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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호 시인

부흐고비 2022. 2. 3. 09:13

정호 시인
울산 울주에서 출생. 본명 정경호.

2004년 《문학•선》을 통해 등단. 2011 안양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비닐꽃』, 『은유의 수사학』, 『철령으로 보내는 편지』가 있음.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화시〉,〈다층〉 편집동인, 〈문학·선〉작가회장, 《가은문학》,《시선》,《시인광장》 편집위원.

 



은유의 수사학 / 정호
아무리 포위하고 수사망을 좁혀 들어가도/ 은닉한 장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젠 눈마저 침침해진 것인가 줄글마다/ 얼굴 빼꼼 내밀곤 하더니/ 마감일 바로 코앞인데 나타나지 않는다/ 놈이 벌써눈치를 챈 모양이다/ 놈을 수사하려면 공모함부터 찾아내야 한다/ 약속이나 한 듯 같이 다니지 않으니/ 분명 서로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촌철살인의 함축과 생뚱맞은 비의가 날치는 시동네에서/ 봄바람처럼 문장골짝 깊숙이 파고들어/ 글나무에 꽃도 피우고 잎도 틔우는 직유와/ 봄눈 녹듯 감쪽같이 행불된 은유.//

시구문 / 정호
둘레길 벗어나 원효봉 향한다/ 선발대는 벌써 시구문을 지났다는 카톡이 온다/ 詩句文이겠거니,/ 명필의 필치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거나/ 어느 문장가의 싯귀 하나 암벽에 들러붙어 있을 법한,/ 아니면 반정으로 겨우 도망쳐 나온 어느 왕족이/ 복귀를 꿈꾸며 호시탐탐하던 時求門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侍龜門이어서/ 거대한 거북바위 하나 계곡 암반에 엎드려 있을 것 같은// 詩句 時求 侍龜 다 아니라면/ 始球는 절대 아니겠고/ 枾九, 市區, 혹시 뻐꾸기 산비둘기 많아서 鳲鸠門?/ 아님 누룽지 달라 꼬리치는 媤狗인가?/ 그도 아니라면 중성문 대남문을 비롯한 아홉 개의 문이 있다는 건지/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마다 궁금증 하나씩 배낭에 주워 담으며/ 시구시구, 에라 얼씨구절씨구/ 땀 뻘뻘 도달한// 시구문,/ 죽어서도 괄시받던 민초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던,/ 꽃상여는 못 탈망정 사대문 문간조차 편히 누워 나가지 못한/ 屍, 口, 門,*/ 나 거기서 한참을 서성이네/ 지례 짐작한 시향詩香으로 꽉 찼던 내 머리/ 느닷없이 소슬바람에 스산히 떨어지는 명命 다한/ 단풍잎 몇 구軀의 시향屍香들로 어지럽네//
* 시구문(屍口門): 시체를 내가는 문

문장들 / 정호
생은 지우개도 없는 문장이다 누가 대신 필사해 줄 수도 도돌이표도 없는 불립문자다 뜻대로 써지지도 않으며 각각의 호흡에 따라 단문으로 짧게 끊거나 때론 길게 이어지기도 하는 만연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문엔 표절금지도 없지만 복사본 하나 나온 적 없는 생기체(生記体)다// 이순 넘어 되돌아보는 내 문장. 되짚을수록 부끄러운데 누구에게 일독을 권하랴 그래도 마지막 구절 하나는 깔끔하게 마무리 하겠다고 한두 구절 끄적거리며 오늘의 여백을 메꾸고 있는// 이 흐릿한 글씨체를 온몸으로 밀고 간다//

별빛 익는 소리에 뒷산 부엉이 울음소리가 한 뼘 더 늙고 / 정호
풀잎에 몸 뒤집는 바람이 시간의 테두리를 돌아나간다/ 한 땀 들인 풀벌레 울음이 설익은 저물녘을 귀얄질한다/ 자색부전나비의 날갯짓에 감나무에 앉아 가을볕 쬐던 한 겨를이 홍시가 되어 떨어진다/ 지리와 멸렬 사이를 방음벽으로 분리한다/ 알라딘의 램프가 지니를 부르는 시간,/ 저녁공양을 마친 선녀보살집 똥개가 시간의 버선코를 물고 한 바퀴 도는 동네가 천불천탑 계곡의 물소리로 불어난다/ 수시로 천국과 지옥으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급행열차의 숨결이 가파르다/ 하릴없이 하루치를 허비하고 줄행랑을 친 어제가 형상망각합금처럼 길을 잃는다/ 짝짝이 컴퍼스가 한쪽다리를 들고 지구를 자전시키는 동안/ 억겁의 시간이 구름처럼 몽싯몽싯 흘러간다/ 눈 깜짝할 새 한 생이 부질없이 저물어간다//

다운로드 / 정호
보문사 뒤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에 속눈썹 한 터럭으로 들러붙었다가/ 되내려오는 가풀막 갈림길/ 무릎높이 표지판 붉은 글씨// 내려가는길 →/ 下向路/ DOWN ROAD// 순간, 무얼 다운받을까 자꾸만 다운로드 되는/ 생각의 꼬리들/ 눈 아래 해변엔 밀물이 몰려와/ 갯벌 배경화면도 이내 다운되어 버린다/ 저 멀리 뻘밭에 발목 잡힌 폐선 주위로 떼 지은 갈매기들/ 석양 해상도 조절하느라 날갯짓 분주하다/ 보문사 향해 천천히 다운로드하는 길/ 끈 풀린 신발이 와이파이 존에서 무선마우스다/ 두 발 번갈아 클릭하며/ 내 IMAGE.GIF 파일을 절마당 바탕화면으로 다운로드한다//

