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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시인
서울 출생으로 현재 미국 뉴욕에 활동 한다.
2000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되었고, 200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밑줄』(2007), 『토네이도』(2020)가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대상,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미주시인문학상, 미주문학상을 받았다.
국제계관시인협회 U.P.L.I, 미국시협회(P.S.A) 회원. 한국문인협회, 미동부한국문인협회, 재미시인협회 회원. 《시와뉴욕》 편집위원 역임, 뉴욕예술인협회 회장.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등 연재. 칼럼니스트로 활동
밑줄 / 신지혜
바지랑대 높이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 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금강경 이야기 / 신지혜
금강경 본다// 우주 한 구멍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 내 발이 무량대수요 내 얼굴이 천 개요/ 내 손이 천 다발이란 거./ 휘저어 닿으면 우주 속살까지 다 만지고 주무르고/ 우주 심장에 가 닿는다는 거. 그러니까 내가// 천 마디 천 생각도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더러운 거, 무서운 거, 아름다운 거, 괴로운 거,/ 사랑스러운 거, 증오스러운 거,/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천지 우레 치는 장엄한 큰 시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미미한 작은 시도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저 풀도 저 물고기도 나도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저 보이지 않는, 우주 한 구멍이 내가/ 오고 갈 구멍이란 거.// 금강경 큰 구멍을 나 통과한다.//
죽은 女歌手의 노래 / 신지혜
이제 그 여가수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득한 그곳에서 몸은 버리고/ 목소리만 젖어왔습니다 얇게 압축된/ 가벼운 디스크 한 장 속에 눌린 그녀의 목소리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魔力이 아직 살아있어,/ 무대랑, 마이크, 물소리 같은 조명과 음향/ 유적처럼 그대로 보존돼 있는 그 신전,/ 지금, 어디쯤 존재하는지 나는/ 사뭇 궁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난 너만을, 너만을 원하네/ 아직도 너에게 넘치는 사랑 부어주려 하네 워워워――/ 노래는 시간의 허방처럼 깊고 흑/ 단의 긴 생머리 찰랑 찰랑이던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윤기로 넘실 넘실거렸습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듣기 위해 내 안으로 귀를 말아 넣습니다/ 가는 혈관을 따라 번져가는 힘센 사랑이/ 내 휴식의 텅 빈 활선을 따라 번져갑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번 입력된 그녀의 곡조는 지워지지 않은 채/ 내 구석구석을 돌아 문득문득/ 찢겨진 내 생각 밖으로 흘러나와 나를 물들이고/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녀의 회전을/ 좀처럼 멈출 수 없습니다//
토네이도 / 신지혜
