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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길상호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5. 08:55

길상호(吉相鎬) 시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대시동인상, 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천상병시상, 김종삼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오동나무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우리의 죄는 야옹』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과 사진 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가 있다. 청림문학 동인,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 안양예고 강사.

 



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 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닮은 사람 / 길상호
물속의 그가 말을 건낸 적 있지// 입술을 떠나자마자 물결이 되어/ 심장을 조금씩 적시던 말// 나는 그날 한없이 파동을 그리는 목소리를 지우려고/ 웅덩이를 메우고 돌아서고 말았지// 하지만 그 후로 움푹한 것들은 모두/ 그가 숨어 있는 웅덩이가 되었지// 어느 날은 술잔 속에서/ 또 어느 날은 때 낀 배꼽 속에서/ 우물우물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지// 너와 나는 울음까지 닮았구나,/ 빗방울처럼 시리고 비린 말// 이제는 숨소리까지 다 말라버린 사람// 아버지의 말을 다시 받아보려고/ 가슴 한쪽을 밤새 파내는 날이었지//

두 잔 집 / 길상호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 아니 전생에 두 번쯤은 만난 적 있는 사이// 창유리 먼지 낀 불빛에 홀려/ 결이 고운 나무탁자에 마주앉았네// 찌개가 줄지도 않고 식어가는 동안/ 혓바닥 위에 들깨소금만 몇 알씩 털어 넣으며// 옆 자리 사람들이 하나둘/ 희뿌연 김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알지 못했네// 한 잔 또 한 잔 전생이 가까워질수록/ 소주병처럼 푸른 밤이 쌓여가고// 주인 할머니는 윤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몇 번이고 안주를 데워다 주었네//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사이,/ 아니 이미 전생에 두 번은 헤어진 사이// 술잔 테두리를 따라 돌고 돌다가/ 서로의 발소리를 놓쳐 까마득히 헤매다가// 끊어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두 잔의 술이 필요했네//

붉은 마침표 / 길상호
옐로스톤 들판 눈밭엔/ 발로 쓴 글이 어지럽습니다/ 쫓기는 새끼 엘크의 문장 뒤로/ 고요테들의 문장이 달리는데/ 얼마나 급하게 휘갈겼는지/ 쉽게 읽어낼 수 없습니다/ 눈 위에 흘려놓고 간/ 근육의 경련과 이빨의 독기 같은/ 아직 신선한 접속어를 주워/ 끊긴 문맥을 잇곤 합니다/ 거친 숨 고를 쉼표도 없이/ 치열하게 사건은 전개되다가/ 심장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순간/ 아쉽게 끝이 납니다/ 아마도 수북히 쌓인 눈이/ 엘크 발목을 잡았던 모양이지요/ 더 이상의 반전은 없다는 듯/ 그 자리 마침표 하나/ 붉은 피비린내가 선명합니다//

돌탑을 받치는 것 / 길상호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 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강아지풀 / 길상호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 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 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강아지풀, 모두 눈꽃이 된다//

봄비에 젖은 / 길상호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목욕 / 길상호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다시/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주름투성이 구겨진/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여기저기 상처로 덧대/ 살아온 바느질 자국/ 수련처럼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마무리해둔 실 끝을 찾아/ 오늘도 배꼽만 긁는다/ 물기 젖은 창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던 감나무/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어둠 속에 숨는다/ 벗어둔 낙엽이 한 장/ 유리창에 걸려 있다//

겨울, 거울 / 길상호
그는 빈 골목 담장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얼굴 가득 피어난 성에를 닦아주자 입을 열었다. 거긴 바람이 많지? 그의 옷자락도 분명 흔들리고 있었는데, 바람은 아닌 듯했다. 깨진 모서리 어디에서도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퍼런 입술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그의 말들도 사실 맺혔다가 흐르는 물방울이었다. 얼어버리기 전에 읽지 못하면 영영 놓치고 말 목소리에 대고 입김을 불어대며 서 있을 때, 가까이— 더 가까이 와봐! 나의 목에 낚싯바늘을 꿴 그의 시선이 줄을 잡아당겼다. 시간의 뒷면에 발라놓은 수은 때문에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곳에 그는 있었지만, 유리의 간격을 두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우리는 쩍, 달라붙고 말았다. 서늘한 온도의 접착력에 놀라 뒷걸음을 쳤지만 입속의 혀까지 이미 얼어버린 뒤였다.// 그가 유리에 찍힌 핏자국을 핥으며 처음으로 웃었다. 미소 짓는 얼굴에 검은 띠를 둘러주자 허름한 영정사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골목에 눈발이 하얗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의 무늬 / 길상호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낡은 잠을 자려고 / 길상호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여관방 벽은 낡은 입술을 갖고 있다// 찢어진 벽지와 얼룩과 못자국과 낙서와// 밀린 잠을 자는 당신과/ 쪼그려 앉아 당신의 밀어둔 잠을 생각하는 나와// 벽의 목소리에 닿으면/ 낡은 것들은 조금 더 낡아가고// 옷걸이에 걸어둔 스웨터는/ 벌써부터 올이 풀린 어깨를 늘어뜨렸다// 병 속에 남은 건 소주처럼 밍밍해진 생활// 당신은 잠꼬대로, 나는 허밍으로/ 새벽의 중얼거림을 따라해 보는 것인데// 날이 밝으면 우리는/ 얼마나 더 헐거워져서 이 방을 나가게 될까// 갈라진 입술을 뜨다듬어 보니/ 부스러기 몇 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꼬리 / 길상호
살짝 손을 대려 했을 뿐인데/ 꼬리를 끊고 달아난 도마뱀을 기억한다// 흙바닥에 남은 꿈틀거림이 멈출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꼬리만 바라본 적이 있다// 일생에 단 한 번만 재생이 가능하다는,/ 그래서 목숨을 걸고서야 끊을 수 있다는 꼬리// 뒤돌아볼 새도 없이 도마뱀은/ 풀숲으로 남은 몸을 내뺐었는데// 아버지가 숲에 든 후, 나는 남겨진 꼬리 같았다/ 몸을 뒤틀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 나를 끊고 저세상으로 떠난 그가/ 사진 속에서 아직 편안하게 웃고 있다//

