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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시일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4. 08:29

강시일 시인
경북 영덕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언론홍보학 석사, 동대학 신문방송학과 박사 수료. 2006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나의 바다』와 문화유적답사기 『경주 남산』, 『역사기행 경주』 1,2권, 『경주 힐링로드』 1,2,3,4권, 『새로 쓰는 삼국유사』 1,2,3권, 공저로 『문두루비법을 찾아서』가 있음. 2015년 경북문협 작품상, 2016년·2018년·2019년 (사)대구경북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2017년 경상북도문화상, 2019년 《문장》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문학동인 volume 동인

 



세상을 의심하다 / 강시일
세상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사건건 비밀번호를 호명한다/ 내 통장의 입을 여는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컴퓨터로 거래하는 일도 인내와 기억의 창고를 헤집게 하고/ 자식에게 송금 못하는 일도 핑계가 된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일도 비밀스런 일/ 곤한 다리를 끌고 귀가하는 현관 앞에서도/ 나만 아는 암호를 애써 불러내어야 된다/ 전화기를 들고 당신에게로 닿기 전에/ 비밀번호를 먼저 불어야 된다/ 도대체 비밀 아닌 일이 없다/ 내 비밀번호는 노출되고/ 세상으로 가는 비밀번호는 오리무중이다/ 하나로 뚫린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숫자의 마법/ 혈압을 무한궤도로 올린다/ 울화통을 부풀게 하는 비밀 없는 비밀세상/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는/ 오늘도 내게 부여된 비밀번호를 요청한다/ 당신을 향한 비밀번호는 물론 닫혀있고/ 나는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세상은 비밀 속이다//

비밀번호 / 강시일
부정확하게 그때부터/ 세상으로 통하는 모든 문에 암호가 걸리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일도 비밀스런 일/ 곤한 다리를 끌고 귀가하는 현관 앞에서도/ 나만 아는 그녀를 호명하고/ 최신 아이폰을 들고도/ 아날로그 비밀을 풀어야 접속이 된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찍기놀이는 약속 없는 공유썩은 어금니, 정강이 뒤의 점까지/ 비밀 아닌 비밀파일로 전통시장 자판에 널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장 값싸게/ 불특정다수의 손거울 속으로 오버랩되고 있다// 당신을 향한 문들은 모두 닫혀있고/ 나는 유리 어항 속 붕어보다 투명하게 익어가고/ 대개의 배고픈 접시 위에 난도질되고 있다// 달아날수록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창 열고 손을 흔들어 보지만/ 투명한 함정, 유리절벽의 의뭉스런 하루를, 쓸데없이/ 나는 또 복제하고 있다//

틀 깨기 / 강시일
아재는 절름발이였다/ 의족이 철커덕 기형의 발자국을 만들 때마다/ 하늘이 기울어버릴 것 같아/ 내 손바닥에 물길이 생겨나곤 했다/ 아재는 평상에 다리를 펴고 볕으로 목욕을 하며 대나무로 붓을 만들어/ 성한 세상을 화선지에 옮기곤 했다/ 동네사람들과 벽을 쌓고/ 울 속에서 바깥세상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족이 골목길에 쇳소리를 그리면 다리가 칼이 될 것 같아/ 아이들은 멀리서부터 눈동자를 굴렸다/ 가끔 빨간 생각으로 무장하고/ 수박을 먹는 아재의 하얀 이빨을 보았다/ 그의 세상은 뾰족한 철창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재는 지천명이 될 무렵 서낭당 점붙이와/ 마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당수나무 나이테가 십여 바퀴나 늘어가던 어느 날/ 붙들이 아재의 늦둥이 사법고시에 붙었다는/ 현수막이 고향마을어귀에 펄럭이고// 돌아온 집 선반 구두 굽에서 문득 그 아재를 보았다// 아재의 쇠다리는 바를 정자로 비틀거렸던 것인데/ 나는 줄곧 지상으로 빗금을 긋고 있었고/ 지금도 세상과 교통하는 내 몸은 관성으로 기울고 있다//

넥타이를 매다 / 강시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목을 조른다/ 울컥 솟아오를지 모를/ 못난 격동을 누르기 위함이다/ 천천히/ 매듭을 엮어 결박 한다/ 밤새 풀려 불퉁거리는 야성을 묶는 거지/ 적당한 힘으로 조이고/ 기절한 듯 잠들었던 이성/ 후두둑 일깨우는 절차/ 가끔은 풀어두고 싶은/ 자유를 동경하는 방랑성에/ 손들어주고 싶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곳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때에 하기위해/ 햇살이 무르익기 전/ 나는/ 넥타이를 묶는다//

