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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강빈 시인

부흐고비 2021. 11. 4. 08:11

독작(獨酌) / 임강빈
주량이 얼마냐고 물으면/ 좀 한다고 겸손을 떨었다// 세상 한구석에서/ 대개는 외로워서 마셨다// 몇 안 되는 친구가 떠났다/ 그 자리가 허전하다// 거나하게/ 정색을 하며 마신다// 독작 맛이 제일이라 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 마신다//

혼자 마시기 / 임강빈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기까지는/ 꽤나 긴 연습이 필요하다./ 독작이 제일이라던/ 어느 작가의 생각이 떠오른다./ 외로워서 마시고/ 반가워서 마시고/ 섭섭해서/ 사랑해서/ 그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 혼자 마시는 술이/ 제일 맛이 있단다./ 빗소리 간간이 뿌리면 더욱 간절하다 한다./ 생각하며 마실 수 있고/ 인생론과 대할 수 있고/ 아무튼 혼자서 마시는 맛/ 그것에 젖기까지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항아리 / 임강빈
크고 작은 숱한 항아리 옆/ 민들레가 피었다// 솔 한 그루/ 굽어보듯 서있는// 그림같은/ 애정(愛情)// 무엇이나/ 가득히 담아주고 싶도록// 그토록 하늘마다 향한/ 둥그런 문(門)// 아아/ 나도// 항아리 옆에 피어가는/ 노을이 되고 만다//

간단하다 / 임강빈
검은 리본 속 사진/ 입 언저리 파르르 떨며/ 무언가 말을 할 듯 말듯 하다// 땅을 파고/ 하관하고/ 마지막을 햇살이 덮어버린다// 누군가 나직이 말한다/ 착한 일 많이 했으니/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간단하다/ 일생이/ 너무나 간단하다//

모일某日 / 임강빈
가장 확실한 건/ 이승을 떠나간 사람하고는/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일이다/ 아직 푸른 기가 남았는/ 가로수 은행나무/ 부채꼴 모양의 이파리가 흔들린다/ 어떻게 알았을까/ 노란 은행 열매가 미리 와 있다/ 이 사실도 모르고/ 황망히 떠났으리라/ 하늘이 하도 맑아서/ 혹시나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욧/ 찍찍 잡음만 되돌아온다/ 그대로 내버려두는 건데/ 공연한 짓 했나싶다//

마을 / 임강빈
옹기종기/ 노랗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기웃거리지 마라/ 곧게 자라라/ 가볍게/ 더 가벼워져라/ 서로가 다독거리며 사는/ 민들레라는 따스한 마을이 있다//

집 한 채 / 임강빈
하얀 길이/ 다 끝나지 않은 곳에/ 집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담도 대문도 없는/ 이 집 주인은 누구일까./ 신록에 싸여/ 오히려 고대광실이다.// 멀리 뻐꾸기가/ 한데 어울린다./ 허술한 집 한 채/ 꿈속 궁전 같다.//

자위 / 임강빈
남들이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 없이/ 팔푼이 시인으로 족했다// 그런 나를 키운 것은/ 원고청탁이었다// 멀리서 청탁이 왔다/ 아, 반갑다/ 실낱같은 모마움// 그 원고청탁이 약속처럼 끊겼다/ 나는 늙었고/ 그럴 때가 되었다//

서정시인 / 임강빈
당신은 서정시인/ 빛 바랜 서정시인/ 산등성이에서/ 억새풀 흔드는/ 그런 시늉을 하다가/ 큰길을 피해/ 고샅을 만나는 달빛/ 허허 헛웃음 틈서리에서/ 눈물은 뜨겁고/ 오십이 훨씬 지나서야/ 철이 든 당신/ 혼자 있고 싶어하고/ 안으로 세상 일 삭이는 당신/ 약해도 단단한 뼈/ 섭섭한 날 있다/ 소리치고 싶은 날 있다/ 맑은 물소리에 귀세우는/ 당신은 아무래도 서정시인.//

시가 쉽게 씌어진 날 / 임강빈
왠지 수상쩍다/ 너무 쉽게 시가 씌어진 날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모두가 어렵다 하는데/ 나만 편안할 수 있는가/ 고뇌와의 싸움에서/ 일찍 항복한 것은 아닐까/ 죄송하다/ 애써 위장한 것은 아닌데/ 쉽게 시가 얻어진 날은/ 왠지 두렵다/ 일상의 나사를 조인다/ 긴장을 힘써 조여본다//

