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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정영 시인

부흐고비 2021. 11. 8. 08:48

문정영(文晶榮) 시인

1959년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서 출생하였다. 유치초등학교,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하고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 『그만큼』 , 『꽃들의 이별법』, 『두 번째 농담』 등이 있다. 현재 계간 ‘시산맥’ 발행인 및 동주문학상 대표, 지리산문학상 공동 대표 역임. 한국문화예술 아르코 창작기금 3회 수혜. 시인의 시는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곽水廓 / 문정영
나는 한때 물처럼 맑다고 생각했다./ 물로 집 한 채 지었거나,/ 물의 집이라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런 나를 비추자 물빛이 흐려졌다./ 내가 지은 집은 지는 해로 지은 것이었다./ 고인 물을 막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흐르는 물자리였으면/ 새 몇 마리 새 자리를 놓았을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눈물로 지은 집 한 채가 생각났고,/ 눈물도 거짓으로 흘릴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은 집이 모래집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깊다는 생각은 지우기로 했다./ 물은 엎드려 흐르는 것인데/ 내가 지은 집은 굽이 높았다.//

얼음 / 문정영
겨울을 들고 서 있는 내게/ 흐르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어, 네가 물었을 때/ 물의 가방 열어보일 수가 없었어/ 나는 지금 숨소리야 차가움이야 한때의 속삭임이야/ 나는 이제 속도가 없어/ 너의 등이 차가워졌을 때, 나는 불투명한 세상을/ 그 가방에 넣었지, 그 후로 꺼내보지 않았어/ 그때 너는 투명하지 않은 유리였을까/ 왼쪽 눈이 시려 너를 건너려다 자주 미끄러졌지/ 녹는 것에 자신 있다는 너에게/ 나는 아직 얼음이야//

아수라 / 문정영
거위로 다시 왔다/ 가볍지 않은 흰 날개, 짧고 두꺼운 부리로 울던 나는,/ 세 개의 무서운 얼굴은 가문 숲에 숨겨 두었고, 여섯 개의 팔은 은사시나무가 되었다// 나로 살려 할수록 뒤뚱거렸다// 어는 날부터 수면이 편안해졌나, 가라앉는 나를 향한 수없는 발짓 감추었는데// 늪에서 피는 꽃이 웃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아수라 부르지 않았고,/ 더는 숨을 멈출 수 없을 때 저리 피는 꽃/ 어떤 의문이 거위의 날개가 되었을까// 내 눈으로는 하루도 보지 못하고// 부르르 떨리는 이름은 누가 지은 것이 아니라, 가지고 태어난 것들// 뜨거워질 만큼 뜨거워지고//무거워질 때까지 무거워진 후에 나를 부르면 소용없다// 저 숲의 이름들 다 깨워도 한 마리 거위보다 못하다//

空의 / 문정영
풀잎에 놀란 눈이 있다,// 변해야 한다고 잎들이 입의 고리를 물고 있는// 처음 면면은 구르다 멈추는 성질이었다// 돌의 옆얼굴 나뭇잎의 눈물 웃음의 발톱 그릇 속의 바퀴소리/ 달리다가 멈춘 계단 숨소리에서 풀려나온 다른 숨소리들// 둥글어서 둥근 것이 아닌// 공의, 속은 문자로 채워도 헛것이다// 깎여서 만들어진 질문을 보고 알았다// 잠든 지구를 돌리는 꿈에서// 점점 내가 지워지고 있었다// 공의, 중심을 보여줄 때// 내 몸의 모서리가 닳아 가는 중이었다// 그게 공의, 리듬이라는 것을// 여직 네모였던 내가 알게 되는//

비밀문장 / 문정영
비밀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몸이 바뀌고 난 후부터였지, 문장이 바뀌면 생각의 정원은 푸른빛,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내 몸에서 일어났고 목소리는 조심스러워졌지// 중년은 비밀을 문장으로 쓰기 어려운 나이, 어디다 감추어도 드러나는 실명제의 통장번호, 똑같은 눈빛 보여도 들키고 마는 거울을 가졌지/ 다른 몸의 습성 익히지 못하고 흉내만 낸 언변들은 언변이 되지 못하고// 새로 산 여행가방은 나를 감추기 좋은 공간, 내 몸은 완벽하게 그곳에 적응하였지, 몇 개의 목욕수건이 필요한 중년은 바뀐 몸의 비밀을 닦지 못하였지/ 해독 어려운 문장이 가방 안에서 자랐지/ 내가 슬픈 문장으로 바뀌기 시작했지//

선글라스 / 문정영
너의 얼굴이 그늘 꽃처럼 바삭거린 적 있다/아프지 않겠다고 몸 트는/ 나를 보았을까, 캄캄해지기 전의 너를 닮은/ 쓰다가 쓰지 않는 날의 눈동자/ 나의 한 쪽 눈이 희미해져가고, 여전히 너는 나의 자율신경을 읽지 못한다/ 햇살을 지켜내느라 종일 피는 것도 있다/ 붉은 눈꺼풀이 수만 번 나를 닦고 있는지 모르고 너는 그냥 아득하다/ 가장 먼저 감추는 것이 의문이라 했던가/ 너를 가렸다는 생각이 이제 나를 가리고 있다//

마스크 / 문정영
삼각형 마스크는 放心이 있지, 샛노랗거나 붉은/ 눈동자는 자물쇠 같은 눈 속으로 떨어지지/ 마스크는 내일을 감추는 손바닥/ 말의 눈을 가리면 지금이 실종된다는데/ 입모양이 보이지 않아도 중심은 찾기가 쉽지/ 굴레는 세 개의 뿔에서 오고/ 고통은 점에서 이어지지/ 지나칠 것도 없다, 저 나른한 은둔자, 얼굴을 벗는다/ 아는 것 다 써버린 후/ 마스크는 마스크밖에 남지 않았어/ 동지에 잠들면 눈썹이 희어진다는데/ 어제의 표정으로 오늘을 쓰는 붉거나 샛노란 세모들//

다발성 척추 협착증 / 문정영
내 몸에서 물소리가 난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자란 편백나무가 자꾸 등 쪽으로 기운다// 남으로 돌려놓아도 눈에서 먼 곳부터 먼저 자랐다/ 우듬지가 무성해지고 줄기가 굵어지면서 잎들의 간격은 촘촘해졌다// 백지 위에다 나무의 크기를 바르게 그었으나 나무뿌리들이 금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부터 가시 벌레들이 편백나무 줄기에서 세로로 기어 다녔다 나무 향으로는 다스릴 수 없었다// 나무에 작은 구멍들이 몇 개 뚫렸다/ 들여다보니 벌레들이 물길을 누르고 있다/ 누군가 소곤거리는 말을 남겨놓았는지 나무들은 이명을 앓는다// 빨리 자란 것들은 잘려나가고 통증이 우거졌다/ 옹이 하나에 신음 소리 몇 개가 걸렸다// 불경에서 구해온 편백나무 침목을 허리 아래에 두었다, 물소리 따라 통증도 이동했다, 자주 만져 맨질맨질해진 신음소리가 들렸다//

수집가 / 문정영
한 잎의 생각을 윤독하는 그는 붉은 치마 수집가/ 아침마다 아픔주머니에서 젖은 얼굴 꺼내는 그녀는/ 방언으로 책을 쓰는 바람 집필가/ 달의 뒤편을 문신하고 있는 저녁에/ 그는 돌의 씨앗을 공중에 뿌리는 자/ 그때 이야기들이 집을 짓고 싹 틔우는데/ 공기를 모으는 자를 만나면 숨소리가 되고/ 사랑을 소리로 아는 자는 입술에서 빛이 나지/ 이른 새벽 골목 수집가와 바람 집필가가/ 서로에게 작열하지/ 어느 불꽃이 시간주머니를 태울 것인지/ 자정에 그를 낳으면 그녀의 하루가 소멸되지/ 그의 하루를 소지하는 그녀는 수첩 수집가//

