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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한경용 시인

부흐고비 2021. 12. 30. 09:10

한경용 시인
1956년 제주도 출생하여 제주도 김녕리와 부산 영도에서 성장하였다. 인하대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국제관광대학원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료하였다. 2010 《시에》 신인상 수상 후 『문학사상』 등에서 작품 활동. 〈포에트리 아바〉 편집위원. 시집으로 『잠시 앉은 오후』, 『빈센트를 위한 만찬』, 『넘다, 여성 시인 백년 100인보』 가 있음. 한양대 총장 공로상, 중앙대 총장 문학 표창상, 《시와 에세이》 신인상 수상.



아침과 이별을 하다 / 한경용
언제나 승자인 그가/ 빛무리의 유리벽을 나갈 때/ 나는 그의 산 그림자에 묻힌 음지식물이었다.// 그가 강의실에서 바오밥나무를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벤치에서 시간의 나무를 자르며/ 나이팅게일의 울음을 귀로 마셨다.// 한 번은 그가 투우 조련사처럼 경기장을 제압한 날,/ 나의 오토바이는 미루나무에게 위로 받으며/ 부스러기 잠을 잤다.// 나에게는 오지 않는 간절한 환희가/ 냄새 없는 햇살로 그 곁에서만 맴도는 것인가.// 그의 지식이 소금 창고가 되어 환호를 받을수록/ 눈 속에 무거운 바다를 넣고 다닌 나,// 그가 장미원에서 들국화를 그리워할 때/ 굴곡이 심한 나의 못물은/ 차디찬 구름꽃으로 내 얼굴을 그려 주었다.// 그믐이 저만큼인데 연극무대를 내려오는 내게/ 행방불명 된 내 속의 누군가/ 알람으로 알려준/ 인형에게도 생일이 있다는// 애완견이 떠도는 길에서/ 나는 천사의 책을 태우고/ 달을 싣고 가는 마차에서/ 노을을 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아침마다 이별한다./ 버려졌거나 찢어진 계급장과/ 쓰러진 침대,/ 검은 예복의 지난날들을/ 파도는 언제나 골짜기로 밀려갔었다.// 오후의 유리창 속 거실 저편/ 아다지오가 흐르는 그의 종신형 의자,/ 내 안의 갈바람이 비바체로 부는/ 계곡의 항명//

달빛 조각 / 한경용
노인도매상가라는 병원에 계신/ 어머니의 종합고독세트를 디스플레이 하면/ 참외를 깎아 먹던 어릴 때의 냄새가 있습니다./ 건반 위에서 키운 향긋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4·3 구덩이에 숨었다가/ 눈꽃 속의 총알을 피해 살아나신/ 달빛 조각이 있습니다./ 그 멜로디의 굴레에서 즉흥 모자를 쓰고/ 국제시장에서 비로도 장사를 하며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리셨던 당신의 스무 살,/ 맹렬한 시장터에 연꽃 향기를 세일 하신 부처님이/ 타월로 지친 마음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강렬한 묘사와 터치를 하며/ 제주도의 산과 바다를 누볐던/ 바람은 당신의 악보/ 환상의 올레를 연주하는/ 페인트가 벗겨진 단층집 나일론 빨랫줄 위로/ 팔짱을 낀 햇빛이 어슬렁거리면/ 어머니의 뒷겨울에서 나오는 안개 바람으로 말려 올린 아이들/ 병실에 놓인 팬지가 설레던/ 하늘에 속살이 묻힐 시간,/ 눈먼 정원에 버무려질 봄을 입히는 밤/ 바지선을 예인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시고 계십니다.//

쉰 / 한경용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캄캄한 극장으로 들어갔다./ “생일 축하합니다.”/ 삼십 년 다닌 회사의 액정 문자 관리인이 조기 퇴직을 알려 왔다./ 곡예 비행하듯 살아온 날들이/ 만 볼트의 빗방울로 쏟아지자/ 나는 감기에 걸려 블라인드를 내렸다./ 지난여름이 아픈 친구는 다시 몸조리를 하여 앞서 가고/ 이번 가을이 아픈 한 친구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멀미는 쌀가마니를 운반하다/ 진흙 위에 와르르 쏟아 버렸다./ 흙덩이, 돌덩이까지 섞인 쌀을 주섬주섬 담다가/ 도미노 게임같이 기쁜 일이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퇴직하던 날부터/ 목을 죈 넥타이와 케시미어의 머플러가 소동을 일으키며/ 쉰을 스캔으로 떠서 들고 다녔다./ 자재 적재장의 가시 철망인 내가/ 쌩쌩하게 잘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하늘처럼 보였다./ 삼백 원짜리 즉석 위안을 마시려다/ 버튼을 잘못 눌러 얼음을 먹었다./ 검은 다이어리에서 깨어나/ 장거리 역전 슛을 날리는 독감 걸린 시/ 보헤미안의 들판을 달리는 바람과/ 내 안에서 코러스를 하는/ 잠시/ 쉰//

죽은 시인의 노래 -황병승 시인을 위하여 / 한경용
잠은 무거울수록 역한 냄새가 나는 법/ 아까부터 자꾸 냉장고를 열고 싶었다/ 비틀어진 밀빵과 반 쯤 남은 우유를 마셔야 목이 풀렸다/ 터널을 빠져나온 저녁에 들려오는 소리는/ 먼 이방의 문을 두드리다 가는 종소리를 닮았다.// 책상 앞에서 하얗게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눈물이 모래처럼 모여지기 위해선/ 많은 바람의 수련이 필요하다/ 오랜 갈증은 이렇게 잔잔히 부서지는 거다/ 바위에 새겨진 기록이 얼마나 참아야 할 부서짐이 였던가/ 알갱이로 다져진 기록, 다갈색 먼지가 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바닥에선/ 어제로 흐르는 내일이 되는 것이다// 잉태를 한 나무들은 날이 저물 때 까지/ 신기루를 져 나른다/ 그늘을 말리는 날에는 당신은 곤줄박이의 무늬를 닮았다/ 숲의 거처를 바라보는 강물이 입김을 쏟을 때/ 바람은 무한대의 음악으로 변화되었다/ 티 테이블에서/ 딱 한 개의 설탕 봉지를 남겨 놓듯,/ 당신의 뒷모습은 언제나 씁쓸함을 찾는다// 어디서 날아 온/ 청둥오리가 천변의 개울가에서 알을 낳는다/ 일월(日月) 위에 입혀진 무늬를 보고 자기 그림자를 찾는 것이랴/ 아침 햇살이 있다간 순간/ 한 모금의 물을 마시기 위해선/ 더 많은 순결을 지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등어가 있는 풍경 / 한경용
어부들은 그물 속에/ 찰랑거리는 투명을 길어 올린다./ 포구의 바닥에는 눈알들이 부러져 있다./ 물로 그린 형상이 시간 속에 무엇을 남겨놓았나./ 심해에 무덤을 남겨놓을 수 없는 운명/ 종족의 기억으로 핏자국을 씻을 때/ 아득한 개펄너머 물컹물컹 울음이 번진다.// 허리 질끈 묶은 아낙이 도마 위 칼질로/ 대가리 갑각류 비릿한 내장을 싹둑 훔쳐낸다./ 좌판대 아래 플라스틱 통에서/ 미추(美醜)의 한 생이 절여진다./ 양은 냄비 보글보글 상념 끓는 소리/ 빈한한 몸은 겨울 한 병을 마시는가.// 낡은 연안에서/ 잡혀 올린 물 떼 주변의 깃대와 밀대/ 한 여름 철 바다를 향했던 초로(初老)의 장화/ 뿌연히 비 내리는 어시장에 호객소리 멈췄는데/ 파드닥!바닥에서 마지막 눈을 부릅뜨는 자의 항거/ 어등(魚燈)은 타오른다.//