巴串파천 / 정호
화양 제9곡 巴串에 이른다 계곡에 바윗돌을 주렴처럼 꿰놓은 듯하다 하여 巴串파천이라지만 땅이름 곶을 붙여 巴串파곶이라고도 하고 물줄기가 바위를 뚫는다 하여 巴串파관이라고도 한다// 파천, 파곶, 파관, 어느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명칭이란 자존의 또 다른 이름일 터. 그게 구분만을 위한 것이라면 무슨 산이며 강 무슨 천이며 계곡이면 어떤가 불러주는 이름과는 관계없이 산은 제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았고 물은 제 갈길 쉼 없이 흘러간다 계곡으로 흐르다 제 분수에 맞게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된다// 아명으로 별명으로 본명으로 필명으로, daum 카페에서 노닥거릴 땐 닉네임으로 Naver 블로그에선 또 다른 익명으로 불리는, 어느 것 하나 이름값 제대로 못하는 내 이름. 내 언제 서야 할 자리 찾아 산으로 솟고 물길 따라 낮은 데로 흘러가는 냇물이 된 적 있던가 그 물길 따라 흐르다 함께 어울려 출렁이는 강물이 된 적 있던가// 문득 낯설어진 내 이름들이 巴串 너럭바위에서 물미끄럼 타며 굴러내린다 얼굴마저 생소한 내가 물길 따라 잘도 흘러간다 속절없이 찰찰찰//

유금천 ㅡ유금천 12세(6월 ?일생), 직 립 좌 립 불 가/ 정호
한마음복지원 베드로 방/ 독감 후유증 앓던 금천이가 떠났다/ 뿌리박은 나무처럼 방바닥에만 들러붙어 있더니/ ㄱ자로 꺾인 한쪽 다리 끌고 저승 문턱/ 용케도 넘어갔다/ 종일 누워서만 지내 납작바위가 된 뒤통수/ 장작개비 같은 몸 들어 올려주던 티 없이 싱글대던 눈/ 그에겐 보고 듣는 것 외엔 모든 게 불가능이었다/ 연필 움켜쥐는 손도 입까지는 닿지 않았다/ 유월에 금천구에서 주워왔다고 성과 이름도/ 유금천으로 살다 간, 영혼,/ 하늘복지원으로 자리를 옮겼구나 거기서 바깥세상/ 두루 해찰하고 있겠구나 한 번도 내뱉지 못한 속엣말/ 신기한 듯 실컷 옹알이하고 있겠구나/ 다들 놀이방으로 몰려가고 난 베드로 방/ 채 치우지 못한 신상명세표가 올려진 옷장 그 아랫단/ 크레용으로 괴발개발 그려놓은 여자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는/ 텅 빈,//

딱새는 겁이 없다 / 정호
쉬잇, 위험!/ 역삼각형 양철표지판 위/ 딱새 한 마리 앉았다/ 비무장지대 겹겹 둘러친 철책 어떻게 뚫었을까/ 애벌레 한 마리 물고 두리번두리번/ 안전지대를 찾는가 했더니/ 어디선가 포로롱 날아오는 또 한 마리/ 아하, 짝을 유혹하는 거였구나/ 뽀리뱅이 망초꽃 꽃향유 어우러진 풀밭에/ 찌르르 찌르르, 짝 짓자 타전하는 소리들/ 고요와 화평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만 유지된다/ 백골부대 수천의 원혼이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촉즉발 긴장이 난무하는 곳/ 세월도 숨이 멎은 이 출입통제 지역이/ 온갖 야생화들 터전이다 풀벌레들 천국이다, 더 이상/ 인간이 매설해 놓은 공포와 전율은 없다/ 〈지뢰〉란 표지판 붉은 글자 아랑곳 않고/ 철딱서니 없이 오물딱조물딱 새끼 치고 살아가는/ 딱새는 겁이 없다//

회춘 무렵 ㅡ사북(舍北) / 정호
한창때는 누렁이도 돈다발 물고 다녔다는/ 그걸 주막집 과부 치마폭에 몽땅 물어다주고/ 땡전 한 푼 없이 홀몸으로 살다/ 링거에 코 꿰인 저 수캐/ 지금도 탄광생각만 하면/ 성냥갑 같은 사택 그 앞을 흐르는 검은 눈물/ 아흐, 생각만 하면 물컹물컹 살아나는/ 탄광에 당장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빳빳이 일어설 것 같은 엘레지/ 캄캄 막장은 생각만해도 봄날이다//

분홍 분홍 / 정호
복사꽃 만발한 그늘에서 지난겨울에 밑줄쳐둔 당신을 읽습니다. 앙가슴 두드리며 뭉게뭉게 게워낸 꽃잎들은 나무의 혓바닥,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은 혓바닥이 굴리는 봄의 말씀. 꽃그늘에 앉은 꽃들의 수다가 오수를 즐기는 당신의 비문 사이를 파고듭니다.// 한파의 무력통치 아래 불온문장에서 해금된 문장이 꽃가지마다 잉잉거리며 읽히는 도원. 지척에서 지근거리던 나비 몇 마리 당신의 말씀 위로 노란 지문(至文)을 날립니다. 춘흥에 겨운 나비의 춘화도를 녹화하는 당신은 음흉한 블랙박스. 그래도 봄날은 언제나 눈부신 치외법권입니다.// 연하게 날리는 미세먼지가 당신의 앞섶을 스멀거립니다. 이맘때면 미세먼지도 흘러간 추억처럼 아련합니다. 형상기억합금으로 불거진 생채기마다 팝콘 터뜨리듯 팡, 팡, 터지는 인증샷. 그 꽃들의 혼인색을 당신의 벙근 미소에 찰지게 버무립니다. 쾌락의 정점을 찍은 나른한 소멸이 아지랑이로 가물거립니다.//

