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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필영 시인

부흐고비 2022. 1. 30. 08:21

김필영 시인, 평론가
1954년 전남 영광군 출생. 필명 소화모(笑花慕). 월간 《시문학》에서 시, 평론 등단, 《스토리문학》 수필 등단. 제8회 푸른시학상, 제3회 스토리문학상 수상. 빈여백 동인. 시사문단 작가협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위원.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계간 시산맥 고문. 한국 시문학문인회 회장. 시집으로 『나를 다리다』, 『응(應)』, 『 詩로 맛보는 한식 』, 『우리음식으로 빚은 詩(시로 맛보는 한식 개정판)』 와 감상평론집 『그대 가슴에 흐르는 시』, 동시집 동시집 『두근두근 콩콩』, 일반서 『주부편리수첩』 등이 있다.

 



응 / 김필영
정겨운 대답, 위쪽과 아래쪽이 원이다/ 두 개의 동그라미 속에/ 마음 하나씩 들어있다/ 둘로 나뉜다 해도/ 절대로 각이 질 수 없는/ 이응과 이응/ 한가운데 거울 하나 들여놓고/ 마음과 마음을 마주한다/ 긍정의 應도 마음心부에서 찾아야 하듯/ 스스럼없이 마음 한가운데에서/ 샘물처럼 솟는 응!/ 응 속의 동그라미들이 굴렁쇠처럼/ 경쾌히 굴러간다/ 옹알이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눈빛과/ 막 뗀 아기의 입술과 맞닿는 교차점 응!/ 둥근 소리의 꽃, 응!/ Oh Yes! 맨 처음 민얼굴의 내가 보인다/ 슬며시 손을 잡는 그대 웃음이 바싹 다가온다.//

못 / 김필영
누구나/ 가슴속에 못 하나 박고 산다/ 뽑힌 것 같은 착각으로 산다/ 화살이 되어 날아와 박힌 못은/ 폐부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아/ 빼내려 할수록 깊이 파고든다/ 내게 박힌 못자리가/ 미어지도록 아파올 때마다/ 달려갈 수 없어 몸부림치다가/ 그대가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내가 그대 가슴의 못이었음을 알았다/ 아려오는 못을 내버려둔다/ 그 못을 뽑을 수 없는 건/ 못 잊을 당신/ 못 잊을 이야기가/ 포승줄처럼 걸려 있기 때문이다//

틈 / 김필영
생명이 움트는 문이다/ 위란강(圍卵腔)에 이르러 수정될 때 비로소/ 한 생명이 수태되는 곳,// 허공에도 틈이 있다/ 봄비가 내리는 것은 아기구름이 사립문틈사이로 마실 나오는 것이다/ 아장거리는 발자국소리에 미소 짓는 하늘이/ 틈을 내어주는 것,// 새싹의 겨드랑이 틈까지 부드럽게 젖을 때/ 초목들의 겨울은/ 틈과 틈 사이에서 기지개를 켠다// 공중의 틈을 헤집고 꽃망울 틈으로 봄이 왔음을 단 한번 알려서/ 어찌 꽃들이 피어날 수 있으랴// 틈에도 빗장이 있다면/ 당신이 내게 오는 틈의 빗장은 빼내버리고 싶다// 유리잔에 담긴 미나리 한 묶음, 잘린 발목 틈에서/ 여린 싹들이 목을 내밀고 올려다본다// 작고 여린 틈이 나를 먹여 살린다/ 꿈틀거리는 곳마다 생명의 문이 다소곳이 열린다//

