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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홍해리 시인

부흐고비 2021. 11. 3. 08:38

봄, 벼락치다 / 홍해리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투망도投網圖 / 홍해리
무시로 목선을 타고/ 출항하는 나의 의식은/ 칠흑같은 밤바다/ 물결 따라 흔들리다가/ 만선의 부푼 기대를 깨고/ 귀향하는 때가 많다// 투망은 언제나/ 첫새벽이 좋다/ 가장 신선한 고기 떼의/ 빛나는 옆구리/ 그 찬란한 순수의 비늘/ 반짝반짝 재끼는/ 아아, 태양의 눈부신 유혹/ 천사만사의 햇살에/ 잠 깨어 출렁이는 물결/ 나의 손은 떨어/ 바다를 물주름 잡는다// 산호수림의 해저/ 저 아름다운 어군의 흐름을/ 보아, 층층이 흐르는 무리/ 나의 투망에 걸리는/ 지순한 고기 떼를 보아// 잠이 덜 깬 파도는/ 토착어의 옆구릴 건드리다/ 아침 햇살에 놀라/ 이선하는 것을 가끔 본다// 파선에 매달려 온/ 실망의 귀항에서/ 다시 목선을 밀고 드리우는/ 한낮의 투망은/ 청자의 항아리/ 동동 바다 위에 뜬/ 고려의 하늘/ 파도는 고갤 들고 날름대며/ 외양으로 손짓을 한다// 언제나 혼자서 항해하는/ 나의 목선은/ 조난의 두려움도 없이/ 강선처럼 파도를 밀고 나간다// 저 푸르른 바다/ 해명에 흔들리는 하오의 투망/ 고층 건물의 그늘에서/ 으깨지고 상한 어물을/ 이방인처럼 주어 모은 손으로/ 어기어차 어기어차/ 다시 먼 바다로 목선을 민다// 어부림을 지나/ 수평선으로 멀리 나갔다가/ 조난 당한 선편과/ 다시 기운 투망/ 난파된 밀수선에서 밀려온 밀어와/ 바닷바람에 쩔은 바다 사람들의/ 걸걸힌 말투/ 소금 내음새// 갈매기 깃에 펄럭이는/ 일몰의 바다/ 관능의 춤을 추는 바다/ 둥 둥 두둥 둥 둥/ 푸른 치맛자락 내둘리며/ 흰 살결 속을 들내지 않고/ 덩실덩실 원시의 춤을 춘다/ 그때 나의 본능은 살아/ 하얀 골편이 떠오르는/ 외양에서 돌아온다// 만선이 못 된 뱃전에서 바라보면/ 넋처럼 피는 저녁 노을/ 오색찬연한 몇 마리의 열대어/ 그들의 마지막 항의/ 해질 녘 나의 투망에 걸린/ 이 몇 마리의 파닥임을// 서천엔 은하/ 은하직녀의 손 가락가락/ 밤바다를 두드리고 있다/ 해면에 흐르는 어부사/ 칠흑 만 길 해곡에까지/ 그곳에 흐르는 어군/ 물 가르며 물 가르며/ 나의 의식을 흔들고 있다// 나의 곁을 지나는 어선의/ 휘파람 소리....../ 휘익휙 나의 허전한 귀항을/ 풀 이파리처럼 흔들고 있다만// 찢겨진 투망을 걷어 올리며/ 닻을 내리는 나의 의식은/ 찬란한 어군의 흐름 따라/ 싱싱한 생선의 노랫가락을 그려/ 다시 투망을 드리운다/ 가장 신선한 새벽 투망을!//

난타 / 홍해리
양철집을 짓자 장마가 오셨다/ 물방울 악단을 데리고 오셨다/ 난타 공연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빗방울은 온몸으로 두드리는 하늘의 악기/ 관람하는 나무들의 박수소리가 파랗다/ 새들은 시끄럽다고 슬그머니 사라지고/ 물방울만 신이 나서 온몸으로 울었다/ 천둥과 번개의 추임새가 부서진 물방울로/ 귀명창 되라 귀와 눈을 씻어주자/ 소리의 절벽들이 귀가 틔여서/ 잠은 물 건너가고 밤은 호수처럼 깊다/ 날이 새면 저놈들은 산허리를 감고/ 세상은 속절없는 꿈에서 깨어나리라/ 깨어지면서 소리를 이룬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물의 집에 고기를 기르려니,// 방송에선 어디엔가 물난리가 났다고/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다/ 약수若水가 수마水魔가 되기도 하는 생의 변두리/ 나는 지금 비를 맞고 있는 양철북이다.//

비 그친 오후 -선연가嬋娟歌 / 홍해리
집을 비운 사이/ 초록빛 탱글탱글 빛나던 청매실 절로 다 떨어지고/ 그 자리/ 매미가 오셨다, 떼로 몰려 오셨다// 조용하던 매화나무/ 가도 가도 끝없는 한낮의 넘쳐나는 소리,/ 소낙비 소리로,/ 나무 아래 다물다물 쌓이고 있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한평생을 노래로 재고 있는 매미들,/ 단가로 다듬어 완창을 뽑아대는데, 그만,/ 투명한 손수건이 '하염없이 또 젖고 젖어,// 세상 모르고/ 제 세월을 만난 듯/ 쨍쨍하게 풀고 우려내면서/ 매미도 한철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비 그친 오후/ 일제히 뽑아내는 한줄기 매미소리가/ 문득/ 매화나무를 떠 안고 가는 서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심봉사 눈 뜨는 소리로 연꽃이 열리고 있다/ 얼씨구! 잘한다! 그렇지!/ 추임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둥근잎나팔꽃 / 홍해리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 / 홍해리
겨우내 성찰한 걸 수화로 던지던 성자 매화나무/ 초록의 새장이 되어 온몸을 내어 주었다/ 새벽 참새 떼가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다 가고/ 아침 까치 몇 마리 방문해 구화가 요란하더니/ 나무속에 몸을 감춘 새 한 마리/ 끼역끼역, 찌익찌익, 찌릭찌릭! 신호를 보낸다/ ‘다 소용없다, 하릴없다!’ 는 뜻인가/ 내 귀는 오독으로 멀리 트여 황홀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데/ 고요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잎의 배/ 죄 되지 않을까 문득 하늘을 본다/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입술들, 혓바닥들/ 천의 방언으로 천지가 팽팽하다, 푸르다/ 나무의 심장은 은백색 영혼의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언어의 자궁인 푸른 잎들/ 땡볕이 좋다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파다하니 뱉는 언어가 금방 고갈되었는지/ 적막이 낭자하게 나무를 감싸안는다/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탱탱한 열매 몇 알/ 적멸로 씻은 말 몇 마디 풀어내려는지/ 푸른 혓바닥을 열심히 날름대고 있다/ 바람의 말, 비의 말, 빛의 말들/ 호리고 감치는 품이 말끔하다 했는데/ 눈물에 젖었다 말랐는지 제법 가락이 붙었다/ 그때,/ 바로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화려하게 울고/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가셨다/ 전신마취를 한 듯한, 적요로운, 오후 3시.//

