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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미정 시인

부흐고비 2021. 11. 9. 08:53

 

강미정 시인
1962년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 』에 ‘어머님의 품’외 4편으로 등단.

<빈터>동인, (사)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집 『타오르는 생 』 『상처가 스민다는 것 』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등.

 



참 긴 말 / 강미정
일손을 놓고 해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 엄마 언제 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 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 같이/ 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 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지며 듣는/ 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 살 붉은 손이/ 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 잘 있냐? 병 앓고 일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핀 꽃처럼/ 소리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저녁 밥상 앞/ 자꾸 자꾸 자라고 있는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는/ 엄마 언제 와? 엄마, 엄마라고 불리는 참 긴 이 말/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씻어내는 빨랫감처럼/ 손이 곱는 말이리 참 아린 말이리//

자전거 체인 소리 / 강미정
그 아이는 두 발 자전거를 탄다/ 발이 잘 닿지 않는 페달을 밟으며 몸이 쏠리며/ 삐뚤삐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바퀴살을 돌린다/ 아이는 쌩쌩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는 날을 당기며/ 자신의 중심을 향해 달려간다/ 아슬아슬 끝없이 멀어지는 아이의/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나는 체인 소리가 참 좋다/ 나는 그 아이만 볼 때도 있다/ 아이가 굴리고 가는 바퀴살만 볼 때도 있다/ 짐칸에 앉아 아버지의 허리를 껴안던 아이/ 고정시킨 자전거를 타고 페달 밟는 연습을 하던/ 그 길을 가르며 다시 자신의 중심을 향해 돌아올 아이/ 어제는 자전거 의자의 빗물을 손으로 쓱 훑어내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비에 젖지 않게/ 얼른 방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은 불안해,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늦은 시간까지 아이의 우산이 씌워져 있던 자전거/ 빗속을 자전거와 함께 한참을 서 있던/ 그 아이가 굴리고 가는 맨발의 체인 소리가 참 좋다/ 아이가 지나간 뒤 한동안 몸 흔들고 있는 강아지풀/ 떨리지 않고 흐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 강미정
아빠는 검은 안경을 끼고 오셨어요/ 어둔 밤이 와도 검은 안경은 벗지 않으셨어요/ 내가 아빠 얼굴을 바라볼 때면/ 검은 안경을 낀 아빠는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빠는 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세요?/ 아빤 왜 검은 안경을 끼세요? 하면/ 내가 너무 눈부셔서 고개를 숙인 거래요/ 내가 너무 눈부셔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거래요/ 너무 눈이 부시면 눈을 다치거든요/ 아빠가 그랬어요 나와 헤어질 때/ 검은 안경을 낀 아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내가 너무 눈부셔서 눈을 다친 거래요/ 선물 많이 사 가지고 또 올게,/ 눈이 다 나으면 올게 약속했는데요/ 아직 눈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아빠를 기다릴 때 해를 바라보는데요/ 눈 다친다, 내 등을 쓸어주시던 아빠 손이 느껴져서/ 뒤돌아보면 내 눈은 캄캄해지고 눈물이 나요./ 또 아빠가 보고싶으냐? 잘 생긴 네 얼굴이 아빠야,/ 원장님이 지나며 똑같은 말씀을 또 하시겠죠//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 / 강미정
장맛비 내리는 창에는 창을 바라보는 당신과/ 입술이 빨간 내가 겹쳐져 있네// 모처럼 겹쳐진 당신과 내가 어룽어룽 빗물 속으로 흘러가네// 박꽃으로 지붕을 덮은 넓은 이파리 그늘 속에서/ 팔락팔락 배추흰나비의 날개짓 소리는 짙고/ 아무도 지나지 않는 돌담 밑 봉숭아 씨가 톡톡 터지네// 풋것의 보따리를 발아래 두고 술병을 비워내는 당신과/ 한 쪽 수족을 쓰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배웅을 받은 나는// 열차 등받이에 푹 기대지도 못한 채/ 서로가 가진 여러 생각의 입구를 입술로 꽉 깨물어 여미고/ 서로 몸 겹쳐지는 창밖의 풍경만 자꾸 눈에 쌓네//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에서 서로 몸 겹친/ 당신과 나는 생전처음의 연인, 눈을 떼지 못하는// 팔월 푸른 그믐의 별똥별이/ 밤하늘을 그으며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를 타러 오네//

떨림 -그대에게 / 강미정
젖은 수건 속에 오이씨를 넣고/ 따뜻한 아랫목에 두었죠/ 촉 나셨는지 보아라,/ 싸여진 수건을 조심조심 펼치면/ 볼록하게 부푼 오이씨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반쯤만 열고 있었죠/ 촉 나시려고 파르르 몸 떠는 것 같아서/ 촉 보려는 내 마음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조심조심 수건을 펼쳤던/ 저의 손은 또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촉 나셨는지 보아라,/ 아부지 촉 아직 안 나왔슴더,/ 빛이 들지 않게 얼른 덮어 둬라,/ 빛을 담기 위해선 어둠도 담아야 한다는 것을/ 한참 뒤 나중에야 알았지만요/ 그때는 빨리 촉 나시지 않는 일이/ 자꾸만 펼쳐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오래 들여다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촉 날 때까지 걱정스레 내 마음을 떨었죠//

기다림 / 강미정
어떤 굴곡진 마음이/ 저 황금벌판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밥은 잘 먹고 댕기냐? 어디 아픈 데는 없냐?// 저녁밥 지으려고 쌀통에서/ 쌀 내리는 소리 같은 바람이 일었다//

연애 / 강미정
살아보지도 않은 이천 년의 달빛을 밟고 한번은 당신이 오고 한번은 내가 오는 사이라하여 우는 마음을 데리고 물가에 앉아// 그윽한 세계란 한번 와서 한번 가는 세계 한번 가서 영영 오지 않는 세계// 한번은 연둣빛 봄비로 오고 한번은 봄비 스민 봄꽃으로 와 어렵게 만난 이 봄날은 50년이 흘러간 뒤거나 50년을 더 기다리는 시절,// 살아보지도 않은 이천 년의 달빛과 샛바람 많은 음력 이월의 짧은 만남을 스쳐가는 사이라하여 울 수가 없는 마음을 데리고 물가에 앉아// 번쩍 하늘을 찢어내는 순간에 봄날은 계속되고 번쩍 한 번의 섬광에 살갗을 찢는 봄꽃은 계속되고// 쉰 번째 만나고 헤어져서도 영영 오지 않는 쪽은 당신이어서 우리의 연애는 푸르스름한 저녁 물 위에 어리는 안개라// 잔주름 많은 마음을 펼쳐 살아보지도 않은 이천 년의 달빛을 하염없이 끌어안은 여기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 단 하나의 세계// 그윽한 마주침으로 곧 사라질 물빛에 모두가 젖는 곳 새로 돋아날 울음으로 모두가 우는 곳//

여러 겹으로 된 한 통의 연애 편지 / 강미정
저렇게, 계단에도 창문에도 전봇대에도 붙어서 우는 매미처럼 저렇게 지겹게 저렇게 표독하게 저렇게 애절하게 생을 다하여 부르는 이름이 한 번 되어 볼래? 생이 다 질 때까지 놓지 않는 독한 향기가 되어 볼래? 애타는 목소리로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우리, 사랑이라는 걸 한번,/ 해 볼래? 외로워도 외롭다 말못하고 괴로워도 괴롭다 말 못하는 자신을 혼자 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혼자 견딜 수가 없어서 컴컴한 땅 속으로 자신을 던진 굼뱅이가 매미의 전 생애일거야, 말하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너의 눈물 속에 갇힌다 파르르, 떠는 꽃잎처럼 너는,/ 운다, 울어도 내 울음소리가 나에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서 실컷, 울 수 있는 폭풍우가 몰아쳤으면 좋겠어, 성난 바다로 달음박질쳐 가는 내 가슴속에도 사나운 바다가 있는 모양이야, 노래도 안나오고 눈물도 안나오는 노래연습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울지, 눈물을 저장하는 사람은 몸이 아파, 낙타의 등처럼 네 등에도 아픈,/ 물혹이 돋는다 틈나면 차에서 들으려고 네가 보내 준 울음소리를 녹음시켰어 햇살이 제법 톡 아프게 쏘기도 하는 이 여름에도 톡 쏘는 추위와 톡 쏘는 배고픔은 따스해서 몸이 신열로 뜨고 삶이 단물 져 무겁지, 내 몸에 붙어서 우는 저 무거운 매미소리 좀 꺼 줄래? 간절히 네 이름만 부르는 저 독기,//

 