나는 꿈꾸지 않았다 -don't try* / 한경용
곡절이 많아도 살 수가 있어/ 못나 보이거나 흔들릴 때 마다 찰스,/ 이젠 당신을 패러디 할거야/ 나는 날마다 당신의 액정 화면에 달라붙는 달팽이/ 소망이 있다면 멋진 사랑 시 몇 편을 불끈불끈 낳고 싶은 것,/ 책에서 태어난 자는/ 한낮까지 내쳐 자는 법이 커피를 젓는 것보다 어려워/ 게으름의 미학으로 행간마다 어슬렁/ 이따금 교회 옆 술집에 가서 낮술을 마시지/ 부패로 발효된 설교보다/ 쓴 호프 한 잔이 희망을 끼니로 떼울 수 있어/ 무료한 시집 읽고 나면/ 쓰레기통 속으로 머리를 쳐 박아 보아/ 어쩌구저쩌구 빵을 먹는 아비의 냄새/ 아비의 죽음으로 강하게 정글을 헤쳐 나왔으니/ “달빛 소나타“라 할 수 있을까./ 할부 대출은 꼬리를 치며 한 생을 끌고 가고/ 가로수는 가로등을 증오하며 추월을 하고/ 타자의 면허증으로 달리다 보니/ 거울을 보며 개가 짖듯 줄창 싸우게 되지/ 시 공간을 오르락 거리며 가는 이번 생./ 애쓰지 마라/ 지옥 행 열차의 창밖에도 오랑캐꽃은 피어/ 후생은 차선을 변경해야 묘비명이 보일거야.//
* 미국의 아웃사이더 시인 찰스 부코스키 ( 1920-1994)의 묘비명

탄실 김명순, 한없이 넓고 먼 / 한경용
안개의 나라에선 해를 보고 달이라 하지 눈물샘 너머 망양생 먼바다로 가면 슬픔이 잊힐지도 몰라. 나는 처음부터 신태양을 부른 '의심의 소녀'* 그대들의 등 뒤에서 별(別) 그림을 생명의 과실**로 따리라. 매미 울음은 파아란 문장의 운율, '나'라는 계절이 출입금지 되었다면 당신들이 일군 고압전선은 벌레탄압쾌락추종자 일 뿐, 자가자무(自歌自舞)라며 실시간 헛소리라 하리라. 그래요, 인간실격 문단에선 모두가 헌 문장을 좋아하세요. 난봉주의자가 말하는 탕녀의 소리로 당신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복제캐릭터로 그릴래요.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새들의 유언을 들었나요. 사이코패스 연인은 무위도취로 떠나도 세상 망언 숨은 꽃은 음주가무 망나니의 귀환을 반기지요. 나쁜 피 콤플렉스는 작품보다 사생활을 즐긴다면서요. 불과 얼음의 갈림길, 꽃과 칼의 자백, 차라리 우물 안 아기 인형과 놀래요. 그곳은 황녀의 섬이라지요. 불행 상속녀와 자존감 수업을 함께할 용기가 있다면 또 다른 뇌는 마음앓이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여자계 '의 거듭나기로 자화상을 그린 종이 여자 탄실, ‘나, 거기 있어 줄래요?’ 정신병동의 연대기에선 지금 한밤인지 한낮인지 몰라요.//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든지 들에 피 뽑았든지 죽은 시체에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탄실 김명순의 등단작, ** 탄실 김명순의 시집, *** 김명순의 시 '유언 ' 전문

고갈산 유튜브 바로가기 / 한경용
부산 영도 초등학교 뒤에 고갈산 있다/ 헐벗겨져 목마른 사람들 부른 산 있다/ 도시락 못 싸 온 애린원, 천사원 아이들 있다/ 학교에서 나눠 준 강냉이떡으로 점심을 먹는 시절 있다/ 산 아래 닥지닥지 붙은 판잣집 있다/ 흥부네 같은 가난들이 주렁주렁 박처럼 열린 집 있다./ 가락국수, 검정 고무신, 화알짝 뛰는 날 있다/ 산 위로 흐르는 솜사탕 구름 있다/ 그 산만 쳐다보면 배고프지 않는 시절 있다./ 초롱초롱한 가난을 찾아 간 날 있다/ 풍성한 봉래산 산마루에 올라, 야호! 하며 있다/ 봄 나절 가득 고무줄 자른 운동장 있다/ 미군 막사 콘세트 교실은 없고 콘크리트 교실 있다/ 담벼락에 내가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 있다/ 국민학교 말만 들어도 설레는 반백의 중년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짓누른 주름 있다/ 복실 강아지처럼 똘망 똘망 눈망울 있다/ 도선장에서 멱 감다 따온 홍합처럼 살아남아 있다/ 세상사 넋두리, 한 소쿠리로 보듬고 있다/ 가난해도 씩씩하게 먼지바람 일으킨 산복도로 있다/ 그 속을 달려온 꼬맹이들 있다/ 멀리서 불어온 소금기 먹은 바닷바람 있다/ 바람 속에 갈매기 안기듯 있다// 절터 부처님, 언제나 그 자리에 빙그레 있다/ "고생했네들, 그려 "하시며 있다//

나비와 벌레 사이 / 한경용
낙원동에서 인사동을 가다가/ 생의 한 토막이 맨홀에 빠졌다./ 상상을 빼앗긴 안경을 낀 채/ 지하 단간 방에서 바퀴벌레로 기어 다녔다./ 바다를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독방에 감금된 빠삐용은 기어가는 벌레를 먹었다지./ 창문 사이 들어오는 햇살 입고 날아가/ 매화나무와 더부살이 하자던 너,/ 석양을 진 증명서가 바닥에 눕자/ 비굴을 노란 새끼로 엮어/ 가판대로 모두를 유혹하였다./ 하늘로 공기처럼, 꽃의 꿀을 모으려다/ 착지 금지를 선물 받았나./ 양 날개가 거미줄에 걸릴 때마다/ 풀잎 방울로 쓴 메시지/ 비 온 뒤/ 검버섯이 널 바위에서 삭제되면/ 나에게 밥을 멕인 벌레를 죽이고/ 다리 건너 안개 속으로/ 팔랑팔랑//