대의 / 문정영
공기를 열고 나오는 저 글자들의 전복/ 한낮의 표지에서 대의를 듣는다/ 땅속에서 견딜 만큼 견디고 나서야 우는 날개들/ 대꽃이 피는 나이가 있기는 하나,/ 오월의 잎만큼 견딜 수 있기는 하나,/ 공중에 뿌리를 둔 것처럼 아래로 자라는 사유들/ 누군가 멈추어 서서 첫발자국을 닦고 있다/ 던져 받은 시공간에 명분이 있기는 하나,/ 어린 대의 줄기도 바깥이 되기 위해 어둠을 겪었는데/ 바람 채우느라 말씀 한 마디가 저리 두런거리는데/ 세상의 얼굴은 펴지지 못하고, 대의 껍질처럼 단단하다//

가시 / 문정영
백지에 그믐달이 걸려 있다/ 가장자리 그늘이 조금 찢겨지고/ 자작나무 표피에 쓰인 자글자글한 무늬마저 벗겨져 있다/ 덤불에 걸린 날개가 어느 하늘을 날았던 것인지/ 누군가에게는 제 몸을 뚫고 나온 꽃,/ 세상이 가시거나 그가 가시거나/ 생각이 오래 박혀 있는/ 날것 중 가장 큰 허공을 가졌던 그가 가시나무에 눌려 있다/ 하늘이 낭떠러지로 쏟아져 내린다/ 지상의 좁은 발자국은 그의 살아 있는 모자/ 12월은 얼음이 박힌 모자//

줄 / 문정영
나를 건너려고 너를 잡는 순간/ 하나는 여기 있고 또 하나는 멀리 있다/ 하나는 건너가고 하나는 건너온다// 쓸쓸한 것 오래되어 멀리 있는 너를 한 손으로 잡으면 두려움이 출렁인다/ 그때 내가 잡고 있는 네가 생명인 줄 알았는데 그 길 건넌 후 나는 너를 돌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가는 줄을 잡고 건너가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오는 줄을 잡고 건너오고 있다/ 무어라 물으면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말이 다르다// 한때 건너려는 길이 같았고, 그 길 건너려 따뜻한 손 너에게 내민 적이 있었다/ 손을 놓으면 그 아래는 문신한 눈썹 같은 상처뿐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줄 알면서도 그 손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네가 줄이고 내가 길이었을 때, 가끔은 네가 길이고 내가 줄이었을 때/ 아무 것 묻지 않고 서로를 건너던 때가 있었다//

꽃들의 이별법 / 문정영
네 앞에서 꽃잎 위 물방울처럼 있는다/ 새벽이 지나간 자리가 빨갛다/ 작은 무게를 버티는 것이 꽃들의 이별법/ 한 발로 나를 짚지 못하고 너를 짚으면 계절 하나 건너기 어렵다/ 너를 다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버티기가 쉽지 않다/ 한 발 내밀 때마다 하늘이 수없이 파랬다 검어진다/ 꽃술 내려놓고 그 향기 따라 건넜다, 어두웠다/ 수평으로 걷지 못한 날들이/ 물가의 신발처럼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해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 벌들은 일찍 떠난다/ 네 숨소리가 꽃잎 떨리듯/ 높아졌다 가라앉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내가 기르지 않는 나비 / 문정영
그녀에게 가는 길에 모르는 나비가 따라온다 길은 낮아지면서 캄캄해지고 나비는 거기까지다/ 당신의 이름을 한 뜸 한 뜸 수놓은 손수건 한 장 접어 간다/ 손수건을 펼치자 고구마 줄기 같은 감정선/ 그녀는 수염이 없는 고양이의 후손, 일일 휴양지의 간판, 나비는 나보다 먼저 글자를 읽는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나는 그녀에게 닿기 전 이미 나비의 의도를 안 것이다/ 나비는 내가 기르지 않는 고양이 그녀는 나보다 나비를 사랑해!/ 내 사랑이 비껴간 그곳에서 나비는 다도해처럼 흘러다닌다/ 나비는 귀를 옆으로 접은 채 꼬리를 세우고 그녀 앞에 앉아 있다/ 그날부터 내가 기르지 않는 나비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질문 / 문정영
무언가를 물어도 엉뚱해지는 계절,/ 길의 바깥쪽에서 사람과 길은 서로에게 깊어진다/ 내 눈가로 잠자리 떼가 지나는 오후 5시, 의문이 떠있다/ 묻고 답하는 것이 한때의 유머처럼 장난스러운 적이 있다/ 어떤 질문에 엉뚱한 답은 이별 후에 발견된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어떤 증세가 들어서고, 흐린 답변뿐이다./ 이제 명징하게 답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는 아닐까/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과 차이가 없을 때/ 물음의 지붕이 곡진해진다/ 높은 곳에서 보면 지금의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은 불가설이다//

비타민 / 문정영
너는 내게 엷은 햇빛 조각 같은 것/ 떼어서 먹는 구름과자 같은 것// 나비 날개보다 더 펄럭이는 신발을 신고 네가 오던 날/ 날개를 펼친 신발에 발을 꽉 집어넣고 제자리걸음하던 날// 네 신발에 갈 새의 오른쪽 심장을 그려 넣고 싶었다//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묻지는 않겠다// 너를 신고 내가 날면 숨 쉬다가 가끔씩 멈추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을까// 가벼운 연애는 농담 같은 것/ 작지만 가볍지 않은 너를 물에 녹여 마시면 발성연습처럼 생소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느 순간 몇 겹의 붉고 깊은 목구멍을 들여다보는 슬픈 너를 비타민이라 읽고 있었다// 우리가 날고 싶은 저녁이 오기나 할까//

예각銳角 / 문정영
밤새 위층에서는 각 싸움이 있었다/ 몸으로 말로 틀린 각을 잡고 있었다// 너는 조금씩 벌어진 틈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어떤 발자국은 울음이 가 닿지 못한 곳까지 아주 멀리 나갔다가 왔다// 그때,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손을 잡으며, 각을 좁혔었는데// 불안은 서로에게 밑줄 친 글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생기는 것/ 불안해서 개를 키워 본 적이 있니,/ 그때 개는 너의 반대편에서 평안해지지// 손을 놓아버리기 전에 이미 차가워진 손바닥// 그런데 그때 몰랐던 손등이 있었던 것이야,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 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겨울의 손을 맞잡고 있었던 것이야// 한 칼끝이 다른 칼끝을 날카롭게 찌르듯// 눈물은 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스머프 / 문정영
작은 버섯구름 위에서 처음 만났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구름 발자국이 생겨났어/ 붉은 모자 하나와 흰 모자 여러 개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당신이/ 손을 가리키면 내 얼굴이 파래졌지// 내가 당신에게 물들어갈 때, 거기 물들어갈 당신이 없을 때/ 천천히 가는 내 발자국 소리에 길이 물들어 가고 있네// 나 아직 모자라서, 내 눈물 스스로 닦을 수 없는데/ 저 뜨거운 강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나요// 어떤 이의 발목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내 가슴에서 흘러요/ 지난 계절에 갈라진 버섯의 내부를 들여다 본 적이 있나요, 거기/ 섬세하게 붉은 시간이 박혀 있는데,// 내 등에 비치는 불빛을 클럽 모나코라 불러도 우리 결코 모나코에/ 가 본 적은 없지// 그 후로 나는 스머프라 불린 적 없어, 내 안에서 버섯구름이 사라진/ 그 순간부터//

 

울음을 묻다 / 문정영

구름이 산의 왼쪽 허리를 긁는다/ 저 가려운 곳에 긴 울음이 숨겨져 있다// 새 한 마리가 의문을 품고 저 길을 난다/ 저기서 헤어진 사람도 숨겨진 물음을 묻는다// 그 물음을 얻기 위해 새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나무는 드문드문 눈을 뜨고 있다/ 아득하다는 말은 저 길을 사람의 눈으로 묻는 것/ 희고 검은 것은 낮과 밤의 가라앉음// 너를 희다 검다 말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울음을 먼저 물어야 한다//

