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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진은영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9. 08:31

진은영 시인, 철학자
1970년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니체와 차이의 철학》이다.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등이 있으며, 철학 책 『들뢰즈와 문학-기계』,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코뮨주의 선언』,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있다.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 진은영
1/ 여자가 이사오던 날 밤/ 어둠은 글라이올러스처럼 피어났다/ 여자는 방에서 나와/ 마당 끝에 있는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둔중하게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여자가 없을 때/ 몰려와 창고 문을 두드려보았다/ 이웃집 K가 말했다/ - 그녀는 귀중한 걸 넣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용감한 X와 Y가 열쇠를 훔쳐왔다/ 여자의 열쇠가 말했다/ - 무언가 대단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문밖 구멍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2/ 모두의 이마 위에/ 번쩍이던 철문 위에/ 시간의 부드러운 염산 방울이/ 똑, 똑, 떨어져내렸다/ 붉게 썩어가는 창고 앞에서/ 다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 무엇이 들었습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 무언가 귀중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그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금했고 그녀도 그랬다/ 모두들 문을 열어보기로 했고/ 넣어둔 것을 기증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돌렸다// 창고 속으로 별빛이 쏟아지며/ 텅 빈 안이 환하게 드러났다/ 여자와 사람들은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굉장한 것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가두었기 때문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훔쳐가는 노래 /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집시의 시간 / 진은영
검고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 교훈을 싫어하는 여자다/ 권태도 새하얘진 아이들의 혓바닥을 칼로 긁어내며/ 자두향기 쏟아지는 그늘로 데려갔다// 그녀는 우리의 작은 귓속에 술을 부었다/ 처음 마신 포도주 같은 이야기들/ 보랏빛 가죽주머니에선 날카로운 시간을 꺼내주었다// 없을 땐/ 마시던 술병을 내리쳤지/ 그녀와 함께 누운 모래밭의 밤하늘/ 검은 미꾸라지들이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찔리며/ 파닥거렸다// 더 캄캄한 날엔/ 그녀가 쏟아졌지, 사내아이들의 몸속으로/ 어두운 복도에 달린/ 단 하나의 좁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지듯// 또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불은 꺼졌고 공기는 한없이 차가운데// 아이들의 흰 목덜미에 은하수처럼 길게 빛나는 스카프를 칭칭 감아주고/ 검은 기차를 타고서 그녀는 떠났다// 선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은 위험합니다/ 플랫폼 푯말을 쓰러뜨리며/ 창밖으로 가슴을 내밀어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지// 우리는 하늘처럼 파란 젤리를 씹으며/ 오래 묵은 담배냄새가 피어나는 꽃잎무늬 소파에 앉아/ 그녀가 보낸 엽서들을 큰 소리로 따라 읽었다// 얘들아, 도시가 점점 납작해져/ 끈적거리는 누런 기름접시처럼 납작해지면/ 내가 준 참나무 설거지통에/ 담가주길// 또는, 새로 만든 도시의 카탈로그를 동봉한다// 밤공기의 부드러운 혀를 찢고/ 그녀의 모자가 별처럼 솟아오르길// 작은 아이들은 공책 밖으로 삐져나오는 글씨 연습을 하고/ 조금 자란 아이들은 황도대(黃道帶) 밖으로 새들을 쫓으며/ 계속되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두고 간 탬버린처럼 몸을 떨었다//

