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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광규 시인

부흐고비 2021. 8. 12. 09:05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서울꿩 / 김광규
서울 특별시 서대문구/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 홍제동 뒷산에는/ 꿩들이 산다.//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까투리는 저마다/ 꿩병아리를 데리고/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는다.//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아스팔트길을 건너/ 바로 맞은쪽/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날아갈 수 없어/ 이 삭막한 돌산에/ 갇혀 버린 꿩들은/ 서울 시민들처럼/ 갑갑하게/ 시내에서 산다.//

아니리 10 / 김광규
추석 귀성차표가 매진되고/ 길가의 코스모스 따라 가을이/ 오리라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가을은 어디서 오지 않는다/ 남쪽으로 왔다가/ 북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만 계절밖에 믿을 것 없는/ 우리의 기다림이 처량할 뿐//

나 /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달력 / 김광규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도 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진양조 / 김광규
가늘게 떨리다가/ 굵게 울리다가/ 떨림과 울림 사이에서/ 잠깐 멈추기도 한다/ 줄과 줄 사이에서/ 그 침묵까지도/ 동양화의 여백처럼/ 소리로 들려주면서//

오솔길 / 김광규
지장보살 앞에 놓인/ 亡者들의 사진/ 내 또래도 눈에 띄고/ 젊은 얼굴도 더러 있다/ 나도 꽤 오래 살았구나/ 손주의 운동화 빌려 신고/ 절을 찾은 할머니들과/ 중년 등산객들 틈에 끼어 서서/ 冥府殿(명부전)을 기웃거린다/ 어둑한 침묵의 한 구석에/ 목탁과 福錢函(복전함)/ 주민등록증과 돈지갑이 들어 있는/ 바른쪽 속주머니를 지나/ 갈빗대 밑에서/ 뜨끔거리며 자라는 죽음/ 어버이를 잃거나/ 자식을 낳거나/ 먹고 마시고 즐기며/ 五十年을 어질러놓은 자리/ 서둘러 대충대충 치우려 해도/ 이제는 빠듯한 시간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픔의 배낭 조금씩 줄이고/ 그림자 슬며시 숲속에 남겨두고/ 일찍 어둡는 산길/ 혼자서 총총히/ 떠나야겠구나//

임종(臨終) / 김광규
한평생/ 잘 쉬었다/ 이제부터 죽음을/ 시작해야지//

나비 두 마리 / 김광규
빨래 말미도 없이/ 한 달 내내 쏟아지는 장맛비에/ 주황색 능소화/ 아깝게 뚝뚝 떨어졌다/ 검은 구름 동쪽으로 몰려가며 겨우/ 앞산의 모습 나타나고 잠시/ 비가 멎었을 때/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니 하얀/ 나비 두 마리/ 안쓰럽게 나풀나풀/ 잡초 우거진 채마밭으로 날아간다/ 장마철에 잘못 태어나/ 축축하지 않니/ 해도 못 보고/ 꽃도 못 찾고/ 금방 땅으로 떨어질 듯/ 서투르게 나풀나풀 날아가는/ 하얀 나비 두 마리/ 풋사랑 이루지 못하고 비 맞으며// 사라지는 어린 영혼들인가//

당시의 유행 / 김광규
당시의 청소년 유행 가운데 하나는/ 새로 산 나이키 운동화/ 그 비싼 신발의 뒤축을 꾸부려/ 찍찍 끌고 다니는 거였다/ 블루진 바지의 무릎 위/ 10센티미터 부위를 일부러 찢어서/ 너덜너덜하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힙합 바지는 그 뒤에 등장했다/ 유행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어느새 그들이 오십대 초반/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기도 했다/ 그 자녀들이 대학생 되어/ 홀태바지를 입고 다니며/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정보의 속도는 믿을 수 없이 빨라지고/ 마음의 깊이는 점점 얕아지고/ 얼굴은 모두 어슷비슷해지고……/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하늘 별자리를 찾던 시인들/ 이제는 인터넷 사전을 뒤지거나/ 몽골여행을 떠나고……//
*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인용.