나비의 착각 / 한경용
고무풍선이 되다 기다리던 출근과 팔짱 끼는 날/ 베란다의 나비 빨래한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되고/ 바이올렛 빛 꿈을 꾸었다/ 밤의 진실을 배우다 정규직으로 가는 코스/ 행간마다 주변을 맴돌았다./ 백지장 한 장에 불과한 경계 강 건너만큼 아득하였다/ 먼저와 반기는 솔나무가 단풍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기다리는 벽 앞에서 포장한 뜨거운 얼음/ 아침 이슬로 사라지다./ 스산한 파도가 노니는 연구실과 작별하는 오후/ 낡은 증명사진을 담은 가방이 떠가는 폐선장/ 겁먹은 이력이 공중으로 솟구친다.//

나비의 뼈 / 한경용
나는 한때 북촌이 만든 경계석인/ 감고당 길을 날던 나비/ 오동나무 위에서/ 폭풍우 가르던 날도 있었지// 여름이면/ 난향(蘭香)에 취해 나래를 접거나/ 십장생 연꽃자수 궤목 안에서/ 숨 막힌 적도/ 결마다 방향이 다른 연잎/ 수놓은 물은 화려했어라// 고가(古家)의 사랑방에서/ 내려놓지 못한 가야금 산조에/ 사대부는 언어의 샘이 타들었나/ 퇴청 마당에 핀 나리꽃은/ 바람이 탈색한 무늬/ 육신이 재가 되어 부는 날/ 한 줌의 기록은 꽃대의 흔적으로 무너진다// 딸기와 블루베리가 얼붙은 글라스/ 용달에 가득 펼친 가회동 삼거리/ 길에서 만난 양반탈과 말뚝이탈이/ 북촌의 정적을 깨운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서 / 한경용
전생이 무당이라 관절마다 통증이 아리오./ 후생이 배암이라 꽃은 수면 아래 흔들릴 것이오./ 진도의 가을 운동회/ 백합 핀 모자 노랑 원피스 길례언니/ 씻김굿 추며 레테의 강을 건너갔지요./ 황금 술잔에 담근 비구름으로/ 막간의 무용수는 나비의 고(孤)를 불러 모으지요./ 페르샤 왕녀도 아기 업은 동냥치 페루 여인도/ 눈동자는 언제나 애(哀)였고/ 6월의 신부 초상화로/ 앵무가 울던 몸 위로 표범이 지나 갔어요./ 여명을 기다리던 뱀 두 마리 엉켜 붙어/ 이마를 기어가다 화관으로 엮이면/ 목이 떨어진 청춘/ 슬픈 전설의 페이지마다/ 굵은 물줄기가 쏟아졌지요./ 폭포는 뒤돌아보면 언제나 산의 오열이었고/ 평원의 바위틈엔 꽃들이 하품을 하는데/ 뱀이 스멀거리는 신록을 여인의 절기라 하면 안 되나요./ 사랑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나의 머리채를 잡은 냉소의 여인./ 꽃잎을 통한 음절이 풍습을 이루면/ 세상 밖 음흉한 소문마다/ 바람의 선과 색으로 폭염 주의보를 해제해주오./ 나비의 목소리로 날갯짓 할 테니/ 내일은 비/ 빗빙울로 이제 그만 창을 설치해주오.//
* 천경자

달랑 / 한경용
장모님은 눈이 크시다. 금방 울어 버리신다. 그 눈에 아이샤도우를, 곱게 옷을 입고 악어 핸드백 들고 당당하게 개업한 사위의 여행사에 나들이 오신다. 봉봉 쌕쌕 두 박스를 들고, 장인 어르신과 같이 후배와 같이 쓰는 신설동 골목의 보증금도 없는 사무실, 달랑 책상 두 개 전화 두 대, 장인은 중국 여행에 대해서만 열심히 물어보신다. 여기저기 사무실을 보다가 전화통을 보다가, 장모님의 큰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다. 얼른 감춘다. 달랑 맨 몸뚱어리로 결혼한 사위의 자존심을 위하여 얼른 웃어야 한다. 눈물이 보이지 않기 위하여 큰 눈을 껌뻑껌뻑 거르신다. 그래, 눈물은 안으로 들여 넣어야지 눈물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여 넣는 것, 골프투어 상담을 마치고 “전화는 그래도 좀 옵니다.”라고 말하니 장모님은 젖은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중으로 얼굴을 돌리신다. 네 살배기 아들과 갓 돌이 지난 딸을 둔 저 불안한 외줄을 탄 사위 놈, 기죽일라. 벽에는 달랑 거울 하나, 폼페이유적 사진의 관광 캘린더가 뜨거운 나의 여름을 태우며 위태위태 걸려 있었다. 그 캘린더 를 구경하는 척, 거울을 보는 척, 눈 화장을 고치는 척, “사무실이 참 아담하네. 하고 너스레 떠신다.// 검은 눈물은 하늘에도 있다. 베수비어스 산정에서의 화산 폭발로 석고가 된 엎드려 절규하는 임산부, 몇 백 년째 쪼그려 기도만 하는 남자 폼페이는 그날 이후 잿더미에 갇혀 검은 비만 내렸다.// 여행사 책상 위에 있는 계간 문예지를 보시더니// 아이라인이 뭉개진 눈 속으로 검은 눈이 반짝인다. “내 딸 세끼 밥만 먹여주고 시를 쓰든 말든 해주어.”내게로 흐르기 전에 커피에 타서 그렁그렁 마신다.//

한없이 넓고 먼 / 한경용
안개의 나라에선 해를 보고 달이라 하지, 눈물샘 너머 망양생, 먼 바다로 가면 슬픔이 잊혀 질지도 몰라, 나는 처음부터 신태양을 부른 “의심의 소녀”*, 그대들의 등 뒤에서 별(別) 그림을 그리리라. 매미의 울음은 파아란 문장의 운율인가. 미루나무에 ‘나’라는 계절은 출입 금지되었네요. 당신들이 일군 고압전선은 벌레탄압쾌락추종자일 뿐, 자가자무(自歌自舞) 실시간 헛소리라 하리라. 그래요, 인간실격 문단에선 헌 문장을 좋아하세요. 난봉주의자가 말하는 탕녀의 소리로 당신들의 복제 캐릭터, 일그러진 욕망을 즐겨 그릴 테니까요, 아오야마 뇌병원으로 귀환 후 새들의 유언을 들었지요. 사이코패스 연인은 무위 도취로 떠나도 세상 망언 숨은 꽃은 술 마시며 놀던 망나니의 귀환을 반긴다면서요. 나쁜 피 콤플렉스는 작품보다 사생활을 즐긴다니 불과 얼음의 갈림길, 꽃과 칼의 자백, 차라리 우물 안 아기 인형과 놀래요. 그곳은 황녀의 섬이라지요. 불행 상속녀와 자존감 수업을 함께 할 용기를 갖는다면 또 다른 뇌는 마음앓이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이제 여자계의 거듭나기, 자화상을 그린 종이여자 탄실! 나 거기 있어 줄래요? 정신병동의 연대기에선 지금도 한밤인지 한낮인지 몰라요.//
* 1917년, 한국 최초 여성 작가 시인, 탄실 김명순의 등단 소설
 주) 한국 여성 현대시 100년 100대 여성시인 소제 연작시 1