물떼새 국밥집 / 정호
강변 자갈모래밭, 흰목물떼새/ 고픈 배 채우려 물길 헤집다가/ 서둘러 귀가 했다/ 조산소 간판 없어도 단번에 찾아오던 둥지인데/ 품었던 알 감쪽같이 없다/ 웬 놈이 쪼았는지/ 빈 둥지 옆 대문 앞엔 껍질만 널브러져 있다/ 무너진 축대, 흐트러진 깃털 이부자리,/ 금년에도 물뱀 녀석 소행일까/ 서운한 생각도 잠시/ 어미가 종종걸음 친다/ 물가에서 다시 피라미를 쪼아댄다/ 먹고 살아야 했다// 원곡동* 골목길, 철 바뀌어도 날아가지 못한/ 물떼새 한 쌍/ 뒤뚱대며 산부인과를 나온다/ 품었던 알 지웠는지 암컷이 비틀,/ 수컷이 허리를 부축한다/ 이번에도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아이/ 생기다만 눈 코 입/ 자꾸 따라온다/ 그만 잊어야 해!/ 둘은 애써 뒤돌아보지 않고/ 근처 국밥집으로 스며 들어간다//
* 경기 안산시, 이주노동자 밀집지역

호수 그루터기 / 정호
누가 베어갔을까, 저 거대한 호수./ 계곡마다 뿌리 깊숙이 박아두고/ 산자락 옹달샘까지도 실뿌리로 끌어당기며/ 무장무장 거목으로 자라 오르던 튼실한 시간들/ 누가 베어갔을까./ 이 저녁 고요한 호심에 앉아있던/ 청둥오리 한 마리 날아간 자리./ 동심원으로 그려지는 저 선명한 나이테 위로/ 아흐레 달빛이 날개 접고 걸터앉는다./ 나도 가쁜 숨 몰아쉬며 야무지게/ 열정 하나 일으켜 세운다./ 저 물관부 한가운데로 돌을 던진다./ 퍼득, 마음 한복판에서 튀어 오르는/ 물수제비./ 내 살다 떠난 자리엔/ 얼마나 큰 그루터기 하나 남아있을까.//

독사 / 정호
풀밭 한켠 똬리를 틀었다./ 무슨 생각 저리 깊은가/ 턱주가리마저 그 위에 올리고/ 한나절 내내 똘똘 뭉쳐놓은 그 독들을/ 낮은포복으로 이슬 마른 풀섶에/ 슬며시 풀어놓는다.// 독 괸/ 작은 입으로 날름날름 삼키는/ 저 커다란 날이미지.//

양석(養石)* / 정호
1// 너는 외롭다./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네 이름자 하나 불러다 세상 불씨를 지핀들/ 또 그게 들불처럼 크게 번지며 타오른들/어찌 그 태깔에 꼭 들어맞으랴./ 사생아로 태어난 너는/ 마냥 강변 돌밭이나 해변에서 뒹굴다가/ 어느 생각 묵직한 돌꾼이라도 만나면/ 뜰 한 구석에 밀려나 초라하게 눈비를 맞거나/ 거실에 자리하여 동백기름으로 반들반들 맛사지도 하며/ 인간들 땀내 밴 손길에 숨도 콱콱 막히지만/ 뜰에서건 거실에서건/ 한글학회가 발행한 최신판/ 호적에도 이름자 하나 올리지 못한 너는/ 잡풀만 무성한 폐사지,/ 이름조차 잊혀진 선승의 부도처럼 외롭다.// 2// 밤늦도록 肉筆과 씨름하며/ 후줄근히 땀내에 젖다가/ 퇴(推)에 밀리고 고(敲)에 두들겨 맞아/ 또 다른 무주고혼이 되고 마는/ 말이여.//
* 양석(養石): 돌 본래의 색감을 살리기 위해 눈비를 맞추어 물때를 제거하거나 기름을 바르고 손때를 입혀 윤기를 내는 일. 수석인들이 즐겨 쓰는 말이지만 사전엔 없다.

자란(雌蘭)에 꽃피다 / 정호
도서관 입구 안내대에 그 여자 있네./ 수많은 철부지 학생들/ 열람실로 전자정보실로 오가지만/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화장 한 번 한 적 없어도 늘 청초롬한/ 몸피도 가냘픈 저 여자./ 그래도 사랑의 열병은 꼭 앓아야 했는가./ 여름 방학으로 폐관된 저 휑뎅그렁한 적막강산에서/ 아무도 몰래 투명하게 물컹한 살갗 드러내고/ 그 수줍은 내숭 스르르 발겨보는/ 은밀한 곳 이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는/ 연보라색 저리도 아찔한 암팡내.// 홀린 듯 내 눈앞이 캄캄하다.//

