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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상순 시인

부흐고비 2021. 12. 28. 09:08

박상순 시인, 문학출판 기획자
1962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작가세계》 봄호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민음사에 1989년 입사해 대표이사(편집인)까지 지냈으며 출판 기획자로 백여 권에 이르는 국내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북 디자이너(book designer)로 문학, 인문학 책의 디자인도 했다. 그의 시는 전위적이고 낯선 느낌이 드는 시이다.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이 있다. 현대시동인상, 현대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 박상순
모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원인데 봄날인 줄 알았음./ 그래도 혹시나 둘러만 볼까, 생각했는데, 아뿔싸/ 고독의 아버지가 있었음. 나를 불렀음./ 환자용 침상 아래 납작한 의자에 앉고 말았음./ 괜찮지요. 괜찮지. 온 김에 네 집이나 보고 가렴./ 바쁜데요. 바빠요, 봐서 뭐해요. 그래도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으니, 여지저기, 여기니, 찾아가보렴./ 옥상에 올라가서 밤하늘만 쳐다봤음. 별도 달도 없었음./ 곧바로 내려와서 도망쳐왔음./ 도망치다 길 잃었음. 두어 바퀴 더 돌았음./ 가로등만 휑하니, 내 마음 썰렁했음. 마침내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는 집, 여기저기 맴돌다가 빠져나왔음.//
모란에 다시 갔음. 제대로 갔음. 길바닥에 서 있었음./ 내 봄날이 달려왔음. 한때는 내 봄날, 스무 살이었는데, 이젠/ 쉰 살도 넘었음. 그래도 내 봄날의 스무두 살 시절,/ 남산공원 계단을 내려오던 그날에, 내 두 눈이 번쩍 뜨이고/ 내 가슴속의 쇠구슬들이 요란하게 덜커덕거렸음./ 분혼 신, 남빛 치마 잊히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던 내 봄날./ 앗, 봄날, 아, 봄날, 그 오후 내 봄날이, 봄날, 봄날, 봄날./ 여기도 봄날, 여기도 봄날, 봄날을 속삭였음. 세월은 갔음.//
모란에 갔었음. 봄빛 다 지고, 초가을에 갔었음. 쉰 살 넘은/ 내 봄날을 다시 만났음. 밥 먹었음, 차 마셨음. 손 내밀었음./ 내 손등, 봄날 손등. 찻잔 옆에 모아놓고 보니, 마음만 휑했음./ 그래도 봄날은 아름다웠음. 다정하고 쌀쌀했음. 그 봄날이,/ 죽기 전에 다시 올게, 네 죽음을 지켜줄 그 누구도 없다면./ 봄날이 내게 말했음. 누가 있겠음? 나 혼자 밥 먹었음./ 내 봄날만을 생각했음. 푸르른 나뭇잎 하나/ 억지로, 쉰 살 넘은 내 봄날의 가방 속에 넣어주고……/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유치원의 점심 시간.//
요리사가 된 냄 봄날이 아침부터 요리를 하고/ 뒤뚱대고, 자빠지는 아장아장 새싹들이 오물오물 점심을 다/ 먹고 나면, 바닷가 빵집 지나, 섬마을 우체국 지나 쉰 살 넘은/ 내 봄날이 파도 소리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 모란이 있었음. 그 길에서, 긴 총 옆에 놓고/ 비탈에 누워 있었음. 총알은 없음. 오래전 남산공원/ 계단에서 덜커덕거리던 내 가슴속 쇠구슬들이 단거리 대공포/ 총탄이 되고, 무거운 포탄이 되니, 가슴이 무거워서 누워 있었음./ 가을도 내 옆에, 총알 없는 빈총처럼 뻗어 있었음./ 가슴이 무거워서 나자빠져 있었음. 그런 모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실인데 또 잘못 알았음. 아뿔싸,/ 겨울이 왔음. 창밖엔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는데,누가 있겠음?/ 아직도 치료중인 내 봄날, 이번엔 고독의 할아버지가 부르셔도/ 환자용 침상 아래 이 끈적한, 납작한 의자엔/ 앉지 않겠음.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누가 있겠음?//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박상순
언제부터인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언제부턴가 비가 수평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수직으로 흐르고 지붕은 쓸모 없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마라나는 누웠다./ 시간에 눕고 먹구름 속에 눕고 봄빛과 가을빛에 누웠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가는 세계의 폭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그녀의 옷가지를 허리에 둘둘 감고 오후 2시에서 3시를 넘기며 이 세계의 끝에 쓰러진 그녀의 피를 뽑는다. 어느 날 강변에서 그녀가 내 허리에 규산(硅酸)을 바르던 그때처럼.// 나 ; 오고/ 마라나 ; 가고// 나 ; 가고/ 마라나 ; 오고// 문 여는 소리/ 문 닫는 소리// 마지막 전람회가/ 끝나는 소리// 마라나 ; 가고/ 나 ; 오고//

아비뇽 / 박상순
침대, 침구, 방석, 베개, 잠옷들의 전시장./ 커다란 침대 위에 사다리가 놓여있다./ 침구 위에 문을 닫은 일요일의 문방구가 있고/ 방석 위엔 바퀴 큰 검은 자동차/ 베개 위엔 둥근 종이통에 감긴 테이프 세 개// 잠옷들이 걸린 옷걸이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나와/ 사다리 위에 오른 사내에게 한 마디/ 일요일의 문방구 진열장에 붙은/ 짧은 머리의 여배우 사진에게 한 마디/ 검은 자동차의 큰 바퀴 옆에 누운/ 검은 개에게 한 마디/ 이별의 말을 전하고// 전시장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아비뇽이라는 무의미한 글자가 그저/ 커다랗게 쓰인/ 침대와 침구와 방석과 베개와 잠옷들의/ 이상한 전시장 한 가운데에서// 침대 위에 놓인 이상한 사다리처럼/ 침구 위에 놓인 일요일의 쓸쓸한 문방구처럼/ 커다란 방석 위에 주차한 바퀴 큰 자동차처럼/ 그저 베개 위에 놓인 테이프 한 조각을/ 뜯어내 손등에 붙이고// 한 여자가 걸어나간 전시장 밖을 향해 중얼거린다./ 지금 우리들의 사랑엔/ 무엇이 남아있는가.//