멍 / 강미정
이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내 몸을 콱 깨물고 있는 푸른 멍은/ 내가 넘긴 한 장의 달력처럼 가볍거나/ 무거운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생각했는데/ 뾰족한 모서리에 부딪혀/ 마음을 다친 적이 수없이 많았으므로/ 다치지 않으려고 몸밖의 모서리를/ 몸 안으로 옮겨와 뾰족함을 삭여내느라/ 내 몸이 푸르게 피는 것이겠지,/ 다친 마음이 둥글어지는 것이겠지,/ 생각도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몸에서 피고지는 푸른 멍을 어루만지며/ 너도 네 몸에다 나의 아픔을 가두기도 했겠다,/ 내 뾰족함이 너를 아프게 찔렀을 것이므로/ 내 뾰족함이 삭고있는 동안/ 너도 아팠겠다, 생각해보는 것이다/ 서로를 너무 세게 껴안았으므로/ 푸픈 멍이 피어나는 것이다,/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에게만 몰두한다 / 강미정
몰두한다, 나는 너에게만 몰두한다 몰두 속에서 나는 한없이 길들여지고 한없이 난폭해지고 한없이 생략되고 한없이 촘촘해져 화분 속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뿌리처럼 촘촘해져 화를 내고 어리석어진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만 몰두한다 몰두 속에서 너는 미소 띤 장미꽃다발을 들고 내 가슴속으로 뛰어들어온다 한없이 느긋하게 한없이 따뜻하게 한없이 아프게 찔러대며 나를 덮는 사랑이여, 나를 벗어나고 싶어 어디로든 가겠다고 몸을 몰고 가면 몰고 가버린 내 마음이 그 어디든 그 어느 곳이든 너에게로만 닿는 저녁, 언제나 너에게로 돌아온다 갈 곳이 너밖에 없어 물을 끓이면서도 몰두 국수를 삶아내면서도 몰두 고명을 얹으면서도 몰두, 몰두한다 모든 방향을 지우고 붉게 들여다보는 몰두여,// 맹목은 빠져나올 생각을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홍양 / 강미정
호로록 지는 꽃 보러 가자했더니/ 애인은 홍양과 살림을 차렸노라 했다/ 대낮부터 홍양을 안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넘실대는 꽃의 맹목을 보노라 했다/ 애인의 연막은 꽃나무처럼 몽롱하여/ 어눌한 꽃바람이 일고/ 뭉게뭉게 천박한 의문이 일어/ 호로록 꽃만 지는 봄날/ 사나흘 뒤 보낸다던 홍양은 갔느냐 물어도/ 아쉬워서 아직 허벅지에 끼고 있느냐 물어도/ 애인은 대답이 없고/ 쿨럭쿨럭 어두운 내 마음이 앓아누웠다/ 꽃의 존재를 은폐한 꽃나무처럼 앓아누워/ 혼자 홍양홍양을 앓는 사흘 동안/ 꽃 보러 가자는 애인에게/ 달뜬 몸이 봄날을 앓는 중이라 했다/ 붕붕거리는 벌떼처럼 죽고 사는 일상의/ 부조리를 읽는 중이라 했다//

색을 쓰다 / 강미정
겨울에서 봄 쪽으로 비 내린다 고요한 물살 흐른다 소리 없이 서로 몸 섞는다 은밀하게 받아들인다 구석구석 어루만져 주고 핥아준다 구름 속 초승달 가는 눈썹을 딛고 사각사각 댓잎 초록을 걷는다 귀닳은 산사 돌계단을 내려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범종 곁에 다달았다 드디어 종이 운다 주름 많은 종소리 은은하게 흐른다 흘러간다 땅으로 스민다 저녁을 싸안은 물의 결과 주름 깊은 둥근 종소리의 결이 몸 섞는다 한 몸으로 흐른다 흘러간다 망울진 홍매화 속으로 빨려든다 가장 먼 곳의 종소리와 가장 먼 곳의 빗소리가 은은하게 꽃잎에 스민다 붉은 색으로 쟁여진다 얇은 어스름이 짙어진다 종소리도 빗소리도 붉은 꽃잎을 찍어내고 어스름 속에서 아득하다//

숨결이라 이름 불리는 시간 / 강미정
그래서 하루 종일 바람소리에 귀를 댔다/ 매일 내 이름을 불렀다는 목소리를/ 어쩌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무궁화꽃 돌돌 풀어 꽃피우는 것이/ 나를 부르는 당신 목소리일까/ 하필 내 발끝에 떨어지는 쥐똥나무 까만 열매가/ 나를 부르는 당신 목소리일까/ 어떤 시간은 나의 전부를 밀고가야만/ 나에게 당도하는 것이 있다/ 내 눈빛에 내 귀에 끝없이 내 마음에 닿는/ 숨결이라 이름 불리는 시간/ 한 호흡이 끊어져 침묵으로 오고/ 한 침묵이 삭아져 숨결로 오는/ 이 모든 것은 이곳 삶의 일부분/ 하루 종일 당신숨소리로 펄럭이는/ 내 노래는 멈추지 않고/ 그 노래 흥얼흥얼 따라 불렀는데/ 흘러나오는 내 노래는 울음이고 눈물/ 이 노래는 내 몸 어느 부위에 스몄다가/ 눈물로 나오나/ 이 노래는 내 뼈 어디에 스몄다가/ 지극한 울음으로 나오나/ 나의 숨결이 되었다는 당신/ 아직도 내 이름을 부르는가 멈추었는가/ 그래서 하루 종일 바람소리에 귀를 댔다//

좋았다 / 강미정
내 눈이 만지고 있는 것이 빗금 져 내리는 햇살에 눈을 감고 초록 나뭇잎 아래에/ 앉아 있는 당신이어서// 지금 막 당신은 내 마음에서 왔고 내 프레임 속에서 미소 짓는 당신을 내 마음/ 가장 아름다운 중심에 둘 때// 당신이 눈을 찡긋, 신호를 보내며 찍은 내사진이 모두 빗금 져 내리는 햇살에 눈/ 이 부셔 눈을 감고 있는 것이어서// 당신이 내 마음에서 눈부시다, 미소 지으며 눈을 감는 이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서러워지는// 그때 막 당신이 당신마음 가장 아름다운 중심에 나를 두었다고 할 때 나뭇잎을 타고/ 졸졸 내려오는 햇살처럼// 좋았다//

묶인 새* / 강미정
어쩌다가, 저 새는 가녀린 제 목을 묶었을까요 묶은 줄에 돌을 매달았을까요 가지런히 두 발을 모으고 돌의 무거움으로 자신을 묶은 저 새는 자목련 그늘 같은 저녁 어스름을 붉게 바라보는 저 새는 비비비쫑쫑 빛나는 메아리 한 줄 긋지 않는 저 새는 다소곳이 앉아 어둔 적막에 길게 목을 뽑은 저 새는 푸드득 날개를 펼치고 재빠르게 날아갈 자신의 가벼움을 꾹꾹 견디는 중일까요 나는 새가 가졌던 묶인 울음을 데리고 마음의 물가에 앉아요 묶인 새를 풀어주고 새장 속에 가만히 앉아요 돌에 묶였던 무거운 울음을 가슴에 가두고 가만히 앉아요 새장에 가두고도 견딜 수 없어서 돌을 매단 사람을 생각하며 가만히 울어요 가지 마 가지 마 불안한 마음이 목을 묶었을까요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돌을 묶었을까요 묶인 새를 생각하며 가만히 울어요 새의 울음을 빌려 내가 울어요 당신의 무거움에 나도 묶이고 싶었을까요 당신에게 묶이며 나는 당신을 묶었을까요//
* 이중섭 그림

배웅 / 강미정
그날 저녁은/ 생가지 타는 연기가 가슴에서 일어/ 눈이 매웠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이메일에는 악보가 불타고 있었다/ 바람 속으로/ 첼로선율이 뜨겁게 날아가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을 보내지 못한 내 마음임을 알았다/ 악보가 불타는 동안/ 미움이 남았으면 다 태워 달라는/ 주문 같기도 했다/ 인생은 불타는 악보처럼 연주해야 한다고/ 노래는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고/ 불이 닿은 악보는/ 붉게 번지다가 검게 날렸다/ 노을 속으로 스몄다/ 소리를 놓아주며 바람이 되고 있는 악보/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고/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가슴을 퍽퍽 치면서 말하던 당신은/ 내 마음의 어디에 스미는 걸까/ 매운 연기가 일어/ 눈이 오래 매운 것이/ 불타는 악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라,라,라,음의 / 강미정
칼금이 그어진 내 몸에/ 주름진 손을 얹고 밤새 훈자 운 손/ 너는 너를 너무 미워하는구나/ 자기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좋다./ 라, 라, 라, 음의 목소리로 말하는 손/ 통증을 견디지 못하는 헛손질의 내 손을 꼬옥 잡고/ 잘 견뎌줘서 고마워, 고마워 웃던 손/ 흥건히 땀을 쥐고 있던 손/ 잃어버릴 것이 있으니 두려운 거야/ 아기집도 내어주고 젖통도 내어주고/ 간도 다 내어주고 나면 안 아프겠지 머/ 젖은 수건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다 만진 손/ 푹 꺼진 마음의 구석까지 쓰다듬던 손/ 또 어떤 일이 닥칠까 내 손은 떨리는데/ 내 마음은 두려운데/ 다 주고나면 가벼워 질거야,/ 라라라 음의 목소리로 얼굴을 씻어준 손/ 눈물방울 하나하나 닦아 준 손/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내 손을 잡아준/ 손 라라라 웃으며 내 손을 놓지 않던/ 그,//