건널목 우회전 / 김광규
땅거미 내릴 무렵/ 건널목에서 우회전하다가/ 길 한가운데 움직이는 물체가 보여/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너덧 살 난 꼬마가 거기 있었다/ 급정거에 아랑곳없이/ 스키니 청바지에 야구 캡을 쓴 엄마가/ 스마트폰을 환하게 들여다보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왼손잡이 / 김광규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중년 / 김광규
낯선 도시에서/ 술 취한 저녁/ 부동산 업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며 경적을 울렸다/ 나는 모른 척 걸어갔다/ 주유소 앞을 지나 비탈길을/ 자갈이 깔린 비탈길을/ 비틀대며 걸었던 것이다/ 어두운 피해/ 어느 사진관 입구/ 불빛 앞에 섰을 때/ 나는 안으로 들어갈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술 마시고/ 웩웩 토하고/ 해장국집을 나섰을 때/ 밤을 새운 가로등은 피곤해 보였고/ 부지런한 행인들은 더욱 낯설었다/ 냉수를 마시고/ 손을 씻고/ 어딘가 여름 풀밭에 누워/ 나도 여유 있는 웃음을 웃고 싶었다//

상행 /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다오/ 확성기마다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옜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다오/ 너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이른 봄 / 김광규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그리고 무릎이 나올 듯 말 듯/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11월 / 김광규
컨테이너 트럭이 가슴을 울리며 달려가는/ 루이제케젤바하 광장/ 서리 맞은 벤치에 앉아/ 노인은 아침부터 맥주를 마셨다/ 부드러운 잠을 잃은 뒤로/ 성경을 읽는 일도 그만두었다// 세탁물을 찾으러 가던 노파는/ 막내딸의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 그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보험회사의 계산서가 올 뿐/ 맞은족 아파트 시멘트벽에/ 가로수들은 불편하게 그림자를 세우고/ 길가의 창문들은 온종일 닫혀 있었다// 낡은 외투에 차가운 지팡이를 짚고/ 남처럼 멀어져 투박한 그의 몸이/ 앞장서 그를 이끌고/ 해지는 광장을 느릿느릿 건너갔다/ 슈퍼마켓이 닫힐 시간/ 양로원 지붕 위로 날으는 비둘기떼//

늦가을 / 김광규
아침 까치는 이미/ 아무런 기다림도 전하지 않는다/ 십원을 아껴가며 참고 견뎌/ 이제는 모든 것을 샅샅이 알아버렸다// 뭉툭한 콧날에 무뎌진 눈빛/ 안으로 닳아빠진 손끝으로/ 깡마른 여인은 연탄을 갈아넣고/ 빈 사과 궤작을 한 손에 든 채/ 치맛자락 펄럭이며/ 철새들이 날아드는 들판으로 나간다// 여름 햇빛에 수없이 빛나던 나뭇잎들/ 스산한 바람을 따라 몰려가고/ 서녘에 지는 해가 등뒤로/ 어머니의 긴 그림자를 남긴다//

가을 거울 / 김광규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초겨울 / 김광규
혼자 앓는 데 곧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아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앞날을 기다리겠지/ 그 긴 순간을 기다리겠지//

초겨울 / 김광규
혼자 사는 데 곧 익숙해지겠지/ 외국에 간 자식들 소식 없고/ 세금 고지서만 꼬박꼬박 날아오겠지/ 외기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어쩌면 성당에 나가겠지/ 새벽 기도를 하고/ 열심히 설교를 듣고/ 신부님 칭찬을 기뻐하겠지/ 온종일 봉사 활동 쫓아다니고/ 고단하게 쓰러져 하루하루를 잊겠지/ 뒷산에서 소쩍새 우는/ 옛날 집 팔아버리고/ 마침내 아파트로 이사하여/ 난방비가 인상될 때쯤/ 허리 병 때문에 드러눕겠지/ 잠마저 잃고/ 꿈마저 빼앗기고/ 환한 웃음마저 눈물로 되갚으며/ 혼자 앓는 데 곧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아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앞날을 기다리겠지/ 그 긴 순간을 기다리겠지//