나의 바다 4 / 강시일
틀림없다/ 누군가 내 무게중심 어딘가 부여잡고/ 심하게 흔들었을 게다/ 갈매기 저리 높이 날지 못하고/ 바다와 하늘 경계를 기웃거리는 것도/ 오랜 어깨동무 친구조차/ 이빨 까부수고 웃어재끼는 걸 보면/ 세상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야물다던 내가 흔들리는 것일 게다/ 어제 종일 비가 내리고/ 젖은 마음 널어 말리는 백사장에/ 도시 여자들 하이힐 자국 깊게 꾸욱 꾹/ 흔적은 상처가 되고/ 버리고 간 낱말들이 이리저리 파도춤 추는/ 도대체 풀리지 않는 퍼즐인생/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흔들림/ 파도는 죽어라 육지로 뛰어들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바다는 어제처럼 여전히 울렁증 환자다/ 하늘이 해를 건져 노을로 가는 시간/ 그리 길지 않을 건데/ 자꾸 흔들린다//

죽었다 깨어나는 신들 / 강시일
니체의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사계절 푸른 댓잎을 내가 응시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묻힐 때/ 사실 신은 다시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 의심했어야 했다/ 그 때 정확하게 신은 죽었다/ 그리고 낱낱이 부서져 알알이 작은 정의로/ 도처에서 신은 부활을 시도했다/ 혹자는 부조리를 고발하는 신으로 일어서고자 했다고 했다/ 그러다 다시 죽음을 목격하고/ 조금씩 부활을 시도하는 사도들의 목소리는/ 성명서에서 희미하게 기록되고 있다// 한 그루 대꽃이 피면 일제히 따라 피었다가/ 대나무는 같이 떼죽음을 맞곤 한다// 촛불시위는 신의 강림을 온 몸으로 요청해대는데/ 정답은 자꾸 오답으로 출력되고/ 답답하여 강물 같은 세월을 딛고 외떡잎식물 하나 둘 깨어나고 있다/ 통틀어 안 통할 수 없었던 통들은 통 속으로 사라지고/ 대나무 쓰러진 자리마다 처음처럼/ 죽순, 촛불처럼 일어서고 신들이 강림하고 있다//

딱새* / 강시일
아닌 것은 아니고, 아니기 때문에 맞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광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제우스가 아미타불, 싯달타가 아멘이라 말한다/ 물은 산이고 산은 물이다/ 성룡이 취팔선을 탐독하다 고주망태가 되고/ 오십천을 까먹고 왕피천으로 간 연어가/ 영생을 얻는다거나,// 소설이 대설보다 눈이 더 많이 온다는데/ 광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단돈 3000원에 분양하는 해피포유 아파트/ 독도는 한국 땅, 대마도는 한국 땅/ MB가 코리아 사절로 화이트하우스를 방문하고/ 쇼트트랙은 미투에도 얼어붙지 않으며/ 구제역口蹄疫은 구제역救濟役으로만 쓰인다든지/ 한국당이 노동운동을 하고/ 민주당이 태극기부대가 된다면,// 벽을 뚫어 마음 속 별들 모조리 구출할 수 있다면/ 밤 새워 망치질 하고/ 새벽녘 뜨는 별 다시 고쳐 박음질 하고//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딱새: 승려들이 짝을 지어 서로 묻고 답하는 선문답
** 수보리: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우친 부처님 10제자 가운데 한사람

원점 / 강시일
기다림 없는 서경주역/ 연통도 없이 지각한 기적소리/ 공중 아무곳으로 던져지는 대합실 안내방송 따라/ 어디쯤에서 허우적 귀가하는 허수아비군상들의 발소리/ 플렛폼이 시끄럽다/ 바람길 따라 떠다니는 양떼구름처럼/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뒤섞여 제각각 퍼즐을 맞춘다// 석양은 허리를 구부리고 서둘러/ 하루를 거두고,/ 새처럼 가볍다가/ 물새처럼 무겁다가/ 삐걱이는 오늘의 관절 어디쯤/ 장미 울타리 어두워지는/ 모두가 돌아오는 그곳/ 향기 헛헛한 허기, 공전하는// 어제처럼 더 오래 전의 목소리로 무궁화가 피었다 진다//