밤의 누드 / 박상순
두 개의 둥근 달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자전거, 다른 한쪽에는 자동차, 자전거 위에는 피아노, 자동차 위에는 구름, 피아노 위에는 그녀가 다닌 고등학교 창문, 구름 위에는 그녀가 걸어 나오던 전철역 입구의 표지판, 고등학교 창문에는 오렌지 꽃물, 전철역 표지판 위에는 작은 꽃봉오리가 그려진 그녀의 가방, 오렌지 꽃물 속에는 쓴 맛이 나는 비가라드 오렌지나무, 그녀의 가방 위에는 포도주 한 병, 오렌지나무 위에는 기린 한 마리, 포도주병 위에는 새벽별.//
두 개의 둥근 달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겨울, 한쪽에는 봄, 겨울 나라에는 털모자를 쓴 그녀가 눈길을 걷고 있습니다. 봄의 나라에는 활짝 핀 벚꽃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눈부시게 빛납니다, 한쪽 달이 기울면 다른 한쪽의 달도 기웁니다, 봄과 겨울 사이에서 날아온 꽤 커다란, 교장 선생님 같은 나방 한 마리가 묻습니다. 뭡니까? 왜 달덩이가 두 갭니까? 마침내 내가,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순간입니다. 보세요. 납니다. 나를 그린 그림입니다. 내 손에는 두 개의 둥근 달이 있습니다.//
이쪽 손에는 푸른 달, 다른 손에는 하얀 달, 푸른 달 속에는 자전거, 하얀 달 속에는 자동차, 자전거 위에는 피아노, 자동차 위에는 구름, 피아노 위에는 그녀가 다닌 고등학교 창문, 구름 위에는 표지판…… 오렌지나무 위에는 기린 한 마리, 포도주병 위에는 새벽별, 겨울 나라에는 털모자를 쓴 그녀가 눈길을 걷고 있습니다. 봄의 나라에는 활짝 핀 벚꽃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빛납니다, 이렇게 내 한 손에는 푸른 달, 또 다른 손에는 하얀 달. 울다가, 울다가…… 빛납니다. 눈부시게//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 박상순
목화밭이 있었다-한 사람이 있었다/ 목화밭이 있었다-내가 있었다/ 한 사람이 있었다-무릎이 깨진 백색의 소년이 거기 있었다//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무릎이 깨진 백색의 소년은 가고/ 너는 아직도 목화밭에 있구나/ 너는 아직도 남아 있구나// 목화밭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있었다/ 목화밭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우리들이 있었다-머리에 솜털을 단 백색의 소년들이 있었다// 흰 꽃들이 부를까. 하얀 달이 부를까/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너는 아직도 목화밭에 있구나/ 너는 아직도 남아 있구나// 목화밭이 있었다- 세 사람이 있었다/ 목화밭이 있었다 - 내가 있었다/ 나와 함께 있었다- 내 손가락을 묻고 돌아선 백색의 소년들이 있었다// 거기 있었다. 사막에도 비가 올까. 사막에도 비는 오겠지/ 솜털처럼 돋아날까. 내 손가락도 자라서 목화가 될까/ 흰 꽃들이 부를까. 목화솜이 부를까/ 하얀 달이 부를까. 다시 부를까// 목화꽃이 있었다-목화밭만 있었다/ 목화밭이 있었다-소년들만 있었다/ 거기 있었다-목화꽃을 지나서 소년은 가고// 내가 끌고 간 것들, 내가 들고 간 것들/ 내가 두 손에 꼬옥 움켜쥐고 간 것들/ 거기 있었다. 목화밭이 부를까. 목화솜이 부를까/ 네 손가락을 묻고 돌아선 백색의 소년은 가고/ 너는 아직도 남아 있구나. 목화밭에 있구나//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 박상순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로 무너져 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도시를 지난 즐거운 사람은/ 눈보라 속에 있겠다/ 어깨를 움추린 채 평원을 바라보고 있겠다/ 무너져 버린 지붕들을 보겠다/ 건널 수 없는 다리 앞에 있겠다/ 가슴까지 눈 속에 묻혀 있겠다// 하늘은 더 어둡고, 눈은 펑펑 내리고,/ 반짝이던 도시의 불빛도 눈보라에/ 지워지고, 지나온 길 마저 어둠속에 묻히고/ 먼 우주의 별들도/ 눈보라에/ 묻히고// 즐거운 사람은 점점 더 눈 속에 빠지고/ 가슴까지 빠지고/ 어깨까지, 머리까지 빠지고// 아주 먼 우주의 겨울 별들은 좋겠다/ 밤은 좋겠다/ 점점 더 눈 속에 파묻히는 즐거운 사람을 가진/ 폭설의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진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겨울은 좋겠다/ 얼어붙은 겨울 강은 좋겠다/ 폭설에 묻혀,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도 않는,/ 건널 수 없는 다리는 좋겠다//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 덮인, 막막한,/ 추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밤새워 바람만이 붕붕대는, 간절한,/ 눈 속에 다 묻혀 버린,/ 저 먼 우주까지, 소리 없는,/ 겨울이 오면.//

