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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제니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8. 09:55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페루〉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편운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들은 아름답고》 등이 있다.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아마도 아프리카 / 이제니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반은 쑥색이고 반은 곤색이다/ 쑥색과 곤색의 접합점은 성홍열 같은 선홍색// 열두 살 이후로 농담이 입에 배었다/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손톱 끝에도/ 주황색 양파 자루 속엔 어제의 열매들/ 양파가 익어가는 속도로 너는 울었지// 눈을 감아도 선홍색이 보이면/ 다시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너무나 멀리 있지만 아마도 이미 아프리카/ 나는 하룻밤 사이에도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이제니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 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중략)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지 않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작고 없는 것 / 이제니
한 열매가 맺히듯 태어나/ 죽고 썩고 사라진다// 나무와 나무가 나란히 서서 숲을 만들고 있다/ 구름과 구름이 스며들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덮인 눈 위에/ 덮인 마음/ 위에 덮인 눈// 사라진 줄도 모르고 사라진 것들에 대해 쓰고 있다// 희고 검은/ 얼룩// 종이를 짓누르는/ 연필의// 만져보면 느껴집니다// 없는 눈이 되어 없는 것을 바라볼 때/ 언젠가 바라보았던 것은 언제나 나의 눈이었고// 살과 피와 표정과 목소리가/ 사라지고서야/ 느껴 아는/ 그것을// 붉고 푸른/ 줄의// 흔적// 한번 긋고/ 지워 버린// 지난한 날들의 어둠이/ 종이 위에 스며들도록/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좀더 힘을 주어/ 누르고 눌러 부릅니다// 무언가 남은 것이 있을까 하고/ 무언가 들린 것이 있을까 하고// 그러니까/ 그것은 그것이었고// 작고 없는 것/ 그것은 언제나 나였고//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나뭇잎과 나뭇잎은 흔들리는 나무였고/ 흔들리는 나무와 나무는 사라지는 숲이었고/ 사라지는 사라지는 눈앞의 나무는 언젠가의 너였고// 결국 모르는 사이에 다시/ 나뭇잎과 나뭇잎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쳐 지나온 날들이/ 구름과 구름으로 되묻고 있었다// 뒤늦게 알고 울고 걸아갈 때/ 다친 마음이 닫힌 마음으로 흘러갈 때// 작고 없는 것이 천지를 덮고 있었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으며 나아갔다//

구름에서 영원까지 / 이제니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자국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들판으로 모여 들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때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 조약돌.나는 네게 주었던 것은 하얀 모래알. 바다는 오늘도 그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돌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돌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놓여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너의 목소리. 바닥으로 번져나가며 너의 목소리. 물결은 왔다가 갔다. 울음은 갔다가 왔다. 바람은 돌이킬 수 없었다. 고양이는 노래를 훔쳤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희망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름뿐이다. 나의 이름 위에 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너의 이름 위에 돌의 마음을 올려 두었다. 발자국소리는 침묵 뒤에 다가왔다. 노래를 부르면서 말없이 흔들렸다. 빛은 어둠을 감추며 언덕으로 달려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돌의 마음. 네가 내게 주었던 것은 검은 조약돌. 너는 너의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나의 이름을 감추었다. 우리의 이름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흘러갔다. 구름이 나를 나무랐다. 나무가 바람을 뒤덮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물결 뒤에는 조약돌만 남았다. 약속은 남은 사람 혼자 간직했다. 바람은 구름 뒤로 사라졌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영원을 보았다고 믿었다.//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 이제니
소년이라고 부르면 소년이 보인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인다. 세상 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꽃도 피어나는. 불도 피워내는. 자신의 숨은 광기를 걱정하는.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모르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던. 시들어버린 얼굴 위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발 물러나고 있었다. 비유를 잃어버린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도처에 도사린 어제의 구름. 물보다 묽은 오늘의 묵음.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으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두 손으로. 내가 살았던 곳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에는 네가 없었다. 소년은 소년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쓴다. 