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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중 시인
1961년 경기도 포천 출생.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문학 우수작품상, 제2회 스토리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제14회 푸른시학상, 이어도문학상 수상.
시집 『물음표를 줍다』.
시문학아카데미 금요포럼 회원. <함시> 동인, 문학공원 동인
물음표를 줍다 / 권은중
등산로 길목에 구르는/ 검붉은 물음표 하나/ 집으려다 멈칫, 들여다본다/ 피부가 말라 움직이지 못하는/ 지렁이 한 마리/ 개미들이 까맣게 모여들고 있다/ 끝없이 파헤쳐도 어둠뿐인 흙/ 문을 열면 벽 같은 자갈 틈에서/ 눈도 없는 몸으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여린 살로 흙을 파헤쳐야 했던 몸부림만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흙을 헐어 흙을 먹어야만 하는 숙명을/ 한 번쯤 거부하고 싶진 않았을까/ 사람들이 버려놓은 박토를 삼켜/ 옥토를 뱉어내던 지렁이/ 그가 말라가며 온몸으로 던진/ 물음표가 무겁다//
행운목 / 권은중
살아가기 위해서는/ 토막토막 잘려야 했다/ 잘리는 것이 사는 것이고/ 죽지 않는 것이 행운인 것인가/ 접시 물에 잘린 상처를 묽히면서/ 토끼처럼 초록귀를 세워 두리번거렸다/ 간신히 잎을 내고 뿌리를 내면/ 다시 토막 나 생이별이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나비 한 마리도 날지 않는 공간/ 밑동이라도 크면/ 누군가의 쉴 자리가 될 수 있을 텐데/ 토막토막 잘려야만/ 당신 가까이 갈 수 있으니/ 이 몸이 정녕 행운목이라면/ 내게 물을 주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대금, 소리의 원류源流 -쌍골죽을 들여다보다 / 권은중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 소리들이 중력에 비례하는 속도로/ 대나무밭에 내려앉을 때/ 쌍골죽은 소리를 먹고 자란다/ 죽순 밑동은 다 자란 대나무크기/ 마디마디 여린 고막을 벼르고/ 달빛의 흐느낌, 햇살의 웃음소리,/ 비와 바람의 노래를 둥근 벽에 새긴다/ 기둥을 밀어 올리는 대나무들이/ 제각기 허공을 향해 키를 가눌 때/ 결코 높이를 탐하지 않는 쌍골죽*/ 오히려 몸을 움츠려 눈을 감고/ 후미진 곳에 머물러 오직 귀를 연다/ 우주에서 달려온 별들의 속삭임을,/ 새벽을 여는 안개의 종소리를 듣는다/ 아침이슬이 적셔오는 둥근 몸통에/ 세상의 모든 울음소리를 새긴다/ 당신의 눈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 쌍골죽: 홈이 깊이 팬 병든 대나무. 대금을 만드는 대나무.
