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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상미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7. 08:17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직할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가 있다.

2003년 박인환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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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 김상미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공생 / 김상미
시는 시인의 가슴을 파먹고/ 시인은 시의 심장을 파먹고/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 가난한 자는 부자들의 동정을 파먹고/ 삶은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의 숨결을 파먹고/ 태양은 쉼 없이 매일매일 자라나는 희망을 파먹고/ 희망은 너무 많이 불어 터져버린 일회용 푸른 풍선 같은/ 하늘을 파먹고//

질투 / 김상미
옆집 작은 꽃밭의 채송화를 보세요/ 저리도 쬐그만 웃음들로 가득 찬/ 저리도 자유로운 흔들림/ 맑은 전율들을// 내 속에 있는 기쁨도/ 내 속에 있는 슬픔도// 태양 아래 그냥 내버려두면// 저렇듯 소박한 한 덩어리 작품이 될까요?/ 저렇듯 싱그러운 생 자체가 될까요?//

비밀 / 김상미
애인을 가슴에서 꺼내 벽에 걸어두니 참으로 조용하다. 벽에 걸린 벽의 침묵이 세속과 다른 냄새를 애인에게 발산하여 애인은 지금 한창 침묵중이다./ 침묵이란 본래 심장 가까이 두는 물건이라 맛만 들이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깊은 맛을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침전해 있던 애인이 어느날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과 얼음의 우화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안은 금세 격동으로 치닫는다./ 저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해류에 휘감겨 십자가에 매달리듯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마치 그 속에서 정화되어 다시 솟는 분출만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오렌지 /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빨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아, 고도(Godot)! / 김상미
따뜻한 양지맡에 앉아/ 햇빛 쬐고 계신 할머니// 비어 있는 허공만/ 계속해서 비어 있는 허공만/ 갖고 노셨나// 지나가다 문득 시선 마주쳐도/ 아, 그 눈!// 정말 그 눈 속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네//

해후 / 김상미
그들은 서로를 보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뒤돌아서면서 서로를 알아보았다 십 년의 세월이 그 사이를 흘러갔다 그들은 늙었다 그러나 서로의 간격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표정은 몰라보게 젊어져갔다/ 그들은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손도 내밀지 않았고 가벼운 포옹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등 돌릴 수 없는 사랑이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그들은 기쁘게 돌아섰다 앞으로 십 년은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 김상미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라는/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을 본다/ 스물여섯 개의 모자가 제각기의 공간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형상을 연출해 낸다/ 누워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엎드리거나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사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밭에 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재빨리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표정을 잃어버린 색깔들의 좌충우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모자를 집어 올린다/ 예술과 인간의 대립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무방비 상태의 내게로 불어온다/ 모자들이 날아가기 시작한다//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자를 쓰지 못했다//

시인 앨범, 1999 / 김상미
요즘은 시인들을 자주 만나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 그들이 너무 잘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제스처, 그들의 생각, 그들의 분노까지 알아 맞출 수가 있다. 그들은 인간이기보다 자연 쪽에 더 가깝다. 天地에 너무나 예민하여 도덕이나 선의나 인간성이 그 사이에 개입하기에는 너무나도 섬세하다. 예전에는 시인들과 사소한 것에 분개하여 더러 싸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와도 싸우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도 있다. 신의가 매우 두터워진 이들도 있다. 전혀 만나보지 못했지만 시만 읽어도 참 좋은 시인들도 있다. 나는 시보다 사람이 더 좋은 그런 시인들에게선 넉넉한 인간애를 얻는다. 그리고 내게는 이미 죽은 시인 친구들도 여럿 있다. 나는 종종 그들을 만나러 바다나 산으로 간다. 파도가 살아 움직이고 해변의 무덤들이 마법의 환과 싸우는 밤바다는 그들을 만나는 데 가장 안성맞춤이다. 나는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하여 그들 중 아무와도 연애를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들과 더러 감정이 얽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 추억의 배설물로도 시를 쓴다는 걸 알고는 그들과 절대 연애감정에 휘말리진 말아야지, 맹세했다. 그들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기보다 자연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밖으로 발산하는 감정은 모두 天災地變에 가깝다. 자연은 신이 만든 것 중 가장 아름답다. 악인이 그 앞에서 전율하고 선인이 그를 지킨다. 그 흰 길을 끝없이 달리는 건 시인들뿐이다. 우리는 그 길을 창조의 길이라고도 부르고 미지의 세계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모두 그 길 안에 있다. 빛이 있으라, 하고 신이 크게 외치자 빛으로 가득 찼다는 그 길! 그러나 그 길은 누구도 빠져 나온 적이 없는 미로이다. 그곳에는 아직 맛보지 못한 삶과 죽음의 광기가 저 혼자 달콤하게 술 방울로 익어가고 있다.//

시인 앨범 3 / 김상미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시인 앨범5 -시는 혼자가 아니다 / 김상미
오랜만의 술자리/ 반가운 얼굴들이 많네/ 다들 무사한 건가?/ 아, 저기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천재 시인도 있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도 조만간 그 자리를 내려놓게 될 거야/ 놀라움과 재치로 가득찬 게임일수록 더 빨리, 더 쉽게 복제의 덫에 빠질 테니까/ 그보다는 저기 저, 물음표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저 시인이 훨씬 더 시에는 강할 거야/ 의문은 시의 원동력이니까/ 미당문학상 받은 시인 옆에 앉은 저 여성 시인은 이제 나와는 눈도 안 마주치네/ 한때는 내 친구라고 하더니/ 이제 와 수직적 정체성에 비상등이 켜진 걸까?/ 그래봤자 사람마다 즐기는 문화의 급수는 거기가 거길 텐데/ 아, 저기 우리 글발(시인축구팀) 팀들이 오네/ 유일한 남풍(南風)/ 이제야 실내가 점점 환해지네/ 어젯밤 만난 미셀 드기는 시는 혼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역시 혼자 마시는 맥주보다 여럿이 마시는 맥주맛이 훨씬 좋아, 좋아/ 이젠 어디에도 1990년대식 낭만은 찾아볼 수가 없네/ 그래도 내 앞에 앉은 시인은 고맙게도 자꾸만 시로 말을 거네/ 요즘 대세는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데/ 아저씨, 여기 맥주 좀 더 주세요!/ 그런데 아직도 저 여성 시인은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있네/ 청순가련을 빙자한 요부형/ 내게도 저런 빛나는 재주가 있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상미 누나!/ 아, 내가 좋아하는 j시인!/ 당나라 화가 우다오츠를 닮아 언젠가는 제가 쓴 시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눈물나게 얌전한 폭탄/ 그런데 나의 프랑켄슈타인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아직도 시와 단식투쟁중인가?/ 언제 봐도 저 세 시인은 미궁 같다니까/ 속 보이는 짓을 해도 야릇한 안개 같아/ 그래도 이 동네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말발이 세/ 그 때문에 시종일관 정직하기가 정말 힘들어/ 그 외는 무엇이든 재미있고, 괜찮아, 괜찮아/ 시인은 혼자지만 시는 혼자가 아니니까/ 시인은 죽지만 시는 죽지 않으니까/ 우리 모두에게 사는 인생, 그 이상이니까/ 그래, 마시자, 술!/ 이렇게 별이 빛나는 밤은 누가 뭐래도 뭉크의 그림보다는 고흐의 그림이 더 생생하고 아름답지/ 아저씨, 여기 맥주 좀 더 주세요!//