벙어리아주머니 / 강미정
링거 주사를 맞는 내 침대 옆에/ 벙어리아주머니가 실려 왔다/ 꺽-꺽-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가슴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울음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 곁에서 아저씨가/ 벙어리아주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기를 재우듯 가슴을 톡톡 다독여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느냐/ 뭐가 그렇게 속상하더냐 아저씨가 물었다/ 당신 마음 몰라주어서 미안하다고/ 아저씨가 대답했다/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벙시레-웃었다// 그들 곁에서 혼자 벙어리아주머니가 되어/ 아저씨가 묻는 말에 대답을 다했던 나는/ 억눌렸던 말과 하지 못했던 말을 다했던 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늦게 피워 올린 꽃송이 같이/ 벙긋 얼굴을 펼쳤던 것인데 눈물이 났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쏟아내는// 그대와 나는 진짜 벙어리,// 웃고 달래며 걱정하는/ 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저들은 서로 너무 잘 알아듣는 이야기에/ 두 귀 쫑긋 세우며 혼자 울었다//

상사화 / 강미정
뿌리에 담고 있는 얘기를 문득 하고 싶은 인연이 만나지기도 할 것이기에 굴곡 많은 마음을 적시려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게 아니겠는가 꽃이 필 때에는 잎은 이미 말라서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하여도 그렇게라도 제 심정을 꼭 한 번은 털어놓고 싶었지 않았겠는가// 여태껏 내가 가꾼 것이 당신이 와서 맡고 갔으면 하고 바란 향기 한 올 뿐이지만 굴곡 많은 걸음/ 이 얼마나 많은 달빛을 걷고 얼마나 많은 별빛을 가슴에 묻어야 그리움이라 하겠는지 독이라 하겠는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우리가 형체도 모르는 그리움에 스미고 스며 설움을 걷고 스미고 스민 설움으로 내 안이 아프게 물어뜯기고 있는데,// 푸른 잎으로 걸어 나간 당신의 길 위에 꽃으로 걸어 나간 내 길을 떨리게 겹치며 없는 당신을 그리는 이런 겹침도 사랑이라 한다면, 모든 바람을 암벽으로 세우고 절벽을 걷는 이런 굴곡 많은 걸음도 사랑이라 한다면 간절한 날을 새기려고 저 꽃이 피고 간절한 그리움을 잊지 않으려고 피멍 돋은 저 잎이 피는 것이라고 한다면,// 꽃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길이 잎으로 걸어 나간 내 길 위에 잠시 어렵게 겹쳐진다면 그것은 굴곡 많은 바람이 잠시 다리에 힘을 빼고 온 힘으로 당신을 껴안듯 황홀을 입는 것이 아니겠는가, 뜨거운 강을 입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늘한 아픔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겹쳐져 굽이치며 죽을 때까지 살아 흐르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벚나무 / 강미정
한 번은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의 오줌을 받아 주어야 했다/ 환자는 소변기를 갖다대기도 전에 얼굴이 뻘개졌다/ 덮은 이불 속에서 바지를 내리자/ 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그것,/ 나도 얼굴이 빨개졌다/ 이불 속에서 소변기를 걸쳐놓고/ 그것을 잡고 오줌을 눌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안한 눈은/ 창 밖 벚나무 가지 위로 오르는데/ 벚나무도 뜨겁게 솟구치는 제 속을 받아내는지/ 펑펑 눈부신 소리로 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 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던 햇빛이/ 후딱 일어나 수천 개의 혀를 내밀더니/ 내 눈을 휘감아 가버렸다/ 놀란 나는 캄캄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벚나무 아래에서 와와, 숨 멎는 소리만/ 내 눈에 고였다가 넘쳐흘렀다/ 그날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내내 돌아누워/ 밥도 먹지 않았다//

수국꽃다발 / 강미정
테이블 위에 수국꽃다발 두 개,/ 갑자기 테이블은 봉긋한 깊이를 가지고 침묵한다/ 꽃을 쓰다듬는 눈동자가 생기고/ 손가락이 생기고 설레는 두 손이 뻗어 나왔다// 사랑스런 여인의 가슴을 만지듯/ 둥그레 꽃을 만져보는 남자,// 유방암 예방으로 브래지어를 풀고 자는/ 자다보면 젖무덤에 손이 가있다는 거다/ 말다툼이 줄었다는 거다/ 뾰족하던 감정도 무뎌졌다는 거다/ 무엇보다 마음이 순해져 일상이 평온해졌다는 거다// 그러니 저 둥근 꽃숭어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한 게 맞다,// 밤마다 내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당신의 손도/ 우리의 뾰족뾰족 거친 것을 혼자 풀었다는 것// 수국꽃다발처럼 내가 가진 침묵 속엔/ 당신을 열고 설레게 한 부드러운 암호가 있다는 것,//

그곳, 나팔꽃을 가꾸는 / 강미정
전봇대에 붙어있던 구인광고에 전화를 걸려고/ 막 수화기를 든 순간이었다/ 발이 땅에 닿자 땅바닥에 깔렸던/ 햇빛은 또르르, 몸을 말아 길을 비켰다/ 발가락이 툭툭 비져나온 옥수수 대가 흔들렸다/ 학교갔다 오냐? 푸른 콩밭에서/ 흰수건만 보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조그만 내 손을 잡고 쓰기법을 가르쳐주던/ 커다란 손이 쨍쨍쨍, 소금꽃을 피우며/ 검게 타올랐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흰수건을 쓴 목소리가 부르던 노래를/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다가 고개를 든 그 곳,/ 나팔꽃 넝쿨이 전봇대 허리를 휘감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에구, 어서 오너라 어서, 햇빛뿐인 길 저 쪽에서/ 누가 자꾸 손을 흔드는 것 같아/수화기를 든 내 손을 번쩍, 들었다가 놓았다/ 다 잘될 거야 걱정 마,/열 번도 넘게 나와 맞닥뜨려졌던 목소리 같은데/ 또 다시 최초로 나에게 와서/ 두 손으로 어깨를 두들겨 주는 그 곳,/ 맨발의 아이들이 리코더를 불며 햇빛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뻔뻔한 홍매화 향기 / 강미정
이제 홍매화는 요염한 자태를 한껏 내뿜으며 늙어가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에 든 사람들은/ 뉘엿한 햇살을 뚫는 범종소리 속으로 두 손을 모으며 들어갔다/ 둥근 무늬를 그리며 범종소리가 홍매화 그늘 아래로 가득 고여 왔다/ 몇 겁의, 햇볓에 쟁여진 꽃잎이 겹겹으로 떨리는 듯 했다/ 법고의 울음소리며 목어의 비늘빛이며 운판의 날개짓을/ 다 빨아먹은 눈빛으로 홍매화는 서 있었다/ 나는 그 늙은 향기에 갇혀 있었다/ 지 새끼들을 생각하면 뻔뻔스러워야제,/ 뭉뚝한 손끝을 모으며 탑을 돌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독하고 뻔뻔스러운 늙은 홍매화 향기 속에 계신/ 나도 문득 뻔뻔스러운 향기를 가진 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즐거운 꽃 / 강미정
같은 말로 씌어진 봄 하나가 온다/ 같은 말로 씌어진 감나무가 꽃피고 같은 말로 씌어진/ 여자가 꽃피고 같은 말로 씌어진 모든/ 세상이 다시 꿈꾸기 시작한다/ 꿈꾸는 내부는 뜨겁고 뜨거운 내부는/ 빛이 나고 빛나는 것이 꽃으로 핀/ 모든 꽃은 뜨거워, 뜨거워,/ 꿈꾸는 씨앗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온갖 부푼 꿈의 어미가 되고 싶은 것이다/ 퉁퉁 부푼 젖을 흔들며/ 젖꼭지를 찾는 어린 입술을 간질이며/ 입속으로 젖꼭지를 밀어 넣어주는 어미처럼,/ 그렇게 나를 빨아먹게 하고 싶은 꿈으로 꽃은 핀다/ 꽃피고 싶은 열망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꿈꾸며, 자꾸 빛나게 하며 주위를 흥분시키며/ 옆의 것을 또 그 옆의 것을 빛나게 하며/ 세상이 온통 저의 꿈으로 꽃피게 한다 우글거리게 한다/ 봐, 모든 꽃은 뜨거워, 뜨거워,/ 변화하고 싶은 것만이 변화를 가져 오는 것처럼/ 같은 말로 씌어진 한하나의 세상은/ 다른 말로 씌어질 하나하나의 세상을 꽃피운다/ 모든 꽃피는 것은 지금도 꿈꾸고 있다/ 즐거운 어미를 기르고 있다//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 강미정
봄비를 받아내고 있는 작은 제비꽃의 흔들림은/ 꽃을 들여다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던/ 당신의 등처럼 외롭고 넓다는 것,/ 그러므로 꽃피어 흔들리는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땅을 움켜쥔/ 고단한 뿌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흔들림이여,/ 제 필생이 가진 파란만장의 중심을/ 꿰뚫고 흔들어야/ 흔들림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작은 제비꽃 한 포기가 필생을 흔들어/ 세상의 침묵 위에 얹어놓는/ 저 파열하는 자주빛 몸부림도/ 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 뿌리가 더듬고 나간 그 처음의 길에서/ 모든 흔들림은 오직 제가 가진 경계의 폭으로/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제 필생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모든 꽃은 뿌리에게로 간다/ 맨 처음에게로 간다//