어쩌자고 / 진은영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신발장수의 노래 / 진은영
나는 원인을 찾으러 오지 않고 원인을 만들러 온 자/ ―기원전 387년, 헤라크산티페/ 저녁바람에 날아간 메모 중에서//
너는 모르지 네가 황급히 떨어뜨린 슬리퍼 한 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밤도 종이 울리고 나는 네가 흘린 슬리퍼들을 주우러 다니지/ 네가 뭘 보고 웃었는지 너는 잘 모르지// 나는 일러주러 왔다/ 커다란 발을 가진 재미난 사내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신발을 줍고 있는 밤이야// 다 가져도 좋아/ 나의 젖은 손과 나의 취한 시간과 나의 목소리/ 고장 난 시간들로 붐비는 시계를 좋아해 너는/ 잘 돌아가는 빅벤을 열고/ 작은 나사를 하나 던진다// 혁명의 텔로스는 빛나는 구름 위로 숨겨드렸지/ 그러니 우린 그냥 지나가는 길에// 뻐꾸기들의 익살스런 울음을 위해/ 5시 25분26분27분/ 쉬지 않고 노래하는 새들의 빨갛게 젖은 깃털을 위해/ 유리 숲으로 슬리퍼를 던지네// 폭탄은 정각에 터지지 않네/ 구름은 매일 흩어진다네// 그래도 저기 오는 가난한 유리장수/ 손목에 한 번도 시계를 차본 적 없는 추억처럼/ 나는 너를 사랑했네/ 하나뿐인 흰 발을 사랑했네//

Summer Snow / 진은영
진리는 낡아빠진, 그리고 감각적인/ 힘을 상실한 은유들이다/ ㅡ니체//
아담이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아교에 늘어붙은 머리털들의 아름다움/ 바람이 검은 잔디처럼 불어온다// 아담, 언 호수 밑엔/ 첫번째 도시가 있어/ 얼어가는 물고기/ 회색 벽이 내뿜는 물방울을 먹는다/ 그 물고기의 이름은?// 불타는 지느러미/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 나는 불타버린 지느러미를 휘젓는다// 거울 숲으로부터/ 사과 파는 여자가/ 쟁반에 두 개의 빨간 유방을 담아온다// 아담, 너는 한입 가득 베어 물며/ 묻는다 이름이 뭐냐고?// 나는 헤롯이며 요한의 잘린 머리/ 내가 죽인 모든 장자들의 아버지인// 은유는 없다/ 그것은 푸른 얼음/ 따스한 구멍 속에서 녹아버렸다// 아담, 이름이 뭐냐고?/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 떠나온 지하실/ 검은 달의 계단 아래/ 쌓인 참나무 술통/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포도알의 오줌/ 그것은/ 사라지는 푸른 얼음의 거울/ 강바닥에 내리는 불탄 살갗의 눈송이다// 호수 밑에는/ 첫번째 도시가 있고/ 눈보라 먹으며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고/ 불타버린 이름들의// 검푸른 수면이 물결무늬 모자이크를 만들며 얼어간다//

문학적인 삶 / 진은영
별들은 죽는다. 짐승들은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홀로 남아 있다.ㅡ오든//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오랫동안 어느 작가도/ 괴테처럼 걸작을 쓰지는 못했으니까,/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할 위대한 페이지를//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도축용 갈고리를 흔들며 바닥을 채색하는 붉은 간과/ 놋쇠 빛깔의 거꾸로 된 물음표에 매달려/ 말라가는 단어들 사이에서// 베르테르의 슬픔에 비견할 성과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그럴지도 몰라. 한 사람의 젊은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나무도마위의 칼자국처럼 갈라진 농부의 이마/ 비릿하게 항구의 푸른 젓가슴에서 발려나간/ 어부의 차가운 돛대, 슬픔의 살찐 넓적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달콤한 폭력이 또 다시 필요할지도!// 관료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노래는 폐허와 부패의 미끌거리는 창자를 입에 문채/ 갈가마귀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법이라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또는/ 고통과 비명의 자유로운 확산과 교역을 위해/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 폐병쟁이 시인을 위해 흰 알약의 값을 올리고/ 아직도 발자끄처럼 건강한 소설가에게는/ 어미소를 먹인 얼룩소를 먹이도록!// 그의 잠든 이웃에게는 아름다운 나라의 산업 폐기물이/ 트로이의 목마처럼 입성하는 도시와/ 햄릿에서 처럼/ 독극물이 고요한 한낮의 귓속으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선물하라// 당신은 결정을 서두른다// 이런 결단들은 종이 봉지에서 포도송이를 꺼낼 때처럼/ 조심스럽거나 부스럭거려서는 안된다.// 소리없이/ 비닐봉지를 휙 가르고 떨어지는 나이프처럼/ 사람들이 모여 들기 전에//

