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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보통 사람들이 좋다. / 이병식

부흐고비 2021. 12. 17. 08:20

날씨가 절기 값을 한다. 소한, 대한 추위에 동네를 흐르는 매호천이 꽁꽁 얼어붙었다. 조그만 빙판이 생겨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얼음지치기한다. 젊은 엄마들도 아이들 겨울 체험이라도 시켜주겠다는 듯 모여들어 와글거린다. 나도 가던 길 뒤로하고 슬쩍 얼음판으로 끼어들어 애들처럼 미끄럼을 타본다. 그 옛날 스케이팅을 즐기던 생각이 난다.

어느 겨울날 친구가 형 것이라면서 낡은 스케이트를 들고 나와 타러 가자고 했다. 바로 몇 명이 어울려 버스를 타고 시 외곽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스케이트를 탈 만한 논이 있어 초보자인 우리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스케이트를 가지고 온 친구도 스케이트 타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배워주고 배우는 게 불가능했다. 거기서 누가 장난스런 아이디어를 냈다. 교대로 논 한가운데로 들어가 거기서 스케이트를 신고 밖으로 나오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스케이트를 타기는커녕 그냥 걷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엉거주춤 섰다. 가는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스케이트 날로 얼음지치며 나온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대개는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것은 그냥 놀이였다. 돌아가며 한 번씩 스케이트를 신어보았는데 하루해가 저물었다. 나는 그때 재미를 느껴 친구와 몇 번을 더 갔다. 다음 해 겨울방학을 시작할 때 스케이트를 샀고 해마다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러 다니게 되었다.

스케이트를 탈 곳은 공설 운동장이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고 잘 타는 친구들을 만나니 배우기도 수월했다. 유료였지만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입장료는 저렴했다. 넓은 운동장에 가두리를 만들어 물을 채워 자연적으로 얼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날씨가 추운 날에는 얼음 질이 좋아 스케이트가 미끄러지듯이 잘 나가고, 날씨가 따뜻한 날은 얼음이 녹아 정오가 되면 전부 내보내기도 했다.

육상경기장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은 그 구조가 육상경기장과 같았다. 외곽으로는 트랙이 있어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 타는 곳이고, 트랙 안쪽의 넓은 공터는 초보자들이 연습하는 곳이다. 트랙에서 잘 타는 사람들이 돌기 시작하면 초보자들은 제 능력으로는 안쪽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다. 그래서 트랙을 도는 사람이 없을 때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 가고는 했다.

안쪽에서 뒤뚱거리며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트랙엔 스케이터들의 흐름이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보인다. 안에서 연습하는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트랙을 도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언제 저곳에 합류할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리며 연습에 매진한다. 며칠 연습하니 잘 타는 친구가 트랙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깃털 자란 새끼 새가 어미 새의 이끌림에 첫 비행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친구가 앞장서서 천천히 달리면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던 트랙 돌기를 성공하는 날이었다. 마치 트랙 들어서기가 궤도에 진입하는 우주선이라도 되는 양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토록 트랙에 들어가고 싶어 했건만 막상 들어가니 타는 게 힘들었다. 트랙에선 남들 따라 쉼 없이 돌아야만 했다. 멈추면 뒷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오로지 남들 따라 트랙을 질주하여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스케이트를 타고 뽐내며 트랙을 돌던 시절보다 트랙 안에서 연습하던 때가 더 즐거운 기억으로 되새김 된다. 잘 탈 줄 모르기에 달리다가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붙들고 넘어져 뒹굴었다. 여학생을 붙들고 넘어질 때는 비명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서로 잘잘못을 다투지 않았다. 서로 미소로 미안하단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조금 숙달이 되면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뒤로 붙어서 기차놀이도 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전부 친구요 이웃이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마치 살아가는 게 트랙을 들어서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마치 궤도 진입에 성공한 우주선만이 지구를 회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처럼. 하지만 세상은 궤도에 들어서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궤도에 들어선 그들의 모습이 화려해 보이지만, 세상은 궤도 밖의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 밤늦도록 가게 문을 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자영업을 하는 사람, 남들 자는 시간에 일어나 폐지를 줍는 노인네도 작은 일상이다. 각자 제 곳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보통 사람들, 이들은 시계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톱니바퀴이다. 나 역시도 궤도에 들어서지 못하고 평범한 공간 속에서 와글거리는 군중이다.

나는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얼음 터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스케이트를 제법 탄다고 트랙을 돌던 때보다 스케이트 배운다고 바글거리던 때가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빙판에서 젊은 엄마들과 어린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병식 수필가 《대구문학》 등단. 매일시니어문학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백교문학상,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수상.

                   대구문인협회,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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