생각과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 김광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들까지 모여서/ 모처럼 생일잔치 벌여준 날/ 70년 전에 내가 태어난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머니 젖꼭지에 댓진을 발라/ 네 살짜리 막내아들/ 젖을 뗀 날/ 밤새도록 계속된 폭격이 겨우 멈춘 뒤/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오래된 기와집 폭삭/ 주저앉은 꼴 믿을 수 없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물주머니가 아래로 처져/ 깜짝 놀라게 늙은 모습/ 거울 속에서 발견한 날/ 36년간 다닌 직장에서 등 떠밀려/ 퇴직하고/ 산길 내려오다가 넘어져/ 깁스를 한 채 목발 짚고/ 절뚝거리던 날/ 20년 동안 피우던 담배 끊고/ 다시 30년이 지나 마침내 술까지/ 끊게 된 날/ 심장혈관 전문의 진단을 받고/ 달라트렌 정과 아스트릭스 캅셀 매일 먹기/ 시작한 날/ 오늘이 그날이다/ 평생 써온 일기장에 먹칠을 하고/ 온 가족을 오래도록 괴롭히다가/ 마지막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세상 떠나는 날/ 내일이 내게서 사라져버리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미끄럼 / 김광규
달동네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꼬마들/ 미끄럼타기 바쁘다/ 미끄럼틀 계단을 종종종종 올라가/ 쭈룩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 엉덩이가 해지도록/ 미끄럼탄다/ 너희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머나먼 알프스 높고 높은 마터호른/ 근처까지 올라와서/ 눈부시게 하얀 빙하의 벌판/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세상 곳곳에서 몰려든 스키어들/ 개미보다도 훨씬 작아 보이는/ 형형색색 장난꾸러기들/ 솟아오른 아버지의 드넓은 가슴팍에서/ 흐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겨드랑이에서/ 가파른 눈언덕 아래로/ 겁도 없이 미끄럼탄다/ 당신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요/ 묻지 않는다//

밤눈 / 김광규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밤꽃 향기 / 김광규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꿈속의 엘리베이터 / 김광규
엘리베이터는 비어 있었다/ B4를 누르고 잠깐/ 어두컴컴한 직육면체 공간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자동문이 열릴 차례였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열리지 않았다/ 열림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더듬어보았으나/ 아예 버튼이 없었다/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캄캄한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늦깎이 / 김광규
우리는 우연히 형제로 태어나/ 병정놀이를 좋아하던 형은/ 훈장을 많이 탄 장군이 되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돌멩이에 페인트 칠하는 사병이 되었다/ 인생은 때로 그런 것이지/ 하지만 앞으로 달라질 거야/ 제대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는 또한 남매로 태어나/ 인형처럼 똑똑하던 누나는/ 돈 많은 회장님 사모님이 되었고/ 울기를 잘하는 나는/ 안경을 쓴 근로자가 되었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누구나 자기 길을 가는 거니까/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결국 동포로 태어나/ 더러는 우리를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고/ 개처럼 충실한 월급쟁이가 되었고/ 꽁치를 사들고 가는 아주머니가 되었고/ 더러는 우리 손으로 지은 감옥에 갇혔다/ 언제나 달라지며 그대로 있는/ 역사는 어차피 이긴 사람의 편/ 그러나 진 쪽의 수효는 항상 더 많았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되겠다고/ 나는 요즘서야 생각한다//

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대장간의 유혹 /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아파치 / 김광규
중학교 시절에 나온 영화였던가/ ‘운디드니’를 읽을 때까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름만 들었지 아직도 보지 못한/ 이 서부영화를 오늘에야 보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열흘 만에 나온 햇볕에 눅눅한 이불과/ 장롱 서랍을 말리려는 마누라를 도와 온종일/ 부산스럽게 마당을 드나들었고/ 딸아이는 지나간 연속극을 보겠다고 TV/ 채널을 독점했다/ 지질한 가장의 오랜 바램은/ 이뤄질 수 없었다/ 이름만 듣고 평생 보지 못한/ 국내 연예인들도 많은데 도대체/ 웬 인디언이냐는 것이다/ 허상을 자꾸 보려고 하니까 시력이 점점/ 나빠진다고 애꿎게 야단맞고 오늘도/ 아파치를 놓쳐버렸다//