개죽음 / 김상미
개죽음은 개의 죽음이 아니다/ 개죽음은 개같이 죽는 것이다/ 어느날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 혼자서 느긋이 술집에 앉아/ 모처럼 흐뭇한 휴식 취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뒷머리에 타타탕!/ 이유없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넘어지는 것/ 그게 개죽음이다./ 아무도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 시대의 불운/ 개죽음은 도처에서 장소 불문하고/ 우리들에게 끼여든다/ 그것 피할 안전지대는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모두 제로이다//

에덴의 동쪽 / 김상미
나는 나를 소홀히하지 않았기에/ 남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디는 곳마다 생쥐투성이/ 세상에 생쥐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위에도/ 생쥐들의 세미나 생쥐들의 축제/ 자동차 뒷좌석에 쌓아놓은 책 위에도/ 여기저기 심어둔 사랑에도/ 이 시대의 검은 낭만을 연주해대는 생쥐투성이/ 내 머릿속 생각들을 훔쳐 갉아먹는 생쥐투성이/ 미로처럼 길게 줄을 서서 모여들고 있다// 마네의 선착장에도 모네의 정원에도/ 쇠라의 그랑자트 섬에도 오치균의 사북에도/ 바람은 불어오지 않고 생쥐 떼들이/ 태양과 달을 희롱하며 숨바꼭질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하다, 생쥐들이여,/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주사위를 던진다// 그리고 그 주사위는 슬픔도 백일몽도 아니다/ 생방송으로 미친 듯이 울어대는 너희들의 아첨이/ 눈부셔, 눈이 부셔/ 너희들에게서 아주 멀어진 이야기들이다/ 내 이야기에 너희들의 웃음을 섞지 마라/ 너희들이 눈물도 섞지 마라/ 나는 내 이야기들로 너희들에게 어떤 덫도 놓지 않았다/ 나는 태양과 달 아래를 달리고 달려/ 지금도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내 발 끝에 걸린 검은 구름조각들이/ 너희들의 집 한가운데 켜 있는 불을 꺼뜨리고/ 너희들의 침대를 텅 비게 만드는 건/ 내가 에덴의 동쪽에서 태어나/ 아직도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내 발자국들을 기억하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잡초처럼 다가오는/ 너희들이 아니고서!//

복사꽃 피는 언덕에서 / 김상미
엄마, 복사꽃이 피었어요. 사람 사는 근처에 피어야 더 아름답다는 복사꽃, 복사꽃이 피고 있어요. 전생이 복사꽃이어서 아직도 내게 그 향기가 묻어 있다는 복사꽃, 느껴봐요. 꽃의 숨결, 꽃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못잊을 그리움은 저렇게 휘파람으로 부는 것이라며,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저 칼날 같은 꽃향기들, 눈으로 코로 입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그 향기로 진달래 화전 대신 복사꽃 화전을 만들어 먹었어요. 들어봐요. 엄마, 나예요, 나예요, 나라고요, 하며 내 영혼이 조각조각 꽃잎으로 전율하고 있어요. 복사꽃 한 잎 한 잎에 묻은 겹겹의 세월들이 온몸으로 환한 봄언덕을 물들이고 있어요. 꿈만 같은 봄바람 온 힘으로 앞서가고 있어요. 내 마음 깊이 잠든 엄마까지 깨우며, 이 세상 모든 머릿속 새장 문 활짝 열어제치고 있어요,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환장한 찰나로//

민들레 / 김상미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날 찾아가 보면, 어느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위대한 양파 / 김상미
아버지의 외박이 일주일째 계속되던 날, 어머니는 양파를 까자고 했다. 양파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오라고 했다. 나는 광주리 가득 양파를 담아왔다. 양파를 까면서 우는 건 자연스런 일이므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열심히 양파를 깠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양파의 눈처럼 희고 예쁜 속살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한참 그 美에 빠져 있다 문득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온몸이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양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째 집을 비운 아버지가 만든 진짜 눈물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 눈물이 너무나도 아파 나는 못 본 척 숨죽이며 양파만 깠다. 눈물 콧물이 떨어져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왜 우는지, 어머니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 꼼짝도 않고 양파만 깠다. 아, 어머니는 저렇듯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있을 때, 남몰래 터뜨려야 할 설움이 차오를 때 이렇게 양파를 까며 우신 거구나! 나는 양파가 내심 고마웠다. 어머니는 양파를 까면서 울고 깐 양파를 썰면서도 울었다. 그 때문인지 눈물 젖은 하얀 양파가 프라이팬에서 황갈색으로 익어가며 내뿜는 향기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달달하고 먹음직했다. 온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채소 중의 채소, 양파는 정말 위대했다. 어머니의 아픔을 모조리 눈물로 씻겨내고는 다시 평심(平心)의 세계로, 다시 우리 어머니로 말끔히 되돌려놓아주었다.//

사랑 / 김상미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즐거운 사랑 / 김상미
난 참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평안하게/ 언젠가는 질 꽃인 줄 알았기에/ 허망하듯/ 부드럽게 옷을 벗었다./ 잠자지도 않고 밤에도/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 있다는 것 알기에/ 난 참 낮게 사랑에 빠졌다./ 참 아득하게/ 값싼 집일수록 불친절하므로/ 구월의 밤바다에선/ 모래위에 집을 짓지도 않았다./ 아무도 내게서 떼어놓지 않고도/ 남극의 빙산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를 녹였다./ 투명한 높은 생각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낮게 낮게 마주치는 사고와/ 그 사고 밑의 욕심을 탐하지도 않았다./ 헛되이 웅크리지 않고/ 내 사랑, 매달리는 그 아래/ 즐겁게 즐겁게 누워만 있었다./ 참 순진하게/ 참 겸허하게//​