대륙을 강타한 토네이도 너는 처음에 무화과나무 밑에서 부스스, 가느다란 실눈을 떴지 고요해서 숨이 막혀요 너는 이따금씩 울부짖었지 너는 마침내 홀로이 길을 떠났지 너의 가느다란 휘파람으로 들꽃의 울음 잠재워주곤 했지 나 자신이 누구야, 대체 누구란 말이야, 너는 외로움 씨눈 하나 빚었지 너는 천천히 스텝을 밟게 되었지 누군가 너를 상승시켰지 점점 격렬해졌지 벌판 들어 올리고 내려놓으며 바다 철버덕 내리치며 빙글빙글 도는 동안, 휘말리는 대지, 바다, 허공이 나에게 자석처럼 달라붙었지 네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지 루핑들이, 입간판들이, 너의 손을 잡고 달려주었지// 너도 처음엔 아주 미세한 숨결이었어/ 무화과나무 그늘 밑에서 겨우 부스스 눈을 떴어/ 처음부터 토네이도로 태어나진 않았어// 토네이도는 캔사스 주 들판을 송두리째 뒤엎고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할딱이는 가느다란 숨결은 나뭇잎 한 장 뒤집을 힘도 없이 어느 오후 공기의 대열 속에 틀어박혀 고요한 공기 눈알이 되었다 마치 한 사람의 격렬한 인생처럼, 치열하게 광란하던 한 시절만이 벌판의 전설이 되었다//
물방울 휴거 / 신지혜
허드슨 강줄기가 대서양 향하여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함께 가는 길은 즐겁다/ 천 갈래 만 갈래 석양에 찢겨지는 물방울의 각자 염원은/ 어서 휴거 되어 구름이 되는 것/ 한때 키 작은 들풀의 마른 몸 구석구석 씻어주었던 물방울이/ 한때 하역장 쓰레기더미 속에서 흘러나온 냄새나던 물방울이/ 한때 고요를 사랑한 시다나무 뿌리의 자양분이었던 물방울이/ 여기선 모두 평평하였으며 돌아봐도 똑같은 큰 얼굴이었으며/ 도대체 어디서 누굴 적셔주던 것들이었는지 모를 어깨들과/ 나란히 큰 힘이 되었다// 간곡한 기도가 통해서 구름으로 휴거되지 않아도 좋았다/ 강줄기는 함께 대서양을 창조했으며 어디서 온 줄기들인지/ 서로 함구했다/ 무거운 자아를 홀로 들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변신은 늘 찰나였으므로/ 구름이 되거나 얼음이 되거나/ 또다시 물이 되고자 떠나기도 했다// 대서양은 모든 물방울을 넉넉한 품안에 한꺼번에 끌어안고/ “괜찮아, 잘 될 거야, 넌 아름다운 구름이 될 거야”/ 늘 토닥이며 노래했다//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롱 아일랜드 해안에서 / 신지혜
잠언 같은 저녁놀이 피었다진다 꽃이파리처럼 내 사유 몇 잎이 뚝뚝, 떨어진다 바다가 쏘아올린 둥근 달, 그 질긴 달빛이 나를 포승 지어 우주 어디로 끌고 간다 지금 이 밤을 통째로 압송중이다// 나는, 천천히 인적 없는 달빛 해안을 끼고 걷는다 내 속은 텅 비어있다 내가 유리잔이다 노오란 달빛이 찰랑거린다 흰 파도와 다투어 잔을 부딪힌다 몇 천년을 두터이 껴입고 반가사유하는 희고 단단한 저 돌들처럼, 내 안에 시퍼런 불이 켜 진다 쓸쓸함의 미세한 알갱이들 텅텅 마알간 공명이 울린다// 잠시, 물거울에 날 비춰보고 돌아섰는데 금세 나를 잊어버린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 물음표같은 발자국들이 듬성듬성 모래해안을 끌고 바다로 들어간다 나는 허리 굽혀 심해를 가만 들여다본다 세상이 그 안에 들어있다 우리는, 마치 서로 가 배경이듯, 필연에 의해 마주친, 산란한 눈빛이다 서로가 그리워 흐려진다// 쓸쓸한 행성처럼, 내가 허공 중심에 걸린다 푸른 한숨을 뿜어낸다 예서제서, 숨은 존재들이 앞다퉈 사유를 켠다 막막한 우주의 관제탑에 오늘, 내가 비로소 행성의 이름으로 등록된다 나는 반짝반짝 쇠줄보다 더 강한 사유의 뿌리를 저 우주 물밑에 늘어뜨린다 가끔씩, 찌가 들썩거린다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나무 한 채 / 신지혜
잎 트일 무렵, 나무의 뿌리는 골몰한다/ 집을 짓듯이 어디로 창을 낼 것인가,/ 내면 청사진 펼쳐놓고/ 꼼꼼히 각도 재고 초크 그으며 줄자 들이댄다 드디어/ 나무 한 채도 온 피부 열어 큰 숨 몰아쉰다/ 온몸 켜지자 나뭇잎이/ 와짝 자라나고/ 한 그루 의연히 제 터 잡는다// 얼핏 제멋대로 가지와 이파리 매다는 것 같아도/ 어떤 가지는 동쪽으로 어떤 잎은 서쪽으로/ 가지와 잎 타고난 제 품성대로/ 적합한 생존원리 따라 자리매김된다 그리하여/ 한 채 반듯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한 뿌리에 난 식구도 어떤 가지는 장남으로,/ 어떤 가지는 막내로,/ 마음 여려 세상 두려운 내성적 가지는 자꾸 뒤쪽으로 가 숨고/ 활달한 외향적 가지는 햇빛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기도 한다// 나뭇가지들 틈새 없이 빼곡하게 한 구색 맞추기 어디 쉬운가/ 뿌리는 우듬지 이파리까지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어느 한 곳,/ 막히거나 터져선 결코 삶의 희락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공 속 그렇게 올망졸망 숨 트인 이것들/ 제각기 햇빛과 바람 사귀고 서로를 독해할 때/ 뿌리는 땅속 더 깊숙이 발 뻗어가며 사투를 건다 그야말로/ 안간힘으로 흙의 힘줄 잡아당기며/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한다// 이윽고 우람한 나무 한 채/ 지구 등짝 위에 업혀 마치 한 몸인 듯 따라 돌고 있다//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 신지혜