인디언과 다른 점 / 김광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 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연통 속에서 / 김광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로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노동절 / 김광규
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리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영산(靈山) /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靈山)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靈山)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靈山)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靈山)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靈山)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크낙산의 마음 / 김광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살쾡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 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는 살고 싶은 마음/ 남겨 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엽서 / 김광규
눈 덮인 전나무 숲을 지나/ 오스트리아로 달려가는 급행열차// 민들레 가득한 들판에/ 암젤의 노랫소리// 알프스를 넘어오는/ 지중해 바람의 넋/ 오버바이에른의 가을 마을에/ 나는 때때로 안개가 되어// 가버린 나에게/ 편지를 쓴다//

주점 에스터하지 / 김광규
비엔나의 음산한 겨울 저녁/ 시청 광장의 성탄절 대목장에서/ 글뤼바인으로 몸을 덥혀도 외투 속으로/ 축축하게 스며드는 추위 피할 수 없어/ 뒷골목 지하 주점을 찾아 간다/ 땅 속 깊이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출입문의 육중한 커튼을 비집고/ 동굴로 들어서면 동물들처럼/ 무리 지어 주객이 웅성거리는 지하 객장/ 벽돌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고/ 담배 연기 자욱한 주점 곳곳에서/ 떠들어대는 여러 나라 말소리/ 훈제 돼지고기와 자우어크라우트와 포도주 냄새/ 인간의 조상은 동굴에 살았던 것일까/ 번화가의 우아한 카페 빼어놓고/ 하필이면 이 어두침침한 동굴 술집 찾아와/ 밤늦도록 떠날 줄 모른다/ 구석 자리에서 촛불 밝히고 호이리게/ 세 카라페 비우면서 우리도/ 한바탕 호기로운 관광객이 된다/ 비엔나의 외국인이 된다//

오우가(五友歌) / 김광규
바위와 나무가 가려주었지/ 우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때/ 널려진 바윗돌과 대나뭇잎들이 우리를 감추어 주었지// 소나무 숲속에 엎드려 숨죽이던 때/ 끈질기게 뒤쫓는 그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것은/ 수류탄이나 기관총이 아니라/ 귀가 멍멍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소리였지// 북두칠성을 뒤돌아보면서/ 굶주린 발길을 해남(海南)으로 재촉하던 때/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준 것은/ 강철 같은 이념이 아니라 희미한 달빛이었지//

아니다 그렇지 않다 / 김광규
굳어 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쟁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쫓는다/ 굽힘 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런 후배/ 온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 우리의 잃어버린 이상을/ 새롭게 가꿔가는/ 그의 힘찬 모습을 보라// 그렇다/ 적선동에서 쓰러진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2018.3.5.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외벽의 ‘광화문글판'. 김광규 시인의 ‘오래된 물음’에서 발췌한 문구가 걸렸다.


동서남북 / 김광규
봄에는 연록색 물결 북쪽으로/ 북쪽으로 펴져 올라간다/ 철조망도 군사분계선도 거리낌없이/ 북상한다/ 산맥을 넘고/ 들판을 지나서/ 진달래도 개나리도 월북한다/ 여름이면 뻐꾸기 노래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어디서나 똑같다/ 가을에는 황금빛 물결 남쪽으로/ 남쪽으로 퍼져 내려온다/ 비무장 지대도 민통선도 거리낌없이/ 남하한다/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서/ 코스모스 단풍도 월남한다/ 겨울이면 시원한 동치미 맛/ 얼큰한 해장국 맛/ 어디서나 똑같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하나로/ 하얗게 뒤덮는 눈보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새 문 / 김광규
일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정문 사용 금지>/ 보통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대리석 계단을/없애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버리자// 그리하여 없애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큰 문을/ 없애버리고 차라리/ 거기에다 벽을/ 만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청 단풍 한 그루 / 김광규
물 한 번 주지 않았다/ 타이어 고무줄로 뿌리를 칭칭/ 동여맨 채 바싹 말라버린/ 어린 나무 한 그루/ 신축건물 외벽과 시멘트 블록 담 사이/ 마른 땅에 되는대로 꽂아 놓고/ 준공검사 끝나자마자/ 시공업자는 서둘러 철수했다/ 그리고 긴 가뭄/ 비 한 번 오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 필 줄 몰라/ 죽은 줄 알았다/ 목숨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4월이 가고/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쌀알처럼 작은 꽃과 연녹색 잎/ 한꺼번에 돋아났다/ 강인하구나/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광야의 꿈 키우며/ 제 몫의 삶 지켜가는/ 청 단풍 한 그루//