나의 시 / 임강빈
남이 쥔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예뻐 보입니다// 나의 시는/ 크지도 예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야코죽지는 않습니다//

송고送稿 / 임강빈
우편으로 원고 청탁이 왔다/ 가뭄 끝에의 단비다/ 마감 날짜가 넉넉하다/ 활자화 된다는 설레임/ 그 마력// 무엇으로 할까/ 이거루보낼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 부러울 것이 없다// 정중히 송고한다/ 등기로 보내는 건데 하능 아쉬움/ 무시히 도착했을까/ 기도하는 마음// 이런 절차가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주고받는다//

절필 / 임강빈
떠들썩하게/ 절필을 선언한 사람이 있다// 나이 팔십에/ 시가 점점 멀어진다/ 내심 버릴까// 시가 전부는 아니다/ 견딜 수 있다// 단풍이 곱다/ 산에는/ 경연대회가 한창이다// 절필하라는 약속/ 조용히/ 유보할까//

시집詩集 / 임강빈
좋은 시집을 받아보는 일은/ 지기를 만난 만큼이나 반갑다// 한편 한편/ 여백을 많이 둔 시다// 빗소리가 들린다/ 기다리던 바다// 비는 사선으로 흔들기도 하고/ 직선으로 꽂히기도 한다// 빗줄기가 끊기면 어떡하나/ 가늘어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모처럼 흡족히 내렸다/ 다시 읽기 시작한다// 요즘 시는/ 가뭄 타는 데 익숙하다// 오늘 시집은/ 주룩주룩 빗소리로 흥건하다//

적막강산 / 임강빈
나의 첫 시집 ‘당신의 손’에는/ 고독이나 슬픔이란 단어가 없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버리기로 했다// 나이 들면서/ 넘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이런 낱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용할 만큼// 마감 날이 가까이 왔다/ 고독이나 슬픔 같은/ 사치스러운 시어는 이제 버리자/ 그냥/ 적막강산이면 한다//

약속 / 임강빈
따뜻한 어느 봄날/ 구용(丘庸) 선생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를 쓰기란 쉽지 않죠/ 필생의 업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 그 무렵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시 밖에 없을 것 같아서/ 엉겁결에 약속을 했다// 사람은 쉽게 약속을 하고/ 스스로 그것을 허문다// 철석같은 약속은 아니었지만/ 구용 선생과의 약속은 지켜진 셈이다/ 이렇게 쉽게 되는 일도 있구나//

소 / 임강빈
활모양의 긴 뿔을 한/ 동남아 지방에서 써레질하는 소나/ 포악하게 길들여진 스페인의 투우나/ 소는 소지만 왠지 낯설다// 일본사람은/ 순종을 강요하기 위해/ 조선어독본 첫 장에/ <소>를 가르쳤다//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산 그림자 밟는 걸음/ 위태위태하면서도/ 뚜벅뚜벅 한결같았다// 외양간에서 별 보며/ 반추하는 조선의 소와/ 글썽대는 눈가에는/ 조선의 정이 스민다//

까마귀 / 임강빈
된서리가 내린 날은/ 유성 온천 변두리/ 빈 논밭엔/ 까마귀가 까맣게 모여들었다/ 열심히 먹이를 쫓고 있었다/ 어지럽힌 발자국/ 햇살이 와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한적했던 허허벌판에/ 길이 생기고/ 지금은 도시로 변하고 있다/ 삼강이 아니어도/ 까맣게 오너라/ 검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했다/ 미안하다/ 까아깍/ 그 울음소리가 불현듯 그립구나//

부끄럽다 / 임강빈
씨-발 씨발/ 단골로 내뱉은 나의 욕지거리/ 벌써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뭔가 성이 안 차서 그랬을까/ 혼란스러워서 그랬을까/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소리소리 질러도 하늘은 멀고/ 풀잎에 업힌/ 작은 아침이슬만 부끄럽게 됐다//

부끄러움 / 임강빈
남들이 애송하는 시/ 한 편 없으면/ 평생 시를 써 왔다/ 부끄러울 때가 있다// - 하늘엔 울타리가 없습니다/ 어느 신문 전면 광고/ 얼마나 멋진 문구인가// 나는 하늘에/ 수많은 울타리를 쳐놓고/ 여태껏/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없다// 애당초/ 버렸어야 하는 건데/ 미적미적하다가/ 어정쩡한 시인이 되었다//