달로 연주하는 밤 / 길상호
서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울림통이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럴 땐 텅 빈 달을 빌려와 밤을 연주했다// 구멍의 크기는 하루하루 바뀌었으므로/ 우리의 손에선 매번,/ 모르는 곡들이 태어났다// 새벽마다 음계 끝 옥상으로 가서/ 느슨해진 감정과 관계를 조율하고 나면// 허밍처럼 얇아진, 달무리처럼 희미해진/ 화음이 다시 돌아올 것도 같았다// 달에게 조금 더 빛을 보태주던 당신의 기타 소리// 현을 끊으며 유성이 떨어져도/ 갈아 끼울 추억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가끔은 녹슨 기타 줄에서/ 더 맑은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모빌 아래 계절은 멈췄다 / 길상호
눈사람을 만들어 사랑을 시작했다/ 만년설처럼 녹지 않을 다짐/ 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심장을 끌 수 있다고/ 나는 주문을 만들어 수시로 되뇌곤 했다/ 상해버릴 감정들은 신문지에 말아/ 냉동실 깊숙이 밀어 넣고서/ 더 어두운 색으로 밤을 덧칠했다/ 이따금 전생의 봄이 삐져나오려 하는 날에는/ 달력 속 절기들을 하나씩 지우고/ 망각 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체온이 없는 그 방에서/ 모든 눈사람들의 성지, 남극에 대해 이야기하다/ 시린 어깨를 맞대고 잠들기도 했다/ 눈구름을 매달고 끝없이 돌고 도는 모빌/ 우리의 발은 언제나 겨울을 걸었다//

장조림 / 길상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면 어둠이 고여 드는 방,/ 밤은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하고// 얽힌 손길에 더는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지금은 저 방에 나란히 갇혀야 해요// 배꼽 속 지루한 인연이 모두 우러나오고/ 눈에 담긴 통증도 흐물흐물 풀리면// 액자 속 다정했던 시절로 우리/ 찰칵 찰칵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요// 방 안 가득했던 어둠이 졸아들면/ 정수리에 모여든 쓸쓸한 거품을 걷어주면서// 이제 어떤 말에도 쉽게 상처 받지 않는/ 짭조름한 심장을 갖고 살기로 해요// 한없이 뒤척이게 되더라도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기 위한 일,// 검은 밤이 너무 일찍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심장의 불꽃을 중불로 내려주세요//

먼 곳의 택배 / 길상호
가끔은 머나먼 생이 택배로 배송되어 왔다// 수명을 단축시킬 거라고 당신은 반품을 강요했지만/ 주소지도 없는 그 박스가 나는 늘 궁금했다// 에어캡으로 정성스레 싸놓은 건/ 얼다만 는개와 안개/ 눈이었는지 비였는지 모를 물방울 몇 개/ 왠지 슬퍼보이는 비늘과 깃털// 머나먼 그곳에도 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상자를 열면 안심이 되곤 하였다// 배송 물품들을 늘어놓고 안장 있을 때/ 저녁은 모서리를 접은 채 평면이 되어 쌓이고// 수레에 박스를 주워 싣는 할머니가/ 몇 생을 건너온 어머니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눈깔사탕 / 길상호
골목길이 사라져요. 한 채의 오래된 집들도 무너져요. 아그작아그작 동네 귀퉁이를 씹으며 전진하는 포크레인 몇 대, 여기는 재개발지역이에요. 아이는 날마다 언덕에 올라 사탕을 씹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눈앞에서 사라져도 모르는 달콤한 눈깔사탕, 깔깔대는 웃음소리 위에 풀썩 뿌연 먼지가 일어요. 다리 잘린 골목이 비틀비틀 담장 뒤로 숨어보지만 금방 들키고 말죠. 아이에게 숨기 장난처럼 즐거운 놀이는 없어요. 실핏줄로 빨갛게 금 간 눈망울 굴리며 동네 구석구석 잘도 찾아내지요. 아이가 가리키는 풍경은 그대로 녹아버려요. 몇 개 남은 가로등마다 어둠이 켜져도 돌아갈 집이 없어요. 끈적끈적한 졸음을 빨다 아이는 낡은 처마 밑에 잠이 들지요. 이런 밤에는 한쪽 모서리 깨진 달이 떠요. 아이의 감은 눈을 어루만지다 달도 그만 눈이 멀어요.//