늙은 소나무 /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 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서서 죽는 나무 / 김광규
오래 가문 날씨 탓인가/ 여름내 대추나무 가지에/ 꽃피지 않고/ 열매 맺지 않더니/ 가을 되어 갑자기 새순이 돋아났다/ 낯선 이파리들 노랗게 피어나서/ 겨울에도 잎이지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나무의 암이라고/ 정원사는 진단했다)/ 머리도 없이/ 내장도 없이/ 몸 밖으로 암세포를 길러내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서서 죽는 나무/ 뿌리가 없어/ 쓰러져 가는 무리들 썩도록 남겨놓고/ 혼자서 바싹 마른 채 열반하는가//

중얼중얼 / 김광규
차렷!/ 한마디로 연대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 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중얼.............//

석불당 새소리 / 김광규
코끝으로 흘러내리는 안경 고쳐 쓰고/ 황새는 외다리로 서서/ 딱따구리가 잡아다 준 나무굼벵이를/ 날름 삼켰다 목이 길어서 우연히/ 심사위원으로 뽑힌 황새는/ 새들의 노래자랑을 한바탕 들은 다음/ 참새와 비둘기와 까치를 텃새라고/ 예선에서 떨어트렸다 뒤이어/ 까마귀와 뻐꾸기와 소쩍새 노래는 어딘가/ 슬프고 처량하게 들린다고 탈락시켰다/ 종달새와 꾀꼬리의 노래는 듣기에/ 좋지만 너무 경박하고 간사하다고/ 낙선시켰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딱따구리가 잡아다 준 산개구리를/ 한 입에 삼키고 나서 황새는 긴 목을/ 주억거리며 마침내 일등을 발표했다/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 박자가 잘 맞고/ 태도가 신중하다는 것이다/ 한동안 소란스럽게 지저귀던 노래마을/ 온갖 새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황새를 개울가로 쫓아냈고/ 당선조當選鳥는 크낙산 골짜기로 숨어버렸다/ 낙선조落選鳥들은 뒷산으로 날아 올라가 저마다/ 개구리 한 마리 없음을 한탄하며/ 아쉬운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석불당石佛堂/ 뒤쪽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지금도 구슬프지 않은가//