허송 / 임강빈
등기 소포나/ 택배로 보낼까 했습니다/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보낼 것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세월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일입니다/ 슬픔 자체가 세월입니다/ 외로움도 매한가지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지만/ 짐이 점점 커져서/ 보내기 쉽지 않습니다/ 너무 섭섭하다거나/ 야속타 하지 마십시오/ 뼈아픈 허송 세월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햇살에 기대어 / 임강빈
햇살에 기대어/ 먼 산 바라보는 일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비스듬히 기대고/ 생각하며 기대고/ 비운 채로 기대고/ 그 모양은 각기 달라도/ 먼 발치에서 사랑을 느낀다.// 서 있는 풍경을/ Ⅹ募悶?그린다/ 단풍으로 물든/ 노랑으로 물든/ 갈색으로 물든 검지손가락/ 햇살에 기대어/ 고개를 쳐들면/ 세상이 조금은 환히 보인다.//

감정의 무게 / 임강빈
계절이나 장소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즐거울 때의/ 슬플 때의 색깔은 다르다/ 육십 킬로그램/ 이쪽 저쪽인 나의 체중/ 물론 감정까지 포함된 몸의 무게이다/ 순수한 감정의 양量은 얼마나 될까/ 증오를 달아 보았다/ 추가 한쪽으로 기운다/ 고독은 어떨까/ 역시 아래로 쳐진다/ 중심이 잡히지 않아/ 제대로 측량하기 어렵다/ 사랑도 마찬가지/ 그 심층深層까지/ 정확히 알아내기란 힘들다//

바람송頌 / 임강빈
바람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궁둥이를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꽃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그 힘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증표입니다//

바람 / 임강빈
식장산(食欌山) 자락에 둥지를 틀고/ 金丁洙 시인은 바람과 함께 산다/ 소나무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제일이라 한다/ 다는 오르지 못하고/ 빈방으로 돌아와서 적막을 즐긴다/ 이 조촐한 일상/ 바람이 일러준 것이라 한다// *그대는 자신을 바람이라 했지/ 지난 해 가을, 몇 해만인가/ 바람처럼 왔다가/ 이튿날 아침 바람이 되어 떠나던 그대/ 그대의 회색빛 승복 등으로/ 쓸쓸히 흐르는 가을 햇살// 바람은 소리는 있어도/ 그 뒷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하게 나직한 바람도/ 한바탕 흔들어대는 輪舞도 그렇다/ 울컥울컥 토할 것 같은 슬픔은/ 오랜 세월 동거한/ 金丁洙 시인의 바람이라 한다//
* 金丁洙 시인의 <바람>중에서

깃발 / 임강빈
가을 하늘은 더욱 그렇다/ 너무 투명해서 그럴까/ 저 건물 옥상에서/ 펄럭이는 깃발/ 그냥 넓은 가슴이라면 좋겠다/ 만나자고 한다/ 서로가 흔들어대며/ 어서 오라고 한다/ 적당한 접경에서/ 눈물 글썽이며/ 꼭 만나자고 한다//

물결무늬 / 임강빈
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 숲은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 수많은 이파리를/ 흔들어 깨우며 소리를 낸다/ 무뚝뚝한 수피(樹皮)도/ 그 껍질을 벗기면/ 여인의 속살보다 더 곱다/ 함부로 훔쳐봐도 되는 건지/ 목수는 묵묵히 대패질만 한다/ 살아서는 숲이 되더니/ 떠나서는 무늬로 남는구나/ 단단한 나무일수록/ 이 선명한 물결무늬/ 겉과 속이 이렇게 달라도 되는가/ 목수의 손끝에서 나무 향기가 나온다//

동목冬木 / 임강빈
한뿌리에서 자란/ 나뭇가지/ 그 가지와/ 가지 사이에 생긴 간격/ 겨울엔 너무 빤히/ 그것이 보인다./ 바람 끝에/ 멈추는 적막이/ 내 뼈마디를 흔들어주곤 한다./ 줄곧 나는 왜 한 나무만을 보아왔을까./ 한뿌리에서 자라/ 그 가지와/ 가지 사이에 생긴 간격./ 그 사이로/ 하루를 오르내리는/ 비탈길이 보인다./ 밤을 한층 춥게 하는/ 별이 보인다.//