하동군 섬진강 일대에 막바지 장맛비가 흩날리고 있다. 비와 몸을 섞은 안개가 도화지처럼 펼쳐진다/사진:김현동,출처:월간중앙


복도 / 문정영
좁고 어두운 통로에 나무가 있었다// 발가락으로 걷는 잎사귀들, 귀로 바람 소리를 듣는 너는 그 순간 나무가/ 아니었다 뜨거웠다, 내가 옆에 없는 데도 타들어 갔다//내 몸에서 네가 어둠을 듣고 있을 때/ 의문을 물고 있던 가지가 툭 떨어졌다/ 바람도 없었다/ 그게 헤어질 이유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발가락을 얼마나 꽉 웅크리고 있었던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자꾸 수음을 했다/ 하루의 모서리가 아팠다/ 날벌레들이 어두운 쪽에서 기어나왔다// 천장이 낮고 긴 통로에 내가 있었다/ 달빛 닿은 곳이 이제 아프지 않다고 했다/ 구석을 밟으면 그늘이 파삭거렸다/ 저녁이면 햇볕자국에서 파 냄새가 났다// 나 없는 동안 복도는 햇볕을 버리고 있었다//

소파 / 문정영
그가 그 자리에 언제부터 기대 앉아있었는지 나는 잊어버렸다./ 소라껍데기 같은 잦은 기침소리를 그날 아침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생의 무게는 한낮의 무지개보다 가벼워라. 앉은자리를 내어준 나도 그의 움직임을 몰랐다.// 그날 아침 햇살 도둑이 다녀간 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분명 해의 그늘은 아닌데, 나무들의 한 생을 태운 나이테처럼 그의 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항암치료로 도두라진 등뼈, 수분이 빠져나간 잎맥 같은 골반,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꽃대에서 나는 신음소리, 말을 전하려다가 멈춘 눈빛,//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을 나는 가졌다./ 빈자리에 새벽보다 더 많은 고요가 깔렸다./ 한 곳에만 많이 움푹 파인, 그의 몸을 닮은 모과 썩은 내가 났다.// 오직 하나의 체위를 받아 안은, 성감대도 없는 나는 그를 얼마나 따뜻하게 껴안아 주었을까//

달, 모자 / 문정영
뒷모습만 생각이 났다/ 어떤 모자를 썼는지, 그 위에 어떤 달이 떠 있었는지, 걸어가면서/ 나눈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왜 나의 시는 과거형인지/ 눈썹은 미래형으로 펼쳐졌는지/ 그걸 기억한다면 그날 밤 환한 달빛을 내어놓았을 텐데/ 삭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삭은 하나를 간직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린 것이라고,/ 묻지 않았는데도 너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 말을 놓아버린 순간에 모자가 너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너의 뒷모습 위에 뜬 달은 분명 그믐이었다/ 너는 끊어지는 말을 다시 이었다/ 어떤 하루는 너무 길어서 달이 지지 않았다고/ 그날은 아무리 걸어도 모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달과 모자는 하나의 관계에서 비뚤어져 있었다/ 그런 모자가 가끔 아픈 뒷모습을 가려주곤 했다//

아스피린 / 문정영
둘러보니 썩은 서어나무 속이다/ 내가 잎이었는지, 잎의 언저리에 피는 헛꿈이었는지/ 불우한 생각이 각설탕 태우는 냄새 같은// 기억 같은 건 믿지 말라, 그 말을 새가 물고 있는 동안 네가 내 안에 멈추어 있었는지, 비어 있었는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들이 나에게 묻는다// 눈발 날리는 날/ 서어나무 발자국은 길 가운데 멈추고, 서쪽 뿌리에서 어떤 처연한 결기가 걸어 나온다// 수첩에 적어 둔 계절은 느리게도 오지 않는다/ 눈 감아도 네가 내 안에서 눈에 덮여 있는 저녁은 갈까마귀 목덜미 빛이다// 아침에 먹는 아스피린으로 내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너에게 가다 보면 나는 조막만 해진 밀랍인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이란 허공의 말이 천천히 지혈되고 있었다//

장흥 / 문정영
물의 흔적 따라가시나요// 江, 江은 고인 숨소리 모으고 있는지, 당신의 햇살이 잠겨 있네요, 그 연한 녹색의 꽃들도 당신이 피워냈던가요, 대추가 붉어질 때까지 몰랐어요// 한여름을 펴놓은 평상에서 당신의 가슴을 나누어, 저녁으로 쓰곤 하였는데, 이제 어느 몸에 있는지, 나눌 수 있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눈빛마저 마주칠 수 없을 때, ‘장흥’ 하고 부르면 그 시절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때, 눈물은 눈물이 아니어서, 손으로 듣고 입으로 내는 소리 들리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이 아니고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깊어진다 해도, 더는 푸를 수 없는 수위에서, 당신을 장흥이라 불러 봅니다// 저만큼 탐진강 하나 낳았던 당신이 걸어가고 있네요//

속초, 푸른 / 문정영
누가 부르지 않았는데 그해 겨울은 추웠다// 얼어 있는 바닷가로 가던 그가 산의 허리를 베어갔을까, 내가 산을 안았을 때 그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흰 미시령이 그 밤 함께 누웠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끌었고 나는 푸른 허리를 상상했다// 그때 바다는 멀리 있었고 항구에 닿을 수 있을지, 오래 출구를 찾던 그의 눈빛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거친 눈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딱 하룻밤이었다 어둠으로 집 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은// 속초의 밤은 모래알보다 더 물러 뼈대를 세웠으나 잡아보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 감촉이 전부라는 듯, 몰래 떠나온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칼은 자신을 벨 수 없을 때 부러지고 나는 그를 벨 수 없어 나를 베기로 했다// 속초항이 그랬다, 그를 비우기에 이별이 너무 파랬다//

우추프라카치아 / 문정영
내가 아는 호수의 발바닥/ 발가락부터 조금씩 사라지는, 내가 쌓아온 것들은 붉은 발자국이 아니었어/ 그렇게 걸어 꽃에 도착하기까지는 물무늬가 자갈 위에서 마르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가 닿지 못한 호수는 호수라 부를 수 없어/ 어느 날 발목이 사라진 꿈을 꾸고/ 아침마다 가야 하는 그곳에 그날은 갈 수 없었지/ 호수를 껴안으면 꽃이 되는, 햇빛도 바람도 그만큼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그곳에 당신은 피어서/ 물기 없이 걸어가는 하루하루가 습자지 같다/ 꽃이 지면 한 사람이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데/ 내 발바닥이 비어 더는 걸을 수가 없다//

독주 / 문정영
까맣게 타버린 울음을 긁는다/ 술의 뒤끝은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 앞에 아무도 없이 달리는, 그러나 앞뒤를 바꾸어 달릴 때 가장 꽁무니가 되는 나의 독주/ 어디서부터 꽃과 나비는 다른 하늘을 보았을까/ 첫술에 쉽게 취한다는 것을 꽃잎이 다 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러나 나의 독주는 계속되고/ 다른 계절의 꽃이 피기까지 뒤돌아보는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울음이 다 타버린 후/ 나는 연한 꽃술의 저녁에 머물렀고, 그 기간에 나의 독주도 건기였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사람도 한때 나의 독주였다//

그릇 / 문정영
색을 비웠다/ 나를 가지고 놀던 그릇, 그 그릇이 못 된다는 말에, 색을 가질 수 없었다// 나 한때 너의 공기이고자, 흙의 눈물 안에 넣어두었는데// 어떤 빛깔로 빚을 수 없고/ 어떤 모양으로 가둘 수 없다// 내 속이 비워져 허공이 집이었을 때/ 왼손으로 너의 별자리를 내 몸에 그려 넣었지// 안과 밖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금이 간다는 말에/ 몇 번이나 다시 흙이 되고 싶었다// 내 바닥을 막아 들숨 한 편이라도 써넣을 수 있다면// 그릇이 되기 전의 시간에 밀애를 풀어 놓을 것이다// 색이 없는 나도 너의 그릇이 될까//

