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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지 시인
1942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1967년 부산대를 졸업했다. 198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소리》 《내 눈앞의 전선》 《햇살 통조림》, 山詩集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산악 저서로 《금강산은 부른다》(조선일보사刊·공저),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 산행 에세이《산아, 산아》, 편저 《윤극영전집 1,2권》이 있다, 2003년 제4회 《현대시 작품상》을 수상했다.
구슬이 구슬을 / 이향지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유리구슬이 유리구슬을 밀어내었다// 구슬이 구슬을 치면 구슬 탓이냐/ 구슬 탓이다/ 둥글둥글 맨질맨질 전신이 정점인/ 저 잘난 구슬 탓이다/ 민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저와 똑 같은 것을 쳐서야 되겠느냐/ 치자고 밀었겠느냐/ 둥글둥글 어울려서 놀자고 밀었겠지/ 놀자고 오는 걸음이 총알 같았겠느냐/ 밀었거나 퉁겼거나 친 것은 구슬이네/ 아픈 것도 구슬이네//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하네//
밭 / 이향지
그녀는 밭을 팔았다 당산나무 아래 앉아 한숨을 쉬고 정월 지난 보리 이랑을 오래 밟아주고 밭 파시오 조르던 사람을 찾아갔다// 밭 판 돈으로 딸은 서양사학과에 등록을 했다 밭 판 돈을 들고 간 빚쟁이는 다시 오지 않았다 밭 판 돈으로 남편은 담배를 사고 막내는 운동화를 사고 대학을 마친 아들은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 멸치를 받아서 화물선을 탔다 이제는 바다가 밭이다 이제는 마른 멸치를 팔아서 보리를 사고 녹두 콩 팥 솎음배추를 사고 시금치를 사고 풋고추 파 애호박 늙은 호박 고구마줄기까지 사고 땔나무를 사고 남편 담배 값을 주고 막내딸 수업료를 주고 팔다 남은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서 물밥을 삼키고 다시 마른 멸치를 받으러 간다// 그녀가 판 밭 아래로 길이 지나간다 그녀가 한숨 쉬던 당산나무 아래까지 도시가 올라온다 그녀는 바다 앞에서 다시 한숨을 쉬고 마른 멸치를 팔러간다//
된장 끓이는 저녁 / 이향지
항아리를 할머니로/ 항아리 뚜껑을 할아버지로/ 항아리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백발로/ 항아리 옆의 감나무를 세월의 몽둥이로/ 꺾어보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 반찬도 없는데 전신이 아프다/ 백발과 할아버지를 젖히고/ 할머니 속의 된장이/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는다//
다공, 다공 / 이향지
쬐끄만 연탄에 구멍이 스물세 개/ 아이 넷 낳기 전엔 열아홉 개였는데/ 면사포 쓰기 전엔 아홉 개였는데/ 서방 만나 살아갈수록 구멍만 늘어가는 몸/ 허리 쑤셔 병원에 가니 다공증이라네/ 구멍 숫자 느니 만큼 탄공장 이문이 늘고/ 구멍 숫자 느는 만큼 불땀은 줄어/ 오일보일러와 살겠다고 짐 싸는 여자 천진데/ 해가 떠도 캄캄한 연탄 여자는/ 오늘도 남대문시장 먹자골목에서/ 갈치조림을 익히느라 헉헉대고 있네//
구절리 바람소리 / 이향지
벽지를 걷어내고/ 합판을 뜯어내고/ 창틀에 박힌 못을 뽑아버리고/ 맞아들일 것인가 저 바람의 알몸을// 저 바람엔/ 들이키면 게워낼 수 없는 컴컴함이 배어 있다/ 다락산 노추산 상원산의 희디흰 탄식이 녹아 흐르고 있다/ 몇 안 남은 붙박이별 뿌리를 흔드는 삽자루가 들려 있다/ 늘어만 가는 빈집들의 방이며 뜨락을 사람 대신 채워보는/ 곡소리가 묻어 있다/ 달 높이에 가로등을 매달고 싶어했던 철새들의 거세당한/ 깃털들이 우왕좌왕 떠 있다// 손을 씻어 본다/ 발을 닦아 본다/ 거울 속의 얼굴을 도닥거려 본다/ 이불을 덮어 쓴다// 구절리는 못 떠도 메주들은 잘 떠서/ 검고 푸른 홀씨들을 구절리 밖으로 날리는 밤//
소금의 행로 / 이향지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 소금이 되지 못한다//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는 물은/ 거름이 되지 못한다// 어제도 나는 산을 노래했다/ 산은 나를 노래하지 않았다// 먼 것이 먼 것을 가리는 날/ 혓바닥에 얹히는 소금//
흙의 건축 1 / 이향지
한 알갱이가 한 화분 속에서 한 덩어리 되어 한 뿌리를 살리는 것이다/ 한 방울이 한 뿌리로 스며 한 송이를 피우는 것이다/ 한 덩어리 속에서 한 알갱이는 가만히 잊혀져야 더 좋은 것이다//
이 연장이 사는 법 / 이향지
이 연장을 조금 안다// 흙을 판다/ 흙을 덮는다/ 나는 파지 팔지 않는다/ 나는 흙이 조금 묻어서 돌아온다/ 나는 굳이 흙을 씻지 않는다/ 물이 마르면 흙은 알아서 떨어져 간다// 흙을 파고 덮는 짧은 사이에 씨앗을 넣었다/ 흙은 알아서 길게 먹이고 재우고 키워 준다/ 씨앗은 알아서 일찍 죽거나 서리 내릴 때까지 산다// 이 연장은 죽은 것을 캐거나 산 것을 옮길 때도 사용된다/ 흙은 알아서 가슴을 뜯어 주거나 엉덩이를 들어 준다/ 흙은 알아서 남몰래 삭이거나 뼈를 남겨 준다// 흙이 문을 닫고 겨울로 떠나면 이 연장도 알아서 쉰다// 이 연장의 끝은 놀고 있을 때 빛이 죽는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이향지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후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 분 걸어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땅심 / 이향지
쓰러져야지, 쓰러져야지 하는 소리가 들려/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려/ 산자락 빈집 한 채 만나고 있네// 따라가야지, 따라가야지 하는 소리가 안 들려/ 그립지 않어?/ 물으려다/ 발이 붙어 버렸네// 파편으로 남은 장독대 옆에/ 감나무 한 그루 무섭게 새 촉 내는 거 보게/ 집은 지금 나무로 이사 중이네// 촉 하나에 기둥/ 촉 하나에 퇴창/ 촉 하나에 소 살던 헛간/ 촉 하나에 부뚜막/ 촉 하나마다 살던 사람/ 그림자 하나씩// 나무로 남아 나무로 살아/ 가지마다 명랑한 새를 앉히고// 죽은 것을 헐어 산 것을 무성케 하네//
삼동(三冬)이 깊다 / 이향지
돌 틈에 삼동 들었다/ 흙과 돌에 남아 있는 온기를 모두 짜내어/ 저의 종자를 지키고 있다// 냉혈의 씨앗이다/ 냉혈일수록 씨앗이 뜨겁다/ 뜨거운 씨앗일수록 깊은 얼음 속에 꼭꼭 채워 놓아야/ 썩지 않고 때맞춰 발아한다/ 제 몸이 차가울수록 자기 안쪽 불씨부터 단단히 빗장 질러 놓아야/ 때맞춰 해빙을 본다// 털 없는 몸이다// 냉혈이란 얼마나 가늘고 기다란 형벌인가/ 얼마나 비루하고 쓸쓸한가/ 삼동은 알고 있다//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는 어떤 봄도 오지 않는다,/ 상대를 꺾으려고 비축해 두었던 독(毒)을/ 자기 자신을 향해 주입하는 순간,/ 그 아름다운 순간에야/ 형벌이 끝난다// 삼동이 삼동 내내 빈속으로 견딜 수 있는 힘,/ 삼동 안에 있다,/ 허기와 오한과 두려움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찌를 수 있는 독,/ 삼동은 그것을 갖고 있다// 삼동은 삼동이 가장 아름다운 때다//