아이스 바 사랑 / 김상미
그녀는 나를, 어리디어린 나를 개목걸이에 걸어 창가에 묶어 두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빵을 만드는 빵집 아저씨와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아름다운 구두를 만드는 구둣방 아저씨를 번갈아 만나야 했거든요, 사랑은 징벌이야, 우리는 누구도 혼자 살지 못하도록 벌 받은 존재들이야, 나는 그녀의 징벌 때문에 날마다 개목걸이에 개처럼 묶여 멍하니 창문 너머 세상을 구경해야 했어요, 매일 매일이 똑같은, 오백 원짜리 아이스 바처럼 단순하고 시시콜콜한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참다못한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어요, 창문 대신 책을 갖다달라고, 아아, 채~액! 그녀는 아버지가 버리고 간, 개목걸이에 묶여 하루 종일 독서하는 어린 소녀, 라는 책을 휘~익 내게로 던졌어요, 나는 매일 매일 그 책을 읽었어요, 그리곤 그녀가 아저씨들이랑 땀 뻘뻘 흘리며 침대 시트를 더럽힌 후 가져오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빵과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아름다운 구두를 먹고, 신고, 먹고, 신고.... 하면서 훌쩍! 훌쩍! 자라났어요,// 반쯤 자란 내게 그녀는 개목걸이 대신 이제 지폐를 주며 나를 밖으로 내몰았어요, 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아주 커다란 챔대를 들여놓아야 했거든요, 나는 그녀가 준 돈으로 시시껄렁한 담배도 피우고 멋대가리 하나 없는 남자아이들과 술도 마셨어요, 그러나 내 눈에는 언제나 개목걸이에 묶여 하루 종일 독서하는 어린 소녀만 보였어요, 호호 입김만 불어도 금세 줄줄 녹아내리는 오백 원짜리 아이스 바 같은,// 그래도 나를 이만큼 키운 건 그녀의 징벌 같은 사랑이고 내 몸을 살찌우는 건 빵집 아저씨와 구둣방 아저씨의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 바 사랑이니, 싫어도 어쩌겠어요,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벌 받은 족속들이니, 나는 평생 보이지 않는 그녀의 개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육체가 영혼을 벗어던지는 그 순간까지, 인생이 주는 감동을 금단한 채 아이스 바처럼, 아이스 바 사랑으로,// 내 역할을,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경되지 않을 내 역할을, 내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줄줄...//

럭셔리 제너레이션 / 김상미
페라가모 구둣가게 앞에 서 있는 소녀/ 프라다 가방을 들고 버버리 코트를 입고/ 불가리 선글라스를 머리에 쓰고/ 티파니 목걸이를 한,// 앳되고 앳된 소녀/ 명품으로 온몸이 반짝이는,/ 럭셔리 제네레이션// (아, 진열장 위의 초록색 페라가모 구두!/ 저 구두를 사려면 두세 명의 고객을 더 만나야 하는데…)// 프라다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쪼그만 루이 비통 수첩을 꺼내는 소녀// (누굴 고르지?)// 오래된 그리운 편지를 읽듯/ 수첩에 적힌 깨알 같은 이름들을/ 읽어내려가는 소녀// (A와 K,그리고 H/ 이 아저씨들이라면 날 애완동물 다루듯/ 부드럽게 대해줄 거야/ 풋사과처럼 춧춧한 내 피부에/ 지워지지 않는 탐욕으로 얼룩진 모욕/ 남겨놓지 않을 거야)// 앳되고 앳된 소녀/ 가늘고 긴 속목에 찬구치 시계를 본다// (시간도 적당하네, 곧 퇴근시간이 될 거야)// (초록색 뱀 같은 저 페라가모 구두/ 저 구두만 사면/ 그래, 저구두만 내 것이 되면/ 청보라색 달개비꽃처럼 새치름히/ 다시는 이런 짓 안 할 테야/ 다시는 명품 땜에 내 몸 더럽히지 않을 테야/ 저 초록색 뱀 구두만 갖게 되면…)// 검은 설탕처럼 달콤한 소녀/ 21세기 화려한 쇼윈도 앞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만나본 적 있는/ 나와 당신들의 무섭고 아름다운 딸,/ 럭셔리 제네레이션//

너무 많은 –끝말잇기 / 김상미
너무 많은 상점들과 상점들/ 상점들 안의 너무 많은 상품들/ 상품들을 고르며 웃고 우는 너무 많은 손들/ 손들 하나하나가 안간힘으로 움켜쥔 너무 많은 욕망들/ 욕망들 속에 도사린 너무 많은 함정들/ 함정들에 빠져 허우적대는 너무 많은 우울들/ 우울들의 화려하게 장식하며 부드럽게 감싸안는 너무 많은 조명등들/ 조명등들 아래로 순간순간 눈멀어가는 너무 많은 발들/ 발들과 발들 사이 조금씩 죽어가는 너무 많은 평범한 삶들/ 삶들과 죽음들을 딛고 나날이 울울창창 성장하는 자본주의/ 자본이라는 거대한 상자에 갇혀 겨우 턱걸이하며 한숨뒤는 너와 나의 빈약한 하루/ 하루하루를 저당 잡히고도 그것만이 전부이고 힘인 너무 많은 가여운 하루살이들/ 하루살이들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너무 많은 상품과 상점들/ 상점들의 계단을 오르고 오르며 짓밟히는 너무 많은 꿈들/ 꿈들도 죄가 되는 세상에서 총알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너무 많은 절망들/ 절망들의 표본인 일그러진 性 사이로 능숙하게 가라앉는 너무 많은 식은 심장들/ 식은 심장들을 하나하나 모아 만든 최신식 폭격기들/ 폭격기들 너머 끝없이 포효하며 위협받는 너무 많은 정신들/ 정신들을 파먹으며 나날이 거부가 되어 가는 자본주의 동반자들/ 동반자들이 모여 만든 너무 많은 규격과 규정들/ 규격과 규정대로 한다면 시인 또한 그들의 너무 많은 노예들/ 노예들의 걸작을 하나하나 잡아먹으며 반짝반짝 광내는 너무 많은 모조품들/ 모조품들의 행렬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상점들과 상품들/ 상품들 중에서도 최상품이 되고 싶어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분명한데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반품처리 되거나 폐품처리 당해 서서히/ 서서히 재가 되어가는 너무 많은 너와 나//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 김상미
입술이 새빨간/ 그녀는/ 날마다 시달리는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사를 찾았다// 프로이트 추종자인/ 그 의사는/ 모든 것에/ 성적(性的) 과잉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메타피직 운율로/ 계단을 오르고/ 마지막 계단에선/ 중력을 느꼈지만// 의사는 프로이트에 의한, 프로이트를 위한/ 처방책을/ 그녀의 자궁 깊이/ 들이부었다// 날마다 그녀는 성욕에 시달리고/ 햇빛 속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살만 보아도/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어느 날/ 그녀는 진찰실문을 밀고 들어가/ 삽시간에/ 의사를 덮쳐버렸다// 정말 예민한/ 프로이트 요법이었다//