70년대 産 /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우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그 머나먼 /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세상의 절반 / 진은영
세상의 절반은 모래/ 나머지 절반은 물/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 나머지는 물/ 절반의 모래 속으로/ 절반의 물이 모두 스민다/ 새털구름 없는 아침에도/ 세상의 절반은 개발/ 세상의 절반은 죽음/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 나머지는 물/ 세상의 절반은 사랑/ 나머지는 슬픔/ 붉은 물이 스민다/ 절반은 모래로/ 나머지는 네 속으로/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죽은 은빛/ 나머지는 웃자라는 은빛 갈대/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거리로 / 진은영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나가겠습니다.//

이 모든 것 / 진은영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오를 것 같다/ 장미색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노란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준 약을 한 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 내리는 것 같다//

고흐 / 진은영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있다 /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무신론자 / 진은영
스위치를 올려주소서/ 깜깜한 방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신,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거리로 나가 무신론자,/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을까// 유신론자는 겸손해진다/ 신이 푸른색 양피지에 적어/ 돌돌 만 수수께끼 두루마리를/ 끝도 없이 자기 앞에 늘어놓을 때// 그러나 무신론자, 그에게는 다만 즐거운 일/ 여름이 되면 장미 정원에서/ 수만 개의 꽃송이가 저절로 피어나듯/ 수수께끼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으면 되는 일이다/ 피지 않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그런대로 좋은 법//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돛단배 사과나무와 기린 화산 무지개/ 수염고래가 뿜어내는 투명한 물줄기에서/ 잠자리 날개의 은빛 무늬에서// 그런 관점을 비웃을 틈은 없다/ 사물의 바닷가에 기기묘묘하게 그려진 모래 그림을 관찰하느라/ 무신론자, 그는 항상 바쁘니까/ 순간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잠깐 동안에/ 한 번에 똑같지 않은 그 기하학적 연속 무늬를// 그는 어리석다, 유신론자가 보기엔/ 이미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두고/ 차들이 과속으로 달리는 도로 속으로 들어가니까/ 노란색 페인트 통을 들고/ 자신이 지나갈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면서// 유신론자처럼 무신론자도 죽는다/ 두 사람은 수줍게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하느님의 두 손바닥으로/ 밤하늘 별로 만들어진 저울 위로/ 영혼의 무게는 똑같다/ 사이좋게 먹으려고 두 쪽으로 쪼개 놓은 사과처럼//

모두 사라졌다 / 진은영
위대한 악을 상속 받았던 도둑들은 모두 사라졌다/ 밤(夜) 속에 가득하던 전갈들도// 혼자 바닷가를 걷다가/ 바위와 바위 사이 구멍에 끼인 발// 부어올라 빠지지 않는,/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 검은 비닐 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런 예언을 듣고,/ 모든 표정이 사라지는 한밤중에//

시인의 사랑 /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과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긴 손가락의 詩 /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청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가족 / 진은영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서른 살 / 진은영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1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생일 / 진은영
사랑의 간장병을 쏟으신다 하얀 종이에/ 가장 맛 좋았던 내 유년 시절에/ 달팽이 눈처럼 얌전히 하루가 솟아오르고/ 엄마, 이건 너무 짜요// 아니, 어머니 물을 주셨다/ 내 몸의 슬픔이 완두콩처럼 자라났다/ 달까지 무성하게// 초록 유리처럼 나를 찌르면서/ 숲은 자라났다// 어머니 생을 주셔서 감사해요/ 존재의 가시에 찔리면서/ 엮은 부재의 장미 한 다발을// 당신은 갈비뼈를 뽑아/ 남자 대신 나를 만드셨다// 흰 냉장고 문에 비친 피투성이 내 얼굴/ 불확실하게 반짝거린다//