용천사 꽃무릇 / 홍해리
내 사랑은 용천사로 꽃 구경가고/ 혼자 남아 막걸리나 마시고 있자니// 발그림자도 않던 꽃 그림자가/ 해질 임시 언뜻 술잔에 와 그냥 안긴다// 오다가 길가에서 깨 터는 향기도 담았는지/ 열예닐곱 깔깔대는 소리가 빨갛게 비친다// 한평생 가는 길이 좀 외로우면 어떠랴마는/ 절마당 쓸고 있는 풍경 소리 따라// 금싸라기 햇볕이 이리 알알 지천이니/ 잎이 없어도 꽃은 잘 피어 하늘 밝히고// 지고 나면 이파리만/ 퍼렇게 겨울을 나는// 꽃무릇 구경이나 가고픈/ 가을날 한때.//

산수유, 그 여자 / 홍해리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 누이야,/ 네가 그리워 봄은 왔다// 저 하늘로부터/ 이 땅에까지/ 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 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 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눈이 온통 여백으로 빛나는/ 한겨울, 너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아,/ 머지않아 봄은 또 오고 있겄다.//

처녀치마* / 홍해리
철쭉꽃 날개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 처녀치마: 식물의 이름

장미 / 홍해리
빨갛게/ 소리치는/ 저/ 싸 ·늘 ·함.//

유채꽃 / 홍해리
내가 쓰는 글마다/ 하나같이 노란 연서 같다/ 성산일출 바다가 풀어놓는 물감보다/ 시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노랗다/ 어쩌자고/ 제주 현무암처럼/ 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가/ 봄이 오면.//

할미꽃 / 홍해리
생전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한/ 삶이었으니/ 죽어서도 여전하구나/ 있을 때 잘해! 라고 말들 하지/ 지금 여기가 극락인 줄 모르고/ 떨며 사는 삶이 얼마나 추우랴/ 천둥으로 울던 아픈 삶이었기/ 시린 넋으로 서서/ 절망을 피워 올려 보지만/ 자줏빛 한숨소리 우레처럼 우는/ 산자락 무덤 위/ 할미꽃은 고갤 들지 못한다/ 이 에미도 이제/ 산발한 머리 하늘에 풀고 서서/ 훨훨 날아가리라, 할미꽃.//

명자꽃 / 홍해리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하눌타리 / 홍해리
노화도 바닷가/ 갈대는 없고/ 반쯤 물에 뜬/ 2층 찻집,/ 꿈 속으로 갈앉고 있는/ 건너편 보길도 적자산/ 보랏빛 그리메,/ 목포행 삼영호/ 뿌연 뱃고동/ 뿌우 뿌우/ 바닷안개 속으로 울고/ 까맣게 탄 사내애들이/ 물 위로 물 위로/ 안개꽃을 피워 올리며,/ 하눌타리/ 천화분을 뿌리에 싣고/ 젖고 있는/ 한낮의 목마름.//

배꽃 / 홍해리
1/ 바람에 베어지는 달빛의 심장/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불꽃이네/ 호르르 호르르 찰싹이는 은하의 물결.// 2/ 천사들이 살풀이를 추고 있다/ 춤 끝나고 돌아서서 눈물질 때/ 폭탄처럼 떨어지는 꽃이파리/ 그 자리마다 그늘이 파여……// 3/ 고요가 겨냥하는 만남을 위하여/ 배꽃과 배꽃 사이 천사의 눈짓이 이어지고/ 꽃잎들이 지상을 하얗게 포옹하고 있다/ 사형집행장의 눈물일지도 몰라.// 4/ 배와 꽃 사이를 시간이 채우고 있어/ 배꽃은 하나지만 둘이다/ 나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시간은 존재 사이에 그렇게 스민다.//

서향瑞香 -화적花賊 / 홍해리
꽃 중에서도 특히 이쁜 놈이 향기 또한 강해서/ 다른 놈들은 그 앞에서 입도 뻥끗 못하듯,/ 계집 가운데도 특히나 이쁜 것들이 있어서/ 사내들도 꼼짝 못하고 나라까지 기우뚱하네.//

헌화가獻花歌 / 홍해리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이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냇가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이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아름다운 남루 -산수유 / 홍해리
잘 썩은 진흙이 연꽃을 피워 올리듯/ 산수유나무의 남루가/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을 솟구치게 한/ 힘이었구나!/ 누더기 누더기 걸친 말라빠진 사지마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잘잘 피어나는 꽃숭어리/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리/ 노랗게 환청으로 들리는 봄날/ 보랏빛 빨간 열매들/ 늙은 어머니 젖꼭지처럼, 아직도/ 달랑, 침묵으로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시멘트 아파트 화단/ 초라한 누옥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이 막막한 봄날/ 누덕누덕 기운 남루가 아름답다.//

개나리꽃 / 홍해리
그대는/ 땅 속의 사금가루를 다 모아/ 겨우 내내/ 달이고 달이더니,// 드디어/ 24금이 되는 어느날/ 모두 눈감은 순간/ 천지에 축포를 터뜨리었다.// 지상은 온통 금빛 날개/ 종소리 소리……/ 순도 100%의 황홀/ 이 찬란한 이명이여.// 눈으로 들어와/ 귀를 얼리는/ 이 봄날의 모순을/ 누구도 누구도 어쩌지 못하네.//

조팝나무꽃 / 홍해리
숱한 자식들/ 먹여 살리려/ 죽어라 일만 하다/ 가신/ 어머니,// 다 큰 자식들/ 아직도/ 못 미더워/ 이밥 가득 광주리 이고/ 서 계신 밭머리,//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꽃 무릇 천지 / 홍해리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 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 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나는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달개비 꽃 / 홍해리
마디마디/ 정을 끊고/ 내팽개쳐도,// 금방/ 새살림 차리는/ 저 독한 계집.// 이제는/ 쳐다보지도,/ 말도 않는다고// 말똥말똥 젖은 눈/ 하늘 홀리는/ 저 미친 계집.//

無花果 / 홍해리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백목련 날다 / 홍해리
영혼이 맑으면 날 수 있다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린 소녀/ 땅 위에 사뿐 앉았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얼굴이 흰 소녀는 수많은 꽃등을 들고/ 여학교 화단가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목련나무는/ 서늘한 불길에 싸여/ 환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적아소심赤芽素心 / 홍해리
세상 오다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비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떠돌다/ 몸 바꾸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걸어오다 뛰어오다 도망치다/ 다시 달라붙기도 하네/ 번개도 치지 않고 천둥도 울지 않고/ 사냥개처럼 하늘이 젖어도/ 그대의 행성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우기의 구름 사이, 문득/ 적아소심이 푸른 하늘처럼 잠을 깼다는/ 삽상한 소식이 귓속에 찬란히 피네/ 그리운 심정으로 꽃대를 올려/ 슬픔 같은 꽃잎으로 가을날을 밝히니/ 눈 마주치기도 두려우리, 그대여/ 부드러운 물칼 같은 혓바닥으로/ 우주의 초연한 질서를 노래하는/ 꽃 속으로 천리를 가면/ 적멸보궁 지붕 끝이 보이리.//

