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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홍배 시인, 클래식 오디오평론가, 영문번역가, 사진작가
1953년 전남 장흥군 용산면에서 태어났다.
2000년 월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단한 새》 《바람의 색깔》
산문집 《추억으로 가는 간이역》 《풍경과 간이역》 《송가인에서 베토벤까지》 《classic 명곡 205》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월곶 / 배홍배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이따금 무거운 침묵위로 고깃배가 미끄러져 들어올 때마다 나는/ 출렁이는 작은 배들의 이마를 다독일 뿐/ 그 흔들림이 내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녁 해가 조심스럽게 비켜 가는 몸속/ 허물어질 것들을/ 소금 창고의 물새가 외로움에 가늘어진 말간 다리로/ 받쳐줄 때도/ 갯바람은 황폐한 그리움 밖으로만 불었다/ 돌아오지 않은 배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 둘/ 그리운 눈빛을 바다에 던지고/ 뒤늦게/ 귀항하는 배들이 물위에 뜨는 그 많은 흔적들을/ 어디까지 지울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 할 때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아직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운 이름 / 배홍배
흔들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저장된 이름 하나를 지운다/ 내 사소한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일격에 넘어뜨리는 가로등,/ 일어나지마라/ 쓰러진 몸뚱이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너의 아픔마저 익사할 때/ 그리하여/ 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 너의 무덤속일 때/ 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 그러나 잊지 마라/ 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
이별의 끝 / 배홍배 떠나 보내야 하네 신천리 달을/ 밤마다 내 몸 어딘가 서성이는 저 달/ 이젠 보지 않으리 포동 소금창고/ 서리눈꽃 눈물마른 가슴바닥을/ 서리눈꽃 눈물마른 가슴바닥을// 한밤이 두려운 내 가엾은 귀/ 엷은 잠결에 깨어 듣는다네/ 오이도 갯벌물새 울음소리를/ 그리움에 가늘어진 울음소리를/ 그리움에 가늘어진 울음소리를// 물새가 날아놀라 어설픈 꿈에/ 외로운 그림자를 떨어드릴 때/ 무심한 파도소리 와르르 와르르르/ 내 가슴 무너지는 소리 듣는다네/ 내 가슴 무너지는 소리 듣는다네// |
쥐눈 / 배홍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 터진 틈으로/ 빠끔히 내다보는 쥐, 쥐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어두워져버린,/ 어두워서 슬픈 눈이 더듬는/ 내 몸뚱이에/ 어스름이랄까, 그늘 같은 것이 번졌다// 벌써 축축했으므로/ 허물어졌으므로, 슬픔은/ 검고 고요해도 무방했겠지만/ 또랑또랑 고이다 까만/ 눈물 한 방울로 반짝여 들어간 곳, 그곳// 쥐의 눈 안에, 나는/ 동그란 심장 하나로 앉아 있었다// 물렁해진 맥박 안으로/ 놈의 팔딱거리는 박동이 밀려들어 왔다//
낡은침대 / 배홍배