엉성한 구석 / 이향지
강 언덕 석축 틈 엉성한 구석/ 땅거미 일가 쫓기듯 기어든 구멍/ 그 컴컴한 쪽으로 자꾸만 눈이 간다// 돌과 돌이 어깨를 걸어 지탱하고 있는/ 포클레인 몇 삽이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저 구석의 방식은 나와는 한참 다르다// 엉성하므로 온갖 벌레 깃들 구석이 많은/ 엉성함으로 깃드는 모두를 엉성히 껴안아 주는/ 엉성하므로 아무도 아무것도 묶어 놓지 않는/ 엉성함으로 떠나고 돌아옴이 자유롭게 하는/ 저 구석의 방식// 엉성함 메우려고/ 흙과 돌을 채우고 꽃나무를 옮기고/ 왜 안 오느냐 왜 늦느냐 빈틈없이 째깍거리는/ 나의 방식// 서리 내린 아침/ 한 두름 땅거미를 따라가다/ 부끄럽게 무너지고 있다//
햇살 통조림 / 이향지
발효를 시작한 육체는 부패에 가까워// 나는 가끔 햇살 통조림을 먹어/ 살아 있는 나무에서 채취한 햇살 통조림/ 천연의 꿀과 방부제를 한 몸에 지닌/ 열매의 숨결/ 그 포만과 공복의 이중성을 깨트려 먹어// 아무 괴로움도 못 느끼는 열매보다/ 시시콜콜 겪으며 견딘 열매가 더 달다/ 썩지 않으려고 부릅떴던 눈,/ 썩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다행인가// 나는 가끔 거울 속에서 햇살 통조림을 열어/ "세상이 너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세상을 위해 있어라!"/ 살과 뼈와 껍질을 송두리째 헐어, 가장 높은 가지에/ 햇살 통조림 매달아 주신,// 나는 가끔 쭈글쭈글해진 햇살 통조림을/ 퇴비 더미에 파묻어/ 발효와 부패를 제대로 거쳐 온 퇴비는 냄새도 고소해//
배고픈 벌이 / 이향지
벌집에서 꽃까지의 길이 봄이다. 역행이 순행을 이끌어 왔다. 역행하는 벌이 없다면, 꽃이 어찌 깊은 눈을 녹였겠는가. 배고픈 벌이 꽃까지의 길을 만든다.//
풍찬노숙 / 이향지
얕은 화분 속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서 있는 작은 소나무는 뒤틀린 허리만큼이나 심사도 뒤틀려 얼마 안 남은 바늘잎을 바장바장 태우고 있습니다. 저 소나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살살거리는 물이 아니라 망치. 아무리 뻗대고 용기를 내어도 제 힘으로는 뚫을 수 없는 화분을 한 방에 깨트려줄 망치. 걷고 싶은 길에서 풍찬노숙하다 웃으며 죽게, 발과 다리를 돌려주는 일.//
게 / 이향지
대청도 사탄리 모래밭에서/ 게 한 마리 둥둥/ 제 가슴을 치고 있다// 투쟁의 상징인 두 엄지발로/ 모래 묻은 가슴을 둥둥둥…… 둥둥둥……// 황혼, 제가 파놓은 모래구멍 밖에서/ 먼 수평선이 밀어보내는/ 파도의 에스컬레이터/ 가로막고 서서// 둥둥둥둥…… 둥둥둥둥……// 제 등껍질보다 크고 눈부신 꽃/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 부푸는 꽃잎마다 무지개를 그려보다 터지는 꽃/ 제 등과 가슴을 적시는 눈물이 되는 꽃/ 눈과 눈 사이에 매달고 있던 커다란/ 거품꽃을 터트리며//
파도 / 이향지
흐르는 바람의 가지 끝에/ 흐르지 않는 五六島/ 어디에 있니? 너의 향기// 바다를 정원으로 가진 집 베란다에서/ 내 유리몸은 흔들린다/ 내 유리눈은 어룽진다// 가지 않은 길은/ 무지개 층계,/ 엘리베이터로 상승한 어느 황혼의 높이에서/ 낮아진 물들의 춤사위/ 황혼에도 헛손질로 희끗거리는, 水平// 線 안의 바다/ 파도의 가지 끝에/ 아카시아, 아카시아, 물거품꽃 아카시아/ 사금파리꽃 아카시아/ 어디에 있니? 너의 향기// 海神이 보내는 흰말들은 모래톱을 물고 쓰러진다/ 바다 밖의 노고지리는 바다 밖으로 돌아간다/ 나무는 쓰러져도 땅에 눕는다//
바다가 되기 전에 / 이향지
흙도, 바다 앞에 이러러서야/ 붉은 울음 풀어 놓는다/ 너도/ 나도/ 바다가 되기 전에/ 드넓은 짠물이 되기 전에/ 거친 해수의 자맥질 겪어 보기 전에/ 메마른 황토의 나날들 들여다 본다/ 너도/ 나도/ 도공을 만났더라면/ 빛나는 청자가 될 수도 있었을/ 황토, 깜냥 못하는 농부를 만나/ 까칠한 배추나 두어 두렁 안았다 간다/ 어떤 흙은 뙤약볕 속에서/ 꼬부라지게 살고 먹고/ 어떤 흙은 선들바람 속에서/ 혀꼬부라지게 먹고 놀고/ 너도/ 나도/ 바다가 되기 전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일만 남았다//
대해 속의 고깔모자 / 이향지
섬이다 섬으로 왔다/ 바람만 불어도 뱃길이 끊기는 하늬바다 작은 섬/ 힘센 손이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대해 속의 고깔모자// 스스로 찾아든 유배지/ 자청한 볼모/ 바다는 뱃길을 끊고 너그럽게 풀어놓는다// 모자 위의 햇살은 번철 같다/ 너무 타서 집적거리지도 않는 에그 프라이// 모자 속의 시계는 느리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장이넝쿨처럼 느릿느릿 간섭하며 간다/ 머리카락 끝에서 발톱 끝까지 흡,착,흡,착, 훑으며 간다/ 어느 쪽으로 가나 수평선에 갇힐 것이므로/ 반짝이는 수면마다 지나간 것들이나 가득히 펼쳐질 것이므로//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곧추선 언덕을 넘는 동안이/ 풍경과 속도의 궁전이다// 궁전 밖에는 해당화/ 해당화 발등에는 뜨거운 몽돌밭/ 몽돌밭 위에는 태엽 풀린 시계 하나/ 파도의 잔소리 듣고 있다// 아무리 작은 배도 섬보다 덜 흔들리고/ 모자보다 신발이 덜 고단하며/ 죽음보다 삶이 덜 지루하다//
내 눈앞의 난간 / 이향지
마루와 마당 사이에 난간이 있다.// 놀다가 떨어질 어린애도 없는 집의 전면에/ 속 빈 강철 난간을 자연처럼 붙박아두고,/ 마당과 마루 사이에 서른 걸음 쉰 걸음을 들인다.// 문이 닳고, 신발이 닳고/ 닳은 것들만 빛이 나고 몸을 바꾼다.// 우리는, 처음의 그림을 후회보다 사랑한다.// 집 한 채의 설계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집 한 채에 소속된/ 생명 없는 것들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파지가 잔토를 설레게 하는가를….// 난간에는 나팔꽃 대신 녹이 잔뜩 피어 있다./ 꽃 아니면 녹이라도 피어야 난간을 돌아본다.// 죽도록 제 몸을 긁어 피우는 꽃을,/ 페인트와 붓을 들고 흔적도 없이 따버린다.//
집 없는 기억 / 이향지
리어카를 따라갔다/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 넓은 길은 좁아지고/ 등에 업힌 아이는 잠들어 축 늘어지고/ 좁은 길옆에 쪽문을 열어둔 파란 대문 집/ 문간 방, 연탄 광에 차린/ 캄캄한 부엌, 쥐들은 밥 냄새를 맡고/ 달그락거리고// 리어카를 따라갔다/ 호마이카 장롱보다 작은 리어카// 한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모퉁이// 한번 좁아진 길은 몇 번을 꺾어 돌아도/ 넓어지지 않고// 리어카 위에는 아이들 목욕통/ 목욕통 안에는 빨간 비닐 곰/ 조금만 눌러도 삑삑 소리를 내고// 햇빛은 장롱 위에서 번들거리고/ 장롱에 딸린 거울은 쓸데없이 커다란 하늘을 담고//
허리 굽은 못 / 이향지
버텨야 한다 못은/ 버팀으로 이 몸을 건너야 한다// 매달리는 모두를 흔들림 없이 받아 걸고서/ 뼈 하나로 풍화의 길에 섰을 수 있어야 한다// 희생, 굴종, 매몰, 화석의 시간에/ 꽈앙! 꽈앙! 끝을 걸 수 있어야 한다// 발로는 벽을/ 머리로는 허공을/ 박차고 떨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 오래 서 있는 자가 언제나 낮게 누움을/ 내가 보았다 말아야 한다//