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결혼한 지 6년 만이다. 그 사이 식구도 하나 늘었다. 그 녀석은 올해 다섯 살로 우리 집 대장을 맡고 있다. 그 녀석과 매일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데 매번 내가 진다. 솔직히 지금까지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늘 아등바등 살았고 오늘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달팽이의 사랑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내고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달팽이의 모습에서 그동안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사는 데만 급급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마 김광규 시인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화자는 어느 날 장독대 앞뜰에서 서로 얼굴을 비비고 있는 달팽이 두 마리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생각한다.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바둥거린 십 년 동안 아내와 가족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들은 장대비를 뚫고 만나서 기나긴 사랑의 삶을 완성하고 있다. 순간 화자는 달팽이와 대비된다. 시인은 달팽이를 통해 우리의 성찰을 끌어내고 달팽이들이 보여 주는 느림의 이미지를 사랑의 깊이로 확장하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특히 “그리움에 몸이 달아”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숨 가쁘게 달려왔”을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달팽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주목하게 한다. 사는 데만 급급했던 나는 그 앞에서 다시 한 번 작아짐을 느낀다.// 요새는 뭐든지 빠름이 대세이다. 손바닥 안에서 인터넷을 하는 세상이다. 너무 빨라지다 보니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지는 모양이다. 빠름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빠져나와 잠시 나를 돌아보자. 소중한 것을 잃은 채 너무 조급하게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녀석과 나는 또 다투고 아내는 우리를 보고 웃으며 감자채볶음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도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을 속삭이는 중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구부러진 타래송곳 / 김광규
요즘은 양철 병마개가 널리 보급되어, 와인 병 따기가 쉬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코르크 마개로 시간을 봉합한 수입 포도주도 많다.// 어떤 때는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와인 병 코르크 마개가 빠지지 않는다./ 타래송곳이 똑바로 들어가지 않고 헛돌 때는, 이 고장 난 코르켄찌어 (Korkenzieher)를 두고 외설스런 농담이 오고가기도 한다./ 외출하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못 쓰는 병따개를 백팩 바깥 주머니에 넣어둔 채, 꺼내버리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이 고장 난 병따개 덕분에 그러나 달리는 급행열차 객실에서 가까스로 포도주 병을 딸 수 있었다. 동행했던 서교수의 정교한 솜씨로 천신만고 끝에 부서진 코르크 마개를 힘겹게 뽑아낸 다음, 부서진 코르크 찌꺼기를 걷어내고, 레드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애초에 맨 손으로는 안 될 일이었다./ 술 담배는 물론 일체의 취사가 금지된 남쪽 자연생태원 숙소에서도 이놈 덕분에 포도주 한 병을 밤중에 몰래 마실 수 있었다.// 내가 조금만 부지런했어도, 이미 쓰레기통으로 사라져 버렸을 이 구부러진 타래송곳의 쓸모가 게으름의 미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때로는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냥 뒤로 미루어 두자. 그리고 당장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서둘러 버리지는 말자.//

노을 / 김광규
아마도 중년은 넘었을 나이/ 점퍼를 걸친 아저씨와 몸빼를 입은 아줌마/ 저수지 물가의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저녁노을을 본다/ 그들의 뒷모습/ 차츰 흐려져 마침내 그 자리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오른손이 아픈 날 / 김광규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 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 섣달그믐날 시작해서/ 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 한 해가 걸렸네요/ 엄마 그래도 괜찮지?/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시달려/ 이제는 손까지 못쓰게 된 노모가/ 외할머니 차례 상에 술잔 올리며/ 혼자서 중얼거리네)/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 들려와/ 가슴 막히도록 슬퍼지는 때/ 오늘은 늙은 딸의 설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였지//

아무도 모르는 별명 / 김광규
아빠는 왜 어른이 되어서도 노상/ 책상에 꾸부리고 앉아 있느냐고/ 고딩 아들놈이 면박을 주었다 그 당시/ 대입시험 준비에 찌들었던 이 녀석이/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는데도/ 늙은 애비가 여전히 서재를 떠나지 못하고/ 책을 뒤적이거나 원고지 메꾸는 꼴 보더니/ 새로 나온 회전의자를 고희 선물로 사 주었다/ 이 의자를 편리하게 뒤로 젖히고 앉아/ 두 다리 쭉 뻗어 낡은 와인 상자에 올려놓으면/ 책 읽기 편할 뿐만 아니라/ 창밖의 오동나무 바라보기도 좋다/ 넓은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듣다가 문득/ 두 발 받쳐주는 와인 상자가 고마워/ 내심 ‘지족’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알 知, 발 足, 두 글자를 합친 이 별명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

녹색 두리기둥 / 김광규
전깃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덩굴이 엉켜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퍼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럾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 있는 덩굴식물이 한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켜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노랑 조개 / 김광규
갈치처럼 기다란 리도 섬을 통째로/ 덮어버릴 듯 밀려드는 아드리아 해 파도/ 밤새도록 소란스럽더니 모래밭에 널려진/ 무수한 조가비에 섞여 물결무늬/ 영롱한 노랑 조개도 하나 있었다/ 입을 꼭 다문 그 통 조개 주어다가/ 물그릇 속에 담가 놓았다/ 어쩌면 이 작은 조개가 입을 벌려/ 지중해 소식 전해 줄지도 모르지/ 사흘이 지나서야 꼭 다문 조개 입/ 활짝 열리고 그 속에서 하얀/ 조갯살 드러났다 그리고/ 다시 닫히지 않았다 열린/ 조개를 바닷물에 멀리 던지고/ 룽고마레 해변 길 혼자 걸으면서/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바다로/ 돌려보낸 그 노랑 조개가 과연/ 살아있을까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일까/ 혹시 진주를 품고 되살아날 수도 있을지//