벗어나길 바라는 순간 벗어나고 싶은 울타리도 하나 생긴다라고 쓴다. 울타리 밖에서부터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감함으로 무장한 날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착란의 찬란의 소리 없는 소용돌이 속이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세계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그림자. 죽거나 늙거나 마지막은 마찬가지라면. 잊거나 믿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천상의 음악이 흘러도 좋을 것이다. 천사가 날개를 펼쳐도 좋을 것이다. 단단한 벽 너머로 막이 열려도 좋을 것이다. 손과 발로 박자를 맞추며 제대로 웃고 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깨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다정한 손도 있을 것이다. 어둠 없이 잠드는 밤도 있을 것이다. 서러움 없이 말하는 입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중심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겁니다. 기어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대화는 쳇바퀴처럼 맴돈다. 꽃은 꿈으로 피었다 진다. 꿈은 망각으로 소멸되며 완성된다. 깊어지다 어두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엽서는 북반구 소도시의 풍광 사진을 담은 것으로 단단한 얼음을 도려낸 듯한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한때의 죽음과도 같은 ---- 호숫가에는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려는 동시에 어딘가에 멈추어 서있다. 멈추어 있는 채로 움직이고 있는 자전거 바퀴의 빛살이 아득히 눈부시다. 언젠가 너를 눈 멀게 했던 호수의 빛.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남몰래 몸을 던지려 했던 깊고 쓸쓸한 물결의. 엽서 곁에는 작고 검은 돌이 몇 개 놓여 있다. 검은 돌 ---- 돌연 가슴을 두드리는 슬픔이 지나가고 ----- 돌은 다시 발견된다. 돌은 그제야 제자리에 놓인다. 발견되는 돌 이전에는 발생하는 눈이 있었고. 눈. 바라보는 눈. 바라보면서 알아차리는 눈. 알아차리면서 흘러가는 눈. 흘러가면서 머무르는 눈. 머무르면서 지워지는 눈. 지워지면서 흘러가는 눈. 너는 엽서의 뒷장을 펼쳐 읽는다. 끝없는 설원의 가장자리로부터 한 사람이 베일 듯 걸어 나온다. 얼음의 꽃으로부터 향기를 간직하려던 사람이여. 닿을 수 없는 국경 너머를 향해 뿔피리를 불던 먼 생의 사람이여. 너는 이미 죽은 스승의 전생의 어머니이다. 몇 겁의 세월을 지나 이름 없는 여인이 낳은 구슬픈 눈을 가진 어린 린포체이다. 순간 ----- 마룻바닥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원의 어린 짐승이 지나 가고 너는 네가 가보지 못한 곳의 겪지 못한 형국을 한눈에 다 바라볼 수 있다는 기이한 착각 속에 빠져든 채로 ------ 맞은편은 여전히 비어 있음으로 가득히 비어 있다. 의자에 앉은 너는 끝없는 설원 위를 끝없이 걷는다. 고행이라도 하듯이 앞서 걸어가는 네 자신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가듯이. 정지된 화면은 다시 재생된다. 기도를 마친 사제는 책상으로 옮겨 앉아 먼 나라의 슬프고 아픈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빛이 먼지를 지우고 있습니다. 밤이 어둠을 돕고 있습니다. 사이 ----- 푹푹 눈발에 빠지는 발소리가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기에. 너는 의자에 앉은 채로 걸음을 멈춘다. 눈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을 때. 어느새 작고 어린 겨울 짐승이 네 곁을 따라 걷고 있었고. 너와 어린 짐승은 각각의 생각에 잠겨 각자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은 언젠가 전해 들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와도 같아서. 네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찰나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로서. 너는 작고 검은 돌 위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한 얼굴을 발견한다. 어스푸레한 빛 속에서 무수히 떠오르는 몸짓들. 빛과 어둠의 경계 위에서 흩날리는 입자와 입자 사이의 흐느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기억처럼 먼지의 춤이 발생한다. 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있었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이전에는 하염없이 덮이는 땅이 있었고. 하염없이 덮이는 땅 이전에는 하염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몸이 있었고 ------- 너는 멈추어 있는 채로 걸어가는 그 모든 사물의 표정과 목소리를 너 자신의 얼굴인 듯 읽어내려간다. 사이 ------ 먼 나라의 사제는 온몸으로 세계의 울음을 듣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가고 있었고. 어느덧 너는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설원의 모서리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함께 걷던 작고 어린 겨울 짐승은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었고. 오직 너 혼자만이. 너 자신과 함께. 둘인 동시에 하나인 채로, 하나인 동시에 둘인 채로. 먼 길을 오래오래 홀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걷고 걸어도 가닿지 못하는 설원의 빛 너머로부터. 누군가 멀리서 내내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들려오듯 문득 서럽고 드넓게 울려오는 네 마음속 한 목소리가 있어. 너는 먼 곳의 얼굴 없는사제를 네 영혼의 친척으로 여기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 이제니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파랑 종이꽃을 접으며 나는 밤마다 오빠의 문장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쓰는 밤. 아무도 나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고백의 목소리. 오빠의 공책 위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들일까. 어제의 파도는 어제 부서졌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 부서지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부서질 것이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밤이면 착하고 약한 짐승의 두 눈이 바다 위를 흘러 다녔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결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가없음. 그것이 나를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 열매를 말리는 건 두고두고 먹기 위해서지.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를 씹으며 나는 자라났고 떠나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또다시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늘의 입 / 이제니