느낌표에 대한 기억 / 김필영
방망이로 한 대 맞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찰나의 느낌은/ 봄바람에 꽃봉오리가 열리기 직전/ 새가 짝을 발견하고 비상하기 직전/ 서로의 눈빛에 별이 반짝이기 직전/ 일시에 번뜩이는 감정, 정지되는 순간이다/ 정수리를 맞은 공이 야구장 담을 넘는 순간/ 눈동자에 방망이가 거꾸로 찍힌다/ 유리창을 깨곤 했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방망이를 들고 교실로 들어오셨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던 우리는 오들오들 떨었고/ 우리 조막손에 방망이를 들려주신 선생님/ 당신이 우리를 잘못 가르친 탓이라며,/ 우리가 때리지 않으면 방망이로 맞는다는 말씀/ 방망이로 맞지 않으려고 철없던 우리는/ 선생님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방망이로 때렸다!/ 느낌표만 보면 떠오르는 얼굴들/ 눈 감으면 그날처럼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삭는다는 것 / 김필영
잘 삭은 술은 사랑 받는다/ 포도가 잘 삭아야 좋은 술이된다/ 견디기 힘든 고난도 따뜻이 위로하면/ 아픔이 삭는다/ 삭은 눈물이 강이 될 때/ 물 흐르듯 슬픔이 씻겨 일어설 수 있다/ 항아리에서 잘 삭은 김치는 밥도둑이다/ 잘 삭은 홍어를 가운데 두고/ 응어리진 마음도 잘 삭히면/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삭는다는 것/ 상처받은 사람만이 삭을 줄 안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잘 삭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있다/ 쓴잔을 앞에 두고/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흙에게 드리는 독백 / 김필영
일상에 찌들어 힘이 들 때/ 당신을 만지면, 당신 가슴에 누우면/ 고단한 마음 편안해집니다/ 당신 살 속에 비접 같은 씨를 묻어/ 딸처럼 예쁜 꽃들을 키우고/ 아들 같은 곡식들을 길러내지만/ 심술쟁이 독초에게도 젖을 물리고/ 말썽꾸러기 잡초에게도 방을 내어줍니다/ 하루 한 시도 쉼 없이 일하며/ 여름날 햇살을 거두어 두었다가/ 추운 겨울이면 군불을 지펴줍니다/ 봄이 오는 길목 가랑비 내리면/ 여린 새싹들 걱정에 선 채 비를 맞고/ 폭풍우에 초목들 쓰러지면/ 눈물을 삼켜 몸속 깊이 흘려보냅니다/ 몸엔 치장 한 번 안하시는 당신/ 어여쁜 딸들 시집보낼 때 쓰려고/ 온갖 보석들을 몸 깊이 묻어두시고/ 가뭄에 목마를 때 물 한 모금까지도/ 허리춤에 고이 아껴두시고/ 용암이 끓는 속을 홀로 삭히느라/ 암덩이 같은 돌멩이들 밖으로 솟구치면/ 아무도 몰래 부드러운 살로 덮으시는 당신// 철따라 길러주신 양식을 먹고/ 등을 밟고 살면서 고마움을 몰라줘도/ 불평 한마디 없으신 당신/ 당신 속살로 빚어진 내 원소는 당신과 같기에/ 탕자처럼 세상을 헤매다가/ 결국, 당신 품으로 돌아가 잠이 듭니다//

우리라는 말 / 김필영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우리라고 하지 않는다/ 우~하고 발음해보라/ 입 맞추듯 입술을 내밀어야만 우~소리가 나온다/ 리~/ 눈가에 주름이 잡힐 듯 눈을 가물거리며/ 반짝, 치아가 미소 지을 때/ 리라고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 We~/ 역시 미소를 머금은 발음이 훨씬 경쾌하다/ 울타리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도/ 울타리 안에서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람에게/ 우리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우리 밖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 밖에 있는 뉘라서 우리를 사랑하겠는가/ 우리가 마음의 우리를 열어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 어찌 행복의 우리 안에 살 수 있겠는가//

속눈썹 / 김필영
눈물이 잠든 창가에 드리운 견사커튼/ 날실 한 올 한 올 사이사이 웃음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날선 빛의 각이 가리키는 방향,/ 빛나는 쪽에서/ 어떤 각으로 나를 가리키는가/ 순한 빛이/ 그 숲을 통과하며 산란 된다/ 휘청거리는 빛을 붙들어주고/ 목발을 짚은 빛을 부축해 들인다/ 울지 못하나 함께 젖는다/ 어둠이 세상을 잠재울 때/ 닫힌 대문 앞에서 잠들지 않는다/ 폭풍우가 닥쳐도 죽음 앞에서도/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눈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속눈썹이 가물거리기 때문이다/ 속눈썹을 통과하여 기억 속으로 스러진/ 그대의 눈빛이 그립다/ 속눈썹을 빠져나가지 못한 눈빛은/ 어떠한 사랑도 이룰 수 없다.//

소리의 귀 / 김필영
마하(mach)라는/ 말이 있기 전 소리가 있었다/ 빛의 속도로 오는 소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눈동자에 소리의 귀가 있어/ 동공은/ 모든 소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빛의 속도로 달려와 소리의 고막을 울리는 마하,// 거미줄에 바람이 잘려나가는 소리, 아지랑이 타오르는 소리, 소리를 지우고 가는 안개소리, 모래톱을 향해 달려오는 파도의 발굽소리, 수평선 위에 몸을 태우는 아침 햇살의 웃음소리// 무수한 소리 소리 소리// 가장 듣고 싶은 소리/ 빛의 소리보다 빠르게 달려와 마음을 뚫고 달아나는 그대/ 소리의 소리를 속에 담은/ 내 마음의 귀!//