한국현대여성시인사(史) 100년, 100인보 연작시 3 -김일엽, 수덕사의 흰 / 한경용
스님 밤이 깊습니다. 이 밤이 깊은 만큼 물도 산도 여우의 울음도 깊어 가겠지요. 환희대를 지나다 보니 아직 등불이 켜져 조심조심 걸어갔습니다. 낮에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읽은 불자 여인이 왔었습니다. 저처럼 그 책을 읽은 예비 비구니로 보입니다. 사랑에 돌팔매를 맞은 탄실은 일본에서 풍찬노숙하고 혜석은 수덕여관에 와서 그림에 정진하는데 심덕은 사랑과 함께 현해탄으로 몸을 날렸다지요. 그렇다면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큰 스님이 되셨군요. 암울했던 시대, 앞서간 신여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께서 스님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하죠. 채공 준비를 하다 보면 바람에 흐느끼는 솔의 소리사, 허공에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촛불에 비친 법당의 그림자, 목탁 소리 이 밤에 소승의 심장을 앉히는군요.// 스님의 유일한 아들이 찾아온 날, 어미라 부르지 마라. 차갑게 거절하시는 모습에, 행자의 쌀 씻는 소리 새들이 우는 소리에 함께 실려 나갔습니다. 108 번뇌 함께 묵언의 찰나, 어이 풍경소리도 멈추는지 모두가 불타의 뜻인지요. 일주문에서 서성이던 중년 신사분의 얼도 천년의 쇠북에 고여 울릴 것인지요. 고찰을 덮은 풍악은 곧 백설을 맞을 것이며 고요에 덥혀 있을 7층 석탑은 흰, 그냥 그 자리에서 녹히겠지요. ‘아이가 걸어간 눈길에 문명의 바퀴 굴리지 마라. ’시던 스님의 말씀, 소승은 선림(禪林)을 향해 걷고 있을 것입니다.// 응산 합장//
* 김일엽 스님의 수필집 제목

메리 앤 모의 비창 -여성 시인보 100년 / 한경용
시몬/ 바람소리 낙엽 우수수 100년을 적습니다. 아프리카 숲 속에서 홀로 우는 새, 렌(ren)은 기도를 합니다./ 국권침탈 된 해 탄생한 아기는 이미 운명교향곡을 들었으리오.// 만주로 가면 조선말을 가르칠 수 있다기에 희망자가 없는 용정,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신여성 선배들의 불행한 애정 행각이 싫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등단작이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이었을까요.// 시몬/ 당신은 사랑에 수줍은 지도자, 식민 조국의 허약한 지식인,/ '렌의 애가'는 어둠의 시대 어떤 소나타로 불러야 하는지요,/ 당신은 '시몬 베드로'였나요./ 진리 탐구자로서의 용감성과 예수를 배반하는 비겁성에 달의 뒷면에서 괴로워했습니다.// 시몬,/ 나는 그대의 발자취를 따라 먼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도 내 생애 사랑을 받아 보질 않았습니다./ 부름과 명령만 받아 왔습니다./ 그윽한 눈빛, 사랑의 로망에게 이가 시리도록 사랑을 받고 싶은 적이 왜 없었겠습니까.// 올가미 텃밭에서 제국의 태양을 숭배한 게 부끄럽습니다./ 꽉 익은 까만 시로 여물어 갈수 없던 슬픈 우리 젊은 날,/ 당신은 나의 '빛나는 지역' 머리말에서 꿈꾸었지요.// 화관을 머리에 이고 떨군 당신의 모습./ 지난여름 무수히 영근 수치의 관이 해질녘 텃밭에서/ 고개 숙여 있습니다./ 나팔수인들 나름, 녹색 영토로 짙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시몬/ 빙글빙글 돌던/ 울안의 모가지를 부러뜨리기에는/ 우리는 너무 힘이 약했습니다.// 창공을 나르다/ 유황도의 모래에 묻힌 청년들이여,/ 꺼이꺼이 새가 되어 내 죄를 씻느라/ 여성인재가 없는 신생 공화국/ 외교일선에서 한 짧은 영어,/ 헬프 코리아, 오, 피스 코리아// 시몬/ 산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보았습니다./ 그를 보자 급히 혈로서 하얀 치마에 써 내려 갔습니다./ 초목도 우는 국토를 부여안고/ 혼자 살아 나온 생명이라,/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나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고개 위로 흐르는 구름// 영운(嶺雲)// 1990년 6월 7일 별세했고, 6월 8일 대한민국 금관문화상이 추서되었다. 1996년 ‘영운(嶺雲) 모윤숙 문학 산실’의 문학비가 한남동 자택에 건립되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다.//

日月일월 / 한경용
냉기를 먹는 다람쥐 한 마리/ 겁에 질린 눈으로 바스락/ 시방, 햇살이 먼저 야산을 하얗게 먹고 있다/ 지금부터 궁핍을 산오름에 지피는 달/ 어디선가 푸후후후!/ 담홍색 과실이 내내 거주하다 떠난 곳/ 과즙이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다/ 녹청색 당신이 숲을 비운 사이/ 바람에 익숙한 나의 흔적이 널려있다/ 모두가 쓸쓸한 갈대는/ 가을 강이 온기를 말아 올리자/ 쓰다 남은 절기 속에 구애가 절절하다/ 허밍을 부르던 빈터 위/ 달이 먼저 간밤에 기울어져 갔다/ 너도밤나무에 달린 철딱서니/ 등 돌린 계절과 화해하는 동안/ 당신을 끌고 앉은 야산의 궁리/ 반 모금의 볕으로 언덕배기를 덥혔는가/ 얼레, 다람쥐 한 마리/ 갇힌 덫 속에서/ 이제 또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달 지기 / 한경용
달은 밤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박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이 내면에서 올라온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자정 무렵 퇴근길에서 보면 구만리 하늘에서 보내는 눈빛인지도/ 내가 한세상 돌아간 후에도 당신은 지켜보고 있으리라/ 나의 등이 쓸쓸하다 생각하여/ 당신은 마음을 달구어 존재를 내밀고 있는 것인가/ 어느 날 문득 가방이 무거울 때/ 어깨를 잡아주는 지하철의 손잡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목구멍 모양이 뻗은 손마다 잡아주다 가방을 내려놓자/ 하루살이들이 내 등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방 속에 달라붙는 것을 보았다/ 가로등도 밤에는 등골이 아프겠지/ 등(燈)은 아파트로 가는 길목마다/ 멀리서 자기를 보며 하루의 생을 끌고 가는 달 지기가 되는 것인가/ 병든 측백나무가 밤에 금빛같이 보일 때/ 얕은 땅에 박고 사는 영혼이 흐르는 것이라 한다//