너는 언제나 회색의 혀로 회색의 목소리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오해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 이해라는 말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이후로 우린 서로에 대한 질문지를 삼켜버렸지 이후로 우린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무수한 말이 적힌 백지를 간직한 채 꿈은 반대라는 말을 괄호 속에 묶어둔 채.// 새의 이름을 가진 물고기, 물고기의 이름을 가진 새. 구슬프다는 말은 날개 달린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날개와 아가미를 나누어 가진 뒤 천천히 서로로부터 멀어지고 꿈속에선 하나의 이름으로 둘을 부르는 일에 골몰했다.// 소리가 노래가 되는 온도를 위해/ 소리가 노래가 되지 못하는 무구함에 대해/ 서로의 손과 발을 만지듯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글만을 쓰고// 생물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시인의 문장과 검은 모자를 쓴 신원 미상의 그림자와 터널 속에 남겨진 내 일곱 손가락과 삼각형이 나를 찌르는 방식과 푸른 발을 가진 새들과 나무둥치의 상처와 소멸하는 별들과 환각의 꽃과// 몇 가지 오류를 거쳐 나는 입 밖으로 귀환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의 시간은 방부 처리된 길고 투명한 유리병의 나날. 서로의 입속말을 훼손하지 않는 대신 여분의 종이는 어둠으로 물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나지 않는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편지광 유우 / 이제니
편지광 유우를 다시 만난 것은 물방울이 떨어지던 어느 저녁, 공원의 한 벤치에서였다. 유우는 맞은편 벤치에 앉아 노란 포스트잇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줬던 유리반지를 낀 채로. 유우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전날 나는 꿈을 꾸었다. 편지광 유우의 검은 펜이 나타나 자신의 심장은 겨우 다섯 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백 개가 될 때까지는-. 하필이면 그때 꿈에서 깨고 말았다. 목이 말랐다.// 때로는 이런 꿈도 꾸었다. 하나 둘 셋 넷. 편지광 유우는 숫자를 센다. 의미 같은 건 없어. 그저 이렇게 세는 게 좋을 뿐이야. 좋을 대로 해.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편지광 유우는 여전히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모른다. 그것이 유우를 외롭게 하는 동시에 빛나게 한다. 나는 매번 문장을 적다 말고 꿈에서 깬다.// 이 도시 곳곳에는 암호가 적혀 있다. 편지광 유우가 자신의 검은 펜을 데리고 이 도시로 흘러들어온 이상 이제 그것들을 무심히 지나쳐버릴 순 없게 되었다.// 첫번째 메모는 동그란 코안경을 낀 산타클로스 광고판 위에 붙어 있었다.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편지광 유우는 여전히 카프카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란 포스트잇을 떼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유우의 유리반지를 바라보았다. 유우는 노란 포스트잇을 떼었다 붙였다 구겼다 폈다 했다. 이따금 내 두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유우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 놓인 사물들을 빤히 쳐다본다.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우는 단 한번도 내가 원한 자리에 놓여 있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원하지 않는 곳에도 놓여 있는 법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찾았니? 십년 전에도 나는 그렇게 물었다. 편지광 유우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지도 않았다. 아니, 그토록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데도 아직까지. 유우는 빈 호주머니를 뒤적이듯 상심한 눈빛이었다.// 유우가 잃어버린 것은 몇개의 단어였다. 하찮고도 보잘것없는 단어 몇 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는, 어쩌면 약간의, 아주 약간의 타협이 필요한.// 검은 펜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검은 펜을 잃어버린 것이다. 금요일의 얼굴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금요일의 얼굴을 잃어버린 것이다. 죽은 친구의 편지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죽은 친구의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를테면 일종의 맥거핀 수법인 셈이지. 유우와 나는 히치콕의 영화를 쓸데없이 많이 보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말들이 무엇인지 서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둘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헤어지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이유다.// 지나간 시간에 관대해진다면, 다가올 시간에 관대해진다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간직해온 꿈을 버린다면. 간직해온 꿈을 꾼다면. 