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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낙타의 눈물 / 허상문

부흐고비 2021. 12. 18. 08:52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슬픈 시를 함께 읽을 때,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우리를 그렇게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세월호 사건'이 망각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볼 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눈물이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눈물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처럼 쉽게 소멸한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진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눈물에 의해서이다.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몸속에서 피가 생동하고 있고 이 세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눈물이 없다면 어찌 봄날에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바라보고 감동할 수 있으며, 겨울나무에 매달린 채 떨고 있는 마지막 잎새의 시린 마음을 아파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여태 가장 비통하게 눈물을 흘린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이다. 싸늘한 시신이 된 어머니는 땅 속에 묻히고 있었다. 젖먹이 때부터 나의 우주였던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과 따뜻한 젖가슴의 감촉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몸이 어둡고 차가운 땅속에 묻혀 썩어갈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나는 언젠가 다녀왔던 사막과 그 위를 걸어가던 낙타를 생각했다.

사막은 세상의 모든 풍파를 짊어지고도 그 자리에 흐트러짐 없이 서있었다. 그러면서도 낙타와 대상(隊商)이 지나갈 때면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사막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그 어머니가 이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사람들이 하산했을 때도 나는 어머니 곁에서 계속 피 같은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어머니가 사막도시 누란의 오드리 공주처럼 미라가 되어 남는다면 언제든 달려가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련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기나긴 여행을 할 때, 바이칼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 역에서 나는 또 한 번 기막히게 운 적이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나둘 역사(驛舍)를 떠나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적 끊긴 거리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갑자기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낙타의 육봉 같이 흔들대는 배낭을 등에 지고 걸으며, '아! 지금 이 세상에 나는 완벽하게 혼자 남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깜깜한 우주 저 멀리에서 하나의 유성이 되어 떠돌고 있다는 비감한 심정이 나를 눈물의 바다로 몰아넣었다.

눈물에 얽힌 사연이 이에 그칠 리 없지만, 정말 이유 없이 애절한 눈물을 흘린 것은 실크로드를 여행할 때 깊은 속눈썹을 가진 어느 낙타와의 만남에서였다. 아마도 그는 최초로 실크로드를 횡단한 장건을 실어 주었거나 혜초 스님을 태워준 낙타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낙타의 운명은 슬프다. 낙타가 가는 길은 언제나 사막길이다. 걷고 걸어도 넓고 아득한 사막의 한 귀퉁이를 지날 뿐이다. 제 등 위의 육봉을 업보처럼 짊어진 채 터벅터벅 걸어간다. 낙타는 아무리 급해도 인간처럼 바삐 달릴 수 없다. 그의 갈 길은 멀고 아득하다. 달려간다면 열사의 사막을 단 하루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걷고 또 걷는 것만이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는 길이고 자신의 업보를 씻어내는 길이다. 낙타에겐들 어찌 눈물이 없겠는가. 그러나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흘리는 낙타의 한줄기 눈물은 긴 속눈썹 속에 금세 감춰져버린다.

사막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는 사막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다. 사막은 육신을 벗고 영혼만 떠나는 길이다. 여백의 공간에서 몸을 비우고 또 비워서 영혼은 더 충만해진다. 그곳에서는 좋은 집, 좋은 차를 위한 경쟁도 없고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헛된 욕망도 번뇌도 없다. 사막은 모든 것을 받아주는 거대한 집이다.

모래 폭풍이 불어오면 몸을 사리고 기다리다가 바람이 잠잠해지면 다시 어디론가 제 갈 길을 향해 떠나야 한다. 사막에서는 하늘은 내 집의 천장이고 모래 구릉은 내 세계다. 조금의 일용할 양식과 머물 집에 만족할 수 있다면 인생이 이렇게 힘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낙타는 텅 빈 사막을 무심히 바라본다.

사막에서는 흑백 무성영화처럼 아무런 말도 소리도 없다. 사막은 밤과 같은 적멸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가 없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인간들의 위선과 덧없는 노동의 시간과도 결별하고, 어떠한 사유도 다다를 수 없는 경건한 현현의 시간만이 남는다. 사막은 존재자들의 가치와 생존을 위한 온갖 몸부림으로 빼곡한 낮의 시간을 무위케 한다. 사막에서 어제는 사라져간 과거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내일의 끝은 또 어디쯤일지 알 수 없다. 억겁의 세월을 버티어온 저 모래더미들은 퇴적한 용암처럼 그냥 가득 쌓여 있다.

가도 가도 사막뿐인 아득한 공간과 시간 속을 걷는 낙타에 비하면 나의 삶은 얼마나 호사로운가. 날마다 따뜻한 세끼 밥을 먹으며 친구들과 요란한 담소를 나누고 손 안에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항상 불만과 고뇌에 차 있다. 인간은 일생동안 부와 명예와 권력을 쫒아 아웅다웅 살아가지만, 낙타는 달과 별과 바람만 생각하며 살아간다.

험난한 사막 길에서 낙타가 운 좋게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은 낙타풀 뿐이다. 낙타풀은 가시투성이어서 한 움큼 씹으면 입안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 인간들이 말하는 '눈물 젖은 빵' 운운하는 것은 낙타에게는 정말 가당찮은 이야기다. 낙타는 '피에 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낙타의 눈물을 생각하면 내 눈물은 얼마나 값싸고 부끄러운 것인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낙타의 방울소리가 나의 부끄러움을 더욱 크게 진동시킨다.

해가 진다. 사막에서 지는 해는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득한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오렌지 빛 광휘를 발하며 서서히 사라져 가는 빛의 향연은 더욱 적요한 아름다움이다. 저 찬란하면서도 슬픈 노을을 바라보면서 나의 초로(初老)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눈물지을 것인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한탄하고 절망하면서,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눈물지을 것인가.

노을 지는 사막에서 외로이 걸어가는 저 낙타를 보라.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적막하게 텅 빈 공간과 처절한 고독 속을 관통하면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낙타는 혼자서 안으로 안으로 눈물을 삼킨다. 내 눈물이 아무리 한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어찌 낙타의 눈물에 비할까. 저 낙타도 언젠가는 사막 어딘가에서 뼈만 남기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삶에서 뼈는 무엇이고 살은 무엇인가? 나에게 묻지 마라. 혼자 눈물을 삼키며 오늘도 뚜벅 뚜벅 사막을 걷고 있는 저 낙타에게 물어보라.



허상문 문학평론가 영남대명예교수. 한국수필 편집위원. 신곡문학 대상, 한국에세이 평론상 수상. 문학평론집 『오르페우스의 시학』, 『폐허 속의 비평』. 수필집 『낙타의 눈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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