자란紫蘭 / 홍해리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가슴속으로 타는/ 불꽃의 교태// 심장을 다 짜서/ 혓바닥으로 핥고// 하늘에 뿜어 올렸다/ 다시 초록으로 씻어// 피우는 고운 불꽃/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현기증이 인다.//

蘭詩 1 -타래난초 / 홍해리
천상으로 오르는/ 원형 계단// 잔잔한/ 배경 음악// 분홍빛/ 카피트// 가만가만 오르는/ 소복의 여인// 바르르 바르르/ 떨리는 숨결.//

난잎 질 때 / 홍해리
곧던 잎 점점 휘어지고/ 검푸르던 빛깔 누렇게 변해/ 마침내 똑! 떨어질 때// 저 하늘의 작은 별/ 깜빡! 하며/ 마지막 숨을 놓는다// 광대무변의 세상 점 하나 지워지고/ 한 순간/ 눈물 방울 하나 갸우뚱한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지구는 돌고/ 그렇다, 권위도 순서도 없는/ 죽음이란 분명한 사실일 뿐//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그랬듯이/ 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손자도 그럴 것이듯// 눈물도 이슬처럼 햇빛 속에 숨고/ 자신이 몸을 낮추어/ 울음으로 찰나의 집 한 채 짓는다.//

담쟁이의 길 / 홍해리
길이라곤 오직 벽뿐이어서/ 아니면 살아있는 나무들이라서/ 담쟁이는 타고 오를 수밖에 없다/ 밤낮없이 수직으로 기어가는 길/ 높을수록 바람은 거세지만/ 타고 오르는 힘은 더욱 푸르다/ 하늘이 머리 위에 있으니/ 숨차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바람아 불어라/ 흔들리는 하늘길/ 홀로 가는 곳/ 길은 늘 시작이다/ 끄트머리는 끝의 머리이기 때문/ 입때껏 바람결은 부드러웠지만/ 벽이란 것은 쩌개지고/ 나무는 눈바람에 깎이기 마련/ 담쟁이는 맨발이라서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너도 맨 정신이면/ 하늘에 닿을 수 있으리라/ 느릿느릿 천천히 맨발로 가거라/ 아득한 끄트머리를 위하여/ 그러나 벽아 나무야/ 너를 타고 오르는 내가 미안하다//

설중매(雪中梅) / 홍해리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 트네/ 몇 생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緣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꽃 지는 날 / 홍해리
마음에 마음 하나/ 겹치는 것도 버거워라// 누가 갔길래/ 그 자리 꽃이 지는지// 그림자에 꽃잎 하나/ 내려앉아도// 곡비 같은 여자 하나/ 흔들리고 있네.//

지는 꽃에게 묻다 / 홍해리
지는 게 아쉽다고 꽃대궁에 매달리지 마라/ 고개 뚝뚝 꺾어 그냥 떨어지는 꽃도 있잖니/ 지지 않는 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 과거로 가는 길 그리 가까웁게 끌고 가나니/ 너와의 거리가 멀어 더욱 잘 보이는 것이냐/ 먼 별빛도 짜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냐.// 홍시 / 홍해리
밤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섬 마을 가시버시 금슬이 좋아// 바다 위에 노는 달/ 물 속 달 안고// 물결 따라 일렁이다/ 흐물히 젖어// 단내 나는 붉은 해/ 금방 밀어 올리겠네// 홍시 한 알, 뚝!/ 떨어지겠네.//

토란잎에 이슬방울 / 홍해리
한 치 앞까지 가리던 낙월도 안개/ 저기 있네// 물 꽃을 피우던 뜨거운 파도와 폭포/ 거기 있네// 아슬아슬 눈에 밟히는 슬픈 사랑/ 여기 있네// 수정처럼 빛나는 동그마한 우주/ 저기 있네.//

찔레꽃 / 홍해리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 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독종毒種 / 홍해리
1/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2/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4/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

오죽烏竹 / 홍해리
빈 가슴속/ 천년 세월을 담아/ 노래의 집을 엮네// 마디마디/ 시커멓게 멍이 들고/ 온몸이 까맣게 타도// 귀 靑靑히 열고/ 푸르게 푸르게/ 서는// 초겨울/ 대밭의/ 피리 소리여!//

죽죽竹竹 / 홍해리
하늘바다 헤엄치는 저 은린들아/ 이쁜 눈썹 푸르게 반짝이거라/ 눈짓으로나 또는 몸짓으로나/ 여긴 달 뜬 세상 꿈속이어서/ 귀에 가득 반짝이는 저 이쁜 것들이/ 한도 끝도 없이 일으키는 파돗소리/ 길 다 지우고 산도 모두 허물어 버려/ 허허벌판 만리 허공 비우고 있구나/ 네 몸의 그늘과 살의 그림자까지도/ 대명천지 아니라도 일색이어서/ 푸른 그리움은 해마다 되살아오고/ 진달래 붉은 산천 꽃이 피어나/ 갈 곳 없는 풍찬노숙 나의 가슴을/ 봄바람소리 흔들어 잠 깨우는구나.//

죽순시학竹筍詩學 / 홍해리
죽순은 겨우내 제 몸속에 탑을 짓는다/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물탑이다/ 봄도 늦은 다음 푸른 비가 내려야 대나무는/ 드디어 한 층씩 올려 탑을 이룬다/ 때맞게 꾀꼬리가 뒷산에 와/ 아침부터 허공중에 금빛 노래를 풀면/ 대나무는 칸칸마다/ 질 때도 필 때처럼 선연한/ 동백꽃이나 능소화 같은 색깔의 소리를 품어/ 드디어 빼어난 소리꾼이 된다.// 숨어 사는 시인이 시환詩丸을 물에 띄우듯/ 대나무는 임자를 만나 소리 한 자락을 뽑아내니/ 산조니 정악이니 사람들은 이름을 붙인다/ 몇 차례 겨울을 지나 대나무가 되고 난 연후의 일이다.//

하늘 밥상 / 홍해리
한밤이면 별이 가득 차려지고/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꿈을 떠 먹는다/ 하늘 열매를, 반짝반짝, 따 먹으며/ 아이들은 잠자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자라고,/나이 들면 허기져도 그냥 사는 걸까/ 꿈이 없는 사람은 빈집/ 추억이 없는 이는 초라한 밥상인데,/ 시인은 생(生) 속에서 꿈을/ 꿈 속에서 별을, 별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 사랑은 영혼의 꽃/ 꿈이 없으면 꽃은 피지 않아/ 아이들은 별에 사는 꿈을 먹고 꽃을 피우는 시인,/ 하늘은 그들의 밥상//