안개 책방 / 길상호
숲 옆구리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 안쪽 오래전 상형문자가 되어 날아간/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책등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니/ 그것 또한 새가 남긴 책의 내용일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젖은 것도 같고 마른 것도 같은 소리는/ 오랫동안 앓던 환청이 도진 거라고/ 너는 나의 두 귀를 손으로 감싸 막았다// 지문을 풀고 나온 바람이 고막에 닿자/ 책은 목소리를 잃고 잠잠해졌지만/ 나는 좀처럼 정적이 편해지지 않았다// 죽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이따금 삭은 가지라도 바닥에 떨어져야/ 멈춘 시계가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없는지 페이지를 넘길 때/ 너는 숲의 비밀이 적힌 두루마리라며/ 나이테 한 올을 풀어 쥐어주었다// 첫 단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숲이 백지 같은 안개로 가득 채워졌다/ 뿌연 눈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혀로 염하다 / 길상호
트럭에 치인 새끼 목덜미를 물고 와/ 모래 구덩이에 눕혀놓고서/ 어미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건 오래 핥아대는 일// 빛바랜 혀를 꺼내서/ 털에 배어든 핏물을 닦아댈 때마다// 노을은 죽은 피처럼 굳어가고 있었네// 핥으면서꺼진 숨을 맛보았을 혀,/ 닦으면서 붉은 눈물을 삼켰을 혀,// 어미는 새끼를 묻어놓고 어디에다 또/ 야옹, 옹관묘 같은 울음을 내려놓을까// 은행나무가 수의로 바닥을 곱게 덮어놓았네//

빈티지 / 길상호
넝쿨장미는 찢어진 담장을 꿰매는 중/ 민무늬 벽에는 꽃 단추도 여러 개 달아놓았다// 어떤 호흡으로 걸어도 몸에 익숙한 골목/ 낡은 사랑을 수선해 쓰는 우리는/ 수시로 이곳에 와 어제와 내일을 덧대곤 했다// 각이 풀린 주름의 계단에 앉아/ 서로의 헐거워진 어깨에 기대 있으면/ 가난도 또 다른 멋이 될 수 있었다// 빨랫줄에 걸린 달도 빛이 바래 있었지만/ 거기서 번져오는 쿰쿰한 냄새 때문에/ 끝단이 닳아버린 우리의 손목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 골목에선 지울 수 없는 얼룩까지/ 세상 하나뿐인 무늬로 바뀌곤 했다//

오드 아이 / 길상호
한없이 따뜻한 노랑/ 한없이 차가운 파랑// 당신과 함께 머무는 동안/ 나의 무대는/ 희극과 비극을 한꺼번에 앓았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두 눈을 오가는 동안/ 이중국적의 감정을 익힐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나도/ 괄호 속 지문을 버리고/ 지루한 해설을 버리고// 폴짝,/ 당신을 넘나들며/ 나만의 대사를 만들려 해요//

쌍둥이 / 길상호
아픔과 슬픔처럼 닮아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현달과 하현달은 어둠의 방향이 다른데도/ 엄마는 매번 똑같은 옷을 두 벌 샀다// 그럴 바에야 그림자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때부터 우린 서로 달라지는 게 지상의 목표가 되었다// 동생이 폭식을 즐기면/ 나는 거식이 즐거웠다// 동생이 심장에 불을 가져다놓으면/ 나는 배꼽에 얼음을 채워놓았다// 참다못한 엄마는 우리를 사진관에 데려가/ 하나의 액자 속에 나란히 앉혀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빛이 둘을 묶어놓는 동안/ 나는 몰래 한쪽 눈을 감았다// 너는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엄마가 나의 감은 눈을 칼로 긁어낼 때// 일란성 아픔과 슬픔 사이에/ 불구의 형제가 하나 더 태어났다//

새똥 / 길상호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오후였다// 유리창에 굳어 있는 새똥을 닦아내다가/ 이미 죽은 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새는 공기주머니를 뒤적여/ 쓸쓸하고 씁쓸한 울음만 꺼내놓았다// 골목 가장자리 씀바귀가 꽃잎을 닫고/씨앗 만드는 일을 서둘렀다// 고여 있던 시간이 조금씩 증발하고// 이름 대신 날개를 단 사람이 창가에 다가와/ 입김을 불어대는 것인지/ 유리가 뿌예졌다가 다시 투명해졌다// 똥을 닦아낸 휴지는/ 죽은 새처럼 나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날개를 갖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잠시 떠돌다 갔다//

따순 밥 / 길상호
언 손금을 열고 들어갔던 집/ 그녀는 가슴을 헤쳐/ 명치 한가운데 묻어놓았던 공깃밥을 꺼냈다/ 눈에서 막 떠낸 물 한 사발도/ 나란히 상 위에 놓아주었다/ 모락모락 따뜻한 심장의 박동/ 밥알을 씹을 때마다// 손금 가지에는 어느 새 새순이 돋아났다/ 물맛은 조금 짜고 비릿했지만/ 갈증의 뿌리까지 흠뻑 적셔주었다/ 살면서 따순 밥이 그리워지면/ 언제고 다시 찾아오라는/ 그녀의 집은 고봉으로 잔디가 덮여 있다//