활*주*로 / 문정영
수만 번 엎드려야 바람을 이기는 화살은/ 비로소 날아가야 할 공중을 겨냥한다/ 바람과 천둥의 행간을 잡아당기는 몸짓이 활의 本인가/ 깜박이는 정신의 변방을 향해 날아간다/ 저 미끄러지는 주로를 따라 화살이 비상한다/ 곤두박질하다 다시 제자리에서 귀가 열리는 나는/ 아직 추락할 때가 아니다/ 다시 아수라를 지날 것인가/ 저 검은 몸을 놓고 계속 날아가고 싶다/ 딱 한 번 눈썹을 밀고 공중에서 순해지고 싶다//

활주로 위로 비행기가 난다. 시인은 조용히 곱씹는다. “다시 아수라를 지날 것인가.” (시 본문 중) 출처:국제신문

 

배추흰나비 애벌레 / 문정영
고치벌은 배추흰나비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아 기른다./ 애벌레들은 애벌레의 몸속을 갉아먹으며 자란다.// 고치벌 애벌레들이 몸을 뚫고 나올 때까지/ 배추흰나비의 애벌레는 날아가는 몽상을 한다.// 내 숨을 먹고 자란 별빛들아,/ 너희들은 날아 또 다른 몸에 수태할 때까지/ 너희들은 내가 기른 목숨이다.// 내 속이 까맣게 타고 뱃가죽이 딱딱해져도/ 내가 날아야 할 한 평의 배추밭마저 너희들에게 나누어주마.// 아프리카 수단 4만 명의 유괴된 아이들아,/ 내 몸속에 너희들의 계절이 푸르게 남아 있구나.//

숨그네* / 문정영
굶주린 천사가 속삭인다*/ 꽉 잡아줄래/ 숨이 태어난 자리에서 피어나는 허기를, 사랑을/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순응/ 전율하며 각자 다른 꽃으로 핀다/ 헤어진 후 갈래꽃보다 가벼워진 입술/ 그는 숨을 고르고 그녀는 그네를 탄다/ 한 번은 그녀, 또 한 번은 그가 굶주린 천사가 된다/ 서로의 붉은 비밀이 사라지면 그네는 멈춘다/ 얼마나 끝내고 싶었을까, 더는 들이킬 수 없는// 아사 직전의 사랑!//
*헤르타 뮐러의 소설 제목 및 소설 속 문장

넷플릭스 / 문정영
꽃을 꽃으로만 보던 절기가 지났다/ 계절이 꽃보다 더 선명하게 붉었다/ 그때 당신은 열리는 시기를 놓치고,/ 나는 떨어지는 얼굴을 놓쳤다/ 되돌려볼 수 있는 사랑은 흔한 인형 같아서/ 멀어진 뒤에는 새로운 채널에 가입해야 했다/ 언제든 볼 수 있는 당신은 귀하지 않았다/ 공유했던 두근거림이 채널 뒤의 풍경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캄캄한 시간을 스크린에 띄우고/ 당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우기로 했다/ 사랑을 자막처럼 읽는 시절이 왔다/ 눈에 잡히지 않은 오래전 사람처럼 자꾸 시간을 겉돌았다/ 나를 의자에 앉혀두고/ 당신은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을 보고 있었다/ 느슨해진 목소리가 사랑을 끝내고 있었다/ 툭 툭 우리는 같은 의자에서 서로 다른 장면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까마귀 / 문정영
그를 처음부터 검다 한 적 없다./ 받아들인 모든 색을 나눌 수 없었을 뿐이다./ 하늘의 반은 불길한 구름으로 가득 차고, 그가 날아온 쪽에서 생긴 구름은 검다./ 그 후 사람들의 질책으로 통증 없는 날이 없다./ 그러나 그가 날아간 뒤의 빈자리는 얼마나 깨끗한가./ 검은색은 햇빛에 따라 색이 바뀐다./ 검은 구름 또한 아침 나팔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나팔꽃을 정오에는 입술다문꽃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의 통증도 시각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통증은 수컷이 겨울 깃을 몸 가까이 붙인 색이다./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의 통증은 암컷이 부리를 꼭 다문 색이다./ 그가 이른 새벽을 닮아 검어 보이나 마음에 붉거나 푸른빛이 숨겨져 있다./ 성정이 유순하여 답하지 못한 그의 속이 시커멓다 하나 그 안에 흰물빛이 감돈다.//

봄비 가치 / 문정영
이번 봄비 가치가 2900억 원이라는데, 꽃들은 나무들은 그 가치를 뿌리로 알까. 바위들은 젖으면서 얼었던 몸을 녹이며, 젖은 산은 꽃불을 피우며, 연인들은 가만히 우산을 받쳐 들면서 봄비 가치를 생각할까.// 봄비 그치고 그 다음 다음날 갑자기 하늘나라로 간 젊은 시인의 가치를 셈할 수 있을까. 그의 죽음의 시어들은 사실 삶의 또 다른 몸짓이었다.// 겨우내 마른 흙 내음 비에 묻어 나오고, 한 사람이 가고 그 한 사람이 마음에 묻힌다. 남은 이들은 다시 올 봄비를 기다리고, 한 젊은 시인이 부리와 발톱을 새로 간 수리매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것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돈화문로 11나길 / 문정영
종로3가에는 할머니 칼국수집 김 서린 유리창 같은 골목이 있다./ 그 유리창에 봄이라 쓰면 골목 끝에서 능소화가 핀다./ 수선집 박음질 소리에 처마들이 단단해진다./ 낮은 창문의 하루를 안다면 새들의 저녁을 아는 일이다./ 몇 벌의 나비를 걸어놓은 한복집에서는 옛날 이야기가 들려나오고/ 봄꽃들이 옛날 무늬처럼 피어난다.// 골목이 생긴 이후 새로모신점집보다 바람이 그 날의 점괘를 본다./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운(平運)이다./ 우산 하나로도 눈비를 막을 수 있는 골목에서 헤어진 연인은 다시 그 길로 들어서면 하나가 된다./ 돌아서거나 비켜갈 수 없어 길의 끝까지 가야 한다./ 능소화주차장은 능소화가 져도 능소화주차장이다.// 돈독(敦篤), 돈화(敦化) 도탑다는 의미가 구불구불 돌아 나오는 골목에서 지난겨울 가랑눈도 어떤 깊이를 가졌겠다./ 누군가 불러 눈을 감으면 속눈썹 끝에 흰 발자국이 걸렸겠다.//

칼 / 문정영
날이 선 칼은 늘 시퍼렇게 몸 다듬는다/ 불에 덴 자국 푸른 물에 담가서 시퍼런 멍 자국을 만든다/ 천 번 두드려 날카로워진 칼은/ 제 몸 아파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 함부로 벨까 두려워서 운다//

인공눈물 / 문정영
나와 안스리움은 한 컴퓨터를 쓰고, 한 책상을 쓴다/ 숨소리도 비슷하다/ 꽃이 진 안스리움은 점점 사무원이 되어간다/ 나를 닮아서 속으로 셈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싹을 틔울 것인지 꽃을 피울 것인지/ 안스리움은 날마다 컴퓨터 화면에서 계산을 한다/ 그러나 그 수치는 자주 바뀐다/ 어제는 새 순 하나를 피우고 꽃 한송이를 지웠다/ 오늘은 이미 다 커버린 큰 잎의 물관이 제재를 당했다/ 가장 눈물이 없는 놈이다/ 물관이 막혀서 가장자리가 말라가는 잎이나/ 눈물샘이 말라서 눈물이 없는 나는 한 식구다/ 잎도 사람도 마른 눈동자로 보면 슬프다/ 가짜눈물로 세상은 젖기도 한다//