모든 힘이 빠진 한 사내가 후줄근하게 돌아와/ 꽤 오래되고 낡은 충전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에 딱 맞는 배터리/ 푹신하고 깊은 잠이 넘쳐나는 낡은 침대 안으로/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의 관절들이 혁대를 풀고 잠든다./ 얇은 모기장과, 빛의 속도로 몇억 광년쯤 날라 온 듯한 낮은 스텐드불빛./ 그러고 보니 저 낡은 침대와 연결된 코드는/ 대기권 밖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 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 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 마디의 잠꼬대가 몸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 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페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베어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저 사내.//
수요일의 붉은 신호등 / 배홍배
단속반들이 다년간 후 여인의 은밀한 슬픔이 어둠뿐인/ 생의 낱장/ 사이에 끼워졌다. 얇은 등이 좌판 위로 접힐 때마다/ 그녀의 눈은/ 붉은 신호등처럼 깜박였다. 이따금 듬성듬성한 이빨/ 사이로 삶의/ 허무를 드러내거나 짧은 다리를 비겁하게 절뚝거리는 것은/ 순전히/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안다, 단 한번도/ 읽혀지지/ 않은 간지 같은 슬픔을. 우스꽝스러운 골반이 강인한/ 턱뼈의 자식/ 들을 아스팔트 위에 얼마나 단호하게 내던졌는지를 안다./ 그녀는/ 표범처럼 멋진 새끼들을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오했다,/ 암표범의 서툰 근육과 그것을 쉽게 들키고 마는 미끈한/ 의식을.//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인다/ 싸락눈처럼 흩어지는 호르라기 소리/ 여인이 애로영화 포스터 안으로 숨는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안전하다/ 그녀가 옷을 벗는다, 오/ 너, 붉은 신호등이여/ (모든 것은 정지된다)/ 보라, 그녀의 깊고 투명한 자궁을 걸어나오는/ 한 무리의 하이에나들을/ 비굴한 걸음걸이가 저토록 당당한//
가계 / 배홍배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오르는 길은/ 축축하고 질척거렸다/ 빽빽이 둘러선 삼나무 숲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묘비에 새겨진 깨알같은 글자들을/ 할아버지의 바람기와/ 그가 거느린 여인들의 내력으로 읽게 된 것은/ 내가 처음 자위행위를 하고/ 첫 애인을 만난 곳이/ 그 무덤 가였다는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안 대대로 부쳐온/ 자갈밭 풋보리가/ 키가 반도 못 자라 일찍 피던 봄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는/ 어머니의 둥근 자궁 같은/ 조상의 벌건 무덤을 보며 불끈, 성욕을 느꼈다는 것이다//
일몰 / 배홍배
서쪽 하늘이 종일/ 누군가의 가슴에서 앓았다/ 울컥/ 뜨는 붉은 노을/ 붉은만큼 서러운/ 애증의 독/ 새가 울음을 상해/ 비명 하나로/ 제 울음 속을 헤쳐/ 가는 곳/ 바라보다 그만/ 내 황량한 주소를/ 거기 두고 왔네/ 가엾은 나의 세월/ 저녁 햇살에 긁히네/ 긁혀 먼지처럼 쌓이네//
달과 매화 / 배홍배
사랑을 잃고 난 후/ 나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제2악장에 갇혀 지냈다/ 종일 테이프 위를 걷기도 했지만 언제나/ 갔던 길을 되돌아 올 뿐이었다/ 이따금 길에서 만난/ 달의 처연함을 비웃는 일도/ 나무들의 우직함을 흉보는 일도/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 했다/ 마땅히 져야 할 곳을 찾지 못해/ 내 몸 어딘가를 서성이는 달이/ 나무들의 검푸른 잎사귀 아래/ 투명한 그림자를 피워대는 것도/ 나는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막연히 연애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주위엔 매화나무만 무성했다/ 누군가 내 이마를 쳐서/ 그것도 아주 세게 쳐서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무병을 앓고 싶어/ 매화나무 위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꽃이 지는 일 / 배홍배