오후 세시 / 김상미
오후 세 시의 정적을 견딜 수 없다/ 오후 세 시가 되면 모든 것 속에서 내가 소음이 된다/ 로브 그리예의 소설을 읽고 있을 때처럼/ 의식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라 주변을 어지럽힌다// 낮 속의 밤/ 똑 똑 똑/ 정적이 정적을 유혹하고/ 권태 혹은 반쯤은 절망을 닮은 멜로디가/ 문을 두드린다/ 그것 느끼는 사람은/ 무섭게 파고드는 오후 세 시의 적막을 견디지 못해/ 차를 끓인다// 너 또한 그렇다/ 부주의로 허공 속에 찻잔을 떨어뜨린다 해도/ 순환의 날카로운 기습에 눌려/ 내면 깊이에서 원하는 대로/ 차를 마실 것이다// 공약할 수도 훼손시킬 수도 없는/ 오후 세 시의 적막/ 누군가가 일어나 그 순간에 의탁시킨/ 의식의 후유증을 턴다/ 그러나 그건 제스처에 불과하다/ 오후 세 시는 지나간다/ 읽고 있던 책의 한 페이지를 덮을 때처럼/ 뚝딱 뚝딱 뚝딱……/ 그렇게 오후 세 시는 지나간다// 정적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정적 또한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의 차임벨 소리에 놀라/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우리 자신의 내부,/ 그 끝없는 적막의 두께뿐이다//

시각의 문제 / 김상미
이 거리가 아프다// 끼리끼리 놀고 끼리끼리 먹고 끼리끼리 웃어대고 끼리끼리 잠자는/ 제대로 눈물도 나지 않고 분노도 일어나지 않고 감동도 되지 않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뼈들이 줄줄이 줄서기만 하는// 뇌세포는 췌장세포를 좋아하지 않고/ 표피세포는 진피세포를 끊임없이 불신하는 데도/ 아까운 5리터의 피/ 줄서기에 다 쏟아 붓고 있는// 미쳐서 환장한 갱스터 한 명 없고/ 사랑에 실오라기 하나 없이 덤벼드는/ 눈먼 방탕 하나 없는// 가증스런 연명(延命)만이 판치는/ 야비한 이 거리// 이 거리가 정말 아프다// 노회한 조련사들만 우글우글/ 빛나는 미래로, 미래로/ 발기불능 자식들을 품에 안고 가는/ 기름칠한 넓적다리 같은 이 거리//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모른 체하고/ 질겅질겅 껌만 씹어대는 세계화를 찬양하며/ 스스로 죽어가는 어중간한 이들// 어떤 게 좋은 삶이냐고 묻는 아이 하나 없이/ 거대한 세계 속으로 사그라지는 석양/ 아무리 잘 지내도 보름달은 결코 뜨지 않을/ 킬킬대는 지옥의 서문 같은 이 거리// 날마다 비탄의 발길로 차고 또 차올려도/ 거짓말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웃고 있는/ 영원한 일인칭// 이 거리가 아프다/ 정말 아프다//

잡히지 않는 나비 1 / 김상미
너무 먼 곳으로 나왔나 봐요/ 그가 보이지 않아요/ 꽃을 끌어안고 웃던 햇살도 보이지 않아요/ 차가운 바람만이 노련하게/ 언덕을 넘어 오고 있어요// 그는 어디로 갔을까요?/ 푸른 하늘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하얀 구름도/ 땅의 체온이 그리운지/ 오랫동안 대지 위로 그림자를 떨구고 있네요// 너무 먼 곳으로 와버렸나 봐요/ 낮에 뜬 저 반달처럼/ 혼자 너무 멀리 나와 떠도는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아무렴 어때요/ 이 세상과 작별인사 하려고/ 밤새 달려오다 넘어진/ 저 시간처럼/ 우리끼리 다정하게 작별인사 해요/ 눈처럼 흰 마음과 장미처럼 붉은 가슴으로/ 어젯밤 배표를 사 놓았어요// 작고 아름답고 순한 배들일수록/ 깊은 바다 밑에서 그 일생을 마치듯이// 정말 이 세계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스스럼없이 편히 쉬어요/ 잡히지 않는 나비, 내 사랑이여!//

잡히지 않는 나비 2 / 김상미
이제는 누구도 별들의 이름과 새들의 말 가르쳐주지 않는다/ 불 피워 숲 속의 짐승들을 뒤쫓는 사냥법 가르쳐주지 않는다/ 날카로운 부리와 빛나는 눈을 한 독수리들도 태양을 향해 모두 떠났다/ 나의 어여뿐 어머니도 푸른 잔디 위에 벗어놓은 신발 속에서/ 두발을 빼내 하늘나라로 가져갔다// 그렇듯 모든 사랑은 언제나 흔적만을 남긴 채/ 한낮의 태양이 별빛 속에 숨어 쉬듯/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서도/ 제 갈길을 찾아 어디론가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들은 내 모든 것의 한 부분/ 지나가던 구름이 비와 눈 되어 내리면/ 만물의 정기 다시 쐬어/ 내게로 되돌아오는 새싹들// 산토끼를 달리게 하고/ 수사슴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눈먼 짐승들을 바람으로 밝게 해주는/ 사랑에 빠져 무성한 저 숲길처럼/ 언젠가는 나 역시 똑같은 곳으로 데려갈/ 끝없는 행복들// 그러니 꽃잎 아무리 다 져도 슬퍼하지 않는/ 저 멀리멀리 그리움 이고 떠난 사람들/ 앞세우며 뒤딸리며/ 비바람 모진 언덕 쯤은 훨훨// 잡히지 않는 나비처럼/ 잡히지 않는 나비처럼//