모자 / 진은영
마술사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제일 먼저 비둘기/ 그리고 분홍 토끼가 뛰어 나온다// 권태의 탁자에 은색 클립처럼 작은 번개가 치고/ 사물의 잘 익은 표면이 쩍 갈라지지/ 명랑한 깃털들의 폭소폭소// 사랑하는 이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가슴이 먼저 튀어나오고/ 머리는 두 손이 공손히 벗어들고/ 담아온 것을 전부 쏟으며 날 보며 인사했네/ 안녕! 이라고// 가을하늘은 파란 모래처럼 쏟아지고/ 파란 모래// 싸우는 이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땀의 완두콩, 그게 부드러웠는데 차가운 슬픔의 총알/ 참새와 애벌레들의 후원금/ 먼저 죽은 친구 얼굴이 자색 양파처럼 굴러나오고/ 그리고 약속의 다이아몬드/ 그에게 들려줘야 할 부서지지 않는 한마디/ 내가 계속 할게// 나비들은 피의 눈송이처럼 날아가고/ 피의 눈송이// 죽은 이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어둠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 내 심장/ 깨진 유리 어항에/ 그가 마지막으로 담았던 눈빛의 작은 지느러미// 구름들은 하얀 풍선처럼 묘지로 달아나고/ 하얀 풍선// 젖은 바닥에 모든 것이 누워 있다/ 바다처럼// 시인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사물의 둘레에, 관념의 둘레에 푹 눌러쓴/ 두글자가 모자라는 말/ 채워야 하는 것, 그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모자라는 것을 쓰고 온종일 걸어다녔다// 시간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 달아나는/ 부재의 머리통 위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서/ (넌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어울린다 / 진은영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이 솟아나는 저녁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너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언제나 / 진은영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 언제나 어느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 이마에 남겨진 조각도의 칼자국/ 언제나 피, 땀, 죽음/ 그 뒤에, 언제나 노래가// 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 언제나/ 너의 빛//

지난해의 비밀 / 진은영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 회색 밑둥들, 저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이 詩를 떨어뜨리고/ 나무들은 버찌를/ 바람은 낡은 역 근처에 음악을//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하얀 달을/ 비 갠 거리를, 핏방울을// 2자가 너의 힘없는 어깨를/ 닮아간다는 거/ 싸움꾼이 잠시 후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 빰이 오른 빰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 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그냥, 판도라 상자 / 진은영
파에서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지개를 켜는 날이 있었지/ 나의 말이 스텐프라이팬에서 겹겹이 흩어진 양파처럼/ 희망의 냄새를 피우며 둥글게 구워지던 날이 있었지// 우리의 말이 긴 눈썹을 열고 부드러운 푸른 오솔길을 보여주던 날이 있었지/ 빨간 스프링의 모가지를 가진 슬픔이 담장 너머로 튀어오르던 날이,/ 거대한 고기 덩이에서 기름을 떼어내다 미끄러진 도살장의 칼날같은 말이,/ 너, 내가 아주 모호한 거리에서 만나/ 헤어지며 주고받은 말이 있었지// 나는 그냥/ 망가진 몸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는/ 상자에 그려진 무섭고 익살스런 녹색 표정의 마지막 유령이나 되었으면/ 아무 때나, 아무 곳에도 숨길 수 없는//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밀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마술사 / 진은영
죽은 마술사, 내 사랑 너는 붉은 철책의 발코니 무의미의 실내악./ 나의 악보가 놀라서 내게서 도망쳤다./ 너에 대한 사랑과 슬픔에 빠져 내 귀는 익사할 지경이 되었으니까./ 소금을 진 당나귀를 걷어찼지./ 눈 속에 잠든 네 입술의 동네 근처로// 내 심장은 얼음 위 맨발처럼 추억 속을 뛰고 있고/ 모든 기쁨을 잠들게 하는 종소리가 어두운 언덕 위로 지나갔다./ 저녁의 탁자./ 알 수 없는 시구들이 파란 연필처럼 길게 드러눕는다./ 단어 속의 기억을, 깜박이는 속눈썹을 흰 개미들이 갉아먹고 있다.// 이봐, 슬픔의 좁쌀을 가득 채우라고/ 이제 내 인생은 구멍 난 주머니야.//

