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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성선 시인

부흐고비 2021. 8. 16. 12:41
'山 詩' / 을 향한   54편을 추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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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생전인 1999년에 출간한 것을 2013년 (시와시학사)에서 다시 다듬어냈다.


저녁밥 -山詩 1 / 이성선
나는 저 산을 모른다// 모르는 산 속에 숨어 피는 꽃/ 그것이 나의 저녁밥이다//

귀를 씻다 -山詩 2 / 이성선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엎드려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향기가 난다//

생을 탕진 하고도 -山詩 3 / 이성선
안개 속 높이 솟은 산에/ 잃은 소 찾으러 간다// 일생을 탕진 하고도 안되어/ 늙어 구름 골을 아직 헤맨다.//

천후우 울음 -山詩 4 / 이성선
저녁 산에서/ 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고개를 돌리니// 수천 마리 소가 등을 맞대고 가는/ 산 능선들 가운데서/ 달마가 천후우天吼牛를 몰고/ 하늘로 향하고 있다// 우주 앞에/ 구름 옷 벗어버리고/ 막 새로 태어나는 설악산//

견적(見跡) -山詩 5 / 이성선
울타리 밖 낮은 구릉 위에 지지 않는 새벽달// 그가 서쪽으로 가다 찍어놓은 소발자국//

물 위에 산이 -山詩 6 / 이성선
팔만대장경이/ 풀잎 안에 있다.// 뿌리 받들어/ 그 곁에/ 눈을 감으면// 소리 없는 저 세계/ 적막에/ 귀를 기대면// 물 위에 산이/ 달빛을 데리고 간다.//

눈물 -山詩 7 / 이성선
西窓에 드리운 산도/ 이제 오묘한/ 빛과 어둠의 세계다.// 한 방울 잿빛 눈물// 산과 오래 앉은 그 사람/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산을 바라보다 산이 사라지고/ 산을 바라보다 자신이 사라지고// 산도 자기도 없는/ 거기/ 그가 앉았다.//

길 -山詩 8 / 이성선
먼 산이 내려와 고요히 누운 연못 위로/ 개구리 한 마리 헤엄쳐/ 간다// 세상을 물으려 찾아가고 있다// 탁발승 하나//

뿔을 물어뜯다 -山詩 9 / 이성선
진흙 묻은 소가/ 빗줄기 몇 가닥에 목을 씻고 지나간다// 번개 짐승이/ 달려들어 소의 뿔을 물어뜯는다// 깜깜한 지상/ 연꽃피는 소리 들린다//

문을 닫다 -山詩 10 / 이성선
구름 낀 산을 비질한다// 몸을 씻고 저녁에/ 저 산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적막 -山詩 11 / 이성선
신선도神仙圖 한 장이다/ 해탈교를 사이에 두고/ 산과 마주앉았다​// 아무 말 없는 적막한 오후/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만 툭/ 지구를 울린다//

흰 눈은 높은 산에 -山詩 12 / 이성선
흰 눈은 높은 산에 와서 혼자/ 오래 머물다 돌아간다​// 새와 구름이 언제나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겨울 산 -山詩 13 / 이성선
겨울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홀연 놀란다/ 나무는 오간 데 없는데/ 나 혼자 나무 향기를 맡는다//

새 -山詩 14 / 이성선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여름비 -山詩 15 / 이성선
대낮에 등때기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후두둑/ 문밖에 달려가는 여름 빗줄기//

밥 세 끼 먹고도 -山詩 16 / 이성선
밥 세 끼 먹고도/ 우리는 왜 이리 할 일이 많은가./ 산에 사는 것들은/ 제 나무 열매 멀리 던지고/ 겨울에는 옷을 벗어/ 뿌리를 덮고/ 새들은 찬바람/ 허공의 하늘에다/ 마른 알몸을 묻어/ 붉은 노을을 이불로 덮어쓴다./ 저녁 어스름의/ 묵빛 속에 꿈을 꾼다.//

문답법을 버리다 -山詩 17 / 이성선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피리 -山詩 18 / 이성선
그대 함부로 나를 허락하지 말라./ 그대 좀체로 나를 이해하지 말라./ 새벽까지 좌정하여 벽 그림자로 흔들려도/ 나의 숨결로 그대 뼈까지 울지 말라.// 나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 있어/ 전 생애가 바람인 까닭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 있어/ 산 하나 울며 떠도는 까닭이다.//