유령이여 안녕 / 박상순
올 겨울엔 유령이 나오는 책 다섯 권을 시중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시원한 냉동 참치를 녹여 먹으면서 묻어둔 악몽을 불러내기로 했습니다.// 참치 식당 별실에 모인 우리는 술도 한 잔 걸쳤습니다. 적당히 악령들이 퍼지면 우린 텍사스로 튈 계획입니다. 잔인한 미소를 코끝에 걸고 우리는 신이 나서 노랗게 들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는 우리가 황제 펭귄 한 놈을 냉동하기로 결정했던 장소였습니다. 첫 번째 놈으로 황제 펭귄의 냉동유령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새로 구하기로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놈으로 구할 겁니다. 닭대가리를 닮은 놈과 왕지렁이처럼 크고 축축하되 더 질긴 게 좋겠지요. 네 번째는 영국산, 다섯 번째는 비장의 국내산으로 정했습니다.// 아마 네 번째는 암놈일 겁니다. 영국에서 온 건데 잉글리쉬는 에프, F밖에 모릅니다. 에프. 아주 큰 놈입니다. 삐죽삐죽 합니다. 날카롭지요. 비장의 국내산은 거대한 창자 같기도 하고, 오물 같기도 하고, 박 터진 두개골 같기도 합니다.// 올 겨울엔 이 다섯을, 흉측한, 끔찍한, 이것들을, 시중에 풀어놓을 겁니다, 우린 이미 여러 번 대구탕, 알탕, 육개장, 곰탕 등을 먹으며 익숙해진 편이지만, 그래도 안 봅니다. 이것들 풀어놓고 텍사스로 튈 겁니다.// 책 다섯 권. 이게 우리들의 암호지요. 지금도 우리는 신이 나서 노랗게 들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터미널로 갑니다. 각자 다른 시간에 시외버스를 타고 모처에서 만날 예정이지요. 산 채, 죽은 채, 통째, 뼈째 구워먹고 비벼먹으며 또 한 잔 걸칠 겁니다.// 내 버스엔 황혼이 걸렸습니다. 안주머니에 넣은 노란 지폐가 내 심장을 쾅쾅 때립니다. 가슴이 뜁니다. 실핏줄이 떨립니다. 살코기 같은 버스를 몰고 가는 황혼의 운전기사는 냉동 참치대가리를 닮았습니다. 뒷자리엔 새 같은 사내가 뻣뻣하게 뻗어 있습니다.// 나도 이승에선 한번쯤, 깊게 묻은 끔찍함을 드러낸 섬뜩한 유령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우리가 택할 대단한, 흉측한, 그것들이, 우리들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닭대가리, 질긴 가죽지렁이라면 좋겠습니다.// 내 시간엔 황혼이 붉습니다. 좋겠지요. 그래요. 갑니다. 튑니다. 황혼이 붉습니다.//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꼭,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이 가을 한 순간 / 박상순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 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단풍잎 하나/ 초침이 돌고 있는 내 눈 속에/ 떨어지고 있었다//

내 가을의 별들 / 박상순
내 가을의 별들에서는 소리가 난다./ 어둡고 낮다// 검은 토끼 모자 가을/ 흰 토끼 모자 가을/ 검은 나팔꽃 모자 가을/ 흰 해바라기 모자 가을// 모자를 쓴 내 가을의 별들에서는/ 소리가 난다// 검은 사과 모자 가을/ 흰 사과 모자 가을/ 검은 기차 모자 가을/ 흰 비행기 모자 가을// 내 별들에서는 이런 가을들의 소리가 난다.// 검은, 눈 뜬 모자 가을/ 흰, 눈 감은 모자 가을/ 검은, 손 벌린 모자 가을/ 흰, 팔 구부린 모자 가을// 검은, 식탁의 모자 가을/ 흰, 욕실의 모자 가을/ 검은, 구름 없는 모자의 가을/ 흰, 하늘 없는 모자의 가을//

섬, 잎, 꿈, 밀물, 썰물, 고래, 돌 / 박상순
1// 나는 사람입니다. 섬입니다. 잎입니다.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무거운 소리입니다. 코발트블루와 버밀리온 사이에서 나온 높은 소리입니다.//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야 한다고,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나도 신발을 신었습니다. 두 발로 걸었습니다.// 섬과 잎 사이,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 고등어 같은 사람과 홍당무 같은 사람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나는 섬입니다. 바닷물이 가슴까지, 턱밑까지 올라온 밀물의 섬입니다. 축축한 발목이 드러난 썰물의 섬입니다.// 나는 잎입니다. 돌의 잎, 물의 잎, 고래의 잎입니다. 잎이 자랍니다. 한낮의 섬이 내 안에서 뛰다가, 한밤의 섬이 나를 피해 걷다가// 내 허리에서 잎으로 돋은, 코발트블루와 버밀리온 사이에서 나온,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떨어진 소리입니다.// 2// 그래도 나는 사람입니다. 딱딱하게 마른 콩 같은, 조약돌 같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작은 돌들이 어쩌다가 마구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도 나는 잎이 돋아나는 사람입니다. 한낮의 섬이 달려가는, 한밤의 섬이 언뜻언뜻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섬, 잎, 꿈, 달, 창문, 신발, 두 발, 허리, 가슴, 밀물, 썰물, 고래, 콩, 돌까지도 다 있는 사람입니다. 앞사람은 여전히 앞에서 가고, 뒷사람은 매일 뒤에서 옵니다.// 잎이 너무 많이 자라서 허리가 조금씩 휩니다.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어젯밤 나를 끌어안다가 발목이 부러진 코발트블루와 온종일 햇빛 때문에 어지러운 버밀리온 사이에서 여름이, 가을이 끝나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사람입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 / 박상순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하루 / 박상순
그녀는 먼바다에서 눈이 큰 물고기가 되었지만, 하루 만에 어부에게 잡혀 어시장으로 들어왔다//