우지강* / 한경용
사꾸라가 활짝 피던 날, 홀로 달이 지는 밤,/ 도쥬상, 마리꼬를 기억하나요./ 도시샤 대학의 붉은 벽돌, 사이프러스 나무의 새소리,/ 나는 아르튀르 랭보를 당신은 프랑시스 잼을 낭독하였지요.// 바람과 별과 시를 담은 당신의 눈 속, 흐릿한 하늘/ 백매화처럼 청백한 미소가 홍매화로 나부끼는,// 당신의 가슴은 낡은 첼로의 은현,/ 당신의 두 이름이 빗살과 햇살의 선율로 활을 켜고./ 아리랑, 아라라오 고개로 숨차게 넘어갈 때/ 나도 따라 허밍 했지요,// 정원의 초목들이 햇살이 뜨거워/ 구르지 못한 돌이 되어/ 흐르지 못한 물이 되어/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타고 모두 떠나고/ 골목길 뒤쫓아 오는 자신의 그림자에/ 당신은 문득문득 놀라곤 하였죠// 북간도의 언덕에서 별을 세고 있을/ 디아스포라,/ 당신의 문장이 밤하늘에 펼쳐져 있어요.// 오늘 밤도 북창을 열면 시어를 음미하듯/ 침향**을 탐미하듯 우는 새들에게/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이제는 우리 모두 부끄러이 부끄러워//
* 우지강(宇治川): 일본 교토 분지의 동남부 모서리에 위치,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 대학 급우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장소
** 이화영 시인 시집 제목

스코치 위스키 / 한경용
나의 원형질은 스코치/ 음산한 분위기로/ 구름을 말아먹고 저녁을 익혀야 제격이죠./ 어둠도 살짝 발라먹으면/ 글래스고우의 해안에서는/ 새들이 몽환의 알을 낳고 날아가지요./ 잿빛으로 채색한 강어귀/ 오크나무에서 연한 갈색이 배어 나와/ 당신의 심장이 무늬 져지면/ 나는 당신을 아크릴 물감으로 그릴 수 있나요./ 사실 나의 영혼은 고원지대 호숫가를 찾아 떠돌았지요./ 늦은 봄/ 기다리던 풀들이 발목처럼 자라고/ 성질 급한 나무들이 단풍이 들어도/ 나는 당신의 북쪽에서/ 붉게 취한 방을 언제나 그리워하지요./ 나의 조상은 스코치/ 안개가 후광처럼 비추는 남자,/ 나는 한 손에 위스키 병을 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요./ 오늘도 고도孤島의 남쪽으로 돌을 던지는/ 나는 프랑켄슈타인.//

뉴턴이 말한 여인 / 한경용
물체 운동의 법칙을 예감하는 길목이 노을에 젖고 있다./ 안팎 짐*을 나르던 갯가의 발들이 소금에 절여 있다./ 새당 밭으로 갈 때는 듬북*과 거름 짐/ 올 때는 작대기와 조짚 짐,/ 바람이 불거나 힘이 기울 때마다 지게가 만유인력을 한다./ 수평선을 따라 곁으로 가던 물소리가 말려 올라가/ 나락이 우수수 낙하한다./ 허수아비가 으스스 귀곡을 한다./ 야밤의 갯바위에서 파래와 가시리들이 벗겨지면 여명이 비명으로 떠오를 것인데,/ 여기 톳밭에서 100년의 삶은 유채꽃도 여럿이 부대끼다 지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고등어가 퍼어런 등을 불 쑤시게 속으로 던졌을 것이다./ 곡조를 알고 눈비가 내릴 때도 돌멩이가 흑사병으로 남아 있나./ 왕절빌레* 구멍마다 숨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정신이 제 몸 하나 비집고 있을 고팡*하나 있었을까./ 그녀의 지팡이와 해시계, 검은 머리 한 올까지/ 0과 1의 2진법을 알았다./ 폭낭*이 기둥처럼 기다리는 골목 입구,/ 부지깽이를 물고 오는 것도 아닌 데/ 잠자는 돌담을 찾아가서 휘어진 꽃줄기를 보니/ '어이구, 내 새끼야, 엉치 아프다.'/ 죽음 소리 하나로 쓸어내린다.//
* 제주어, 안팎 짐: 갈 때 올 때 지게로 지고 오는 짐
* 듬북: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 말려서 밭 거름으로 사용,
* 빌레: 돌 모둠 터 *고팡: 곳간 * 폭낭: 팽나무

그리스의 연인 / 한경용
그리스여 소피아여/ 하얀 면사포/ 벗지도 않고서/ 입을 맞추네/ 누구나/ 신이 되어 머무르는 곳/ 산토리 섬/ 하얀집 살고파서라/ 파르테논 신전 위에/ 푸른 하늘을/ 소녀들이/ 원주(圓柱)되어 이고 있지/ 태양이 있는 곳에/ 신화가 있나/ 아크로폴리스 올리브나무야/ 아테네를 떠나간/ 나의 님프여/ 제우스 신전의 폐허를 봐라/ 찬란한 당신이 서사시 되니/ 에게 해의 파도가/ 울음을 참네/ 아폴로스 섬 지키는/ 사자상 보며/ 빛바랜 너의 슬픔/ 노을이 지네/ 등나무 의자에서/ 그리스 와인을/ 앗티카 평원에/ 옛물이 샘솟네//

라마 / 한경용
마추픽추가 잠들 무렵/ 라마는 안데스를 가르던 바람을 싣고 걸어온다./ 우름밤바 강이 허기진 옥수수밭을 휘감을 때까지/ 독수리의 전갈을 들으려/ 신전에 묻힌 혼들을 위해 귀를 씻는다.// 예언이 끝나는 곳에 푸른 하늘을 믿는/ 검은 눈동자가 머언 산을 바라본다./ 모래에 묻힌 메아리를 기다리며/ 잊히지 않기를 다시 기원해 보지만/ 정복을 무너뜨리지 못한 요새/ 발목에 묻힌 풀벌레들/ 께나와 산뽀니아를 들려줄 성곽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몰락을 삼킨 태양신의 후예가/ 매트로 전철역 광장에 와 있는가/ 날아간 철새의 곡조가 지하도를 따라 떠돈다./ 잉카의 정령들이 먼지로 씻은 밤/ 오지에서 홀로 취해야 하는 적막을 알기에/ 산정에서 내려온 새들이 아침을 알려도/ 라마는 구비전설로 떠돌던 광야를/ 지우지 못한다.//