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저편 우주 끝에 가 닿는 결무늬, 다시 밀려와 내 몸속을 통과했네 내가 휘적휘적 길 걸어갈 때, 몇겹의 공기가 푸드득 찢겨져 너풀거렸네 이따금씩, 휘둥그레진 그 눈알 속에 수천의 내 얼굴 촘촘히 박혀있었네 문득문득 저편, 파스텔의 전생들이 흘깃흘깃, 나를 바라다보네// 타박타박 걷다가 뒤돌아보면 공기 소용돌이가 나를 따라오네 어쩌다 올이 풀린 공기알이나 찌그러진 공기 한 알도 누군가 재빨리 수선하네 노오란 햇살의 실밥들이 자욱히 흩날리네 길 앞, 저쪽이 접혔다 펴질 때마다 우주건반이 루루 경쾌하네 나는 거리의 악사처럼 길을 가슴에 껴안고 연주하네//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 / 신지혜
내 생일이라고, 꽃다발 선물하겠다고 그가 말했다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 나는 정색하며 손사래 쳤다 나로 인해 꽃 꺾지 말라고, 햇빛 한 모금 삼키려고 안간힘 발돋움하며 치열하게 산 것이 꽃의 생활이니 역시 힘들었을 거라고, 내가 꽃 보러 여기 왔듯이 나를 보러 한 철 찾아온 꽃들에게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고, 꽃과 내가 다 같이 이 지구에 와 어둠 속, 삶의 눈물겨운 불 한 등 켜고 살았다고, 나도 꽃의 탄신일에 나를 꺾어 바치지 못했노라고, 누가 누구를 위해 꺾이고 잘린다는 것 꽃이 한 번도 돼본 적 없는 이는 모른다고, 꽃의 어미나 내 어미나 같아서 우린 결국 한배에서 나왔다고//
파란 대문 / 신지혜
그때, 철판같이 견고한 어둠 한 장이 내렸다/ 엄마가 내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누구든지 자기 안에 파란 대문이 있단다 네 안을 들여다보렴./ 나는 내 안에 얼굴을 파묻고 날 들여다본다/ 가만히 바라보니, 파란 대문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흔들어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 문이 잠겨있어요 열쇠가 없어요/ 걱정말아라 네 마음을 그 열쇠구멍에 꽂고 힘껏 비틀어보렴.// 그러나 나는 너무 녹슬었어요 엄마, 온통 붉은 꽃 투성인걸요/ 아니란다 이 세상에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거란다/ 보거라 저 공중에 네 숨결마저도 아름다운 무늬꽃을 피우고 있지/ 과연 바라보니, 내 숨결의 물빛 붓꽃이 투명한 공기알을 잔잔히 흔들고 있었다// 나는 굳게 닫힌 파란 대문의 열쇠구멍에 나의/ 마음을 꽂고는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저편/ 시간의 태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 마음의/ 경계선이 모두 지워져버렸고 내 생각의 안팎이 무너져버렸다/ 촘촘한 두려움의 경계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파란 대문은 내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 / 신지혜
좐슨 씨가 카메라를 들고 서서/ 나와 그의 거리를 팽팽히 당긴다/ 잠시, 적막이 그대로 묵직하게 끼여있다/ 치-즈/ 그리고 플래쉬가 터졌다/ 공간이 터지는 것을, 깨지는 것을,/ 내가 적나라하게 파열했다/ 순간이 이렇게도 유리처럼/ 깨질 수가 있다니./ 그때 산산조각 난 유리의 날개를 보았다/ 날았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얇은 종이속에/ 온전히 터짐으로써,/ 비로소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되었다//
밥 / 신지혜