낱말 / 박상순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네 번째 바다의 두 번째 연인의 서른세 번째 파도 -220볼트 커넥터 1 / 박상순
1968년 4월, 퀴논의 한국군 맹호부대는/ 8일간의 전투에 돌입했다. 바다 건너에선/ 멧돼지만한 토끼 두 마리의 털이 뽑혔고/ 강변 기찻길 옆 학교 운동장의/ 철봉대는 차가웠다./ 1969년 3월 14일, 15일, 16일,/ 사흘 동안 눈이 내렸다.// 나는 아직 젊었고, 놀라웠고, 거만했고, 침착했었다./ 바람이 내 심장의 선명한 오른쪽에서 다가와/ 왼쪽 발밑으로 흐릿하게 지나갔다.// 바다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건물 입구에/ 좌우로 서 있었다./ 그들의 바다 냄새를 통과해 나는/ 승강기에 올랐고, 잠시 눈을 감았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열대 해변이/ 네 앞에 펼쳐졌다.// 열대 해변을 닮은 아주 긴 복도를 지나 문을/ 두드렸다. 자줏빛 입술을 가진/ 수증기가 문을 열었다. 내부의 벽과 바닥이/ 뜨거웠지만 견딜 만한 열기였다.// 수증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220볼트용 내 침묵의 연결기에 관한/ 질문으로 이해했다. 정직하게 답했다./ 수증기가 또 말을 건넸다. 나는 다시/ 그것을 더 세밀한 질문으로 이해했고,/ 길게 답했다. 나의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자 수증기의 자줏빛 입술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때에야 나는 어떤 답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이해했다. 바닥이 더 뜨거워졌다./ 수증기의 상체가 가로로 부풀며 사방으로 퍼졌다,/ 수중기의 하체가 내 허리에 축축하게 감겼다./ 내 몸이 물기로 뒤덮였다. 숨이 막혔다.// 입술이 사라진 수증기를 반으로 갈라 나는/ 수증기 사이에 길을 만들었다./ 나는 아직 젊었고, 놀라웠고, 거만했고, 침착했었다./ 수증기 사이로 길이 뚫리자/ 벽과 바닥의 열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사방을 메웠던 수증기가 사라질 무렵/ 자줏빛이 감도는 돌들의 바닥이 드러나면서/ 반으로 갈라진 작은 인간의 몸체가 보였다.// 나는 그 작은 인간 두 쪽을/ 내 침묵의/ 좌우 안주머니에 하나씩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긴 해변을 걸었다.// 사흘 동안 눈이 내렸고, 그 사흘 뒤엔/ 비가 내렸다./ 작은 인간 한 쪽이 점점 자라나/ 내 심장의 오른쪽에서/ 안개를 몰고 왔다, 또 다른 반쪽은/ 내 심장의 흐릿한 왼쪽에서/ 240볼트쯤 되는 전류를/ 내 몸에 주입했다.// 나는 쓰러졌다./ 끈적끈적한 전기가 내 몸을 더듬었다./ 그러고 곧바로 한기가 내 얼굴을 덮쳤다./ 양쪽 눈에 선인장 가시가 박힌,/ 자줏빛 돌들의 세 번째 어머니의 네 번째 바다의/ 두 번째 연인의 서른세 번째 파도의,/ 가죽이 벗겨진 멧돼지 토끼의/ 차가운 발바닥이었다.//

220볼트 커넥터 2 / 박상순
1981년 여름 한 무리 젊은이들이/ 남쪽 항구에 모였다. 같은 해 서부 해안에선/ 붉은 삼각형이 태어났다. 동시에 오래된/ 성황당 산길의 돌 하나가 자줏빛을/ 내기 시작했다. 1982년 4월, 성황당/ 아래쪽의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로 붕괴했다./ 버스가 추락했다. 사람들이 대피했고/ 주변 건물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그해 12월 26일, 27일, 이틀간 눈이 내렸다.// 월요일 저녁에, 내게서 사라졌던/ 반쪽 인간 하나를 붕괴현장 근처에서 만났다./ 제 몸의 한가운데서 자란/ 선인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머지 반쪽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뒤, 수요일 저녁/ 몸의 한가운데서 선인장이 자라나는/ 그 반쪽 인간이 다시 나타났다./ 철길을 건넜다. 강변을 걸었다./ 해 질 무렵 반쪽 인간이/ 밤마다 자신의 선인장 위로 기어오르는/ 시뻘건 생명체들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닌 척/ 나 역시도 그런 척/ 반쪽 인간의 몸에서 메마른 가시를 내민/ 선인장만 바라보았다./ 자신의 선인장 위로 기어오르는/ 어젯밤과 그젯밤의 시뻘건 생명체에 관한/ 반쪽 인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내 몸이 점점 옆으로 기울어졌다.// 반쪽 인간이 자신의 몸을 구부려/ 선인장에 얼굴을 묻은 채/ 기울어 쓰러지는 내 몸을/ 밤새 받쳐주었다./ 강 건너, 네온사인이 요란한 사거리를 조금 벗어난,/ 아주 긴 복도가 있는 실내였다.// 시뻘건 생명체들이 내 몸속을 밤새/ 쏘다니다가/ 떠났다.// 이틀간 눈이 내렸다.//