반달 -山詩 19 / 이성선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산달山月 -山詩 20 / 이성선
당신을 껴안고 누운 밤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돌 하나 품어도/ 사리가 되었습니다.//

침묵이 따뜻하다 -山詩 21 / 이성선
달이/ 빈 산 위에 혼자 있는/ 나무를 껴안는다// 아아/ 침묵이 따뜻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하늘// 주위에/ 물소리도 허공도/ 다 어디갔나//

산이 나비로 변해 -山詩 22 / 이성선
큰 산이 한 마리/ 나비 되어/ 짙은 안개 속을/ 헤맨다//

노루귀꽃 숨소리 -山詩 23 / 이성선
늦은 저녁 산에 귀 대고 자다// 달빛 숨소리 부서지는/ 골짜기로/ 노루귀꽃 몸을 연다// 작은/ 이 소리// 천둥보다 크게/ 내 귀 속을/ 울려// 아아// 산이 깨지고/ 우주가 깨지고//

향기 -山詩 24 / 이성선
지렁이가 해 뜨는 지평을 먹으며 기어간다// 내 눈이 그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땅의 향기에 놓쳐버린//

황홀 -山詩 25 / 이성선
오늘 아침 산이/ 물방울// 음악이다// 세상이 꽃으로 피어난다// 이제/ 더 갈 데가 없다//

쇠별꽃 -山詩 26 / 이성선
흙길을 가다가 본다/ 발자국이 남아 있다// 발자국// 들여다보니 놀랍구나/ 사라진 얼굴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찾았다 잃어버린 사람/ 쇠별꽃 내음//

모란꽃 위에 눕다 -山詩 27 / 이성선
달 벌레가/ 산을 파먹어 들어가서// 그 안에 동그랗게/ 몸 꼬부렸다// 달을 먹은 산// 자정 넘은 야밤/ 모란꽃 위에 눕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마당 구석//

장엄한 배경 -山詩 28 / 이성선
풀잎은 장엄하다// 그 뒤에 일몰이 섰다// 누군가 죽고/ 산맥이 엎드리고// 밤이 돌아와 곁에/ 짐승처럼 눕다//

풍경 -山詩 29 / 이성선
하늘에 혜성이 지날 때/ 집시처럼/ 악곡 올리며 갈 때// 달 뜨는 산이/ 물 속에 들다// 어찌할까/ 저/ 고요// 내 눈 안에

도/ 산이 걸렸는데//

나 없는 세상 -山詩 30 / 이성선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물 위에 달빛 붓으로 -山詩 31 / 이성선
가랑잎 종이 위에다/ 평생 이름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슬픔이더냐/ 차라리 실컷/ 물 위에 달빛 붓으로 글을 쓰겠다//

울림 -山詩 32 / 이성선
높은 산상에 죽어 오래 섰던 나무// 산을 쩌렁 울리며 쓰러진다// 토성 저쪽에서/ 이 소리를 들은 다람쥐// 고개를 번쩍 들고 바라본다//

숨은 산 -山詩 33 / 이성선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우주 골짜기 -山詩 34 / 이성선
옹달샘 가에서/ 갓 피어난 동자꽃이/ 샘물을 들여다본다// 샘물이/ 물 마시러 찾아온/ 사슴을 쳐다본다// 작은// 우주 골짜기//

꽃 한 송이 -山詩 35 / 이성선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구나//

대화 -山詩 36 / 이성선 --- * 발췌 하지 못함

시골길 -山詩 37 / 이성선
시골길에/ 비 온 뒤 물이 고이고/ 물 속에/ 산이 들고// 산 속에 꽃이/ 붉게 피고/ 꽃 속 절간에/ 동자승이/ 숨어서 웃고//

산중다인山中茶人 -山詩 38 / 이성선
찻잔에 매화 붉게 필 때// 앞산을 낮게 나는 새가/ 그 발을/ 찾잔 물에 적시고 지나간다// 허공에 갑자기 향기 감돌고/ 저녁 저 발이/ 누구의 가슴에 깊어지는데// 새는 어디에 닿는가// 닿고 닿지 않음/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침 뱉듯이 보는 이가// 내 뒤에서 조용히 차를 들고 있다//