바다와 노인들 / 김광규
바닷가 외딴 마을의 길가 벤치에 노인 세 사람이 앉아서 무료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부 출신으로 보인다. 소주를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바닷가를 거닐며 파도 소리에 귀기울이는 관광객이나, 롤러스케이트를 배우는 동네 아이들만 가끔 쳐다볼 뿐이다.// 해풍에 깃을 씻은 까치들이 길가의 목책 난간에 내려앉아 바다와 노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소나무 가지로 올라앉는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리고, 그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담배와 술에 찌든 이 노인들 틈에 끼어 앉아, 나도 외지에서 온 친구가 지나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싶어진다./ 나 같으면, 행인보다는 바다를 더 오래 바라볼 것이다.// 그래도 될까./ 내가 용기를 내어 접근하자, 그들은 무엇을 물으려 하느냐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여기서 돌아서면 안 될 것 같아, 또 한 발짝 그들에게 가까이 간다./ 어느 틈에 그들은 네 사람으로 늘어났다. 안경을 쓴 낯익은 얼굴도 그 가운데 있지 않은가./ 나는 나에게로 바짝 다가선 셈이다.//

메아리 / 김광규
보이지 않는 소리의 기억을/ 그 화가는 아홉 번이나 그렸다/ 반세기 전의 메아리가/ 점과 선과 면으로 바뀌어 이렇게/ 한 폭의 그림으로 되울려 온 것/ 오랜 세월 지났어도 갓 칠한 듯/ 페인트 냄새 풍기며/ 최신작처럼 환하게 빛나는 유채화/ 밝은 화면의 한가운데 금방/ 화필을 잘못 떨어뜨린 듯/ 의도적 결점까지 남긴 수화의 솜씨/ 러닝셔츠 바람으로 땀 흘리며 그린/ 메아리의 흔적이/ 지난번 경매에 출품되어/ 30억 5천만 원을 호가했다/ 보름달보다 둥글고/ 백자보다 희고/ 두루미보다 높이 날아오르는/ 그림의 메아리//

서울에서 속초까지 / 김광규
서울에서 속초까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를 옆에 태운 채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틈틈이 눈을 돌려 북한강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을 것을/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닌데.../ 긴 세월 함께 살면서도 그와/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다/ 얼굴을 마주 쳐다보거나/ 별다른 말 주고받을 필요도 없이/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를 곧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여름 바닷가에서 물귀신 장난치고/ 첫눈 내린 날 살금살금 다가가서/ 눈 한 줌 목덜미에 쑤셔넣고 깔깔대던/ 순간들이 많았어야 한다/ 하다못해 찌개맛이 너무 싱겁다고 음식 솜씨를 탓하고/ 월급이 적다고 구박이라도/ 서로 자주 했어야 한다/ 괜찮아 워낙 그런 거야 언제나/ 위안의 물기가 어린 눈웃음/ 밝은 목소리/ 부드러운 손길/ 포옹할 수 없는 기억/ 속으로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것을.//

 



김광규(金光圭)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독문과에서 문학석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은 독일 현대시문학이다. 1975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반달곰에게》,《아니다 그렇지 않다》,《크낙산의 마음》 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양대학교 독문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김광규 시인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쓴 적은 한 번도 없죠"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김광규(77) 시인의 시 '안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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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 이청준 영전에 / 김광규 시인

문우 이청준 영전에 편안히 눈감은 자네 앞에서 통곡하는 대신 시를 읽게 될 줄은 몰랐네 어릴 때 굶주림에 시달리고 전짓불의 공포에 떨며 자란 우리는 그래도 온갖 부끄러움 감추지 않고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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