빗방울 사진 / 길상호
연꽃의 조리개가 닫히고 나면/ 사진관은 곧 사라질 거라 했다// 못도 물그림자를 걷어내며/ 암실 같은 어둠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을 위해 사진사는/ 잎 끄트머리 빗방울 렌즈를 갈아 끼우고// 꽃받침도 없이/ 겨우 꽃잎을 붙잡고 있는 인연,// 바람만 조금 불어도/ 초점거리에서 벗어나 버리는 얼굴// 그가 빗방울에 맺힌 그림자를 꺼내/ 연잎 위에서 굴리는 동안// 현상되지 않던 표정들은/ 잎맥 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뜨린 연, 꽃잎을 받아들고/ 어두워진 수면이 한참을 울먹였다//

눈치 / 길상호
눈치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물고기/ 나는 배꼽이고 항문이고 눈에 띄지 않는 곳마다/ 눈치를 풀어 키웠다/ 물고기는 배고픈 내게 밥을 물어다주었고/ 때로 감쪽같이 숨는 법도 알려주었다/ 눈치 때문에 가까스로 불행을 벗어나는 일이 많았다/ 눈치를 보며, 눈치를 따라가는 게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서서히 살이 올랐다/ 그러면서 몸속의 작은 물고기는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 하나같이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눈치에겐 불안이 유일한 먹이였던 것,/ 나에게서 풍기기 시작한 비린내를 눈치채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계단 길 / 길상호
발목이 부은 할머니는/ 오르막 계단 길/ 몸뚱어리 하나만도 무거워/ 그림자 떼어놓고 오른다/ 난간을 잡고 헐떡이던 숨소리/ 잠시 민들레처럼 주저앉아/ 샛노래진 얼굴을 닦는다/ 굳어버린 할머니 등처럼/ 꼬깃꼬깃 사연들 접혀 있는 길/ 한 해 또 지나면/ 더 가팔라질 것인데/ 이승 고개 후딱 넘어야지,/ 혼잣말을 들은 모후 햇살이/ 할머니 주름 계단에/ 주르르 미끄러진다//

책등에 기대 잠이 들었지 / 길상호
1./ 쌓아둔 책들은/ 모두들 등 돌린 애인처럼 서늘하다/ 무심하게 바라보면 가끔/ 다시 읽어야 할 간절한 구절이 스쳐갔다// 2,/ 잠에서 깬 고양이들이 발톱을 꺼내 책등을 긁는다/ 장판에 떨어져 쌓이는 살비듬,/ 죽은 아버지는 시원하다 하실까?// 3./ 다음 생이 오면 또 아프겠지요,/ 전생에 했던 말을 다시 중얼거리며 귀신들은/ 책갈피마다 담배연기처럼 스며들었다// 4./ 나무가 그러하듯이 책은 계절을 다 보내고서야/ 비로소 한 줄의 기록을 남겼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책을 톱질하는 사람이 있다// 5./ 갈비뼈 사이에 꽂아둔 책들은 습기에 취약해서/ 울음이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한 장씩 펼쳐 말려야 했다//

향기로운 배꼽 / 길상호
흰 꽃잎 떨어진 자리/ 탯줄을 끊고 난 흉터가/ 사과에게도 있다/ 입으로 나무의 꼭지를 물고/ 숨차게 빠는 동안/ 반대편 배꼽은 꼭꼭 닫고/ 몸을 채우던 열매,/ 가쁜 숨도 빠져나갈 길 없어/ 붉게 익었던 사과 한 알,/ 멧새들이 몰려와/ 부리로 톡톡 두드리다가/ 사과의 배꼽,/ 긴 인연의 끈을 물고/ 포로롱 날아간다//

저물녘 / 길상호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하는 시간// 우리 앞엔 아주 짧은 햇살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어둠이 스며든 말은 부러 꺼내지 않았네// 그저 날개를 쉬러 돌아가는 새들을 따라/ 먼 곳에 시선이 가닿았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이름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돌아서야 했던 역, 당신의 저물녘//

마늘처럼 맵게 / 길상호
생각없이 마늘을 찧다가/ 독한 놈이라고, 남의 눈에 들어가/ 눈물 쏙 빼놓고 마는 매운 놈이라고/ 욕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단한 알몸 하나 지키기 위해/ 얇은 투명막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칼자루 밑에/ 닭살처럼 소름 돋은 통 속에서/ 짓이겨진 너의 최후를 떠올려야 했다/ 내가 밀어 올렸던 줄기들 뽑혀 가던 날/ 거세당한 사내처럼 속으로 울던/ 뿌리들의 고통 잊어버리고/ 기껏 눈물 한 방울이 무엇이기에/ 누구를 욕하고 있단 말인가/ 독하면 독할수록 맛이 나는 게/ 그런게 삶이 아닌가, 저 마늘처럼/ 모든 껍질 벗겨지고 난 뒤에도/ 매운 오기로 버티는 게 삶이 아닌가//