즐거운 비 / 김필영
눈물은 아기의 첫 울음소리에서 시작된다/ 새 생명의 잉태는 하늘의 기쁨이라서/ 눈물 속엔 큰 웃음도 눈물이 된다/ 비가 내리는 것은/ 공중의 부유하는 슬픔의 원소들을 묽히는 일/ 슬픔의 핵들이 제 몸 속으로 하나 둘 분해될 때/ 비는 즐겁다/ 지구북을 드럼 치듯 두드리고파 몸살이 난다/ 계절이 연주회 무대를 펼치면/ 바람은 콘탁을 들고 구름을 모은다/ 산 강 대지 바다의 악보 위에/ 초목과 계곡, 섬들로 적힌 음표들/ 번개가 천둥을 때려 연주의 시작을 알리면/ 비로소 구름은 빗소리를 울리기 시작한다/ 여린 꽃잎을 초목을 강물을 바다를/ 피아노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 포르테시모까지/ 바다는 모든 슬픔을 두드려 부수고 모인/ 즐거운 비의 눈물덩어리/ 당신에게 기댄 한쪽 어깨가 눈물에 젖는다/ 하늘의 드럼 두드리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수박 / 김필영
초록 줄기 끝 노란 꽃 피어날 때/ 벌들이 보면 수줍어 할까봐/ 잎사귀 넓은 손으로 감추어주었지요// 여름햇살에 땅이 갈라질 때/ 땅속 맑은 물 길러 올리도록/ 뿌리 끝에 누가 두레박을 달아놨을까요?// 몸속 하얀 씨 까맣게 여물어갈 때/ 간지러워 웃다보니/ 점점 뚱뚱해졌지요// 몇 번이나 장대비가 쏟아질 때/ 빗물 하나 들어오지 않는/ 초록줄무늬옷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이좋게 한 조각씩 나누어 먹으라고/ 99%의 달콤한 물이 허물어지지 않고/ 서로 끌어안고 빨갛게 웃고 있네요// 한 사람도 체하지 않고 천천히 먹으라고/ 몸속에 까만 씨/ 누가 심어놨을까요?//

함평나비메주ㆍ된장 / 김필영
한반도 흙을 먹고 자란 콩잎사이/ 나비떼 나라와 콩꽃 피었네/ 콩밭이랑 어머니 어깨 위에/ 한가로이 나래치던 나비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 땀으로 빚은 손맛 그리워/ 메주내음 따라 다시 날아와/ 흙빛 된장 속으로 숨어들었네.//

콩 반쪽을 나눈다는 것은 / 김필영
콩 반쪽과 반쪽 사이엔/ 작은 움집 한 채 들어 있다./ 새싹을 틔워 올리기 전엔/ 나뉠 수 없다고/ 뜨거운 손 하나로 모은/ 연둣빛 마음 하나 살고 있다./ 콩 반쪽을 나눈다는 것은,/ 여린 그 마음을 나누는 것./ 반쪽으로 나뉘어져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두 손 마주잡고파/ 그저 주고만 싶은/ 무한한 마음을 나누는 것,/ 언젠가는 떡잎으로 피어날/ 초록 꿈을 나누는 것.//

 

누가 꽁치를 표절 했나 / 김필영
갓 구운 꽁치 한 마리/ 고도의 설계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등선에서 배지느러미 쪽으로 말아 감아/ 줄 당기기 하듯 당겨진 곡선의 내각들/ 바다 속 수압을 견디며 잠수하는 데 용이할 것이다/ 물살을 갈랐을 야무진 뺨 위로/ 심해 속을 꿰뚫어 보던 눈을 부릅뜨고 있다/ 뾰족한 머리에서 미끄러진 매끈한 몸통 끝까지/ 마찰계수를 줄여주던 피부에 윤기가 흐른다/ 등과 배의 경계, 암청색 하늘과 맞닿은 은빛 수평선/ 젓가락으로 허공과 바다를 가른다/ 몸을 곧추 세워 고속추진을 도왔을 중심 뼈/ 꼬리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교하다/ 척추 좌우에 직각으로 뻗은 가로 뼈들/ 거북선 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져 있다/ 저 뼈가 있어 뒤집히지 않고 먹이를 벌었으리라/ 부채살처럼 세운 꼬리지느러미/ 능숙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게 가운데가 잘록하다/ 이 꼬리를 너무 휘두르다 그물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꽁치를 보면 아무래도/ 잠수함 설계자가 모델로 삼았을 공산이 높다.//

 

영광굴비 / 김필영
연평바다를 향해 추자도를 거슬러/ 칠산바다 물살을 힘차게 가르던/ 야무진 뺨, 검은 눈동자를 보면/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알밴 밀감빛 아랫배에서 밝아와/ 잔물결 출렁이는 은빛바다/ 아득히 연자줏빛 하늘과 맞닿아/ 몸통을 가르는 수평선에 머물고/ 천년 빛이 스민 염산의 갯벌소금에 여며/ 법성포구 하늬바람에 씻은/ 굴빗살 한 점,/ 가시 발라 숟가락위에 올려주던/ 어머니가 울컥, 그리워진다/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아/ 처진 어깨로 끼니를 때우려할 때/ 밥상에 올라온 굴비를 보면/ 등줄기에 불끈, 힘이 솟는다//

