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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을에 핀 또 다른 봄 / 문민순

부흐고비 2021. 12. 18. 08:49

잎이 꽃으로 피는 계절이다. 산과 들에 눈부시도록 황홀한 붉고 노란 꽃이 피어 또 다른 봄을 맞고 있다. 나무도 풀도 가로수에도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단풍꽃을 피워놓으셨는지, 신비로운 자연의 변화를 보니 새삼 성스런 마음이 일어난다. 뿐이랴,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마음도 평화롭고 파티복을 갈아입듯 알록달록 단풍으로 치장한 나무들의 춤사위를 보면 화려한 공연을 보는 듯 가슴이 설렌다.

추석 연휴, 아이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고 나니 집 안 가득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비로소 내 본연의 삶이 되돌아온 것 같다. 혼자 살아온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홀로 있으니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해진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어우렁더우렁 복닥거리고 사는 것도 이제는 점점 낯설어진다.

나들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선다. 야외 선을 타고 가평 아침고요수고 원으로 향한다. 차창 밖 들판은 풍성한 수확을 예고하듯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룬다. 시원하게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해 에 찌든 눈이 밝아진 느낌이다.

수목원은 언제 보아도 정갈하다. 간밤에 우렁각시가 다녀간 듯 입구에서부터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바람과 햇살의 궁핍으로 목타던 감성이 축축해진다. 숲에서 뿜어내는 자연의 질펀한 향유, 알록달록 물감을 칠해주는 가을 햇살, 살갗을 간질이며 달아나는 바람, 알맞게 젖어드는 습도, 이 모든 것에서 살아 있음의 희열이 돋는다.

국화와 야생화가 피어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국화는 모두가 벌거벗으려 하는데도 도도하게 선명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봄내고 있다. 오두막정원, 테마정원, 달빛정원, 서화원, 시가 있는 산책로 둘레를 자박자박 걷는다. 코스모스, 꽃무릇, 핑크뮬리, 천일 홍, 구절초 등이 피어 있는 것을 보니 산중의 수목원에도 완연한 가을이 찾아든 것 같다. 활엽수는 몸의 속살까지 드러내고 부끄러워하는 듯 보인다. 하늘 향해 쭉 뻗은 나무들 역시 양지바른 쪽에는 벌써 붉고 누런 갈색 옷을 갈아입고 화려한 가을 파티를 벌이고. 이자경李子卿의 추충부秋蟲賦에 이르기를 “한 잎이 떨어지니 천지는 가을이다葉落知天下秋.”라는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산속이 아닌데도 도심과는 기온 차이가 크게 다른 듯하다. 시가 있는 산책로에 시인 류시화 님의 작품 한 점이 걸려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는 시다. 제목만 봐도 감성이 밀려들고 가슴 한편이 저려온다. 그 외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보며 계절도 읽고, 인생도 읽고, 감성도 읽는다. 나도 시인이 된 듯 가을시를 조용히 읊조려본다. 가을이란 계절만으로도 가슴에 묵은 상처가 되살아나고 허무와 외로움이 묻어난다. 잊고 지낸 사람이 생각나기도 하고,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도 가슴 절절하고 한 잎 낙엽이 내려앉는 소리에도 귀가 열린다. 그러기에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어 사색하고 싶은 것인지 도 모른다.

어느 계절이든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듯 가을의 정원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 아니런가. 몇십 년을 살면서도 매번 되돌아보면 삶이 낙엽처럼 한순간처럼 느껴진다. 구름처럼 나뭇잎처럼 화려한 삶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는 걸 보면 인생무상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뜨겁고 푸른 여름이 젊은이라면 가을은 해탈한 노년의 계절이다. 내 인생도 무르익어가는 가을 앞에 서 있다. 버려서 비어있는 줄만 알았는데 아직도 가슴속 어딘가에 욕망의 바람이 스멀스멀 너울댄다. 여생을 문학으로 아름답게 물들고 싶은 욕심이 뒤늦은 이즈음에도 불쑥불쑥 치솟곤 한다. 수많은 문인이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도 사랑을 그려내어 희망을 준 것처럼 나도 좋은 글을 써서 누군가의 감성을 건드리고 싶어진다.

사람은 떠나도 이름은 남아있듯 좋은 글을 오래오래 썼으면 좋겠다. 식지 않은 열기를 언제까지 뿜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글 쓰는 사람으로 행복한 충만감을, 희망찬 봄을 기다려보리라. 비우고 버리므로 가벼워진다는 진리를, 가을 아닌 또 다른 봄에서 깨닫는다.



문민순 수필가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에세이강남 회원.

                  저서 : 『향기로 머문 자리』 공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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