압축을 풀다 / 권은중
약수터 화단 모서리에 말뚝 하나/ 차렷, 자세로 서 있다/ 산목련이었던 그를/ 누가 말뚝하나로 압축했단 말인가/ 햇살을 붙들고 재롱부리던 손/ 개똥지빠귀 숨바꼭질하던 어깨/ 남김없이 잘려나가고/ 머리마저 싹둑 잘려나가 몸통만 남았다/ 그늘 한 뼘 펼칠 수 없게 된 후론/ 약수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쳐다보지 않는다/ 꽃과 이파리가 사라지자/ 산목련이라는 이름도 사라졌다// 겨우내 불평 없이 서 있는 산목련의 압축/ 가만히 들여다보니 몸통이 촉촉하다/ 옆구리 가지 사이에 숨어있는 싹들이/ 압축을 풀고 있다//
빈 집 / 권은중
재개발 소문에 묶여/ 죽는 날만 기다리는 집/ 철사로 동여맨 대문 안마당 한쪽/ 목련꽃 혼자 웃다가/ 지쳐 떨어지고/ 감꽃 피어 마당가득/ 풋감이 떨어지고/ 뒤늦게 꼭지에 붙들린 붉은 감/ 까치만 들락거린다/ 웃음이 떠나고/ 기침소리도 없는 집/ 어둠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금간 벽은 담쟁이가 꽁꽁 싸매었다/ 낮에는 해가 망보고/ 밤에는 달이 지키는 집/ 슬리퍼 끄는 소리 골목을 지나면/ 어둠이 흠칫 놀라/ 더 깊이 숨는다/ 담 너머 까치발로 들여다보아도/ 귀먹은 집은 기척도 없다/ 봄이 마당 한가득 들어와 살아도/ 인기척 하나 없는 저 집/ 움직이지 못하는 어둠이/ 집안에 홀로 산다//
빈 통 / 권은중
빈 우유통을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통 밖으로 떨어진 빈 통을 집어든다/ 깃털이 이렇게 가벼울까/ 만삭의 몸으로/ 차가운 냉장고에서/ 누군가를 기다린 우유/ 밀폐된 몸속에 간직한/ 소의 울음과 건초들,/ 이제 가볍다// 딸의 이름이 붙은 엄마로 살다가/ 목관에 누운 어머니/ 죄다 비우고/ 헛 껍데기만 남은 통/ 나도 어느새 엄마가 되어/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빈 통이 되었다// 통을 흔들어본다, 어지럽다/ 아직 딸을 위해 통 속에/ 비워야할 것이 남았을까/ 빈 우유통에 물을 붓는다/ 내 목까지 물이 차오른다//
치열한 삶 / 권은중
축대 한 귀퉁이로 들어가는 새 한 마리 보았다// 작년에도 그곳에/ 새끼 낳아 키우더니 올해도 그 집이 무사한지/ 답사를 왔나// 쪼로롱 쪼로롱 노래하는 새는 // 축대 밑에 새끼를 감춰두고//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위에서/ 주변을 살핀 후// 낙엽 뚝 떨어지듯/ 둥지로 들어간다// 천적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마음// 새끼들은 어미가 올 때까지/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삶인가// 올해도 난, 못 본 척 해야겠다//
한 끼 / 권은중
출근길 전철역 환승 통로/ 식권 한 장이 발에 밟혀 뒹군다/ 누군가 한 끼의 권리를 잃어버린 셈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권리행사는/ 제 갈 길에 바쁜 무수한 발에 짓이겨진다// 식량이 넘치거나 모자란 지구별/ 한 끼의 권리도/ 불공정 앞에서는 사치다/ 정치이념과 국가주의로 무장한 인류는/ 한 끼의 밥에도/ 공정의 잣대를 들이댄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한 끼의 밥을 벌기 위해/ 중금속에 오염된 쓰레기를 뒤지고/ 손톱 끝에 피가 마를 날 없이/ 광물자원을 캐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화장터 소각장,/ 벗이 재가 되어가는 시간/ 15센티 두께 콘크리트 바닥 한 층 아래에서/ 나는 한 끼의 국밥을 삼킨다//
초승달 / 권은중