시작 연습詩作鍊習 / 홍해리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한 채// 험란한 바다에서 흔들리다/ 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쓸쓸한 귀항/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시인이여 시인이여 / 홍해리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詩를 찾아서 / 홍해리
일보 일배/ 한평생/ 부처는 없고/ 연꽃 속/ 그림자 어른 거릴뿐.// 풍경소리/ 천릿길/ 오르고 올라/ 절 마당 닿았는가/ 보이지 않네.//

시안詩眼 / 홍해리
한 권의 시집을 세우는 것은/ 시집 속 수십 편의 시가 아니라/ 한 편의 빼어난 시다.// 한 편의 시를 살리는 것은,/ 바로,/ 반짝이는 시의 눈이다.// 스스로/ 빛나는/ 시의 눈빛!// 그 눈을 씻기 위해/ 시인은 새벽마다/ 한 대접의 정화수를 긷는다.//

나는 간다 / 홍해리
시인은 들머리로 들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날머리로 나가면,// 독자는 첫머리부터/ 시를 읽어/ 끝머리에서 마감하느니,// 시는/ 초장 · 중장 · 종장이든/ 기 · 승 · 전 · 결로 완성되느니,// 나는 갈고 또 간다/ 절 · 차 · 탁 · 마의 한 생이 지고/ 한 편의 시가 탄생하도록!//

나에게 묻는다 / 홍해리
詩가, 나에게 묻는다./ 네가, 네가 詩人이냐?/ 네가 쓴 것들이 詩냐?/ 아, 詩들아, 미안하다!/ 아, 詩에게, 부끄럽다!/ 나는, 나는, ......//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 홍해리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명창정궤 / 홍해리
살기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 쓰지 말고,// 죽기 위해/ 잘 죽기 위해,// 쓰고, 또 / 써라.// 한 편 속의 한평생, 인생이란 한 권의 시집을!//

정곡론正鵠論 / 홍해리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꿈 / 홍해리
하늘을 안고/ 땅을 업고/ 무한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도 날아도 제자리였다// 겨울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세상에서 시인이라는/ 수인명패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 비명을/ 치고 있었다 바락바락 발악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날개가 너무 무거웠다.//

수유역 8번 출구 / 홍해리
바람 부는 날/ 나 역에 나가 그대를 맞으리라.// 수유역 8번 출구/ 그대를 처음 만난 곳.//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 나오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한 계절이 그렇게 흐르고/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만 부는 한낮.// 나 그곳에 나가/ 무작정 기다리네.// 바람은 그날처럼 불어오는데/ 그대는 오지를 않네.// 바로 그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5월이 오거든 / 홍해리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가을 들녘에 서서 /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다시 가을에 서서 / 홍해리
샐비어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 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 유리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 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빛/ 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 그미의 손톱이 튀어나와/ 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 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석류꽃처럼 피던/ 그미의 은빛 넋두리가/ 드디어 하늘을 날고 있다/ 이슬을 쫓는 저녁 연기도/ 저문 산천의 으스름으로 섞여/ 꽃잎은 천의 바다를 눈썹에 이고/ 서른하나의 파도/ 허허한 내 오전의 미련을/ 부르르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

빈들 / 홍해리
가을걷이 끝나고/눈 시린 하늘 아래 빈들에 서면, 빈들/빈들, 놀던 일 부끄러워라/빈들만큼, 빈들만큼 부끄러워라/ 이삭이나 주우러 나갈까 하는/마음 한켠으로/ 떼지어 내려앉는 철새 떼/ 조물조물 주물러 놓은 조물주의 수작들!//

구멍 / 홍해리
호수가 꽝꽝 얼어붙어도/ 한 옆엔 얼지 않는 구멍이 있다/ 물고기들 숨 막힐까 봐/ 발딱발딱 숨쉬는 구멍이 있다//

여자 1 / 홍해리
너는/ 차가우나/ 따스하게 어는/ 아이스크림,// 캄캄한 희망이다.// 따스하나/ 차가웁게 녹는/ 아이스크림 너는,// 하이얀 절망이다.//

새벽 세 시 / 홍해리
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 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새벽 그믐달 / 홍해리
팔월 그믐께/ 동쪽 하늘/ 앞가슴 풀어헤친/ 푸른 바다 위// 목선 한 척/ 떠 있다// 어둠 가득 싣고 있다/ 모두 부리고// 쓸쓸함만 싣고 있다/ 모두 내리고// 빈 배가 가고 있다// 별 몇 개 거느리고/ 넉넉한,// 빈배가 더 무거워/ 하늘이 기우뚱,// 중심을 잡고 있는 우주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제 곧 적막에 닿으리라.//

하현下弦 / 홍해리
초겨울 호수 아래/ 깊은 잠 속/ 물고기 한 마리/ 반짝/ 얼음장 위로 뛰어올랐다.// 머릿속에 밤새 반짝이던/ 시 한 편/ 번뜩/ 눈을 뜨는/ 시월 스무사흘 새벽,// 날빛을 세운 채/ 또랑또랑 눈뜨고/ 떠 있는/ 하늘바다의 눈썹/ 냉염冷艶함이라니!//

개운開雲 / 홍해리
매화가 피었어도/ 눈으로도/ 귀로도 향기를 맡을 수 없더니/ 병원에서 돌아오자/ 꽃은 이미 다 지고/ 꽃이 있던 자리/ 쥐눈이 콩만한 열매/ 가녀린 탯줄에 매달린 아기처럼/ 조롱조롱 맺혀 있다/ 초록빛 앙증맞은 눈빛을 찾아/ 내가 건너뛴 시간의/ 간극間隙.// 개운하다, 풋사랑!//

먹통 사랑 / 홍해리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 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그리움을 두고 / 홍해리
가을이 깊어지면/ 마음의 거문고 줄을 적시다/ 세상에 귀를 열어 보라/ 꽃 지고 난 사이 허공길 걸어/ 내 갈 곳 어디런가/ 저린 삭신 풀어 놓고/ 눈뜨고 자며 뒤척이다가/ 속내 감춘 한줄기 바람/ 꿈꾸며 가다 숨길 멈춘 곳/ 시리리시리리 시리다 우는/ 천지간에 지천인 풀벌레소리/ 이미 한세상 내디딘 걸음/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것이 우리의 밥술인 것을/ 손톱 반달 만한 그리움도 있어.//

그리움을 위하여 / 홍해리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 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밤은 시를 쓸 것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 n빛 소쩍새 울음.// 보리 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삘기풀 찔레꽃의 평활 위하여/ 이 묵은 시간 거리의 떠남을 위하여.//