밥은 먹었느냐/ 사람에게 이처럼 따뜻한 말 또 있는가// 밥에도 온기와 냉기가 있다는 것/ 밥은 먹었느냐 라는 말에 얼음장 풀리는 소리/ 팍팍한 영혼에 끓어 넘치는 흰 밥물처럼 퍼지는 훈기// 배곯아 굶어죽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느 죽음보다도 가장 서럽고 처절하다는 거/ 나 어릴 때 밥 굶어 하늘 노랗게 가물거릴 때 알았다/ 오만한 권력과 완장 같은 명예도 아니고 오직/ 누군가의 단 한 끼 따뜻한 밥 같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거//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것은/ 인두겁 쓴 강자가 약자의 밥그릇 무참히 빼앗아 먹는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먹는 것은 둘 다 옳다/ 목숨들에게 가장 신성한 의식인/ 밥 먹기에 대해 누가 이렇다 할 운을 뗄 것인가// 공원 한 귀퉁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이에게도/ 연못가 거닐다 생각난 듯 솟구치는 청둥오리에게도/ 문득 새까만 눈 마주친 다람쥐에게도 나는 묻는다// 오늘/ 밥들은 먹었느냐//
공기 한 줌 / 신지혜
새벽 산책길,/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때마다 공기 한 줌이 빨려들었다 빨려나간다/ 삼천대천 우주가 내 코끝으로 들락날락한다// 나를 빠져나간 공기가 다시 네 속으로 빨려든다/ 너를 빠져나온 공기가 다시 내 속으로 빨려든다// 내가 빨아들인 이 공기도/ 지금은 아득히 사라진 古代, 그 어느 死者의/ 내부를 탱탱이 살찌웠던 그 물빛/ 숨결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풀무를 돌리며/ 차가운 눈물을 따뜻이 데워냈을 것이다// 저 길가에, 푸른 화두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는/ 상수리나무들과, 희미한 종소리로/ 새벽을 틔워내던 초롱꽃들, 위태로운/ 허공절벽을 시시때때로 박차 오르던 이름 모를 새들과/ 나 한 숨결 고루 나누면서도/ 가없는 수평의 겸허를 깨닫지 못했다// 새벽 산책 길,/ 불현듯 내 코끝이 찡해진다//
빈의자다섯개 / 신지혜
그식탁옆에빈의자여섯개가있었다아무도앉아있지않았다/ 아마나를초대한것은그들이었을지몰라나는다가가한의자에/ 조용히앉아커피를마신다아무도말하지않았다다섯개의자에/ 앉은그들도보이지않는,커피를마신다무언의얇은膜과膜사이/ 엔오직직감만이팽팽이당겨졌다빈의자다섯개앞에다섯개의/ 커피잔이보이지않는다참,반가웠어요내가일어섰을때그들도/ 따라일어섰다공기다섯무더기가일제히뒤틀리며소용돌이쳤/ 다내귓가에소음이들렸다그때였던가,잠시투명한공기막사이/ 사이,단단한적막의얼굴들펄러덕,스쳤다빈의자다섯개//
물의 얼굴 / 신지혜
물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목구비를 만지려고 했더니/ 그만 사라졌어요/ 아니, 순식간에 날아갔다고/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소리 들었다고// 세면대에 수돗물을 틀어놓거나/ 샤워기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 제멋대로 자유자재한 모습의 존재가/ 다른 별에는 없는데/ 유독 지구표면에만 젤리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분말처럼 부서지지 않고/ 혼자인 듯 여럿이/ 부드러운 힘으로 사람을 키우고/ 들꽃을 빚고// 매초, 삶과 죽음의 궤적을 그리며/ 몸 안 심산유곡 휘돌아 치는 물소리,/ 하지만 물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산목숨 물주머니 아닌 것 하나도 없어 무릇/ 인연 스칠 때마다 서늘한 숨꽃 툭, 틔워준다 한다/ 단 한번도 그 변화무쌍한 천의 얼굴,/ 바로 본 적 없으나 그 품이 넉넉하다 한다//
거주 증명서 / 신지혜
지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침묵으로부터 왔다. 아무리/ 모질게 아파도 그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찬 겨울 하늘,/ 춤추며 혼자 발을 내리는 눈송이./ 시린 햇빛에 등 기댄,/ 우두커니 풀밭에 앉아있는 홈리스 고양이./ 철조망아래 그림자 떨구고 바알간 발가락으로/ 잔뜩 철조망 움켜쥔 괭이 갈매기./ 내게 안부 묻고 넓은 등 보인 칸나 꽃들./ 그들은 모두, 떠나갈 때/ 자신의 그림자 말끔히 거두어 간다.// 누가 내 존재를 갑자기 불심검문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내 그림자 한 장 꺼내 제시할 것이다./ '이 지구별 거주 증명서 한 장'// 나는 시시때때로 쓰러지는 내 그림자 일으켜 세우며/ 너덜너덜 헤진 그림자 한 벌 다시 꿰매어 입고/ 마지막 안간힘 쓰기도 하였다.// 내 그림자는 단 한 벌뿐이다./ 내 육신으로 만든 단 하나의 인장이며,/ 이 지구별 유일무이 거주증명서인 것이다.//