태 / 문정영
그녀는 잠들지 않은 잠을 재운다/ 내가 그녀의 몸속에서 지나온 캄캄한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몸과 내 몸이 닿은 곳// 길들이지 못하는 새는 없다// 그녀의 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작은 부리를 갖는다 발톱은 자라지 않고,/ 털은 고르지 못하여, 세상 쪽으로 더 나갈 수가 없다// 그녀는 잊기 위해 잠을 재운다, 수없이 떨어지는 파문의 날들 등 두드려주고 있다/ 그립다 말하는 순간 잠은 손끝에서 온다,/ 팔이 아래로 떨어지고 고개가 옆으로 무너진다/ 그때 그립다는 말은 얼마나 아플까/ 그녀 몸 가까이 대어서 듣는 물소리/ 눈에 슬픔이 고이는 동안 아직 날개가 다 자라지 못했는데// 그녀가 보는 순간 사물들은 잠든다/ 그녀가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잠든다/ 소리는 아프지 않기 위하여 잠들고/ 입술은 떠들지 않기 위하여 먼저 노래한다// 불편하게 흔들리는 그 눈의 말을 들어버렸다/ 눈물 한 방울에 천 개의 기억이 맺혀 있었다//

아스피린 / 문정영
둘러보니 썩은 서어나무 속이다/ 내가 잎이었는지, 잎의 언저리에 피는 헛꿈이었는지/ 불우한 생각이 각설탕 태우는 냄새 같은// 기억 같은 건 믿지 말라, 그 말을 새가 물고 있는 동안/ 네가 내 안에 멈추어 있었는지, 비어 있었는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이 나에게 묻는// 눈발이 내리는 날/ 서어나무 발자국은 길 가운데 멈추고, 서쪽 뿌리에서 어떤 처연한 결기가 걸어나온다// 수첩에 적어 둔 계절은 느리게도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네가 내 안에서 눈에 덮여 있는 저녁은 갈까마귀 목덜미 빛이다// 아침에 먹는 아스피린으로 내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너에게 가다보면 나는 조막만 해진 밀랍인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이란 허공의 말이 천천히 지혈되고 있었다//

블랙 / 문정영
너의 눈을 베끼기로 했어 그 불우한 무대 위의 빛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내리는// 너의 눈썹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였어/ 하루, 그 다음 하루를 읽어가는 바람은 숨이 멈추고/ 나는 겨울별자리처럼 멀리 있었지// 등이 보이지 않는 너의 뒷모습// 나는 자주 혼잣말로 너를 베꼈어 그 소리들이 내 입 속에서 굴러다니다 사라졌어// 너의 눈동자에 동그라미를 쳤어, 암사지도 같은/ 동그라미가 가끔은 거짓으로 보였지/ 불안을 감추기 위해 꽃을 그려놓았지// 다시 감각을 찾기 위해 눈을 씻었어/ 손끝의 눈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지// 너에 대한 필사는 저녁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가벼워진 조명, 껍질 같은 몸짓//

지붕 / 문정영
햇빛 모양의 눈썹들이 숨어 있다/ 늙은 여우비의 마른 자국에 입이 없는 바람이 머물고,/ 앙금이 다 가라앉아 무거워진 눈물이/ 몇 개는 백지처럼 붙어 있고 몇 개는 풀처럼 자라고// 너무 커다란 저녁은 거기 누울 수 없어// 당신의 웃는 입모양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얼마나 큰 지붕을 가졌을까,/ 내가 들고 있는 들보가 가벼운데 당신은 그리 오래 매달려 있었는지/ 귀에 익은 숨소리에 햇살이 잠시 날아간 것 같다// 밤에는 천천히 가는 시계를 닮은 집의 모서리/ 당신이 눈으로 가리켜준 시간을 다 이고 있다// 어디쯤에서 갈라져 지붕은 새를 닮았을까/ 잡석 몇 개 드문드문 서 있는 저 눈썹마저 사라지면/ 굴레를 이고 있는 나의 날개는,//

나무의 꿈 / 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산벚나무 / 문정영
나는 기록에 쓰인 도구다./ 기록이 끝나고 나면 몸피에 꽃이 피었던 흔적 찾을 수가 없다./ 어제 생각 난 이름은 타인에 관한 것이나 본래의 나를, 바람을, 새/ 울음을 알지 못할 정도로 변모되었다./ 대동여지도 필사본에 목판에 없는 독도가 보이는 까닭은 기록의/ 한계 때문이다./ 나는 자주 직립의 자세를 잊어버린다./ 팔만대장경을 새긴 내 뼈는 서늘하게 보전되어 오기도 한다.// 널찍하게 몸피만 키운 나는 희생될 것이라 생각했다./ 바위틈에 박혀 뒤틀리고 크지 못한 형제들은 집안 풍경으로 남았다./ 몸에 남아 있는 지도며 고문서가 후세에 남겨지기까지 나는 수많은/ 상흔을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사라져야 했다.// 몇 생을 건넌 후생들이 산형화서로 피는 5월은 얼마나 연붉은가./ 봄날이면 나는 나를 필사하는 일로 분주하다.//

가운 / 문정영
나를 입은 그가 서 있다// 낭하는 위험을 느끼는 정신이 가지는 골목,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는 입가의 상처를 껴안고 산다// 그의 몸을 안을 때 나는 전부를 풀어놓는다/ 가냘프다고 말하는 것은 골목에 대한 실례,/ 그의 몸피가 줄어들면 나는 스스로 펄럭이는 깃발// 하루는 깊고 깊은 잠을 입어야 사라지고, 그가 나를 벗은 후에 하루는 차곡차곡 접힌다// 그의 꽃이 지는 것을 본적 있다/ 중심이 세워졌다가 사라져가는 것을 모르는 척했다// 바람과 햇빛을 입지 않은 山처럼 내 안에서 뻗어나가는 것이 어찌 슬픔뿐이랴// 나를 입은 그가 가벼워진 神話처럼 납작하게 누워 있다//

열흘나비 / 문정영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개 같다. 열흘 쯤 웃다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날아가는 지 잊어버릴 것만 같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산 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리에서 너는 열흘을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에 산다. 종국에는 열망을 향해 날다 산화하는 너를 나는 지금 쫓고 있다.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저격수 / 문정영
한 발의 총알이 햇빛 속으로 날아갔다/ 파편의 죽지에 명중하는 허공/ 총알의 속도에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동공이 열리며 하나의 숨이 지고 피어났다/ 왼쪽 목덜미가 간지럽다가 오른쪽 발가락이 전율하곤 했다/ 조준은 정확했다, 오래 깨물다 놓쳐버린 젖가슴이 명중 당했다/ 딱 그만큼에서 네 몸의 폭발음이 들렸다/ 그 울음은 너의 첫울음처럼 신비로웠다/ 총알이 순간순간들을 뚫고 나가듯/ 열린다는 것은 어느 한 곳에서 全身으로 몰입한다는 것/ 너는 너의 가슴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하나의 총알만 가졌다/ 총구를 열고 뛰쳐나간 저 희열/ 덩굴장미는 햇빛 총알에 더 크게 몸 열고 있었다//

점화點話 / 문정영
보고 듣지 못하는 그는 손가락에 눈과 귀가 있다./ 상대방 손가락 위에 자기 손가락으로 점자(點字)를 쳐/ 서 대화를 한다./ 눈물 한 방울이 점자처럼 손등에 떨어지기도 한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화려함이 먼저라고 척추장애인/ 아내에게 배운다./ 눈과 귀를 닫고 마음으로 보면 세상은 눈물방울보다 작다./ 아내의 손끝에서 꽃향기와 별빛을 읽는 그는 부드러워/ 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는 불안과 고통에 이르는 것도 달팽이만큼 느리다./ 일 년처럼 읽고 십 년처럼 느낀다./ 문장이 단순해진 것은 느리게 가는 것들 적기 위해서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풀잎과 공기를 더듬어 쓰는 작가이다./ 새벽의 연우(煙雨)가 막 깨어난 꽃잎을 감싸는 것처럼/ 손끝이 별빛에 가 닿는다고 쓴다./ 그가 점화(點火)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의 일이다.//