부드러움을 위하여 / 홍해리
물이랑 연애하고 싶다/ 물 가르는 칼이고 싶다// 이슬아침 댓잎에 맺힌 적요로/ 빛나는 물이 스미듯이 자르는,// 칼에 베어지기 전의 작은 떨림/ 그 푸른 쓸쓸함 한 입 베어 물고,// 길 지우는 배경 물로 살아나듯/ 칼 지우는 투명한 물이고 싶다.//

노을 / 홍해리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낙엽 편지 / 홍해리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이 가벼움으로/ 세월에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生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평생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 눈썹 위에// 바람이 잔다.//

늦가을 / 홍해리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단순한 기쁨 / 홍해리
나이 들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희미해져도,// 보이는 것이 더 많고/ 들리는 것이 더 많네.// 둔해지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많은,// 이 투명한 세상!// 살아 있다는/ 단순한,// 이/ 기쁨.// 마음이 도둑이다 / 홍해리
비운다 비운다며 채우려 들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들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으려 들고/ 먹지 못할 것까지 먹으려 들고/ 해서 안될 말까지 하려고 드는/ 요놈의 미운 마음, 도둑이구나!//

물건 / 홍해리
은화를 기르던 풋고추가/ 검붉은 색깔로 변하고/ 다시 시뻘건 물건으로 변화하면/ 은화가 금화로 바뀌었지/ 오줌 쏘기로 기선을 잡던 시절/ 멀리쏘기와 높이쏘기의 힘과 기술을 익혀/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는 만복의 중심/ 마침내 좆이 되었다/ 기적소리 기척도 없는 칠흑의 동굴로/ 열차는 기름 먹은 몸으로 달려가다/ 번개 치고 천둥 울고 벼락 때리는/ 불 속으로 뛰어들면/ 새벽을 깨우는 소방차 소리 요란했다/ 나의 보석 같은 대리석 기둥/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푸른 바다를 홀로 항해하는 일등 항해사의/ 돛대였다/ 살면 서고 죽으면 줄어드는/ 이 은밀한 생명의 신비여/ 검붉은 청동빛 기둥에 새겨진 비명碑銘/ 비명소리만 늘 요란했지 별것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라/ 살아 있다는 것은 늘 요란한 것/ 살고 죽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다/ 무슬(玄酒) 삼천 사발을 마시고 나면.//

바다에 홀로 앉아 / 홍해리
도동항 막걸리집 마루에 앉아/ 수평선이 까맣게 저물 때까지/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다봅니다/ 두 눈이 파랗게 물들어/ 바다가 될 때까지/ 다시 수평선이 떠오를 때까지.//

바다와 詩 / 홍해리
난바다 칠흑의 수평선은/ 차라리 절벽이어서/ 바다는 대승大乘의 시를 읊는데/ 나는 소승小乘일 수밖에야/ 죽어 본 적 있느냐는 듯 바다는/ 눈물 없는 이 아름다우랴고/ 슬픔 없는 이 그리워지랴고/ 얼굴을 물거울에 비춰보라 하네.// 제 가슴속 맺힌 한/ 모두어 품고 아무 일도 없는 양/ 말 없는 말 파도로 지껄일 때/ 탐방탐방 걸어나오는 수평선/ 밤새껏 물 위에 타던 집어등/ 하나 둘 해를 안고 오는 어선들/ 소외도 궁핍도 화엄으로 피우는/ 눈 없는 시를 안고 귀항하고 있네.//

겨울바다에 가서 / 홍해리
세월이 무더기로 지는/ 겨울바다/ 아득한 물머리에 서서// 쑥대머리/ 하나/ 사흘 밤 사흘 낮을/ 이승의 바다 건너만 보네// 가마득하기야/ 어디/ 바다뿐일까만// 울고 웃는 울음으로/ 빨갛게 타는/ 그리운 마음만 부시고/ 파도는 바다의 속살을 닦으며/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고나는데---// 까마아득하기야/ 어찌/ 사랑뿐일까 보냐.//

봄바람 속에 / 홍해리
겨울바람 속에는 날카로운 솜방망이가 들어 있다/ 두억시니/ 어처구니/ 칼 찬 사내들 말발굽소리 대지를 가르지만/ 미나리꽝 얼음장 밑 푸른 미나리/ 살 오르는 소리 들어 보아라// 봄바람 속에는 부드러운 칼이 들어 있으니/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너/ 눈에 빠지며 엎어지며 불원천리 찾아왔다/ 기다린다는 것은/ 살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환장의 세월이었지// 남은 겨울의 꼬리를 가차없이 잘라내려고/ 겨우내 부드럽게 칼을 갈았다/ 봄비는 조용히 울어 눈물로 겨울을 씻어내며/ 역습해 오는 꽃샘바람을 수비하기 위하여/ 비수를 가슴에 품는 것이니/ 봄바람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문자를 보라// 봄이라고 바람 분다 봄바람 분다/ 봄바람 봄바람 바람이 분다.//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 홍해리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을 빛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영혼의 사리 / 홍해리
눈물이 얼마나 단단한 강철인가/ 아는 이는/ 죽음이 얼마나 편안한 꿈인가를/ 알 수 있으리// 온 길을 되짚어 가는 일도/ 때로는 절벽 어둠의 길/ 평정의 봉긋한 봉분을 짓고/ 대지를 한 벌의 수의로 삼아// 갈대들이 흔드는 발마소리/ 강을 건너 억새밭을 오르는/ 달도 이울어 밤이 오면/ 고요로운 휴식의 품으로// 꺼이꺼이/ 되돌아갈 일이네/ 이 청정한 가을날/ 눈물 같은 하늘 아래.//

옐레나 이신바예바 / 홍해리
하늘 높이 떠밀어 준 장대를/ 슬쩍,/ 놓는 순간// 한 마리 새가 되어// 바르르 떠는 난초잎 같은/ 천평선天平線을 넘어// 허공으로// 날개 없는 새는 추락하지만/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른다//

주현미 / 홍해리
한탄강으로 가는 직행버스/ 초가을 맑은 날// 카셋테입은 돌고 돌아/ 죽어 있던 관능이 터져 나왔다// 전신으로 비늘을 반짝이며/ 사내들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간드러지게/ 간드러지게// 간지럼을 먹이면서, 퍼들퍼들/ 몸을 비비꼬며 꼬리를 쳤다, 타닥 탁!// 어릴 적 개울의 송사리 떼/ 고추를 건드렸다, 톡톡,// 앗사앗사/ 깜빡죽기.//

우화羽化 / 홍해리
바닥을 본 사람은/ 그곳이 하늘임을 안다/ 위를 올려다보고/ 일어서기 위해 발을 딛는 사람은/ 하늘이 눈물겨운 벽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아오를 허공임을, 알고/ 내던져진 자리에서/ 젖은 몸으로/ 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 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