파랑새 / 김상미
나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 청춘의 중간 지점에 나무관으로 걸려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나무관을 따뜻한 지하로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끙, 끙, 끙, 나는 나무관을 끌어내리는 데 내 청춘을 다 소비했습니다 물빛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뚝, 뚝, 뚝, 나무관을 적실 때마다 나무관 위엔 붉은 꽃들이 피고 붉은 꽃들이 졌습니다 내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고 나는 내 삶 전체를 흔드는 아버지의 나무관 때문에 자꾸만 끝이 뾰족해졌습니다 끝이 뾰족한 것은 모두 죄다, 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너무나도 끝이 뾰족해진 나는 어깨 위의 나무관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관에 뚫린 구멍이 아주 커다란 구멍이 되었을 때, 그 구멍 속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올랐습니다 파랑새, 나는 것은 모두 죄다, 끝내 아버지는 따뜻한 지하에 내려서지 못하고 추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올라갔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구멍 뚫린 죄의 얼룩만 남은 나무관 곁에서 이제 홀로, 홀로 노래해야 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가버린 세계 / 김상미
그는 나와 다른 장소에 산다/ 나와 다른 장소에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느끼고 배설한다/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열어놓은 창밖/ 외로운 나무에 물을 주고/ 꽃 하나 지면 또 꽃 하나 심는다/ 어떤 유정도 어떤 무정도 온전히 그대로 빠져나갈 수 있게/ 스스로 밧줄이 되어 나를 묶지도 않고/ 내가 켜 놓은 촛불 속을 빙글빙글 돌지도 않는다/ 그는 나와 다른 장소에서 내 얼굴에 불 지르고/ 그 재로 자신의 얼굴을 만든다/ 세상이 버린 시간의 꽃잎들은 모두 다 그의 얼굴이다/ 내가 내 속에서 외치는 땀과 공포의 냄새는/ 모두 다 그의 향기이다/ 그는 종이를 통해 내게로 온다/ 철저히 삶으로부터 분리된 그 장소에서/ 나는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어둡고 슬픈 자주색 꽃들 사이에 핀/ 붉은 딸기를 딴다/ 꺾여진 꽃들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상처가 아니다/ 그는 나와 다른 장소에 산다/ 나와 다른 장소에서 쓴 사람이 없는 글을 읽고 글을 쓴다// 그는 언제나 삶을 먹는 자이고/ 나는 언제나 죽음을 먹는 자이다//

함정 속의 함정 / 김상미
갑자기 유년의 뜨락이 그리워져 앨범을 뒤지는 건 함정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새 옷을 입혀 함께 외출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책꽂이에 꽂힌 당신의 시집을 빼내 읽지도 않고 다시 꽂는 것도 함정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마음이 울컥해져 창문을 여는 것도 함정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실망했다고 말할 때마다 먹은 나이를 게워내는 것도 함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 침묵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들어줄 귀가 없고, 보아줄 눈이 없고, 품어줄 가슴이 없다면 아무도 사귀지 마십시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당신의 정신적 고통은 결코 함께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슬픔만을 조금 나눠 가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건 함정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아낌없이 뇌를 빠뜨리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들로 가득 찬 당신 머리 속 서재에 앉아 좌절한 손으로 쓰는 사랑과 미움, 파멸의 書 또한 함정입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그 꽃잎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함정! 그 외 달리 무엇을 꽃다운 인생이라 부르겠습니까?/ 천변지이(天變地異)가 모두 그 꽃잎 하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햇볕 아래 서 있으면 / 김상미
햇볕 아래 서 있으면 세상과 내가 너무 닮아 보인다 투명해 보인다 숨기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진다 미세한 실핏줄까지 다 보인다 세상이 내게 약속하고 내가 세상에게 약속한 희망의 작은 숨소리까지 들린다// 햇볕 아래 서 있으면 나는 동물이 되고 나무가 된다 동물처럼 움직이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나를 느낀다 햇볕을 끌어당겨 나무를 배고, 호랑이 노루 사슴 토끼를 낳는 나를 느낀다 온몸에 꽃이 피는 걸 느낀다// 햇볕 아래서 있으면 빛의 밭고랑을 뛰어넘어 내게로 오는 네가 ㅗ인다 빛에 둘러싸여 하얗게 빛나는 네 두 발, 잎은 더욱 푸르고 열매는 더욱 단단해져 네 몸에 기대 우는, 환한 내가 보인다// 마셔라, 더 마셔라, 온몸이 햇볕으로 가득 찰 때까지… 나는 마시고 마신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허기지는 햇볕, 마시면 마실수록 꼬르륵, 꼬르륵, 배가 더 고파지는 햇볕// 햇볕 아래 서 있으면 지나가는 기러기, 철새 떼의 비행들이 얼마나 내 시선을 받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내게 말을 걸고 싶어 했는지… 내 마음이 얼마나 햇볕에 배고파했는지…// 햇볕 아래 서 있으면 비로소 내가 딛고 온 세월이 내가 숨 쉰 공기였음을, 내가 밟고 지나온 지도였음을, 뜨거운 눈물 위에 세워진 한 채 집이었음을, 햇볕 한 점 한 점이 다 내 마음이었음을…// 두 다리, 두 주먹에 힘 꽉 주고 햇볕 아래 서 있으면//


똥파리* / 김상미
영화 「똥파리」를 보았다. 「똥파리」속에는 '시발놈아'라는 말이 셀 수 없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말은 보통 영화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급이 높고 비장하다. 지랄 맞게 울리고 끈질기게 피 흘리는 그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아무도 없는 강가에 가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시발놈아'를 스무 번쯤 소리쳐 불렀다. 그랬더니 내 가슴 안 피딱지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겁 많은 똥파리들이 화들짝 놀라 모두 후두둑 강물 위로 떨어졌다. 시발놈들!//
* 양익준 감독의 영화

편지 / 김상미
일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먼 아메리카, 그곳에서 날아오는 편지.// 며칠 전 치과에 다녀왔소. 치료를 받는 동안 내내 간호사 아가씨가 왠지 낯설지가 않았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더니 아, 당신을 닮았더군요. 모습은 전혀 다른데 움직이며 웃는 모양이라든지 사람을 아련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당신을 많이 닮았더랬소. 참 별일이죠? 치과 의자에 입 아 벌리고 앉아서도 당신을 생각하다니...... 처음엔 그 아가씨 되게 딱딱하더니 내가 당신 생각하며 아련할 때 몇 번 낯붉히며 살짝 웃는 것 보고......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조금씩 당신 닮은 부분 있어 나 누구에게도 화 안 내고 그렇게 기분좋게 살았으면...... 그런 생각하였소. 당신이 그립고 아파서가 아니라 삶에 목이 메어, 갈수록 멀고 아득해지는 이 삶이 눈물겹고 귀중해서......// 일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한 장의 종이 위에 제 자신의 무늬 찍어 보내는 사람,/ 먼 아메리카, 그곳에서 날아오는 편지.//

어머니의 편지 / 김상미
얘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네 세계가 아직도/ 말할 수 없이 아담하고 점잖고 예쁜 새장과 같다면/ 내 안으로 어떤 시집이든 절대 들여놓지 말아라/ 어떤 시집이든/ 그 안엔 냉혹한 언어의 클리너/ 거칠고 무모한 언어의 다이버/ 숨어 있으니/ 괜히, 심심풀이로, 함부로/ 그 안 넘보지 말아라/ 너는 감히 상상도 못할/ 최악의 모욕으로 더럽혀진 치욕의 핏방울들/ 네 세계 한복판으로 쏟아질지도 모르니/ 어떤 시집이든 마음 내킨다고 아무렇게나/ 펼쳐 보지 말아라/ 시인들이란 제 자신의 피로 시를 쓰고/ 그 시로 끊임없이 신의 주변에 거미줄을 치는/ 무서운 사람들이란다/ 도끼로 그 뿌리를 찍어 푸른나무 쓰러뜨리고/ 그곳에다 꿈의 생지옥,/ 검은 소금으로 절여진 영혼의 샘 파는 사람들이란다/ 그 불온한 그림자 네게 스며들지 않도록/ 그 샘 가까이엔 아예 가지 않았음 좋겠다/ 너는 그저 생긴 그대로 교과서처럼 온화하게/ 새장 속의 작은 새처럼 다정하게/ 기품 있는 네 세계 안에서/ 그냥 그렇게 살았음 좋겠다/ 온갖 사랑의 특혜 그림같이 주고받으며// 세세 만년 행복하게//