사바나의 코끼리 / 이향지
건기의 사바나/ 뿌우연 먼지떼의 호위를 받으며/ 코끼리 한 마리 가고 있다./ 너덜거리는 귀,부러진 상아/ 패전으로 얼룩진 생애가/ 네 발에 실려 비틀거리고 있다./ 기다란 코를 맥없이 대지를 향해 처뜨린채/ 구멍투성이의 귀를 간간이 저어/ 파리떼를 쫓으며,/ 거대한 스크린 속을 떠돌고 있는 코끼리 등에는/ 하얀 새 한 마리 타고 있다./ 꿈꾸었으나 벗어나 본 적 없는 지평선에는/ 그루터기만 남은 무지개가 하나 기다리고 있다.//
내 사랑은 / 이향지
내 사랑은 길고 깊은 골절의 와중/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우족을 씻고 있는 남자의 물 묻은 손등 위/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젖은 홍화씨를 볶고 있는 남자의구부정한 어깨 위/ 뜨거운 솥 안에서 하염없이 휘둘리고 있는 나무주걱의 자루 끝//
불가능한 꿈 / 이향지
나는 납이 아니라 납 실은 수레가 아니라 늙은 마부가 아니라 다리 저는 말이 아니라 휘두르는 대로 후려치는 가죽 회초리가 아니라 그 모두를 싣고 가는 수레바퀴// 나는 그 무거운 것만이 아니라 그 끙끙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쓸쓸하고 고달픈 것만이 아니라 그 호령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무턱대고 순종하거나 삐거덕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모두를 한 몸에 실은 수레바퀴// 이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이 답답한 빌딩 그늘에서 이 텁텁한 공기 속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는 네 바퀴들 틈에서 백 년 전의 오십 년 전의 흙 길을 달리는 두 바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간 구석에서 한 바퀴는 이쪽에 한 바퀴는 저쪽에 퉁그러져서 누워 꾸는 허구 헌 날의 꿈/ 도란도란 흙 길을 달리는 수레바퀴 한 쌍의 꿈//
밥으로 죽 끓이기 / 이향지
1./ 물은 변경에서부터 끓기 시작했다./ 말간 거품들이 냄비 안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떠올라/ 숫자가 점점 많아지더니, 갈수록 뜨거워지는 벽을 등지고/ 밥 덩어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부글거리던 거품들이/ 밥 덩어리를 통과 할 때 냄비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밥 덩어리를 통과하여 다시 떠오른 거품들은 눈알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그때까지 참기름은 끓는 물의 표면에 떠서/ 호박빛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물먹은 밥알들은/ 갈수록 퍼져서 냄비의 바닥을 덮으며 불어 올랐다./ 물방울들이 참기름을 빨아들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냄비 안은 뿌연 장막 속으로 가라앉았고, 끝내 풀리지 않는/ 기름 몇 방울은 끓는 밥물의 중심에 우묵한 터를 만들며 고였다./ 나는 드디어 숟가락을 들었다. 중심에 모여 끝내 풀리지 않는/ 기름을 떠내고, 불어서 무거운 밥알이 더 이상 눌어붙지 않도록/ 냄비 바닥을 부드럽게 저어 주어야 했다.// 한 공기의 밥이 한 그릇의 죽이 될 때까지/ 내가 한 일, 중심에 고인 기름을 떠 낸 일밖에 없지만,/ 있는 밥으로 죽 끓이는 일도 이처럼 풀리지 않아/ 끝내 떠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
2./ 죽을 다 먹은 뒤,/ 복작대던 냄비 안과/ 빈 숟가락을 들여다본다// 텅 빈 뱃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노 하나// 주변도 중심도 물도 기름도 밥도 죽도/ 사라진/ 둥근 배 안// 나는 다시 노를 든다, 앉았던 항구를/ 두 삿대를 일으켜 밀어낸다// 식탁, 이 불멸의 항구를 찾아/ 어깨가 쳐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들을 위해//
봄 / 이향지
내 봄은 커다란 항아리 속 같아/ 둥근 바닥에 꽃신을 놓고 앉아 있네요/ 보리밥이 싫어서 우는 계집애/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야 하는데/ 내 몸은 지네가 아니네요/ 어머니는 시장 가고 아버지는 기원 가고/ 늘보리언니는 부엌으로 불러 코피 터트리고/ 보리동생은 징소리 끌고 항아리 속으로 갔네요/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야 하는데/ 사다리는 항아리 밖에 기대 있네요/ 발은 점 점 커지고/ 꽃신에선 하나 둘 꽃잎이 지네요/ 날아가야 하는데 날아가야 하는데/ 날개는 장마보다 멀리 있네요/ 햇살이 기둥처럼 들이치는 한 때/ 혼절하여 항아리 같은 봄이 되었네요/ 작은 꽃신 찢어서 신고 날아가는 저 나비//
봄 둘 / 이향지
나무 한 그루 심었지요 콩나물 같은 오리나무/ 오리 건너 또 한 그루/ 오리나무 두 그루 심었지요/ 하나 뿐인 호미를 엄마 마당에 두고 와서/ 윤이 걸 빌려서 심었지요/ 호미 질이 서툴러서 내 무릎도 함께 파였지요/ 한 그루 또 한 그루 양쪽 무릎이 파였지요/ 흙 덮을 때 내 두 손도 함께 덮였지요/ 오리 건너 무릎 하나…… 오리 건너/ 손 하나…… 오리 건너 무릎 하나……/ 오리 건너 손 하나……/ 콩나물 같은 오리나무 둘/ 내 손등을 파며 자라났지요/ 나무 뿌리 깊어질 수록 내 두 무릎 앙상해졌지요/ 흙 모자라 덮어준 두 손은 흙이 다 되었지요/ 호미도 흙도 모자랄 때/ 내 나무 내 나무 두 손 덮어/ 무릎에 받아준 탓이네요//
봄 일곱 -빈 집 / 이향지
물통엔 물이/ 반쯤 남아있다// 평상 위에는 목침 하나// 바람도 주인 따라/ 들에 나가고// 빈 집/ 저 큰 입 속에/ 배고픈 햇살만 쟁쟁//
봄똥 / 이향지
작년 것이 뻣뻣하게/ 낡은 자루를 끌고 왔다/ 부루카를 벗어던진 아프카니스탄 여자처럼/ 얄팍한 짚북데기를 젖히고/ 장터거리로 나왔다/ 댕댕이넝쿨 채반 위의 봄똥 몇 포기// 한 겨울에 피는 모란꽃인가 하였으나/ 얼었다 녹은 줄기마다 질긴 실이 들었다/ 끝이 굳은 사람들/ 이 실을 자주 먹으면/ 대나무 마디 뚫리는 소리 듣는다 한다// 한 자루 다 팔아야 만 원도 안될/ 봄똥 채반 옆에/ 몇 십만 원을 얹어주어도 데려갈 사람 없을/ 노파 한 줌// 애원하듯 사죄하듯 연신 비비고 있는/ 곱은 손에/ 천 원짜리 두 장을 잡혀주고 떠나가는/ 텃밭 봄똥 한 줌//
시월 이야기 / 이향지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낙관 / 이향지
연꽃 한 송이 돌 속에 꽃핀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새 한 마리 돌 속에 나는 몸을 새겨 넣을 동안/ 소나무 한 그루 돌 속에서 달빛 두르고 걸어나올 동안/ 대나무 한 그루 돌을 뚫고 구름에서 일어설 동안/ 내가 뻘 속에 주저앉아/ 진흙 꽃봉오리나 밀어내고 있을 동안//
돌 속의 넓은 풀밭 / 이향지