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 / 길상호
붉은 그물자루에 걸려있는/ 양파야, 속이 매운 양파야/ 빗방울에 흙 비린내가/ 마른 껍질을 긁어대는 봄/ 바깥세상이 궁금하다고/ 정수리 푸른 안테나 뽑지 마라/ 몇 겹 몸속에 웅크리고 누워/ 꿈속에나 뿌리를 담가라/ 그물 속 팔딱팔딱 몸부림치는/ 네 호흡이 잠을 깨워도/ 모르는 척 버려 두어라/ 아무리 길게 뿌리를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땅,/ 여기는 고소공포가 사는 아파트/ 뜯어먹을 건 네 몸뚱어리뿐/ 매운 눈물이 너를 삼켜도/ 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

길상號를 보았네 / 길상호
인터넷 화면 속 떠다니는 사진/ 길상號를 만났지/ 어느 바다에서 밀려왔는지 개펄에/ 닻을 내린 배 한 척/ 마냥 신기해서 스크랩을 해두고/ 보다가, 보다가, 눈물이 났지/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 기우뚱, 일어서지 못했지/ 펄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지/ 바다로 이어진 물길 마르면/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길상號는 튜브를 몇 개 부레처럼 달고/ 헐떡이고 있었지/ 밀물이 들지 않는 모티터 속에서/ 힘차게 힘차게 노를 저어도/ 너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었지/ 바다가 없어도 물고기 건져야 하는/ 그 밤 나는 가여운 어부가 됐지//

봄날 또 간다 / 길상호
​살랑살랑 꼬리 흔들며/ 고양이 세숫대야의 물을 핥는다/ 붉은 혀끝에서/ 까르르 출렁출렁 물이 웃는다/ 투명한 젖꼭지 드러내놓고/ 그 수작이 뜨거워지느 한낮,/ 세수하러 나온 할머니는/ 막 피어난 제비꽃들과 나란히/ 잠시 넋을 놓고 보다가/ 주름 속 숨겨둔 속살이 간지러워/ 헛기침을 내고야 만다/ 고양이 후다닥 자리를 뜨고/ 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렁이던 파장 속 얼굴을 지우고/ 수돗가를 다림질 하던 햇살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다/ 활짝 폈던 할머니 주름을/ 꼬깃꼬깃 다시 접어 놓고서/ 참 아쉬운, 봄날이 간다//

도무지 / 길상호
도모지(塗貌紙),/ 얼굴에 종이를 발라 자살하는 방법이 있었단다/ 물 적신 창호지로 눈 코 입 귀 모두 막고/ 물기와 함께 생을 증발시켰던 것이다/ 이승의 마지막 문턱을 위해 얼굴 구멍마다/ 창호지 문을 달던 사람이여,/ 침 바른 손가락 조용히 속내를 뚫어보면/ 세상 업보 닫으려는 그대가/ 문 안에 가부좌로 앉아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던 나에게 다가와/ 얼굴에 한 겹씩 종이를 바르는 사람이 있다/ 날카로운 햇살도 통과하지 못하는 문 안에서/ 그래도 살아보려고 헐떡이면/ 그대의 웃음소리는 참으로 따뜻하다/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 몇 개의 손톱을 부러뜨리고서도/ 또 다시 문을 긁게 하는 그대가 있다//

다큐멘터리 / 길상호
순례자는 카일라스 타루초*에 갔다네/ 마냐사로바와 락사스탈* 물줄기/ 번갈아 받아먹던 입술은 검게 탔다네// 물구덩이 만나면 거기 몸을 심고/ 돌조각의 아픈 모서리는 몸에 박으면서/ 오체투지, 온몸 발이 되어 걸었다네/ 이리저리 숨어 다니던 두려움이/ 깨지고 깨져 피를 흘렸다네// 타루초에는 배고픈 바람이 살고 있다네/ 오색의 혓바닥 날름대는 바람에게/ 순례자는 끌고 온 몸을 바쳤다네/ 바람은 순례의 몸을 맛있게 먹고/ 환생의 길 넌지시 알려준다 하네// 나는 화면 속 바람의 말은 못 듣고 내려와/ 어떤 것도 살지 않는다는 락사스탈/ 호수에 빠진 나를 찾고 있었네/ 순간 사라진 화면 속으로 순례자들이/ 바람처럼 몸을 감췄네//
* 청, 노랑, 빨강, 녹색, 흰색 5가지 색의 천에 움마니밧메움, 경전, 불교 그림 등을 찍은 것이다. 하늘의 복이 5색 깃발을 타고 내려온다고도, 경이 바람에 흘러가서 불법이 널리 퍼진다고도, 바람을 맞는 중생들이 행복해진다고도 한다.
** 카일라스(해발 6.714m) 밑에는 만년설이 녹아 이룬 호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호수는 생물이 살고 있는 맑은 물로 채워져 마나사로바 호수=선호(善湖)라 하고, 다른 호수는 생물도 살지 않고 탁한 물로 채워져 있어 락사스탈 호수=악호(惡湖)라 부른다.