Agnus Dei, Samuel Barber -내가 아는 한 노동운동가에게 / 진은영
밤이여, 너의 긴 팔에 몇 개의 못 구멍을 내라./ 뿔피리처럼 맑은 눈을 떠라./ 당신이 집을 떠나 공장에서 썼던 일기의 첫 줄은 명랑했을 거라 상상합니다.// 진보라니, 언제나 그 말은 아득하게 들립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알몸으로/ 사랑을 하고 빵을 나누는 일처럼// 자면서 벌어진 입술로 새어나오는 잠꼬대 같은 진실들/ 그런 걸, 믿으라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묻곤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지우면서/ 당신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결코 욕심 부리지는 않았죠./ 한낮이 아니라/ 별들이 아니라/ 용접기 불꽃이 만든/ 한 개의 반짝이는 구리 반지를/ 벽보 속에, 슬픔 속에, 한 노동자의 얼굴 속에 넣어뒀을 뿐)// 당신은 확신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나는 약간의 소금, 나를 넣어주세요./ (그렇다고, 역사의 바다가 더 짜지지는 않을 테지만)/ 모든 것은 둥둥 떠오를 것입니다./ 거짓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염도의 합법칙성이 아니라 소금 한 알// 흰 깃털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씻는 나무들// 어쩌면, 높은 데서 딴 열매는/ 빛의 밤송이 같은 것, 배가 고프고 따갑습니다./ 때때로 빈속에 삼킨 정직은 우리의 창자를 찢으며 내려갑니다.// 나는 완벽한 사실의 평면, 혹은 고통이라고 믿는 벽에 뚫린/ 아주 작은, 단 하나의 구멍./ 나는 그것을 통과해서 나갈 거니까./ 앞으로// 앞으로//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중얼거렸습니다.// ……// ……// 나는/ 그 순간에 덧붙일 정치철학적 논평은 준비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질문으로/ 다시 질문을 지우며//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념으로/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스타바트 마테르 / 진은영
십자가 아래 나의 암소가 울고 있다/ 오 사랑하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나는 꿈에 못 박혀/ 아직 살아 있답니다// 밤을 향해 돌아서는 내 입술을/ 당신의 젖은 손가락으로 읽어 보세요/ 세계는 거대한 푸른 종소리처럼/ 내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어요// 나는 밤의 부속품처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떨어져 나왔어요/ 별처럼 순한 당신 눈빛과/ 네 개의 길고 따듯한 뱃속을 지나가는 계절들 사이에서도/ 소화되지 않은 채 나는 남아 있어요// 당신은 오래된 술 같아요/ 내가 마시는 술에 슬픈 찌꺼기가 떠도는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마시든 나는 두껍게 취기를 껴입지만 늘 추워요/ 나를 향해 당신이 동굴처럼 뚫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팔을 뻗어 서로를 안아요/ 오 사랑해/ 서로를 자꾸 끌어당겨요/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두려움보다/ 슬픔보다/ 흰 재가 더 높이 쌓이고 있어요// 어머니, 결국 나는 내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뚜껑 열린 석관이/ 세월 속에서 제 주인을 유실하듯/ 당신이 당신 아이를 잃어버렸듯/ 바람이 날아가는 투명비닐 봉지를 분실하듯/ 당신은 찾을 수 없어요/ 정말이지 우린 다르게 생겼어요/ 당신을 닮았던 얼굴 위에 낯선 고통의 진흙을 덧칠하며/ 내 얼굴은 점점 두껍게 말라갈 테니// 목이 말라요 어머니/ 마른 풀밭 위에 빈병처럼/ 나는 또 흘러들어요/ 당신이 몇 방울 남지 않은 곳으로//