나는 어머니를 찢고 들어왔지요/ 어머니 피로 첫 옷을 입었고/ 어머니 비명으로 첫 귀를 열었고/ 어머니 손가락으로 첫 눈을 떴고/ 어머니 숟가락으로 첫 밥을 먹었지요/ 내 피가 내 아이의 첫 옷이 될 때까지/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지요/ 누군가를 찢지 않고는 미궁 벗어날 수 없나니/ 나는 내 아이가 때맞춰 나를 찢게/ 긴 끈을 풀밭 입구까지 이어두었지요/ 내가 찢고 미궁 벗어날 때 어머니 물/ 모두 나를 따라와 내 딸에게로 갔지요/ 어머닌 나로 인해 질긴 돌이 되었으나/ 나와 내 딸이 붙잡고 빠져나온 긴 끈/ 질기게도 아직 그 풀밭 어귀에 이어져 있지요/ 질긴 어머니 잘 찢기지 않지만/ 반 쪽 거울 들고 오는 발가숭이에겐, 이처럼/ 쉽게 돌이 되어 넓은 풀밭 이어가지요//
밖에 뭐가 있는가? / 이향지
밖에 뭐가 있는가?// 저무는 밖에, 저문 밖에/ 남자, 아니면, 여자/ 가는 길, 아니면, 오는 길/ 샐비어 꽃밭처럼 타오르는 尾燈들밖에/ 曲盡, 曲盡, 이어가는 사랑 하나밖에/ 사랑, 사랑, 뒤따르는 지리멸렬밖에// 해 뜨기 전에는 못 죽겠다는 가로등밖에/ 갓길밖에/ 빈 갓길밖에// 무도 가는, 배추도 가는/ 돼지, 닭, 비육우, 양파자루도 서울로 가는/ 신문지에 말린 장미다발도 포개져서 가는/ 흔들리며 가는, 빽빽한/ 저속도로밖에// 불 꺼진 버스/ 옆자리에 늙은 호박을 앉히고/ 호박이 굴러 떨어지지 않게 안전띠에 묶어 앉히고/ 두 귀에 이어폰 꽂고/ 내다보는 밖에// 달랠수록 높이 우는 첼로가 있다//
노파 / 이향지
깊은 우물이 하나 있다/ 지은 지 88년째 되는 낡은 집이 있다/ 米壽에도 생일 상을 받지 못한 볍씨 한 톨이 있다/ 말을 할 때마다 가르릉/ 가르릉 숨 끓는 소리를 내는// 깊은 우물이 말라간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낡은 집이 기우뚱하다/ 수 십 년 된 요강을 방문 밖에 갖다놓고/ 돋보기와 틀니를 손닿는 곳에 두고/ 전화기를 바짝 당겨놓고 누웠다// 깊은 우물 옆에는/ 15분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벽시계/ 흑백으로 바뀐 화면에서 지지지지/ 백설이 내릴 때까지 끄지 않는 TV가 있다/ 그것들이 적막을 쫓아준다// 깊은 우물 옆에는 단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단감나무는 갈비뼈가 하나 더 모자랐다/ 늑막염을 오래 앓다 오래 전에 죽었다/ 단감나무 자리에는 작은 창이 있는 방을 만들어/ 밤마다 불빛을 걸어둔다// 깊은 우물에겐 함부로 부르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다/ <흑탄 백탄 타는데/연기가 펄펄 나는데/ 이내 가슴 타는데/연기도 김도 안나네!/ 깊은 우물의 노래는 깊은 우물에게만 들린다// 깊은 우물을 찾아간다/ 가도, 가도, 길이 멀다//
액체의 시간 / 이향지
모서리를 만난 시간이 흘러내린다//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고추장을 젓고 있는 여자/ 젓다가 묽어서 고춧가루를 더 넣고/ 젓다가 뻑뻑해져서 엿기름물을 더 붓고/ 젓다가 묽어져서 고춧가루를 더 넣고……/ 고추장은 저을 수 없이 불어나 버렸다// 모서리를 만난 시간이 흘러내린다// 항아리 아가리는 좁은데 주걱 혀는 넓어서/ 고추장은 항아리 밖으로 더 많이 흘러내린다/ 끈적끈적한 고추장을 맨손으로 걷어 넣으며 여자는/ 온몸을 풀어서 고추장이 된다// 고추장 항아리 속에서 올려다보면/ 좁고 둥그런 하늘/ 모서리에 걸려서 캑캑거리는 달/ 눈 매워 손 매워 훌쩍거리다 보면 자정/ 모서리를 만난 시간이 흘러내린다// 뒷마당 모서리에 질긴 빨랫줄/ 빨랫줄에 허리 꺾여 물 흘리는 스커트/ 달링달링 빨랫줄을 바닥으로 내려 주세요/ 젖은 팔을 휘저으며 함께 우는 스웨터// 정오와 자정은 같은 숫자를 쓰지만/ 의자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었다//
내 눈앞의 전선 / 이향지
전선은 그대로 둔 채 나뭇잎만 떨어졌다// 집과 집의 경계를 처마 끝보다 높이며/ 골목을 넘어 골목을 하나 더 가로지르고 있는// 전선은 허공을 긋고/ 허공에 늘어져 있다// 늘어진 전선의 가장 늘어진 부분이/ 박태기나무 머리를 지나가고 있다// 빗방울들은 여름내, 푸른 잎에 묻힌 전선의/ 가장 늘어진 부분을 타고/ 박태기나무 머리로 흘러들었다// 바람이 늘어진 전선을 흔들면/ 전선은 박태기나무 안 푸른 저수지를 흔든다//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不變을 흔들고/ 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不眠을 치는 것이다//
거울을 가두고 / 이향지
산에 간다. 글쓰는 나, 옷 벗는 나, 쳇바퀴 속의 나, 권태와 벌거벗고 싸우는 나,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는 나, 내 전신을 가두던 거울을 골방 속에 가두고// 산에 간다. 골방 문을 활짝 열어 내가 내다보던 창 밖을 내다보게 하고, 벗어놓은 옷, 젖은 머리칼을 훔쳐주던 타월, 발 닦던 융단 조각, 내가 남긴 물기들이 흐릿하게 물안개를 만드는 골방에서, 권태의 구름에 휩싸이게 하고//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죽은 시간들은 이파리 하나 피워내지 못하고, …창 밖이 캄캄해지도록 내가 오지 않아 더불어 캄캄해지는 제 몸 바라보게 하고,// …반달 속의 계수나무 끝없는 기다림에 제 발목 자르고, 제 몸에 어른거리는 창백한 달빛에 진저리치게 하고// 아직도 안 왔어? 어느 산에 간 거야? 자정이 넘어도 내가 오지 않아, 다쳤는가 죽었는가 걱정하게 하고, 새벽바람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날밤 샌 주먹을 천장까지 들어 올렸다가도, 투쟁에서 지친 내 몰골에 오히려 넉넉해져서 미소짓게 하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앉아 흙 냄새를 맡는다. 누렇게 익은 나락들이 따라오며 물결친다. 새떼가 날아오른다! 기다리던, 기다리던, 거울이 날아오른다!//
그림자의 언덕 / 이향지
지나간 것들―, 지나간 것들의 그림자―, 혹은/ 지금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그림자일수도―,/ 언제였는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새벽에 내가 본/ 그림자 사람들, 그들이 침묵으로 오르고 있던 왼쪽이 더 높은 언덕// 모자 달린 만티카 자락 발목까지 치렁거리며/ 언덕을 오르는 세 사람―, 앞사람은 잠깐 사이에/ 커다란 보퉁이였나 보다. 뒤에 선 사람은 잠깐 사이에/ 칭얼거리는 아기였나 보다, 가운데 선 사람은 잠깐 사이에/ 앞에 섰던 보퉁이를 이고 뒤에 섰던 아기를 업으려고 언덕에/ 쭈그려 앉았나 보다. 둥글고 환한 빛이 중세의 수도승 같은 사람들/ 그림자를 가두고 한쪽 측면만을 투명하게 비추다 이내 캄캄해지던 것// 그리고 또 한사람―, 가장 나중에 오르던 사람―,/ 저 아래 쪽 숲에서부터 아주 밝은 랜턴을 들고, 줄기/ 위에서 쉬고 있는 빛깔 없는 구름들을 흔들흔들 비춰보며/ 구불텅거리는 숲길을 올라온 사람. 지나간 사람들을 찾으러/ 왔다고 생각되던 사람. 그 역시 수도승처럼 검고 긴 만티카 차림./ 랜턴 빛으로 나를 잠깐 비추며, 무엇인가 묻던 사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언덕 쪽으로 돌아선 사람. 이내 희미해지고 숨죽이던 빛// 그 날 그 새벽 숲에서―, 어두운 새벽 숲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았다. 이 숲에선 내가 다만 바라보는 者라는 것도―,/ 나는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을 듣는 者라는 것도―,//