복숭아 / 임강빈
낮은 구릉에/ 복사꽃이 그림 같다/ 조치원에는/ 도원 문화제가 열린다/ 그날의 축제가 엊그제 같은데/ 다투어 열매가 탐스럽다/ 여인의 예쁘장한 둔부臀部/ 불그스레 분홍빛으로 익는다/ 천도天桃가 아니라서/ 한 입 깨물면/ 진짜 팔월 복숭아 맛이다//

갈대 / 임강빈
보름달을 굴리고 있다./ 갈대가/ 사각사각/ 보름달을 굴리고 있다./ 갈대끼리/ 온몸을 비비대는/ 소슬한 바람./ 열심히 굴려봐도/ 제자리에/ 맴도는 보름달./ 비로소/ 몸을 일으키는 아픔을/ 갈대는 알고 있다.//

승천 -민들레에게 / 임강빈
그 넓은 땅 제쳐두고/ 하필이면/ 굴핍하게 태어났다/ 돌 틈 사이에서 아슬아슬했다// 여전 궁핍은 따라다녔지만/ 청춘은 길었다/ 밤낮 걱정으로/ 호호백발이 되었다// 이제는 승천할 차례다/ 우리가 만난 헛됨 시름 버려라/ 가벼이 승천할 차례다//

들깨꽃 / 임강빈
돌멩이 골라내어/ 두어 평 밭을 일구다/ 들깨 모종을 하다/ 아기 손바닥만하게/ 건강하게 자라서/ 잎 사이 사이/ 꽃자루에 다닥 피어/ 보일 듯 말 듯 부는 바람에/ 안간힘쓰다/ 작아서 부끄러운가/ 더러는 일찍 그늘에 숨다/ 이 꽃보다/ 우리는 얼마나 작아 보이나/ 아직은 따가운 햇볕/ 공터 언저리/ 하얀 들깨꽃/ 잔잔한 외로움.//

코스모스 / 임강빈
하얀 창 앞에/ 마구 피어 오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다.// 바다 앞에/ 날리운 모닥불 같은 것으로/ 스스로 전율에 이어 온/ 사랑// 여기 아무도 반거(蟠踞)할 수 없는/ 하나의 지역에서/ 가을의 음향을 거두는 것이다.//

안개꽃 / 임강빈
아침 이슬은/ 잠깐/ 있다 가는 집념이다.// 안개꽃/ 한 아름/ 그렇게 있고 싶은 그대.// 작은 욕망으로/ 가득 찬 꽃/ 흔들릴 수밖에 없는 꽃.// 멀리서 볼수록/ 그것은/ 추상화의 선이다.// 사랑은 때로/ 이것들의 선線인가/ 흔들림인가// 이슬 같은 안개꽃 속에/ 장미 한 송이/ 그대 뜨거운 노래.//

난蘭 / 임강빈
참, 무심했다/ 난 한 그루// 두 촉이 쏙 올라와/ 꽃이 되었다// 시산이/ 그 쪽으로 쏠린다// 가까이 와서/ 맡으라 한다//

억새풀 / 임강빈
흰머리를 인 억새풀은/ 물빛에 비추어서 더 하얗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그 물빛이나 굽어보면서/ 억새풀은 제 키만 키울 줄 안다/ 흘러갈 수는 없을까/ 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바람 없이도 스스로 흔들어대는/ 기막힌 솜씨 이 율동/ 억새풀 사이로/ 소복한 여인이 서 있다/ 가까이에서 강물을 응시하고 싶다/ 일찍이 나도/ 이런 분위기에 젖어본 적이 있던가.//

은행나무 / 임강빈
이사 온 뒷집 주인과/ 아직 인사를 못했다// 담 사이인데/ 너무 무심하다 싶다// 그 집 은행나무의// 그 눈부심// 충충한 우리 집을/ 환히 비춰 준다// 공짜로 바라보는/ 이 편안함// 은행잎 지기 전에/ 그 집 주인과 인사를 나눌까 한다.//

만개滿開 / 임강빈
겨울 뒤에서 숨어 있다가/ 작심한 듯/ 마침내 뇌관을 터뜨린다// 일제히 터뜨린다/ 펑펑/ 가지마다 꽃이 만개한다// 꽃은 몸 전체로 핀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순수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은 허구(虛構)가 없다//

구경꾼 / 임강빈
어깨 너머로/ 남의 인생을/ 열심히 구경하다가/ 모두 돌아간/ 빈 무대에/ 비로소 박수를 보낸다./ 어떤 비유의/ 꽃잎이/ 시나브로 지고 있었다.//