바다에는 썩은 물고기가 산다 / 길상호
언어는 물고기다// 썩으면 지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어떤 언어는 부레를 너무 부풀려 헤엄을 칠 수 없다, 수면 밖에 떠 있는 흰 배를 끌고 물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 바람을 집어넣고 헤엄치는 언어가 자유로울까, 언어는 동족을 잡아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 대개 덩치 큰 놈이 이기지만 작은 놈끼리도 입을 맞추면 순식간에 큰 놈을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바다 속 언어 중 비늘 하나까지 온전한 놈은 없다, 가끔 채식을 즐기는 언어도 있는데 그놈이 뜯어먹고 난 자리에는 어떤 풍경도 남지 않는다// 침묵을 즐기는 언어는 심해로 간다, 놈들은 수압으로 입을 다스리며 부레 속에 공기 대신 기름을 채운다, 여차하면 확 불을 지르고 생을 끝낼 참이다, 이런 언어들 중 詩라는 걸 쓰는 놈이 있는데, 시라는 게 썩은 물고기 살점을 받아먹으며 만들어낸 것이라 기우뚱 바로 서기가 힘들다// 오늘 저 깊은 심해에서 물고기 한 마리 건져냈는데/ 역시 지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모르는 척, 아프다 / 길상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도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아프다/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개미의 바느질 / 길상호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잘 사는 것이여,/ 날마다 허리를 졸라매던 그녀도/ 한 마리 붉은 개미/ 그래도 허기를 벌리는 입은/ 쉽게 봉할 수 없었네/ 날마다 늘어나는 틈새를/ 독하게 기워내는 바늘,/ 녹슬 틈 없던 그녀의 믿음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을 그 집에서/ 나 그녀로부터/ 바람 하나 들지 않는/ 옷 한 벌 얻어 입고 살았네//

붉게 익은 뼈 / 길상호
당신 무릉도원에서 온 사람,/ 잠시 복숭아 꽃잎 열고 나왔다가/ 비로 져버린 꽃잎 문도 못 찾고/ 언제나 마음 젖어 헤매는 사람,/ 이제 늘어가는 주름과/ 물러터진 깊은 상처도/ 당신 몸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 바람을 타고 다니며/ 꽃이 있던 허공을 두드리다가/ 스스로 바닥에 져버릴 사람,/ 그래도 아직 걸을 수 있다고/ 발목에 심어둔 복숭아 씨앗/ 단단하게 키우며/ 땅에 묻히면 그대로/ 한 그루 붉은 꽃이 될 사람//

물의 집을 허물 때 / 길상호
몇 개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며/ 오래오래 걸은 후에야/ 집 하나 겨우 얻었습니다/ 발바닥 굳은살 속에 동그랗게 자리 잡은/ 아픈 물방울의 집 한 채,/ 지문 훤히 비치는 문을 열고/ 거기 뜨거운 방 안으로/ 물고기 한 마리 들이고 싶었습니다/ 상한 지느러미로 물살 가르다/ 금방 물 위로 떠오를 것 같은/ 불안한, 너의 생을 눕혀놓고서/ 살살 다독이고 싶었습니다/ 상처는 상처로 치유될 것 같아/ 닫힌 자물쇠 바늘로 열면/ 허나 주루룩 눈물 흘러내리는 집,/ 한순간에 꺼져버린 그 집을/ 오늘도 혼자 맴돌다 나왔습니다//

감자의 몸 /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겨울눈 / 길상호
그 날은 나무와 눈이 맞았다/ 한동안 뿌리 근처를 서성이며/ 내가 불쌍한가, 나무가 더 불쌍한가 가늠했다/ 처음에 잎도 하나 없는 나무쪽으로/ 연민의 무게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직 어머니가 남아 있고/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이제는 바람에도 이골이 났으므로/ 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의 눈과 마주친 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무는 솜털 덮인 눈, 따뜻한 눈으로/ 터무니없는 내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우습다는 듯 우습다는 듯/ 첫눈은 가지마다 내려 쌓였고/ 그날 겨울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만/ 나무 밑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국화가 피는 것은 / 길상호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어디로 가나 / 길상호
조심조심 저 길 끌어당기면/ 방패연처럼 뚫린 마음의 구멍/ 달빛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순간, 툭, 길이 끊기고 만다/ 사라진 달은 어느 가지에 걸려/ 창백한 얼굴로 울고 있을까/ 팽팽했던 길은 또 어디서/ 긴장이었던 삶을 풀어놓고 있을까/ 발목의 매듭 자리 꽃물 젖으며/ 마음의 구멍 더 넓어져 갔다.//

무당벌레 / 길상호
손바닥에 올려놓은 무당벌레/ 차근차근 손금을 읽다가/ 사람의 운명이란 게 따분했는지/ 날아 가버리고 만다/ 등껍질의 점처럼 선명한/ 점괘 하나 기다리던 내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어 가는 바람처럼 무심히/ 무당이란 이름도 버린/ 벌레,/ 나는 언제쯤 나에게서 훨훨/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비린 별이 떴네 / 길상호
작은 혀가 웅덩이 물에 닿을 때마다/ 새끼 고양이는 조금씩 일렁이며 지워졌네// 물결 속에서 야옹야옹야옹/ 끝도 없는 흐느낌만 더해가고 있었네// 마른 탯줄 끝에 묶여 있는 새벽이/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는 시장 골목// 물웅덩이는 생선들의 몸을 씻어내고 태어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비린 무덤// 죽음으로 내장을 부풀린 새끼 고양이는/ 몸을 눕힐 구석이나 갖고 있을까// 묘괴에 홀려 천막을 긁던 바람이/ 잠시 머물려 젖은 털을 핥아주고 갔네// 찢어진 차광막 사이로 비늘처럼/ 생기도 없는 별이 몇 개 떠 있었네//