빈센트를 위한 만찬 / 한경용
지네를 자른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지하실의 복도는 마디가 있다./ 후미진 달이 갇힌 창문이 내 안으로 길쭉하게,/ 깨진 유리창 속의 기억이 소름 끼친다./ 지네를 자르듯 잘라 버려야지/ 긴 손가락으로 질끈질끈 자르듯 묶으니/ 살아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며 목도리에 묻힌다./ 죽어가지 않을 것 같다./ 뒤돌아본 내 지하실 복도/ 지네는 마디로 산다./ 나는 죽지 않는 마디가 무섭고 열 개의 손가락이 무섭고/ 그보다 더 어울려 그려져 잊힌 목도리가 무섭다./ 나의 닫힌 유리창을 열어보곤 언제나 목을 조른다./ 목이 긴 해바라기를 바라보다 쏟아진 핏자국의 양귀비/ 아이리스에 젖어,/ 데이지 꽃잎으로 몰아쉬던/ 언덕마다 노을이 채색된다./ 수도원의 첨탑 위로 달 조각이 걸리면/ 까마귀 나는 밀밭풍은 또다시 이글거리는가./ 젖은 불빛 아래 카페에서/ 압생트*로 칵테일한 눈동자의 자화상을 그린다./ 내 노오란 집이 떠가는/ 강물은 마디가 없다.//
* 고흐가 그린 에메랄드 빛깔의 술,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마셨다 한다.

질투는 푸른 색 / 한경용
안녕 빈센트, 젊은 목선이 타히티로 왔네/ 자네와 다투고 헤어진 게 미안하던 참에/ 도록을 위한 서문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받고 반가웠네/ 파리의 무게를 놓아준 목선은 에메랄드 위를 떠돌다가/ 총독부 관저 첨탑 아래 바다로 흩어졌네/ 일몰이 외침을 지니고 흔들리기 시작했네/ 나는 어둠을 삼킨 심장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네/ 흔들리는 그림들은/ 어쩌다 벽 위에 선 내가 꿈꾸던 표정들이라네/ 보라보라 섬을 휘도는 햇살은/ 안개를 걷어 헤치고 온 내게 무척 낭만적이었네/ 지금도 자네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을 테지/ 검은 배경에 야윈 볼과 고집스러운 매부리코/ 팔레트와 붓을 들고 이젤 앞에서/ 두려움으로 응시하던 자네의 모습을/ 난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었지/ 나는 섬 한 바퀴를 돌고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낮에는 여인들을 그리고 있다네/ 사람들이 무어라고 수군거리는지 알 수가 없네/ 노을이 질 때까지 수렵은 일상이며/ 파도가 몰아치는 밤도 있었다네/ 녹청색 유혹을 하는 기슭까지 달려가 비를 주룩주룩 마시며// 떨어진 열대과일도 먹으며/ 파도타기 하는 나를 상상해 보게/ 파리는 지금 안개가 끼거나 눈발이 꽁꽁 언 겨울이겠지/ 살롱 '푸른 방'에 드나들던 세잔과 마네, 모네의 그림들은// 잘 팔리고 있을 테지/ 이따금 몽마르트르가 그립지만/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을 것이야/ 녹색 구렁이가 여기서는 넘실거려/ 그것이 나르바나이지 않겠나/ 난 진정 무능하기를 원했네/ 평론가와 화상들로부터 팔리지 않는 추궁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파리의 삶은 가장의 무책임, 아내의 이혼 요구,// 도덕적 양심/ 어느 하나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네/ 목가적인 삶과 캄캄한 궁륭 사이에서/ 나의 잠은 정글 속에 있었고/ 회복기, 예술가의 눈에 비친 황량한 허무주의/ 그것이 나의 유미주의였다네./ 나의 이브와 당신의 이브를 비교해 보게/ 날 것의 언어가 타협과 오해로 오렌지색에// 주눅이 들지 않고/ 빨간 개가 옆에서 잠이 들 때/ 원초적인 파랑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네/ 어떤 식물학자도 몰랐던 그 세계/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오직 나만이 그릴 수 있었던 낙원이 아닌가 싶어/ 그럼 다시 파리의 공기를 마시러 갈 때까지// 기다리게// 폴 고갱으로부터//

연어 / 한경용
“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이 소식은 사할린 강바닥에서도 들려왔다./ 따스한 해류에서 느끼는 정감,/ 나는 물살을 거스르는 파란 힘줄과/ 물결에 뜯길 지느러미를 준비한다./ 해원의 무늬살이 애향을 가리키며/ 겨울을 생산하는 바람 속에 오호츠크해가 있다./ 조류란 먼 바다에 계신 당신이 끄는 물의 힘을 찾는 것,/ 태어난 강바닥 위, 흙모래 냄새도 코끝을 당겼으리라./ 움직이며 물밑을 더듬는 찰나,/ 거품이 방울지는 산호더미/ 용왕 전에서 굿을 하고 남대천으로 돌아오나./ 구름의 농도를 재는 무속으로/ 해가 솟는 물목마다 군무다./ 그물이 쳐진 여울목에는 늘 길이 부서지지만/ 연어에게는 앞으로 가는 유영법만이 있을 뿐,/ 저 멀리 고향의 등대가 보이고/ 상처로 달군 몸의 피도 뜨겁다.//

오디새의 겨울 / 한경용
백록(白鹿)을 오르며 생각했다/ 당신은 오디꽃을 피우던 새 한 마리/ 녹원을 향해 어디로 날아갔는지/ 얼음 아래 묻힌 울음을 따라 내가 올라가고 있다/ 나의 기억이 유빙으로 깨어날 때까지/ 당신이 낭하의 깃을 버린 배경에는 잘못이 없다/ 당신의 날개를 접으려 가든파티를 연다 해도/ 폭설의 배후에서 족쇄를 채운 나의 겨울이 무서운 거다// 나는 초록의 동선을 지운 배암 한 마리/ 축축한 미로에서 당신을 잃었다/ 당신이 가문비나무 위로 날아가며/ 휘몰아친 날개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낙화로 부서지던 당신의 결정(結晶)/ 빙벽에 매달린 나의 구애/ 태고에는/ 배암도 바람의 구멍을 찾아 날아간 적이 있다// 당신의 경계를 따라간 내 그림자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데/ 엎드린 우도(牛島)로 구름이 흩어지고/ 주홍빛 블루 속에 새 한 마리/ 빙허(氷虛)의 누각을 찾아 독배한들/ 공중으로 떠난 입술에 부을 따스한 하늘은 없다// 혀의 물결로 헤매던 화구 속에서/ 배암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숭어 / 한경용