어제는 무얼 했나? / 이향지
― 어제는 무얼 했나?/ ― 처음으로 울었어요. 내 배꼽으로 이어진 기다란 줄로, 때때로 자장가 들려주던 엄마의 음성이 갑자기 북 찢는 소리로 바뀌며, 알 수 없는 손길이 사정없이 내 볼기를 쳤어요.// ― 어제는 무얼 했나?/ ― 바다 밑 해초마을을 걷고 있었어요. 조그만 달이 수면을 흔들며 나를 불렀어요. 나는 물 밖의 달을 잡으러 허우적거리며 떠올랐어요. 앞쪽에서 파도가 밀려왔어요. 뒤쪽에서 파도가 벽이 되었어요.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파도는 강철의 손을 걸고 있었어요. 달빛은 사금파리처럼 내 머리 위에서 부서졌어요.// ― 어제는 무얼 했나?/ ― 바람 속에 있었어요. 바람이 가시나무 가지를 퉁겨 내 머리카락을 잡았어요. 나는 거미처럼 대롱거리며 가시나무 가지를잘랐어요. 내 손바닥은 내 피로 붉은 노을이 되었어요.// ― 어제는 무얼 했나?/ ― 하나뿐인 아가씨를 전송했어요. 바람이 불면 바위를 물어뜯는 파도의 울음소리,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좋을 곳으로, 떨면서 걸어가는 아가씨의 발 밑에, 무지개 빛 비단 천을 깔아주었어요.// ― 어제는 무얼 했나?/ ― 모든 여자와 굴욕을 흙에 묻었어요. 내 뜻밖의 이 묘혈들을, 한 산이 어깨를 기울여 받아주었어요. 이제는 조용히 누워 산의 살이 되는 길. 아아, 그러나,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붉은 흙들의 춤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군요.//
엄마의 풍선을 찾아가는 풍선의 노래 / 이향지
나는 두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지웠다네. 그녀의 넋두리는 33년 동안 계속되네. 그녀의 가족들은 넌더리를 내며, 각자의 동굴 속으로 떠나버렸다네. 그녀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는 것이 일. 물렁물렁한 잠항아리 속으로 지운 아이들이 돌아와, 엄마를 들어내자 엄마를 찢어버리자. 엄마를 키우는 데도 돈이 든다네. 땀 뻘뻘 흘리며 잠에서 빠져 나오면, 바싹 마른빨래 곁으로 낳은 아이들이 돌아와, 엄마를 줄에서 걷어버리자, 엄마를 개켜서 장 속으로 넣어버리자. 엄마를 치우는 데도 돈이 든다네. 자나깨나 자나깨나 아이들의 합창 소리. 잠 속에도 밥 속에도 아이들의 합창 소리. 엄마를 풍선에 매달아 날려버리자. 그녀는 풍선에 매달려 엄마를 찾아간다네. 엄마엄마 엄마의 풍선을 찾아다닌다네.//
비탈에 서 있는 여자 / 이향지
산 위에 서 있는 여자의 뒤에는/ 세 겹의 산이 있고// 산 위에 서 있는 여자의 양쪽 옆에는/ 두 그루의 죽은 나무가 있다// 죽은 나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한쪽 손이/ 밑둥만 남은 나무 위에 걸쳐져 있다// 웃고 있는 여자의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의치가 반짝인다// 순간이다//
귀향 '94 / 이향지
갈매기 한 마리 발이 얼어, 돌아오고 있었다.// 나무장이 서던 자리,/ 생선장이 서던 자리,/ 뻥뻥거리며, 튀김틀이 돌아가던 자리….// 추운 날, 제 몸 분질러/ 불꽃으로 사라진 나무들…, 석쇠 위에서 파닥거리다/ 구이가 된 생선…, 뻥 소리와 함께 쇠 그물을 뚫고/ 길바닥으로 흩어진 옥수수 낟알들….// 눈알들은 굴러갔다, 익어서 굴러왔다….// 콧등으로 흘러내리는/ 볼록렌즈를 치켜올리며,/ 간척지 횟집 앞/ 엎어놓은 평상다리에도 앉아 있었다./ 밀려난 바다는/ 海壁을 치며 길길이 뛰고 있었다.// 조청처럼 귓바퀴를 당기는/ 사투리들을 떼어내며,/ 갈매기 한 마리/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있었다.// 박용래의, 저녁 해가 날개 끝에서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뚜껑이 덮인 우물 / 이향지
내 고통이 저기 있네/ 하늘색 나무 뚜껑이 누르고 있네// 발등까지 덮이는 하이힐을 신고 감색 바지를 입고/ 뚜껑 아래 고통 열어보려 하네// 다가가는 고통과 다가오는 고통/ 사이에서/ 듣는/ 발소리// 누르는 힘과 들어올리려는 힘/ 사이에서/ 흘러나온/ 악취와 암흑// 뚜껑 아래 우물은 썩고 있었네/ 뚜껑 아래 내 고통/ 죽어서 살기에 꼭 좋은 곳에 두고/ 수수꽃다리 향기를 좇아 돌계단을 오르네//
별과 지붕이 없는 곳에서 / 이향지
해남군 땅끝에서 말하지 그래/ 생각보다 저녁이 빨리 왔다고/ 내내 내리는 비에도/ 젖는 것은 다만 껍질뿐이라고/ 바람이 핏줄 속을 흘러다녀도/ 앗는 것도 재는 것도 체온뿐이라고/ 산 몸을 뼈처럼 에워싸는 어둑살이/ 땅끝에 선 마음을 뼈처럼 세우는 중이라고/ 적당히 식고 적당히 무너진 저녁이 되어/ 적당히 썩고 적당히 버려진 갯벌 앞에 섰으니/ 낙지 게 바지락들과/ 울음 같은 악수라도 나누지 그래/ 사실은……, 사실은……, 하고 말하지 그래/ 별과 지붕이 없는 땅끝에서 혼자 밤을 맞기엔/ 나는 아직 화려하다고//
빙과氷果 / 이향지
포도값이 좋으면 여기저기 포도밭이 새로 생기지요/ 포도값이 떨어지면 여기저기 포도밭이 버려지지요/ 산비탈 포도밭이 가장 나중 태어나고/ 산비탈 포도밭이 가장 먼저 버려지지요// 버려진 포도밭은 헝클어지구요/ 헝클어진 넝쿨은 엉겅퀴 까마중 수크렁과 놀구요/ 버려진 포도알은 작고 성글구요/ 성근 포도알에 여름 햇살은 더 많이 스몄지요// 헝클어진 넝쿨 틈에/ 쪼글쪼글 말라서 언 포도가 몇 알 붙어있어요/ 쪼글쪼글한 얼굴 위에 백설 모자를 쓰고/ 모자가 녹을까봐 산그늘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얼음이면서 불인/ 氷果,/ 씹을수록 달디 단 실이 들었어요// 머리를 덮어오는 겨울 산 그림자/ 몸에 남은 수분을 더욱 짜내며 이어가야 할/ 실 한 가닥이/ 이 열매에겐 아직 남아있습니다// 운 좋은 날이면 만날 수 있어요/ 눈에 손에 입에 뱃속에 달디 단 햇살 지피는/ 氷果,// 발끝의 돌이 싫어 포도를 포기한 포도나무에겐/ 달고도 아픈 회초리지요//
치마 입고 꽃 넘기 / 이향지
꽃이 뛴다/ 꽃을 넘어/ 고구마밭 말뚝을 뽑아 와야 한다/ 치마는 길고 꽃은 갈수록 키가 높아진다/ 꽃을 넘어 말뚝을 뽑아오면 바지를 사준다고/ 엄마는 안보이고 엄마말만 선반 위에 있었다/ 채송화는 넘었지만/ 봉선화도 넘었지만/ 말뚝 근처에 꽃 둑을 이룬 코스모스는 못 넘어/ 두 손으로 잡아 당겨 꽃줄기를 불끈 누르고/ 엉덩이를 반쯤 틀어서 오른 쪽 발을 넘기고/ 반쯤 더 틀어서 꽃 너머로 남은 발을 옮길 차롄데/ 꽁무니 들린 치마 속으로 코스모스가 와르르 들어와버려/ 떠들썩한 꽃 이파리 두 손으로 탁탁 쳐서 털어버리려다/ 누르고 있던 꽃줄기까지 한꺼번에 일어나버려/ 바람 부는 꽃 둑처럼 치마 속이 부풀어버려/ 어떡해 어떡해 못 넘은 꽃 둑을 짓이기며 다리 뻗고 앉아/ 파리 잡듯이 모기 잡듯이 치마 속 꽃잎을 뜯어내다가/ 말뚝까지 가기도 전에 밤이 와버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말뚝이 꽃 둑까지 찾아와버려/ 어떡해 어떡해 책방에 가던 길이었는데/ 선반 위 엄마 말을 너무 믿었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이 많은 꽃을 나 혼자 언제 다 살아//
변산바람꽃 / 이향지