꽃밭에서 쓴 편지 / 김상미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대가 떠난 뒤 나는 꽃들과 친해졌답니다. 그대가 좋아했던 꽃들. 그 꽃들과 사귀며 하루하루 새 꿈을 개발해내고 있답니다.// 그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 안개꽃이었나요? 영원한 사랑. 그 꽃으로 그대는 나를 유혹하고 나를 버렸지요. 꽃밭 가득 그 꽃들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요. 깊이를 잴 수 없는 꽃들의 욕망은 그 자체가 울부짖는 색깔 같아 그대 없이도 나는 그 꽃들을 숨 막히게 안고 숨 막히게 그 향기를 맡아요.// 이제 엉겅퀴처럼 상심한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나는 하루하루 화해의 개암나무 잎에 나를 문지르며 베고니아처럼 신중하게 아이비처럼 지조 있게 매일 밤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역경 속의 에너지를 키우고 있답니다.// 그러니 늘 버림받아 우는 매발톱 꽃씨 따위는 이제 보내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진달래처럼 짧고 연약한 열정에 매달려 쐐기풀처럼 잔인하게 시들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옛사랑, 그대를 위해 행운목 한 그루는 보내드릴게요. 애석하게도 그대가 좋아했던 달맞이꽃은 모두 시들어 버렸어요. 깊은 밤에만 피는 노랗고 변덕스런 꽃. 봉선화처럼 성급하게 수국처럼 냉정하게 나를 떠난 그대처럼 그 꽃들은 모두 바람 부는 벌판에 내던져 버릴래요.// 하지만 그대가 선물한 백석 시집 갈피에 넣어두었던 제비꽃은 내가 가질게요. 아주 오랫동안 보고 또 본 꽃이라 말이 통할 정도로 친해졌거든요. 버릴 수 없는 내 일부분이 되어 버렸거든요.// 나는 이제 꽃들이 발산하는 생명력 없이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그립지가 않아요. 꽃잎 하나하나가 내게 상처를 주어도 그 상처 위에 오래 앉아 있으면 꽃잎 하나하나가 다시 나를 치료해 줘요.// 그러니 잘 가요, 내 사랑. 내 사랑이 앞으로도 계속 제비꽃에 빠져 있을지, 패랭이꽃에 가 머물지, 아카시아 꽃처럼 비밀스런 사랑을 탐할지, 아몬드 꽃처럼 무분별한 사랑에 빠질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나도 몰라요.// 그렇지만 꽃들은 많은 걸 잊게 해주고 또한 많은 걸 떠올리게 해주고, 두려움 없이 즐겁게 많은 걸 기다리게도 해줘요. 사랑하는 만큼 빠지게 하고, 더 많이 보이고, 볼 수 있게 해줘요. 파닥파닥 상상력이 뒤쫓아 다니는 어린 아이의 발자국처럼!//

사랑에 관한 짧은 편지 / 김상미
몇 달, 아니 몇 해가 흘렀네요./ 당신을 만나고도 한참을 더 살았네요./ 느릿느릿, 아니 숨가쁘게 헉헉./ 자기네들끼리 모여 소풍 다니는 흰 구름 떼처럼/ 산 넘고 바다 건너 초원을 가로질러 왔네요.// 진짜 삶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은 활활, 커다랗게 한숨 쉬고 있지만/ 배고픔과는 다른 내 삶을 어떻게 하겠어요.//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낙타 발굼치에 묻은 모래방울로도/ 집을 짓는 당신.// 첫눈에 나는 반했는걸요./ 무너지고 무너지면서도 당신에게로 가는/ 새장처럼 조그마해진 나의 집.// 아직도 나는 그 집에서 살아요./ 당신 때문에 엉망이 된 내 별자리 위에서/ 밥도 짓고 기도도 드려요.// 뜨거운 햇살 아래선 밀짚모자를 쓰고/ 도저히 답습할 수 없는 세계는/ 눈 딱 감고 건너뛰어 다녀요.// 우리, 조금만 더 살아요./ 활짝 피어나 웃는 제비꽃처럼/ 당신을 기다릴래요./ 날마다 내 마음 소매치기해 가고선/ 다시는 되돌려주지 않는 당신.// 10년 전에도 그랬고 20년 전에도 그랬지요.//

인류 -순이의 편지 / 김상미
나는 아파요 아주 많이 아파요/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장 아파요/ 하지만 이 아픔은 내가 내 몸을 소홀히 하여/ 신이 주신 삶의 혈세를 낭비하고 낭비한 탓/ 그 때문에 신이 내 몸에 슬쩍 심어둔 죽음의 씨앗이/ 쑥쑥, 무럭무럭 자라난 탓/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해요 견딜 만해요/ 아파서 죽는 것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모두 다 심오한 신의 뜻이라지만/ 죽음이 그냥 죽음이듯이/ 아픔 또한 그냥 아픔일 뿐이에요/ 신은 누구보다도 바쁘고 도도(滔滔)하여/ 아마도 나한테까지 마음 쓸 여유가 없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삶을 믿어요/ 철저히 삶의 편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신을 등에 업은 죽음이라도/ 단번에 나를 쓰러뜨리진 못할 거예요/ 언젠가 때가 되어 내가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건 삶을 사랑하는 내 믿음이 부족해 삶의 눈 밖에 났을 때일 거예요/ 아파서,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더는 삶에게 베풀 것도 갈 곳도 없어졌기 때문일 거예요/ 죽을 때가 되어서 드디어, 마침내 죽는 것일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을래요/ 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그대들/ 매일매일이 힘들고 두렵고 아프지만/ 언제나 그 안에서 꿈꾸듯 애틋하고 평화롭고 다정하고 싶은/ 인류라는 그대들과!//

