다/ 땀흘리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후줄그레 씻음의 행위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대는 믿지 않앗다. 세상은 참 더러워요./ 추해요. 치사해요./ 아침 한기 온몸에 소름/ 바닥에 바위와 풀잎이 투명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입김이 호호 냇물 위로 서리는 그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오늘 다시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따스한 믿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얼굴을 씻고 가슴을 씻고/ 가슴에 묻은 사랑의 소금끼를 씻고/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빼앗겼던 것을 씻듯이/ 내 가슴에 묻었던 그대의 얇은 가슴마저 씻으면서/ 근육에 배인 아픔만큼은/ 씻어내릴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정말 얼마나 벅차고 소중한가/ 추운 날 가난한 사람들의 입김이 그렇듯이/ 씻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케 한다/ 어떤 갈 길 같은 것.//

아름다운 절망 / 김정환
그때 아름다움이 나를/ 깜깜하게 했네/ 아 희망은 절망의 속살/ 절망은 희망의/ 의상인 것을/ 아름다운 것은 절망인 것을/ 아 희망은 겨드랑에/ 식초 냄새 지우지 못하는/ 줄기찬 삶 그 자체/ 화려한 노고와 백주 대낮의/ 교통과 고층빌딩과/ 생선 싱싱한 수산시장/ 절망은 두 손에 묻어나/ 검게 광택나는/ 글썽임/ 그때 아름다움이 나를/ 눈부셔 눈 못 뜨게 했네/ 아 희망은 고단한 육체/ 절망은 그 육체의/ 죽음 같은 눈화장인 것을//

태안의 희망 / 김정환
한 해가 저무는/ 안면도에/ 눈이 내린다/ 검은 재앙도/ 흰눈에 잠겼다// 각처에서 달려온/ 눈보다 하얀 마음/ 검은 기름띠에/ 인간 띠로 맞선/ 사람과 사람들// 이름 없어 더 아름다운 얼굴들/ 송년회를 취소하고/ 해외여행을 미루고/ 컴퓨터를 끄고 태안의 눈물/ 닦으러 몰려든 국민들// 금붙이 담은/ 복주머니 들고/ 줄을 섰던 사람들/ 10년 후 기름주머니/ 다시 들었다// 재앙의 현장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검은 바다/ 하얀 손 하얀 마음/ 바다를 사랑하는 손길들//

안 보여 / 김정환
안 보여 아직은 광란의/ 의상에 휩싸여/ 슬픔의 핵심이 보이지 않는다/ 노래를 노래이게 하는 것/ 사랑도 모른 채/ 이별에 젖게 하는 것/ 눈물로 적셔/ 희망에 젖게 하는 것/ 살아올 삶보다 울컥이지만/ 줄기차게 미래로 뻗어가는 것/ 안 보여 아직은 노래의/ 몸짓에 휩싸여/ 슬픔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보이고 노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제 / 김정환
어제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므로/ 그리고 살았던 것은 또한 삶이므로/ 어제의 어제가, 어제의 가슴이 항상/ 어제인 것이 아팠던 것이겠지요/ 어떻게 보면 오늘은 아픈 가슴들이/ 오래도록 쌓여 이토록 휘황찬란한/ 것이겠지요 내일도 오늘처럼 아프지는/ 않겠지마는 오늘 살았으므로 내일/ 아픈 것은 오늘보다 더 크게/ 아프겠지요/ 뭐, 삶 또한 가슴보다 더 커 있겠지요//

육교를 건너며 / 김정환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몸을 떤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도 후회 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를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연하장 / 김정환
우리가 망한 건 망한 거다 壬申年 우리만/ 그런 게 아닌들 몇백 년 전 세한도가/ 우리들 열광의 추억으로 남을 턱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당선하세요 꼭, 형/ 난 형 세대가 출마하는 것에 찬성이에요/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면 우린 다음을 위해/ 갈라질망정, 번듯하게 살 의무가 있어요/ 다행히도 자리가 여럿이라니까. 우린 그만큼/ 찢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당선하세요 꼭, 형/ 세한도 소나무가 가라오케를 틀고 있다/ 대통령보다 힘든 게 국회의원 선거라는데/ 동네 한량 몇십 명 앞에서 아직 囹圄의/ 소나무가 차마 제 혼자 춤추진 못하고/ 악수를 청한다/ 몇 년 전/ 결별할 때도 그랬지만 피눈물 난다, 정말//