고향실古香室 -山詩 39 / 이성선
낙산사 회주스님이 거처하시는 집에는 누가 언제 써놓았는지 고향실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눈에 잘 띄어 않게 조금 서툰 듯 그러나 세월이 와서 오래 만지고 놀아 완성시킨 글씨가 그 앞에 나를 세워 꽉 묶어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제대로 서툰 것은 오래 이루어지는가. 오래 완성되어야 저렇게 알 수 없는 형상의 골짜기로 내 발을 끌어들이는가/ 죽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무섭다. 시간의 뼈의 허물어짐. 가랑잎 웅크린 듯 별 아래 물닭 날 듯 고졸한 향기. 저 수만 근 적막//

초암草庵에서 -山詩 40 / 이성선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눈동자 -山詩 41 / 이성선
산 속에서 만난 샘물// 신의/ 눈동자//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했지만// 나는 몸으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돌아왔다//

달이 자는 곳 -山詩 42 / 이성선
달이 자는 곳에 가고 싶다/ 거기가/ 꽃 속이 아니라/ 산이 아니라 그 너머/ 당신의 유방과 유방 사이//

봄밤 -山詩 43 / 이성선
나귀의 귀 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을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아름다운 저녁 -山詩 44 / 이성선
장마로 오랫동안 가려졌던 산이/ 터진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살결을 드러낸다/ 보아서는 안될 속가슴과 가랭이 사이/ 여인의 옷 벗는 모습을 숨어서 보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저녁이다//

달빛 발자국 -山詩 45 / 이성선
달빛이/ 산길을 쓸자/ 냇물처럼/ 길이 산 위에 떴다// 너구리 까투리 고라니 산밤 찾는 들쥐들/ 발가락에 달빛 묻어// 어떤 발자국 줄은 산 위에서 별 쪽에서 사라지고/ 다른 줄은 마을로 내려오고// 또 한 줄은/ 내 잠 속으로 숨어들어/ 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내 뼈골 속에 흩어져 달빛으로 찍힌/ 작은 하늘 흔적들//

너의 이름을 산에 묻고 -山詩 46 / 이성선
산이 그의 뒤뜰에/ 유성 가득 흐르는/ 광활한 우주숲에 숨기고 있다/ 그 숲에서 이상한 짐승소리가 들린다// 산은 늘 운다/ 산으로 가는 길이/ 영원에게 가는 길이다/ 아니다. 순간에 이르는 길이다//

해 지는 소리 -山詩 47 / 이성선
향기 있는 사랑이 그립다/ 해 지는 소리 남아 있는 산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잔다/ 산이 저무는 시간/ 물 속에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세상은 깊어지는데/ 사람들만 야단이다// 꽃이 지면 허공은 새롭다/ 새 그림자 지나가면 물이 더 맑다/ 남으려 하는 것은 욕된 것/ 머물려 하는 것은 아직/ 너를 넘어서지 못한 것/ 삭발한 산을 따라/ 기다리는 이 없는 곳으로 떠돌리라// 물 속 빈 산에서 들리는/ 당신의 독경소리 찾아//

위험한 사람 -山詩 48​ / 이성선
멀리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산은 멀리 있고/ 마음의 산은 더 멀리 있는데// 그곳에 네가 있고/ 네가 있는 곳에/ 그리고 그 너머에/ 다시 내가 있는데// 먼산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버린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향성사 문짝 -山詩 49 / 이성선
산을 들어서는 문턱에/ 낙엽 두어 장 떨어져 웅크리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침 햇살 잘 받은/ 향성사 극락보전 문짝이/ 등을 돌리고/ 여기 와 떨어져 있구나// 그냥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크게 소리쳐 말한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물 위를 걷는 산을 본다// 산은 이미 비를 지나/ 꽃잎 속에 주무시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동쪽 나무 위에서 새벽 하늘이/ 채찍을 들고 막/ 내 등을 내려치려 한다//

신발 -山詩 50 / 이성선
현관에 신발 하나 놓여 있다// 험한 큰 파도 위로/ 나를 태우고 돌아다닌/ 작은 배// 바람속 비 속/ 이 진흙 바다// 그러나 신발 없이도/ 건너간 이 있어// 침묵의 성자가 되어/ 건네주고 다시 건네주고/ 사라져 가는 이 있어/ 다시 보니// 지금 누가 내 집에 와 있느냐/ 네가 산정 위에 머문/ 구름 같다// 나를 세상으로 이끄는/ 화엄경//