그만큼 /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 꽃은 양귀비 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등 / 문정영
거울에 비친 등은 쓸쓸하다. 죽은 날벌레 같은 뾰루지 몇 개 달고 있다. 원형이 사라진 엉덩이와 뼈대가 보이는 척추를 따라 머리칼은 오래된 이력처럼 적을 것이 없다. 내내 앞의 눈치에 뒤를 열어 두지 못한 사내의 모습이 거기 있다. 사랑은 앞에서 오는 것이라고, 뒤태를 소홀하게 대하더니 어느 하나 비추지 못한다. 10월의 귓속말처럼 등은 소소한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굴욕을 겪었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중심이 생겼다. 쉽게 붉히는 얼굴을 가진 앞은 결핍성을 감추고 있다. 등은 스스로를 비추는 줄 모르고 비춘다. 등은 뒤돌아서도 등이다.//

자정 / 문정영
밤의 한가운데를 바르게 펼쳐놓았다는 뜻이다./ 한밤에 꽃잎 떨어지면 하루가 가벼워지고 사랑니 빠진 자리에 혀가 들락날락하는 것같이 허전하다./ 허공을 풍경으로 하기에 아픈 시간이 자정이면 어둠을 자근자근 씹고 있는 꽃나무의 한때도 자정이다.// 내 입속 가시 부러지는 소리, 몸속으로 들어간 어둠 빠져나가는 소리 크게 들린다./ 눈물도 꽃잎처럼 가벼워져야 떨어진다./ 자주 어두워지는 표정을 소리로 바꾸면 한숨이다.// 뼈에 장기에 소리들이 들어차고 소리들이 빠져나가는 소리./ 어떤 소리는 부드러움을 잃었고, 어떤 소리는 활기가 없다.// 풍경 이전의 허공, 한숨 직전의 표정이 나의 자정(自淨)이다.//

어떤 品性 / 문정영
어떤 통증은 다른 통증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바람의 빗자루로 몸을 쓰는 나는, 너무 쓸어 봄까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물푸레나무 잎처럼 바람에 견뎌 볼 요량도 없다. 나긋해진 것의 반은 여성성 때문인가./ 어쩌다 한 번 홀로 서 있는 고추목처럼 발끈한다./ 남자라는 몸에 숨고 싶어서다.// 들을 것 다 들어버린 귀는 소리에 예민하지 않다./ 그런 날이 계속되면 공기만큼 무거워진다. 제대로 한 번 붙어 볼/ 심사는 얼음장 밑으로 흐른다.// 변모된 어떤 것들의 결과는 상처라는 이름이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겨울 논흙이 뭉쳐져 꽁하듯 걸어 왔다./ 검독수리를 쫒는 수리매처럼 다중 인격도 한 때 부리고 싶었다.// 모질지 못한 눈썹만 남은 한 남자가 내 안에서 바람을 빗질하고 있다.// 어떤 품성은 다른 품성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무의 독법 / 문정영
나무가 겨우내 읽을거리를 구하고 있다 바람을 읽고 지나가는 행인을 읽는다 우듬지를 통과한 문장은 시베리아 고기압처럼 차갑다 허기진 문장들 물관이 봄까지 읽는다 읽을것이 없다면 온종일 기다릴것이 없다 "절벽에서 축구를 한다"는 가까운 나라의 비아냥거림도 또박 또박 받아 적으며 겨울나기를 한다 새들의 연애를 읽는 동안 배꼽 아래서 뜨거운 피가 돈다 뿌리에 힘이 들어간다 바람이 한 겨울에 써 놓은것들 3월까지 틈틈이 찾아 읽는다 상심 할 틈이 없다 봄이 되면 읽었던 문장에서 첫 싹이 돋을 것이다//

빈집 / 문정영
수북이 나무의 재만 남은/ 아궁이 속으로/ 시커먼 둥근 고구마 같은 기억이 느릿느릿 익어가네/ 바람이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와/ 치유되지 않은 몇 개의 깨어진 그릇들만 덩그렁 거리고/ 부엌 안을 맵게 그을리네/ 허물어진 굴뚝으로/ 모정의 갈증을 누군가 끊임없이 피어 올리고/ 그 밑으로 이따금 아이가 울며 지나가고/ 연기가 담벼락 틈으로 기어 나와 그 아이와/ 임의동행 형식으로 가네/ 늙은 개는 그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짖을 때를 기다리네// 어떤 슬픔의 시간이, 덜컹거리는 문짝들을 안에서 꽉잡고/ 놓지 않은 것일까/ 무너진 담벼락은 손쉽게 놓아버린 것일까/ 불기가 사라진 아궁이의 눅눅함을/ 수굿이 덮고 있는/ 붙박이 쇠솥이 검은 햇볕에 천연스럽게 타고 있네//

겨울고추 / 문정영
끓던 찌개가 바닥나고/ 초장에 고추를 찍어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구레나룻을 기른 탓인지/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가 말했다/ 하루에 마음을 17번 바꾼 적이 있다고/ 그 중 4번쯤은 생각 없이 바꾸었고/ 짧은 고통마저 없었다고/ 그의 마음은 서슴없이 꾹꾹 찍어 먹어도/ 맵지 않은 겨울고추며/ 무위도식의 웃자란 열매였다/ 찬이슬과 바람을 알지 못하는 고추는/ 맵지 않다/ 맵지 않다고 누구나 잘 먹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던/ 기억 자로 구부러진 고추 하나가/ 끝난 잔치처럼 남았다/ 나는 그 고추에 서름을 잔뜩 발라/ 그에게 내밀었다/ 하루가 아주 매웠으면 했다/ 바뀐 생각 하나가 가슴속을 얼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가슴 속에 등불을 켜면 / 문정영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저만큼 지나가 버린 사람의 뒷모습도 아름답다/ 젊음의 서투른 젓가락질 사이로 빠져나간/ 생각들이 접시에 다시 담기고/ 사랑니 뺀 빰처럼 부풀어 오른 한낮의 취기도/ 딱한 거리를 훈훈하게 한다/ 나무들도 나처럼 한 잔의 술로/ 등불을 켜는 것일까/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윈 저들의/ 어깨가 지나친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름답다/ 한때 와디가 흐르지 않는 사막처럼/ 모래성이 쌓이던./ 씹히지 않던 일상도 생각의 양쪽 어금니를 사용하면/ 잘게 부셔져 소화된다/ 입 속을 행구워낸/ 모금의 수돗물로도 입내음이 향기롭다//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스쳐 지나간 사람의 옛모습도 종이학처럼 작게 접힌다//

3월 / 문정영
땅 위로 솟구친 시퍼런 심줄들 속으로 핏물이 흐른다/ 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만한 크기의/ 상수리나무의 굴 속으로/ 쉴새없이 빨려들어가는 꽃빛의,//

경계 1 / 문정영
물살 느린 강가에서 나는/ 지난 한 세월을 찌에 묶어 멀리 던졌습니다/ 기쁜 날들과 슬픈 날들이 낚시바늘에 교대로 매달려/ 물 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그 중심 위에서 작은 미끼 하나에/ 혼돈과 명징의 세계가/ 자꾸만 흔들리고 흔들렸습니다/ 어느 한 세상도 가볍게/ 부표처럼 떠 흐르거나/ 쉽게 가라앉지 못했습니다/ 해넘이 적/ 몇 갈래의 물살을 거스르고, 피라미 떼들만/ 때 벗은 조약돌 같은 흰 배를 내밀며/ 언뜻언뜻 뛰쳐 올랐을 뿐입니다/ 물이 차 오르면서 마흔 개의 빈 낚시 바늘에/ 아가미가 걸린 커다란 달 하나가 흔들리던 경계를/ 남은 삶 속으로 끌어당기고 당겼습니다//