꽃그늘 / 강미정
꽃이 지고 있는 나무 그늘에서/ 아이는 내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왁자하게 술렁이던 꽃나무는/ 적막이 한 그루다,/ 천천히 한 장을 내려놓고 두 장을 내려놓다가/ 후루루, 빠르게 다 내려놓는다/ 네가 내 몸으로 와서/ 몸 가득 초록으로 살 때까지/ 네가 내 몸으로 와서/ 몸 가득 아픔으로 살 때까지/ 네가 내 몸으로 와서/ 몸 가득 사랑으로 살 때까지/ 죽도록 죽도록 살 때까지 살 때까지,/ 정처는 고요하게 푸르기만 하고/ 정처는 수런거리는 길 안에만 있고/ 정처는 너무 오래도록 한 곳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 한 잎의 적막이 내려앉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꽃 그늘의 수런거림이 고요하고 푸르다//

꽃이 지는 일 / 강미정
햇살 눈부신 돌계단 사이 보랏빛 제비꽃이 지는 걸/ 딸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보았습니다/ 꽃이 지는 일은 꽃이 다른 몸이 되는 일 같았습니다/ 눈물을 버리는 일 같았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옮겨다 준/ 한 그루의 나무 그늘 같은/ 내 집에서 혼자 조용히 젖는 울음 같았습니다/ 무의 키만큼 자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도/ 제비꽃은 영 지지 않았습니다/ 나무 사이로 새 한 마리 쏜살같이 날아갔습니다/ 나뭇가지 하나 나뭇잎 하나 건들지 않고 날아갔습니다/ 돌계단 사이 제비꽃이 보랏빛 향기가 되는 것처럼/ 딸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눈부신 시간이 되는 것처럼,/ 쏜살같은 시간을 눈을 감고 누워/ 나무 그늘 속의 햇살을 둘이서 다 걸었습니다/ 연둣빛 나무를 다 걷고 나면 꽃이 질 것 같았습니다//


모진 년 / 강미정
고년 참 독하기도 하지,/ 벽에 실금 간다고 옆집과 대판 싸운 뒤/ 꽃이 막 피고 있을 때 베어진 대추나무/ 그루터기에서부터 아스팔트길까지/ 울룩불룩 땅이 솟아 있다/ 얼마나 지독하게 꽃피우고 싶었으면/ 얼마나 뜨겁게 제 몸속으로 꽃을 쓸어안았으면/ 저렇게 단단한 아스파트길을 구부리며 갔을까/ 잘린 몸 비틀며 뿌리를 뻗었을까/ 싸울 때 더 세차게 젖을 빨던 아이처럼/ 사는 일이 무서울 때/ 주위는 얼마나 어둡고 단단하던지/ 얼마나 무섭고 고집이 세던지/ 울며 나무를 베어 본 사람이나/ 울며 뿌리로 옆집 담을 허물었던 대추나무나/ 다 기댈 곳 없는 제 마음 하나로/ 사나운 세상을 뚫고 가는 방법일 테지/ 불안한 삶이 꽃을 먼저 피우고/ 뿌리를 더 깊게 박는 법/ 절망이, 두려움이 삶을 끌고 갈 때가 있다/ 독하게 살아남을 때가 있다//

딱실못 -메기매운탕 끓이는 여자 / 강미정
물을 보고 오면/ 몸이 낫는다는 여자가 있다/ 국물이 파랗게 우러난 미역국을 먹고 나면/ 몸이 낫는다는 여자가 있다/ 마디 굵은 손이/ 짓무르도록/ 짓무르도록/ 삶아낸 메기의 흰 살을 추리는/ 여자가 있다 한나절이나 말없이 앉아/ 두근거림 많은 물낯을 닦아 내는/ 여자가 있다/ 도무지 애가 서지 않아/ 애 낳았다는 집을 찾아다니며/ 생미역을 얻어 왔던 여자가 있다/ 제 뱃속으론 애 한번 슬지 못한/ 여자가 있다/ 출렁출렁 딱실못 커다란 눈이 울 때/ 물거울은 들여다보지 않고/ 늘어진 버들가지가 쓸어내는/ 찬바람만 보고 오는 여자가 있다//

오동도에서 / 강미정
여수 오동도 잔물결이/ 지는 해를 받아내는 모습, 붉다// 흙이 많은 당신이 동백꽃송이 주워들며 젖는 눈빛/ 붉다, 앉은걸음으로 꽃송이 가지런히 놓아 만드는 꽃길/ 세상에는 꽃 아닌 것이 없고/ 세상에는 열매 아닌 것이 없어서 붉다,// 다섯 알집 뜨거운 불이었던 당신과/ 열 달 열흘 처음 지핀 불이었던 나,// 꽃의 색이 다르고 꽃의 피고 짐이 다르고/ 꽃의 향기가 다르고 허공으로 뻗은 꽃의 바닥이 다르고// 이 세상 다르게 피어라는 말씀, 붉다// 버선발을 들어 불을 딛고 마당에 오른 당신은/ 벙어리 귀머거리 당달봉사 이름 없이 불렸던 맹호댁,// 흙이 많은 꽃나무의 고요를 밟고 건너갈 수 없다는/ 당신의 젖은 눈빛 고요히 붉다,//

시멘트 길 위에 꾹, 눌러진 발자국 / 강미정
어떤 급한 마음이 뛰어 갔나봐/ 이 곳에서 단 번에 뛰어 건너지 못하고/ 기우뚱 기울은 몸을 한 번/ 추스리며 갔나봐/ 시멘트 길 위에 꾹,/ 눌러진 발자국/ 어디로도 가지않는 이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살짝 겹쳐 얹어보면/ 꾹, 눌러진 발자국만 길을 떠나고/ 끊임없이 길을 떠나고/ 기우뚱, 날 저무는 오늘도/ 아직 길을 떠나고 있는 발자국/ 길 떠나지 못하는 내 발을 얹고/ 계속계속 길을 떠나는 발자국/ 그 길 긑에 있는 당신,/ 무거운 몸을 추스르며/ 급하게 내 마음 딛고 뛰어 갔나봐/ 꾹, 눌려져 매일 나에게로 당도하는,//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 강미정
애 밴 여자가/ 한 손으로 불룩한 배를 안고 또 한 손으론 허리를 받치고 지하철 객차에 올랐다/ 책을 보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눈감은 사람, 핸드폰 액정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 애인과 마주 보며 이야기에 골똘한 사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를 양보한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뒤뚱뒤뚱 내가 앉았던 자리로 와서 앉는 여자의 배를 보며/ 마음속으로 배를 한 번 둥그렇게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첫 애를 가진 둥그런 내 배를 쓰다듬으며 눈물이 맺히던 아버지,/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비좁은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애 밴 여자 쪽으로 왔다/ 지하철 안은 갑자기 조용해져, 책이 사라지고, 이어폰이 사라지고, 핸드폰 액정 화면이 사라지고, 와글와글 입들이 사라지고, 새까만 눈만/ 꼴깍 침을 삼키며 아버지의 목소리에 꽂혔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애 밴 여자 앞에서/ 쭈글쭈글한 손을 내민 할아버지 참 애절한 눈빛과/ 놀란 눈으로 몸을 움츠린 애 밴 여자의 난감한 눈빛/ 이 영감탱이가 노망들었소? 할아버지 손을 끌어당기는 할머니/ 참 미안혀요, 나가 젊었을 때 뱃속에 든 애를 놓쳤는디, 애 밴 사람만 보면 이러요,/ 내 배에 남아 있는 떨리던 손바닥 무늬 같은 게 가슴으로 올라온다/ 오래도록 내 눈을 맞추며 웃던 아버지를 할머니가 손잡고 간다//

절벽으로 지어진 집 / 강미정
하루는 친 모래를 이고 가파른 절벽을 올랐다 또 하루는 붉은 벽돌을 이고 가파른 절벽을 올랐다 숨이 헐떡헐떡 심장에서 다 쏟기고 나면 꿈이었다 축축한 땀을 닦으며 매일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나의 집은 당신이었다 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바람이었다 바람의 물살이 흔드는 초록 나뭇잎이었다 푸른 파도였다 일렁이는 그늘이었다 그 그늘 속에 길을 낸 협곡이었다 깊은 숨결이었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가파른 마음이었다 펄럭펄럭 돋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내벽에 걸리는 붉은 아픔이었다 헐떡헐떡 저녁 공기를 털며 무작정 내 그늘에 앉아 붉은 심장 한 벌 축축하게 걸어두고 내려가는 당신이었다//