이 꽃은 너무 작아서 때릴 뺨도 없다. 이 꽃은 너무 애리애리해서 뜨겁게 안아줄 수도 없다. 이 꽃은 너무 밝은 빛도, 너무 드센 바람도, 너무 짙은 그늘도, 거절한다, 거절한다, 도리질한다. 도리질 할 때마다 산란하는 햇빛. 이 꽃은 바람이 잘 통하는 잡목림. 우묵하나 완만한 골짜기 안. 잎 피기 전의 잡목림 반그늘 잔돌밭. 큰 물 지나고 나면 다시 돌밭이 되는 곳. 바다가 가까우면서도, 갯바람이 덜 미치는 곳. 사람이나 짐승들 드문드문 지나가는 오솔길 옆. 가까우면서도 쉽게 들키지 않을 그런 자리. 진달래꽃과는 반대편. 진달래꽃보다는 조금 더 먼저 피어난다. 진달래꽃보다 창백하나 갖출 것 다 갖춘 완전체. 진달래꽃보다 조금 더 자세를 낮추고, 조금 더 먼 곳에서 호흡해 줄 때, 가장 빛나는 모습을 드러낸다. 신토불이 토종의 넋. 가지마라, 가지마라, 붙잡던 내 고향 어른들을 닮았다.//
자미원민들레 / 이향지
잊혀진 땅에 꽃피운 작은 민들레/ 곁에 나를 심어보리/ 복선을 깔고 엎드린 철길 옆에서/ 함께 황달 들어 비를 기다리리/ 자갈밭 굳은 흙이 삽날을 부러뜨리리/ 불을 기다리는 석탄조각들이 내 뿌리를 밀어내리/ 기차가 비명과 함께 나를 주저앉히리/ 홀씨가 익기 전에 나는 아마 죽으리// 밤이면 더 스산하리/ 좁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바람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쓸 만한 못들을 뽑고 있으리/ 흉하게 구멍 뚫려/ 문고리 쪽을 어깨가 기운 문짝들이/ 저마다 높은 음으로 덜컹거리리/ 개들이 개들을 불러/ 개 짖는 소리 개 뛰는 소리// 모종삽을 다오//
동백 / 이향지
바닷가 벼랑 틈에 깊디깊은 목구멍이 있고/ 무한천공 이슬을 받아먹으며 자란 혀가 한 그루/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몹시 반들거리지만/ 햇살도 미끄러지게 반들거리지만/ 가까이 가보면 해풍에 터진 혓봉오리들이/ 핏빛으로 맺혀있다// 제 뿌리 붙잡고 있는 절벽이/ 텅 빈 소리의 길이 될 때까지/ 제 몸을 후벼파는 나무의/ 혀,/ 몹시 반짝이는 이파리들의 안타까운 손짓말// 한 때는/ 봄 운하를 저어 가는/ 외 노였고,/ 외 노에 딸린 목선이었고/ 목선에 딸린 삿대였고/ 목선 꽁무니의 방향타였고/ 돛대였고/ 뱃바닥에 고이는 물 퍼내는 바가지였고/ 잔고기 가두는 물 칸의 비스듬 열린 뚜껑이었고/ 그 전부를 싣고/ 설레임 설레임 저어 가는/ 외 노였던,/ 나무의/ 혀// 소리의 나무가 폭포수처럼 치솟아 바다를 덮을 때까지/ 오, 오, 오, 핏빛으로 갈라터진 혓봉오리들이라도/ 붉게, 붉게, 피워서, 파도에 떨구어야 한다//
그리운 워워 -목련 / 이향지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모르는 곳인데 인파 속에 있다/ 어디로 가야 집이 있나 두리번거리다 피스를 만났다/ 나는 피난을 가는 중이라 한다/ 나는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피스보다 식구들이 있는 워워로 돌아가려고 한다/ 피스의 군대들이 빽빽하게 줄을 지어 모퉁이를 돌아온다/ 나는 피스에 막혔다 빽빽한 군화소리/ 붉고 노란 불 방망이들의 끝없는 행렬/ 나는 피스의 군대에 떠밀려 억지로 걷는다/ 나는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나는 워워로 돌아가서 아들과 남편을 만나야한다/ 나는 자꾸 돌아보며 워워에 남은 아들과 남편을 걱정하다/ 피스의 발길에 걷어차였다/ 나는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남편과 아들은 워워에도 없다/ 그들은 나를 찾아 피스의 군대에 입대했다한다/ 불발탄들이 워워 소리치며 스쳐지나 간다/ 밤에 피는 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빽빽 울던 아기는/ 나는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나는 폭탄 옆에 앉아서/ 죽은 별들을 생각하다 워워에서도 걷어차였다/ 나는 우두커니 서있는 우드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필 거야 아니 터질 거야/ 내 손가락에 손가락을 얹어봐 가슴을 얹어봐/ 나는 마지막 폭탄에 가슴을 얹었다/ 나는 컴퓨터를 켜둔 채 잠이 들었다/ 나는 핀다/ 딱딱한 우드 속에서 솜털 골무를 떨어뜨리고/ 우윳빛 말들을 뱉어낸다//
갈대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 / 이향지
바람에 허리 휘어 바람 끝에 섰을지라도/ 제 의지로 서있는 것들은 저리도 아름답다./ 갈대는 바람을 꺾지 않는다./ 누군가의 옷자락에 쓸리며 꺾인/ 변두리의 슬픔에 내 길이 닿았을 때/ 겨울 갈대는 꽃으로 서있는 게 아니었다./ 먼지 속에서도 빛을 만나면 제 빛을 녹여/ 겨울 갈대의 뿌리에 연둣빛 반란의 무리를 전하곤 하는/ 차디찬 눈구렁에 섰을지라도/ 갈대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의 경우 / 이향지
은사시나무 서 있던 자리에 집이 서 있다/ 누군가 앉고 눕고 날기 위하여 세운 집/ 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나무 한 그루 사라진 일로 숲이 울지는 않는다/ 사라진 나무도 그럴까// 은사시나무 가지에 새를 앉혀 놓고/ 붓과 먹을 찾는 사이에 나무가 사라졌다/ 나무는 물안개가 되었을까/ 나무젓가락이 되었을까 이쑤시개가 되었을까/ 희고 부드러운 펄프가 되었을까// 은사시나무 종이로 편지를 쓰면/ 물안개 번져 잉크가 번져/ 쓴 사람조차 읽어 볼 수 없는 편지가 될까/ 나무는 혼자 서 있는 말뚝이네// 은사시나무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 나무조차 나무를 걱정해 주지 않는 숲/ 점점 엉성해지는 숲 둘레//
또 한 나무가 땅 짚고 / 이향지
땅을 암만 짚어도 싹이 안 난다고/ 벌거숭이 씨앗 둘이 아스팔트에서 울고 있다// 감싸주던 果肉을 한꺼번에 잃고/ 우리도 저렇게 울어본 적이 있지/ 서로를 부둥켜안을 만큼의 넝쿨만 돋아도/ 한 나무 무성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서로 밀어가며 힘껏 뒹굴어보라고// 내가 뱉은 씨앗들은 또 어디어디서 저렇게 울고 있을까/ 약해지지 말자, 나는 지금 사과를 사러가는 길이다// 눈이 내리도록 줄기에 붙어있어도/ 포도씨는 떫다, 두텁고 달콤한 果肉 속/ 사과씨 배씨도 떫다/ 떫어서 퉤퉤 뱉어주어야/ 멀리까지 튀어서/ 또 한 나무가 땅 짚고 일어서는 것// 아무리 뒹굴어도 제 눈물밖에 짚을 곳 없는 씨앗은/ 새벽에 떠나는 큰 트럭을 탔다//
방울토마토 / 이향지
방울토마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나는 방울토마토나무였는데, 지금은 없다. 효정이가 먹었다. 경로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그 아이들은 탐스러운 방울토마토였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국산/ 중량 412g 100g당 310원 가격 1277원 포장 년월일 00.2.17. 판매처 암호 0204437012777 업종 기타식품판매업// 방울토마토 지금은 빈 용기만 있다. 동글동글 잘 익은 방울토마토. 현대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다시 만났는데, 새빨간 심장 한 곽을 다시 만났는데, 지금은 찢어진 투명과 빈 용기만 있다. 아침까지 있었는데, 새빨간 심장 네 알이 내 앞에 남아있었는데, 내가, 방울토마토가, 방울토마토나무가, 한 알씩, 씻어서, 먹어서, 없다.//
방귀에도 껍질이 있다 / 이향지