종지 / 정호
남한강 상류 돌밭 한켠에 엎디어진/ 조막손만한 스텐레스 종지 하나./ 얼마나 오랜 세월 강바닥 굴러다니며/ 모난 돌에 치이고 단단한 돌에 부딪쳤는가./ 밑바닥이며 둘레 가장자리 어디 빼꼼한 데라곤 없다./ 어떤 내력이 이 작은 종지를 예까지 끌고 왔을까./ 오래 묵힌 짠 생각으로 식솔들 입맛 맞추다가/ 지아비 제사엔 청주잔으로도 쓰였을까./ 생각지도 않은 물난리 된통 만나/ 평창 연당 영월 단단한 돌들과 부대끼며/ 수없이 찍히고 부딪쳐가며/ 여기 영춘 오사리 돌밭까지 와서/ 하릴없이 망신창이 지친 몸 쉬고 있는가./ 그 주근깨투성이를 가만히 집어 올리는데/ 오오 놀라워라, 종지 안쪽은/ 흠 하나 없이 말짱하다./ 거울면처럼 반들반들하다./ 고뇌를 안으로 안으로 보듬으면/ 저리도 환한 속을 간직할 수 있을까./ 저 시린 시간의 물살에/ 나부대며 흠집만 더께더께 늘어나는/ 내 마음 속 종지 하나.//

속내 / 정호
동강 벼랑바위 맞은 편 모래톱에서/ 손바닥만한 꺽지를 낚았다/ 물씻김 좋은 물바위에 걸터앉아 배알을 따고/ 부레와 쓸개 내장을 후벼내는데/ 억센 등비늘이 따끔! 손가락을 찌른다/ 멈칫, 하는 순간 꺽지는 푸득거리는 감촉만 남긴 채/ 미끄러지듯 내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순식간에 새파란 물속으로 사라진다/ 내장도 모조리 빼놓고 어디로 갔을까/ 깊은 물속 기웃거리다가/ 속내 털린 통증을 자갈 사이에 파묻으며/ 굵은 소나무 밑둥치 같았던 삶의 굴곡 우툴두툴 파헤치다/ 통점도 접고 생각마저 비우고/ 끝내 기진하여 물 위에 허연 배 띄우리라/ 용도 폐기된 기관들/ 나는 꺽지 내장을 강물에 내던진다/ 부레 쓸개 동동 떠내려간 산그림자 짙은 자리/ 잘 닦인 물거울이 나를 비춘다/ 한때는 불 같은 열정으로 타올랐던/ 허영으로 치장하고 때론 이웃과도 등 돌리던, 이제는/ 배롱나무 껍질 같은 밋밋한 마음자리/ 간 쓸개 다 빠져나간/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톡 / 정호
그것은 내밀한 속삭임/ 줄탁하듯 꽃봉오리 벙글 듯/ 네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말문 트는 경이이리/ 줄곧 미묘하고도 아주 짧은 기표여서/ 밤새 엮은 별빛 영롱한 꿈으로 풀잎을 굴러 내리며/ 한없이 낮은 데로 임하는 신의 목소리이리/ 얼큰하고도 구수한/ 또는 상큼하고도 깔끔한,/ 때론 너 아닌 당신에게 그렇게 속 시원히 쏘아붙여도 좋을/ 흉금 같은,/ 한 줄기 바람보다 빨리 달려가는 연애를 쓰네/ 낱낱의 그리운 소리들이 손끝에서 튀어 오르는 생각들/ 연필심 부러지듯 간당간당하던 배터리가 순식간에 나갈 때/ 그것은 갑자기 불어난 강물 건너는 내 골똘한 징검다리이리/ 소쩍새 소리 구슬픈 봄밤/ 더는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간신히 버팅기던 명줄/ 실 끊어지듯 일시에 놓아버리는 순간,/ 일생의 긴 그림자 끌고 저승 문턱 아슬히 건너가는/ 21그램에 매달린 아주 끈적하고 긴 유적(遺笛)이리//

생각 툭 / 정호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 나 아닌 내가 이런 생각에 휘말리고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차에 싣고 새벽같이 달려나가/ 홍수 지나간 농암천 생밭 뒤적이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싱숭하고도 생숭한/ 생각 한 덩이 번쩍 들어/ 깊은 강물에 풍덩, 빠뜨린다는 생각/ 생량머리인데도 물이 아주 차다는 생각이 촉감보다 빠르게/ 뇌리를 스친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생각씨* 같다는 생각에/ 그러다 생각시, 생얼에 생생한 생머리도 생동생동 생각다가/ 생살 생채기 생돈 생무지 생트집/ 생으로 목숨 연명하는 것들이/ 온갖 생때같은 것들이 생짜로 매달린 생이/ 생사람 잡듯 생떼를 쓰고 있다는 생각,/ 온갖 생청스런 말로 생색이나 내는/ 생면부지의 생각들이 서로 무슨 생화라도 하려는지/ 생글 웃기도 하는데, 생긋 젖히기도 하는데,/ 문득, 나는 생판 모르는 나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 생급스런 생소리로 생억지를 부리며 생먹고 있는 내가/ 나 아닌 날 위해 생고생한다는 생각/ 생각할수록 생게망게하고도 생뚱맞다는 생각//
* 생각씨: 관념사

무생채비빔밥 / 정호
시 고픈 게 시장기이다./ 출출한 날 풋풋한 시상 한 뿌리/ 내 안의 텃밭에서 온새미로 뽑아올린다./ 시래기 추려내고 모래참흙처럼 자잘하게 묻어난 생각들/ 말갛게 헹구어 나무도마에 올리고//