삽 한 자루 -山詩 51 / 이성선
삽 한 자루 벽에 기대 섰다// 흙을 어루만져 씨를 묻고/ 밭을 뒤집어 노을 갈아 밤을 심어/ 새벽 열고// 지금은 묵묵히/ 몸을 씻은 후 집에 돌아와/ 벽 앞에 서 있다// 적막한 평화로움// 나의 손에 부려질 때와는 달리/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심히 자기로 돌아가 있다// 그러나 저 깊은 손이 어느 날/ 대지 위에 나를 묻어/ 하늘로 돌려보내리라//

천기누설 -山詩 52 / 이성선
天機가 누설되어/ 달이 뜬다.// 저 큰 도포자락으로/ 산을 쓸며/ 누가 걸어가고 있느냐.// 차고 높은 봉우리에/ 푸른 향기// 폭포가 하늘로 거꾸로/ 매달리고// 허공의 뼉다귀를/ 꺼내어 심어 놓은 듯// 절벽 위에 비뚜루/ 떨어지는 소나무// 구름만 발소리 죽이고/ 지나가는 山上// 하늘 연못에/ 진흙소가 걸어가고 있다.//

저문 하늘빛에 기대다 -山詩 53 / 이성선
설악산 해 지는 모습이 너무 깊어서/ 가만히 그 아래 서서 올려다보다가/ 저물어 아름다운 하늘빛에 몸을 기대다// 고요의 산그림자에 안기는 하루의 끝/ 작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척한 꽃대 하나 없는 바람에 떨며 곁에 있다//

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山詩 54 / 이성선
땅에 누운 것들은 모두 싱싱해진다/ 썩을수록 무無 가까이서 맑아진다// 잎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니/ 구름이 산을 밟았구나/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구나// 구름 밟은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 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어디로 가고 있는 나무다// 서 있으면서 가고 있는 산/ 풀잎도 여기 앉아서 구름 냄새가 난다// 내가 죽으면/ 어떤 냄새가 날까// 나뭇잎 떨어져 햇살에/ 몸 말리는 냄새?//


구름 / 이성선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어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구름과 바람의 길 / 이성선
실수는 삶을 쓸쓸하게 한다./ 실패는 생生 전부를 외롭게 한다./ 구름은 늘 실수하고/ 바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구름과 바람의 길을 걷는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구름은 항상 쓸쓸히 아름답고/ 바람은 온 밤을 갈대와 울며 지샌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길/ 구름과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이다//

큰 노래 / 이성선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산길 / 이성선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뢰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속으로 絃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산에 시를 두고 / 이성선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시를 써 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 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미시령 노을 / 이성선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누에 / 이성선
산뽕잎을 흰 누에들이 먹고 있다.// 구름 풀어지는 설악산

우물 / 이성선
우주의 숨쉬는 자궁// 그 속에 당신의 정액이/ 별들로 희부옇게 뿌려져 있다.// 바가지 하나 가득/ 우물물을 뜬다.// 사리빛 당신의 몸을 마신다//

山詩 1 / 이성선
누가 西으로 찾아가느냐/ 아득한 山人이 사는 곳// 가다가 밭둑길에 엎드려/ 산능선 등을 한 소가 되어/ 풀을 뜯고 있는 사람을 보았느냐.// 물 속 달과 싸우는/ 승냥이를 보았느냐//

山詩 4 / 이성선
東은/ 해 뜨는 바다/ 저녁 달 솟는 소리/ 蘭잎 그림자로 문을 발랐네.// 西는/ 산으로 병풍을 쳤네.// 친구여 오라./ 그대 오시면// 구름 빠져 흐르는 물/ 산이 들어가 넘어진/ 샘물로/ 차를 달이겠네.// 山茶 한 잔/ 雪茶 한 잔//

山詩 6 / 이성선
진흙 묻은 산을/ 빗줄기 몇 가닥 씻고 지나간다.// 문득 번개 짐승이/ 그의 몸에 입을 대려 한다.// 어디서 이 깜깜한 지상에/ 연꽃 피는 소리 들린다.//

山詩 9 / 이성선
달이 나무 속에 들어 있다./ 산의 가슴에 피리 한 자락이 숨어 있다.//

山詩 10 / 이성선
농부보다 더 늙은 몸으로 논바닥을 걷는 해오라기./ 가끔 서서 길게 쳐들고 산을 바라보는 모가지.//

山詩 18 / 이성선
시골 흙길에/ 비 온 뒤 물이 고였네./ 물 속에/ 산이 들어 있네./ 산 속에 꽃이/ 붉게 피고/ 꽃 속 절간에/ 동자승이/ 숨어서 웃고 있네.//