쌀밥 / 김필영
쌀로 지었다고 다 쌀밥이 아니지/ 비결은, 쌀에게 자연의 기억을 회복시켜야 해/ 마른 쌀을 찬물에 한 시간쯤 담가/ 허수아비 춤추던 들판을 불러들여 봐/ 쌀눈이 빠지지 않도록 살살 씻어/ 솥에 붓고 손등까지 물을 채우면/ 발목이 물에 잠긴 벼처럼 일어날 거야/ 센 불에서 팔팔 끓여야만/ 달아오른 솥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땡볕에 땀 흘리듯 익어갈 테니/ 불끄기 전, 약한 불로 뜸 들여 주면/ 황금들녘의 벼처럼 순하게 돼/ 솥뚜껑 열어 김 올라오면 잠시 눈을 감아봐/ 밥을 풀 땐, 주걱으로 공기를 섞어 담아야/ 밥알 사이사이 갈바람이 담길 거야/ 쌀 중심에서 나온 땀의 쓴맛도/ 고향이야기 모락이는 입안에서는 고소한/ 자르르 윤기 흐르는 쌀밥//

간장게장 ㅡ꽃게 심문기審問記 / 김필영
밥도둑이라는 그대가 어떻게 여기 왔는고/ 서해의 물살을 딛고 옆걸음 치다가/ 어부의 그물에 붙잡혀 왔나이다.// 여덟 개의 발은 밥을 훔치는 도구인가/ 바다의 진미를 저장하는 막대이옵니다.// 들고 있는 두 집게는 흉기가 아닌가/ 천적을 만났을 때 정당방위 할 손이옵니다.// 손가락을 문 적 있다는데 변명을 하는가/ 겁을 주려다가 실수를 한 것이옵니다.// 등에 진 밥통은 밥을 담을 그릇 아니던가/ 거센 물살에서 새끼를 기르는 알집이옵니다.// 그래도 밥을 훔친 것은 맞지 않는가/ 입맛을 당기게 했을 뿐/ 훔치지도 먹지도 않았사옵니다.// 무엇이 입맛을 당기게 했는고/ 마늘 생강 양파 사과를 끓인 간장이/ 뱃속으로 스며들 때 흘린/ 제 쓰라린 눈물 맛인 듯하옵니다// 이제부터 그대를 밥도독(都督)*이라 칭하노라//
* 도독(都督); 신라시대 지방9주의 장관

빈대떡 / 김필영
안개가 낮은 풍경을 지우며/ 비라도 내릴 것 같은 날/ 아내가 보름달을 굽는다/ 녹두반죽을 한 국자 떠서 펼치자/ 팬에 찰싹 달라붙는 달 한 덩이/ 달군 불판에 달을 뉘어/ 쑥갓 잎으로 계수나무를 심고/ 홍고추를 썰어 화석을 새긴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면/ 분화구마다 고소한 맛이 깃들고/ 아내 마음은 동구 밖으로 나가/ 동동주 한 병을 들고 돌아올/ 남편을 마중 나간다/ 달의 뒤편까지 노릇노릇 구워 질 때/ 아내 기다림도 보름달처럼 달아오른다//

막걸리 / 김필영
고슬고슬 찐 찰밥을/ 배꽃 필 때 빚은 누룩에 버무려/ 명경수에 담가 이레 밤을 새우고야/ 박속같은 얼굴로 웃는구나/ 보름밤 창호지 같은 맨살을/ 조롱박으로 떠서/ 진달래 꽃잎 띄워 벗과 마주한다/ 쓴맛인 듯 단맛 같고/ 신맛인 듯 떫은 입술에/ 입술이 녹는다/ 짜르르, 짜르르르/ 고단한 하루가 따라 들어와/ 흐린 가슴에 불을 밝힌다/ 발끝까지 피가 돈다//

홍어삼합 / 김필영
사춘기 지날 무렵 장터에서/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는데요// “너도 한길 다 컷응게 탁배기 한잔 혀라/ 그라고 삼합, 한 점 혀야 어른이 된다잉”// 어른이 된다는 말씀 싫지 않았는지/ 막걸리 한 사발 벌컥 들이켜고/ 외삼촌이 입에 넣어준 삼합/ 엉겁결에 받아먹었는데요/ 콧속으로 치미는 독한 냄새에/ 안절부절 허둥대던 기억, 어제 같은데요/ 내 나이 외삼촌만큼 되어/ 남도식당 노적봉에 가면/ 묵은지에 삶은 돼지고기 새우젓에 적셔/ 삭힌 홍어 위에 올리면/ 삼합을 먹기도 전에 코가 뻥 뚫리고/ 왜 눈물이 먼저 나는 걸까요?//

미역국 / 김필영
눈물범벅 된 몸으로/ 당신 핏줄로 기른 생명 쏟아내고/ 물 한 모금 넘기기 힘겨울 때/ 나를 위해/ 벗어 놓으셨던 신발/ 다시 신으시려/ 바다 같은 마음으로 드신/ 첫 국밥// 미역국을 먹는 것은/ 어머니 젖을 먹는 것/ 영구 기억장치에 내장된/ 초록 바다 보다 푸른 어머니/ 그 눈물을 먹는 것/ 내 어머니의 마음을 먹는 것//