허수아비 / 임강빈
가파른 천둥지기에도/ 누렇게 벼는 익어가리./ 외롭다 말라/ 산골 햇볕은/ 얼마나 찬찬한가./ 작은 창자 채우려/ 몰려온 참새떼/ 오히려 무료를 달래주고 있지 않느냐./ 하늘만 쳐다보다가/ 지금은 벼가 익고 있다./ 남루함이여/ 시름은 털어버려라./ 황금빛 저 익어가는 것/ 그것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일 아닌가.//

적막 / 임강빈
도리깨질을 한다/ 마당 구석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그 광경이 재미있었다/ 콩깍지에서 빠져나오는 소리/ 여기저기 튕기는 소리/ 적막을 흔들고 있었다// 한잠을 자고 나면/ 외할머니는/ 윗목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고 계셨다/ 쪼르르 내려오는 소리/ 그 소리에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면/ 노란 대머리가 쑥 올라 있었다//

함구령 / 임강빈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날/ 퇴근 후/ 직원과 함께 택시로 상가 가는 길이었다/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앗, 아버지다/ 덜덜/ 떨고 계셨다// 가난과 추위는 가깝다/ 빈한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말씀하셨다/ 그 가난 때문에/ 사시나무 떨 듯하고 계셨을까/ 안 볼 광경을 본 것이다// 그날의 일을 고한다는 것이/ 차일피일하다가 놓쳐버렸다/ 마침내 나는 나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무거운 짐은 가중되었다/ 함구령은 아직껏 유효하다//

신록에 / 임강빈
이 맑은 눈동자이고 싶다/ 이 여린 마음이고 싶다/ 바스스 일어나는 신록을 보아라/ 가벼이 손짓하는 신록을 보아라// 바람과 만나/ 햇살과 만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한결 싱그럽구나// 아장장장 걸어가는/ 걸음마 같이/ 넘어져도 방긋 웃는/ 아기와 같이// 신록은 동심/ 이 눈부신 푸르름/ 때가 묻을 겨를이 없네.//

나들이 단장短章 -여름 / 임강빈
1/ ​객과 더불어 겸상을 한다/ 꽁보리밥/ 차가운 냉수에 말고/ 된장에 한입 깨문 풋고추/ 얼얼한 그 맛/ 아, 빛나던 식욕.// 2/ 어느 바다에서 왔나/ 식탁 위에 생선 한 마리/ 깨끗이 발라 먹은/ 원형의 생선 가시/ 그림 되고 싶다/ 접시 위에서 포동포동 뛴다.// 3/ 목 태우던 비 오다/ 주룩주룩 오다/ 장대처럼 꽂히는 비/ 가끔은 여우비도 섞인다/ 사이사이/ 참새들도 땅에 와서 노닌다.//

매듭을 풀며 / 임강빈
조용히 먹을 가신다./ 안으로 괸/ 앙금이랑 섞어 먹을 가신다/ 연적의 물을/ 盆에서 자란 느티나무 뿌리에/ 조금씩 부으시며/ 다시 먹을 가신다./ 붓끝에서만 풀리는/ 당신의 매듭/ 한 획 한 字 내려가는/ 아버지의 隸書/ 풀리지 않는 매듭이나/ 풀어가듯/ 나도 조용히 무릎 꿇는다./ 그 行間에 비치는/ 가랑잎 소리.//

세수 / 임강빈
세면기에서 얼굴을 씻는다/ 안색이 좋아졌다고 하고/ 신수가 환해졌다고 한다/ 지나는 인사치레거니 하다가도/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지난날의 몰골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것은 우울과도 통한다/ 비누질을 한다/ 날마다 하는 일인데/ 물위에 때가 둥둥 떠다닌다/ 바람이 잘 닿는 각(角)으로/ 알게 모르게 낀 것일 것이다/ 흘깃 거울을 본다/ 가난한 이목구비/ 분명 나를 닮았다/ 손바닥으로 북북 문질러댄다/ 묵은 것이 손에 잡힌다/ 때묻지 않은 얼굴로 있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깡마른 정신으로 있다는 것/ 더 어려운 일이다//