원주 여자 -아름다움에 대하여 / 김정환
너는 나보고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몸 파는 너를 보고 불쌍하다는 나를 보고 막무가내/ 불쌍히 여기는 그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구나/ 여자야 어두운 원주역 학성동 길/ 비 내린 가로수처럼 늘어섰던 여자야/ 여자야 거대한 미움의 응어리 속 가까울 수 없는 외딴 섬/ 질퍽이면서, 여자야, 그러나 내가 무슨 영혼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대가 삶에 대해 지치고 아프고 설워 보일 때/ 우리가 미움과 위선과 교활함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 습기찬 하숙집에서 돈에 대해/ 몸 팔음과 안 파는 입술, 사랑의 가능성에 대하여/ 한 개인의 비극적인 생애에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랑은/ 전쟁처럼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은 보다 억척스러운 꿈과 맞닿아 있기 때문/ 우리가 뇌세포 묻어나는/ 불안에도 지쳐 있을 때/ 우리가 고향집 풀밭 때묻은 치마폭에도/ 매달려 있을 힘이 없을 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무기에 대하여/ ....../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은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철길 위에 쓴다 / 김정환
무쇠와 근육을 부딪쳐/ 근육과 눈물을 부딪쳐/ 울컥이며 가자 만국의 노동자/ 덜커덩거리는 것은 시대일 뿐/ 우리들의 심장은 촉촉하고 강하다/ 음침한 것은 또한 화려하다/ 대낮 햇빛 밝은 시절의/ 영롱한 인간이여/ 미래여 우리가 걸어온/ 함성 위에 굵은 눈물로/ 더욱 강인한/ 철길 위에/ 드디어 우리는 자유라고 쓴다/ 갈 길 위에 쓴다 오 진정한 자유//

지하철 정거장에서 (하나) / 김정환
말하라 우리가 이젠 벅찬 한줌의 먼지로 서서/ 열차가 도착하는, 발 밑의 지축을 울리는 경적소리/ 그 몰고 오는 풍파의 장엄이나마/ 온전히 온전히 가슴 설레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열차는 기다림 속 무언가 가여운 떨림을/ 산산조각 내는 속도와 방향으로 들어온다// 이 조그만 도착의 운동에는 흩날려대는/ 갈채 같은, 환호 같은 슬픔의 나부낌!// 그러나 진실은/ 휠씬 더 우람하고 시끄럽고/ 두려운 소리로 온다// 아직도 버팅겨 있음의 뿌리는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율의 함성으로 온다// 기다려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휠씬 더 아픈/ 휠씬 더 심장이 터질 듯 벅찬/ 감격으로 오리라//