//한//연//씩//끊//는//다/

/싹뚝싹뚝/행으로/토막치고//

톡,톡,톡, 채를 썬다

\한\글\자\씩\잘\려\나\간\다

화면양재기에 몽땅 쓸어담아 빛깔 좋게 버무린다

다진 마늘의 이미저리/참기름 알레고리/매실즙 메타포/고춧가루 붙여넣기/

>적⩑당⩒히< .....쫌쫌

시니피앙 달래 쫑쳐 넣은 시니피에 간장도 한 스푼// 포에지에 첨가한다// 맵짜하고 아린 맛이 무채에 배~어~든~다~// 입맛은 역시 손맛이다// 쓰삭~쓰삭~,// 매콤한 듯~ 뒤, 고소하면서도~ 죽, 시큼하고~ 박, 아삭한~ 죽,// 보기만 해도 시금떱떨씁싸름아리아리매콤달콤아싹하게 입속을 맴도는,// 가을날 오후 급히 버무려낸// 무생채비빔밥 한 편// 시 고픈 시장기 간신히 때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 정호
18 복도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17 청국장 냄새 큼큼한, 휘/ 16 다/ 15 닥, 거실에서 쫓겨난 무늬벤자민과 해피트리/ 14 홈쇼핑 택배 박스/ 13/ 12 바닥에 전단지 몇 장 나뒹구는/ 11 자전거와 빈 오지항아리 크고 작은 것 2개/ 10/ 9 씩씩대며 올라오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던 중년/ 8 낡은 의자 1개와 자전거, 어디서 개 짖는 소리/ 7 어/ 6 유 숨차, 전망 좋다고 꼭대기 살았더니, 헉헉/ 5 07:23 수원행 놓치면 지각! 세발자전거와/ 4 훌라후프, 엘리베이터 편한 줄만 알았는데/ 3 사람 잡네 보행기와 책상 의자/ 2 잘 자란 행운목, 오늘 부디 지각 않는 게 최대의 행운/ 1 난감한 표정의 꼬부랑할머니께 (안녕치 못한)안녕하세요!/ 구불구불 십팔절양장 지나 현관출구항문 빠져나가는, 황변 같은//

엑셀 / 정호
콩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홀몸으로 어린 것들 업고 된장 담그고 콩 갈아/ 된장 간장 두부로 온 동네 먹여살렸다./ 이장집 하동댁 과수원 떡집 곱분이네 후박나무집 쌍둥이네/ 지난장날 청도댁은 5천 안골댁은 3천2백/ 이번 추석대목엔 얼마나 받을려나, 총 35만 2천 하고도 몇 백/ 거기서 최서방네 콩 2가마 6만8천 주고 나면 28만4천/ 장학생 두 놈, 그래도 학원비는 내야 하니 3만6천/ 딱 24만8천, 연탄값 2만5천에 곗돈 적금 등등,/ 오늘은 마수걸이로 두부 두 모에 현금 3백, 그걸로 국밥 한 그릇/ 한창 프로그램 잘 돌아갈 땐 그랬는데/ 쉰 줄 접어드니 잘 돌아가지 않는다./ 도리없이 저녁마다 달력에 촘촘, 가장자리까지 빼곡하다./ 언제나 업그레이드를 꿈꾸지만/ 서비스센터 들락거리는 일만 점점 잦아지길 십여 년/ 내장된 프로그램 기능도 갈수록 떨어진다./ 열린 창 하나씩 닫고 이제는 Sheet 몇 쪽만 간신히 구동하는/ 날이 갈수록 콩쭉지로 비어가는/ 재부팅조차 힘겨운 저 엑셀.//

김삿갓묘 / 정호
와석리 김삿갓묘에는/ 삿갓이 없다/ 살아생전 하늘 쳐다볼 면복없다며/ 번듯한 집에 배불리 들앉아/ 구들장이나 따뜻이 짊어질 염치없다며/ 삿갓으로 떠돌이로 죄값 치르고/ 이제 영월땅 깊은 산중 풀밭에 누워/ 맘껏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하늘 아래 죄 없는 자 그 누구나/ 우리들 질긴 목숨, 그만큼이나/ 늘어나는 죄의 이력들/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게 세상일이라지만/ 삿갓 한번 쓸 줄 모르는 우리는/ 죽어 삿갓 쓰고 누울 일이다//

박 타는 흥부 / 정호
박을 타네 늦가을 된서리 맞아 시든 박줄기 거머쥐고 흥부 부부가 박 그네를 타네 긴 줄기 한 끝은 초가지붕 위 그대로 다른 한 끝은 삽짝도 없는 울타리의 감나무 우듬지에 걸어두고 잘 여문 박덩이 하나 발판 삼아 훠어얼훠어얼// 박을 타네 집 앞 실개천에 박 한 통 띄우고 흥부가 박 위에 올라 박 배를 타네 뱃놀이 한번 못해 본 세상 뒤로 하고 찰찰찰 흐르는 물길 따라 그 아내도 박 한 통 띄우고 덩실덩실// 박을 타네 박꼭지에 주먹만 한 구멍 내고 놋숟가락으로 박속 박박 긁어내어 박나물 데쳐 간장 된장 초고추장에 들기름 듬뿍 쳐서 버무려내 먹고 빈 박통 늦가을 볕에 시름시름 말려 맨손으로 위아래여불따귀 번갈아 두들겨가며 박 통을 타네 가얏고가 따로 있나 얼쑤얼쑤 소리도 좋다 뚱가랑뚜당땅// 박을 타네 박꼭지에 톱 들이대고 슬근슬근 박을 타네 된서리 내린 요맘때면 희한하게 크기도 오물조물 잘 여물어 물바가지 쌀바가지 반짓고리바가지 걱정 없네 한 사나흘 굶은 흥부마누라 가끔은 성질나서, 내가 무슨 보살이냐! 바가지 긁기에도 이만한 것 따로 없네 제일 잘 여문 것 씨도 흥부처럼 잘 여물었을라나 아들 다섯 딸 여섯 자식농사 고을에서 으뜸이라 흥부만큼 야무진 씨 나와라, 어기영차//