북서풍이 부는 인천/ 싱싱한 청춘은 춥다./ 복학하여 바닷바람 독서실에 있다./ 독감 걸린 나,/ 의사는 몸을 녹이고 온수를 마시랍니다./ 차 한 잔은 주겠는데 따스한 방은 없어/ 모두가 등을 돌려, 콜록콜록 길 가다/ 한일방직 옆 골목 분홍빛 유리성/ 누나들을 보며 어슬렁거렸다./ 강추위에는 동사하니 여기 방에 들어와/ 뜨거운 홍차라도 같이해/ 겨울 강의 숭어를 보고 싶었다./ 몸을 덥혀줄 수 있다면/ 나를 가져가도 좋아요./ 눈보라가 매웠고 내강內江은 얼음으로 굳어 있었다./ 어느덧/ 커튼 사이 싸구려 조명 아래/ 흐르는 몸속의 소나타/ 거울 같은 강물에 숭어가 뛰놀기 시작하였다./ 팻자국의 면 이불을 헤쳐 가슴도 헤쳐/ 골찬 등지느러미 은빛 비늘이 반짝이자/ 꼬리가 갈라졌다 이어졌다/ 설익은 아침/ 동정처럼 날아간 까치/ 햇살 끝, 가지에 앉아 울고 있었다.//

 

유랑시 / 한경용
둑방길 따라 축 처진 꼬리 뿌옇게/ 뒷발바닥 보이면서 길을 잃다/ 눈발 속 뛰는 아이들이 부러워 구부정/ 곧 나를 찾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날아간 목소리 유랑이라 등을 내밀다/ 남겨진 물 고량주만큼 냉독하다/ 실성한 사람처럼 거리만 노려본다/ 말을 걸고자 한 이들 내 앞에서 침울/ 칙칙한 대지 허상의 눈동자들/ 그리워하지 않는다/ 붉으레 푸르레 떠돌다가/ 물푸레나무 속에 숨어 몸을 씻다/ 물들이다 만 하늘이 꺼지고/ 불빛이 고기처럼 익어가는 골목마다/ 수선한 리듬이 술렁인다/ 휘어진 밤의 건물 속에서/ 바삭한 이불과 침대만이 그려지고/ 습격한 한 개의 빵과 초코우유가 고프다/ 종로의 기와지붕 아래 낮잠을 즐기다가/ 수치를 삼킨 눈으로 어슬렁거리다가/ 지네주(酒) 파는 흰 수염 할아버지를 보자/ 장미여관 담벼락에 숨어 오줌을 누다/ 나를 부르는 친절이 무서워/ 햇살도 구겨 넣은 뒷골목에 꼼짝없이 갇힐 뻔하다/ 영원 장의사 유리창에 붙은 안내서를 보다가/ 짊어진 채무 고지서를 들고/ 세무서 쪽으로 한 발 한 발 걷는 아저씨를 따라가다/ 쪽방촌 할머니의 안내를 받다가/ 한 장 한 장 세월 날리는/ 목구멍 하나 버거운 노숙자와 놀다/ 난 도망간다 궤짝 속의 아저씨가 차에 치인 후/ 난 숨죽인다 미화원의 마대가 무서워/ 희미한 불빛 터널 안에서 파르르 떨다/ 되밀려 오는 바람 떠밀려 가는 눈발/ 어둠이 새벽으로 까마귀떼처럼 날아갈 때/ 야멸찬 경적이 뱉어낸 신음으로 넘어지다/ 복수초의 탄식이 노래지며 가는 풀섶은/ 안나푸르나 봉으로 가는 등정/ 목청들이 마스크를 한 채 돌아서고/ 폐차 속에서 장송곡이 흘러나오자/ 고엽들이 썩은 향내를 풍긴다/ 난 보다 설목 위 은빛 햇살을/ 강아지가 먼저 무심을 욕하고/ 광케이블 매설지역이란 표지를 비석 대신 놓아 준 온정은/ 나의 길에 핀 꽃/ 이제 바람은 나의 출항을 다독이고/ 낙엽은 내게 날개를 달아준다/ 쏘다니는 나를 보던 눈동자들/ 그대들의 손바닥에서 어르던 부름들/ 달아난 이름은 허공을 굴리고/ 핏자국에서 붉은 별들이 울음을 토할 때/ 냇물이 떠나버린 천변에서/ 나는 낙엽 더미를 이불 삼아 어떤 안식을 노래할까/ 뒷골목은 먼지의 순장으로 덮여 있다/ 북극 바람은 모태에 신전을 두고 간다/ 레미콘 아래에는 발목이 설계되다/ 유미주의 시인의 입술에서/ 오독의 싯귀만 방울 소리로 흘러나오고/ 귓가엔 고드름이 걸린다/ 등뼈가 진흙 속에 스며들 때/ 주홍빛 하늘이 가물거리고/ 어린 울음소리 파랑으로/ 나의 수염은 비로소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영도 유성流星* / 한경용
예총 회의 마치고 비도 사람도 줄줄줄 미아리 정진규 시인 댁 처마 밑에 서 있었소. 싯방울이 물방울로 합해지다 갈라서다 무엇이 그리워 다시 만나 돌 뿌리 부딪쳐 흙탕물로 뒹굴다 가는 길은 하나로 졸졸졸, 귀갓길 정시인이 "선생님! " 하며 반겨 묵어가기로 했소 당신처럼 교사이고 단아한 신혼의 변 선생이 차려주는 주안상 송구스러움에 어이 할지 몰라 빗소리 마음소리 문학소리 웃음소리 허튼소리로 화답했지요. 발령 받은 부산 영도의 여학교가 참으로 좋소. 마치 우리의 통영여중 근무 시절처럼 바람 부는 날은 이송도로 내려 와서 ‘파도여 날 어쩌란 말이냐’, 맑은 날은 고갈산에 올라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영도다리 건너면 간판마다 당신이라 품 안에 있는 듯 하하핫, 그럼 영(永)을 품고 시詩를 베고 허虛를 안고 우雨에 취해 객客을 덮고 정시인 댁이라 이만 자려하오. 내년 2월 13일 부산 예총 마치면 시집 상재할 것이오. 그러면 날마다 그리운 영의 포켓 깊숙이에서 노닐, -마馬// 그리움을 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네/ 더불어 사랑 별똥 향해 나눠 가졌네/ 다른 장소 다른 시각 죽어서 멀고 먼 길/ 창찬唱贊한 영겁 동반하길 바랬네/ 동천冬天의 하얀 죽음 배반의 장미송이/ 함께한 그날의 성좌 홀로 남아 우러르네/ 머나먼 사념의 길목 ‘애정은 기도처럼’/ ‘비둘기 내리는 뜨락’ 어디서나 달무리로 –영永//
* 유치환 시인이 1967년 2월13일 부산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소천하다. 그 후 1 년 만에 쓴 이영도 시조시인의 수필 제명이 유성(流星)이다.

