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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남권 시인

부흐고비 2022. 2. 4. 02:16

김남권 시인, 아동문학가, 시낭송가
△경기도 가평 출생. △《시문학》 등단(2015) △한국시문학문인회 사무국장. 강원아동문학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강원작가회의, 솔바람동용문학회 회원 △이어도문학상 대상, 강원아동문학상, 2021 KBS창작동요제 노랫말 우수상 수상 △시집 『등대지기』, 『하늘 가는 길』, 『불타는 학의 날개』,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다수 △동시집 『짜장면이 열리는 나무』, 『1도 모르면서』 △일반서 『시낭송의 감동과 힐링』, 『마음 치유 시낭송』, 『내 삶의 쉼표 시낭송』. 한국장학재단 멘토,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김남권 시인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외 다수 동시집 '엄마는 마법사''1도 모르면서''짜장면이 열리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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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 김남권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머문 자리마다/ 꽃망울이 터지고/ 당신의 손길이 머문 자리마다/ 이파리가 돋아납니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당신의 함박웃음 소리에/ 꽃망울이 터지고/ 당신의 해맑은 미소에/ 꽃잎들 눈인사 합니다/ 당신과 함께 온 이 봄/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낙타의 눈물 / 김남권
바람이 얼어 있다/ 서해에서 시작된 바람이 선자령 정상에서/ 주문진 포구를 바라보며 직립해 있다/ 58년 동안 고비사막을 걸어오느라// 등이 사라진 낙타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정지해 있다// 이미 늙어버린 바람의 허리가// 페이지가 없는 책장을 넘기다// 물안개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천 길 어둠이 하얗게 밀려왔다/ 점봉산을 걸어 내려 온 새벽이// 자작나무의 옷을 벗기는 아침,// 하늘도 뜨거운 옷을 벗었다// 바다가 바람의 입술을 마시며// 젖빛으로 누워 있다/ 바람이 녹고 있다/ 자작나무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뜨거운 숨결이 된,// 등이 사라진 낙타가// 속눈썹으로 눈물을 자르며// 내게 오고 있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 김남권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 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나비와 개망초 / 김남권
하얀 나비가 날았다/ 하얀 기억을 남기고 발자국도 없는/ 하늘을 날아올라/ 날개를 펄럭인 자리마다/ 꽃이 피었다// 꽃잎은 공중을 물들이고 피어나/ 암술을 내밀고 그리움을 접속했다/ 나비는 꽃을 본 게 아니었다/ 나비는 망초의 은밀한 곳을 본 것이었다// 나비의 날개가 쪼개지기 시작했다/ 백 여덟 개의 꽃잎이 우주를 향해/ 떨고 있는 동안/ 나비는 흰 무늬를 쪼개어 수의를 짓고/ 샛노란 심장에 봉분 하나를 세웠다// 참이었던 적 없이 개를 족보로 들여 놓고/ 살아 온 세월,/ 그래서 가슴은 늘 서늘했고/ 눈빛은 늘 허전했다// 이제 다시 긴 잠에 들어가면/ 칠 년 후 쯤 깨어나/ 날개 없는 짐승으로 땅을 기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꽃그늘을 찾아다니며/ 나비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물어볼 것이다//

나비 냄새 / 김남권
무지개를 한 입 깨물었더니 물비린내가 났다/ 수 십 년 동안 날 따라온 달처럼 고향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숨을 쉬고 있나 보다/ 늙은 물고기들은 나비가 되었는지/ 공중에 빨주노초파남보 다리를 놓고/ 깔깔깔 웃는 소리 들렸다// 무지개를 한 입 깨물었더니 꽃 비린내가 났다/ 수 억 년 동안 날 따라온 별처럼 우주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숨을 쉬고 있나 보다/ 어린 물고기들은 애벌레가 되었는지/ 산 위에 북두칠성 다리를 놓고/ 까르륵 웃는 소리 들렸다// 젊은 엄마의 가슴에서 나던 그 냄새/ 어머니가 별이 되던 날 밤/ 하얗게 날아 오르던 나비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비의 장례식 / 김남권
어머니는 내가 다닌 학교의 청소부였다/ 휴게실도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고/ 하루 열두 시간씩 허리가 휘게 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88만원을 목숨처럼 안고 사는 마지막 청소부였다/ 그것마저도 용역회사에 수수료와 세금을 떼어주고 나면/ 한 달 뼛값 칠십 만원, 아무리 기를 써 봐도 통장의 잔고는 일곱 자리를 넘지 못했다/ 평생을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청소부 가평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팻말 한번 치켜든 날/ 용역깡패들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아 갈비뼈가 으스러진 채로 짐승처럼 끌려가다/ 이명처럼 들려오던 앰블런스 너머로 희미한 빛을 본 이후로 아직 꿈결 여행 중이다// 여전히, 사진 속에서 수선화처럼 웃고 계신 어머니,/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늘 하얀 무명저고리에 꼿꼿한 동정을 달고 옷고름에서 풀냄새가 나는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자식의 모든 허물은 덮어 주었지만/ 장날이면 새벽같이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콩 한 되, 팥 한 되를 팔아서 밀가루와 보리쌀 몇 되를 머리에 이고 칠흑 같은 고갯길을 홀로 넘어온 성자였다// "부엉이 우는 밤은 차라리 동무였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여우울음 소리라도 들리는 날엔 오금이 저렸니라, 그때는 그저 집에서 입 벌리고 있을 내 새끼들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깜깜했니라."/ 관절염 수술로 한동안 병원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병원 창문에 보름달이 훤하게 비추는 밤이 되면/ "자슥 앞세운 에미가 무슨 낯으로 칠순 잔치를 다 한다냐," 하시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고/ 그렇게 훌쩍 십년이 지나고 팔순을 앞둔 어느 날/ 노오란 달맞이꽃이 하얗게 꽃망울을 터트리던 밤/ 하얀 나비 한 쌍이 화르륵, 화르륵 제 몸을 불태우며/ 어머니 품속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울지 마라 아가야,/ 세상의 모든 어미는 나비가 되는 거란다."/ 아, 나는 어머니가 나비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비의 문장이 자식의 무늬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만장 같은 날개짓으로 꽃의 언어를 불러 오는 이유를,/ 세상의 모든 어미가 밤마다 달맞이꽃을 피우는 이유를,//