안옹근씨를 찾습니다 / 정호
어디에 숨었나요 안옹근씨/ 아니 옹글다고 안옹근씨/ 安重根씨하고는 집안 내력이 다른/ 꼭꼭 숨어도 필요할 땐 잘도 찾아내서 채가는// 그는 이름난 집안의 서얼입니다. 혼자 버젓이 얼굴 내놓고 나다닐 수도 없는 처지. 눈에 익은 말글들만 졸졸 따라다니며 뒷전에서 일이 매조지게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대접 한번 받은 적 없습니다. 홧김에 만사 내팽개치고 드러누워 있다가도 맥락이 뒤엉키면 뒤치다꺼리로 또 불려나가는// 그는 태생부터가 옹글지 못한 놈입니다. 기껏해야 따름, 나름, 나위, 겨를 같은 서자나 뿐 것 데 바 듯 체 혹은 채, 이런 얼자들하고 어울려 장을 지지고 볶습니다. 성이 안옹근이고 이름이 이름씨인, 그의 동생은 그림씨입니다. 형 같은 처지라 옹글지 못하기는 매한가지. 그래도 안옹근씨 형제 덕분에 우리말동네가 꽃등 내건 듯 환합니다.// 안옹근씨여 이름값 못한다고 푸대접만 받는/ 엉거주춤, 글동네지킴이나 말동네마당쇠로만 살아가는/ 그럴수록 속은 더욱 단단한/ 외고집 안옹근씨여/ 허섭스레기 나처럼 영원히 옹글지 말기를//

우수雨水 무렵 / 정호
재개발 철거지 공터에 진눈깨비 흩날린다/ 무너진 담장 아래/ 이생에서 마지막일 꽃 피우려 안간힘쓰는 산수유/ 때늦은 눈비에 젖고 있다/ 우듬지에 마른눈꽃 피고 둥치는 진눈에 흠뻑 젖는다/ 킁킁대며 눈밭에 설매雪梅 한 송이씩 피워내며/ 질척한 공터 시적시적 걸어가는/ 저 강아지가 시적이다/ 눈발이 잠시 주춤거린다/ 망울진 꽃눈에 흘끔흘끔 내려앉는 진눈깨비,/ 모두들 떠나버린 산동네 홀로 지켜선 저 터주대감에게/ 살풋, 눈꽃을 피워줄까/ 질척, 꽃눈을 뜨게 할까/ 우수의 길목에서 시적거리고 있는 저녁나절/ 살풋과 질척을 저울질하는 저 경계가 시적詩的 거리다//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 정호
떠나간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여름날 풀벌레 울음소리도 스산한 들녘에선 더욱 그립고/ 그리운 것은 늘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운 것은 그때 놓친 열차다/ 그 후로도 열차는 기적을 몇 번 더 울렸지만/ 나는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통학에서 통근으로, 이제는 승용차로 출퇴근하지만/ 아름다움은 추억으로만 추적거릴 뿐/ 내게 더 이상의 기적은 울리지 않는다/ 오늘 토요일,/ 수원행 막차로 돌아오는 우중 길/ 그때도 비내리는 토요일 경주행 막차였다 딱 하나 비어있는/ 빈자리 옆,/ 수학여행 준비물 챙기러 귀향한다던 그 단발머리/ 쑥스럽게 교과서나 만지작거릴 때, 거기/ 청포도를 읊어보라고 조곤조곤 다그치던/ 하얀 교복 불룩한 가슴에 숨겨둔 이름표도 꺼내보이던/ 그 스스럼없던 눈망울이/ 지금 비내리는 차창에 그때처럼 어룽거린다/ 놓친 열차는 언제나 아름답다//
* 올리히 렌츠, 「아름다움의 과학」

한뎃잠 자는 어머니 / 정호

이른 아침 안양천 뚝방길에 달맞이꽃 무리지어 피어있다 별밤 지새웠을 그 환한 속내 들여다보는 순간 아직도 깊은 잠에 취한 꿀벌 한 마리 온몸이 밤이슬에 촉촉이 젖은 채 요지부동이다 본능적 항법장치도 제 기능을 못했는지 어쩌다 길 잃고 달맞이꽃집에서 하룻밤 의탁하게 되었을까 박음질 촘촘한 실무늬날개옷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꽃대궁 흔들어본다 혼미한 정신 한 줄이 명아주지팡이처럼 가볍게 흔들린다 마흔 넘도록 장가 못간 막내 짝이라도 찾겠다고 지팡이에 몸 의지한 채 이 꽃 기웃 저 꽃 기웃, 그러다 기진하여 들녘 아무 꽃에서나 곤한 잠에 든, 어머니// 은벽한 곳 이슬 함빡 젖은 이부자리가 치매의 젖줄보다 달다//