山詩 23 / 이성선
경전 하나 들고/ 산을 떠돌았다.// 목탁에 의지해 天路를 찾아 /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쌓이는 것은/ 더 큰 누더기// 옷 한 벌 바라때기 하나로*/ 조각달처럼// 높은 산 위에 눕는다./ 흐르는 물 위에 눕는다.//
* 碧松 智嚴의 禪詩 ‘一衣又一鉢’에서

山詩 30 / 이성선
너의 이름을 허공에 묻으랴/ 너의 영혼을 어둠에 묻으랴/ 너의 사람을 산에 묻으랴// 산은 죽음이다./ 죽음을 넘어서 있는 집이다.// 그 안에/ 삶과 죽음이 입을 맞추고 누워 있다./ 산은 날개다./ 산은 옷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문을 열고/ 물소리를 낸다.// 산은 너의 안에 있다./ 산은 너의 밖에도 있다./ 산은 한 마리 새다./ 산은 날아가지만/ 너의 눈동자 속에서/ 너와 함께 숨쉬고/ 너와 함께 잔다.// 산은 그의 뒤뜰에/ 유성 가득 흐르는/ 광활한 우주 숲을 숨기고 있다./ 그 숲에서 이상한 방울소리가 들린다.// 산은 늘 운다./ 산으로 가는 길이/ 영원하게 가는 길이다./ 아니다. 순간에 이르는 길이다.//

황혼 화엄의 노래​ / 이성선
성자聖者의 모습으로 산이 저문다/ 아득한 회흑색 고요/ 조율하지 않아 구불구불 흩어져 나간/ 슬픈 능선들, 생각들/ 수많은 말들이 혼돈에서 깨어나기 전/ 침묵하는 입/ 붉은 빛만이 산을 밟고/ 거대한 힘으로 하늘 향해 일어섰다/ 목숨의 불, 화엄 황혼/ 숨막히게 나를 압도하는 고요여/ 말하는 자는 사라지고/ 바라보는 자만 여기 남아 있다/ 바라보는 자조차 떠나면/ 누가 남아 뼈보다 투명한 마음으로/ 어둠속에 노래하리/ 평생 명상으로 늙어서/ 험상한 나무위로/ 한 방울 향기보다 더 붉게 핀 적요의 꽃/ 그를 싣고 도도히 흐르는 산맥의 강/ 신은 산을 조율하지 않는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돌아가게 하고/ 스스로 깊게 한다/ 혼자 날게 하고/ 누구에게도 날개를 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무덤 / 이성선
누가 나를 불러 냈는가// 청산 가득 하얀/ 박꽃 피어 눈 부셔라// 별들과 벌레 소리와 물 소리 이슬로 짠 옷 한 벌/ 내게 던져 주며 누가 이르노니/ 동 트는 새벽까지 기다려라/ 빗자루로 붉은 동녘 하늘을 쓸고 내리는/ 그 분을 찾아라// 붕붕대는 벌의 날개짓/ 고요의 노래// 우주는 벌집이네/ 그중에는 더러 땅에 떨어져 죽은 논도 자주 보이네// 아, 저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나를 맞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자유자재한 손을 가진/ 그 분이 내 곁에 계시듯/ 어느 별 나무 아래 계실까// 만다라꽃이 뚝뚝 떨어지는 고요의 밀원/ 섬들이모두 떠올라 명상하네// 우주가 내 눈동자 샘물 속에 빠져/ 몸을 씻고 있을 때/ 숲은 비로소 가슴을 열고/ 신운에 떨며 노래하노니/ 하늘과 땅이 한 소리에 그윽히 젖네// 이 대지 위에/ 기다려도 박꽃 지는 시간까지/ 별들만 자꾸 죽어 꽃이 되어 내리고// 줄을 길게 긋고 떨어저/ 몸을 묻는 골짜기가 환해지네// 선사들은 어디서 죽었을까// 무덤이 안 보이네/ 다른 영혼을 키우러 떠난 자는 죽어서/ 세상에 무덤을 두지 않네// 새벽 언덕에 혼자서 서 있는 빛처럼//