김치찌개 / 김필영
아름다운 만남은 오래 참아주듯/ 숙성김치와 얼리지 않은 제육/ 강한 두 맛이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도마에서 김치를 자르기 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렸을 때/ 한 입에 쏙,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게 섞인 제육은 모나게 썰어야/ 입안에 요리조리 뒹구는 맛이 즐겁다/ 팔팔 끓이기 전 제육을/ 익을 만큼 볶다가 김치를 넣으면/ 김치는 기름옷을 입고 제육엔 간이 들어/ 끓는 물에서도 제 맛을 간직하고 있다/ 식탁에 오르기 직전 두부를 넣고/ 고춧가루 한 숟가락 흩뿌려 주어야만/ 매콤한 고추향이 입안에 오작교를 놓는다.//

청국장 / 김필영
더운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끈적이는 실금이 나올 때쯤/ 코를 막아야 할 만큼/ 온 동네를 진동시키는 냄새는/ 나눠먹고 싶은 이 땅의 인심이다/ 반드시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야만/ 구수한 맛이 깊어지니/ 제육 몇 점 곁들여 넣고/ 잘 익은 김치를 넣어 간을 맞춘다/ 밭에서 난 고기 한 입만 삼키면/ 냄새도 향이 되어/ 혀끝에서 뱃속까지 편안해져 와/ 반찬 없이도 밥 한 그릇은 뚝딱/ 고향집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멸치볶음 / 김필영
추어, 행어, 멸어라 이름 붙은/ 그 작은 녀석들을 들여다보면/ 고기 어자魚字를 붙여 부름직하다/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이/ 몸통 중심을 가르고/ 알을 낳는 내장을 가슴에 안고/ 무리지어 종족을 이끄는 두개골과/ 은빛 비늘에 맛과 향을 지녔으니/ 가히 손색없는 물고기렸다/ 마늘 풋고추를 간장에 초벌 볶고/ 물엿 참기름에 한 번 더 볶아/ 그 위에 참깨 송송 뿌려주니/ 맛도 영양도 뼈대 있는 가문답구나/ 내 오늘 너의 진가를 인정하여/ 우리집 밑반찬의 선봉장으로 봉하노라//

장조림 / 김필영
막내를 극진히 사랑하신 아버지/ 식사 때면 막내와 겸상하셨다/ 막내와의 이른 별리를 예감하셨을까/ 당신의 지식과 지혜를/ 식탁에서부터 알려주셨다/ 아버지 밥상 단골 밑반찬은/ 누나와 형의 밥상엔 없는 장조림/ 나는 아버지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까지/ 천천히 밥을 먹곤 하였는데/ 행여 아버지께서 장조림을 남길 때면/ 간간한 고기는 밥에 올려 먹고/ 조림장으로 밥을 비벼먹었다/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던 아버지/ 날 위해 일부러 장조림을 남기셨음을/ 어리석게도/ 아버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불고기 / 김필영
불고기 속엔 불이 없다/ 불로 뜨겁게 정을 익히는 요리다/ 혼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으니/ 정들고픈 이와 마주 앉아야 한다/ 불고기를 맛나게 먹는 비결은/ 잠을 잘 재우고 깨우는 것/ 소고기를 얇게 썰어 배를 갈아 넣고/ 대파는 어슷썰어 양념에 저며/ 간이 스며들 때까지 잠을 재운다/ 잠을 깨울 때는/ 재운 고기가 놀라지 않도록/ 약한 불에 육수를 적셔가며 깨워야/ 엉키지 않고 배시시 일어난다/ 달아오른 불판에/ 정겨운 눈빛을 함께 익히면/ 서로의 정도 맛깔스럽게 달아오른다//

보쌈김치 / 김필영
가으내 바라만 보다/ 초록치마 펼쳐서/ 밤, 은행, 대추, 굴을 보쌈했네/ 어둠에서 서로 안고 맛이 들어/ 꼭꼭 여민 치마폭을 펼치네/ 보쌈김치는/ 삶은 돼지고기를 곁들여야/ 침샘이 솟아나니/ 오른손으로 먹기 전/ 왼손에 든 술 먼저 마시고/ 눈을 감고 음미해야 하네/ 얼얼하게 입안을 달구고/ 꿀꺽, 목을 넘어갈 때/ 자지러지는 맛/ 허벅다리에 힘이 솟네//

북엇국 / 김필영
정 받으라 따르는 잔/ 정 주고파 주고 받다보면/ 속 좋은 장사 없네/ 쓰린 속엔 백약보다/ 황태만한 약손도 없다네/ 내장을 비워내고 덕장을 떠나/ 태백의 준령을 넘어/ 뼈를 발라낸 누런 황태살/ 끓는 솥에 제 몸 풀어헤치면/ 동해의 칼바람을 기억해내고/ 국물에 새벽노을이 물들어오네/ 북엇국은/ 정성으로 끓여야 맛이 드는 국/ 그 정성 한 그릇 마시고 나면/ 아무리 쓰라린 속도 봄눈 녹듯 풀린다네//