푸른 기억 / 김남권
잠수종과 나비의 장 도미니크 보비처럼/ 너의 눈빛에 전신이 마비되는 순간/ 언어는 마비되지 않은 왼쪽 눈꺼풀 하나로/ 마지막 자서전을 쓴다// 찬란한 햇살이 영원 속으로 떠오른다/ 침묵했던 심장이 일어선다/ 말할 수 있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 열정이 쏟아진다// 석고로 진화하는 허망한 몸뚱어리,/ 눈꺼풀 하나로 겨우 별을 만진다// 이제 더 이상 강물을 건널 수 없다/ 나무의 부르튼 가지를 만질 수 없다/ 꽃잎의 거친 숨소리에 머무를 수 없는 나비라니,/ 이건 차마 살아 있는 지옥이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비가 수직으로 내린다/ 비의 기둥을 빠져 나온/ 바람에게 묻는다// 나비를 보았느냐?//

별의 주소는 묻지 않겠다 / 김남권
늦은 그리움에, 너는 첫눈에 반한 첫눈처럼/ 내 가슴에 들어와 별이 되었다/ 우편번호도 없이 캄캄한 우표 한 장 붙인 채/ 수억 광년을 걸어서 왔다// 아주 오래전 보았던 눈빛 무늬를 기억해 내고는/ 연극이 끝난 배우처럼 나에게 왔다/ 하루에 한 번씩 지상의 별이 길을 떠나면 멀리서/ 마중 나온 너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차가운 몸을 녹였다// 아직 하늘이 녹기 전, 푸른 수의를 입고/ 먼저 오는 이의 조문을 받기 위해/ 지상에 별 하나를 밝히고 그 입술 위에 천상의 화인을 찍었다// 숨이 막혔다/ 그렇게 혈관에 새긴 편지로 바람의 온도를 재는 동안/ 어둠이 걷혔다/ 아직 나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새벽이 올 때까지 멀리서 오는 별 하나를 그리워할 뿐이다//

별의 안부를 묻다 / 김남권
나는 한 번도 별이 뜨는 걸 본 적이 없다/ 별이 지는 걸 보는 건 아주 오래되었지만/ 뜨는 걸 본적은 한 번도 없다/ 별의 주소도 모르고/ 별의 가족도 모른다/ 이젠 더 이상 별이 지는 것도 못 보겠다/ 별의 나이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이미 별의 심장이 되어 나를 점령한 너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나는/ 숨이 막힌다/ 그저 별의 그림자만 따라가기로 했다/ 별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별이 된 너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 이 밤이 지고 나면 네가 숨 쉬던 자리에/ 별꽃 한 송이 피어나/ 바람마저 붉게 물들이겠다//

 

별을 건네는 시간 / 김남권
길을 걷다 나무 한 그루 화사한 꽃망울 터뜨리는 걸 볼 때/ 가슴 한 켠이 쿵,하고 내려앉는다면/ 첫사랑이 온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땅이 울리고/ 눈길 닿는 곳마다 이파리가 돋아나/ 바람마저 화사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첫 눈 같은 그 사람의 숨결이 오는 것이다// 이 생애 딱 한 번 가슴으로 스친 인연/ 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주목나무의 붉은 뿌리로 살아남아/ 마른하늘의 무지개처럼 걸어서 걸어서/ 너에게 갈 것이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그 길을/ 눈 길게 뜨고/ 꽃잎을 품에 안은 얇은 바람이 되어/ 이 생애 마지막 체온을 담아/ 너에게 갈 것이다// 생전 처음 와 보는 길 모퉁이/ 산기슭, 얇은 강물 소리가 돌아나가는/ 너럭바위 어디쯤에서/ 턱, 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게 된다면/ 아직 가슴에 사랑의 씨앗이 남은 것이다// 느티나무가 한 자리에서 천 년을 견디다/ 속이 텅 빈 채로 쓰러진다고 해도/ 그 뿌리는/ 살아남아 다시 천 년을 사는 것처럼/ 한 번 새겨진 사랑의 흔적은/ 뿌리에서 가슴으로 별의 족보를 이어 가고/ 눈보라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눈을 감고 눈밖을 본다/ 꽃 피지 않은 사랑이 없고/ 꽃 피지 않은 시절이 없다/ 지금 여기, 꽃봉오리 하나 너의 작은 손에/ 별 무늬 하나를 건네고 있다//

별의 노래 1 / 김남권
모든 별에는 수도꼭지가 있어/ 이른 저녁이 되면/ 말끔히 세수하고 나와 나를 기다리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서낭당 느티나무 정자를/ 베고 누워/ 나를 올려다보네/ 노을과 몸을 바꾸는 아홉시가 되면/ 아침의 노여움도 어둠 속에 둥지를 틀고/ 바람의 표정을 바꾸네/ 모든 별들이 우주의 눈을 밝히는/ 자정이 되면/ 수선화처럼 푸른 어깨를 내밀어/ 숨 막히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네/ 늦은 세수를 하고 다시 보아도/ 너는 호수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이 부셔/ 가슴에 손을 얹고 눈 감을밖에,//