살구꽃이 졌다// 떨어진 꽃잎은 잊혀졌지만 꽃이 있던 자리는 점점 자라서/ 아이 울음만큼 자라서/ 직박구리가 목이 쉬어 떠났다, 가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새가 앉았다 간 자리를 쳐다보아도/ 아무리 쳐다보아도// 꽃잎을 쉬이 잊은 일에 대한 치밀한 반성이나 가책 말고는 달리// 설렐만한 일은 없었으므로// 살구꽃 사진을 침실에 걸어놓고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새가 떠나지 않았다면/ 침실의 어두운 불빛 아래가 아니었다면/ 꽃잎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무릎 바짝 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는 줄이나 알았겠나// 살구 알이 자라서 드리우는 동그란 그림자 안이 그/ 처럼 환한 줄 생각이나 했겠나//
단단한 새 / 배홍배
플라타너스 가지에 부리 노란 새가 앉아 있습니다. 새가 움켜쥐고 있는 허공이, 내가 당신을 만날 때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허전함을 가려주던 나뭇잎의 그 넓은 마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아닐까, 지금 내 등을 두드려주는 봄볕도 저 허공을 지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새의 발 크기가 궁금해집니다. 새가 울 때마다 노란 새싹들이 피어납니다. 새는 얼마나 많은 나뭇잎을 피웠으면 저토록 단단한 목청도 갖게 되었을까요. 플라타너스의 넓은 마음 씀씀이도 새의 단단한 울음에서 비롯되었으리니 플라타너스는 제 잎 넓은 삶을 어느 때 저 작은 새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새가 날아갑니다. 해묵은 열매 하나가 탁구공 만한 정적을 네게 선물하는군요.//
새가 나는데 / 배홍배
해가 진 서쪽 하늘에 왜가리 간다// 어둠을 삼키며 나는 새// 꺼억꺼억- 반달 토해내고/ 울음을 앞세우고, 남은 반달은 간다// 새의 목청 안에 울창한/ 달빛가지// 울음의 마디가 하나 더 자라/ 허공중을 걸어 둘 뼈의 속이 비었을 뿐인데/ 새는 어디까지 가는지// 가야 하는지// 누구네 가계의 쓸쓸한 내력을 저 허공에 써서 걸어야/ 뼛속이 꽉 차서, 새는// 날개를 접을 것인지// 갓 피어난 감꽃이 맑은 눈을 씀벅이는 이 저녁//
라르게토를 위하여 / 배홍배
이젠 끝내야 해/ 마주하는 방향으로 숨쉬는/ 낯선 시간을// 내일보다 월등한 오늘밤/ 춤을 더 추어야겠지/ 라르게토,/ 붉고 외로운 체벌인 태양을/ 증오하는 날들을 위하여// 멀리 뇌성이 데려가는/ 마지막 오늘을/ 조용히 붙들 수는 없을까// 부엉이보다 낮은 신음으로/ 그만큼만 뒤로/ 밀리는 적의의 숲까진/ 다시 사람의 풍경, 외진 곳에서// 눈부시게 우는,/ 너를 잊는 밤은 아름다워, 라르게토//
서강 / 배홍배
하루를 걷다가 주저앉으면/ 잃은 길도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와/ 몸뚱이는 길이 되었다/ 쪽배에 고인 몸은 길 밖으로/ 흘러넘쳐/ 소리 나게 흐르고/ 하늘은 몇 평/ 머릿속을 둥둥 떠간다/ 돌아보며 울며/ 하늘이 지나간 모양새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오늘 밤은 뒤가 켕기겠다/ 새 울음 한 방울로 귓속도 켕기겠다//
비 / 배홍배
차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봅니다/ 빗방울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눈동자들입니다/ 웅덩이에 그들과 내가 주고받던/ 말들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세사으이 외롭고 쓸쓸한 일들을 들어,/ 들어서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웅덩이는/ 탁한 표정을 짓다가 모래보다/ 무겁게 나에게 침잠합니다/ 먼 하늘이 그것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듯 순간 머리끝이 환합니다//
눈에 젖다 / 배홍배