石과 더불어 / 정호
내시경 검사 결과 전립선 결석이다/ 약물치유도 안 되고 수술할 수도 없다/ 좁쌀부스러기보다 작은 돌 그림자에/ 마음도 돌처럼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스프레이로 사방탁자 수반에 자리한 돌에 물을 뿌린다/ 이사할 때마다 들러붙어 온 놈들이다/ 이제는 내가 그놈들을 모시고 산다/ 덕산 괴곡 상하선암 물줄기 따라/ 탐석하던 그때부턴가 구불구불 내 몸속/ 좁다란 물길에 돌돌거리는 돌들/ 반생을 돌밭 누벼온 탓인가, 이제는/ 돌들이 내 안의 물길 거스르며/ 중심에 와 박혔다, 그놈들 모두/ 하나같이 명품이다/ 가끔은 내시경으로 감상도 하며/ 남은 생 신주처럼 모시고 살아야할//

죽구나무 ㅡ청운각에서 / 정호
그가 하숙하던 집 담벼락/ 살구나무 그루터기가 빈 집을 지키고 있다/ 암담하던 시절 나무는 그에게/ 죽기살기로 꽃피우라 가르쳤다/ 살구 살구 또 살구, 열매 맺으며 가르쳤다/ 살아서 또 살아남아서/ 새콤한 야망 알알이 영글라 가르쳤다/ 그 집을 떠난 지 40년 되던 어느 가을날 야밤에/ 그는 흉탄에 쓰러졌다 소슬바람 타고/ 백두대간 건너온 그 소식에 때 아닌 꽃 두 송이/ 각혈하듯 게워내고/ 살구나무는 그길로 고사했다// 이제 그 나무는 그루터기만 황토담벼락에 끼어/ 새카맣게 탄 가슴 쓸어내리고 있다/ 내 야망 한 줌도 언젠가 저리 까맣게 탈 날 오려니/ 이참에 어느 야들야들한 년 하나 만나/ 늦바람꽃 두어 송이 피워볼까/ 살구나무로 살다 어느 순간/ 그 여자 배 위에서 죽구나무 한 그루 되어볼까//
* 청운각: 박정희대통령이 문경초등교사 시절 하숙했던 집.

늦깎이 / 정호
늦가을 재넘이 호박밭에 간다. 아예 풀밭이 되어 멧돼지똥이라도 굴러다닐 것 같다. 군데군데 빛바랜 호박넝쿨이 망초 명아주 비름 바랭이 개여뀌 쑥대머리 같은 것들과 씨름하듯 뒤엉겨 난전을 펼쳐놓고 있다. 그 푸새 속 주름 짜글짜글한 할미씨, 펑퍼짐한 방뎅이 까발린 아줌니, 봉긋한 젖가슴 수줍은 듯 호박잎에 반쯤 가린 처녀애들, 모두 제 깜냥 잘도 익어간다. 그 중 이제 막 꽃봉오리 떨궈낸 애기호박 몇 개, 때는 바야흐로 한로 지나 상강인데// 혈기방장하던 호시절 다 무엇하고 이제서야 꽃 피워 열매 맺겠다고 이 난리들인가. 따순 햇살 한 줌도 끝자락이고 백발서리가 바로 코앞인데 아직도 조막만한 엉덩이 땅에 내리지 못하고 기력 다한 호박넝쿨에 엉거주춤 들려있는// 내 가을날 시밭 뒤늦게 꽃봉오리 매단 저 애송이들, 된서리 내리기 전에 알량한 열매 서둘러 맺느라 줄줄이 난산이다.//

월매동동주 / 정호
광한루 담벼락 따라 올망졸망 동동주집들/ 그 중에 이름꺼정 틉틉헌 월매동동주집,/ 술청 주방 죄다 뒤져봐도/ 정작 월매는 코빼기도 읎는디// 쫄쫄 굶은 이도령 상그지* 되얏구나/ 야심헌 밤 월매집에 몰래 숨거 들어갔것다/ 그려도 향단이가 채려주는 밥 항 그륵/ 서산마루 해 꼴깍하듯 후딱, 해치우는디// 미치고 환장혀고 복창이 홀랑 뒤집어지건만/ 그랴도 내 사오**,/ 남해바다 노도채매*** 왈칵 밀려오는/ 야속헌 정 뚝! 따러어 술잔 그득 채우문서/ 도령님요,/ 이거 한 잔 받고 내 딸 이자뿌소/ 내일이면 우리 춘향이는 죽능당게/ 워디서 구걸허더래두 살어만 익그들랑/ 일 년에 딱 한 번 내 새끼 제삿날/ 냉수라도 한 잔 올려주랑게// 장대비 같은 눈물로 건네는 동동주인디/ 얄밉은 저 도령님 하는 짓거리 좀 보소/ 가슴은 칠 년 가뭄에 갈라터진 논바닥인줄 몰러두/ 짐짓, 아이고매!/ 월매나 방가버라**** 월매나 방가버라/ 사또 자제 체면 구면 싸그리 다 팽그러치고/ 허벌나게 벌컥벌컥 받아마시던 그 꼬락서니/ 생시인 듯 어릉거려 나도 와락, 들이켰지라이// 그려,/ 낡은 나무탁자에 내비쳐논***** 빈 대접에/ 육자배기 한 가락 댕그러니 배어있는/ 월매동동주, 그 맛 한번 쥑여주게 징허더랑게//
* 상그지: 상거지 ** 사오: 사위 *** 노도채매: 노도처럼