오랜만에 엄마를 찾아간 날/ 반가움에 덥석 잡은 손/ 긴 손톱이 가슴을 에인다/ 얼른 손을 빼시는 엄마/ 손톱 깎아드릴 여유조차 없는 딸의 일상을/ 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손톱을/ 서로에게 들켜버렸다/ 몇 번을 깎으려다 잊어버린 사이/ 손톱은 무얼 먹고 자랐을까// 그 많은 일에 닳고 닳아/ 깎을 필요도 없던 엄마의 손톱/ 중풍으로 손을 못 쓰게 된 후, 한 번도/ 제때에 깎아드리지 못했다// 유리창 밖/ 깎아드리지 못한 손톱 하나/ 저문 하늘에 걸려있다//
아버지의 부탁 / 권은중
휴대폰 벨이 울리자, 화면에 아버지가 나온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 “난 네가 죽었는지 알았다, 전화도 없고 볼 수가 없으니”/ “죄송해요 시간 내서 갈게요”/ “부탁이 있다, 너 올 때 목숨 끊는 약 좀 사와라”/ “아버지, 자식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이젠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까지 어눌하니, 딱 죽고만 싶구나”/ “저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수년을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병수발을 하시다/ 똑같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 한 가닥 남은 기억으로 딸에게 졸라댄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 목숨 끊는 약 좀 사오라는 부탁/ 아무리 전화기를 들여다봐도/ 그 전화는 다시 오지 않는다//
숙부 / 권은중
부엌 가까운 뒤란, 형수를 위해 그가 팠던/ 이끼 낀 우물에 하늘이 고여 있다/ 오직 맨땅에 헤딩하던 사내/ 언제 만날지 모르는 물길을 찾아/ 마른 땅세서 우물만 파던 그가/ 펄럭이는 만장을 앞세우고 상모를 돌리며 간다/ 꽹과리를 두드리며 형이 가던 길을 간다/ 끊어질 듯한 허리, 펴지지 않는 오금/ 물길을 찾아 땅속을 파내려가는 것만이/ 자식들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으니/ 파 올린 흙이 산이 되어도 마른 흙만 나올 때/ 어둠에 쓰러져 수없이 샘이 되고 싶었으리라// 포천군 이동면 제비울 산 1번지/ 포클레인으로 판, 한 평도 안 되는 흙구덩이/ 땅속 우물만 파고 살던 사내/ 눈을 감은 채 누워 우물을 꿈꾼다/ 숙부는 이 구덩이를 파는데 평생이 걸렸다//
양파 / 권은중
양파 껍질을 벗긴다/ 뿌리가 껍질 안에서 길을 찾고 있다/ 밖에 나온 뿌리는 바스라지는데/ 껍질 속에서 둥글게 웃자란 새순은/ 또 다른 생을 찾고 있다/ 양파도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고 있다/ 싹을 키워 올릴 힘을 비축하는 동안/ 발부터 짓고 있었다/ 이력서를 준비하는 아들/ 튼실하게 푸른 싹을 밀어올릴 궁리중이다/ 자신의 몸을 담보로/ 착지할 땅을 찾아/ 지금 첫 발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삶 / 권은중
입던 니트/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고/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한올한올 짜여졌던 실을 푼다// 오랜 세월 옷으로 살다 풀려진 실은/ 견뎌온 날이 순탄치 않았다고/ 꼬불꼬불 지나온 길을 이야기한다/ 젊은 패기와 곧은 마음을 누그리며/ 굽이쳐 살아올 때도 힘이 들었지만/ 살아온 이야기 하려니 쉽지만은 않은가보다/ 주절주절 내려놓는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타래에 주워 담으며/ 구불구불한 그 길의 기억을 지우며/ 그동안의 살아온 모양대로가 아닌/ 새로운 기억의 회로를 생성하며/ 목도리 짜던 솜씨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
벙어리장갑 / 권은중