고향의 천정 /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 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깨끗한 영혼 / 이성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눈동자가 따뜻하다.// 늦은 별이 혼자서 풀밭에 자듯/ 그의 발은 외롭지만/ 가슴은 보석으로/ 세상을 찬란히 껴안는다.// 저녁엔 아득히 말씀에 젖고/ 새벽녘엔 동터오는 언덕에/ 다시 서성이는 나무.//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번뇌는 절망보다 깊지만/ 목소리는 숲 속에/ 천둥처럼 맑다.// 찾으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다.//

아름다운 사람 /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 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 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고 아름다워 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영혼의 침묵 / 이성선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조금씩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 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여기 돌아와 섰다./ 그가 타오르면/ 조금씩 나를 하늘로 길어가고/ 다시 우주의 침묵을 내려/ 내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는 이 땅에 떠 있는 석등/ 조용히/ 그를 불 밝히는 그릇.//

신화 / 이성선
아이가 가재를 잡으려고/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서 가재가 아니라/ 달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달은 아이를 삼키고/ 집채보다 더 크게 자라서/ 동구 밖에 섰다.// 달의 뱃속에 지금 아이가 산다//

생명 / 이성선
바닷가에서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아이처럼/ 나는 작은 심장에 매일/ 하늘을 퍼 뜬다// 바다 아이가 조가비에/ 바다의 깊은 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허파도 하늘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에 담긴 한 방울 물이/ 실은 바다 전체이듯/ 가슴속에 담긴 하늘 또한/ 우주 전체이다//

바다를 잃어버리고 / 이성선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을 잃는 것입니다// 당신을 다 안다는 것은/ 당신에 대하여 눈을 감는 일입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이 가을에 이젠 떠나야겠습니다/ 멀리서 더 깊이 당신에 젖고 싶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와 흔들리는 가슴/ 물새들의 반짝임도 울음소리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들어야겠습니다// 당신이 보내신 편지를 읽듯이/ 멀리서 떨리는 손으로/ 등불 아래서 펴 보아야겠습니다//

경작(耕作) / 이성선

새벽에 농부는 밭을 간다./ 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 밭고랑에 넘어진다.// 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를 꺼내/ 벌판에 펼쳐놓고/힘껏 갈아가는 농부// 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 밭을 간다./ 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 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 아이의 눈 속에 핀/ 새소리를 갈고.// 그가 갈아온 밭고랑에/ 고인 눈물/ 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 일생을 갈고 와 이제/ 황혼의 발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 찢긴 밭고랑에 핏빛으로 타는 놀// 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울음소리로 몸을 꿰매고 / 이성선
밤에 나는/ 커다란 한 마리 새로 변하여/ 웅크려 발톱을 갈다가/ 허공을 날아/ 얼음 번쩍이는 설악산 그 큰 뿌리를/ 두 발로 번쩍 들어, 날아 날아/ 허공을 가로질러 와서/ 마음 복판에 들여놓는다./ 내 안에 산이 우는 소리/ 밤중 큰 산의 큰 울음소리/ 나는 밖으로 난 문빗장을 굳게 지르고/ 울음소리에 흔들리다가/ 울음소리가 되어 울다가/ 등이 터지고 마음 찢어지고/ 밤내 울다가/ 어느 자정 무서운 울음소리 한 끝으로/ 해진 내 몸 다 얽어 꿰매고는/ 홀연히 일어나/ 실로 커다란 한 마리 새가 되어/ 서쪽 하늘로 날아간다.//

유년기의 자화상 / 이성선
학질을 되게 앓던 날 새벽/ 할머니는 정한 뽕잎 하나 따서/ 정낭 귀틀에 깔고 그 옆에 나를 앉혀/ 혀로 뽕잎을 세 번 핥게 하신 후/ 다시 나를 업고/ 해 뜨는 봉우리/ 까마득한 바위 끝에 앉히고/ 내 머리 위에/ 동서남북의 바람을 불러들여/ 학질을 재판하셨습니다./ 알 듯 모를 듯 주문을 외시던 할머니는/ 품속 칼을 선뜻 꺼내/ 푸른 바다 뜨는 해를 향해/ 십자를 긋고/ 이어 그 무선 칼날로 내 머리를 그으셨습니다./ 내 몸 안으로 부서져 내리는 칼 소리/ 내 몸 온 구석에 부서져 하얗게 빛나는 칼 빛/ 할머니는 나를 업고 다시/ 개울로 가셨습니다./ 할미꽃 잎사귀를 손바닥에 비벼/ 내 콧구멍을 막아주시고/ 징검다리를 건너뛰게 하셨습니다./ 할미꽃 잎사귀의 독한 향기는/ 몸에 스미어 내 눈에 별빛이 번쩍이고/ 나는 별 밭 징검돌 은하수를/ 반은 죽어 건너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하는 사이/ 칼 빛에 두려운 학질 무리가/ 할미꽃 향기에 질려/ 별 밭 하늘로 도망가고 말았는가./ 돌아오는 마을 어귀에/ 풀 꽃잎 까치울음 함께 떠서/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편지 받고 / 이성선
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 그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조용히/ 해 지는 산 앞에 앉아 있지// 무릎 아래의 꽃들이/ 마음 접는 시간 곁에 사네// 혼자 있을 때 사람이나 짐승/ 풀잎까지도/ 전체적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지// 단순한 삶 속에/ 앉아 있으면// 자주 해 지는 시간이 찾아와서/ 장엄한 그림 속에 나를 넣어 작곡한다네//