빈 화분 / 김정환
빈 화분이 이미 빈 화분 아니고 비로소 집이다/ 식물의, 식물적인 기억의./ 바라봄이 없는 바라봄의 원형이 있다./ 무엇이 원(圓)이고 어디가 원(原)?/ 질문도 그렇게 시끄러운 운명이 없고/ 운명도 그렇게 시끄러운 무늬가 없다./ 도란도란이 두런두런으로 넘어가는 원형이다./ 신대륙의. 공간이 죽음을/ 품기 위하여 펼쳐지려는 노력이었군./ 시간이 저 혼자 간절하게 이어졌어./ 그런 수긍도 이제 둘 다 먼저 그러지 않고/ 너무 많은 시간과 공간의/ 낭비도 고요한/ 신대륙이다, 빈 화분.//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 세상 / 김정환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우리들의 부모를 떠났고 우리들의 고향을 떠났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손발이 댕겅 잘리는 프레스 작업대에서 하꼬방 다락방 할미꽃으로 허리 꺾인 여공 시다로/ 우린 이 세상을 만들었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였다/ 춥고 배고파요 견딜 수 없어요, 제발 조금만 주세요 애원하였다/ 몇 사람이 무참히 피를 흘렸다, 몇 사람이 개같이 끌려갔다, 살진 돼지처럼 맞아 죽었다,// 그리고 몇백만의 눈물이 이 세상을 홍수로 넘치게 하고서야/ 저들은 우리들의 헐벗고 발가벗은 몸을 겨우겨우 가려 주었고/ 우리들의 주린 배를 겨우겨우 채워 주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몇 사람이 피 흘렸을 때 세상은 앞장서서 피를 흘렸고/ 몇 사람이 끌려갔을 때 세상이 앞장서서 끌려갔다/ 수백만이 눈물 흘렸고 부모와 처자식과 동지와 고향과 조국이, 온 세상이 더불어 눈물 흘렸다// 우리들이 조금 더 많은 것을 저들에게 부탁했을 때/ 우리들은 기계가 아녜요, 우리들은 짐승이 아녜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애원했을 때/ 저들은 왜놈의 장도칼로 우리들의 배를 쑤셨고, 파쇼경찰의 몽둥이로 우리들의 골통을 빠갰고, 미제의 총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이 끌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업수임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능욕당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피를 흘렸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피를 흘렸고/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끌려갔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끌려갔다// 이제 상처투성이 세상인 우리가 나서야 한다/ 떨쳐 일어나, 갈비뼈 부러지고 내장이 쏟아져 나온 이 세상을/ 세상인 우리가 뜯어고쳐야 한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해방되지 않으면/ 세상이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피 흘리는 세상의 상처를 닦아내지 않으면/ 세상은 피 흘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할 나라/ 보다 나은 세상, 보다 나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 번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태일의 순결한 피로 평화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김경숙의 꽃다운 피로 해방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 김종태 박종만 박영진 김장수 오범근 아아 억울한 투쟁의 피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의 평화로/ 만인의 참혹함에서 만인의 아름다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피땀의 찬란한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투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며/ 민족통일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아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아아 우리들의 나라, 만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

취발이 / 김정환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대 슬픔도 한숨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제 내 곁에 돌아와/ 아직도 차마 두 눈 감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가 떨며 은밀히 키워온 그대 몸 속의 치명적인 씨앗에 바치는/ 그대 슬픈 짓밟힘 앞에/ 그대 짓밟힌 육체의 화려함 앞에 바치는/ 나의 이 한줄기 분노를/ 어찌 맨주먹으로 훔쳐내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으랴/ 못 견뎌 저승에서 끝내 살아온 듯만 싶게/ 부석한 얼굴 밤새 뜬눈으로 돌아와/ 아직 내 곁에서 무너져내리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여 또한 그대가 내 품에서 두 눈 부릅뜬 상처로/ 나의 무딘 가슴 방망이질할 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대의 절망도 비참도 남은 몸짓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혼자서/ 나는 그대 눈물의 끝장을 기다린다/ 또한 그대 몸 안의 숨은 부끄러움에 몸둘 바 모르는/ 나의 이 한 불꽃 분노를/ 어찌 눈물로 식혀낼 수밖에 없으랴/ 어찌 눈물로 재울 수밖에 없으랴/ 내 곁에 누운 것은 눈물이 아닌/ 분명 그대의 몸이다/ 지울 수 없게 살아남은/ 뼈아픈 그대와 나/ 거대한 생명의 폭포수다//
* 취발이 : 한국의 가면극에서 노총각 역할을 하는 주요 인물.

희망의 나이 / 김정환
이제 알지 계단은 오를 때마다/ 내릴 때 더 힘이 든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열광이 식는다 역사가/ 계단이어서가 아니다 오르막이/ 있었다면 이토록 숨차지 않으리라/ 물려주어야 할 무게 때문이다/ 고층건물도 뒤집어보면 계단이다/ 내가 따르고 네가 앞서간다//