소래 廢徹橋 아래/ 눈발 날렸다/ 구름의 구중중한 생을/ 헤쳐 나와 무엇엔가/ 으깨지려 오는 눈송이들/ 뽕뽕다리 지날 때/ 기억에 구멍 숭숭 뚫려/ 그리운 것 한가지 씩/ 잊고 있었다/ 눈송이들 몇은 포구의/ 헐한 불빛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기억의 끝까지 글썽임에 고이고// 끊긴 협궤/ 올려다보면 아득한/ 그리움의 절벽/ 종일 눈송이들 뛰어내려/ 뻥 뚫린/ 가슴에 얼룩진 달이 떴다//
상처를 향하여 / 배홍배
멈출 듯 지나간다 당신을/ 지나서 당신을 향해 꺾이는 비,/ 비와 빗방울들 부딪쳐/ 익명의 파편으로 흩어지는// 물의 비명은 어디?// 제 울음을 휘감는 바람/ 한 겹 조여 오는 소리로 커가는/ 모양대로/ 열리는 당신의 눈 속을/ 빗물은 몇 밤을 더 흘렀을 것이다/ 흐르고 깎여 퍼렇게 날선 눈빛에/ 함부로 보낸 날들이/ 몸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바람이 붕대를 푸는가, 보인다/ 울음의 꼴, 어영차/ 업어다 매단 고장 난 불빛/ 부러진 밤길을 절뚝절뚝 오는 비, 비//
군산항 / 배홍배
열차는 바다로 흘러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녹슬고 휘어서/ 뱃고동은 울어서/ 바다로 나갈 기세로 꿈틀거리다/ 아예 헝클어져버린 물길에서/ 바다는 오늘이 아닌 듯/ 맞서는 파도에도 고요했다// 폐선이 되기 위해/ 몰려간 뱃길이/ 당신까지 이어지는 한나절을 비운/ 어제 그맘때/ 시퍼런 물빛 차오르는 뒷길도/ 반나절일 때/ 가슴 아래 그어지는 붉은 수평선,// 한 줄로 남겨진 약속// 잊겠다 잊었겠다/ 머릿속을 토해내고/ 끄덕끄덕/ 숨 가쁜 몸뚱이 넘어오는 뱃길은// 속 출렁이는 님도 잊었겠다// 떠나기도 전에 하늘,/ 돌아온 날들로 까마득히 채워질 때//
경전선 / 배홍배
늙은 의사가 힐책하듯 흉부 사진을 내걸었다// 검은 골짜기마다 달이 뜬 흔적// 달이 지면 깜깜한 골짜기는 훤히 보일 것이고/ 달빛이 내다버린 몇 년이 거기 얼룩졌을 것이고/ 얼룩 아래는 남은 몇 년이 더 텅 비었을 것이니/ 그림자로 기척 없이 진찰실을 나왔다// 더 이상 낯설지 않게// 풀풀 걸음은 날려서/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나는// 살아서 바람이었을까// 의사의 처방처럼 알 수 없는 시간표/ 안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호, 그땐/ 완행열차에서 왜 상한 눈물 냄새가 났을까// 채 마르기도 전에 남겨진 것은// 얼룩진 세월과 텅 빈 시간의 틈새/ 아득히 비둘기 떼 나부끼는 온몸/ 그리운 하루일 때/ 가슴까지 흘러온 것은// 다시 만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만큼의 깊숙한 달빛에 퉁퉁/ 불은 몸뚱이를 여러 겹 벗겨내어 그곳에 아직, 나는// 연서를 쓰고 있었다// 두근두근, 흰 알약 같은 달이 유혹하는 것 같아서//
나주역 / 배홍배
폐역의 지붕 위에 너덜너덜 흘러내리는 햇빛 속으로/ 여객기가 날아올랐다// 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에 기찻길이 새로 생겼다// 철길은 망초꽃의 그늘 아래거나 그늘에 찍히는 내/ 발자국 안에도 있다// 기차가 돌아 올라가는 몸 속/ 루프터널// 늑골들이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움의 모서리가 닳아// 뼈마디들이 마음 놓고 흔들리는 소리에 대하여 저/ 지붕은 얼마나 긴 시간을 생각에 잠길 것인가// 한 생生을 지키며// 등을 구부리고, 햇볕과 비와 눈과 바람을 홀로 견디는/ 또 한 생生에 대하여// 그 쓸쓸함의 각도에 대하여//
생의 간이역 / 배홍배
기차는 땅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속죄의 여행자처럼/ 미지에 자신의 몸을 내맡김으로써/ 시련의 구도자가 된다./ 요철이 험한 언덕길을 내려가며/ 깊은 바람 속으로 빠져들고/ 승객들이 바람의 기도문을 외우듯/ 저마다 한 가지씩 입안에서 웅얼거리며/ 긴 휘파람 소리를 내면/ 비눗방울 같은 포구의 불빛들이/ 차창에 미끄러진다.//
피아골 가는 길 / 배홍배
꽃비 내리는 이 길을 누가/ 걸어 가셨나// 그 옛날 지리산 빨치산과/ 그들을 쫓아간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들이 손잡고 가셨나// 터지는 총소리를 서로/ 받아먹고/ 탕탕 꽃송이들을 터뜨렸나// 한 걸음 다가서면/ 산새가 운다/ 길 너머 꽃잎들 진다고// 꽃그늘 밖으로 비켜서서 운다//
그리운 것들 / 배홍배