나의 고독은 90분간 허들을 넘었다 -220볼트 커넥터 3 / 박상순
1983년 5월의 첫 번째 수요일,/ 안개가 밀려왔다./ 그날 새벽의 최저 기온은 섭씨 10.3도였다./ 1986년 9월 24일 수요일은 맑았고/ 머리와 가슴에 커다란 숫자를 박은/ 어린 병사들이 사격장에서/ 가죽이 벗겨진 멧돼지 토끼를 향해/ 구식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2016년,/ 내 곁에 누워있던 5월의 첫 번째 수요일은/ 다리를 높게 올려 90분간 허들을 넘었다.// 나는 또 아주 긴 해변을 걸었다./ 나머지 반쪽 인간을 따라갔다./ 처음 본 그때 그곳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벽과 바닥의 열기도 수증기도 없었다.// 잠시 앉았다가 섰다가/ 반쪽 인간도 나도,/ 끝내 앉지도 서지도 않은 채/ 어색한 행동을 반복했다./ 흐물흐물한 반쪽 인간의 하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파도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반쪽 인간이/ 자줏빛 입술로 내게/ 도움을 청했다./ 마지막 인사였다.// 가죽이 벗겨진 토끼들이 내 머릿속에서/ 90분간 허들을 넘었다.// 그 반쪽의 바람대로 나의 길들은 모두/ 물속에 가라앉았다./ 6월 10일 오후의 축구 경기는 4시 18분쯤/ 끝났다. 그날 저녁의 기억은 없다.//

내 들꽃은 죽음 / 박상순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프랑스 니스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해 겨울은 쓸쓸했다./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외국인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내 들꽃은, 버스에서 내렸다. 내 들꽃의/ 지난여름도 쓸쓸했다./ 땅속을 벗어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 중년의 여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 들꽃은, 웃으면서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그렇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프랑스 니스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해 봄은 쓸쓸했다./ 목련은 피고, 하얀 목련은 피고, 언덕길을 오르는/ 버스의 차창 밖에서 목련은 활짝 피고/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내 들꽃을 감싸고, 내 들꽃은 다시/ 버스에서 내리고.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프랑스 니스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은 죽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독일 여자의 죽음 / 박상순
검은 옷, 짧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왜 그렇게 했나요?// 검은 옷, 짧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말해 줄 수 있나요?// 검은 옷, 짧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그게 언제였지요?// 긴 복도 끝에서 만난 상상 속의 한 여자가/ 자꾸 묻는다// 검은 옷, 짧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당신이 이곳에 온다 해서 빗속을 달려왔어요.// 검은 옷, 짧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내게 정말 말해 줄 수 있나요?// 긴 옷, 검은 머리, 검은 눈이 다가와/ 왜 그렇게 했나요. 당신은.// 내 몸 속에서 아주 오래된 물결 하나가/ 딱딱하게 굳으며 자꾸 묻는다.//

나의 물고기 남자 / 박상순
나의 물고기 남자가 트럭에 오른다. 트럭이 달린다. 트럭이 흔들린다. 충돌한다. 물고기 남자의 트럭이 부서진다.// 나의 물고기 남자가 부서진 트럭에서 빠져나온다. 바닷물이 흘러내린다. 바닥에 쓰러졌던 나의 물고기 남자가 일어선다. 나의 물고기 아이들과 마주친다. 나의 물고기 아이들이 물거품처럼 흩어진다. 나의 물고기 여자와도 마주친다. 나의 물고기 여자는 황급히 가던 길을 바꾼다.// 나의 물고기 남자가 둑둑둑 걸어서 나에게 온다. 문을 부순다. 커다란 물고기 남자는 겨우, 간신히, 부서진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온다. 물고기 남자가 쓰러진다. 커다란, 아주 커다란 물고기 남자가 내 앞에.//

내 손에는 스물여섯 개의 기다림이 있어요 / 박상순
터널이 있어요. 강이 있어요. 다리가 있어요. 언덕이 있어요. 계단이 있어요. 지붕이 있어요. 길이 있어요. 벽이 있어요.// 겨울이 지나가요. 눈보라가 지나가요. 봄이 지나가요. 여름이 지나가요. 노을이 지나가요. 비가 지나가요. 안개가 지나가요. 가을이 가요.// 얼음이 있어요. 모래가 있어요. 호수가 있어요. 바다가 있어요. 물고기가 있어요. 배가 있어요. 파도가 일어요. 파도소리가 들려요.// 구름이 지나가요. 두시가 지났어요. 세시가 지났어요. 일곱시가 지났어요. 여덟시가 지났어요, 열두시가 넘었어요. 달빛이 지나가요.// 가시가 있어요. 가위가 있어요. 부러진 가지가 있어요. 유리병이 있어요. 거울이 있어요. 햇빛이 움직여요. 가끔은 연기가 나요.// 지빠귀가 지나가요. 밤이 지나가요. 엷고 푸른 소리가 터널을 지나가요.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리던 깊고 붉은 바람이 강을 건너요.//