올란도 / 진은영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과 함께 물 밑으로 사라졌다/ 나의 하느님, 전당포에 앉아계신 인색한 하느님/ 얼마나 값을 쳐주시려고/ 이 많은 영혼을 당신 속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나요?/ 겨우 고관대작을 위한 은그릇 몇 개 내어주실 작정이면서/ 올란도, 나 올란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지고서// 올란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메피스토 왈츠 / 진은영
뚜껑과 시신을 잃어버린 관 속에서/ 붉은 샐비어꽃들이 피어날 때/ 밤이 깜짝 놀란 두 눈썹을 치켜뜨고/ 묘석처럼 자라나는 담쟁이 잎을 응시할 때/ 불안이/ 부서진 어깨뼈의 십자가에서 포도송이처럼 열릴 때// 사물 하나를 물고 와 심장의 텅 빈 수조/ 어두운 피의 찰랑거리는 기억 속에서 헤엄치게 할 수 있다면/ 다시 낯선 비밀들이/ 몸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 도기의 깨지기 쉬운 색깔에 포박되어/ 미친 양탄자의 춤 위에 올라탈 수 있다면// 모든 구멍을 틀어막는 슬픔의 막대기여/ 무취의 거리를 짓이기며 달려가는 라벤더 꽃잎의 타이어/ 고대 화폐처럼 닳아버린 달의 입술이여, 사라진 역병이여// 어둠의 찢어진 자루에서/ 썩은 양파들이 굴러 떨어지는 밤// 네가 마시는 알코올 속 얼음으로 녹아들기 전에/ 바이올린 화염으로 흰 자작나무 숲을 다 태우기 전에/ 그가 왔다// 나의 죽은 귓속에서 푸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파울 클레의 관찰일기 / 진은영
사랑이나 이별의 깨끗한 얼굴을 내밀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의 신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온다/ 두 손을 문지르며 사라질 때까지 경배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과 전쟁의 심벌즈는 내 유리 손가락, 붓에 담긴 온기와 확신을/ 깨버렸다/ 안녕 나의 죽은 친구들/ 우리의 어린 시절은 흩어지지 않고/ 작은 과일나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 키높이만큼 낮게 흐르는 구름 속으로 손을 넣으면/ 물감으로 쓸 만한 열매 몇 개쯤은 딸 수 있다, 아직도// 여러 밝기의 붉은색과 고통들/ 그럴 때면 나폴리 여행에서 가져온 물고기의 색채를/ 기하학의 정원에 풀어놓기도 한다// 나는 동판화의 가는 틈새로 바라보았다/ 슬픔이 소녀들의 가슴을 파내는 것을/ 그녀들이 절망을 한쪽 가슴으로 삼아 노래를 멀리 쏘아 올리는 것을// 나는 짧게 깎인 날개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조금씩 부서지는 누런 하늘의 모서리/ 나쁜 소식이 재처럼 쌓인 화관을 쓰고// 나는 본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영원히 날아가려 했다/ 폼페이의 잔해더미에 그려진/ 수탉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이 모든 폐허를 들어 올릴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 속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나를 좋아하던 어느 문예비평가가 말했다지만, 글쎄……/ 그는 국경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해부학과 푸생, 밀레와 다비드를 공부했고/ 이성과 광기의 폴리포니를 분간할 줄 아는 두 귀에,/ 광학을 가르치고 폐병과 심장병의 합병증에도 정통했지만/ 슬픔으로 얼룩진 내 얼굴과의 경쟁에선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마다 나는 세네치오를 불렀고/ 부화하기 전의 노른자처럼 충혈된 그가 왔다//