픽셀의 세계 / 신지혜
컴퓨터 화면 속/ 사물들 확대하여 이리저리 잘게 쪼개다보면/ 최후에 남는 픽셀 하나,/ 채 어떤 형상이 펼쳐질지 예측 불가한 사각의/ 빈집 하나만 달랑 남는다/ 거기서 인류 최초의 기원이 비롯되었을 터,/ 이 픽셀이 산천을 빚고 꿈틀거리는 물고기 빚고 사람을 빚어/ 이 가상세계 한판 쩍 벌여놓은 것,// 내 모습도 결국/ 그저 픽셀들의 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나마 내 픽셀들마저 모두 삭제해버리면 그때부터/ 실로 무한 여백의 광활한 대공이 내 눈앞 훤히 펼쳐진다// 그러니 어찌 내가 있다 없다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살아도 나는 없으니, 나를 무엇이라 이르겠는가// 눈뜨면 이 가시적 세상 속 그저 울고 웃는 시시비비 분별,/ 선하다 악하다 더럽다 추악하다 가타부타 논설마저/ 일체 객쩍은/ 홀로그램 가상세계임을 나 깨닫는다//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묘법세계인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오는 나들목에/ 오직 최초의 원 픽셀이 나를 디자인하고 현현시켰을 것이다// 한낮동안 거푸 픽셀 쌓고 허물다가/ 디자인아트 소품 하나 탄생시킨다 이 창조물도/ 저 천의무봉한 그곳에서 원 픽셀씩 뽑아온 것이다//
헬로우,동두천 / 신지혜
길 건너편에 살고있는 하인즈씨,/ 오늘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문밖에 나와있었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었다/ 정확히 동두천이라 했다/ 총알이 관통한 두 다리를 잘라야 했다/ 천만다행 총알이 스쳤다는 그의 얼굴은/ 밀반죽을 으깬 듯 왼쪽 귀가 뭉개져 있었다/ 캄캄한 봉분이라도 마악 열고 나온 듯, 앙상한 손가락 가늘게 떨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또다시,/ 동두천 필름을 돌려주기 시작한다// -그때 동두천에서 우리 부대가 중공군에게 쫓기고 있을 때였지./ 피난민은 개미행렬처럼 끝이 없었지 그때 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논두렁, 밭두렁에 수수이삭처럼 목숨들이 픽픽 쓰러졌었어-// 회상하는 그의 눈 속 바람이 일었다/ 포연 속 총알을 뜷고 다시 살아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고,/ 몸뚱이 반 토막뿐인 그는 다시 내 손을 움켜잡는다/ 자신의 몸뚱아리가 반동강이 일지라도,/ 새벽마다 두 눈 뜨게되어 늘 고맙다 한다/ 그 흔한 공기, 물, 햇빛에게도 고마워 눈물난다고,/ 흐린 잿빛눈알 속, 에게해 같은 푸른 물줄기 하나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가만 잡아주었다 차마/ 그의 눈 속, 강물 바라보지 못한 채 저 허공,/ 문득 바라보았는데 둥근 황도 같은 달하나 조용히 걸려,/ 어둠 속, 고개 숙인 마을지붕들 머리 위를 일일이/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발 없는 발을 가졌습니다 / 신지혜
내가 이 지구 등에 업혀 어찌나 빨리 돌아가는 지요// 아침에서 저녁으로, 다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내가 딸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딸로/ 내가 아들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한 나라에선 시민으로, 이 지구별에선 지구인으로/ 은하계에선 은하인으로, 우주에선 우주인으로/ 고정됨 없이 내가 이 역할 저 역할 한꺼번에 다 하던지요/ 그러하니 이들 중, 과연 어느 누굴 고정된 나라고 일컫겠는지요// 내가 방금 전 생각에 붙어 머물 겨를도 없이/ 내가 방금 전 한 일 그림자 채 거둘 참도 없이/ 오른 발 왼발 내 발자국 새길 틈도 없이/ 내가 어찌나 빨리 회전하던지/ 나도 날 정지시킬 수 없답니다// 나 저 허공에 밧줄 하나 걸지 않은 채/ 억대 조상과 후손 사이 내통한지/ 이미 누천년이 일각처럼 흘러가버렸습니다// 내 발 없는 발은 시공조차 걸림없어/ 과거 현재 미래란 경계 없이 자유자재 떠도는 발// 천지사방 어디에도 막힌 데 없어 뻥 뚫린 길들/ 모두 다 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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