심해의 사람 / 길상호
어떤 빛도 닿을 수 없는/ 바닥에 내려가 산다 했어요/ 심장의 열수분화구를 식혀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요/ 우울도 지그시 수압으로 눌러놓고/ 텅 빈 눈의 유령 상어처럼 떠돌다 보면/ 이따금 내려앉는 기억의 사체들/ 물컹한 살점이나 뜯으면서/ 시간의 색깔은 의미가 없다 했어요/ 그래도 목숨은 즐거움을 원해서/ 몸을 켰다가 껐다가 발광 놀이/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놀이,/ 암흑의 바다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뭍으로 돌아갈 수 없다네요/ 결 고운 바닥에 어서 뼈를 내려놓는 게/ 지금의 유일한 희망이라 말하는/ 그는 심해를 사는 사람, 돌아서는 등에/ 날선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어요//

오동나무 안에 들다 / 길상호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간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가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자기장을 읽다 / 길상호
밝혀도 꿈틀, 움직일 수 없다/ 마른 흙바닥 위에/ 지렁이는 죽고 말았다/ 자성 강한 죽음이/ 반대 극의 식욕을 불러들인다/ 쇳가루처럼 시커멓게/ 달라붙은 개미 떼/ 자기장이 참 길기도 하다/ 식은 국밥 대신/ 제 몸 한 조각씩 대접하는/ 한낮의 뜨거운 장례/ 꼬마들도 뭔가에 이끌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자기장을 유유히 벗어나는 건/ 배가 없는 바람뿐이다//

차 한 잔 / 길상호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타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침엽수림 / 길상호
눈 위로 눈이 또 내립니다// 한 번도 데워진 적 없는 바람을 들이마시고/ 당신의 입술은 얼어붙습니다// 새들이 나이테 속 서늘한 돌림노래를 꺼내/ 숲 속에 풀어놓는 동안// 당신은 뾰족한 잎들을 하나씩 뽑아/ 손톱 밑에 낀 얼음을 긁어냅니다// 통점을 잃은 상처들이 덧나서/ 끝도 없이 퍼렇게 번져갑니다// 식은 손가락이라도 잡아보고 싶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는// 당신의 수목 한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희망에 부딪혀 죽다 / 길상호
월요일 식당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않은가/ 제 날개가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었던가/ 쓰레받기에 그들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썩은 책 / 길상호
죽은 글자들을 모아놓은 책/ 나는 오늘 책을 묻었다// 굽은 자음과 모음을 펴려고/ 흙이 된 당신들이 모여들었다// 땅이 느릿느릿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빗방울과 눈송이가 번갈아/ 지워진 나이테를 복원해냈다// 당신들이 다녀간 행간,/ 아픈 단어마다 싹을 틔웠다// 책을 묻었다// 죽은 글자들을 위해서는/ 더 깜깜한 죽음이 필요했다//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 길상호
베어 묶어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첫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구름 없는 절에 들다 / 길상호
눈 녹기 시작하자 내 마음이 질척하게 밟히던/ 그 날, 얼음장의 동맥을 돌던 핏물이 뜨거워져서/ 심장을 쿵쿵 두드리던 날이었나 봐요/ 운주사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었지요/ 세속의 비밀 하나 훔쳐 달아나던 나는/ 그 하늘 밑에 숨을 곳이 없어 난감했어요/ 가슴이 두근거려 새어 나오는 체취를 틀어막고/ 어디 꽃이라도 피었으면 그 향기에 묻히고 싶어도/ 다른 꽃들은 아직 가지의 중심에 잠들어 있고/ 일주문 단청만이 꽃잎 안으로 나를 들여보내 주었지요/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또 길을 잃었어요/ 하나의 구원도 이루지 못한 막막한 마음 앞에/ 늘어선 천불천탑(千佛千塔)은 천 갈래의 길로 얽혀 있었지요/ 한 굽이 벗어나면 새로운 물음으로 또 막아서는/ 그 얼굴들 바라보다가 다시 도망치는데 숲 안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는 눈을 감고 누워서도 이미 알고 있던 거예요/ 내가 훔쳐 달아난 시간의 오랏줄에 묶여/ 새 세상에 연결되지 못할 인연들을 말이지요/ 그는 얼굴에 울음도 웃음도 남기지 않고 혼자서/ 구름 사이로 노 저어 가 버렸지요/ 독경 소리가 그의 발자국을 뒤따르고 있었지만/ 한 개의 탑도 쌓지 못한 나는 더 어두워져서/ 노가 일으키며 간 물결의 흔적 찾을 수 없었어요/ 절을 나오면서도 하늘은 너무나 맑은 날이었지요//