 

                                단 하나의 노래 / 김남권

내 안에 섬이 있다 단 하나의 노래가 되는 섬이 있다 서편제의 돌담길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다 아리랑 망부석이 된 사내가 있다 만질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어서 노을이 된 우주가 있다 하늘을 베고 누우면 바람이 될까 봐 젖은 눈망울을 애써 감추며 별빛의 무늬를 헤아리는 척, 돌아눕는다 내 안에 너에게로 가는 뱃길이 있다 단 하나의 노래를 안고 묵호 등대의 불빛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다 촛대바위가 된 가시내가 있다 만질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어서 바다가 된 물비늘이 있다 그리움을 베고 누우면 꽃이 될까 봐 젖은 눈동자를 술잔 속에 감추며 달그림자를 메만지는 척, 허리를 굽힌다 내 발끝에 네가 다녀간 열꽃이 핀다 단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단 하나의 술잔을 비운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헤에헤 아리랑 음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그물처럼 갈라터진 심장 속으로 아리랑이 흘러 들어갔다 단 하나의 노래가 섬으로 돋아났다 내 안에 너라는 작은 섬이 생겨났다


풍경의 사랑법 / 김남권
바람이 분다/ 오대산 능선의 주목나무 잎새를 지나온/ 싱싱한 바람이 불어와 월정사 추녀 끝에 매달린// 숫처녀의 치맛속으로 들어간다/ 딸링 딸링 딸링 딸링/ 처녀의 몸이 울릴 때마다 바람의 얼굴은 붉어진다/ 뜨거운 사랑을 나눌 때는 저런 소리가 나야 하는 것이구나/ 온 몸에 떨림이 번져 파문이 번져 나가야 하는 것이구나/ 바람이 오지 않았다면// 저 산 자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동안거가 풀리면 묵언도 풀리듯/ 스님들도 사랑을 하려면 적어도 백일은/ 침묵을 견뎌야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거였다/ 온 몸으로 울고 나서야 달빛도 풍경속의 물고기로 매달리게 된다/ 한바탕 고요를 흔들고 나서야 물고기도/ 단잠에 빠지게 된다/ 바람이 분다/ 기룬 님 작은 어께를 넘어 온 여린 바람이/ 새벽 별빛을 데리고 들어와/ 내 발 위에 풍경소리를 놓고 간다//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바람이다/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어느새부턴가 몸 안의 기운이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손바닥에 남은 한 줌의 공기만 당신 것이 되어버렸다/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두 발로는 버거워/ 지팡이를 짚고서도 비틀거린다/ 땅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발을 옮기는/ 것처럼 허공에 오래 머무르는 발걸음이/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위한 말줄임표.../ 자유로운 몸짓의 마지막 쉼표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자식 여섯을 잉태하고 키우는 동안/ 당신의 전부를 먹이고도 양파껍질처럼 남은 것을,/ 세상의 모든 생명을 길러 내는데 쏟아부었던/ 모성마저 단풍의 절정에서/ 낙엽이 된다/ 아 , 바람이다 당신은/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지렁이 꽃 / 김남권
눈 속에서 바람의 은신처를 찾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바람의 주검이 머무는/ 지렁이의 길을 따라 막장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없어 안심되기는 처음/ 축축한 하늘이 맨살에 닿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눈을 감았다/ 지렁이의 길은/ 눈을 감아야 갈 수 있는 곳/ 눈을 감아야만 눈이 멀지 않는다/ 지렁이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지렁이가 운다/ 비가 흙의 잠을 깨운다/ 바람의 숨구멍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렁이의 분변이 드디어 민들레를 밀어 올렸다/ 아, 하고 열리는 하늘/ 지렁이의 눈을 닮은 민들레의 떡잎/ 지렁이를 따라 간 사람의 눈썹이다//

소금꽃 / 김남권
소금은 음식의 시작이자 끝이다/ 겉절이 하나에도 어머니는 허투루 소금을 치지 않았다/ 배추를 찬 물에서 헹구는 동안에도/ 하얀 소금 한 바가지는 부뚜막의 가장 신성한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척, 처어억~/ 잡귀를 물리치는 손사래가 지나간 자리마다/ 편안하게 숨을 거두고 있는 배추 이파리,/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을...// 어머니의 삼우제가 끝나고/ 유산문제로 멱살잡이를 하다 분이 덜 풀린 채로/ 벌컥벌컥 병나발 소주를 들이켜던 순간,/ 홧김에 집어든 김치 한 조각을 우적 우적/ 씹던 누나가 갑자기 ‘엄마, 엄마아~’를 부르며/ 통곡하던 순간 알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어머니의 손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니가 끼니때마다 소금으로 간을 하며/ 그놈의 성질 좀 죽이라고 했던 이유를,// 평생을 자식들 입안을 맴돌다가/ 마지막 순간 천일염 한 줌으로/ 길을 떠나신 어머니의 유산이 녹고 있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처억척’ 숨이 죽을 때/ 나도 비로소 누군가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제비꽃 당신에게 / 김남권
메마른 땅 돌 틈 사이에// 제비꽃 한 송이 피어나려고 눈보라는 그렇게/ 차가운 별빛 아래 오래 머물렀던가 보다// 해마다 3월은 다시 온다/ 가장 평화로운 햇살만 모아/ 보랏빛 웃음이 피어나겠다// 가장 아름다운 눈빛만 모아/ 보랏빛 향기가 피어나겠다// 세상에서 높고 귀한 것들은 모두 보랏빛이다/ 세상에서 깊고 환한 것들은 모두 보랏빛이다// 나를 품고 길러낸 어머니의 가슴도 보랏빛이고// 내가 사랑한 사람의/ 가슴도 모두 보랏빛이다// 내 가슴이 한결같은 보랏빛으로 빛날 때/ 메마른 땅 돌 틈 사이에 피어나는 제비꽃 한 송이도/ 뜨거운 별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하늘 바다가 같은 눈을 뜨고/ 꽃나비가 같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내 심장이 보랏빛 얼굴이 되어/ 너를 처음 바라보았을 그 때처럼//