유우는 영원히 자기 자신과 공통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약간의 탄수화물만 섭취할 뿐이야. 나머지는 공원의 비둘기에게 던져주지. 유우와 나는 도시의 곳곳을 걸어 다닌다. 나는 유우가 남겨놓은 메모들을 눈으로 좇고 있다. 유우는 이 도시 여기저기에 짧은 편지를 써두었다. 누구에게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사람에겐 어제 쓴 메모 또한 타인의 기록일 뿐이다.// 아무런 개연성도 없는, 이렇다 할 논리도, 열쇠처럼 확실한 의미도 없는 네버엔딩 스토리. 하지만 이왕이면 해피엔딩이면 좋겠어. 편지광 유우도 제법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울면서 웃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어지간해선 잘 웃지 않지만 쉽게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슬퍼하거나 지치지도 않는다. 그걸로 됐다, 아직까지는.// 여행은 짧다. 고작해야 몇주 정도. 나는 곧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다. 뒤돌아서면 두 번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편지광 유우는 물방울을 튀기며 걸어간다.// 왜 너는 한번도 답장하지 않았니? 편지광 유우가 뒤돌아서며 묻는다. 매일 아침과 저녁, 네가 내게 편지를 쓰는 이유와 같아. 편지광 유우가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난날의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마의 주름과 느려진 걸음 외에는 편지광 유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 메모 역시 물음표로 끝난다. 마침표는 유우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저만치 편지광 유우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나는 또다시 어느 골목에서 유우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다시 우연처럼 만날 것이다. 그전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림자 정원사 / 이제니
정원의 길은 둥글고 버섯의 왕은/ 포자의 모자를 쓰고 어둠의 수풀 속을 걸어간다/ 어둠의 수풀 수풀 수풀 그런 수풀 수풀 수풀// 보퉁이를 들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어젯밤 여름이 내게 왔을 때,/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때, 웃지 못해 울 때, 그때,/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말 못할 때,/ 깨어진 거울을 사이에 두고 너와 마주 앉았을 때,/ 그때,/ 기적이 일어나,/ 너와 나의 입이 하나가 된다면,/ 나는,// 소리 없는 방을 지나는 둥근 바퀴처럼/ 검은 사각형을 지우는 검은 사각형처럼/ 나무들은 그럼에도 흐른다 버섯의 왕이 자라듯/ 길게 위로 위로 내면에서 열리는 창문을 향해/ 문명의 운명의 말굽 발굽은 높이 높이/ 발 없는 발을 가진 슬픔을 뿌리에 묻고/ 검은흙을 감싸 안으며 흐르고 흘러// 그림자 정원사는 내게 말했지/ 너는 한 번 결혼하고 또 한번 결혼하게 될 거야./ 한 번은 네 자신과 또 한번은 네 그림자와/ 난 아직 한 번도 결혼하지 못했는데/ 난 아직 그 어떤 영혼과도 손잡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그림자인가요 그림자가 나인가요// 내가 잡은 푸른 벌레는 매번 죽어 있었지/ 나는 녹색병에 든 내 심장을 두 번 흔들었다/ 거품이 날 때까지 거품이 날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내 취향 내 기행 내 만행 내 악행 내 결백/ 나는 과거의 사람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고/ 이 작은 인공의 숲에서 검은색으로 은둔 중/ 거미줄 시계풀 곤충들의 소리에만 귀 기울인 채/ 너는 네가 믿는 유령의 모습으로 희미하게 읽히고// 초점 초침 초월/ 나의 동공은 녹청으로 물들어가는 정원의 빛/ 너의 거짓이 우거지도록 내려버려두는 대신/ 내 오랜 그림자의 끝을 향해 여행하기로 했다//

사몽의 숲으로 / 이제니
여기 누군가 두고 간 바둑판이 하나 있다/ 흰돌 검은돌 흰돌 검은돌/ 흰돌 흰돌 흰돌 검은돌 검은돌 검은돌/ 검고 흰 들판이라 불러도 좋겠지// 명백함에 대한 명백함은 명백함의 명백함을 넘어서지 않는다/ 꼭 그만큼의 명백함에 대해/ 꼭 그만큼의 암묵적 동의에 대해// 거짓을 말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도의를 도리를/ 저버리지 말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숲은 격앙의 진원지/ 진심을 다해 전하고 싶은// 무엇을/ 그것을// 그리하여 우리의 사몽/ 우리의 사몽은 어제의 기억처럼 늘어서 있지// 양탄자와 구두 단추/ 빗자루와 빗자루와 빗자루와 빗/ 자루와 빗자루/ 빗자루에 집착하는 마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 오래된 약속이 하나 있다/ 잊으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잊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더이상 울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진홍의 붉은 불그레한 누군가의 식도 언저리를 지나는/ 초록의 검은 빛나는 이끼 이끼 이끼 웃자란 이끼들/ 웃자란 찌꺼기들 내뱉지 못한 찌꺼기들에 대해/ 목소리의 색깔을 식별하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식별할 수만 있다면/ 식별할 수도 있을까// 그리하여 사몽은 오늘도 빗자루질을 한다/ 사몽 사몽은 낙엽을 쓸고 쓸고 또 쓴다/ 서투른 문법으로 빗자루질을 한다 한다 한다/ 그러나 사몽은 긴머리 긴머리보다 더 긴머리/ 나뭇잎은 계속 계속 떨어지지 쓸고 쓸어도 쌓여만 가지// 말할 수 없이 긴 머리로/ 사몽은 나아가고 사몽은 되돌아오고/ 이 끝없는 공허의 숲의 적막의 둔덕의 언덕에 앉아/ 둥글게 퍼져나가는 구름의 빗자루질을 낙엽의 빗자루질을//

모퉁이를 돌다 / 이제니
어느 날 당신 앞에 모퉁이가 나타난다 모퉁이는 당신이 보았거나 보게 될 한없이 이어진 몇 개의 선분이다 당신은 모퉁이를 돌며 모퉁이라고 발음하고 모퉁이라고 발음하며 모퉁이를 돈다 모퉁이는 돌거나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모퉁이는 당신에게 사라지거나 나타날 것을 종용한다 모퉁이는 지나치고 모퉁이는 냉정하고 모퉁이는 어둡고 모퉁이는 발생 가능한 사건의 형태로 존재한다 당신은 모퉁이를 돌면서 위를 쳐다본다 하늘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다고 되뇌면 보고 싶은 감정이 더할까 덜할까 이것은 문장으로 연습해보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다 소멸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다 삼각형 사각형 각진 도형들의 감각으로 위로받고 싶은 모종의 마음이다 새장의 새처럼 새의 새장처럼 휘날리는 은빛 깃털처럼 은빛 깃털의 휘날림처럼 당신은 약간의 온기만 있으면 족하다 그러나 당신에게 온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당신은 모퉁이를 돌며 오전과 오후를 연습한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의 불가해함을 연습한다 그림자의 각도를 예측하고 그림자의 일부가 된다 모퉁이를 돌면서 모퉁이라고 발음하고 모퉁이라고 발음하면서 모퉁이를 돈다 어느 날 당신 앞에 모퉁이가 나타난다//