은자의 북 / 홍해리
나의 詩는 북, 은자의 북이다/ 삶의 빛과 향으로 엮는/ 생명의 속삭임과/ 격랑으로 우는,// 북한산 물소리에 눈을 씻고/ 새소리로 귀를 채워/ 바람소리, 흙냄새로 마음 울리는/ 나의 시는 북이다, 隱者의 북.//

자화상 / 홍해리
내 몸에 흐른 강이 몇 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몇 개/ 이마에 매달린 납덩이가 몇 개/ 가슴 속 갈매기 깃발이 몇 개/ 털 빠진 기회의 꼬리가 몇 개/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눈썹이 몇 개/ 아, 무엇이 무엇인가 무엇이 몇 개.//

절정을 위하여 / 홍해리
조선낫 날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 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윗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중복 / 홍해리
한낮/ 들녘 파아란 하늘/ 미루나무 이파리/ 환상의 구름장을 몰아다/ 등줄기에 쏟는/ 소나기/ 쏴아하아,/ 매미 소리여.//

찬란한 세상 / 홍해리
소리는 귓속에 집을 짓지만/ 귓속에 들어가 보면/ 소리는 하나도 없다/ 사랑은 사람소리/ 떡에는 떡메소리/ 엿장수는 가윗소리/ 파도는 물소리를 소유하지만/ 모두 다 비웠을 때/ 비로소/ 소리의 집은 소리로 차서/ 소라껍데기 같은 이 귀가 빛난다/ 비어 있는 여자들의 소리는 귀에서 나와/ 이 세상을 찬란히 채운다.//

첫눈 / 홍해리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청명(淸明) / 홍해리
손가락만한 매화가지/ 뜰에 꽂은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니/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발자국 떼지 못하고/ 청맹과니/ 멍하니 서 있는데/길을 밝히는 소리/ 천지가 환하네.//

추상 / 홍해리
할 일 다한 밤나무 꽃이삭/ 공중에서 교미를 마친 수벌처럼/ 숭얼숭얼 떨어져 땅에 누웠다/ 밤느정이 세상사 부질없다고/ 이별이야, 님과 나의 이별이야/ 이리저리 얽혀 응어리진 매듭/ 마지막 혼불로 풀고 있는 것인가/ 온몸이 꽃으로 무너져내린 사내/ 여장한 사내/ 푸른 치마 꺼꾸로 입고 그린/ 추상화 한 폭/ 밤늦게 홀로 돌아오는 길/ 대낮 같이 밝은 오월 보름날/ 느정느정 솔지 않은 희망이여/ 파란과 만장인 生의 만날이었던가/ 한 치 건너 두 치인 세상/ 달빛이 밤늦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 땅 위에 그린 밤늦의 추상화를.//

춤 / 홍해리
나비의 꿈을 엮다/ 나비가 되는 일/ 노래를 엮다/ 노래가 되고/ 학을 흉내내다 학이 되는 일// 사위 속에 멈추고/ 정지 중에 이어지는/ 찰나와 영원/ 솟구치고 가라앉는/ 흐름과 멎음// 물소리 그러하고/ 바람소리 그러하고/ 불길이 모여/ 빛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이 순간// 영원을 타고 앉아/ 손끝에 피워 내는/ 꽃 한 송이/ 빙그르르/ 도는/ 우주.//

푸른 유곽 -아카시아 / 홍해리
오월이 오고/ 아카시아 초록 물이 올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유백색 향기/ 검은 스타킹의 서양 계집애들/ 쭉쭉 뻗은 다리/ 늘어진 꽃숭어리 숭어리/ 댕그랑댕그랑/ 지독한 그리움에 흔들흔들/ 눈 맑고 귀 밝은 조선 사내들/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 점령군 같은,/ 게릴라 같은/ 천하의 무서운 사내들/ 부산한 발자국 소리/ 요란한 거리, 거리/ 질펀한 사랑/ 어질어질 어지러운/ 오오, 저 진동하는 단내/ 흐드러진 푸른 유곽의.//

하루살이 / 홍해리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천년이니/ 하루 살이가 얼마나 멀고 무거우랴./ 먹지도 않고/ 똥도 싸지 않고/ 하루 종일 날기만 하다/ 알만 까고 죽는다./ 날개가 다 타서/ 더는 잉잉대며 날 수 없을 때/ 우주의 천년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하루에 천년,/ 천리를 가는 것이 부끄러워/ 미치도록 떼지어 나는/ 저 하루살이 떼!//

하얀 고독 / 홍해리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 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 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 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해질 녘 / 홍해리
꽃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팽팽하다/ 서늘한 그늘에서도/ 어쩌자고 몸뚱어리는 자꾸 달뜨는가// 꽃 한 송이 피울 때마다/ 나무는 독배를 드는데/ 달거리 하듯 내비치는 그리운 심사// 사는 일이 밀물이고 썰물이 아니던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세상/ 하늘과 땅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저물어 막막해지는/ 꽃 그늘 해질 녘의 풍경소리!//

황태의 꿈 / 홍해리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샌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 가는 몸 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흔적 / 홍해리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산책 / 이해리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가벼운 바람 / 홍해리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 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 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 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우리들의 말 / 홍해리
거리를 가다 무심코 눈을 뜨면/ 문득 눈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에까지/ 검은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끄러운 알몸의 시대/ 그 어둠을 가리우지 못하면서도/ 그 밝음을 비추이지 못하면서도/ 거지중천에서 날아오고 있다/ 한밤을 진땀으로 닦으며 새는/ 무력한 꿈의 오한과 패배/ 어깨에 무거운 죄 없는 죄의 무게/ 깨어 있어도 죽음의 평화와 폭력의 설움/ 눈뜨고 있어도 우리의 잠은 압박한다/ 물에 뜨고 바람이 불리우고/ 어둠에 묻히고 칼에 잘리는/ 나의 시대를/ 우리의 친화를/ 나의 외로움/ 우리의 무예함/ 한 치 앞 안개에도 가려지는 불빛/ 다 뚫고 달려갈 풀밭이 있다면/ 그 가슴속 그 아픔 속에서/ 첫사랑 같은 우리의 불길을/ 하늘 높이 올리며 살리라 한다.//

           저 무한천공으로 / 홍해리

너의 고향은 하늘이었느냐/ 어쩌다 지상으로 추락하여/ 잃어버린 날개로 날아오르며/ 그리움의 향기로 꽃을 피우느냐/ 해오라비난초 잠자리난초 나비난초/ 제비난초 갈매기난초 방울방울 방울새란/ 병아리난초 나나벌이난초 새우난초/ 닭의 난초여 닭의 난초여 아름다운 네 모습/ 저 무한천공에서 우주와 영혼을 노래하고/ 영원을 향해 날아올라라// 너의 고향은 하늘이었느냐/ 어쩌다 지상으로 추락하여/ 잃어버린 날개로 날아오르며/ 그리움의 향기로 꽃을 피우느냐/ 나비처럼 제비처럼 어여쁜 네 모습/ 해오라비처럼 갈매기처럼 방울새처럼/ 날아오르는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네 모습/ 저 무한천공에서 우주와 영혼을 노래하고/ 영원을 향해 날아올라라/ 날아올라라//