자라지 않는 나무 / 김상미
우리는 너무 우울해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하고/ 우리는 너무 외로워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고 부르고// 그래봤자 우리는 모두 슬픈 뱀에게 물린 존재/ 상처가 깊을수록 독은 더 빨리 퍼져// 우리는 키스를 하면서도 썩어가고/ 우리는 사랑을 나누면서도 썩어가고// 그래봤자 우리가 소유하는 건 날마다 피로 쓰는 일기 한 페이지/ 나부끼고 나부끼고 나부끼다 주저앉는 바람 한 점// 그래도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가급적이면 더 치명적인 비극, 희망을 향해 바퀴를 굴리고// 그러다 만병통치 알약처럼 서로를 삼키고/ 사막같이 바싹 마른 가슴에 불치의 기우제를 올리는//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을 발가벗겨 구름 속에 처박고/ 어찌할 줄 몰라 밤에게 된통 걸려버린 나무 그림자// 밤새도록 춤, 춤만 추는 자라지 않는 나무//

폭풍 속으로 -1970년대 풍으로 / 김상미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넌덜머리가 난다/ 우리는 우리끼리 만났다/ 우리끼리 떼 지어 다녔다/ 핑크 플로이드를 듣고 재니스 조플린을 듣고/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를 따라 불렀다/ 까마귀 떼처럼 백로가 노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슬픈 뮤지션들/ 온몸이 서러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 어느 곳을 건드려도 툭, 하고 푸른 눈물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노래 가사와 똑같은 꺾인 길, 굽어진 길, 막다른 길들을 돌아다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무릎에 붉은 상처가 생겼다/ 오오, 붉은 상처는 훈장 같아!/ 우리는 서로의 무릎에 난 상처를 따뜻한 혀로 핥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소박한 청춘/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소박함이야말로 지혜의 꽃이라는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만큼 나누어줘야 할지 몰라/ 광란의 속도로 달리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느릿느릿 에릭 사티를 듣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소리쳐 불렀다/ 새파랗게 젊은 정의는 한낱 꿈!/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다가와 구애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 아무리 목갈기를 휘날려도/ 그중 가장 으뜸은 돈이라고, 돈다발이라고/ 우리는 다시 굽은 길, 꺾인 길,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가 있으면 노래하는 자도 있는 법/ 우리는 온몸으로 노래하며 더 멀리,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자유의 속옷을 열어제친들 무엇하랴?/ 이마에 찍힌 청춘의 이름표를 도려낸들 무엇하랴?/ 우리는 누구와도 우리들의 삶 흥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끼리 떼 지어 놀았다/ 비 오고 바람 불고 폭풍우 치는 이런 시대,/ 너무 멀리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이지만/ 우리는 노란 해바라기, 불타는 태양/ 달리는 풀잎처럼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 눈을 찌르는 일광,/ 그 노래를 움직일 거대한 폭풍 속으로!//

담배 연기 / 김상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하일 바흐찐은 자신의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 그 담배 연기를 오늘날 내가 마시고 있다./ 헤어지자 말하는 남자의 등뒤로 담배는 만병의 시작이다 쓰여진 커다란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평원이 보인다. 헤어지기엔 평원이 너무 넓다. 큰 키의 나무라도 몇 그루 있었으면… 그러나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는 남자라면 이별의 독초에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 담배 연기를 받아 마시며 천천히 평원의 입구로 들어선다./ 푸드득 몇 마리 비둘기들이 적막을 깨며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다. 가지마, 남자의 심중이 마지막 총알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박힌다./ 그러나 이별은 섬광이 아니다. 섬광이 빠져나간 껍질이다. 그 껍질 때문에 우리는 세계는 어디나 다 똑같음을 배우게 된다. 참으로 끊기 힘든 담배, 그를 위해 자신이 쓴 책을 기꺼이 찢은 남자. 그 위에 찍히는 립스틱 자국./ 아무래도 이곳은 이별의 장소가 못 된다. 이별은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바른 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원은 너무 넓고, 내리쬐는 햇살은 눈부시게 따뜻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평원을 가로지르는 내게 더 이상 눈물 따윈 흘리기 싫다며 평원의 푸른 눈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참으로 이별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그 남자는 얼마나 아팠을까?//

가면 속의 연인들 / 김상미
비에는 비가 내린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본다/ 아침 점심 저녁/ 그렇게 다르던 내부가/ 갑자기 비의 발굽 아래로/ 쏟아지면서/ 나를, 우리를……경계선의 끝으로/ 몰아간다/ 누가 (우리)라고 했지?/ (우리)가 누군데?/ 방약무인 비는 내부를 어지럽히며/ 피시시시 머리 속의 마개를 뽑아낸다/ 하나의 머리 속에 마개를 뽑아낸다/ 하나의 머리 속에 그토록 많은/ 가면들이 숨어 있었다니/ 우리를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겠지요?/ 시선 속으로 마구 비를 집어 넣는다/ 그러나 우리, 우리는 안다/ 그 사이에 심연이 하나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지금도 박에는 비가 내리고 있군요/ 우리는 우리를 찌르는/ 가면의 내부와는 상관없이/ 비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래, 아직도 밖에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세미나 / 김상미
오늘의 주제는 마르크스였다./ 우리는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나는 왼쪽 창가에 앉았다. 이론에 강한 그들은 끊임없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엥겔스가 굶고 있던 마르크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장면을 떠올렸다./ 연민과 존경으로 엥겔스의 시선은 성에 낀 유리창처럼 아름다웠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마르크스의 예측은 오류를 범했다고. 사회주의는 그토록 날카롭고 이지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지만 유머가 없다고. 유머가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라고-/ 사람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것을 잊고 있다./ 부르주아 출신이 프롤레타리아식 커피 맛을 어찌 알겠는가!// 거대한 토론의 한가운데 작은 토론은 죽고, 그 자리에 남은 우리는 슬그머니 자본주의적 미소 속에 그를 끌어당기지만, 무자비하게 벗겨버린 그의 옷을 다시 입힐 수는 없었다.// 마치 그것이 가장 정확한 결론인 양-//

집 / 김상미
나는 안다/ 내가 돌아가는 곳/ 문, 복도, 문, 복도, 문/ 그리고 마침내 불이 켜지는 방/ 그저 않아 있거나/ 비스듬히 누워/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달리 더 어떻게 할 수도/ 더 붙잡을 수도 없어/ 움켜잡은 매트리스/ 그 위로 쏟아지는 이야기의 빈통들// 그래,/ 나는 안다/ 내가 돌아가는 곳/ 열고 닫고/ 닫고 열고/ 열고 닫고/ 창문만 커다랗게/ 고통을 겪는/ 소시민의 함정/ 그게 어디 집이니? 그게 어디 집이니?/ 불협화음으로 골수 깊은 웃음/ 소리/ 소리/ 소리의 집/ 문, 복도, 문, 복도, 문/ 그리고 마침내 불이 켜지는 방//