꽃별 지다 / 김남권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벽이 왔다/ 별 하나가 잠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꽃의 눈물 / 김남권
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고 꽃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꽃비가 내린다고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꽃은 꽃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인연들과 만나고 싶을 뿐이다/ 꽃을 만들어 낸 나무에게 꽃씨의 반역을 고변하고/ 사랑의 비밀을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한 사람만 사랑한다고 사랑은 아니다/ 해퍼야 사랑이다/ 누구에게 선택받은 것만 사랑이 아니다/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소나기에 젖어서 두근거리던 눈빛도/ 별빛에 잠겨서 설레이던 심장도/ 꽃술 안에 스스로 갇혀있는 이유는/ 꽃비로 내릴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꽃이 지천으로 피어나서 꽃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꽃비가 내린다고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해퍼야 사랑이다/ 꽃이 홀로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아는 순간,/ 그대도 꽃이 되는 것이다//

늑대의 눈물 / 김남권
수컷 우두머리가 죽었다/ 암 늑대는 다른 무리의 늑대를 피해 가능한 멀리 떠나야 한다/ 하루 백 리가 넘는 숲을 가로질러/ 오스트리아를 지나 몽블랑까지 며칠 만에 천 킬로를 이동했다/ 큰수염수리가 따라오는 폭설 한가운데를/ 죽을힘을 다해 뛰어온 암 늑대는/ 따뜻한 은신처를 찾아 새끼를 낳았다/ 스라소니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도 늑대처럼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작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을 포기하면 새끼들이 굶어야 한다/ 어미는 새끼들이 아, 하고 입 벌린 채/ 굶고 있을 때/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알프스의 밤이 깊어 가고 늑대 새끼도 스라소니 새끼도/ 어미의 귀가를 기다리며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암 늑대는 공중 깊숙한 곳의 달을 쳐다보며/ 숲의 정령을 포기한 채/ 마른 울음을 울어야 한다//

봄길 / 김남권
눈밭에 머물러 있는 짐승의 발자국은 외롭지 않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거슬러 내려와/ 제 땅도 아닌 곳에 인감도장 찍어 놓고/ 발자국 따라 돋아나는 봄을/ 가장 먼저 등기할 것이다/ 발자국이 깊어야 땅은 더 기름지겠지/ 발자국이 깊어 땅은 더 웃고 있겠지/ 이 순간에도 분주히 길을 내고 있을/ 지렁이 두더지 땅강아지에게/ 노루 사슴 고라니의 눈동자를 보낸다/ 인간이 불법 전매한 땅의 주인으로부터 받은/ 강제철거명령서 한 장 들고/ 설해목 쓰러진 자리/ 짐승만도 못한 짐승들이 사는/ 마을로 봄길을 낸다//

달의 연인에게 / 김남권
보름달이 떴는데 어떻게 날 안 처다볼 수 있어?/ 널 보려고 한 달을 걸어서 왔는데/ 별들의 일방적인 해코지를 받으며 천 년을 걸어서 왔는데,/ 어차피 나와 한 몸이었는데 좀 떨어져 지내면 어떠냐구?/ 그게 벌써 오억 년 전 일이야 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한 달에 딱 하루 완전한 몸일 때 너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일 년을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도/ 어떻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니?/ 하도 답답해 백일 동안 달맞이꽃을 피워 놓아도/ 너는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더구나/ 새벽이 오면 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어/ 다시 보름이 오겠지/ 그렇지만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을지 걱정이야/ 만약 살아 있다면 다음 보름엔 꼭 얼굴 한 번 보자/ 달이 저물고 있어/ 부디 아프지마//

마늘이 나올 때 / 김남권
왕겨를 덮어놓은 밭두렁// 허공을 덮은 자리에 마늘 순이 올라왔다/ 묵은 계절, 뿌리내리지 못한 어둠속 결빙의 입자들을 붙잡고// 악착같이 버텨낸/ 채권자들이 몰려왔다/ 즐비한 외상장부를 들고// 즐비하게 들개 떼가 몰려와 장농을 뒤지고 책상을 뒤엎고/ 부엌의 살림살이마저 마당 한가운데 널브러지던 그날처럼,// 하늘은 고요하다/ 피난민이었다가 화전민이었다가 도시 한 모퉁이를 지나//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인생은 텅 비어 있었다/ 갚아야 할 것도 받아야 할 것도// 오직 혼자만의 기억 속에 남겨둔 채 눈을 감으셨다/ 딱, 지금의 내 나이였을 것이다/ 농약기운이 온몸에 퍼져서 소양강 길을 꼬불꼬불 돌아 나올 때쯤,// 아들에게 남겨두고 갈 빈 외상장부 때문에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전해 받지 못한 외상값 받으러 가는 날이 온다면,// 그동안의 이자도 받아낼 생각이다/ 대청동 치과의 이빨 때운 값, 의정부 시장 통 여인숙 방값,// 그리고 급할 때 지인들에게 빌려 쓰고 떼먹은 돈까지/ 아버지의 외상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신발 갈아 신고 노잣돈 받아 길 떠나는 날,/ 만장 깃발 가득히 흩날리고 갈 것이다//