약속 / 홍해리
언제 여행 한번 가자/ 해 놓고// 멋진 곳에 가 식사 한번 하자/ 해 놓고// 봄이 오면 꽃구경 한번 가자/ 해 놓고// 지금은/ 북풍한설/ 섣달그믐 한밤입니다//

후회하면 뭣 하나 / 홍해리
가고 나면/ 모든 게 다 잘못한 일 뿐// 해 준 게 아무 것도 없어/ 미안할 뿐// 해 줄 것도 하나 없어/ 한심할 뿐// 행복하면 그냥 웃지만/ 웃을 일 없으니 웃어야 하는// 검은 머리 파뿌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
  어리석은 병이라고 癡呆라 함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일본에서는 인지기능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으로 인지증認知症이라 한다.
  하루 속히 신약神藥/新藥이 개발되어 치매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를 돌보느라 애쓰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행복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소망해 본다. (홍해리 시인)


제1시집 「치매행」 치매행致梅行 1-150편

다 저녁때 -치매행 1 / 홍해리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 저녁때 /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어린아이-치매행 4 / 홍해리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손톱깎기 –치매행 5 / 홍해리
맑고 조용한 겨울 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깍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주소를 지우다 –치매행 11 / 홍해리
소식을 보내도 열리지 않는 주소/ 아내의 이메일을 지웁니다/ 첫눈은 언제나 신선했습니다/ 처음 주소를 만들 때도 그랬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눈이 사로잡은 아내의 처녀/ 아직도 여운처럼 가슴에 애련哀憐합니다/ 이제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 위/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내 사랑입니다/ 열어보고 또 열어봐도/ 언제부턴지 받지 않는 편지를 쓰는/ 내 마음에 멍이 듭니다.//

가을 하늘 -치매행 28 / 홍해리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팔베개 -치매행 65 / 홍해리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께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집니다/ 마름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고 금세 잠속으로 잠수합니다/ 생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보다가/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편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아내는 부자 -치매행 78 / 홍해리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 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 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천하태평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 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탓 -치매행 80 / 홍해리
난蘭 찾아다니느라 늘 집을 비웠으니/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난에게 남편 빼앗긴/ 주말과부의 가슴이 얼마나 시렸을까//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자정에야 돌아와/ 새벽이면 빠져나가고/ 밤이면 다시 취해 기어서 들어왔으니/ 술에 익사한 남편을 건사하는 아내/ 사는 게 어디 사는 일이었겠습니까// 시 쓴답시고/ 밤낮 시詩답지도 않은 걸 끼적거리며/ 시 쓰는 친구들 불러내 술이나 마셔 댔으니/ 시에게 남편을 내주고 술에게 빼앗기고// 아내는 모든 걸 놓았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내 탓, 내 탓입니다!//

영산홍 한 분 -치매행致梅行 93 / 홍해리
오늘은 아내가 조그만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유치원에서 꽃을 심는 실습을 했나 봅니다/ 활짝 핀 영산홍이 앙징스럽습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데/ 편지 한 장이 가지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나는 이제까지 꽃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때 아내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었지만/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늦둥이 같은 환한 꽃 한 분/ 이제사 꽃거울에 나를 비춰봅니다/ 활짝 핀 꽃이 반짝반짝 웃고 있습니다.//

봄은 몸에서 핀다 -치매행 99 / 홍해리
몸에 뿔이 돋아나면 봄입니다/ 뿔은 불이요 풀이라서/ 불처럼 타오르고 풀처럼 솟아오릅니다/ 연둣빛 버들피리 소리/ 여릿여릿 풀피리 소리/ 속없는 사람/ 귀를 열고 닫을 줄 모르는 한낮/ 봄은 몸에서 피어나는데/ 봄이 봄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꽃이 꽃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자리 -치매행 100 / 홍해리
나는 어디 있는가// 풀벌레 짓은 실로 지은 비단옷 입고/ 수평선 타고 가는/ 금빛 물고기와 노는/ 잠 못 드는 초록빛 영혼으로/ 비 갠 다음 무지개 빛깔로/ 길가 풀꽃 한 송이의 넓이를 차지한/ 하늘만 보이는 감옥/ 천야만야 수직 절벽의 해동청/ 떠 있는 자리// 그곳에 나 있다//

여보 사랑해 -치매행 129 / 홍해리
아내는 어쩌다 나일 꺼꾸로 먹어/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대신 잡아 줄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 얼마큼 가야 길이 보일지/ 하루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바로 이 말/ 나는 그조차 인색한 사내였습니다/ 젊어서 받지 못한 사랑/ 이제 받고 싶어 아내는 조르는 것인가/ 쓰잘머리 없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늘도 내 마음은 열대야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땀만 줄줄 흘립니다/ 이러다 잠을 깨면 하루가 천년입니다/ 삼시 세 끼는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아침 점심 저녁 준비로 분주한 날마다/ 외상말코지도 아닌데 마음만 팍팍합니다./ (외상말코지: 어떤 일을 시키거나/ 물건을 주문할 때 돈을 먼저 치르지/ 않으면 선뜻 해 주지 않는 일)//

애면글면* -치매행 149 / 홍해리
머릿속에 고이 잠든 아내의 영혼/ 깨워서 들어올릴 수 있을까/ 지레가 없는 남편은 지레 속이 터지고/ 가슴속 지뢰밭에 묻혀 있는, 저/ 숱한 불발탄들/ 제풀에 터지지도 못 합니다/ 한평생 두남받은 일 없는 사람/ 어쩌자고 지청구 먹을 짓만 하는지/ 속이 타다 제물에 문드러집니다/ 오늘도 소금엣밥으로 한끼를 때우며/ 하루를 천년처럼 천연세월하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 대목땜하는 날씨로/ 창밖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래도 내 마음계곡은 텅 비어 있어/ 바람은 제바람에 우름우름 웁니다/ 사람이 많으면 길이 열린다지만/ 단 둘이 낑낑대는 우리 집은/ 가을철 물웅덩이 올챙이처럼/ 애면글면 애면글면/ 애이불비 애이불비 혼자 놉니다.//
* 애면글면: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제2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 치매행致梅行 151-230편
해질녁 -치매행 151 / 홍해리
아내는 자유의 나라에서/ 놀고 있는데,// 작달비 내리 퍼붓는/ 해질녁// 너덜겅길/ 비틀비틀 걸어가는// 사내 하나/ 등이 굽고 어깨가 처진.//