끝방 / 강미정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불꺼진 방 모서리를 지나 어두운 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다시 수많은 어두운 방을 돌고 돌아가 끝방,/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어둠을 담았던 쓰레기통을 씻어 말리고/ 어두운 방을 닦은 걸레가 겹쳐져 널려 있는/ 그 옆, 고독하고 긴 복도를 닦은/ 막대걸레가 세워져 조용히 말라가는 그런 방,/ 난 그 방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간 가만히 내려/ 무슨 소린가 끊임없이 들리다가도 귀를 갖다대면 고요해지지/ 문을 열면 환하게 텅빈 방이 되어버리지/ 너, 아니? 가슴에도 끝방이 있다는 것 말이야/ 여러 개의 어둔 방 모서리를 돌고 돌아가/ 맨 끝에야 다다르는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수많은 빈 방 지키며 부르는 노래 간혹간혹 들리는/ 그 끝방, 가장 많이 아픈 아픔이/ 가장 많이 기다린 기다림이 산다는 방,/ 그 방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너무 화안해서/ 눈을 감고 말아, 눈을 감고 말아//

그늘 / 강미정
벤치에 살짝 엉덩이만 걸친 노인이 촘촘한 나무그늘 사이로 든 햇살의 반짝임 보고 있다// 목장갑을 벗지 않은 노인 바지 밑단을 둘둘 걷어 올린 노인 종아리에 힘줄이 구불구불 돋은 노인 주름진 목에 수건을 두른 노인 팥죽땀이 흐르는 노인 목장갑 낀 손등으로 얼굴을 닦는 노인 땀 젖은 옷이 야윈 등에 찰싹 달라붙은 노인// 바람이 더위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낸다// 멀리 그늘 속으로 스민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짝을 찾는 매미 울음소리와/ 등을 오그리고 간신히 앉은 노인의 가쁜 숨소리와/ 비스듬히 지나는 햇살의 반짝임과 하늘을 올려다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슬픈 눈빛과// 잠시 숨을 돌릴 만큼의 시간 동안, 자신을 녹인 고요한 일렁임과 마주앉은 노인의 땀 젖은 그늘과 벗지 않은 목장갑// 그 간극 사이로 팔랑이는 나뭇잎이 그늘을 오므렸다 폈다한다//

햇빛 구경 / 강미정
올해 새로 돋은 저 눈부신 햇빛,/ 맨발로 뛰쳐나온 그 여자 울던 자리에/ 폴짝폴짝 깨금발로 뛰어온 아이 꼬옥 안고/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 자리에/ 새로 돋은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포롱 포르롱 내려와 연신 꽁지깃을 까딱거리네/ 아이 손잡고 들어간 저 맨발의 여자도/ 올해 새로 돋은 아픔을 걷는 것이리/ 우우우 그 여자 울부짖음처럼/ 수만 갈래 바람으로 날려가는 꽃잎/ 햇빛의 발걸음으로 땅을 밟고 가는 저 몸짓들!/ 나에게도 올해 새로 돋은 아픔이 있어/ 이토록 뜨겁게 몸 앓고 있는가/ 파르르 잘게 떨고있는 연초록빛 눈부신 그림자로/ 내 얼굴 위를 걸어가는 햇빛,/ 그 여자의 맨발이 환히 놓여졌던 자리에서/ 아린다는 말, 알 것도 같네/ 너무 밝아 속살 아린다는 저 눈부신 아픔/ 수만갈래로 갈라지며 부딪히며 내게로 왔던/ 올해 새로 돋은 저 눈부신 햇빛,//

가만히 휘어지는 / 강미정
잿빛 허공을 밀치고/ 등나무 넌출이 불 켜진 가로등을 가만히 감는다// 죽을 고비를 아홉 번이나 넘겼다는 여자는/ 감사합니다 말하며 가만히 웃는다// 가만히,/ 비 그치고 해 졌는데/ 엄마, 어젯밤에 너무 아팠지? 이 말 쪽으로/ 내 마음이 휙 휜다// 오래도록 가만히 감아왔던 것/ 내 마음이 길게 고개를 젖히며 보았던 것// 휘어지는 것은 내가 끌려들었던 것,// 마음이 휘어졌던 것만 가슴에 가만히 담긴다//

굽은 길 / 강미정
처음엔 뭣도 모르고 밀며 밀어내며 견뎠지/ 나중에야 그늘도 뵈고 잔설도 뵈고/ 휘이 굽이진 길이 보였어/ 세상사가 전부 똑 발랐다면 이미 숨 꼴딱 넘어갔겠지/ 처음 오는 미움은 곧고 너른 길 같아서/ 먼 끝이 다 보였지, 물불이 없었지/ 그러니 사람 여럿 죽이고도 자신이 젤로 먼저 죽는 거야/ 어쩌겠어? 산봉우리가 밀려와 덮치고/ 폭풍우 몰아쳐 성난 말처럼 날뛰는 가슴을?/ 그러면 여기가 끝이다 생각하고/ 살아온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어 가보는 거지/ 저 아득한 맨 처음까지 걸어, 걸어서 가보는 거지/ 성이 나서 단 한발자국도 못 디딜 때도 있었고/ 몇 날을 물도 넘기지 않고 고스란히 걸을 때도 있었지/ 오장육부가 다 문드러져 넝마가 될 때까지/ 걷다가 뛰고 달리고 숨을 헐떡이고/ 싸우고 던지고 울부짖고 원망하며 가보는 거지/ 누구랑 싸웠다고 할 수도 없고 밀어냈다고 할 수도 없는데/ 죽자살자 막 살아내는 새파란 자신이 보이면/ 그 모습이 측은해져 가슴이 울고/ 따뜻하게 보듬게 되면 잘 살아 낸 것 아니겠나/ 내사 평생을 반쯤은 그늘이 지고 반쯤은 햇살 따숩게 내리는/ 아롱아롱한 굽은 길 하나만 겨우 찾았지만/ 누가 알겠어? 저 굽이굽이 굽은 길에/ 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그러니 진물 흐르는 가슴에 원망 싸매놓지 말고/ 다 풀어서 슬퍼해도 되는 거여/ 속 헐고 입 헌 데는 뜨거운 미역국이 최고더라/ 한 그릇 시원하게 넘기고 앓거라,//

싸그르르 / 강미정
사소함을 다 거두절미한 내 몸에서/ 싸그르르 쌀 떠내는 소리/ 앞치마도 두르지 않은 그 먼 저녁이 와서/ 젖은 손 엉덩이에 쓱쓱 물기를 가셔내며/ 오늘도 고생했제 장하다 장하다/ 집으로 향하는 굽은 그 길이 활짝, 펴져/ 싸그르르, 쌀 퍼담는 소리/ 다시 오지 않을 그 저녁을 담은 내 몸/ 배고픈 게 살고 싶은 소린기라/ 술래가 나를 찾지 못하는 남의 집 광에 숨어서/ 싸그르르 쌀 퍼내 가는 소리 들었던/ 그 멀고 어둡고 몸 근지럽던/ 배고픈 소리,/ 살을 살리는 소리/ 엄마 죽 끓여 드릴게요,/ 빽빽하게 아픈 내 몸의 여백 위로 활짝,/ 쌀 퍼내 담는 소리 싸그르르,//

촉 / 강미정
젖은 수건 속에 오이씨를 넣고/ 따뜻한 아랫목에 두었죠/ 촉 나셨는지 보아라,/ 싸여진 수건을 조심조심 펼치면/ 불록하게 부푼 오이씨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반쯤만 열고 있었죠/ 촉 나시려고 파르르 몸 떠는 것만 같아서/ 촉 보려는 제 마음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조심조심 수건을 펼쳤던/ 저의 손은 또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촉 나셨는지 보아라,/ 아부지 촉 아직 안 나왔슴더,/ 빛이 들지 않게 얼른 덮어 둬라,/ 빛을 담기 위해선 어둠도 담아야 한다는 것을/ 한참 뒤 나중에야 알았지만요/ 그때는 빨리 촉 나시지 않는 일이/ 자꾸만 펼쳐보았던 일 때문인 것 같아서/ 오래 들여다보았던 일 때문인 것 같아서/ 촉 날 때까지 걱정스레 내 마음을 떨어죠//

달라진 봄 / 강미정
눈 동자가 흔들리고 실핏줄이 터져 피멍든 계절// 잿빛 구름 몽실몽실 뭉쳐 곤드레 만드레 합창을 하고/ 둔탁한 공기방울을 흩뿌리며/ 온 대지를 암흑 속으로 끌어당긴다// 불어오던 봄 바람은 멈칫거리고/ 나무가지에 앉아 소근 소근 속삭이던 새소리는/ 맑은 숨결을 갈증하며 하늘에 호소한다// 피우기도전에 버스럭 버스럭거리는 꽃망울/ 맹가슴에 검 붉은 빛이 감돌고// 봄 볕에 검 붉은 빛 허물은 벗겨져/ 다시,/ 꽃망울은 붉게 피어나리라//