밋딤 / 이제니
빛나는 것을 바라보듯 눈을 감았다. 거둘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마음으로 길쭉하게 진동하는 소립자의 호소처럼, 여기에 슬픔이 있고 여기에 틈이 있다.// 당신은 왜 당신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내 얘기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실은 이미 너무 많이 이야기해버렸지요.// 우리에게 밋딤의 밤이 출현한다면 우리를 가로지르는 이 바람에 대해 질문하겠다. 너의 두 손은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까닭 없이 수줍고 돌연한 자세로 흔들렸다.// 밋딤으로 다가가기 위해 밋딤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나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양을 세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무한히 커지는 속삭임 한 번, 무한히 작아지는 속삭임 한번./ 흰색 다음엔 무슨 색이 오나요./ 흰색 다음엔 흰색 아닌 색이 온단다.// 그리운 냄새가 피어올랐지만 언제나처럼 반대편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원했으므로 내가 그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나는 나에게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오른쪽으로 두 발짝 걸어가자 눈물이 났습니다.//

발 없는 새 / 이제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나무로 만든 작은 관이라면 더 좋겠지. 나는 거기 누워 꿈 같은 잠을 잘 거야. 잠 같은 꿈을 꿀 거야.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내가 어디로 흘러와 있는지 볼 거야. 누구든 한번은 태어나고 한번은 죽지. 한번 태어났음에도 또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한번 죽었는데도 또다시 죽으려는 사람들. 제대로 태어나지도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 청춘은 다 고아지. 미로의 길을 헤매는 열망처럼 나아갔다 되돌아오지. 입말 속을 구르는 불안처럼 무한증식하지. 나의 검은 펜은 오늘도 꿈속의 단어들을 받아적지. 떠오를 수 있을 데까지 떠올랐던 높이를 기록하지. 나의 두 발은 어디로 사라졌나. 짐작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숨겨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 속에 묻어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는 짐작할 수 없는 높이를 수반하지. 높이는 종종 깊이라는 말로 오인되지. 다다르지 못한 온도를 노래할 수 있는가. 다다르지 못한 온도를 아낄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요롱이는 말한다 / 이제니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롤요롱하게.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은 비처럼 비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요롱이는 검은색과 검은색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끊이없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마침표를 잃어버린 슬픔. 양팔을 껴야만 하는 외로움. 그건 단지 요롱요롤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보이지 않은 틈 속으로 한 발을 들이밀면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입 속의 모음이 가슴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으로 입에서 울음으로 옮겨가는 일을 보는 일은 요롱요롱하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당신만의 요롱이를 찾지 못했을 뿐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 잘못도 아니어도 요롱요롱 용서를 구하고 싶다.// 얼어붙은 영하의 영혼으로, 튕길 듯한 용수철의 탄성으로. 요롱이는 떠나온 자리를 매순간 들여다본다. 과연 내일이 와도 요롱요롱 밥을 먹고 요롱요롱 울다가 요롱요롱 흘러가는 구름 속을 볼 수 있을까. 꼭 맞는 옷. 꼭 맞는 장갑. 꼭 맞는 장화. 꼭 맞는 헬멧을 쓰고. 안팎이 다르지 않는 들판 쪽으로. 물과 공기와 바람이 있는 풍경 속으로. 먼지 같은 삶은 감수한 지 이미 오래.//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정말 요롱이가 된다면 정말 요롱이가 된 기분이 들 테지. 고딕체의 마음으로. 소수점 이하로 무한 질주하는 원주율의 아름다움으로.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꽃처럼 신열이 내린다. 어둠이 내린다고 써도 무방하다.//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 이제니
기분 나무는 구름의 영토 서쪽끝에 도열해 있었다/ 그늘 밑에는 알파카 나의 알파카가/ 어느새 우리는 구름의 영토 끝까지 날아왔구나// 무구한 검은 동공이 소용돌이치며/ 연관 없는 어휘들의 밤 위로 날아오를 때// 너는 어리지 않다/ 너는 늙지 않았다/ 너는 아직 늙지 않았다// 꼭짓점과 모서리들이 멀어진다/ 나는 몇 개의 점과 선과 면을 간단히 밀어낸다// 발밑에는 줄지어 누워 있는 녹색의 풀/ 구름의 무덤 곁에선 녹색의 목소리가// 나는 이 생을 두 번 살지 않을 거야/ 완전히 살고 단번에 죽을 거야// 알파카 나의 알파카/ 아름다운 얼굴이 그 여린 솜털이/ 부드러운 바람에 조용히 흩날릴 때//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백을 믿는다// 나무의 수맥을 따라 흐르는 물결 너머/ 테두리를 잊은 마음이 밀려온다//

녹색 감정 식물 / 이제니