**** 월매나 방가버라: 얼마나 반갑구나 ***** 내비쳐논: 내려놓은

잠시 / 정호
그것은 한편의 짧은 시/ 길섶 코스모스 꽃잎에 살폿 발 내딛다 날아오르는/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 잠깐 앉았다 가는,/ 혹은 묵정밭 들머리에 엉거주춤 서 있는 망초꽃/ 대궁이나 몇 번 흔들다 형체도 없이 사라질/ 한 순간의 적요// 아내와 한바탕/ 티격태격, 속마음 뒤틀리는/ 그래도 내 여자거니 스스로 달래기까지/ 마음 속 한 귀퉁이에 최신 버전으로 압축하여 시말로 녹여낸/ 한 순간의 이미저리// 그 짧은 행간에 숨은 알레고리다/ 일상의 잡다한 인연들의 연속인/ 우리 살아가는 일, 때로는/ 잡혀 사는 일이 꽉 잡고 사는 일/ 그 길고도 오랜 메타포를 순간적으로 요약해 놓은/ 절묘한 터치이다 생각의 피륙을 짜는 씨줄이고 날줄이다/ 시도 때도 없이 귓전을 맴도는 잠언 같은/ 짧은 시다, 잠시란//

죽령 옛길을 오르다 / 정호
발발이 앞세우고 소백산 감아오른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게 덜덜거리지만/ 십년지기 등짝이 편해 실려 가는데/ 옛길 초입에서 놈이 기어이 어깃장을 놓는다/ 밤낮없이 혹사시켰다고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도리 없이 긴급출동 견인차에 앞발 들린 채/ 마을 간이진료센타로 끌려간다// 놈의 완쾌를 기다리며/ 근처 설렁탕 집에서 내장에 기름 좀 치고/ 냉각수 벌컥벌컥 들이켜는, 나는/ 언제 엎어질지 모르고 뛰는/ 한 마리 토종견/ 좋으나 궂으나 헐떡이며 뛰어왔다/ 고질병인 늑막염으로 가끔 정비공장도 들락거렸다/ 어느새 육십령고개 넘는가 싶더니/ 속도는 갈수록 더욱 빨라진다/ 발발이도 주인 닮아 기관지가 취약한지/ 해마다 여름이면 에어컨 수술로 입원하곤 했는데/ 아직은 퇴물 될 날 멀었다며/ 자리 툭, 툭, 털고 거뜬히 일어난다/ 가던 산길 용케도 찾아/ 콧구멍 벌름거리며 달린다/ 몇 구비를 더 휘감아올라야 내 삶의 정상에 닿는가/ 칡넝쿨 도로 안쪽으로 뱀처럼 기어나오는/ 가파른 오르막길/ 덜커덕, 에어컨이 또 고장이다/ 얼굴에 훅, 끼치는 열기// 앞뒤 차창 다 열어 제치고/ 킁킁대며 죽령 옛길을 오른다/ 피톤치드라도 맡으며 가란 듯/ 발발이 프라이드가 주인을 한껏 혹사시킨다//

시인이 많은 세상 / 정호
시월 마지막 날 이른 출근길/ 내장사內藏寺에 불났대// 승객들 모두 코웃음뿐, 귀담는 사람 없는데/ 일행 중 한 명이 한 술 더 뜬다// 요즘 날씨가 좀 좋은가/ 내장산 홀랑 다 태워먹을 만하지/ 그래봤자 동짓달 가기 전엔 다 꺼질걸//
* 내장사 화재:2012.10.31. 새벽2시에 불이 나 대웅전 및 동종 전소.

꼭꼭 숨어라 / 정호
그 시절 그 동네 16평 아파트에 사는 새댁들은 허물이 없었다/ 설거지 끝내고 세탁기 한 판 돌려댄 후에/ 같은 동 또 옆동 수다들 한 방 가득 펼쳐대는 한낮/ 코흘리개들보다도 더욱 신들이 났다/ 어느 집인들 좁은 방 두 칸에 가진 거라곤/ 밤마다 푸근한 사랑 익혀내는 싱싱한 남편과/ 재롱둥이 한둘씩뿐, 기실 더는 보여줄 것도 없지만/ 안 봐도 서로가 훤히 들여다뵈던/ 말 그대로 소꿉장난시절이었다/ 유치원 보내면서/ 이제는 24평, 그래도 애들 데리고 이 집 저 집/ 볼 것 보여줄 것 더러는 있었는데/ 애들 머리 커지고 목소리 점점 굵어지고/ 각자 공부방 찾아 33평으로 옮겼다/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만 얼굴 부딪는 이웃들/ 그냥 눈웃음이나 목례 한번뿐/ 다들 비슷한 중년의 아낙들끼리지만/ 꼭꼭, 숨길 게 너무나 많아 더욱 서먹해지는/ 저 짙은 화장 속/ 두터워진 얼굴들에 등 돌리고// 엘리베이터 거울에 나를 비춘다/ 나는 누구인가, 내 속에 감춰진 나를/ 꼭꼭 숨기고 있는//

중요한 것은 간단하다 / 정호
대보름날 아침 찰밥을 넘기다, 이게?/ 징검다리 건너 소 먹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콩밭 한쪽엔 차조 도랑 건너 뚝밭엔 메조/ 저 넘실대는 물결 속 몇몇 논배미에 누루황황 짙은,/ 우리 어릴 땐 그냥 찬나락이라고들 불렀는데/ 그게 차벼일까 찰벼일까 찹쌀벼일까/ 골목골목 백과사전을 뒤진다/ 차벼도 찰벼도 찹쌀벼도 뒷길엔 없다/ 아예 큰길로 빠져나와 벼를 찾는다/ 역시 먹고사는 일이 제일 중요한지/ 벼[Oryza sativa]에만 무려 10페이지/ 도표 7개 사진 16장 설명 1564줄/ 그럼, 이런 사전을 만든// 사람[person] 항목을 찾는다/ 아, 중요한 것일수록 아주 간단한 법/ 딱 31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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