왕십리 올뎃 / 박상순
왕십리는 왕십리/ 하늘 아래 왕십리. 가을 왕십리./ 부서지는 낙엽 언덕/ 내려올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의 왕십리. 둘도 없는 왕십리.//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하얗게 밀어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여름, 웨딩홀 앞에서도 왕십리./ 목 없는 나무가 있고, 겨울이 있고/ 목 없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봄이 있고/ 그녀도 거기 있었음./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왕십리를 걸었음./ 지난 봄, 지하철역 앞에서/ 그녀를 보았음. 봄날의 그녀는/ 왕십리를 초대했음. 결혼식에 초대했음.// 미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초대했음./ 그러나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잎 떨어지는 왕십리에 있었음./ 그날은 슬금슬금, 가을비를 안고서/ 비 내리는 왕십리를 종일 걸었음.// 삐딱하게 주차를 한, 타조 알 같은/ 차에서 내리는 여자와 맞닥뜨렸음./ 여자가 소리쳤음./ 왕십리?/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달걀 같은 여자가 따라 내렸음./ 왕십리?/ 두 여자는 그녀들끼리 마주보고 소리쳤음./ 왕십리?//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뿌리치고 걸었음./ 비 내리는 왕십리를 마냥 걸었음./ 가을 왕십리/ 봄이 와도 왕십리, 밤이 와도 왕십리/ 낼모레도 왕십리/ 가을 왕십리.// 울긋불긋 단풍 들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쓸쓸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물결치는 왕십리, 그래봤자 왕십리, 리얼 왕십리/ 왕십리의 왕십리, 아직 왕십리.// 타조 알도 올뎃. 낼모레도 올뎃. 하늘 아래 올뎃./ 가을 가득, 올 뎃……/ 둘도 없는 왕십리. 끝도 없는 왕십리/ 가을날의 왕십리. 올 뎃 왕십리.//

그녀는 서른에서 스물아홉이 되고 / 박상순
철고양이 또는/ 무쇠늑대가/ 주유소 지붕 위에서/ 늙는 밤// 그녀는 서른에서 스물아홉이 되고/ 나는 서른하나에서 서른셋이 되고// 철고양이 또는 무쇠늑대가/ 늙는 밤// 그녀는 황혼에서 새벽이 되고/ 나는 황혼에서 한낮이 되고/ 불을 켠 자동차는 달려가고/ 불을 켠 자동차는 달려오고// 철고양이 또는/ 무쇠늑대가/ 주유소 지붕 위에서/ 늙는 밤// 나는 둘에서 하나가 되고/ 그녀는 하나에서 둘이 되고/ 나는 둘에서 하나가 되고// 철고양이 또는/ 무쇠늑대가/ 주유소 지붕 위에서/ 늙는 밤// 그녀는 서른에서 스물아홉이 되고/ 나는 서른에서 마흔이 되고//

나는 네가 / 박상순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너를 닮은/ 물렁물렁한 시냇물, 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죽은 말의 여름휴가 / 박상순
죽은 말이 여름휴가를 떠난다/ 아직 살아 있는 말들의 마을을 지나/ 달린다// 죽은 말은/ 오래전에 사라진 나의 미래/ 살아 있는 말들은 내 미래의 시간이 죽은 뒤/ 솟아난 엉뚱한 미래// 이제서야 죽은 말은 여름휴가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엉뚱한 미래를 지나/ 달린다. 달린다// 죽어서도 달린다/ 죽도록 달리고 또 달려서/ 바다로 간다// 바다는/ 이미 오래전에 닥쳐온 나의 고독/ 모래알 같은 고독이 파도에 쓸려/ 밀려가고 밀려오는/ 여름은/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죽음// 꼬리에 죽음을 달고 내 죽은 말이/ 여름휴가를 떠난다/ 죽은 말/ 죽어버린 말/ 죽은 말/ 다시 살아나도 영원히 죽어버릴 나의 말//

공구통을 뒤지다가 / 박상순
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 버스 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뾰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폭포 앞에서 / 박상순
그녀는 콩 한 개/ 나는 콩 두 알// 그녀는 별 하나/ 나는 별 두 개// 그녀는 갑자기 오토바이를 사고/ 나는 높은 산, 높은 길, 높은 구름, 더 높은 하늘을 사고// 그녀는 콩 한 개/ 나는 콩 두 알// 그녀는 별 하나/ 나는 별 두 개// 나는 갑자기 높은 산, 높은 구름, 높은 하늘 위의/ 날개 달린 물고기가 되고//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내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녀가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 그래도 그녀만을 폭포처럼 사랑했을 때// 그녀는 콩 한 개/ 나는 콩 두 알// 그녀는 별 하나/ 나는 별 두 개// 그녀는 갑자기 오토바이를 사고 바다를 사고/ 나는 그녀를 위해 무지갯빛 물고기를 사고// 그러나 그녀가 죽고/ 내가 죽고// 그녀가 살아나고/ 나는 그냥 죽어버리고// 그녀는 별 하나/ 나는 별 두 개// 그녀는 콩 한 개/ 나는 콩 두 알// 나는 갑자기 높은 산, 높은 구름, 높은 하늘 위의/ 날개 달린 물고기가 되고//

네가 가는 길이 더 멀고 외로우니 / 박상순
현실에 몸을 두고 살기가 외로워 의자 위에 내 몸을 올려놓습니다. 올려놓고 보니 불편한 의자입니다. 그리고 보니 의자도 현실입니다. 이번에는 의자를 몸 위에 올려놓아 봅니다. 무겁습니다. 의자를 내려놓고 나 자신과 맞서보기로 합니다. 온갖 사실들이 기억의 창고에서 쏟아져나옵니다. 한동안 그것들과도 맞서보지만 여전히 의자 하나 놓여 있습니다.//