고래 사냥 / 김상미
내 마음의 해도(海圖)를 주마./ 바다로 나가거라./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책과 수평선이 주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저 멀리, 나와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들과의/ 참신한 방황에 나 자신을 맡겨버렸다./ 바다로 나가거라./ 빛나는 꿈 한 자루 입에 물고/ 뱃머리에 노련한 작살을 정착한 채/ 고래를 향해 노를 저어가라./ 격렬한 폭풍파도는 네 존재를 알게 해주리라./ 무섭도록 격렬하고 깊은 것일수록/ 서로를 잘 이해하기 마련이다./ 바다로 나가거라./ 너를 기다리는 고래의 함성에/ 저 깊은 바닷속 죽은 선원들의 무덤이 저절로 열리리라./ 가거라, 폭풍파도가 너를 기다린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배처럼/ 떠나거라./ 가서 보아라./ 그 어떤 인간의 야망보다도 더 장렬하게/ 네가 던진 작살 끝에 묻히는 고래의 피를!/ 그 피묻은 장엄한 공포를!/ 그리고 그 모든 걸 삼키고도 지구의 3분의 2를 덮고 있는/ 바다의 저 불가사의한 경의를!//

감옥 / 김상미
ㄱ을 감옥에 가둔 건 ㅁ입니다. ㅁ은 ㄱ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부인과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면, 시간이 있을 때만 ㅁ은 ㄱ을 면회하러 옵니다. 내일도 올게. ㅁ은 다정히 웃으며 면회실을 나갑니다. 내일? 그러나 그건 ㄱ의 내일이 아닙니다. ㅁ의 내일이고 ㅁ의 시간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ㄱ에겐 아름다운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ㄱ의 시간이란 이 지상에 없습니다./ ㅁ은 ㄱ을 면회할 때마다 ㄱ을 사랑으로 덧칠하고 또 덧칠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으로 덧칠을 하고 또 해도 ㄱ의 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ㄱ은 갈수록 어두워집니다. ㄱ은 비둘기가 비닭기로, 앞에가 압혜로, 세상이 세샹으로 표기된 1969년도 판 소설책 같습니다. 맞춤법이 엉망인 소설책은 읽어내기가 힘듭니다. ㅁ은 조금씩 조금씩 ㄱ과의 면회시간을 줄여갑니다. ㄱ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ㅁ 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봅니다. ㄱ이 가야 할 슬픔의 길은 ㅁ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에서 더 뚜렷해집니다./ ㄱ을 감옥에 가둔 건 ㅁ입니다. ㅁ은 ㄱ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부인과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행복은 ㄱ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ㄱ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복입니다. ㄱ은 빼앗긴 행복 대신 비둘기를 비닭기로, 앞에를 압혜로, 세상을 세샹으로 표기한 1969년도 판 소설책을 읽습니다. 맞춤법이 엉망인 소설책은 감옥에서 읽기엔 안성맞춤입니다. 행복 없이 읽어내는 소설책은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감옥이고 ㄱ이 갇혀 있는 곳도 그런 감옥입니다.//

묵묵부답 / 김상미
홀연히 돌아서는 사람이 되고 싶겠지/ 싹뚝 잘린 나무처럼/ 모든 걸 반토막 내고 싶겠지// 그러나 그늘 냄새 풍기는 골목 어귀에서/ 최선을 다해 마시는/ 몇 잔의 술/ 그뿐이겠지/ 말짱하면 말짱한 대로/ 취하면 취한 대로// 너도 적/ 나도 적/ 우리 모두 적이 되어/ 제대로 정복 한번 못해 본/ 성문이나/ 죽으라 두드리겠지// 그 한계/ 그 절망/ 그 억지/ 이제는 풀어줄 때 되지 않았니?// 새벽은 아직도 말이 없고/ 일상은 저리도 도도한데!//

불후의 명작 / 김상미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썼다.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이다. 해변의 까마귀. 그러나 카프카에겐 해변보다 사막이 더 잘 어울린다. 둘 다 모래로 만들어진 곳이다. 젖은 모래와 마른 모래. 한쪽은 태양을 삼키고 한쪽은 태양을 뱉아낸다. 카프카는 타오르는 태양을 삼킨 작가이다. 그는 그 그림자만으로도 이 세상에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그가 남긴 그림자의 한 부분이다. 불후의 명작은 그 그림자와 운명을 함께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모래폭풍이 낳은 인간들의 사냥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바람으로 이루어진 성채(城砦)이다. 피를 쏟아내지 않으면 새 날이 밝아오지 않는 곳. 불후의 명작은 그곳에 산다. 피가 피를 부르고, 피가 피끼리 통하는 해변의 카프카, 그 빗장 너머에!//

어머니와 나 / 김상미
이젠 친구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왔다./ 사십여 년 어머니는 내 친구였다./ 어머니와 나는 남자들이 가꾸다 버린 들판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집은 새와 바람들이 잠자다 떠나는 호텔,/ 아침이면 미래에 대한 쓰라린 생각들이 커피 물처럼 끓어올랐다./ 그래도 우리는 나무를 심고 꽃에다 물을 주었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돌멩이들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대지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시집을 읽었다./ 마음 속으로 아무리 사나운 폭풍이 몰아쳐 와도/ 아주 정갈하게, 茶를 달이듯 언어들을 다루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던 돌들이 하나 둘 빠져나왔다./ 인간의 마음에 박힌 돌들은 절대 진주가 되지 않는단다./ 어머니는 시집 가득 쌓인 돌들을 내가 다시 집어오지 못할 곳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 세상이 내는 갈채 소리를 그리워했다./ 마당가에 듬뿍 핀 키다리들국화에 앉은 잠자리 날개를/ 넋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반짝거리며 사는 것들을 향해 물을 뿌렸다./ 물을 먹고 자란 것들은 쑥쑥 담장보다 더 높이 올라섰다./ 어머니와 나는 똑같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곳을 벗어날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사라져 가는 나날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겉잡을 수 없는 욕망이 일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그러나 빛은 내가 쓰는 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멀리 던져버린 내 마음에서 뽑아버린 돌들에서 나왔다./ 나는 어머니와 내가 지은 집을 버리고/ 어머니의 그림자를 내게서 떼어내고 싶었다./ 어머니는 마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경멸했다./ 어머니는 너무나 헤어지기 힘든 사람이었다./ 사십여 년 벽 없이 나와 함께 살았음에도/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처럼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내 몸에 새겨진 어머니의 사랑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 어머니의 집을 버리고/ 한 권의 책 속으로 들어왔다.//

독서는 사랑이다./ 나는 사랑을 향해 원도, 한도 없이 나아갔다./ 그 아래 켜져 있는 수천, 수만의 희망들을/ 전부 다 태워버리고 싶었다./ 내 머릿속으로 구르는 검은 잉크의 언어 알들이/ 지칠 줄 모르는 고뇌의 물살에 휩쓸려/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못해 본 사랑,/ 그 사랑의 모습으로 내게 되돌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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