불룩한, 봄 / 강미정
반으로 가른 봄배추 속에는 꽃대가 꽃망울을 송송송 단 채로 쪼개져 있다/ 눈물을 흘리며 썰던 대파도 꽃대 속에 꽃망울을 알알이 박아 놓았다// 뱃속에 이렇게 많은 알이 슨 것을 보니,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고 뚜룩뚜룩 쳐다보는 것을 보니, 몸 속, 무늬가 졌겠어,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깊은 길이 났겠어, 생선 배를 가르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봄에는 왜 이렇게 알 밴 것들이 많을까,/ 배란기 때마다 체온이 올랐겠지, 입덧으로 신 음식이 먹고 싶었을 거야, 낳을 때까지 먹고 싶던 홍옥 한 알처럼, 입이 달았을 거야, 생각했다// 그래서 봄만 오면 바람이 단가, 살갗이 툭툭 갈라지며 저렇게 꽃이 피고 몸 속, 지울 수 없는 무늬가 지는가, 배가 불룩해지는가,/ 목이 메어왔다// 산더미만한 배를 안고 다리가 퉁퉁 부은 임신중독증의 그 여자가 신발 밑창 자르는 일을 부업으로 한다면서 끓여내오던, 그,/ 야, 배고프면 잠도 안 오잖아, 물기 고인 눈으로 웃던, 그, 봄,//

짧은 여름밤을 끄다 / 강미정
가로등 불빛 아래 들깨밭/ 숭숭 뚫린 깻잎 구멍을 불빛이 막아주고 있다/ 깻잎이 바람에 흔들리자 불빛은/ 놀라 펄쩍뛰며 허기의 구멍을 보여준다/ 허겁지겁 주워먹은 배고픔이/ 숭숭 뚫어놓은 구멍,/ 저 배고픈 구멍 속에서 나도/ 절망을 벼리며/ 내 문장의 푸른 문맥 위에/ 핏발 선 붉은 눈을 얹고/ 슬피 울고 싶었던 날이 있었던 것처럼,/ 너를 던져보고 싶었던 날이 있었니? 있었니?/ 짧은 여름밤을 다 갉아먹고 나방이 날아오른다/ 생의 진창을 튀기며 불빛에 몸을 던지는/ 나방은 푸른 배고픔을 깻잎 뒤에 슬어놓았다/ 아직 뚫리지 않은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저 푸르고 줄기찬 문장을 숭숭숭 뚫는/ 절망도 모르는 우멍한 구멍,/ 서글퍼라 이 놈의 세상 온통 구멍뿐이네,/ 들깨밭을 바라보던 아낙이 가로등을 끈다/ 저 많은 구멍을 막아주고 있던/ 불빛이 툭, 발길에 채여 넘어진다//

열대야 / 강미정
시발 것 해 준 게 뭐가 있느냐, 칼이 들어 왔습니다/뜨겁게 찐득찐득 달라붙는 새벽을 가르고 왔습니다/제삿날 음복주를 따를 때 밤늦게까지 시끄럽다고 문을 두들기던 이층은/저녁부터 뽕짝짝 에코 마이크 노래 부르더니 뚝, 끊겼습니다/달빛을 머금고 퍼렇게 빛나던 새벽칼날을 보았던 것일까요/고요하게, 딸깍딸깍 불이 하나 둘 켜집니다/죽여서 제발 살게 해 줘 봐, 소주병이 날았습니다//쨍그랑, 깨진 사금파리에 달이 뾰족하게 떴습니다/ 불꺼진 집에서 퍼렇게 희미하게 TV는 자꾸 말을 합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파업은 가정 파괴범이다 생각했죠,/ 아무도 대답 없이 묵묵히 듣고 있습니다/ 그 논밭 내 명의로 해 놔라 안 그러면 이 집이고 뭐고 싹,/ 칼날에 새벽이 한 번 더 휙 갈라집니다/ 어느 집인지요 갓난아이가 으앙, 울음을 울고 개들이 일제히 짖습니다/ 왈왈, 왈왈 다 깨 뭉개고 죽자 죽어, 칼이 춤을 춥니다/ 맨발이 달려갑니다 다시 되돌아옵니다/ 쾅쾅쾅, 갑자기 우리집 문을 두들깁니다/ 오늘은 제삿날이 아니라서 조용하게 있었는데 급하게 문을 두들깁니다/ 칼이 따라와 머리카락을 말아 쥐고 끌고 갑니다/ 삐용삐용 경찰차가 왔습니다/ 내 아들인데 해도 해도 너무 합니더, 맨발이 웁니다/ 잘 댕기던 직장 잃고 지 마누라가 내빼고 나서는 저랍니더,/ 투다닥 몸이 엉겨 붙습니다 투둑투둑 몸을 떼어냅니다/ 떼어내어도 자꾸 달라붙는 열대야입니다/ 잠은 안 오고 새벽 그늘이 너불너불 일어납니다//

사과나무 울음 / 강미정
산그늘에서부터 어둠이 엎질러져 흘러내려도// 주렁주렁 새끼를 달고 무겁게 서있는/ 사과나무 둥치까지 적시기는 아직 한참// 소쩍소쩍 저 붉은 울음의 넓은 이파리까지/ 다 적시기는 아직도 한참/ 들쳐 업고 온 애를 떼 놓고/ 혼자 울고 가던 여자의 발걸음은 이미 다 젖어// 젖가슴 무거운 사과나무 아래에 멎은/ 더 닿을 데가 없는 느린 발걸음도 다 젖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얼굴들이 주렁주렁// 가장 새초롬한 입술을 가진 사과 한 알/ 살며시 감싸는데 목을 껴안고 입술을 부빈다// 서로 감싸고 안아주는 것에 스민 눈물을/ 떠올려보지 않았다면// 마음 저 깊은 곳에 쌓은/ 달착지근한 슬픔을 어찌 울어 보았을까// 소쩍소쩍 저 넓은 울음에 기대/ 주렁주렁 사과나무 한 그루를 다 적셔 낸다// 산그늘 어둠이 엎질러져 칠흑으로 넘쳐도/ 쪼그려 우는 여자의 등을 적시기는 아직도 한참//

울음이라는 현 / 강미정
혼자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등을 본다 담배 연기로 뿌예진/ 등 안쪽에는 그가 써먹지 않는/ 울음이라는 현이 떨고 있을까/ 혼자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볼 때마다/ 가장 낮은 음으로 침묵처럼 떨고 있을/ 그의 울음이라는 현을 생각한다/ 요즘은 소리내어 펑펑 울 곳도 없지? 말하면/ 노래방에 갈래? 웃는다/ 목이 쉬도록 삶을 목놓아 부르는/ 그의 노래는 울지 않는 울음,/ 울부짖는 자신을 큰 목소리로 외칠 곳도 없어/ 소리내어 꺼이꺼이 울 곳도 없어/ 내 현을 떨면서 그의 목을 안고 등을 안으면/ 등만 보여주며 살았던 삶에게 미안해지고/ 따뜻하구나 내 무게를 다 안아주는/ 그의 다리는 늘 후들거렸을 것인데/ 낮은 숨소리와 혼자 안주도 없이 마신/ 가벼운 술 냄새와 끝없이 끝을 보고 앉아/ 등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울 줄 모르는/ 울음이라는 현이 떨고 있는 등의 안쪽,//

낮게 울다 / 강미정
먼 바다를 보러 산엘 올랐는데/ 산 아래 낮은 몸들이 어두워지는 저녁을 맞고 있었다/ 길고 낮게 뱃고동이 울었다/ 뱃고동의 울음을 따라/ 커다란 배 한 척이 쭈글쭈글 터진 바다의 살갗을 기우며/ 천천히 둥근 바다 속으로 들었다/ 길고 낮게 뱃고동이 한 번 더 울었다/ 길고 낮은 음을 가진 것들은 저토록 애달프게 울었다/ 움푹한 둥근 배를 안고/ 쭈글쭈글 살갗이 터진 주름을 안고/ 목욕탕에서 내게 등을 내어주던 어머니도 그렇게 한 번 우셨다/ 어둔 아궁이 생솔가지 분질러 넣으며/ 타닥타닥 생솔 타는 연기 속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를 부르며 어둑어둑 마당의 거름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두워지는 저녁을 새기듯 우셨다/ 비가 올 즈음의 물비린내 같은 딸애의 잠든 머리맡에서/ 어둑한 낮은 소리로 밥 먹자, 밥 먹자 흔들어 깨우며 울었던/ 어떤 날의 기억은 지독한 물비린내가 난다/ 울음을 다 새기듯 아득하게 핀/ 물비린내 속에서 혼자 낮게 울었다//

홍역 / 강미정
목련나무는 맨 아랫가지가 먼저/ 꽃등을 밝혀 들고/ 윗가지로, 윗가지로 불을 옮겨 주고 있다/ 불씨를 받은 꽃봉오리들/ 타오르기 시작한다 활짝, 화알짝/ 홍역 앓는 몸처럼 뜨거운 꽃/ 눈물난다/ 저렇게 생을 채우라고/ 뜨겁게 우리의 생을 채우려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움은 올라온다/ 맨 아래 가지에서부터/ 가슴 속 뜨거움을 받아내는 꽃/ 아픔을 삭히는 화근내처럼/ 꽃도 제 몸을 태우는 향기가 난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뜨거움 때문에/ 뜨거움이 채우는 저 생생한 생 때문에//

파도 / 강미정
당신과 나 사이를/ 초록파도가 지난다 허공으로/ 허공의 초록파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실려온다/ 나무의 근육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는/ 이 순간을/ 누군가 당신을 울게 맏들었으니/ 누군가 나를 울게 만들었으니/ 한 걸음씩 당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한 걸음씩 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내 마음을 묶은 곳,/ 나는 목소리를 잃었고/ 당신은 기다림을 잃었다/ 내 눈은 수평선에 있고/ 당신은 오래 침묵한다/ 언제부터 마음은 색깔을 가지게 되었나/ 나는 나의 파도를 놓아두고/ 당신은 당신의 파도를 산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내 마음을 묶은 곳.//