소금 / 김필영
황금보다 소중하다는 자루를 열자/ 당신의 눈빛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염전에 가두어 며칠을 땡볕에 심문해도/ 제 몸 자취 없이 산화한 후에야/ 감춰두었던 자식을 내어놓는다/ 사금파리처럼 각진 결정체를 들추니/ 파도소리가 바다의 울음인 줄 알겠다/ 조개가 옹이진 살 속에 진주로 울 듯/ 모래 같은 소금을 키워내며/ 떨어지려하지 않는 아이를 해안선에 부려놓고/ 수평선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다는 그렇게 울었던 게로구나/ 살 속에 모난 자식을 키워내며/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낸 당신의 사리// 어린 내 얼굴에 떨군 어머니의 눈물//

한과 / 김필영
한과는,// 우리의 생이 웃음소리 없이/ 쌀가루처럼 바수어 지더라도/ 토실토실 뭉쳐 살라하고// 정직한 땀으로 기른 곡식으로/ 모두가 모인 잔치마다/ 거짓 없는 정 서로 나누라하고// 미운마음이 일어서려 할 때/ 낮은 소리로 아삭아삭 얘기하며/ 물엿 스미듯 가까이 다가가/ 서로 기대고 안아주라 한다//

냉면 / 김필영
함흥이면 어떻고, 평양이면 어떠랴/ 비빔냉면도 좋고 물냉면도 좋다/ 흰 눈 내릴 때 여름을 부르고/ 땡볕 쏟아질 때 겨울을 불러보자/ 살얼음 낀 육수에 소름을 얹어/ 눈물 같은 식초 몇 방울 뿌리고/ 수육위에 올린 삶은 계란 반쪽처럼/ 서로의 고명이 되고/ 우리 가슴 속에도 둥근달 떠오르겠지/ 뜨거운 육수 한 모금 마시고/ 서로의 눈빛 찡,하고 빛날 때/ 후루룩, 속 시원히 들이켜 보자/ 그대와 나 쫄깃한 면발처럼 만났으니/ 우리 사리처럼 얽혀/ 매콤한 겨자로 쌓인 상처를 씻어보자//

잔치국수 / 김필영
살아가는 것이/ 밥그릇싸움으로 느껴질 때/ 밥그릇 마주하는 게 서먹해지면/ 잔치국수 말아주는/ 처마 낮은 집을 찾아간다/ 여기 저기 면발 들이켜느라/ 후르륵, 후르르륵/ 슬픔을 삼키는 소리 같아/ 젓가락을 놓고 돌아보면/ 남은 육수까지 다 비우고/ 트림소리 후련한 얼굴들,/ 삼백예순날엔 잔칫날보다/ 마음 다치는 날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들 틈/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

비빔밥 / 김필영
첫사랑이 눈빛으로 시작되듯/ 눈으로 먼저 맛을 본다/ 콩나물, 시금치, 호박, 당근/ 나물들이 지닌 빛깔을 들여다보면/ 자연의 이야기들이 오롯이/ 입안에 먼저 씹힌다/ 비빈다는 것은/ 서로의 체온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 밥과 나물이 맛과 향이 어우러진다/ 매콤한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고/ 고소한 참기름으로 향을 보탠다/ 비빈 밥을 한입 삼키며/ 고소해진 마음에 마음을 비빈다.//

고추장 / 김필영
태양은 지구에 심고 싶은/ 가장 고운 빛 하나를 고추에 심었다/ 햇살알갱이들이 녹아 있는 고추는/ 가루로 빻아도 붉다/ 찹쌀풀을 쑤어 고춧가루를 붓고/ 둥근 그릇에 빙빙 돌려 저으면/ 붉은 징 같은 울음이 맴돈다/ 맘씨 고운 사람들은/ 햇살담은 기운을 먹고 싶어/ 고추장을 담근다/ 암울한 세상에 상처 받아도/ 고추처럼 맵게 일어서려고/ 고추장에 석석 비벼 먹는다/ 매운 고추를 붉은 울음에 찍어 먹으며/ 불끈, 주먹을 쥔다.//

보리밥 / 김필영
사월의 창을 열면/ 솔잎보다 푸르러진 청보리밭/ 초록파도가 출렁인다/ 보릿고개를 넘어야했던 소풍날/ 보리밥 도시락 선생님께 드리지 못하고/ 청보리밭 사이로 돌아오던 길/ 봄은 눈치도 없이 싱그러워서/ 보리밭에 숨어 울었다/ 사월이 오면/ 마음은 보리밭으로 달려가고/ 보리밥 고추장에 비벼 먹여주던 얼굴들/ 명치 끝 뻐근히 밀고 올라와/ 가슴 속 청보리밭 길을 걷는다//