저울 / 임강빈
한번은 약국에 가서/ 약 대신/ 나를 달아보기로 했다// 욕심을 달아본다// 어지간히 버렸다 했는데/ 노욕이 남아있어/ 저울판이 크게 기운다// 양심은 어떨까 하다가/ 살그머니 그만 내려놓았다/ 두려움 때문이다// 저울판이 요동친다/ 평형이 잡힐 때까지의/ 긴 침묵/ 외로운 시간이다.//

산책길에서 / 임강빈
누가 쓸었을까/ 골목길/ 싸리비 자국이 선명하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빈집 한 채/ 적막한데/ 돌담 위로/ 라일락이 고개를 쳐들었다// 비어 있어/ 가득 채우려 함인가/ 그 향기가 부럽구나// 가까운 산 빛이/ 초록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안개 / 임강빈
겨울 뒤에서 숨어 있다가/ 작심한 듯/ 마침내 뇌관을 터뜨린다/ 일제히 터뜨린다/ 펑펑/ 가지마다 꽃이 만개한다/ 꽃은 몸 전체로 핀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순수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은 허구虛構가 없다//

그냥 가거라 / 임강빈
쓸쓸하다는 감이 잡힐 법한데/ 참 이상하다/ 한쪽으로 낙엽 구르는 소리/ 왠지 가볍다/ 이 가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떠나려 하는가/ 수척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차갑다/ 슬금슬금 눈치 볼 것 없다/ 그냥 가거라//

햇살 / 임강빈
추위를 타는 편이다/ 염첨염천에도 그늘애 오래 있으면/ 으스스 한기를 느낀다/ 햇살이 그립다// 한동안 병원에 있다가/ 집에 들어왔다/ 왠지 서먹서먹하다// 우리 집 베란다에/ 아침 햇살이 가득 넘친다/ 서둘러야지/ 나무의자에 앉아/ 일광욕日光浴 한다// 쏴- 쏴-/ 앙금을 털어낸다/ 아픔을 씻어낸다// 아, 눈부신 햇살//

눈빛 / 임강빈
간밤에 칠흑이었다/ 우리가 잠자고 잇을 때/ 눈이 내린 모양이다/ 하얗게 변했다/ 세상이 교교皎皎하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지 않아다/ 베란다 아래/ 연두, 빨강, 갈색, 파랑 슬래브집이/ 일색이다// 지붕마다 정지된 채로 조용하다/ 갑자기 적막감이 몰려온다/ 아, 나 떠나는 날/ 이처럼/ 하얀 눈빛이면 한다//

날짜 / 임강빈
마을에서 지근한 거리/ 누울 자리 하나 장만햇습니다/ 살아서 그래도행복했고/ 저승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지상이나/ 땅 속이나 시간은 같습니다// 흔적도 없이 없어질 일이지만/ 몇 점 남겨 두었습니다/ 앞사람과 잘 어울릴지 몰라/ 걱정은 됩니다// 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날짜가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은수저 / 임강빈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져 온 은수저로/ 밥을 먹습니다// 아내의 수저는 꽃무늬가 박혀 있어/ 구별하기 쉽습니다// 이것저것/ 음식을 나르느라/ 노고가 얼마입니까// 지난 세월/ 무심했습니다// 까딱하면 인사를/ 놓칠 뻔 했습니다// 아내도/ 수그긍하는 눈치입니다// 고맙다/ 은수저야//

일의대수一衣帶水 / 임강빈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거리/ 두 나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독도의 풍랑이 거세다/ 아베 총리는/ 자기네 땅이라고 서슴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다// 그들의 간교가 눈에 선하다/ 가증스럽다//

그냥 / 임강빈
모처럼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 전화다// 반갑다// 응, 그냥 잘 지낸다// 며칠 후 이쪽에서 걸었다/ 건강은 어떠냐// 뭐, 그냥 그래/ 왠지 퉁명스럽다// 꿈이 없는 사람/ 무료한 사람// 노인들은/ 그냥으로 통한다//

봄 / 임강빈
안개가 자욱합니다/ 우릉 우르릉 발동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있다가 사람 소리가 납니다/ 꽃들은/ 먼저 피려고 다툽니다/ 나무 이파리도/ 뒤질세라 서둘러댑니다// 천지에/ 가득가득 봄이 밀려옵니다//

가을 포옹 / 임강빈
여름은 큰 몸짓이었다/ 무성해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오솔길 같은 가을/ 체중이 많이 빠졌다/ 눈에 띄게 야위었다/ 떠나려는 이 가을/ 악수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은밀하지 않은 곳에서/ 꼭 한 번은 포옹하고 싶다//