침묵을 버리다 / 강미정
난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욕설 같은 바람이 얇은 옷을 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앞쪽은 젖은 옷처럼 찰싹 붙고 그 뒤쪽은 불룩하게 헐렁한,/ 마음이 바람의 날을 벼리고 있잖아/ 절규하며 날뛰는 힘을 견디며 파랗고 날 샌 노래를 부르잖아/ 봐, 깊게 사랑했던 마음이 들끓을 때/ 당신은 울음소리에 몰두할 수 있지/ 당신이기에 어느 한 가슴이 가장 먼저 울 수도 있지/ 내가 알았던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다시 당신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여,/ 저기 망망대해를 펼쳐두고 출렁임을 그치지 않는/ 당신의 침묵이 폭풍우가 되는 바다가 참 좋더라/ 폭풍우에 스민 울음소리가 들리잖아/ 나를 부르는 웃음소리가 들리잖아/ 마음이 바람의 날을 세워 밀며 밀리며 견디는/ 저 애증의 극단 중간에 침묵을 두고/ 세상이 되고 길이 되었던 당신이 가슴으로 와서/ 폭풍이 될 때 나는 휘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아름다운 허물 / 강미정
시간이 알을 까고 기어나간 길이 보인다/ 알을 품어준 어미의 시간은/ 몸이 다 갉아 먹힌 따뜻한 껍질로 남아 있다/ 싱크대 밑에서 장롱 뒤에서/ 껍질뿐인 시간을 지키고 있는 어미를 만나면,/ 눈이 부셔 눈을 감는다/ 날아가거라 더 멀리 날아가서 어미가 되거라/ 날아간 길을 애지중지 하는 어미의 시간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뜨거움이다/ 다 자란 몸이 남은 몸을 쓰러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간 빈 껍질마다/ 어리고 어린 시간을 채운 어미여,/ 푸르게 짜올렸던 중심을 향해/ 천천히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다/ 아름다운 허물을 껴안고 있는 시간이/ 알을 까고 기어나간 따뜻한 길이 보인다//

옛일을 이야기하다 / 강미정
삭여 내지 못하니 얼마나 무거울까,/ 등을 쓸어주며 배를 쓸어주며/ 무명실로 묶은 엄지손가락 끝을 콧김 쐰 바늘로/ 콕, 찌른다 한순간 분을 못 이겨/ 펄펄 뛰던 것들 온종일/ 어지럽게 머리 헝클어 놓던 것들 툭, 터진다/ 붉게 손가락 끝이 아픈/ 이런 터진 마음끼리 우리는 묶여 있다/ 가까울수록 더 팽팽하게 묶여 속없이 지낸다/ 속도 없이 참기만 하니 어렵지,/ 어려운 세상이 보도되고 있는 뉴스시간/ 해고 근로자들이 가두행진을 하고 있는 맨 뒷줄에서/ 한 여성 근로자가 쪼그리고 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며 젖을 물린다/ 젖을 빠는 아이의 이마를 쓸어주는 손이/ 클로즈업되어 환해진다/ 옛일을 얘기 할 수 있는 시절을 건너고 있구나/ 저렇게 옛일을 다독이려 오늘을 건너가고 있구나/ 등을 쓸어주며 배를 쓸어주며/ 한 번씩 모르는 척 해 줘라,/ 몇 달째 일할 곳을 찾지 못한 그를 보며/ 묶은 실을 풀며 등을 훑어 준다//

소리나는 추억 / 강미정
음식을 담기 전 빈 그릇을 한 번 두들겨 본다 버릇이다/ 그릇도 소리나는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분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추억이 있다 따뜻한/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맛있다고 생각한 오래된 믿음처럼/ 나는 그릇이 내는 그 소리에다 음식을 담는다/ 음 하나 고르는데 평생을 거는 사람을 만난다면/ 세상의 어떤 죽음을 맞이해도 슬프지 않을거다/ 아버지는 피리를 자주 문질러 주셨다/ 좋은 소리가 나려면 악기가 따뜻해야 돼/ 온 가족이 다 모여서 먹는 따뜻한 음식처럼요?/ 그래, 천천히 천천히 바람을 밀어 넣어봐/ 내가 부는 피리는 차가운 바람 새는 소리만 반복했다/ 너무 추워요 아버지, 떨려서 눈물이 나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는 상상을 하며 바람을 담아 봐라/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지/ 그때도 난 따뜻하게 데운 그릇에 따뜻한 음식을 담아야지 생각했다/ 따뜻한 소리를 담는 아버지의 피리,/ 차가운 바람이 따뜻한 노래가 되고 싶어 마구 몸을 일으키지/ 자신을 읽어 달라고 피리 속으로 뛰어들어와 출렁이고 있어/ 나는 아직도 그릇이 따뜻하면/ 좋은 음식맛이 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먹는 따뜻한 음식!/ 양파껍질을 까며 매운 고추를 썰며/ 음식을 담기 전에 그릇을 한 번 두들겨 본다//

눈 / 강미정
나무는 몸 속에 눈이 있다/ 몸 속으로 무늬가 지는 눈물이 있다/ 세상에서 눈부신 처음이 되려고/ 세상 가득 자신의 향기로 끝맺으려고/ 나무는 젖은 눈으로/ 뜨겁고 빨갛게 들끓는 자신의 꿈을 들여다본다/ 낯설고 막막한 처음을 거느리고/ 우리도 한 번씩 나무가 된다/ 두 다리 사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세상에 눈먼 눈으로 제 몸의 무늬를 지우며/ 세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무가 된다.//

밥물 끓는 냄새 / 강미정
모르는 집 창문 아래에 앉아 있었다/ 창문 안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틀어놓은 물소리에 섞여/ 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 하는/ 모르는 여자의 가늘고 긴 흐느낌/ 여자의 울음소리가 고요해질 때까지/ 모르는 집 창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마음의 첩첩산중에서 자란 울음은/ 혼자 저렇게 울겠구나,/ 혼자 저렇게 울었겠구나, 울었다/ 잘 크라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가만히 들리고/ 천천히 물 붓는 소리가 가만히 들리고/ 쌀 씻는 소리가 가만히 들리는/ 내가 모르는 집의 밥물 끓는 냄새,/ 싸우고 나온 일을 잊고/ 벌떡, 일어나 집을 향해 막 바쁘게 걸어갔다/ 어디로 멀리 혼자 가고 있는 길을 거두어/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던 길을 거두어/ 밥물 끓는 냄새로 간절해진/ 집으로 막 걸어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리고 앳된 울음 / 강미정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바보 이반이 말했지/ 손에 굳은살이 박히지 않으면 밥을 먹지 말아라/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 아이는 까만 눈을 깜빡이며 배시시 웃었지/ 천진스레 눈을 맞추는 맑고 깊은 그 눈빛, 무서워라/ 예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가장 큰 일은/ 밥을 먹는 일이란다 밥 먹는 일,/ 어린 눈은 자꾸 나를 보고 엄마라고 부르며/ 보드랍게 보드랍게 목을 감고 입을 맞추었지/ 고 이쁜 어리고 앳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내 마음은 안쓰럽고 서늘한 슬픔이 돋아/ 내 손에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아, 내 손에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하고야 말겠다 말겠다/아랫동네 초상이 난 집을 지나며/ 사람들이 굳은살 박힌 손을 들어 삿대질을 해대도/ 저 도둑놈의 집 집, 침을 퉤퉤 뱉으며 가도/ 분개하지 않고 죽은 저 사람도 담을 넘었을 땐/ 실은 어리고 앳된 울음이 담 넘어 갔을 때였겠지/ 무서워라 담을 넘는 어린 울음 쪽으로/ 죽기살기로 발이 동동거려져/ 전 속력으로 눈에 뵈는 것 없이 내달렸었겠지//

저녁 강가에서 / 강미정
우리가 당도한 곳은 잿빛 저녁 강가였다/ 강물은 고요히 저물고 있었다/ 저무는 일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어둠 속으로 산과 산이 경계를 지우며/ 서로 포개지고 있었다// 경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었을 텐데/ 마음을 지우는 것은 어둠이었다/ 우리는 그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히 저무는 오늘이 얼마나 격렬한지/ 얼마나 뜨거운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어둠만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고요히 겹쳐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산과/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강물과/ 겹쳐지지 않던 우리의 잿빛 저녁을,/ 저물고 있는 우리의 오늘을 보고 있었다// 겹쳐진 산을 지우고 겹쳐진 강물을 지우고/ 겹쳐진 잿빛 저녁을 다 지우고 있는 어둠,//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로 겹쳐져 본적이 없었으므로/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겹쳐지는/ 어둠을 다시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언제나 이런 어둠을 건너고 난 뒤였다//