카잘스 / 진은영
음악은―밤의 망가진 다리/ 하느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신다// 음악은―영혼의 가느다란/ 빛나는 갈비뼈/ 물질의 얇은 살갗을 뚫고 나온// 음악은―호박琥珀에 갖힌 푸른 깃털/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심장 속에서/ 시간의 보석을 부수고 있다// 음악은―무의미/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부드러운 달의 날개 아래서/ 길들은 펼쳤다 잠이 들었지//

글 쓸 자유 / 진은영
우주 속에 같은 장소는 없다/ 심장- 하루하루 다른 색으로 변해가는 과일/ 우리가 서로를 포기했던 곳/ 파란 손잡이 가위를 써 봐, 종이를 자를 땐/ 기분이 좋아/ 잘못된 질문에 괄호를 친다/ 【헛된 대답들은 우정으로 간직하자구】// 후설은 말했다 에포케, 라고/ 몰라도 된다 풀로 붙인다 오려도 된다/ 텅 빈 가방을 들고 있다/ 뭐가 안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거야// 【지저분하게】 풀로 붙인다/ 【삐뚤빼뚤】 오려도 된다/ 【그대로】 남아있다- 피 묻은 휴지처럼//

우주의 옷장 속에서 / 진은영
옷장 속에서 사랑을 했네/ 하늘의 흰 무릎이 내려와/ 땅의 더러운 무릎에 닿았네/ 간지러워 나무들은 재채기했네/ 가슴이 부끄러워 두 개의 언덕으로 솟아났네/ 놀라서 구름은 달아나고/ 아름다워서 웃음이 흩어졌네/ 아아 너무 웃어 비가 내리네/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으로 나는 쏟아졌네/ 흐르는 별들처럼/ 밤의 깨진 술병 속으로// 얼굴 위로/ 텅 빈 옷걸이들 흔들리네//

나는 도망 중 / 진은영
머릿속에 놓인 누군가의 일기장/ 펼치면 한 줄도 씌어있지 않다/ 무기력의 종이 위에// 나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펜을 쥐었어, 부화시키려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의 알들을// 그거 알아? 나는 생쥐가 파충류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이 별이 내 별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펠릭스를 훔쳤습니다/ 그거 알아? 슬픔이 하느님보다 힘세다는 거/ 그거 알아? 계산이 잘못 되었어/ 그거 알아? 너는 텅 빈 목욕탕에 남겨졌어/ 그거 알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이 찾아왔어/ 그거 알아? 죽은 친구의 소식을 가져온 우편배달부를 위로했어/ 그거 알아? 노른자가 깨졌다 식탁 위에서// 나는 단단히 살아있다! 잘 익은 간처럼//

귀가 / 진은영
나는 드릴처럼 튼튼한 이를 가진 쥐였다/ 내 가족이 사는 집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내고 숨어들고 싶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 집에 가려면 수쳇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당의 내부를 장식했던 꽃 쓰레기들과/ 제사 대 먹다버린 과일들/ 누군가 시궁창에 매달아 놓았다/ 파란 모기떼 인도하는어두운 길 따라가면/ 오! 내 어머니 사시는 곳/ 나는 돌아왔다// 집의 붉은 혀가/ 깊은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도시 / 진은영
유리로 된 미끄러운 길을 굴러가는 바퀴들/ 주황색 다알리아의 무수한 겹꽃잎/ 버스 정류장 구인 공고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떼/ 개들은 흰 진흙의 맛을 보고 있다/ 하늘에 낡은 동전 같은 낮달 뜬다//

고백 /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청춘 1 / 진은영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청춘 2 / 진은영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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