만행 / 김남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아침마다 길을 나선다/ 익숙하고 다정하고 오래된 길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거리 신호등을 건너고 편의점을 지나고// 시장 뒷골목을 천천히 걸어서 터미널로 향한다/ 동서울 가는 직행 표를 끊거나/ 영월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도 한다/ 정말이지 버스를 타는 순간에는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기약 없이 익숙한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 십오 년 이젠 돌아오지 않을 때도 된 것 같다/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동안, 나는 쓸쓸해 진다/ 별이 마중 나오지 않는 길을,// 그리움이 컴컴해지도록 터벅터벅 버려진 발자국을/ 더듬어 간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은 밤새 비어있을 것이다/ 갈 곳 잃은 달맞이꽃만 이십 년 전 그 길을 걸어 나와/ 허기진 달빛을 받아먹고 있을 것이다//

따뜻한 고백 / 김남권
도둑 같은 안개비가 내렸다/ 지붕의 가장 낮은 틈으로 스며들어/ 12월의 마지막 새벽을 홀렸다/ 자정 무렵 별빛의 빙점이 시작되었다/ 눈 쌓인 거리에 미끌거리는 눈물이 흐르고/ 하얀 면사포에 쌓인 것들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고 있다/ 짐승의 털이 유순해 지는 시간이다/ 발꿈치를 들고 강을 건너는 물고기들의 함성소리가/ 새벽 강물을 깨우고 있다/ 산 정상의 빗물, 작은 짐승의 빗물/ 가난한 지붕의 빗물, 고독한 이들의/ 빗물이 흘러 강물이 되었다/ 잠들지 않는 물길이 물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물이 흐를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나무의 체온이 만져지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렇게 내가 아직 살아 있어/ 너를 꽃 피울 수 있구나//

폭설 / 김남권
새벽에 역사가 바뀌었다/ 흰 무리의 반란군이 소리 없이 쳐들어왔다/ 주동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제압으로// 부패한 왕조는 뒤집어졌다/ 줄줄이 끌려 나오는 역적들은 모두/ 남해로 유배 시킨 뒤 참수하기로 했다/ 땅 끝을 찾아 가는 길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있다는 전갈이 왔다/ 수시로 출몰하던 산적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이 남아 자신들의 은신처가 발각된다면// 한 번에 소탕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바람 소리마저 숨죽여 들어야 했다/ 죄 많은 사람은 절대로 새벽길을 나서지 않는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그 자리에 묻히기 때문이다/ 새 날이 오고 있다/ 소리 없이 흰 어둠이 밀려가고 나면// 빈 터에 꽃무리 점령군이 몰려 올 것이다/ 반란의 연속,// 숨죽이다// 숨죽이다// 터져버릴 심장이 열두시 정각에 머물러 있다//

뿌리가 전향할 때 / 김남권
지평 아래가 모두 동결되었다/ 숨 쉴 수 있는 틈조차 차단된/ 완벽한 결빙이 주는 안도감은 끈끈한 결속이다/ 물을 끌어온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모의가 추진되고 있었다/ 흙의 무게가 사라진 어둠 밖으로/ 햇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새들도 무겁게 날고있었다/ 탕, 탕, 탕// 쇠가 튕겨 나가는 소리/ 개울가에서 들려오고/ 바람이 깨졌다/ 다시 3월이다, 지평으로 숨이 올라오고/ 허리끈이 풀린다/ 쩡, 쩡 어둠이 깃을 털었다/ 하늘 가득 연둣빛 발가락에서 풀냄새가 쏟아졌다//

아내의 맨발 / 김남권
유리컵 가득 투명한 어둠이 갇힌다/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도 투명하게 갇혀 있다// 떠남과 머뭄이 공존하는/ 미명의 순간, 어둠이 맨발인 채로/ 실려 가고 있다/ 가섭존자가 실려 가는 부처의/ 맨발을 핥았듯이/ 새벽을 여는 햇살이 내려와/ 이슬에 실려 가는 아내의 따뜻한/ 맨발을 핥고 있다/ 아, 드디어/ 어두운 미명 속에서/ 연꽃이 눈을 뜨고 있구나//

순백의 바다 / 김남권
바다에 내리는 눈은 이차돈의 피다/ 까마득한 곳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순백의 뿌리에 도달했다/ 해마다 순결하게 바다의 심장에 다다른/ 눈, 파도의 포말로 응답한다/ 백사장은 온통 순교자의 피로/ 하얗게 물들었다/ 사랑한다면 목숨 걸고 지켜 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심장 하나 쯤이야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에 내리는 눈은 녹지 않는다/ 바다가 온몸으로 지켜내야 할 것들이/ 파도로 깨어나 눈을 맞이한다/ 내가 아는 모든 바다에는//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끝장마 / 김남권
공중을 오가는 빽빽한 언어를 적시고/ 빗살무늬문장이 몰려온다/ 능선과 능선 사이 뜨거운 호흡을 몰아넣고/ 흰 보라 물결 하늘을 건너온다/ 안나푸르나 빙벽에서 수만 년을 견디고 견뎌 온// 영하의 시간이 녹고 있다/ 구름의 입자들은 저 홀로 뜨거워지고/ 은행나무 이파리가 달무리를 먹어 치우는 중이다/ 빗살무늬는 여전히 만행중이다/ 시조새가 하늘의 소리를 물고 비행중이다/ 후이여, 후이여 ~~/ 용마루 위에서 목이 긴 짐승이 울고 있다/ 빗줄기가 이륙하느라 분주한 지상에/ 마지막 무늬가 새겨지고 있다/ 태초에 나를 보냈던 내 어머니의 지문이다//