첫딸을 홍역으로 잃은 엄마는/ 같은 해에 태어난 막내고모를 젖 먹여 키우셨다/ 자식 같은 시누를 안쓰러움에 야단도 못치고/ 잘되기만을 바라셨다/ 일찍 부모를 여윈 고모는 늘 외톨이였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벙어리장갑을 짜주셨다/ 어쩌다보면 한 짝만 남은 장갑/ 둘이 헤어지지 말라고 길게 끈을 연결해주셨다/ 벙어리장갑 안에 손가락 4개는 온기를 나누며/ 서로를 끌어 앉는데/ 홀로 남은 고모는 얼마나 시렸을까// 엄지손가락은 자기가 추운 줄도 모르고/ 조카 4형제 추울까봐 가끔 부며/ 온기를 채워주셨다/ 큰일을 치룰 때마다 도맡아 하시면서/ 늘 우리 조카들을 걱정해주셨다//
놀이터 遊泳/ 권은중
한 밤중 놀이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맴돌고 있다/ 모래 바닥엔 움푹움푹 뜀박질이 꼬리를 물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소게임/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평행을 잡는다/ 오르면 내려 가야하는 미끄럼틀/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른 길도/ 뜻하지 않게 한 걸음으로 내려올 수 있다/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던 그네/ 박차고 오르던 힘으로 흙마당을 움푹 파고 앉았다/ 철봉을 잡고 아귀에 힘을 준다/ 아무리 가깝게 끌어안으려 해도/ 직선을 고집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용수철 위에서 통통 튀는 백마/ 천리 길을 달려 보고픈 희망을 가져보지만/ 흙 속에 다리가 묻혀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정육면체에 허공을 바벨탑처럼 쌓은 정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가슴 속에 가만히 서 본다/ 벚나무 이파리 하나 날아든다//
모루에 대한 기억 / 권은중
시골집 헛간구석에 엎드려 있는 모루 하나/ 무수히 망치를 얻어맞은 등허리가 곧다/ 옆구리 검붉은 부스럼을 건드리자/ 움찔, 잠 깨어 올려다본다.// 마당가 미루나무 옆 할아버지 대장간/ 풀무질 할 때마다 부와부와, 호랑이 우는 소리/ 무서워 풀무 주위만 빙빙 돌면/ 조막손을 감싸 쥐고 함께 풀무질 하여/ 숯불 속에 숨어 얼굴 붉어진 쇠토막을/ 모루 등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기신다/ 쇳덩이가 두들겨 맞아 호미로 둔갑할 때까지/ 신음소리만 삼킬 뿐 불평 한 번 않던 모루/ 중풍으로 쓰러진 후/ 손녀의 손에 이끌려 대장간에 가시면/ 모루를 잡고 눈만 껌뻑이시던 할아버지/ 빨리 일어나 썰매 만들어 주마시더니/ 꽃상여 타고 가신 후, 아직 소식 없다// 먼지가 덮힌 등에 움푹움푹 패인 망치 자국들/ 귀를 대면/ 점점 크게 고막을 울리는 망치질 소리/ 코끝이 먹먹하다.//
갈빗국을 끓이다 / 권은중
친구가 선물한 갈비세트/ 호주의 평원을 뛰놀던 소다/ 찬물에 담근다/ 갈비뼈 사이사이/ 돌아갈 수 없는 아픔이 붉게 배어나온다/ 물속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곰솥에 불을 지피자/ 뜨거운 우리를 박차고 나가려는지/ 콧바람을 불며 거품을 뿜어댄다/ 끝없는 초원을 뛰놀던 시간/ 초록 거품이 되어 가장자리에 몰려다닌다/ 앞발을 들고 가운데로 용솟음치듯/ 한바탕 끓고 나더니/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까/ 푸른 그릇 위에 누워있다//
석관 / 권은중
야트막한 잔디가 덮인 사각 대리석 뚜껑/ 온 천지 흰 눈으로 덮여 입구가 사라졌다/ 간신히 찾아낸 반듯한 입구/ 6.25 전쟁의 두려움도/ 남편의 술 주사도/ 허리 펴지 못하는 노동도/ 그곳까지는 미치지 못해/ 이제 어머니는 석관 속에서 편안해졌다// 시부모 모시던 닳아버린 손톱도/ 그곳에서 한 마디 더 자라겠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스미지 못할/ 단단히 봉인된 저 석관// 그 누구도 뚜껑을 열어/ 모처럼 맞은 어머니의 평화를/ 건드리지 못한다/ --------------//
길 / 권은중