항아리 2 / 문정영
느티나무 옆에서/항아리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으면/ 나도 속이 텅 빈 그릇이 될까/ 몸 속 냄새나는 오장육부/ 다 썩고, 빈자리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던/ 욕심마저 다 비워질까/ 그 곳에 낯선 공기방울들 떠돌다 들어와/ 한 바퀴 돌다 가면/ 갈비뼈 사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 희망마저 다 삭아들겠지/ 닿을 수 없는 희망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투박한 내 모습 빈 독으로 남을 거야/ 공기방울들 나무 위로 올라가고/ 이따금 통하고 물방울 떨어지면/ 내 몸 잠시 공명관처럼 울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곧 잠잠해지면서 정강이 사이에 낀/ 속 깊은 메아리마저 쓸어 낼 수 있을 거야/ 하늘을 쳐다보며/ 겨울나무의 없는 집착 배우고 나면/ 내 몸 정말 매끄러운 항아리 하나 될까/ 담겨지는 것 그대로 담을 수 있는법구경 하나 넣고 뚜껑을 닫는다//

외눈박이 잉어 / 문정영
내가 누군가에게// 배려라는 귓속말을 할 때 며칠 전 식당 어항에서 본/ 외눈박이 잉어가 생각난다/ 그가 바라보지 못한 세상의 한 쪽은/ 늘 차갑거나 불안할 것이고,/ 그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지느러미 또한/ 짙은 굴곡을 이룬다/ 바라볼 수 없는 쪽의/ 수초의 흔들임이나 물결의 부드러운 밀착은/ 늘 기억 저 편에 있을 뿐/ 찌개가 부글부글 끊는 동안에는/ 그의 보이는 눈이 적개심처럼 이글거리고,/다시 찌개가 식으면/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세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배려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내가 바라본 세상은 그의 어떤 눈이었을까//

겨울화분 / 문정영
그가 내 몸 속 물렁해진 흙 위에/날아와 앉은 것은 지난봄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씨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살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나는 그의 집이며 체온이었을 뿐, 그가 가져온 세간을/ 내 몸 속에 들여놓지 못했다/ 그의 뿌리가 굵어지면서,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들이면서/ 내 몸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몸의 어느 부분을 휘감을 때의/ 기쁨이란, 그가 뿌려준 온 몸의 땀을 받아 안으며/ 집안에 하나씩 들여놓은 세간의 무게를 느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꽃을 피울지, 어떤 씨방을 갖고 있는지/ 그의 몸짓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름을 타면서 무척 많은 땀을 흘렸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낯선 바람의 등을 타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 때쯤/ 그는 자신의 출생비밀을 들려주었다 사생아라는, 다시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뿌리의 들썩임이/ 한동안 지속된 뒤에 나는 그의 물관을 통하여 누구나 한 번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나는 더 오래 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온 몸을 들썩이며/ 를 받아주었다 겨울에는 뿌리의 움직임이// 주춤거릴 것이며, 더 이상 내 몸에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것이다/ 굽은 허리의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햇볕 잘 드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빨래판 같은 남자 / 문정영
그는 오래된 시간의 나무 판자에/ 울퉁불퉁 홈을 파서 만든,켜켜이 햇살을 나이테로 바꾼 널빤지 같은 남자다/ 그에게 한 번 길들여지면// 빠르고 電子動인 것들보다 우묵한 마음에서/ 오래 더럽혀진 생각을 씻어내곤 한다/ 다른 것들과 섞이지 못하는 자폐증의 빨래감들도// 그 앞에서는 깨끗해진다/ 다만 누군가가 올 때와/갈 때가 다른 것이 늘 그를 그늘지게 한다/ 서로의 마음을 치대면서 부딪기면서 사랑하는 일조차/ 그렇게 깨끗한 관계로 헹구고 나면 애증의 물기만 남아있는 것일까/ 헹구고 짜내어 물 맑아지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인지//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닦아내어/ 더 이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마음의 상처는 속속들이 더 깊어 가는지 모른다/ 곪아터진 흔적을 옹이로 틈틈이 박고 사는/ 그래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첫물로 받아들이는,//

전지剪枝 / 문정영
봄은 과수원의 풀리는 나뭇가지 자르는 힘으로 온다 바람벽 닫아두고 冬安居한, 가벼워진 팔을 자르든지, 다리를 절단하든지모를 게으름이 꽃망울로 피기 전에, 묵은 괴로움은 먼저 잘라내야 한다 그런 열망과 수정되어야할 꽃가루의 수집을 요즘 꿀벌들은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는 꽃 속의 욕망을 찾고 있을 뿐 잘린 나뭇가지 끝에서 품어내는 따스함을 알지 못한다 아직 처녀티를 벗지 못한 젖꼭지만한 생각을 봉투로 소중히 싸두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자리가 부끄러워서이다 늑장을 부린 剪枝의 수정이 안된 꽃들의 집단자살 같은//

지루함에 대하여 / 문정영
운현궁 낮은 담벼락 위의 아직 상량식 끝나지 않은 거미가 지은 집, 주인은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쁜지 보이지 않는다 몇 천년을 걸어서 온 햇살이 먼저 환한 등불을 서까래 사이사이 걸어 둔다 바람은 방금 풀칠한 창호를 말리며, 일자지붕을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다 아무 세간도 없는 집안에 지루하지 않은 시간한 자루만 누군가 부려놓고 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늙은 주인이 자루 주둥이를 풀어 아주 느린 시간 한 줌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손님을 맞는다 거기 조갈증을 앓고 있는 내 조급함의 빈 자리!//

잠그고 푸는 법 / 문정영
출근길 겨울 외투를 한 겹 더 입다보면참 잠가야할 세상이 많다 잠그지 못하고 흘린 인연이 얼마나 많으랴만, 하루는 단추를 제 구멍에 잘 넣는 일에서 시작한다 걸어온 길만큼 크기와 모양이 다른 단추나 쟈크들 내가 잠근 세상은 나만이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열어놓고 태평하게 서 있었던 때가 간혹 있다 보이지 말아야할 것들을 보이고 난 뒤의 헛손질외투의 구멍에 양복의 단추를 잠근 채내 생의 반이 구겨져 있는,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나는, 욕망 푸는 법을 배운다//

옛 집터*에서 / 문정영
목대문이 있던 자리의 키가 안 맞는 풀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거미의 집과흙 묻은 사금파리에서 빛나는 노래들그물에 걸린 민들레 씨앗이/ 아직 이주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내 살의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간 뒤 온갖 잡풀들 오른쪽 마루며, 왼쪽으로 구부러진 방을 넘보고 있고, 그 곳에 햅쌀 같은 햇살로 새집을 짓고 있는 더부살이하던 놈들 누군가 떠난 자리도 남은 누군가에는 몸 기댈 수 있는 자리가 되는가 보다/ 나를 살게 하던 봉숭아 꽃잎만한 미소들, 물에 잠겨도 지워지지 않은 길들, 잎새에 숨은 숨소리들 그대로 남아서 물고기의 밥이 되는 것들/ 나는 마루터의 풀잎에 앉아 오래도록 그리움의 탁본을 뜬다//
* 옛집터 : 2003년 수몰예정지구 전남 장흥군 유치

폐선 / 문정영
그가 태어난 곳은 낙조가 긴 서해의 섬, 그는 자라면서 늦은 저녁과 홍조 띤 바다를 사랑했네 그를 안아주며, 쓰다듬어준 아버지는 더 넓은 해양 지도를 그가 잠드는 방에 붙여주었네 그는 날마다 알 수 없는 나라를 항해하였고 그 나라의 풍물을 하나씩 사올 때쯤,// 아버지의 저녁은 깊어갔네 허리가 굽듯, 갑판 위의 안전대가 부러져 가고 낡은 철사로 동여맨 만선 깃발이 내려앉은 날// 아버지는 낮은 풍랑에 넘어졌네 아버지의 혈관은 이미 오래된 기름에 막혔고 그가 건네준 풍물로는 고칠 수 없었네// 오직 바다로 난 길만을 알던 아버지 잠들어 계시는 모래언덕아버지의 무덤 위로 그가 사랑한 밀물의 안온함이 끊임없이 다녀가네/ 그가 물 위에 그린 지도를 따라 아버지의 꿈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네//