저 하늘엔 비행기가 갑니다 / 박상순
그래서 외로운 나도 길을 나서봅니다. 우연도 필연도 아닌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내 좁은 경험을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혼자 가기가 심심하기는 하지만 큰 길을 따라 강변까지 나갑니다. 이제 계단을 내려가면 강입니다. 오른발 왼발. 강변에선 함부로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른발 왼발. 나는 갑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고 합니다 / 박상순
강변에 나와 바람을 쏘입니다. 눈을 감아봅니다. 내 의식이 바람 속에서 눈을 뜹니다. 내 몸은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누워있는 몸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바람을 쏘인 탓인지 의식이 자꾸 가벼워져 몸 밖으로 새나갈 것 같습니다. 하나 둘. 새어나갑니다. 새나가고 맙니다. 저 하늘엔 비행기가 갑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고 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이 더 멀고 외로우니 나는 잠시 여기서 멈춰 있으라고 합니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1년 뒤 / 박상순
시외버스를 타고 피난을 갔다/ 위조지폐를 만들던 사람들이 붙들려 갔다/ 내 아버지도 붙들려 갔다/ 삼촌은 전쟁터로 돈에 팔려 나갔다/ 나는 덜 늙은 할머니를 매달고/ 피난을 갔다// 새끼 염소가 나를 구경하러 나왔다/ ―저런 새끼 상관마!/ 밥상을 따로 차려 먹으며/ 염소네 식구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다시 피난을 갔다/ 누런 송아지가 나를 구경하러 나왔다/ ―너, 100까지 쓸 줄 알아?/ 할머니는 자꾸 주저앉았다/ 밤마다 빗자루 귀신이 내 뒤를/ 쫓아다녔다//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 / 박상순
여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이 있다/ 철문을 뜯어서 만든 얼굴이 있다// 작은 철문으로 만든 얼굴, 큰 철문으로 만든 얼굴/ 모두, 검게 칠한, 검은 얼굴들/ 처음에는 옥상에, 복도에/ 다음에는 문밖에, 거리에/ 이제는, 산에도, 바다에도/ 무거운 철문을 뜯어서 만든, 무거운,/ 딱딱한, 차가운, 너무 무거운,/ 여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이 쌓여 있다//

허전한 인사 / 박상순
아내가 옷장 정리하다 십 년 넘은 양복을 이제 버리자고 한다. 두어 벌의 새 양복이 옷장에 걸리는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양복을 버리자고 한다. 털이 다 빠지고 소매 낡아 몸에도 맞지 않는다. 어깨가 좁고 소매가 달랑 올라붙었다. 뿌리양복점이 문 닫은 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옷장에는 아직 뿌리양복점이 걸려 있다. 안주머니에 뜨겁던 젊은 날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비닐봉지에 싸여 구석으로 밀려난 양복을 꺼낸다.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의 문을 닫는다. 젊은 날 수고 많았다.//

여행자의 책 2 / 박상순
내 죽음은 오랫동안 방안에 있다./ 문을 열어놓아도/ 문을 닫아놓아도/ 소리도, 흔적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방.// 방과 방 사이의 문들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었는데/ 내 죽음은 혼자서 없는 문을 열고/ 없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없는 문을 열고 또 닫다 보면/ 내 죽음이 조금씩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죽음의 방안에서 내 죽음이 자란다.// 한 뼘쯤, 아닌 손가락 한 마디쯤/ 내 죽음이 자라다보면/ 손톱만큼 남아있을 내 미래의 슬픔과도/ 이별할 수 있을까.// 1860년 3월 내 죽음이 시작될 때/ 미래는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 청계천 7가에서 한 여자 아이가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가/ 내 죽음과 마주쳤다.// 아이는 놀라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끝에서도 내 죽음을 알아보고/ 등에 푸르른 꼬리가 달린 내 죽음을/ 나비처럼 따라왔다.// 내 죽음이, 다른 모든 죽음들이 서성이며 흘러가는/ 지하 통로에 앉으면/ 아이도 내 죽음 옆에 앉았고/ 내 죽음이, 다른 모든 죽음들과 함께 웃옷을 벗고/ 신발을 벗으면/ 여자 아이도 내 죽음 옆에서 신발을 벗고// 아프다, 안 아프다./ 기쁘다, 안 기쁘다./ 이런 말들을 맑고 고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맑고, 고운.// 그러나 긴 다리를 가진 딱딱한 내 죽음은/ 푸른 꼬리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죽음만이 지나가는 지하 통로를 지나서/ 내 죽음의 거처로 혼자 돌아왔다.// 그곳에서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50년의 세월이 돌고/ 이듬해, 그 이듬해. 이듬해// 내 죽음이 혼자 강변에 앉아/ 영원히 죽어가고 있는/ 내 죽음의 등에 달린 푸른 꼬리를 강물에 담그고/ 내 죽음의 느린 슬픔을 호소했다.// 오래전의 그 소녀도 이젠 죽음이 되어/ 그날, 강변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맑고 고운 소리로 소녀의 죽음이 속삭였다.// 나는 요리사가 되었어요./ 지금은 빵을 만들어요./ 매일/ 그런데 이제 신발은 없어요./ 두 다리를 잃었어요./ 오래전에/ 지금은 매일 빵을 만들고 있어요./ 죽은 뒤의 시간은 너무 길어요.//

고래와 시금치 / 박상순
고래와 시금치가 터널 입구에 있다./ 어디로 향하는 터널일까. 터널의 입구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처럼 내리막이다.// 어디에서인가 환한 빛이 내려와 터널의 입구를/ 밝게 비춘다./ 물결은 잔잔하다. 나는 유리병을 들고/ 물속을 걷다가/ 고래와 시금치가 있는 터널 입구에 서 있다.// 물속은 고요하다. 물속의 모든 것들이/ 터널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듯/ 아무것도 없는 입구에 내가 있다./ 고래와 시금치는 죽지도, 썩지도 않았지만/ 움직이지도, 자라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물속에, 불빛 아래, 터널 입구에/ 고래와 시금치와/ 유리병을 들고 있는 내가 있다.// 유리병 속에 헬리콥터/ 유리병 속엔 또, 고래와 시금치가 있다./ 물속은 잔잔하다. 나는 물속을 걷다가// 고래와 시금치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들고 서 있다. 병 속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다.//