식물이 말라죽기도 하는 밤이었다/ 수풀은 슬픔을 잠식한다/ 습기는 습기로 피어오른다/ 많은 것들이 죽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거의 볼 수 있었다/ 어두운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다/ 새의 깃털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선명했다/ 넝쿨과 넝쿨이 안간힘을 다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 같은 마음이 서로를 잇고 있었다/ 실을 토하는 벌레의 등을 누르자 녹색의 즙이 흘러나왔다/ 어떤 죽음은 사소하게 잊혀져갔다/ 가위로 오려 만든 종이인형의 그림자/ 배경이었던 것들이 백지 위에서 불쑥 일어서곤 했다/ 어두운 수풀의 어두운 새의 어두운 깃털이/ 누군가의 얼굴이 뭉개지고 있었다/ 녹색 식물의 입이 흔들리고 있었다/ 녹색의 감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릴 수 있다면 날아오를 수도 있겠지/ 날아오를 수 있다면 사라질 수도 있겠지/ 물과 얼음/ 물과 수증기/ 액체의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영혼의 질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잘못 내디딘 한 발자국은 이미 길을 잃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수풀 아래 묻혀 있던 잊혀진 기차 레일/ 남색의 곤색의 녹색의 꽃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빛의 회절 속에서 진동하는 녹색/ 녹색 광선이 너의 얼굴을 조각내고 있었다/ 눈은 떼어 여치에게로/ 입은 떼어 앵무에게로/ 귀는 떼어 귀뚜라미에게로/ 코는 떼어 조약돌에게로/ 분별없는 심장이 그것의 감정을 녹색으로 물들였다/ 내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수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계단은 아래로 향하는 무수한 선분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죽어가면서 태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지워지면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고아의 말 / 이제니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 늙고 병들고 지친 마음이 내 얼굴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게 합니다 어둠속에서 써내려간 글자들을 읽으려고 종이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종이의 질감을 만져보았습니다// 종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심장은 손가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아름다운 도형들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뾰족한 것들이 나를 위무한다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나에게 나를 보여주지 마세요/ 거울과 거울과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나는 달렸습니다// 먹이를 손수 구하고/ 담요와 네, 담요와/ 따뜻한 담요와 네, 따뜻한 담요와// 그 짧은 손 중에서 어미의 손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내 손이 어미의 손에게로 가닿기를/ 소용없는 말이 고아의 해변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손을 잃으면 발이 손이 됩니다/ 발을 잃으면 손이 발이 됩니다/ 손발을 다 잃으면 손발 없는 것들의 그 깊은 고독에게로// 바다는 깊습니다/ 바다는 깊고 넓습니다//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넘실대고/ 고아의 말과 한 몸으로 넘실대고/ 바다는, 고아의 해변은, 매순간 다른 리듬으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 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더 큰 진폭으로 울고 있습니다/ 텅 빈 조개껍데기에서 소리없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

완고한 완두콩 / 이제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감자와 샐러드 완두와 완두콩// 당신은 감자 샐러드를 먹는다/ 완두콩만 골라내면서//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하고 울기 때문에// 당신은 완고하다 당신은 완고한 완두콩// 나는 감자 샐러드를 먹는다/ 당신이 골라낸 완두콩만 골라서// 완두는 완고하지 않아요/ 완고한 것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완고 완고하게 우는 당신의 마음속에// 당신은 마지막 완두콩을 골라낸다/ 완두 완두하고 우는 완두콩을 골라낸다// 당신은 완고해 완고 완고해/ 완두 완두하고 우는 완두보다 더 완고해// 접시는 비어간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완두 완두하고 우는 완두콩들이 실종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완두콩들이 실종될 때/ 어쩌면 우리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당신은 샐러드 속의 없는 완두콩을 생각한다/ 완두 완두하고 우는 완두콩을 생각한다// 어째서 완두 완두하고 운다고 생각하나요/ 완고한 것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완고 완고하게 우는 당신의 마음속에// 우리 이제 완두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지/ 오늘밤 접시는 누가 닦을 건지나 정하자구// 완고한 완두콩에게 닦으라고 하는 건 어때요/ 완두 완두하고 우는 완고한 완두콩에게// 당신은 입을 다문다 완고한 완두콩이 된다// 완두와 완두콩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접시는 접시 접시하고 운다고 믿는 누군가가 있다//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그릇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국물도 있어요 국물도 맛있어요/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흘리지 마세요 흘리면 슬퍼져요/ 나는 알갱이처럼 말을 아끼는 사람/ 지금도 아침이면 아껴야 할 알갱이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다/ 어째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갱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 이제니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노인의 마음을 생각한다. 아침이 되면 머리에 흰 가루가 내려앉아 있습니다. 노인의 마음으로 노인의 길을 걸으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손과 발이 얼어붙고. 걷고 걷다 보면 어느 결에 허리가 굽어 있다. 