휘저어놓은 창자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방귀는 꼭꼭 숨었다/ 뿡뿡거리며 재빨리 나섰다가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맹장처럼 싹둑 잘릴지 몰라/ 창자벽에 들러붙어 숨을 참는 것이다// 방귀 터지기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 두레상 둘레에서 까먹고 버린 껍질 생각을 한다// 안방 마루에 독상을 받고 이틀 동안/ 아버지는 백수였다 보리밥 싫어 반찬 싫어/ 밥그릇 바닥을 푹푹 파고 있으면/ 두레상 쪽 엉덩이를 들며 큰 언니 이름을 불렀다/ "아나! 이것 까서 사이좋게 갈라먹고/ 껍데기는 멀리 갖다버려라! 아이들 발 찔릴라!"/ 마룻장 울리며 굴러오는 알방귀 소리에 하하 깔깔 웃다보면/ 갓 삶은 계란 서너 개는 까먹은 듯 목구멍이 보드레졌다// 두레상 둘레에서 방귀 까먹듯 아버지를 까먹고 살다/ 데쳐놓은 소풀 지경에 이르러서야/ 너무 멀리 갖다 버린 껍질 생각을 한다//
금대봉 / 이향지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물은 소리치며 흐르네./ 꽃은 스스로 피기 때문이고/ 물은 비탈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라 하네.// 물이여/ 둥근 물방울이여./ 너의 둥근 패배가 내 목마름을 구하고/ 내 더러움 씻어주네.// 꽃이여,/ 불타는 꽃잎들을 걷어올리고/ 금대봉 풀섶에서/ 꽃등을 켜든 하늘나리여./ 꽃술마다 계곡을 불러 발 씻는 소리에/ 내 귀가 하늘에 떴네.//
왕시루봉 오르며 / 이향지
솔가리 섞인 돌 틈에서 춘란 촉이 눈 틀 때/ 지리산 왕시루봉을 걸어 오릅니다./ 오르는 길은 오솔길/ 산 너머 넘어가도 긴 오솔길./ 어디서 보아야 시루 같습니까/ 대답 없는 사람을 멀리 앞세우고/ 두툼한 솔가리 밟으며 오릅니다./ 왜송 숲 다음은 홍송 숲/ 홍송 숲 다음은 잣솔 숲/ 솔숲에 일렁이는 바람 소리 사귀며/ 오솔길 한 가닥 앞세우고 오릅니다./ 잣송 숲 너머엔 억새 밭/ 억새 밭 옆구리엔 잡목 숲/ 아플 일 없으니 아픔을 만들며, 저 산정까지/ 금빛 강이 내려다보이는 억새 언덕까지/ 잣나무 터널을 뚫고 오릅니다./ 오르면 오를수록 눈이 두터워/ 멧새소리도 동네 어귀에서만 빙빙 도는 때/ 나 살던 곳, 돌아갈 길, 아득히 잊고/ 오솔길 한 가닥 끌고 오릅니다./ 오르는 길은 힘들고 숨이 차지만/ 나는 내일 이 길로 갈색 나비를 날리며/ 내려올 겁니다, 겨울을 부려놓고/ 봄 한 짐 지고, 갈색 나비를 날리며,//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龍牙長城에서 / 이향지
비가 밟고 간 산 머릿길로 들자/ 짙은 안개가 달려와/ 시야를 좁히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가는 뜻을 물으니/ 흙들의 대답이 고분고분 하다./ 후퇴가 허락되지 않는 바윗길로 드니/ 바위 마르기를 기다릴 자유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여럿 중의 하나 된 자! 떨어져 나가라!/ 바위를 당기며 솟구쳐 올라,/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이 서로 다름을/ 몸으로 듣는다.//
저기 산이 있으니 / 이향지
눈이 내려도 모르겠지/ 눈이 쌓여도 모르겠지/ 철조망 밖에서 눈이 녹고/ 냇물이 흘러도 모르겠지// 오목골 오른쪽 등성이에/ 진달래 꽃불이 타고/ 개짓는 집 항아리에서/ 두견주가 익어도 모르겠지// 고루포기산 머릿골이/ 배추밭이 되어도 모르겠지/ 고루고루 포기포기 들판을 이룬 배추들/ 트럭타고 팔려가서 김치가 되어도 모르겠지// 포기 포기 심어놓은 내 발자국/ 덕장 북어는 모르겠지/ 눈과 함께 녹아서/ 서해를 만나도 모르겠지// 철조망 밖에서 달이 자라고/ 철조망 밖에서 별이 뜨고/ 철조망 밖에서 새가 울고/ 다시 눈이 내려도 모르겠지// 그러니까,/ 명태들아!/ 살아서/ 산으로 가자!//
가을 산으로 간다 / 이향지
붉은 나뭇잎에 부는 바람,/ 붉디붉은 나뭇잎에 입술을 대는 바람,/ 내 머리 위 붉디붉은 나뭇잎 물결 위/ 흰 구름 뜬 하늘을 살랑살랑 건드리는 바람,/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갔을 사람의/ 맨머리와 생각을 노을 빛으로 적시었을 바람,/ 한 나무의 뿌리로부터 가장 먼 가지 끝에서/ 떨어지기 전 한 때를 볼 부비며 환하게 흔들려보는 잎새들,/ 저 타오르는 불꽃같은 흔들림 아래/ 처음인 듯 깨어나는 물소리,/ 저 타오르는 불꽃같은 흔들림 너머로/ 떨어진 잎새들 밟으며, 오솔길 타고//
성성 / 이향지
늦었어요, 섬섬옥수/ 몽당비 되도록 길을 쓸며 걸어왔더니, 무서리/ 다음엔 된서리/ 다음엔 눈꽃 핍니다// 탄식할 틈도 없어, 별별 백발이 다 날아와 꽂히며/ 흰눈을 뜹디다// 거울을 볼 때마다 삐죽삐죽 하얀 새싹 돋으니, 한라산/ 칼바람 찾아 깨끗이 자르고 오자!//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을 기며, 백록담/ 올랐더니, 파란 한공에 나부끼던 은하까지/ 출렁 걸립디다// 은하에 머리 감고 까마귀를 날리며/ 아침 산을 내려갑니다//
범여울 / 이향지
저, 저 고양이가 물어갈 호랭이 같으니라고. 그러니께 저게 다 같은 족보로구먼 그랴. 곶감에 놀라 소도둑 태우고 삼십육계 치던 이가 할애비고, 얼음낚시하다가 저수지에 꽝꽝 꼬리 물린 치가 삼촌이고, 사냥꾼에게 한 벌 가죽 벗기고 오들오들 떨며 하릴없이 칡담배 팍팍 피우던 그 호랭이 외손녀로구먼 그랴. 여남은 살 되도록 토끼 한 마리 시원하게 못 잡다 용케 시집 가 배부른 것 기특하더니만 피는 못 속이는구먼 그랴.// 놀랍고 정신없기야 했겄지. 큰물은 덤비지, 애들은 울지만. 허나 삶이란 게 본래 비는 오는데 소는 뛰지, 꼴짐은 넘어가는데 오줌은 마렵지, 오줌은 마려운데 허리띠는 안 풀러지는 것 아니겠나. 대체 범강이 장달이, 이순신 같은 호랭이는 다 어디 가고 고양이 똥 치울 호랭이만 남았는고?// 에고, 남의 얘기 할 바 아니라고? 범은 없고 범여울만 남은 시대여, 우리는 또 돌에 눌려죽을 어느 자식을 입에 물고 이 세상을 건너는 것이냐.//
기억이 기억하게 / 이향지
불 꺼진 램프와 해 그림자/ 길고 높은 못, 천장 바짝 가는 끈에 매달려 있다/ 그을음이 생긴 적 없는 램프는 실내장식용이다/ 가만가만 흔들리는 온도까지 느끼려면 더 다가가야 하는데/ 초점을 벗어나면 그림이 달라진다// 그 자리 그대로가 아니다/ 비스듬 열린 문틈으로 빛이 드나든다/ 조금씩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는 전개/ 대각선을 비켜서 포개지다 미끄러지다 이어지다 다시 꺾어지는/ 빛과 그림자놀이/ 어디서 많이 보았다/ 모서리와 면을 이어주는 방식이 한참 낯익다/ 나보라고 나에게만 다녀가는 빛/ 허기와 포만은 같은 것이다// 극지의 삼각점/ 성긴 눈발에도 미끄러지던 것들/ 해가 가는 만큼 짧아지거나 휘어지거나 부서지거나 어두워져서 돌아오던 것들/ 납작해지는 쪽이 편할 때도 있었지/ 무엇을 더 자라기를 바라지 않는 것// 소금과 설탕은 희다/ 짠 것과 단 것을 알아차리는 혀는 본능이다/ 돌아보면 언제나 같이 있었다//
둥글고 환한 구멍 / 이향지