황색예수전-서시 / 김정환
그대는 살과 뼈와 피비린 인간의 모습./ 인간됨의 가장 비참한 모습./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는 하늘 그냥 늘 푸른 하늘일 뿐/ 그대 못박힌 손발의 상처에/ 갈수록 아픔이 생생한 살이 돋는 사랑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도 어쩔 수 없다,/ 힘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우리가 그대의 사랑을 확인할 때/ (그것은 항상 너무 늦었을 때)/ 그대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돌아선 뒷모습./ 그것은 그대의 위대한 슬픔/ 그대는 슬픔의 시공을 초월하여 있으나/ 처절한 비참 속에 더욱 처절하게 있어/ 6·25전쟁이나/ 죽창, 도끼, 학살, 참상의 끝./ 세상이 그대를 버릴지라도/ 그대는 어쩔 수 없다 버리지 못하고/ 그대의 가슴은 그대를 버림까지 품고 있으니/ 그대의 거대한 포옹 속에서/ 그대를 버린 사람들은 가시처럼 그대를 찌른다/ 그대 육신의 가슴을 찢어져라 찌른다/ 그러나 그대는 바로 찢어질 수 없는/ 깜깜한 사랑의 힘/ 그 자체./ 언젠가 손끝, 발끝, 황홀한 마주침같이/ 입맞춤 같이, 아주 가까운 귀전의 입김 소리 같이//

세례 요한의 말 / 김정환
나는 죽음으로/ 이 세상의 추악함을 증거하였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증거하였다/ 아아 두 동강 난 조국의 아픔/ 나의 죽음 연후에야 너희들은/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희들은 둘로 확연하게 갈라졌다/ 설움 짓누르며 하늘나라를 준비했고/ 시시덕거리며 지옥나라/ 아직도 나는 어느 외로운 쇠창살 감옥살이나/ 뙤약볕, 발바닥이 뜨거운 공사판에서/ 삶의 어려움을 증거하고 있으나/ 눈을 감은 사람들은 아직도 눈시울이 뜨겁고/ 눈뜬 사람들만이 죽어서/ 살아 있다 죽음으로 내가 증명한 것은/ 나의 사랑과 너희들의 불의와 거짓과/ 상처투성이의 삶./ 그리고 아직도 이렇게 텅 빈 손으로/ 내가 너희들을 구하고 있음을./ 나는 아직도 아아 사랑은 너무 외롭구나며/ 거칠고 황량한 빈 들의/ 외치는 소리로 남아 있다//

성탄 / 김정환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칠흑 같은 밤이 술렁거렸고, 땀에 찌든 막벌이꾼들의 치미는 근육덩어리들이/ 반짝였다, 어물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의 비늘들이/ 진압치 못해 축축한 성욕처럼 온 세상 위를 꿈틀대며 기어갔다/ 그리고 밀어닥친 홍수처럼, 아님 밀려난 흥남부두처럼/ 사람들이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갔다// 보따리가건너갔다비틀거리는어깨들이건너갔다물샐틈없는크리스마스캐롤들이건너갔다생계유지걱정무겁게매달린자식새끼들이덕지덕지건너갔다큼지막한헤드라이트불빛들이사방에서마구덮쳐얼굴을갈겼다도대체숨쉴틈을주지않는이땅은누구땅이냐핏발불끈솟아오른리어카꾼의험상궂은욕질이그틈을비집고건너갔다김이모락나는순대가건너갔다홍어찜이건너갔다이조시대민중의수탈을절인오줌냄새가건너갔다그북새통을쫓겨나못비킨다못비켜이자리는죽어도못비킨다아낙네가보따리를움켜쥐고길을건너갔다차량의홍수가흐르는밤거리희미한백열등밑에서맹인여가수의마이크목소리가축축히젖어들었다오늘도걷는다마는청계천6가내가쫓겨나는것이아니다좀더끈끈한삶그래도우리들의희망은희미한가로등과비린내내일의가난을어쩔수없을지라도성시반짝이는것은살아있는것들일뿐산다는것은얼마나위대한가물샐틈도없이사람들이횡단보도를넘쳐흘러갔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난의 뱃속에서 희망의 씨앗이 잉태됐고/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 김정환
산동네 골목길 돌면 눈에 밟힐 것이다 이따금씩 민들레도 펴 오르는 다닥 붙은 단칸방 길 밖 살림으로 그렇다 너는 세입자로 오순도순 애들이랑 고향 생각이랑 살았다 부디 똘똘 뭉쳐 둥지 지키려는 안간힘 주먹손이었다 이제 내내 눈에 밟힐 네 모습은 손수 미역국을 끓이던 양복점 아저씨가 더 이상 아니다 모습은 복부와 심장에 회칼 꽂히고 형용은 울다가 엉엉 부르튼 눈에 네 눈 속 우리 눈에도 회칼 꽂히리라 죽인 것은 칼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렇다 슬레이트 가옥주, 돈 550만 원이 아니라 독점 아파트업자와 복부인이 너를 죽였다 충청남도 강경 고향길 억세게 가난한 농촌에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살길 찾던 상경길 그 길을 배에 칼 꽂힌 채 되밟고 있진 않으리라 우리 눈에 칼 꽂힌 채 두고 홀로 고향 길 찾지는 않으리라 도시 빈민 달동네 세입자 단결투쟁 외치던 성북구 동구여상 후문 옆 벽돌 공터 여기에 남아 제국주의와 독점재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리라 그때 비로소 네 배에서 칼이 뽑히고 우리 눈에서 칼이 뽑히리라 그때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정상률//