소일거리 –치매행 164 / 홍해리
나 심심할까 봐/ 아내는 부러 일을 만든다/ 이런저런 잔일로 내 잔일殘日이 바쁘다// 보물찾기하듯/ 빈틈이 움켜쥐고 있는 휴지뭉텅이도 찾아내고/ 여기저기 그려논 벽화도 지우며/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오늘도 날이 저물고/ 몸은 콩가루처럼 피곤하다/ 삶이란 네가 나를 삶고/ 내가 너를 지지고 볶는 것 아닌가,/ 아닌가// 맛이 간 내 생生의 어느 날/ 꿈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별이 반짝일지 모르지만/ 도남圖南의 날개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願 - 치매행 169 / 홍해리
배고프면/ 밥 먹자 하고,// 아프면/ 병원 가자는,// 말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걱정 없겠다/ 정말 좋겠다.//

자식들에게 -치매행 218 / 홍해리
어느 날/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있다고/ 놀라지 말 일이다// 세상이 다 그렇고/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말이 없다고/ 놀라지 마라/ 이미 말이 필요 없는 행성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았으니/ 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천지가 경련을 해도/ 그리워하지 마라/ 울지 말거라// 유채꽃 산수유꽃 피면/ 봄은 이미 나와 함께 와 있느니.//

제3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치매행致梅行 231-330편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詩답잖은 허섭스레기를 끼적거리느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아내는 홀로 매화의 길을 가고 있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 2018년 가을에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 세란헌洗蘭軒에서, 洪海里 적음.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치매행 231 / 홍해리
나이 든 사내/ 혼자 먹는 밥.// 집 나간 입맛 따라/ 밥맛 달아나고,// 술맛이 떨어지니/ 살맛도 없어,// 쓰디쓴 저녁답/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만찬 -치매행 237 / 홍해리
삶은 감자 한 알/ 달걀 한 개/ 애호박 고추전 한 장/막걸리 한 병// 윤오월 초이레/ 우이동 골짜기/ 가물다 비 듣는 저녁답/ 홀로 채우는 잔.//

꽃과 별 -치매행 240 / 홍해리
꽃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이 있는가/ 별을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꽃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별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아낸 꽃을 쳐다보면서 꽃을 보지 않고/ 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별을 보지 않고// 지상에 꽃이 피어야 하늘엔 별이 뜨고/ 내가 봐야 꽃도 피고 별도 뜨는 것이니// 아내도 한 때는 향기로운 꽃이었고/ 내 어둔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세월이 약이 될까 -치매행 261 / 홍해리
철석같은 약속도/ 세월이 가면 바래지고 만다/ 네가 아니면 못산다 해놓고/ 너 없어도 잘만 살고 있느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세월이 좀먹고 세월없을 때도/ 되는 일은 되는 세상// 세월을 만나냐 독이 약이 될까/ 색이 바래듯 물이 바래듯/ 세월이 약이 될까, 몰라//

죄받을 말 -치매행 262 / 홍해리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거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자꾸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이제 그만 -치매행 267 / 홍해리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 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침묵의 나라 -치매행 281 / 홍해리
뭐라 하면 알아듣는 것인지/ 눈을 끔벅끔벅 깜박이다 감아 버립니다// 나를 원망하는 것인지/ 내가 불쌍하다, 한심하다는 것인지// 종일 말 한마디 없는/ 아내의 나라는 대낮에도 한밤중입니다// 말의 끝 어디쯤인가/ 달도 오르지 않고 별도 반짝이지 않는// 그곳을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인가/ 오늘도 아내는 말 없는 말로 내게 속삭입니다//

초겨울 풍경 -치매행 283 / 홍해리
말 없는 나라로부터 소식이 올까/ 혹시나 하지만 온종일 대답도 없고// 바람에 슬리는 낙엽, 낙엽/ 나겹나겹 낮은 마당귀에서 울고 있다// 내 마음 앞자락까지 엽서처럼 날아와서/ 그리움만 목젖까지 젖어 맴돌고 있지만// 마음만, 마음만 저리고 아픈 날/ 솟대 하나 하늘 높이 푸르게 세우자// 여린 날갯짓으로 당신이 날아온다면/ 나도 비인 가슴으로 기러기 되어// 무작정 당신 곁에 가 앉아 있으리/ 하염없이 지껄이는 지아비 되리//

무심중간 -치매행 330 / 홍해리
새벽에 잠을 깨는/ 적막 강산에서/ 남은 날/ 말짱 소용없는 날이 아니 되도록/ 깨어 있으라고/ 잠들지 말라고/ 비어 있는 충만 속/ 생각이 일어 피어오르고/ 허허 적적/ 적적 막막해도/ 달빛이 귀에 들어오고/ 바람소리 눈으로 드니/ 무등, / 무등 좋은 날!//

제4시집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 치매행致梅行 331-421편
인지증認知症 -치매행 334 / 홍해리
세상에 속상한 일 한둘인가 어디/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이 되다니/ ‘나’를 어디 두고 이리 헤매는가/ 환한 이쪽을 두고/ 어찌 어둡고 칙칙한 그쪽에서/ 홀로 가고 있는가, 아내여!//

​시를 찍는 기계 -치매행 346 / 홍해리
“마누라 아픈 게 뭐 자랑이라고/ 벽돌 박듯 시를 찍어내냐?”/ 그래 이런 말 들어도 싸다/ 동정심이 사라진 시대/ 바랄 것 하나 없는 세상인데/ 삼백 편이 넘는 허섭스레기/ 시집『치매행致梅行』1, 2, 3집/ 아내 팔아 시 쓴다고/ 욕을 먹어도 싸다 싸/ 나는 기계다/ 인정도 사정도 없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무감동의 쇠붙이/ 싸늘한 쇳조각의 낡은 기계다/ 집사람 팔아 시를 찍어내는/ 냉혈, 아니 피가 없는/ 부끄러움도 창피한 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시를 찍는 기계다, 나는!//

치매 -치매행 391 /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흰 그림자 -치매행 392 / 홍해리
아내가 하얀 옷을 입고 가고 있었다.// 빛나는 흰빛, 그림자도 뵈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로 가고 있었다.// 기해년 정월 그믐 경칩의 새벽이었다.//

애절哀切 -치매행 410 / 홍해리
삼 년을 홀로 누워// 미완의 삶을 잇는// 아내의 눈빛// 내 가슴에 그냥 박히는// 천의 화살!//

 



홍해리(洪海里) 시인
1942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洪峰義.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집 『투망도』를 내어 등단했다.

시집 『투망도』 『화사기』 『무교동』 『우리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홍해리 시선』 『대추꽃 초록빛』 『청별』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한 슬픔』 『애란』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우리詩> 주간

 

 

洪海里 시인의 집 <세란헌洗蘭軒>

시는 언어의 금빛 화살, 독자의 가슴에 꽂혀 파르르 떨어야 한다.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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