작은 새가 돌 위에 앉아 웁니다. 새가 앉아 우는 돌은 딱딱합니다. 새의 눈물도 딱딱한 것이어서, 딱딱하게 우는 새의 눈동자도 결국은 깜장 깨알만큼 작아지는 것이어서 산새만큼 작아진 동그란 눈을 뜨고 짧게 바라보는 풍경들은 그만큼만 내게서 멀어집니다. 그렇게 멀어져서 작은 새가 울음 한 방울로 보냈을 저녁의 높이가 그리워집니다. 그 위로 넘어가는 산등성이 너머로 떨어졌을 달의 창백함이 그립고 이 그리운 것들을 못내 그리워하는 나의 가냘픈 마음이 그리운데 파란 하늘은 왜 희미해지는 것일까요. 새들이 수 없이 앉았다 간 돌의 속을 사람의 마음으로 그리워한들 오롯한 침묵을 견뎌온 속내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만, 수십 년 감춰 온 돌의 침묵을 처마 밑에 어룽지는 그늘로 읽고, 그것이 돌 위의 작은 새나 나나 모두 그리워했던 것임을 알아차린 후에야 나의 그늘은 조용히 몸뚱이를 떠나갑니다.//
낯선 시간 / 배홍배
서기 일천 구백 구십 삼년 사월 십팔일 십팔 시 삼십 팔분 강남병원 3층, 황금 글씨로 쓰인 청첩장의 무게에 짓눌리는 아침, 냉이와 쑥부쟁이 몇 포기를 찾아내 더러운 나물국을 끓여 먹고 사람보다 일찍 일어난 아파트들의 그림자 사이를 지나갔다. 문화센터 앞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고 걸음은 미완성, 워크맨 속에서 슈베르트가 선잠을 깼다. 낯선 여인을 태운 버스 운전석은 브레이크 페달이 너무 멀어 외로움과 가까이 앉은 사람에게만 뿌려지는 여우비, 와이퍼에 눈이 허옇게 닦인 운전자가 엉망으로 꼬인 봄빛 속을 더듬어 자동차를 쓰레기장에 주차시켰다. 내린 사람 없음, 쓰레기장 관리인은 일지에 눌러 쓰고 손톱 밑은 까매지고 다시 워크맨, 천식을 앓는 의학박사 H의 건강 강의에 손바닥만 한 라디오가 숨차했다. 넝마 같은 창문으로 덮인 종합병원, 목적지도 없이 정다운 황무지에 자동차 사고로 누워 있는 남자의 갈비뼈가 눈부시게 빛나고 전문가들은 생각에 지쳤다. 종합 진찰 소견서에 아무런 병명이 없다고 늙은 여자가 항의를 하고.//
봄날은 간다 -오쇄리* / 배홍배
돌배나무에 노인이 기대어 서 있습니다.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마을의 집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속이 비어갔을까요. 빈속을 아침 햇살이 드나들고 그 때마다 하얀 꽃은 피었을까요. 꽃 지는 밤이면 둥근 달도 여러 번 다녀갔겠지요. 그리하여 저렇게 단단한 자식들을 얻었겠지요. 노인이 뒤를 돌아봅니다. 길 하나가 따라왔습니다. 눕기도 하고 잠들기도 하면서 섞여왔을 길에 앵두꽃은 피었는지, 살구꽃 복숭아꽃 같은 것들도 거기 따라 피는지 궁금합니다. 노인의 눈에 안개가 감돕니다. 감고 도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은 아이 솜털 같은 복숭아가 벌써 열렸거나 살구가 시큼해진 이후일 것이므로 지금 눈 안 가득 분홍 꽃이 피었다 해도, 쳐다본 지는 오래입니다. 내게도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일이 저렇게나 오래 되긴 했어도, 그만큼 오랫동안 뒤돌아 바라볼 일이 남아있긴 해도.//
* 오쇄리-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오쇄리, 지금은 철거된 마을.
봄날 일기 / 배홍배
어머니의 기차는 누에의 마지막 잠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말갛게 익은 열차의 옆구리에서 달 같은 아이가 태어나고 어머니는 슬픈 기관사가 되었다. 동쪽 하늘의 별빛이 운명을 점지했으나 별들은 이미 유령이었으므로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는 조용히 첫 울음을 울었다. 늙은 소가 나직이 따라 울었다. 아이가 울지 않는 날은 철 이른 사상을 가진 매미가 와서 울고 동네 아저씨는 무장공비를 맨손으로 잡아 경찰이 되었다. 울타리 밑 어린 해바라기들은 태양을 노려보며 노란 잎사귀를 불끈 말아 쥐었다. 근심 깊은 하늘은 서쪽부터 붉은 주름이 하나씩 늘어가고 처마 끝에선 새끼 참새들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갔다. 아이가 자라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해하기까지 어머니의 열차를 향해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공중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봄은 쌀독처럼 야위어 갔다. 봄을 견디기 위해 집 밖으로 버려진 아이가 아무렇게나 배워버린 체념의 깊이를 헤아리며 느릿느릿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봄날 일기 2 / 배홍배