외로운 사랑 / 이성선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풀잎과 앉아 / 이성선
풀잎과 마주앉아/ 우주와 앉아/ 마음을 모은다./ 산이 춤추며 온다./ 바다가 말하러 온다./ 산 노래에 몸을 싣고/ 꽃의 눈동자 이슬에/ 뼈를 씻고 바라보면/ 다시 깨어 보면/ 세상 속에 세상은 없다./ 거기 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의 이 큰/ 천둥 번개가 모두 나의 집/ 나의 몸이다./ 풀잎과 앉아/ 별 속에 나비로 날아/ 이 우주 이 무궁/ 삶은 신비다./ 세상 전체가 향기다.//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 이성선
내가 풀잎으로 서서 별을 쳐다본다면/ 밤하늘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내가 나무로 서서 구름을 본다면/ 구름은 또 어떻게 빛날까./ 내가 다시 풀잎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 다시 나무로 서서 나를 본다면/ 나는 진정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걸어갈까./ 내가 별을 쳐다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풀잎들도 별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나무도 나를 보고 있다.//

풀잎의 노래 / 이성선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상에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늘에 꽃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대 안에 돌아와 계시니/ 신의 음성이 계시니/ 깨어 노래하는 자와 함께 있다// 그대를 버리지 못하여/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등을 켜 주니/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높고 찬란히 사는 별을 본다// 하늘에 몸 바치고 살아가는 자여/ 사랑을 바치는 자여/ 그대 곁에 내가 있어/ 깊은 밤 풀잎 되어 운다//

노을 무덤 / 이성선
아내여 내가 죽거던/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짐승의 꿈 / 이성선
나는 어둠이야/ 이 고요함 속에 나는 온통 별이야, 눈물이야/ 하늘이여 팔을 내려/ 번쩍이는 북두칠성 굽은 팔을 내려/ 나를 안아가 주오/ 이 영혼이 별의 가지 끝에 이슬로 맺혔다가/ 날아가/ 밤의 나라, 고요히 불타는 나라/ 그 가슴에 묻히면/ 무궁에 눈뜰 거야, 우주에 피어나 해탈하여 날아다니며/ 노래할 거야/ 풀잎에 어둠으로 웅크려/ 밤하늘을 쳐다보며 꿈꾸는/ 나는 지금 죽음보다 황홀한 짐승/ 허공 가지에 커다란 달로 떠/ 그대 가슴에 안길까/ 눈시울 붉은 꽃으로 가서/ 그대 가슴에 묻힐까/ 고요한 밤하늘을 울리는 심금/ 나는 죽어서 별이야/ 별빛 가지에 피어난 눈물이야//

별의 아픔 / 이성선
내가 지금 아픈 것은/ 어느 별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늦게 괴로운 것은/ 지상의 어느 풀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토록 외로운 것은/ 이 땅의 누가 또 고독으로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의 외로운 별과 나무와/ 이 땅의 가난한 시인과 고독한 한 사람이// 이 밤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나/ 서로 통화하여 앓고 지새는// 병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여.//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처다 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환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싶다.//

바람 속에서 / 이성선
산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무에게 가는 길이/ 별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의 길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늘 산에 있고/ 바람은 늘 바다에 가득하고/ 바람은 나무 끝에 먼저 와/ 그 곳에 서 있다.// 나의 길은 바람 속에 있다./ 잎새 끝에는 언제나/ 새벽 별이 차갑게 떨고/ 바람은 길에서 나를 울렸다.//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 이성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물 곁에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귀가 깨어/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새벽 들판의 풀잎처럼/ 언덕 위 나무처럼/ 별 아래 함께 서 있는 것//