철길 위에 선 소년 / 김남권
여덟 살 소년이 철길 위를 걸어 간다/ 멀리서 기차가 오고 있다/ 소년은 까마득한 직선이 맞닿아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지만// 레일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몇 번씩 철길 위에서 떨어지면서도/ 포기할 줄을 모른다/ 가면 갈수록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철길은 그대로이고 풍경은 바뀌었다/ 기차가 가까이 오고 있다// 기적소리가 울렸지만 철길이 맞닿은 곳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소년은 철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차는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여든이 된 소년의 아버지가 철길위에 서 있다/ 소년이 마지막까지 찾고 싶어 했던 철길이 보인다// 기차가 가까이 오고 있다/ 몸이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철길이 꼭짓점을 만났다// 멀리서 여덟 살 소년이 달빛을 받으며// 철길을 걸어오고 있다//

바람의 거처 / 김남권
계십니까?/ 빈집에 바람이 들어 왔다/ 바람은 신열을 앓고 있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사랑의 온도를 넘어선지 오래되었다// 발바닥까지 뜨거웠다/ 그리움도 끓어오르다 극점에 다다르면/ 크레바스가 되는 것처럼/ 숨 조차 가눌 수 없는 바람의 입구를/ 서성이는 가난한 노을을 보았다// 계십니까?/ 빈집을 비운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세상이 온통 몸살을 앓고 있는데/ 사랑을 잃어버린 바람은/ 어느 골목에서 소리죽여 울고 있을까//

첫사랑 / 김남권
그 눈빛을 처음만난 순간부터,/ 내 눈은 멀고 말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걸어온 구도자처럼/ 낡은 외투를 걸친,/ 그늘 속을 비추는 별빛이 쏟아지고/ 너를 만나기전에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하늘의 시간을 빌려 온 빗물이었다// 너를 만난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구름의 시간을 빌려 온 눈물이었다// 뿌리의 끝까지 낮은 번개가 들어오고/ 바위틈 그늘의 허리 아래에서 풀꽃 한 송이/ 내 이름을 불렀다// 황홀한 저녁이 불을 밝히고,/ 가슴 한 켠으로/ 빗물이 들어와 고였다// 수평선을 걸어서 걸어서,/ 내게 온 제비꽃 한송이,/ 보랏빛 눈을 떴다// 첫사랑이었다//

남긴 밥 / 김남권
배고팠던 시절에도 집에 가축을 길렀던 사람들은/ 밥그릇을 비우는 일이 없었다/ 일부러라도 밥을 남겨야 강아지가 먹고/ 닭이 먹고 남으면 밤중에 몰래 산짐승이 내려와 먹고 가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함께 뜨거워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목숨이라면 배부르지는 못해도/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가까운 친척집에 초상이라도 치르는 날이면/ 이웃집에 가축들의 안부를 부탁하고, 돌아올 때는/ 고깃근이리도 싸다 드리곤 했다// 같이 살아남아야 행복한 이유를 알았던 시절,/ 동네 집집마다 살림살이가 한결같이/ 팍팍한 화전민 형편이었지만/ 한 사람도 힘들다고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가축들도 주인을 닮았는지 순하고 그리웠다/ 밥도 고기도 배가 터지도록 먹고 가축이/ 애완동물이 되었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배부른/ 사람들은 밥을 굶기기도 하고 내다버리기도 하고/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집어 던지기도 한다// 남겨야 할 밥이 없다는 사실은/ 나누어야 할 그리움이 없다는 말이다/ 뼛속까지 허기가 져도 발등을 타고 올라/ 물끄러미 쳐다보는 개미에게 나눠 줄/ 밥풀 하나 슬그머니 흘리고,/ 가슴으로 배웅해야 할 따뜻한/ 물 한 방울 남기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동안 허방에 빠져도 슬/ 쩍 딛고 올라 올 뜸 같은 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철이 고철에게 / 김남권
고철 시인이 고철을 팔러 왔다가 짜장면을 사줬다/ 1kg에 280원하던 고철값이/ 130원밖에 안한다며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평창시장 골목 칠천각에서 짜장면을 사주고/ 고철이 다 된 1톤 트럭을 타고 멧둔재를 넘어 갔다/ 도로공사를 하다 그라인더 날이 튀는 바람에/ 여섯 바늘이나 꿰맨 다리에 시의 붕대를 감고 절룩거리며/ 가난한 나를 찾아온/ 고철 시인은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었고/ 덕분에 가난한 허기를 때운 나는 원동재를 넘어 영월로 갔다/ 내다 팔 고철도 없고 내다 팔 시도 없는/ 나는 ‘내가 자주 가는 집’에 들러 외상으로/ 막걸리에 산초 두부나 시켜놓고/ 노가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철 시인을 불러 늦은 저녁/ 세상사는 이야기나 들어보는 수밖에,/ 그나저나 내 시는 1kg에 얼마나 받으려나/ 내일은 그동안 써놓은 원고 뭉치를 들고/ 고물상 저울에 통째로 올라가/ 더 쓸모없어지기 전에 비만한 몸뚱이나/ 팔아야겠다//