열무김치 / 김필영
십자화과 무속의 열무 한 접시/ 도란도란 나눠먹는 사람들 가슴마다/ 노랑나비가 날아든다/ 열무는 열이 많아 포개지면 누렇게 뜬다/ 박토에서 살아온 열무는 줄기도 질겨/ 부러뜨려 봤을 때 톡, 부러져야만/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귀에 즐겁다/ 풋내가 나는 것은/ 상처에서 흘린 피눈물 맛 때문이니/ 여린 몸에 칼을 대지 말 일이다/ 다진 마늘, 갖은 양념에 홍고추가 제격인데/ 찬밥 한 덩이를 갈아 넣어야 제 맛이 나온다/ 아기 다루듯 살살 정성도 함께 버무려/ 열무에 고추 향이 깃들어 발효될 때까지/ 고향 꿈을 꾸고 돌아온 열무라야/ 식탁에도 웃음꽃 피어난다//

상추쌈 / 김필영
싸움을 싫어하는 착한 아내도/ 상추쌈은 즐긴다네// 시누이에게 눈 흘기고 싶을 땐/ 상추쌈 입에 넣고 노려본다네// 찬밥 한 덩이만 있으면/ 널따란 상추는 한 잎,/ 여린 상추는 두 닢을 포개어/ 풋고추를 쌈장 듬뿍 찍어/ 한 입 가득 기쁨을 먹는다네// 상추쌈을 마주하는 날이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벗들과/ 상추쌈 하고 싶어/ 눈물 나게 그 얼굴들이 보고 싶다네//

돼지갈비 / 김필영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려준 날 이후/ 사소한 일로 냉랭해질 때면/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아내가 사인을 보낸다/ 화해를 핑계로 돼지갈비를 먹고 싶은 것,/ 못이기는 체 나서는 내 발걸음이/ 나도 몰래 경쾌해진다/ 가을 타는 나뭇잎처럼/ 숯불에 갈빗살이 지글거리면 아내는/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방긋 웃는다/ 아내 식욕을 집게가 따라잡지 못해도/ 돼지갈비에 술 한 잔 나눈 날 밤/ 내 갈비뼈 곁에서 쿨쿨 잠이 든 아내는/ 꿈속에서도 돼지갈비를 먹는지/ 입맛까지 다셔가며 꿀잠을 잔다.//

삼계탕 / 김필영
음식은 예부터/ 어른께 먼저 올리는 것인데요/ 삼계탕을 끓이시던 어머니/ 매형 앞에 먼저 놓아주신 뜻/ 사위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요/ 당신 몫 통통한 다리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시던 장모님/ 영계 뱃속을 정성으로 채우시며/ 찰밥처럼 끈끈하고, 밤처럼 포근하게/ 대추처럼 달콤하고, 인삼향처럼 그윽하게/ 뚝배기의 뜨거운 국물 마시듯 땀 흘리며/ 서로 열렬히 사랑하라는 뜻/ 삼계탕 먹을 때마다 생각납니다//

수제비 / 김필영
바지락이 품어온/ 바다의 눈물로 간을 맞춘/ 김 모락이는 둠벙을 퍼 올리면/ 청고추의 칼칼함과/ 홍고추의 얼큰함이/ 입천장에 불을 지르네/ 뚝심 좋은 신랑이/ 꾹꾹 눌러 주무른 반죽/ 애교 많은 각시가 여몄으니/ 쫄깃한 찰떡살 일세/ 둥둥 떠오르는 옛 생각에/ 울컥, 목이 메면/ 뜨거워도 시원하다 우겨 말해도/ 그 말이 거짓 아닌 걸/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네//

육회 / 김필영
수온이 올라갈 무렵,/ 바다생선 앞에서 망설여질 때/ 믿을 수 있는 횟감은 단연 육회/ 순한 황소궁둥이 속/ 빛깔도 수줍은/ 혈관 비켜 간 홍두깨살/ 숫돌에 막 갈은 칼날의 예리함으로/ 빗살로 썬 선홍살/ 가을 과수원에서 금방 딴/ 과즙 물씬 나는 배를 채로 썰어/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생살에 볶은 깨를 뿌려 올리면/ 이 맛이 바로 그대와 나/ 깨 쏟아지는 맛//

숯불갈비 / 김필영
오래전 충무로 그 갈빗집/ 입안이 허전할 때 생각난다/ 고기를 처음 먹는다던 그대가/ 순식간에 3인분을 뚝딱,/ 지갑을 텅 비게 해놓고 미안했는지/ 갈비엔 말 못할 향기가 있다했지/ 그대 내게 다가온 것처럼/ 숯불향이 갈빗살에 스며들어/ 돌아서면 다시 먹고 싶은 갈비맛/ 이글거리는 숯불에 달아올라/ 그대 볼에 노을이 피어날 때/ 우리 가슴도 뜨거워졌지/ 숯향처럼 그윽한 그대를/ 지금 내 옆구리 가까이 있게 해 준,//