자네트가 아픈 날 2 / 박상순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이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 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가수 김윤아 / 박상순
내 이름은 윤아야. 가수 김윤아. 좋아하는 뮤지션? 그런 건 없어. 시집. 그런 건 안 읽어. 책? 『고원―정신분열증2』를 몇쪽 봤을까? 책표지는 기억해. 시인. 빵공장, 마라나. 그런 시를 쓴 시인의 디자인일 거야. 아무튼 내 이름은 윤아야.// 까르푸에서 그 시인을 보았어. 내 얼굴은 몰라. 그 사람은 나를 몰라. 그는 파니 프라이스만 생각해. 그 여자는 화가야. 화가지망생.이탈리아에서 죽었대. 이야기 속의 이야기야. 엑스트라였나 봐. 그런데도 그 여자만 생각해. 하지만 내가 만든 노래야.// 사실 내 이름은 파니야. 스페인어 할 줄 아니? 내가 복사했어. 가수 김윤아의 노래. 내 친구 윤아가 감기약을 먹고 누워 잠들었을 때, 나와 함께 가기로 한 스페인 꿈을 꾸고 있을 때 내가 했어. 어떻게 된 거냐구? 물음표를 뒤집어봐. 새우 한 마리. 바다에서 잡혀온 새우 한 마리. 탱고 춤을 출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 속으면 안 돼! 내 이름은 윤아야. 가수 김윤아. 정신적인 윤아, 즉물적인 윤아. 하지만 내게는 없어. 인상적인 윤아, 사실적인 윤아, 표현적인 윤아. 대면적(對面的)인 윤아. 침투적인 윤아. 음악은 좀 아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 슬프다고 생각하니? 미니멀하지! 잘 생각해. 내가 복사했어.// 미니멀한 것으로 한 곡 들려줄까? 하지만 뒤틀 줄도 알아야 해. 내 비극의 컬러를 모르면 마라톤 경주를 관람할 수 없단다. 본능이라고 생각하진 마! 눈을 감으면 잘 들리니? 귀를 막으면 더 크게 들리지? 그 사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빵공장, 마라나. 그런 시를 쓴 사람 있잖아. 사실은 내 시야. 새우 한 마리. 바다에서 잡혀온 새우 한 마리.// 내 이름은 윤아야. 가수 김윤아. 너에게도 써줄까? 아니면 한 곡 들려줄까? 컬러풀한 걸루. 아이덴티티는 너무 20세기적이야. 난 움직여. 움직이고 있다구. 하얗게 밀려오는 밤바다의 파도. 이른 아침 7시 50분에 시청사 정문 앞 도로변에 서보면 다보여. 현대적으로, 21세기적으로, 그렇지만 능숙하게 르네상스식으로도. 너도 한번 볼래? 하지만 잘 생각해! 속으면 안 돼. 나 말고, 나 말고, 너에게 속으면 안 돼. 사실 내 이름은 꿀벌이야.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속옷이야. 새우야. 메타피지컬이야. 하얗게 밀려오는 밤바다의 파도. 동사야. 명사야. 알타미라 벽화야. 치솔을 사러 가는 곰인형이야. 변신이야. 장치야.// 밤이야. 아침이야. 하늘이야. 땅이야. 새벽이야. 바다야. 33, 44, 66――나야. 나.//

기린 / 박상순
밤의 바닷가에 앉아 양말을 신는다. 기린이 달려오는 것 같다. 벗어놓은 웃옷을 걸친다. 아직도 기린이 달려오는 것 같다. 기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란 목이 바다에서 올라와 밤의 모래밭을 달려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육지 쪽으로는 환한 불빛이 아직 빛나고 가끔씩 웅성거리며 몇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검 푸른 물 속에서 기린이 나와, 내게로, 내게로 달려오는 것 같다.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잘못 된. 그런데도 자꾸 기린이 달려온다. 양말 때문일까. 한쪽 양말을 벗어본다. 그래도 자꾸 기린이 달 려오는 것 같다. 나머지 한쪽의 양말도 벗는다. 기린. 어깨에 걸친 웃옷을 다시 벗는다. 기린. 물에서 나온 기린이 모래밭을 건너 내게로 온다. 나뭇잎 같은 별들이 떨어져 기린의 목을 스친다. 달빛이 그물이 되어 기린에게 내려온다. 갑자기 형광등 공장이 보인다. 형광등 공장이 불탄다. 기린이 또 달려온다. 기린. 달빛 그물을 뚫 고 기린이 달려온다. 내 앞에. 기린. 눈앞에는 갑자기 형광등 공장이 보이고 형광등 공장이 불타 고. 또 달려온다 기린.//

안녕 / 박상순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살았다는 남자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미 죽은 그녀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미 죽은 나는 여자였을 지도 모른다고/ 나도 잘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골목은 조금 어두웠지만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고/ 아직 겨울바람이 남아있어서 어깨를 잠깐 움츠렸지만/ 옷깃을 다시 여미며 나는/사내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20년 전에 여기서 죽었다는 여자가/ 내 웃옷을 들고 내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20년 전에 내 유리관 속에 누워있던/ 어떤 젊은 여자의 생김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늦고/ 갑자기 더운 여름밤이 되어버렸는지/ 목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차가웠고/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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