사랑은 양성(陽性) 중 / 김남권
당신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체온 측정을 해보겠습니다/ 37.5도, 너무 뜨거운 거 아닙니까?// 기침이나 호흡곤란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혈액검사를 해보겠습니다/ 아, 다행히 음성이군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열은 내려가지 않고/ 동공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세요// 체온 측정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37.5도, 너무 뜨거운 거 아닌가요/ 이렇게 계속 열이 나면 장기가 모두/ 상할 수 있습니다// 당장 음압병동에 격리하겠습니다/ 당신은 오늘, 사랑에 확진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 김남권
티라노사우루스가 눈에 불을 켜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먹어 치운다/ 꾸역꾸역 공룡의 입속으로 끌려 들어간 사람들은/ 형형색색으로 이어진 내장을 구경하다가/ 울컥, 사레가 들린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한다// 서울의 지하에서 육천오백만 년 동안 잠복해 있던/ 아홉 마리의 티라노사우루스는/ 신 백악기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두더지의 숙주를 받아 땅속에 살면서/ 암수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는 바람에/ 가끔씩 먹은 음식을 토해낼 때는/ 새끼들이 딸려 나오기도 하고/ 자정이 까까워지면 내장 가득 술이 채워져/ 발걸음이 비틀거리기도 한다// 하루에 한 번 범고래처럼 숨을 쉬기 위해 지상으로 나올 때,/ 사람들은 공룡의 내장이 투명하다는 걸 깨닫고/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다 탈출한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썩은 고기를 먹고 썩은 물을 마신다/ 온몸에 바이러스가 퍼진 사람들은 결국/ 백 년도 못 살고/ 티라노사우루스가 기다리는/ 땅속으로 간다// 신 백악기도 곧 문을 닫게 될 전망이다//

이어도 행, 열차를 꿈꾸다 / 김남권
지구의 동쪽, 새벽이 처음 열릴 때/ 바다열차가 출발한다/ 지축 위에 반짝이는 북극성처럼/ 가슴속에 반짝이는 섬, 이어도 행 열차가/ 한반도 중심 정남진에서/ 남해의 붉은 일출을 맞는다/ 뭇 섬들을 애무하며 지치지 않는 열차는/ 추자도, 여서도, 거문도 물갈기를 이끌고/ 천년 포구 제주항에 다다른다/ 한라산을 오르며 기적을 울리던 열차가/ 서귀포를 거쳐 용머리해안을 지날 때/ 백록의 분화구에서 손을 흔드는 북극성/ 억만년 마라도의 뿌리에 닿아 있는/ 이어도를 향해 자줏빛 바다를 가른다/ 파도의 울음을 들으며 당도한 삼백칠십 리,/ 모든 육지, 어느 곳에서보다 가까운/ 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섬이 보인다/ 온몸으로 ‘이어도사나’를 부르는 손짓/ 건곤감리도 선명한 태극 깃발이 나부낀다/ 동경 125도, 북위 32도에 네 다리를 딛고/ 하늘과 수평으로 태평양을 향해 펼쳐진/ 바다열차의 종점이 기다린다/ 대한민국 이정표의 최남단 이어도역이다/ 서울역을 출발하여/ 이어도역을 향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바다열차의 첫 기관사는 제주비바리다.//
* 2017년 이어도사랑 시(詩) 작품 공모전 대상

물풀의 경배 / 김남권
장맛비가 휩쓸고 간/ 물길 위에 물풀의 오체투지가 장엄하다/ 강을 가로질러 바다로 향하는 동안,/ 뿌리 속부터 차오른 설움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짐짓 강물이 흘러 간 방향으로/ 백팔 배를 배접한다// 바다의 심장을 불러와/ 캄캄하지만 캄캄하지 않은 새벽,/ 팔만 사천의 탑돌이를 채워야/ 물길이 트이는 그곳에서/ 너에게로 향한 물고기의 수화手話를 들을 수 있다// 물풀이 고개를 든다/ 상처 입은 물고기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풍경 속에 매달린 물고기가 꼬리를 흔든다/ 수선화 한 송이 피어난다/ 해, 탈이다//

상처의 무늬 / 김남권
상처는 영혼의 문장이다/ 우주를 통틀어/ 나를 식별할 수 있는 도 다른/ 그림자를 만드는 일이다/ 새로 돋은 몸에 상처를 내고/ 우주는 긴장한다/ 상처 안에 우주를 새겨 넣고/ 별을 품는 동안/ 바람조차 아프게 흐른다는 것을/ 그렇게 이별처럼 흘러/ 나무에게 묶이고/ 강물 속에 빠지고/ 철조망에 찔려 피 흘린 채로/ 스스로의 무늬를 매만지는/ 상처가, 바로 사랑이다/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한/ 마지막 피울음이/ 나를 바치는 진정한 사랑이다//

양평가는 기차는 강물을 따라가며 운다 / 김남권
양평가는 기차는/ 강물을 따라가며 운다/ 낯설음도 마주침도 없는 침목을 따라/ 따뜻한 쇠바퀴가/ 쉼 없는 울력을 하고/ 한 세기를 지나는 동안/ 바람의 기적소리를 저장해 온 강물이/ 설레임을 채우고 가는 연인들의/ 호흡 속으로 빨려든다/ 난생 처음,/ 너와 나누었던 눈감은 입술의 그것처럼/ 레일은 황홀하다/ 단 한 번의 외면도 하지 않은 채/ 마주 보는 그대로/ 철길은 강물을 따라 흐른다/ 그렇게 침목이 여울지는 동안/ 강물도 너의 심장소리로 설레인다/ 기차를 다라가던 물고기가/ 침목속에 박힌다/ 시간이 정지된 레일 위로/ 늙은 갈대의 지문이 떠오르고/ 첫 서리가 강물을 마시느라 분주한 갈대숲에서/ 물고기 한 마리/ 오래된 기차 하나를 끌고 간다//