조금 남아 있다 / 임강빈
머리카락이 빠져 나갑니다/ 이빨이 빠져 나갑니다/ 기억이 빠져 나갑니다/ 빠져 나간다는 것은 없음과 같습니다/ 나는 조금/ 남아있을 뿐입니다//

빗방울 / 임강빈
비가 지난간 뒤/ 빗방울이 모였습니다/ 빨랫줄 아래로 옹기종기/ 매달려 있습니다/ 순서는 없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 하나가 증발합니다/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 같은데/ 참 간단합니다/ 우르르 빗방울이 뒤따릅니다//

원근법遠近法 / 임강빈
멀어지면/ 가까워진다는 것/ 가까우면/ 멀어진다는 것/ 겨우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소심한 사람 / 임강빈
기념사진 찍자고 한다/ 서둘러/ 맨 뒷자리에 섰다/ 아, 편하다// 매서운 추위/ 삼삼오오 곁불로 모여들었다/ 움직이는 머리와 머리/ 그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매사가 이렇다// 아, 소심한 사람//

나의 전성시대 / 임강빈
방바닥에 배를 깔고/ 시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편 시가 되었다/ 부나방같이 덤벼들었다// 원고 청탁이 오면/ 부랴부랴 허둥댔다/ 시에 대한 경외심도 없었다// 세월이 쏜살 같다/ 나에겐 얼마 남지 않은 황금 시간// 그 시간과 가까워지면서/ 모처럼/ 봇물 터지듯 시가 되었다// 왔다/ 나의 전성시대가 왔다//

들녘에서 / 임강빈
나무들의 편안한 자세/ 풀들의 편안한 자세// 바람이/ 그 앞을 지나고 있다// 풀잎이 바람 속에 움직인다/ 나뭇잎이 바람 속에 움직인다// 이내 균형 잡히는 나뭇잎/ 이내 균형 잡히는 풀잎// 여기 와 소리쳐 본다/ 불끈 주먹도 쥐어 본다// 아무도 흐트러 버릴 수 없는/ 저 편안한 자세// 들녘을 걸으며/ 연습을 한다// 하나 둘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물 / 임강빈
허유許由가/ 귀 씻던 물이/ 늙지 않고 있다/ 비록 버리고/ 갈 것이나/ 꼭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돌 사이를 흘러간다/ 세상일을/ 한 귀로/ 흘려버린다는 것의/ 어려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이 골짜기 물도/ 여러 풍상/ 삭이는 동안/ 이미 다 알고 있다//

버들 / 임강빈
꺾이지 마라/ 늘어진 가지야/ 全琫準의/ 혁명처럼 꺾이지 마라/ 춤고 어두운 겨울을/ 견딘 버들아/ 봄추위가/ 아직은 골목에 남아 있지만/ 맨 먼저 눈 뜨거라/ 춤추거라/ 뿌리 박은 나의 땅/ 늘어진 가지야/ 바람 따라 서러운 버들아/ 진정 꺾이지 않는/ 힘을 보이라//

거위의 노래 / 임강빈
목청 있어도/ 울지 못하는 노래// 날개 있어도/ 날지 못하는 날개// 분노를/ 삼켜버린 거위의 목청// 슬픔으로/ 막힌 거위의 목청// 울고 싶지만/ 울음이 되지 않는다// 날고 싶지만/ 날개가 되지 않는다// 달밤이 좋아/ 다시 가다듬는 목청// 그래도 탁 트이지 않는/ 거위의 노래//

무제無題 / 임강빈
한번은/ 논바닥에/ 고인 물일레// 거두어 간/ 밑둥에/ 넘치는 물일레// 서릿바람/ 그 안에도/ 얼지 않는 구름// 진정/ 서러운 것 없이/ 다시 녹는 물일레/ 한번은/ 논바닥에/ 혼자 있는 물일레//

엉덩방아 / 임강빈
한밤중에 소피를 보려고 일어서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척추에 이상이 생겼다 한다/ 시술을 받았다// 재활 중이다/ 허리가 중심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일어선다는 것/ 한 발자국 떼어 놓을 때까지의/ 그 두려움//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고 하다가/ 혼자 설 수 있을 때의/ 박수소리// 졸업한 지 까마득한데/ 늘그막에 재수(再修)한다/ 둔하고 게을러 진도가 더디다/ 입을 악물고 참고 견딘다/ 사람 구실할 수 있을까?/ 글쎄!//