심상치 않지? / 김정환
그렇지?/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시커먼 연기와 불자동차 같은 것/ 그렇지?/ 바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심상치 않지?/ 문제는 바람은 바람 때문에/ 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바람은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어두운 수풀 얘기가 아냐/ 대낮 광명에 관한/ 시멘트와 콘크리트에 관한 얘기라고/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그런 만큼 우리는 아직 소시민이야,/ 그렇지?//

바퀴벌레 / 김정환
바퀴벌레 한 마리가 천정에서 떨어져/ 무참히 잠든 내 영혼의 이마를 때린다/ 달아난다, 잡히지 않으려고/ 바퀴벌레도 아닌 밤중, 바퀴벌레는 그도 홀로 깜깜해/ 저는 반짝이는/ 슬픔이라는 듯이/ 고요하고 그러나 억센/ 털난 다리로 씩씩거리며/ 달아난다/ 소스라쳐 내가 놀라는 것은/ 아직도 내게 돌려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동산 부동산./ 바퀴벌레는 내 이마에서 떨어져/ 털난 다리는 갑자기 커 보이고/ 내 몸통보다도 커진 다리의 근육이/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내 신혼의 벽지 위를 짓누르고 다닌다/ 어떤 소중한 두려움 같은/ 그러나 그 자체로는 슬픈/ 흉악한 사랑의 깜깜 절벽/ 소름끼칠 여유도 주지 않는/ 그러나 바퀴벌레는 숨가쁜 진실이다//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 김정환
물론 그렇지 단순한 모순은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성에는 반동적인 것과/ 혁명적인 단순성이 있다 요는/ 단순성에도 계급성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태권V와 외계 로보트의 싸움이 아니다/ 자본가는 괘씸해서, 나쁜 편이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는 선량해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노동력이므로/ 자본보다 엄혹하고/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파괴자이므로/ 자본보다 강하다/ 그리고 노동자는 더 나은 세상의 건설자이므로/ 이미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기보다는 기본적이고/ 이를테면 지는 해와/ 찬란한 완성의 단순함이다//

 



김정환(金正煥) 시인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 『창작과비평』에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하였다. 1982년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에 이어 장시집 『황색예수전』 1·2·3과 『회복기』, 『좋은 꽃』, 『해방서시』, 『사랑노래』, 『우리, 노동자』, 그 후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1·2·3, 『희망의 나이』, 『하나의 2인무와 세 개의 1인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빈 극장』, 『드러남과 드러냄』 등을 간행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산문집 『발언집』, 문학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소설 『세상 속으로』 상·하, 『그후』, 『사람의 생애』, 『순금의 기억』 등과 아포리즘 『지금, 사랑에 들뜬 그대여』등이 있음.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를 폭포처럼 쏟아”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작하는 시인이다. 백석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사람의 삶]시인 김정환 - 시사저널

우리 주위에는 ‘그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 시인 김정환씨(44)에게는 이 말을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로 바꾸어야 타당할지 모른다. 황지우 이성복 최승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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