바람 부는 날 / 강시일
낙엽이 바람을 타고 있다/ 애당초/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젖줄로 연명하다/ 가정이라는 담을 둘렀다// 위태롭게 담장 위를 걷다/ 사랑타령에 삶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직장 가시에 목구멍이 아프다// 탈출하고픈 욕망이/ 나날이 팥죽을 끓인다/ 생이란 오랏줄에/ 목이 조이고 있다// 대나무숲이 강남스타일 춤을 춘다/ 오늘, 바람이고 싶다//

북부해수욕장 야경 / 강시일
하루치 태양이 몰락하면/ 검은 익명으로 위장한 바다 속/ 포스코 조명등 뒤집어진 세상이 춤을 춘다/ 더위에 지친 청춘들이/ 날치처럼 바다로 뛰어들고/ 혈기찬 별들도 바다에 발을 담근다/ 소리들이 무리지어 파도를 일으키고/ 한계령 조개구이 모닥불에 탁탁 침을 뱉으면/ 은빛 술잔 사랑노래 부르며/ 연거푸 고꾸라진다/ 결국 묵빛 아스팔트가 일어서고/ 달을 매단 가로등조차 휘청거리면/ 검은 바다 중심 잃고 울컥 서러움 토한다/ 수평선 빨갛게 찢어질 무렵/ 파도는 가까스로 집을 찾는다//

이별 공식 / 강시일
그 뜨겁던 여름이 가고/ 오색 낙엽 손가락 벌려 작별 고하네/ 당신의 혀에서 비롯된/ 내 귀에 달디 단 내음을 전했던/ 기억에서 색 바래가는 언어들/ 하얀 눈 속에 포장된 채/ 어둔 굴 안에서 동면하고 있건만// 봄이 오면/ 다시 황토색으로 일어나/ 부끄럽게 매화나 피워 올리려나/ 더 오래 기다렸다가/ 노랑 파랑으로 채색한 가면 쓰고/ 탈춤 추는 바람개비 되려나/ 한 울타리에서/ 단맛으로 영글던 포도송이/ 다른 날/ 또 다른 곳에서 각자 꽃 피우는 것//

시간의 흔적 / 강시일
어제처럼/ 파도의 등을 타고 휘파람 소리로 다가와/ 댓잎 어깨를 밟고/ 나이테 같은 여운 남긴 채/ 지나간 시간처럼 바람이 떠나고// 콩나물시루 속 걸러짐 없이 물이 흘러도/ 어깨너머 웃자라듯/ 시간은 어디로 간지 모르는데/ 낙엽이 지고/ 주름살은 세월의 그림자를 조각한다// 가끔 침전된 욕망이 발효해 영상화되면/ 시간의 흔적이 역류하고/ 별 박힌 검은 시간 윤회를 꿈꾸면서/ 어머님 신경통같이/ 기억 마디마다 봉침을 맞는다//

지중해의 밤 / 강시일
오천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출구 모르는 수전노의 땀으로 뭉친/ 검은 유혹/ 흑인여자의 기름진 피부로 빛난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에서 비롯된/ 메소포타미아의 민들레 홀씨/ 우랄 알타이산맥을 넘어/ 이스탄불 비단길에 꽃 피우려나/ 쉼 없이 일렁이는 춤// 긴 레이스를 즐기며/ 아직 터지지 않은 여명을 기다리다/ 기어이 혼자 터뜨려보는/ 불꽃/ 깊은 밤 어둠을 태운다//

기다림 / 강시일
기다림은 언제나 미지의 세상에서/ 조금씩 불 밝혀보는 일이다/ 촛불조차 일렁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불안한 조짐의 바람이 일다가/ 광란을 집어삼키는 파도가 일고/ 다시 고요하게 평화가 오면/ 미닫이를 밀고 햇빛을 맞는 것인데/ 그때 열차가 플렛폼을 밟는다/ 거친 숨소리는/ 그도 바쁘게 달려왔다는 증거/ 땀내 나는 시간을 소화하는 몸짓들이/ 정적인 극한 인내의 기다림과/ 궁합을 맞춘다/ 혼자 기다린 것만은 아니라는/ 저 직설법의 설명을 듣는/ 강물 위로 직립의 시계가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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