눈앞에선 곧은 길/ 멀리 보면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예고 없이 달려가도 기꺼이 허리를 내어주는 길/ 늘 한결 같은 마음이었던 거야/ 결코 노란 중앙선을 넘어서지 않으려고/ 늘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던 거야/ 흐르는 강물이 어깨를 나란히 해주지 않았다면/ 가드레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을 거야/ 가로수들이 늘어서서 환호해주지 않았다면/ 한번쯤 멈춰버리고 싶었을 거야/ 넘어지지 말라고 점멸등이 걱정해주지 않았다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비탈을 만나 숨이 차오를 때마다/ 언덕 넘어 평지가 있을 거라 믿었던 거야/ 어두운 터널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듯/ 자 힘을 내봐/ 길이 있는 곳까지 가보는 거야.//
봄의 길목 / 권은중
담쟁이는 벽을 붙잡고 삶의 터전을 잡았다/ 푸른 잎에서 붉은 잎으로 변신을 하고/ 잎을 떨어뜨려도 여전히 벽에 갇혀있다/ 겨울을 난다는 것은 봄을 낳기 위한 입덧/ 실핏줄까지 물을 끌어올리며/ 손가락 오므리고 올라올 이파리를 기다린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길목/ 곁에 있는 동백은 온몸에 봄을 뒤집어쓰고/ 봄은 담쟁이를 건너 동백에게 넘어갔다/ 한 계절에 두 개의 계절이 뒤섞여/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분명하다// 동백은 입덧을 끝내고 꽃을 낳았다/ 봄의 입술이 빨갛다/ 바닥은 또 한 번 꽃을 피워 올린다//
어려운 걸음 하셨네요 / 권은중
시 공부 끝나고/ 맛있는 점심 먹자며 큰 도로 건너/ 찾아찾아 간 굴밥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달궈진 돌솥 들기름 냄새가/ 와락 멱을 잡아 당긴다// 얼마나 맛있는지 앉을자리 없이 가득한 식당에/ 벽을 기댄 끝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구석진 자리에서 식사 끝나고 일어난 손님/ 밥 먹는 우리에게 신경쓰지 않게 할 요량으로/ 앉은뱅이 식탁을 넘어 한 발에 건너 나오신다// 그바람에 맛난 굴밥 먹던 두 시인/ 사레가들어 얼굴 빨갛게 기침을 해댄다// 한 발에 두 시인을 쓰러뜨리는/ 어려운 걸음 하셨네요//
민들레 / 권은중
저 흰 공작 한 마리/ 날걔를 편 지 며질인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깃털 빠진 새 한 마리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붙잡혀 있다/ 날아오를 꿈을 꾸는데 바람에 깃털만 날아간다/ 올해도 깃털을 다 잃고/ 여전히 땅에 묶여 있다/ 가벼운 바람의 유전자들/ 민들레 절반은 바람이다//
박주가리 / 권은중
지난 겨울 은빛햇살을 타고 날아든/ 비행접시 하나/ 몇 번을 시도하다 담 밑에 안착했다/ 봄 햇살을 끌어 당긴 외계인/ 담 밑에서 고개를 내민다/ 여름이 되자 담에 올라서서/ 하늘 멀리 행성에 보내는 교신/ 끝내 안테나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내려앉는다/ 외계인은 담을 지우고 봉숭아와 과꽃을 포섭한다/ 하나 둘 피워 올린 꽃향기로/ 우리집을 점령하고 이웃집까지 넘본다/ 뙤약볕과 장맛비를 막아주던 이파리들/ 향기가 불러온 벌레들의 기습 공격에/ 마음껏 차지했던 담을 도로 내어 놓는다/ 드문드문 꽃향기는 두 평 남짓 꽃밭을 지키며/ 호시탐탐 지구를 점령할 그날을 위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줄기로/ 씨 주머니를 잔뜩 움켜쥐며/ 벌레들과 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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