달빛이 부서진다/ 달빛이 부서진다/ 삼복 날 부채 같이 훌렁거리는 개꼬리에 감겨/ 섣달 보름 둥근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얼음이 쩍쩍 붙는 밤// 子正에 개밥 주러 나온 게으른 여자가/ 냄비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밥알을 긁을 때/ 스테인레스 숟가락 등에 부딪쳐 부서져 내린다/ 숟가락 목으로 탁탁 쳐서 끈끈한 밥알을 떨굴 때/ 숟가락 자루 쥔 손등에 걸려 부서져 내린다// 일어서서 실눈을 뜨고 달을 쳐다본다// 영하 58℃의 寒風에, 달은/ 멀고 아득한 하늘 속까지 떠밀려 갔다/ 달이 빠져나간 구멍은 둥글고 긴 홈통 속이다/ 홈통 끝은 낮인가, 홈통 저쪽만 텅 비어 환하다/ 잘 얼린 얼음같이 푸르스름하고 판판하고/ 환한 구멍, 저 둥근 구멍 밖에 달이 있는가/ 홈통 밖은 부서진 달빛만 자자하다// 다복솔이 어깨와 머리에 앉은 눈가루를 터는 밤// 한 번 더 실눈을 뜨고 홈통 속 들여다본다/ 달은 없다, 구멍뿐이다/ 주먹을 이어 붙여 주먹 망원경을 만들어 본다/ 조리개를 좁히고 망원경으로 당겨볼수록 달은 더 없다/ 섣달 보름 둥근 달이 雪寒風에 떠밀려 먼 우주로/ 빠져나간 구멍뿐이다, 둥글고 환한 구멍 바닥에/ 낯익은 나무 그림자 하나 흐리게 누워 있다// 그래도 달은 둥글고 환한 구멍 하나는 남기고 간다//
가죽 / 이향지
내 증조 할머니/ 산유골 일굴 때/ 보름마다 큰 나무통에 김 오르는 쌀밥 담아/ 정지 뒷문 밖에다 내어놓고 돌아! 돌아!/ 아아들 놀랠라! 살째기 와서 묵고 가거라!/ 대숲을 향해 소곤소곤 부르면/ 어흥 소리 나직하게 내며/ 나타났다는 호랑이// 쫓기고 쫓겨서 내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는지// 어머니 어느 날 내게 고백하시기를/ 네 넟은 집채만한 불호랭이였다/ 니는 바로 그 집에서 났다// 그후론 잠결에도 내 가죽을 쓸어본다//
가로수 / 이향지
오월, 비 오는 날/ 여왕이 영원히 외출한 거리/ 연둣빛 두레방석들 퍼질퍼질 둘러앉아 비를 맞는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저기서 어깨가 들썩거린다/ 분홍방석이 향기롭게 부풀었던 자리다./ 분홍방석은 열흘도 못가 다 떨어졌다/ 비는 영롱한 손길로 씻고 또 씻는다/ 비 그치면 꼬부라지도록 해가 앉아 놀 것/ 목구멍이 금세 텁텁해지는 도로변에서/ 연두는 재빨리 초록이 되고 초록은 갈매가 되고/ 불길에 휩싸였다 뼈만 남을 때까지/ 같은 자리에 펼쳐져 있어야하는/ 방석의 길,/ 새는 무시로 뚜껑을 열고 닫는다/ 방석 안 눌린 소리들을 활짝 펼친 하늘로 나르고/ 빛나고 가벼운 공기를 날라다 방석 속을 부풀려준다/ 다 보이지만, 나는 무겁고 너무 높이 떠있어서/ 저 작은 새처럼 할 수는 없다/ 저 두레방석들 뿌리 곁까지 걸어 내려가면/ 어둡고 까칠한 둥치들은 안아볼 수 있겠다//
죽고 싶을 때 / 이향지
소나무는 솔방울을 주렁주렁 매단다/ 나비는 떼지어 날다 젖은 땅에 내려앉는다/ 고추잠자리는 떼를 지어 공중 춤을 춘다/ 나그네쥐는 줄을 지어 바다로 간다/ 고래는 떼를 지어 모래밭으로 올라온다/ 만조 때 개울어귀에서 전어는 달빛을 향해 튀어 오른다/ 연어는 꼬리지느러미로 제가 태어난 개울바닥을 판다/ 지렁이는 아스팔트 위를 종횡무진 기어다닌다/ 가시나무새는 가시나무 가시에 가슴을 힌껏 찌른다는 말 있다/ 늙은 개는 주인이 잘 보이는 나무 아래 눕는다/ 사람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알 속으로 들어간다/ 별똥별은 길고 빛나는 일자 획을 비스듬히 긋고//
알므로, 강이다 / 이향지
흐르고 넘치기만 해서야, 강이겠는가/ 모자란 듯, 모자란 듯,/ 스미고, 고이고, 머물 줄도/ 알므로, 강이다/ 자란자란 떠밀려, 생각 없이 따라 가고/ 따라 웃다, 따라 울다, 따라 살다/ 몹시 굽고 헤살부리는 낭떠러지를 만나,/ 먹먹하니 주저앉는 골짜기를 만나,/ 제 허울 조각내어 들여다 볼 줄도/ 알므로, 강이다/ 한 방울로 만났던 기쁨/ 그 영롱한 순간들,/ 그 투명, 투명들 방울방울 모여/ 깊고 푸른 물무덤을 이룬 곳,/ 오늘은, 그 기슭에 쉰다/ 기러기처럼 이마로 날다 몹시 떨어졌던 곳,/ 있는 듯, 없는 듯, 숨 돌리며 쉬고 싶은 곳,/ 사랑해, 사랑해,/ 엄지를 세워주던 가을 물기슭,/ 그 풍경, 손사레치며 떠날 줄도/ 알므로, 강이다/ 무한정 살고 살리고 싶어서 강이 아니라,/ 시름시름 앓는 목숨들/ 소스라치게 껴안고 돌아 볼 줄도/ 알므로, 강이다//
글자들 / 이향지
나뭇잎이 바람에 묶여 있었는가/ 바람이 나뭇잎에 묶여 있었는가/ 묶여서, 어디로 흩어지던가/ 묶여서, 무엇으로 다시 오던가/ 내 눈 앞의 것들/ 내 귓속의 것들/ 내 생각 속의 것들/ 무지개로 왔던 것들/ 기러기로 왔던 것들/ 꽃으로 창으로 돌무더기로 왔던 것들/ 애통애통 바장바장/ 둘러싸고 살고 죽고/ 죽고 살고 둘러싸고/ 아무 향기도 소리도 없는 것들/ 내가 왜 그것들인가/ 그것들이 왜 나인가/ 먼 세상의 이야기들 모두 나뭇잎 되어/ 노랗게 바알갛게 다시 물이 드는데/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더 묶여서/ 가자는가 어디로/ 오자는가 어디로//
노숙 / 이향지
길 위에 누웠다. 가리봉 정상 바위 위에 누워 노숙을 한다. 텐트조차 세울 수 없어 침낭 한 겹 둘렀다. 흐르는 공기의 방. 드문드문 별 박힌 흐린 하늘이 내 천정. 빠르게 흐르는 구름 아래, 봄을 기다리는 번데기 한 마리. 배낭은 베개가 되고, 등산화는 이슬 싫어 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집 두고 길에 누운 여자 머리맡 지킨다.// 해질 무렵 이 바위에선 날개미들의 비상이 있었다. 수만 마리의 수개미들이 날개를 떨며, 한 마리의 여왕개미를 호위하고 날아올랐다. 회오리처럼 빙빙 도는 검은 구름. 날개 떠는 소리가 울음소리 같았다. 한 마리의 수개미만 있으면 되는 일에 그토록 많은 들러리를 세우는 게 자연.// 날다가 떨어진 개미들이 밤늦도록 바위 위를 기어다닌다. 우묵한 곳에는 날개미들의 시체로 수북하다 내 침낭은 날개미들의 시체 위에 있다. 추락한 수컷들을 깔고 누웠다니, 기분이 좋다. 동정을 지닌 채 죽은 것들의 시체와 동정을 잃고 새끼를 남긴 것들의 몸뚱이 위로 별 달 구름 바람이 뒤섞이며 흐른다. 자연은 잔인하지만 生과 死를 수평저울에 올리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 한 쌍의 날개미가 밀월여행을 떠난 하늘에선 구름이 오줌을 싼다. 별빛이 말려놓으면 다음 구름이 오줌을 싼다. 달빛이 호호 불어놓으면 다음 구름이 더 많은 오줌을 싸고 간다. 나는 구름의 오줌에 젖지 않으려고 지퍼를 단단히 올리고 침낭 뚜껑을 끌어다 얼굴까지 덮었다.// 발아래 나무들 단풍드는 소리에 산이 끙끙 앓는다. 뚜껑에 달린 지퍼까지 안에서 채우고, 침낭 속의 번데기도 끙끙 앓는다. 눈부신 태양이 깨우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다짐했지만, 번데기가 먼저 일어나 구름 속의 태양을 깨웠다.//
띠포리로 가겠다 / 이향지
띠포리는 무게로 산다// 띠포리 값은 성깔 값이다 띠포리 값은 눈알 값이다 띠포리 값은 허장성세, 은빛 비늘 값이다 띠포리 값은 턱없이 뻣뻣한 등뼈 값, 노골노골 꺾이지 않는 늑골 값이다// 물 있을 때의 헤엄이다/ 띠포리는 울음을 그친 것이다// 알맞게 마른 띠포리/ 그물에 걸려 바다 밖으로 내팽개쳐질 때/ 무더기로 은퇴당한 고향 띠포리/ 띠포리 값은 두고두고 우려먹는 국물 값이다// 포획의 기쁨도, 그물 안의 비상도, 지분지분한 이익에 끌려 속수무책 팔려가는 신세도, 띠포리의 것은 아니다// 헤엄 끝난 육체에서/ 마른 고기 한 점 발라 고추장에 찍어 먹이는 맛,/ 한 젓가락도 못 되는 빈약한 몸뚱어리/ 져 나르거나 퍼 나르거나 상관할 바 없다 싶을 때,/ 얼룩 많은 누군가의 비늘이라도 닦아 줄 수 있다면/ 그 띠포리는 잘 산 것이다// 띠포리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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