아이리스로 쓰는 이별 / 한경용
상심을 지고 갈 배낭이 없어/ 눈빛 속에 담으려 하였다./ 나의 기다림을 질투하는 이월이/ 중환자 실로 갔다./ 기곗방집* 친구 범이가/ 미로공원 소풍을 왔다가/ 자기 이름표를 단 나무 아래로 갔다./ 파아란 숨결을 안아주던/ 메트리스가 떠날 채비를 하자/ 놀란 하늘이 버스를 탔다./ 오름을 갖고 사는 개망초는 그를 부르고/ 숲은 장의를 입는다./ 크낙새가 딱! 딱! 부딪쳐 보는 빈 나무 위/ 날아가지 못한 우리 젊은 날 풍선들/ 송곳 같은 입부리로 모두모두 터트리자/ 바람 소리가 크악크악 운다./ 오솔길이 안내하는 '가시리'/ 미처 다 쓰지 못한 잉크로 쓴 편지/ 아이리스가 숨이차 한 걸음 가서 앉고/ 또 한 걸음 가서 앉고//
* 정미소, 방앗간의 제주도 말

시간의 무게 / 한경용
내가 강의하던 사유의 무게가 0/ 허공에 놓으면 그대로 떠서/ 샤갈의 그림처럼 공중부양을 하게 된다./ 시간강사 20년 차 내가슴도 무중력이다./ 불이 붙었다고 하더라도곧 꺼지고 만다./ 빨대로 물 속에 기포를 불어 넣어도 기포가 올라오지 않으니/ 벌교 물방개가 보면 기막힌 사연이라고 말하겠지/ 혈액도 무중력을 받으면 무게가 없어지므로/ 나를 불러주는 머리 쪽으로 피가 올라가/ 보이스 피싱을 듣게 되는 현상,/ 나는 우주비행사가 되어 귀가 부어/ 세상을 척도하는 기준이 갑자기 카오스세계로 몰입된다./ 위 아래를 구별할 방법이 없는 내가/ "거꾸로 서 있을 수 있다"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나사를 돌리면 나사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반대 방향으로 돌게 될 것이라/ 한줌의 흙이면 연단 위에 피울 베고니아의 권리조차 허용않는 허무/ 시리얼로 적신 중년이 우주인이 되는/ 검은 비밀 봉지가 일산역 앞 포장마차에 걸려있다.//

서퍼 / 한경용
장생포 앞바다나 김녕리로 나가 보면/ 흔들리는 것 또한 고래들뿐이 아니란 걸 안다/ 고래의 생존법에는 곡선으로 미끄러이/ 율동선이 있다고 한다/ 절벽 아래 파도를 연모하는 것 또한 새들뿐 아니란 걸 안다// 그간, 얼음 등대 밖에 있었어/ 저 봄이 나를 미치게 하였지/ 는개가 낀 날/ 오랫동안 목까지 밀려온 밀물/ 멈춰버린 독방수감이 된 시계/ 궤짝 속에 가둬 놓고/ 불량 죄수의 직사각형 침실로/ 놀러 온 햇살을 보곤/ 철조망 아래 달도 별도 탈출을 꿈꾸었지// 물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을 때/ 좋은 파도가 오면 그것처럼 참기 힘든 일이 없어/ 스리랑카나 발리/ 뉴질랜드의 와이마마쿠 스왓에서/ 갑자기 출몰한 돌고래 떼를 만난 적도 있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지/ 라인업에 나가서 수평을 보면,/ 먼 바다로 부터 들려오는 당신의 함성/ 바다가 깨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나// 운이 좋다면 말이야/ 태풍의 영향을 받은 멋진 물결이 올 수가 있어/ 이번 주 차트 상엔 금요일 정오/ 파도 터널 지나면 다시 한 번 폭풍 속으로/ 수염고래여, 프런트 사이드 ‘360-4’*를 보여 줄까// 이곳은 검문소, 높은 담 검은 망루./ 푸른 고독이 누룩이 될 때까지//
* 공중으로 뛰어 횡으로 360도 회전하는 모습

실비가 나를 감다 / 한경용
보슬보슬 실처럼 내리는 비들이/ 이파리들과 모의하다/ 나를 감으며 어둡도록 고립시키자고/ 비슬비슬 나처럼 내리는 비 사이/ 물먹은 불빛 개척교회 목사님이/ 부슬부슬 벽보에 붙어 웃고 있다/ 뽀얀 풍경이 기다리는 안개 속으로/ 칙칙한 거리, 십자가를 싣고 간다./ 으슬으슬 후생으로 환승하니/ 아슬아슬 사다리 타듯 살아온 내게/ 옥상 위는 접근금지 해제를,/ 뿌연 안개가 걷히는 종점/ 마네킹의 가명이 오슬오슬 벗겨진다./ 한때 페이스북에서 자긍하던/ 평범 파괴자가 푸슬푸슬 내리니/ 굴뚝 아래 꽃들이 포슬포슬 마신다.//

지리산의 피리 소리 -여왕 진성과 고운孤雲 / 한경용
지리산에 노을 이 물들 쯤/ 여왕은 박제된 밀실에 있다고/ 산새들에게 슬픔을 전해주오./ 동해로부터 충만한 빛을 받은 님/ 신라의 여명이라 불리길 바랐지요./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봉공(都統巡官 承務郎 殿中侍御史 內奉供)인/ 최치원은 해동의 신동이니라, 당나라 헌종의 칭송에/ 어서 빨리 캄캄한 누리 불법 (佛法) 강화(强化)하여/ 그루터기마다 화엄경을 펴려 했지요./ 겨울 산사의 바람은 심장을 지나고/ 선방에는 스님들의 옷자락이 널려 있습니다./ 여왕의 기운이 농으로 타오를 때쯤/ 미풍과 벌 나비도 친구 사이라/ 만물이 온화하리라/ 산천초목 기름지리라 꿈꾸었습니다./ 신(臣)은 성골, 진골이 아닌 육두의 신분/ 못에 연꽃을 피우질 못해 제 몸에 못을 심습니다./ 장부는 도인 법장의 길을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탑을 쌓으려 합니다./ 금관이 무거우신 여왕의 뜨락에는/ 해마다 모란은 그늘에 피는지/ 솔가지처럼 소나무에 앉아 한번 생각해봅니다./ 요망한 기운은 어좌(御座)에 있고/ 올빼미 흉한 소리 회오리로 들리는데/ 천자의 수레는 먼 지방에 있습니다./ 나는 동해 밖에서 새로 날아와/ 새벽 창가 시 읊는 소리/ 뒤숭숭한 여왕의 가슴/ 암자마다 파초를 심어 주고 싶습니다./ 서라벌의 풀들은 이른 봄을 기다리고/ 노승은 동양화 속으로 들어가/ 도연명으로 앉아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물이 얕으면 큰 배를 띄울 수가 없거늘/ 섣달그믐 바람마저 드셉니다./ 이제 지리산의 피리 소리, 하늘을 가르고/ 격량을 헤쳐 온/ 풍마(風馬)는 스스로 낮은 곳에 서 있을 겁니다.*//
*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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