묵호역은 물고기역이다 / 김남권
그곳이 묵호역이었는지 물고기역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새벽녘 묵호역에 내려놓은 사람들이/ 항구를 쳐다보며 은빛 비늘을 털고 있었다/ 바다를 거슬러 오르느라 지친 물고기들도/ 가금씩 울리는 기적 소리에/ 게으른 눈을 떴다 감았다/ 초점을 잃은 채 어부를 응시한다/ 열차가 묵호역에 머무는 동안 싣고 가는 것도/ 물고기뿐이다/ 역장의 기침소리를 먼저 알아듣고 스르르/ 잠에 빠져 드는 물고기/ 물고기의 기침소리를 짐작하는 묵호역장도/ 어부의 아들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물고기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물고기의 기도로 바다는 붉어진다/ 정동진에서 달려 온 불빛이/ 어달리 산자락을 깨우는 아침이면/ 등대는 강릉행 열차의 꽁무니에 매달린다/ 멀리서 온 불빛일수록 아침은 찬란하다/ 멀리서 온 그리움일수록 가슴은 더 따뜻하다/ 바다의 불빛이 사람의 무늬가 되고/ 사람의 그리움이 물고기가 되는 곳/ 그곳이 묵호역이었는지 물고기역이었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광부 / 김남권
광부는 사라졌다/ 광부의 페를 먹은 엑스레이 사진만/ 갈비뼈 앙상하게 원귀로 걸려 있다/ 폐를 갉아 먹은 탄가루가/ 결국 광부를 통째로 먹어치운 것이다// 막장에서 막장으로 향했던/ 광부의 마지막 소원은/ 햇빛 한 번 실컷 마셔보는 것이다// 몸에서 까만 물이 흐르고,/ 개울에서 까만 물이 흐르고/ 정액마저 까매진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까만 연탄불 피워 노릇노릇해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목구멍에 남아 있는/ 탄가루를 밀어 내고/ 하얀 젖을 밤새 물려주던 색시에게/ 몇 억분의 분신을 발사하는 일이었다// 광부의 어머니도 광부였다/ 자식 캐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어머니// 가난과 배신으로 콩팥가지 가매진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는 판잣집 구석에서/ 가슴이 홧홧하도록 십구공탄을 피워 놓은 채/ 등신불이 되었다// 삼척탄좌 목욕탕에 걸려 있는 광부의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하얗게 타고 이는 어머니를 보고야 말았다//

문막약국 앞 송광선 내과 / 김남권
문막파출소 앞 송광선 내과를 나서는/ 할머니 세 분, 저승길 연장증명서를 들고/ 건너편 문막약국 문을 밀고 들어선다/ 코발트색 짧은 치마를 입은 서른 중반의 여자가/ 마대로 바닥 청소를 하다가 고개를 쳐들고/ 반가운 척 손을 잡는다/ 할머니가 들어서자마자 따끈한 쌍화탕 한 병씩 건네는/ 약사의 구멍 숭숭 뚫린 머릿결이 을씨년스럽다/ 문막약국 앞 금강사우나에서 방금 나온/ 마흔 중반의 여자는 세은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젖은 머리를 드라이하고 화장을 마친 여자가/ 불법 주차해 놓은 아이보리색 세단을 향해 주파수를/ 발사하고 부론방면으로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송광선 내과에서 또 한 분의 할머니가 나온다/ 할아버지는 안 보인다/ 할머니들은 송광선 내과를 다녀와야 하루가 시작된다/ 밥맛도 생기고 자식들 볼 면목도 생긴다/ 건너편 농협 주유소에서 무심하게/ 기름만 넣고 가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할머니가 아침마다 송광선 내과에서 기름을 넣고 나오는 것을/ 문막의 크리스마스는 8월에도 온다는 것을,//

사천항 / 김남권
사천항 등대에 불빛이 켜지면/ 바다는 눕는다/ 캄캄할수록 잘 보이는 별빛의 지표를/ 비추는 동안 멀리서 온 파도는 옷을 벗는다/ 처얼썩 처얼썩 숨죽여 물고기의 침묵을/ 깨뜨리고 풍만한 어깨를 드러내어 웃는다// 고독한 불빛들이 모여서 등대가 되고/ 고독한 그림자가 모여서 항구가 된다/ 사천항은 언제나 어부들의 심장 소리로 분주하다//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를 기다려 온 바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 파도의 무늬를 그려 놓고/ 뒤척이는 순긋*에서 사천까지/ 해송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던가/ 강물이 바다와 섞이고도 민물인 채로/ 등대의 불빛을 삼키는 것은/ 집어등의 축제를 위한 마지막 전야제인 것을// 사천항에서 배 한 채 지어 놓고/ 온종일 바다의 눈물을 바라다보는 동안/ 게으른 등대는 사내의 등 뒤에서 졸고 있고/ 아버지의 하늘은 열린다// 하늘과 한 몸인 채로 어머니의/ 하얀 등대가 푸르게 젖고 있다//
* 순긋: 사천항에서 경포대 사이에 있는 작은 해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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