달 하나 묻고 떠나는 냇물 / 이성선
아낌없이 버린다는 말은/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말이리// 너에게 멀리 있다는 말은/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말이리// 산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날이 많은데// 너는 멀리 있으면서/ 매일 아프도록 눈에 밟혀 보이네// 산이 물을 버리듯이 쉼없이/ 그대에게 그리움으로 이른다면//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되리/ 달 하나 가슴에 묻고 가는 시냇물처럼//

달을 먹은 소 / 이성선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보고/ 더 놀란다//

우물을 보는 소 / 이성선
동네 우물을/ 소가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상수리 나뭇잎 피고/ 새가 날고/ 하얀 구름이 흐른다.// 물 속의 소는 유난히 귀가 크다.// 우두커니 올려다보는 얼굴/ 흔들리는 굴레/ 먼 옛날 어느 족장의 훙예 같다.// 종처럼 일하다가/ 거지처럼 떠돌다/ 늙어서 바리때 하나 짊어지고/ 떠나왔다.// 우물에 나비 미끄러지고/ 민들레 피어/ 그의 얼굴을 만진다./ 꽃관을 썼다.//

강물 / 이성선
새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지난해만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지난해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그 전 해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이 교실은 해마다/ 요만한 이이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흘러간다//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눈이 온 다음 날 비치는 햇살 / 이성선
눈이 온 다음 날 솔잎에 빛나는 햇살/ 산협에 내려와 두근거리는 하늘/ 가지의 속삭이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 거울 속에 담긴 한르을 차고 날아가는 새/ 새소리 새소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사이로 젖는 향기//

나무 /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나무에게 / 이성선
내 귀를 네게 묻는다./ 듣는 사람아/ 하늘을 듣는 사람아/ 그대 시인이여./ 너의 가슴에서 플룻을 듣는다./ 내 안으로 깨어오는/ 또 한 사람이 들린다./ 진실한 언어의 발소리/ 나무야/ 이 저문 땅의 빈자여/ 함께 걸어가 다오./ 네 안의 아름다운 자가/ 별이 이고 춤추는 자가/ 나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너의 세계를 가고 있다./ 나무야/ 함께 걷는 시간에/ 나는 문득/ 너의 뒤에서/ 알 수 없는 강물을 건너고 있다.//

나무 안의 절 / 이성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 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복사꽃 / 이성선
봄날 길 없이 온 너는/ 갈 곳 없어 더 화안하다/ 몸 찾은 곳이/ 달 뜨는 쪽 아니다// 저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너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때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것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붓꽃 / 이성선
산아래 붓꽃 한 자루 피어 있다.// 한밤에 촛불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세상을 향해 이런 얼굴로 핀다//

벌레 / 이성선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고요하다 / 이성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 이성선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백담사 / 이성선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도반(道伴) / 이성선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구도(求道) / 이성선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가을 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소포 / 이성선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 아래// 노란 들국화 몇 송이/ 한지에 정성들여 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가겠습니다//

다리 / 이성선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흔적 / 이성선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

흔들림에 닿아 / 이성선
가지에 잎 덜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리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입동 / 이성선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입동저녁 / 이성선
벌레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도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입동이후 /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이성선(1941년~2001년) 시인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때 아버지가 월북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속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61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다. 1967년 졸업한 후, 수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반에 들어가 콩을 연구하며 지냈다. 1970년 ≪문화비평≫에 작품 <시인의 병풍>외 4편으로 등단했다. 1972년 ≪시문학≫ 추천을 받아 재등단했다. 1974년 첫 시집 ≪시인의 병풍≫을 간행한다. 교사 생활과 병행해 1987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 국어교육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 1988년 강원도문화상을,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다. 1994년에 제6회 정지용문학상을, 1996년에 제1회 시와시학상(작품상)을 수상한다. 1999년 인도 여행 후 2000년 3월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에 겸임교수로 부임한다. 개인 시집 14권, 공동 시집 4권, 시 선집 2권을 남기고, 2001년 5월 자택에서 타계했으며 화장해 설악산 백담사 계곡에 영면했다. 2002년 5월 생가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2004년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인 이성선≫을 간행했다. 2005년 시와시학사에서 ≪이성선 시 전집≫이, 2011년에 서정시학에서 ≪이성선 전집 1·2≫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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