둥근 자세 / 강미정
글게 스민다는 말이 소리 없이 울고 싶은 자세라는 걸 바다에 와서 알았다/ 둥근 수평선, 모래에 발을 묻고 둥근 흐느낌으로 울다가 스미는 파도,/ 나는 왜 당신의 반대편으로만 자꾸 스며 갔을까/ 내 반대편에서 당신은 왜 그토록 지루하게 둥근 원을 그리며/ 나에게로만 스민 빗물 보내왔을까/ 파도가 대신 울어주는 바닷가에서/ 둥글게 스민다는 말이 혼자 우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대신하여 울던 당신이/ 어두운 곳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는 오래오래 혼자 울던 당신이/ 이른 저녁 눈썹달로 떴다 울고 싶은 자세로 둥글게 떴다/ 세상은 울고 싶은 자세로 몸을 웅크리다가 둥글어졌을 것이다/ 수평선이 저렇게 둥근 것처럼/ 나를 비춰왔던 울음도, 나에게 스미어 왔던 당신도 수평선처럼 둥근 자세였다/ 멀리 떨어져야 잘 볼 수 있었다/ 헤어짐이 끝없기 때문에 사랑도 끝없다고 당신은 말한다/ 둥근 눈물로 혼자 말한다//

방생 / 강미정
가정안정을비는등불, 만수무강기원등불, 시험합격등불,/ 당신은 소망등불을 단다/ 뒷호주머니에 비수처럼 꽂혀있던 마지막 지폐 한 장/ 불을 붙이고 어둔 하늘을 향해 날려보낸다/ 내 몸의 감옥을 나와 내 정신의 감옥을 나와/ 당신은 바람 한 줄기처럼 나에게서 멀어졌다/ 사랑을 덮었던 내 모든 순수는 고요해지고/ 다시 캄캄해졌다/ 바람이 허공을 흔들었다/ 당신이 날린 소망등불이 바람 앞에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껌뻑이는 소망등불을/ 내 걸었던 나의 눈은 당신이 퍼내 갔다/ 당신에게로 간절하게 길을 내었던/ 움푹한 나의 눈길은 끊겼다/ 내 몸의 감옥을 나와 내 정신의 감옥을 나와/ 검은 하늘의 한 복판에 명중되는 소망등불,/ 늘 당신이 명중되었던 내 가슴 한복판이었다/ 아직 내 모든 순수는 당신에게 몰두하고/ 당신은 아직도 허공을 흔들며 소망등불을 단다//

잠이나 한 숨 자고 오는 그곳 / 강미정
그곳으로 찾아가서 한다는 첫말이 마구마구 사회로부터 내몰리고 있는 기분, 알아요? 였다/ 못 들은 척 허리를 구부리고 빨갛게 꽃잎을 열고 있는 봉숭아를 바라보며 잠이나 한 숨 자고 가거 라, 였다/ 한 오년쯤 흘러 딸 하나 낳아 키우는 게 어찌 이리 힘든지, 다섯이나 우째 키우셨어요? 했더니/ 못 들은 척 화단에 물을 주면서 이 봐라 요놈이 요 이뿐놈이 꽃봉오리를 살포시 밀어 올렸다이,/ 했다/ 십 오년쯤 사는 게 왜 이리 재미있는 게 없는지 남편도 자식도 다 저 하나밖에 모르고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때도 그래그래 여서 잠이나 푹 자고 가거래이, 했다/ 이십 오년 철 좀 들었다 싶은 나이에도 잠이나 한 숨 자고 가라고 내어주는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칼을 쓸며 아픔도 슬픔도 한 순간 허리 한 번 구부리면 다 지나가는/ 기라 겸손이 어데서 나왔겠노 했다// 오래도록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내벽에 젖은 흙을 깔고 흙을 돋우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그곳,/ 황량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아픔과 분노가 밖으로 비져나가지 못하게 얼루고 달래고 있는 그곳,/ 허리를 굽히면 더 잘 보이는 일들이 있는기라, 굽은 등 위로 햇살을 튕겨 올리는 그곳에 당신, 꺼/ 멓게 한 밤을 웅크리고 등을 보이며 숟가락으로 서걱서걱 배를 긁어먹는 눈빛으로 어려움이 온다/ 싶으면 불쑥, 꽃이 핀다 생각하고 그라고 여 와서 잠이나 한 숨 자고 가래이, 전화를 걸어온다//

아픔을 먹다 / 강미정
내 앞에 당도한 물고기는/ 한껏 부풀린 부레와 유연한 꼬리지느러미로/ 거친 물살을 휘저어온 듯 했다/ 물고기는 아픔을 모른다는군/ 날카로운 칼날에 쓱쓱, 저며진 살점이 씹힐 때마다/ 입 속에서 푸득푸드득, 생살이 꿈틀거렸다/ 파도소리 같은 물고기의 외마디가 쏴쏴, 터져나왔다/ 이상하지, 아픔을 모른다는 것이,/ 초고추장에 찍은 생살이 자꾸 내 앞으로 왔다/ 아픔을 모르면 살맛이 없을 걸,/ 저며낸 제 살점을 바라보는 물고기의 초롱초롱한 눈을/ 깻잎 한 장으로 가렸다 물고기는/ 가려진 아픈 얼굴로 깊고 푸른 바닷길을 유영했다/ 접시 위에서 자꾸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어댔다/ 아픈 세상을 무심히 지나친 한 세상 같았다/ 아픔을 모르는 이 세상 같았다/ 살맛이 없는 이 곳을/ 아픔이 없어 너무 많이 아픈 이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내 앞의 초장이 붉게 엎질러졌다//

새 / 강미정
읽던 시집을 엎어두고 찻물을 얹는 사이 새 그림자가 휙, 시집에 날아들었다 새가 시집을 읽고 갔다 갇혀있던 글자를 모두 물고 갔다 그 짧은 순간 시도 한 줄 써놓고 갔다 시집 가득 눈부신 햇살이 적혀있다// 새가 날아간 쪽으로 끓고 있던 단어 하나를 날려 보낸다 침묵하고 있는 단어 하나를 날려 보낸다 몸은 자유로우나 영혼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신이 다녀간다 영혼이 자유로우나 몸이 자유롭지 못한 나를 다녀간다// 끓인 물이 뜸 드는 이 삼 분 깃털처럼 가벼운 그 단어를 새는 날개에 새긴다 시인은 영혼에 새긴다/ 차를 우리는 동안, 새는 햇살 한 페이지 펴진 볏가리에서 꽁지깃을 까딱거린다 통통통통 경운기가 지나자 포르르포르르 떼를 지어 난다 낮게 난다 빠르게 난다 감나무 가지 사이로 쏙쏙 박히듯 빨려들어간다 감나무 잎이 파닥인다// 우려진 찻물같은 당국화 멀티 메일이 도착한다 햇살 소복하게 앉은 감이 발그레 익는다 새가 날아오른다 환한 햇살 속으로 나를 물고 간다 빠르게 시집을 읽고 간다 시집 위에 그림자를 두고 간다 눈부신 소실점이 된다//

번개 인터뷰 / 강미정
사실 번개는 완전히 외면했던 이야기잖아요?/ 오래 묻혀있던 보석일지도 모르죠/ 당신은 뜨거웠다고 하는군요/ 정수리에 떠 있는 먹장구름의 내면이라구요?/ 그래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봐요, 번개/ 늘 모른 척 했던 이야기겠지요?/ 자기 혼자만 아는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견딜만하지 않아도 견딘 이야기,/ 사실은 번쩍 번개처럼 지나가고 남은 이야기잖아요/ 독백이었던 것이 방백이 되는 이야기,/ 순식간에 다 벗겨지는 이야기,/ 어디에 번개가 치나요?/ 하루에 몇 번이나 번개가 치는가요?/ 언제부터 번개가 치기 시작했나요?/ 아하, 길 잃고 헤맨 그때가 독백이었군요?/ 사실 번개가 꽝 내리칠 때부터 방백이었죠/ 그럼 번개를 다루는 방법이 있나요?/ 예? 바늘로 여러 번 찔러서 번개를 잠재운다고요?/ 놀랍군요 따끔 따끔이 번개였다니요/ 그래서 번개가 잠자기 시작했군요?/ 그런데 당신은 왜 번개를 견디기만 했을까요?/ 괜찮지 않았는데 왜 괜찮다고만 했을까요?/ 어둡게 낀 먹장구름을 환하다고만 했을까요?//

풍년 / 강미정
내 종아리만한 무 한 개가/ 추석 즈음엔 사천 원 하더니/ 김장철인 요즘/ 종아리만한 무 다섯 개에 무청까지 묶어서/ 한 단에 심천 원 한다.// 한 손으로 들기 무거운 무 한 단을/ 두 손으로 들고 오면서/ 이렇게 헐하게 팔아도 되는지/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이 흐려진다.// 풍년지면,/ 풍년지면 더 헐해지는 농산물.// 모종 값에라도 내야한다고/ 갈라진 손끝에 바른 반창고가 너덜너덜./ 쉬지 않고 농산물을 거두던 부모님/ 풍년 오면 주름살 더 짙어지던 얼굴이/ 무 한 단에 겹쳐진다.// 너무 값이 싼 농작물을 살 때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지은 죄도 없이/ 너무 헐하게 산 것 같아 죄송하다./ 너무 헐하게 산 것 같아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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