물방울무늬 생긴 날 / 문정영
겨울비 내리는 휴일 두터운 잠바를 꺼내 입고 이발을 하러 갔다 무성히 웃자란 머리칼 위로 차가움이 은실처럼 붙었다/ 잠바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비의 소리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오래 닦지 못한 옷먼지에 닿은 비의 무늬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살아온 생의 파란(波瀾)이 스르륵 전신으로 번졌다 잘 닦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거기 그렇게 옷먼지로 있었다/ 내 안에 이런저런 소름들이 잘린 머리칼처럼 몰래 숨어있었다 젖을수록 속이 환해지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 만한 생!//

인공어초人工魚礁* / 문정영
오래 쓸리고 흘러내리며 봉분마저 사라져 버린 때, 무덤 밖으로 몸 내민 廢船 같은 아버지 DNA검사도 어려운 뼛조각들이 얽힌/ 그를 수장한다 그가 이름처럼 지닌 완장 같은 거그가 서해의 낙조로 날인한 인장 같은 거물 밖에 남겨둔다 그를 해체할수록/ 그의 몸은 더 큰 해초의 집이 된다 물 안에서는 왼쪽 사타구니의 혈관을 뚫던 가는 철사의 관통도 없다 위장을 오래 점령한 악성종양도 없다/ 관 속 편안한 자세만 취하면 된다//
* 인공어초 : 폐선 등을 바다에 가라앉혀 만든 해초와 고기들의 집

오후 / 문정영
석계역 가는 철길가 오월 꽃자리가 아토피성 피부 같은 담벼락 앞, 바람이 파헤친 흙살에누군가 가눌 수 없는 마음을 심어놓고/ 그 위에 노란 양산을 펼쳐 두었나 양산의 그늘이 촉촉이 젖어있다 마음 도둑은 가고 늦은 시간이 자라고 있는,//

나무의 꿈 / 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풀무치의 애벌레 / 문정영
말랑거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풀잎이 말랑거리는 시간을 풀무치의 애벌레는 안다 허울을 벗고 기어가는 애벌레는/ 몇 번을 더 벗어야 풀잎을 자유롭게 뛰어 넘을까 그렇게 空으로 사는 것은 없다 허공에서 커 가는 것은 허공이 집이다/ 허공에 서까래를 올리기 위해서는 풀잎보다 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풀무치가 넘어가는 세상, 허공은 건너뛰어도 건너뛰어도 절벽이다/ 그리고 더 이상 건너 뛸 수 없을 때 허공이 말랑거리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맨드라미 / 문정영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돼지우리 곁에 감나무 몇 그루 기둥처럼 서 있었다봄이면 볏짚이 목련꽃잎처럼 썩어갔다 수탉의 벼슬 같은 꽃이 마당에 지천으로 피었다 그 무렵이면 내 몸에도 붉은 꽃이 피었다'아토피, 아토피' 지루한 가려움증의 꽃이었다 접힌 살 부위에서 먼저 뿌리를 내렸다/ 사각사각 긁는 소리 따라 자잘한 상처가 모인 꽃 이삭이 솟구쳤다 꽃은 내 몸에 천천히 퍼지는 독이었다 독은 늦은 봄부터 여름 내내 번졌다/ 번지면서 하늘을 태우고 흙을 태우고, 내 눈가는 늘 붉어 있었다 할머니가 썩은 볏짚을 태워 온 몸을 씻겨주었다 내 검어진 사타구니를 제법 벌어진 감꽃들이 몰래 들여다보곤 하였다//

책 속의 개미 / 문정영
달리는 전철 안에서 책을 펼쳐 한참 줄거리를 읽고 있는데 아직 읽지 않은 글자 하나가 떨어져 꿈틀거린다 어디서부터 따라 왔는지/ 책 안으로 들어와 행간을 두리번거리는 한 마리 개미 결코 글자의 형상으로만 남지 않겠다는 작심을 했는지 나가는 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데,/ 책 밖으로 나가는 길은 읽는 사람이 글자를 삼킬 때에만 보인다 글자가 생각 속으로 들어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졌을 때, 그 사람의 입이나 눈을 통하여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개미는 처음 들어온 쪽에 사다리를 놓고 싶으나 지나온 길에는 걸어놓을 턱걸이가 없다/ 이미 굳어버린 생각의 집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이다 개미가 열심히 출구를 찾는 한 쪽에 누군가의 신발 한 짝이/ 들어오는 길인지 나가는 길인지 모르게 옆으로 엎어져 있다//

대나무女子 / 문정영
대나무 흰깍지 벌레가 등을 간질인다 따끔거리는 마음을 바람에 맡기고 있는 울어도 늘 반듯이 서서 우는 그녀는, 그 작은 벌레가 뚫어놓은 욕망에 힘겨워한다 등뼈의 첫마디에서 끝마디로 번져 가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틀어막아도 목에서 터져 나오는 죽비소리 그 사이, 벌레가 낸 마음 구멍으로 푸른 그리움이 먼저 고개를 쑥 내민다 일생에 꽃 한 번이라도 피우다 시들고 싶은, 그러나 누군가의 거실에서 하나의 가구가 되고 싶지 않은, 女子//

황구 / 문정영
신용산역 호프집 만남의 광장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늘 길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교차로에서 짐차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황색털 안에 햇빛이집 한 채 짓고 있습니다 한 낮에도 시장의 야채꾸러미처럼 엎드려 있는 그는 말라버린 젖꼭지를 아직도 땅에 물리고 있습니다/ 다 자란 새끼에게 마지막 젖줄을 내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어미임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눈 속으로 신호등 없는 사람들이 건너다닙니다/ 그가 그렇게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전자상가 쪽으로 배달되는 무수한 전자칩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쓰다가 낡거나 고장 나면 버리는/ 일상들을 그는 쓰레기봉지에서 자주 찾아냅니다 그가 바라보는 나 또한 그렇게 버려진 칩 중에서 날이 나간 칩 하나가 아닌 가 생각해 보다가/ 그가 웅크리고 있다 일어난 따뜻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봅니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노래있을까 / 문정영
몇몇은 아직 재래식 아궁이로 몸을 뎁히는 그런 바람 부는 동네의 길가에 쌓인 완전 연소된 연탄재 같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위해/ 다 타버린 몸을 가지고 있을 뿐, 그런 몸들은 항산화제로도 노화를 막을 수 없으며 이미 주어진 권리를 다 써버린 뒤/ '토지거래허가제'처럼 얼마만큼 크기 이상의 자유는 사전 허가를 득해야하는 ,대지가 효능보다는 가격으로 결정되는 그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를 위해 자신의 구멍을 열어 불꽃을 피울지 알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허락 받아야만 하는 시대에서는/ 어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있을까//

연필깎기 / 문정영
흑색의 단단한 심이 온 몸을 관통한 나무는 분별할 수 없도록 껴안고만 있으면 그것이 하나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 그들은 제 마음 타는 줄 모르고 온전히 서로의 몸을 그렇게 껴안고만 있었습니다나는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나무의 살을 잘라 내고 심은 심대로 깎아 내렸습니다/ 내 안에 그들의 사랑을 톱질하는 칼날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둥근 톱날에 나무와 심의 깨어나는 상처들 그러나 그들은 깎여야만/ 서로의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배려라는 글씨를 쓰기 위해서 나무는 마음의 뼈대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깎은 몸을 보여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은 몽당연필이 되기 전에 알 수 있을까요//

이명耳鳴 / 문정영
내 왼쪽 귀의 좁은 동굴에서는 작은 소리들이 산다 매미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휘파람새 울음 같기도 한다/ 내 안에서, 날마다 충동되는 분노와 욕심이 내는 소리는 아닌지 달팽이관을 따라 돌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리는/ 내 안에서 얼마나 울고 싶었을까, 마흔 해 넘어서야 그 소리가내 울음인지 알고, 조금씩 나누어 우는 법과 홀로 흐느끼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끄럽고, 남들이 있는 곳에서 울지 못하는 그 울음이 나를 깨우는 또 다른 소리가 되도록, 귀에 갇히지 않으면서 한없이 열리도록, 한 밤중 더 크게 들리는 울음의 등을 나는 자주 두드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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