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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채용 여사 잔칫날 / 윤영

부흐고비 2021. 12. 17. 08:39

청송 주산지 아래 펜션으로 6남매가 모여들었다. 개골창 나무는 살갗이 터져 잎과 꽃을 피워냈지만, 느지막이 내린 사월 봄눈이 허옇다. 그리 잘 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자식에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다 모이니 당신 표정 안온하다. 뜨신 방에 등 맞대고 ‘깔깔 흐흐’ 수런수런 밤 길다. 창으로 오리나무 어리고 이슥도록 호랑지빠귀 울음 그칠 줄 모르는 저녁.

아침이 되자 광산김씨 김채용 여사의 팔순잔치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수륙진미를 벌여 놓은 진연 상은 아니지만, 바글바글 끓는 미역국에 당신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다리 휘어진다. 꽃바구니, 돈바구니가 오르고 손자 손녀들이 내미는 선물 증정식에 괜스레 허리에 두른 복대를 풀었다 붙였다 하는 채용 여사. 명색이 글쟁이랍시고 둘째 딸인 내가 편지를 읽는 시간, 두어 줄 읽어 내려가다 먼저 가신 아버지 생각, 고달팠던 당신의 일생에 댓바람부터 눈자위 자꾸 붉어진다. 이내 밥상 앞에 말똥말똥한 식구들 죄다 우는 풍경이라니.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눈이…”

예고 없던 유치원 막둥이 손자 노래에 주왕산이 들썩인다. 일순 삼라만상도, 생로병사도 밥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 우린 그렇게 울다 웃다. 기념품으로 주문한 색색깔의 우산을 펼치며 마지막으로 합창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저희들의 우산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우산대에 적힌 '김채용 여사 팔순 기념‘ 문구 찬찬히 살피다가 한마디 하신다.

“살아생전 내 이름 석 자 박힌 일 처음 보는구나.”

여전히 황새냉이꽃 같은 눈은 풀풀 날리고,

윤영 수필가 2005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문학상(2019), 대구문인협회 작품상(2017), 제1회 달구벌수필문학상 수상.

            저서 『사소한 슬픔』, 『아주 오래 천천히』.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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