이 고독이 감옥 같습니다. 말을 나눌 곳이 없어서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아직 쓰이지 않은 종이는 흐릿한 혼란과 완전한 고독과 반복되는 무질서를 받아들인다. 손가락은 망설인다. 손가락은 서성인다. 노인의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 노인의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다는 것. 휘파람을 불 때도 노인의 마음으로. 노래를 부를 때도 노인의 마음으로. 노인은 어쩐지 외롭고. 노인은 언제나 다리가 아프고. 노인은 짐짓 모르는 척 고요히 물러나고. 노인은 노인의 마음으로 가만히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노인의 마음은 망설임을 갖고 있고. 노인의 마음은 말하지 않는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노인의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면 있지도 않은 문장은 더욱더 아름다워지고. 있지도 않은 문장은 있지도 않은 문장으로 다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나는 점점 더 붙박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람은 차고. 구름은 자고. 나무는 잎을 만나지 못하고. 비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흰 가루는 점점 더 수북이 쌓입니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거리로 나서면 다시 돋는 잎사귀 곁으로 노인의 마음이 스쳐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한 마리의 개 / 이제니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꽃이 없는 계절이다. 계절 아닌 계절에 찾아온 누군가에게 그의 정원은 빛없는 장소이다. 봄의 화사함 혹은 여름의 무성함은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억양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 마리의 개. 개는 보이지 않는 정원의 보이지 않는 무성함 속을 뒹굴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개의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다. 시들어버린 꽃과 떨어져 나부끼는 잎과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과 흔적 없이 사라진 어제의 길들……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쓰면서,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맨 처음 쓰인 것이라고 쓰면서, 줄글은 달려 나가는 동시에 달아난다.// 그리고 거름 더미 위에 앉아 울고 있는 녹색.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다시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을 따라 걷는다. 보이지 않는 개가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울고 있는 녹색이 보이지 않는 개의 뒤를 따라 걷는다.// 언젠가 아주 어린 날.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걷고 걸었던 길고 긴 밤길. 친구는 몇 날 며칠을 울어 부은 눈으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슬픔에 대한 예의를 알지 못했으므로. 가만히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친구보다 더 크게 울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 보이지 않는 개. 그리고 다시 속으로 속으로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과 사잇길을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부은 눈으로 자신을 달래주던 어린 날의 친구를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울고 걷고 울고 걷고. 녹색은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울음은 보이지 않는 개의 눈 속에 그득하였고. 보이지 않는 무성함은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맴돌고 있어서.//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꽃도 잎도 없는 계절이어서. 보이지 않는 개와 울고 있는 녹색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 이제니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지. 서로의 영혼을 더 잘 읽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더 좋은 빛을 나눠 주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갔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보았던 그 모든 풍경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지. 어디서 마주쳤는지 알 수 없는 얼굴들. 어디서 묻어 왔는지 알 수 없는 먼지들. 기억과 망각. 입김과 고드름. 반복해서 읽어도 새로운 책. 낱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낱말카드. 동사보다는 명사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계절. 겨울 숲속의 말 없는 산책. 고독 속의 고독. 고독 끝의 고독.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여행 가방을 꾸리는 새벽의 피로.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낯선 기차역. 말할 수 없는 말들과 말해져서는 안 되는 말들. 대기실. 휴게실. 정류장. 정거장. 싸구려 호텔 로비나 야간열차의 식당칸. 흡연 욕구로 가득한 공항의 흡연실. 불 꺼진 안내 데스크 위에 놓인 피로한 팔꿈치들. 나 혹은 당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시간. 읽거나 읽지 않았던 어제의 책들과 함께. 당신 혹은 내가 조금 부족하게 존재했던. 저곳과 그곳 사이의 그 모든 이곳들. 흘러가는 물결과 물결 속에서 조각 낱말로 간신히 말하던 날들.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몰라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었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간신히 남아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때. 전신주 아래에는 새들이 놓쳐버린 새 둥지 가지들이 떨어져 있었고.