좀처럼 꽃은 피지 않았다// 까맣게 탄 날들이 쏟아진 달력에 어머니는 삭망월(朔望月)을 그려 넣고 일요일마다/ 붉은 하혈을 했다 그리곤 피의 색깔로/ 앞날을 점쳤다// 내일을 믿는 그녀에게 운명은/ 사람 인(人)자의 정점에서 피운 꽃 한 송이,// 함부로 바람은 어린 앵두나무를 범하고/ 반성도 없이 가지 끝엔 무채색의 해가 열렸다// 표류하는 무역풍에서 며칠이 더 뿌려지고/ 마른 연못에 고이는 누런 구름,/ 구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눈에서/ 벽안(碧眼)의 눈동자가 여물었다// 다시 태양은 작열할 것인지// 햇빛을 대지에 구겨 넣어 어느 때/ 황무지에 꽃 한 송이 피워 낼 것인지/ 어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달밤이었다// 분노인 듯 오래 된 앵두나무는/ 뒤틀린 달빛 가지를 벋고/ 꽃의 거대한 뿌리인 산은/ 우리 집 커다란 장독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춘장대역 / 배홍배
승객은 한 사람, 쓸쓸해본 적 없이// 승강장을 딛는 만큼/ 저녁을 내려놓는 그는// 혼자서 달맞이꽃이었다// 하룻밤쯤은 뜬잠으로/ 칭얼칭얼 피었다/ 모래톱까지는 되물어/ 되물어서 허물어질 것이고// 귓바퀴가 맑아/ 외딴 얼굴/ 파도소리는 구를 것이니// 목울대가 긴 막차는 울고 갔느냐/ 울음이 길어/ 그토록 어려웠던 신호로// 일몰에 떠오르는 섬// 사람의 살빛에 밀리는 사람아, 사람아//
근황 / 배홍배
그대 말씀으로 일기장이 황폐해져 갈 때 눈물 속 눈알을 꺼내 닦고 닦았습니다. 닦을수록 유리창만 어두워지는 우리 집 방안, 강아지도 전 주인의 이름을 억지로 기억하다 두 눈이 튀어나왔습니다. 창밖엔 장맛비가 한창입니다 내린 비로 눈물 속은 깨끗해졌는지, 우리 집 유리창은 더 투명해졌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는지요. 한 때는 빗소리가 조용해서, 너무 고요해서 빗방울 속이 울음인 줄 몰랐습니다. 며칠을 서서 들어도 여러 날이 한 번에 지는 줄 몰랐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날리지 않고 바람이 부는 곳으로 뒤통수가 비어갑니다. 신세진 모든 것들을 향해 쓸쓸한 듯 등도 뒤척여야겠지요. 한 곳을 바라보며 오래 서 있으면 꽃이 피는 사람의 몸, 에워싸면 아픈 손가락, 끌어안으면 기억은 등이 차다 합니다. 한 계절을 한 발 앞서가는 소식, 소식과 소식을 뒤따르는 다른 하루가 겹치는 매달 그대는 비밀스런 근황을 부쳐오겠지요. 계산되지 않는 순서대로 오늘도 우체부가 울면서 갔습니다.//
가을에 / 배홍배
저기 저 먹감나무/ 잎사귀에 한창/ 머무는 햇빛/ 아직 내 푸른 그늘을/ 변주하고 있네// 대나무 잎의/ 서걱이는 소리를/ 나의 뼛속이/ 고요하게 듣고 있네// 해묵은 그리움을 깔아주는/ 저녁도 이토록/ 떫떨하고/ 시시컬컬한 노랫말과/ 어울릴 수가 있다니/ 뭐랄까, 몸 깊은 곳을/ 울리는 무슨 악기라도 되는 듯이//
은행을 줍는 노인 / 배홍배
노인은 은행을 줍고 있었다/ 희미한 눈으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은행 알들// 노인은 빈자리를 더듬었다/ 더듬다가, 손가락으로 땅을 후볐다// 들여다보면서 후벼 팠다/ 헛것을 만지는 눈빛이 뭉툭/ 닳아 패인/ 동그란 구멍/ 그렁그렁, 은행알들이 고였다//
겨울바람 -쇼팽 에튀드 op.25 제11번 / 배홍배
바람의 안쪽을 더듬었다/ 더듬어 바람의 울음을 캐냈다// 울음이 있던 자리를// 귀 기우려 들여다본다/ 체재기 하며// 엿듣는 밤은// 눈이 먼// 한 밤은/ 별 들이 빛났고// 별빛과 어둠 사이는/ 만월의 수명이다// 여러 달이 기우는 시간을/ 쩡쩡- 손가락을 짚어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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