눈물 한 점 / 임강빈
사람들은 모여서 울고 있다/ 범벅이 된 눈물/ 그 흔한 눈물이 나는 왜 없을까/ 애먹었다/ 나중엔 무섭다는 생각/ 에라 모르겠다/ 침을 발랐다/ 아주 진하게/ 어릴 때의/ 이 놀라운 위장(僞裝)/ 뜨겁다/ 눈물 한 점//

공일 / 임강빈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누가 찾아올 것 같아/ 자꾸 밖을 내다본다/ 우편함에는/ 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 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 한 점 구름 없이/ 하늘마저 비어 있다/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 반갑다고 연신 아는 체한다/ 그래그래 알았다/ 오늘은 완전 공일이다//

편지 / 임강빈
편지보다야/ 빠른 전화로 끝낸다/ 전화가 바람이라면/ 편지는 묻어나는 향기다// 세월에 쌓이고/ 하고 싶은 말이 쌓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사실 그럴까/ 차가운 하늘 바라보며/ 꺼질 뻔했던 불을 지핀다// 그래 그래/ 가난한 시인으로 남기로 한다/ 아니 나직한 향기로 있을 거야/ 그럼 안녕//

울타리 / 임강빈
나 無心했네./ 누워서/ 겨울을 생각하니.// 언제/ 심었던가/ 기억 밖인데// 지금은 자라서/ 울타리가/ 되어주는 나무.// 그 가지 끝엔/ 後悔가/ 없네.// 바람 없이도/ 움직이는/ 그 가지 끝// 아, 瞬間의/ 몸짓이/ 아니네.// 내 食口보다/ 미쁜/ 看護여.// 나 無心했네./ 누워서/ 겨울을 생각하니.//

나비 한 마리 / 임강빈
훨훨/ 나비 한 마리 되어/ 보리 이랑을 지나/ 노오란/ 장다리 밭을 지나/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지나// 훨훨/ 나비 한 마리 되어/ 꽃나무 위로 날고/ 파란/ 잔디밭도 날아/ 마당 앞까지 내려앉은/ 공장지대를 지나// 훨훨/ 나비 한 마리/ 긴긴 여름 해 다 보내고/ 아직/ 앉을 자리 못 찾아/ 노을 속/ 시간을 서성거리고 있다.//

빨간 신호등 / 임강빈
빨간 신호가 떨어지면서/ 3.5톤 짜리 트럭도 멈춘다./ 그 위에 실린 황소가/ 낯선 도시를 두리번거린다./ 몸집이 커서 슬프냐/ 도살장 가는 길이라 한다./ 큰 눈을 하고도/ 눈물 한 번 흘린 적 없었는데/ 두 줄기 고드름이 생겼다./ 쟁기질하던 일 그립다./ 꼭두새벽/ 외양간에서 바라보던 별빛/ 두메에서/ 정이 많던 우리 주인/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찰싹 손바닥으로 맞아봤으면……./ 파란 불로 바뀐다./ 착한 뒷모습이 멀어간다.//

냉수 / 임강빈
소년 시절/ 할머니와 함께 잤다.// 캄캄한 건넌방/ 가슴 파고들다 잠이 들곤 했다.// 새벽마다/ 할머니는 냉수를 찾으셨다.// 가끔 우물에는/ 별이 떠 있었다.// 두레박으로 그것을/ 퍼 올리고 싶던 생각// 무모하기는/ 지금도 매한가지// 한번도 거른 일 없던/ 냉수 심부름//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는/ 우물 속의 별빛// 갈증을 느낀다./ 냉수로도 풀 수 없는 이 목마름/ 할머니 하고/ 나직이 불러본다.//

 



임강빈(任剛彬, 1931~2016) 시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공주사범대학 국문과 입학 후 교내 동아리인 '시회(詩會)'에 참여하면서 시작 활동에 전념했다. 1956년 문예지 現代文學에 '항아리', '코스모스', '새' 등이 추천돼 등단했다. 1952년 청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이어오다 1996년 대전 용전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손’ '동목(冬木)', '매듭을 풀며', '등나무 아래에서',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버들강아지', '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 '한 다리로 서 있는 새', '집 한 채', '이삭줍기', '바람, 만지작거리다' 등이 있다. 충남도문화상(문학), 요산문학상, 공산교육상(예술), 대전시인상, 상화시인상, 정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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