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은 기억은 죽지 않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새들은 오늘 다시 날아오르며 노래한다. 팔랑거리는 작고 거대한 날개들. 이 어둠이 걷히면. 이 기억이 스러지면. 어제의 양떼구름을 잊어버렸듯 오늘의 나무둥치의 상처도 잊게 되겠지. 기쁠 것도 슬플 것도. 기억할 것도 잊어야 할 것도. 간직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얻어야 할 것도 구해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먼지는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너에게는 아직도 잃어버려도 좋을 무언가가 남아 있었고.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에서 나무로 여전히 옮겨 다녔고. 어느 날 문득. 처음부터 흙이었다는 듯이. 마침내 땅으로 내려와 쉰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는다.//

슬픔은 액체 같은 것 / 이제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유년을 보냈다고 했다. 부모는 오래전에 떠나고 없다고 했다. 오래된 절망이 너를 키웠다. 그 언덕과 그 바다를 떠난 이후로도 세상은 줄곧 그 언덕과 그 바다로 떠다녔다. 너는 너에게 탄생 축하 카드를 보냈다. 죽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고. 성탄일에는 크고 세모난 나무를 샀다. 나뭇가지마다 은구슬 금구슬을 매달았다. 은구슬 위에는 은 얼굴이. 금구슬 위에는 금 얼굴이. 밤의 나뭇가지에는 밤의 새들이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는 천천히 말라 가고 있었다. 슬픔은 액체 같은 것. 울고 나면 목이 마르다는 것. 물관을 거스르는 가지처럼 너무 점점 말라갔다. 점점 말라가면 한 줌의 흙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나미는 모나미 / 이제니
모나미는 당신을 사랑한다. 모나미는 당신을 사랑하고. 모나미는 당신을 껴안는다. 모나미는 당신을 울고. 모나미는 당신의 어깨를 두드린다. 문득 어디선가 소음처럼 목소리 하나 끼어들고. 모나미는 좁고 어두운 마음 바닥에 누워 있다. 모나미는 언제나 조금 허기진 상태이고. 모나미는 편의점 진열장 한구석에서 당신을 바라본다. 모나미는 어떤 사실이 늘 새롭게 부끄럽고. 모나미는 드러내고 싶은 여백이 간절히 필요하고. 모나미는 종이 상자로 이룰 수 없는 집을 짓는다. 모나미는 몬암이. 모나미는 못난이. 모나미는 종이 상자 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모나미는 당신의 보폭을 따라 걸어간다. 모나미는 우리들의 정다운 벗. 모나미는 153 들판의 푸르른 언니. 허기진 당신이여.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흔들리며 떨리는 불안한 손가락을 숨기지 말아라. 모나미는 모나미. 모나미는 모나미. 모나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회전식 슬픔. 모나미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원주율 감정. 모나미는 우리들의 숨길 수 없는. 모나미는 우리들의 잊을 수 없는.//

울고 있는 사람 / 이제니
우울을 꽃다발처럼 엮어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입니다. 왜 그늘로 그늘로만 다니느냐고 묻지 않았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성마른 말이 너를 아프게 하는구나.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갇혔다고 닫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가세요,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너를 품어주는 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 다시 본래의 깊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나 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구나. 갈 곳이 없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인 채로. 구석진 곳을 찾아 혼자서 울고 있구나.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나.//

치마를 입은 우주 소년 / 이제니

 /  / 잣나무숲의 태양/ 오월의 순한 아카시아/ 이상하고 외로운 소실점/ 로케트처럼 날아오르는/ 치마를 입은 우주 소년/ 미드헤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열어/ 숲속에서 나무들과 춤을 추던 밤/ 하늘엔 구름 둥둥 먼 북소리/ 그늘처럼 드리워진 그림자들/ 스쳐가는 상제흰나비 흰가루/ 맡자마자 사라지는 나무 냄새/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할 수 없는/ 밖은 눈부셔 어두운 동굴 속/ 오로라 오로라 대기 속의 노이즈/ 미래의 길이는 과거의 길이와 똑같아요/ 그러니 날 기다리지 말아 우주 소년에 대한 기억/ 모퉁이를 도는 나선형의 바람 탬버린 소리가 들리는 지하실/ 해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맴도는 말 물음으로 가득한 책/ 로지  로지/ 포도  포도/ 새턴  새턴/ 귤잼  귤잼/ 머큐리  머큐리/ 물방울  물방울//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 이제니

오후의 오로라/ 오지 않는 비행선/ 우비는 젖지 않는다/ 없는 들판의 없는 얼굴/ 내리지 않는 비를 맞는/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길은 물든다/ 날개 잃은 벌레/ 입속에 담긴 편지/ 미세레레 미세레레/ 여백에서 들리는 노래/ 몰약처럼 빛나는 눈동자/ 아직도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아직도 나와 같은 단어를 쓰나요/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은 녹차 찌꺼기/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길게 흰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어제의 비행운/ 손끝에서 푸른빛이 나온다면 어디를 가리키게 될까/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물방울의 행렬/ 춥고 그리운 우기의 맛/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어가는/ 우기의 복화술사는 입을 다문다/ 구름  구름/ 설탕  설탕/ 창문  창문/ 잿빛  잿빛/ 제라늄  제라늄/ 빗방울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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