할미꽃, 남긴 말 / 길상호
푸른 집 앞에서 할미꽃은 보지 못하고/ 꽃이 남기고 간 흰 머리칼만 보았네/ 굽은 허리로 나와 잠깐 햇볕 쬐고 간다는/ 그녀에게 너무 늦게 찾아갔었네/ 한순간 꽃피웠을 시간이 꿈에서 깨자/ 대문은 닫히고 나는 그녀의 집으로/ 살아 들어설 수 없는 몸이었었네/ 꽃받침에 턱을 괴고 앉아 무슨 생각/ 하다 갔는지 그 앞에 묵묵히 바라보자니/ 빈 줄기 씨앗에게 나를 데려다 주었네/ 흰 머리칼을 둥지 삼아 놓인 씨앗은/ 그녀 이승에 남긴 한 마디 말이었네/ 어둡고 좁은 방에 갇혀 있어도/ 마음 가 있으면 거기 꽃은 핀다고,/ 거슬러 갈 수 없는 시간의 물결도/ 자신의 무게 모두 덜어내고 나면 가뿐히/ 넘나들 수 있는 고개일 뿐이라고,/ 햇볕에 빛나는 머리칼이 따뜻한 숨결로/ 막막하던 나를 위로해 주었네//

상처가 부르는 사람 / 길상호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올려놓는 중이다/ 매웠던 삶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양파는/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난다/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 굴레들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 벌레들이 영혼을 모두 실어나르고 나면/ 양파는 이제 윤회의 둥근 원 하나/ 완성하리라 그리고 보니/ 나에게도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이 있었다/ 그때 왜 나는 붉은 핏방울의 기억을/ 숨기려고만 했던 것일까 힘들게 온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 방문을 닫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욱 난감하게 갇히고 마는 것이다/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

소띠의 술주정뱅이 / 길상호
내 속에 언젠가부터 나를 갈아엎는 내가 산다/ 위장 내벽을 쟁기로 긁어대던 그 놈,/ 결국 오늘은 쟁기 날 끝에 피가 묻어 있다/ 물을 들이키면 그 놈이 파 놓은 구멍으로 줄줄/ 새고 마는 것이다 나는 고장 난 위장을 끌어안고/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그래도 놈은 좀처럼 구멍을 통해 나오질 않는다/ 변기의 소용돌이 속에 가둬놓고 더 이상은/ 내 몸에서 기생할 수 없게 물 내리고 싶은데/ 어쩌면 그 놈이 벌써 간 쪽으로 기어 올라가/ 퉁퉁 부은 간에 쇠스랑을 꽂을지 모른다는 생각,/ 내 간이 어디 붙어 있더라, 생각을 하다가/ 내 몸을 전부 변기 속에 처박아 두고 싶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을 하는 나를, 갉아먹는 나는/ 아무래도 살이 붙어 있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 놈 또한/ 비실비실한 다리로 막힌 내장 파헤치느라/ 발이 퉁퉁 부르터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속에 있는 나도 불쌍해 소주 한 모금/ 사식처럼 넣어 줄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놈/ 술기운에 힘을 얻어 더 깊숙이 쟁기를 댄다/ 이랴, 이랴, 저 자신을 끌고 다니는 소 한 마리/ 나의 주정은 쟁기 날처럼 번쩍인다//

나무를 배웅하고 온다 / 길상호
이끼는 세월이 짜 놓은 수의,/ 죽은 영혼 춥지 않도록 입혀주는 옷,/ 푸른 옷 입고 나무 땅으로 돌아가네/ 가느다란 뿌리부터 뚝뚝 끊으며/ 이승의 어두웠던 길을 지우고/ 연한 몸의 벌레들 뚫어주는 구멍을 따라/ 더듬더듬 저승길 찾아가네/ 껍질 속에 묻어둔 아픈 사연 꺼내들고/ 유언처럼 바람에게 읽게 하고는/ 푸르게 반짝이던 잎사귀의 눈 모두 감네/ 아침마다 이슬은 그 옷자락을 닦으며/ 나무의 영혼 멀리까지 배웅 갔다가/ 눈물이 다 말라서 울지도 못하고/ 그때마다 나이테는 풀려/ 인연의 끈 하나씩 놓아주네/ 저 가지처럼 마른 몸으로 먼저 떠난/ 형님도 그랬을까, 바람 끝에서/ 그의 나이테 찾아 잡으려 해도/ 잡히는 것은 아직 남은 나의 손금들,/ 나는 아직 세월에 묶여/ 더 많은 잎과 꽃을 피워야 할 몸,/ 다시 사람의 마을로 돌아가네//

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蓮연의 귀 / 길상호
蓮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 그 푸른 귀들을 보고/ 고요한 수면에/ 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온다/ 물속에 가부좌를 틀고/ 蓮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 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 준비 중이다/ 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 나도 그 밥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라는 소문 / 길상호
고로쇠 호스를 혈관에 꽂고 오늘은 나무의 맥박으로 눕고 싶어, 수천 개 푸른 귀를 달고도 너의 말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가 필요해, 가지에 가지를 친 너의 말들을 가지마다 찾아가 가만히 푸른 손으로 틀어막겠어, 그래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말들은 나이테 두루마리에 차곡차곡 새겨놨다가 죽어서도 가져가겠어, 스스로 속을 파내고 관이 되어 거기 부장품처럼 너의 말들 안치할 거야, 밤마다 유리창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때문에 너의 잠도 편치 않겠지, 나를 꺾고 싶은 너의 바람, 그렇게 강도를 낮춰도 소용이 없어, 내게는 온몸에 박아둔 낚시들이 있거든, 가지 끝 푸른 미끼를 무는 순간 파르르 너의 말들은 낚이게 될 거야, 그러면 너는 온통 푸르게 변한 내 얼굴과 마주해야 해, 조심해! 그 말의 주인공이 너라는 소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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