된장찌개 / 김필영
한반도 흙빛 닮은 된장/ 눈감고 맡으면 흙향이 난다/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고/ 묵을수록 맛이 깊다/ 흙에서 자란 콩으로 담갔기에/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아무리 먹어도 탈나지 않는 약藥/ 된장을 즐겨먹는 몸엔/ 감기도 뿌리내리지 못한다/ 맹물에도 된장 몇 숟가락에/ 호박 두부 청양고추 넣고 끓이면/ 칼칼한 맛이 끼니마다 새롭고/ 오해로 토라진 사이도/ 된장찌개 가운데 놓고 삭히면/ 발효된 된장처럼 살아나는 정//

칼국수 / 김필영
칼국수엔 서슬 퍼런 칼이 없다/ 맛깔스런 국물이 있다/ 칼국수 국물엔/ 겨울눈을 머금은 뽀얀 하늘이/ 함초롬히 내려와 있다/ 연둣빛 호박 채, 주황빛 당근 채/ 젓가락으로 섞기엔 너무 고와라/ 매콤한 홍고추양념장을 넣어/ 후루룩, 한 입 가득 들이켜면/ 방망이로 반죽을 미시던 여름밤/ 어머니의 손맛 코끝에 밀려와/ 뜨거워지는 가슴에 겨울눈 내린다//

육개장 / 김필영
이열치열 더위를 즐기기엔/ 육개장이 제 격이라네/ 양지머리 육수 우러내는 솥으로/ 봄고사리들 주먹손으로 달려오고/ 빗물 흘러내린 토란줄기 껍질 벗으면/ 숙주향 대파에 스며든다네/ 얼큰한 육개장/ 입가에 붉게 바르며/ 이마에 굵은 땀 흘러내려도/ 허물없이 육개장 한 그릇 나누고픈/ 그대 오신다는 기별에/ 초롱초롱 여름밤은 밝아 오고/ 찜통더위도 성큼 물러선다네.//

수정과 / 김필영
정갈한 물도 수정 들여다보듯/ 그윽이 들여다보고/ 그 깊이를 가늠하라고/ 자수정 빛으로 물들였는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수정과 속에 수정은 없다/ 가을이 물든 곶감이 잠긴 호수에/ 달빛에 익은 잣알 몇 개/ 꼬마오리들처럼 떠 있다/ 여간 음식도 서로 나누어 먹은 후/ 수정과 한잔씩 들고/ 사슴처럼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 다정히 벙그는 마음/ 수정처럼 맑아진다//

족발 / 김필영
저 짧은 다리로/ 어디서부터 걸어왔을까/ 결승점까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톱마저 빠져버린 발/ 다리도 아니요, 발도 아닌 족발은/ 그 단면의 빛깔을 먹는 것/ 아롱아롱 피어난 콜라겐 꽃무늬/ 칼날의 아픔을 참아낸 가을꽃 같아/ 혼자 먹기엔 너무 외롭다/ 꽃잎 한 장 새우젓에 적시어 펴면/ 우리 가슴 속에도 발자국 피어날까/ 가을꽃 한 잎 상추에 싸들고 갈등한다/ 그대에게 먹여줄까, 내가 먹을까//

소주 / 김필영
초록병을 흔들어 깨우자/ 소용돌이치는 공기방울들/ 오늘도 참 애썼구나/ 첫잔에 이슬 떨어지는 소리/ 꿈 꿈 꿈,/ 그대 가슴에도 처음처럼/ 맑은 이슬 맺히는가/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병목을 넘어와 담기는 정情/ 쌉쌀한 하루가 가슴 속으로 스러진다/ 이 맑은 술 그 어디에/ 타는 불꽃이 숨어 있어/ 식은 가슴이 이토록 달아오르는가//

산낙지 / 김필영
바다가 그리운 날엔 친구여,/ 산 낙지를 먹세/ 갯벌이 그리워/ 흡반으로 유리를 붙들고/ 고향 꿈을 꾸는 녀석들을 따라/ 가슴 속의 바다로 가세/ 죽음 앞에/ 여린 발로 날선 칼날을 휘감는/ 두려움 없는 저 몸짓을 보소/ 가난이라는 파도가 밀려와도/ 우리 죽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하느니/ 한잔 가득 자네 마음을 따라보게나//

광어회 / 김필영
제주 섬을 동서로 돌아/ 한반도를 적신 물을 마셨다면/ 양식이든 자연산이든 신토불이겠다/ 납작한 광어는/ 백의민족을 닮은 물고기/ 속살이 희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듯/ 바닥에 엎드려 낮은 자세로 산다/ 광어회의 백미 지느러미 살도/ 우리가 서로에게 양보하듯/ 먹이 앞에서도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광어는/ 두 눈을 한곳에 모아 바라보는걸 보면/ 좌우로 편 가르지 말고/ 제 살을 안주삼아 따뜻한 잔 서로 나누라/ 온몸으로 일러 준다//

삼겹살 / 김필영
반가운 이와 함께 삼겹살을 굽는다/ 불판에 마음도 올려놓는다/ 단면의 빛깔만으로 힘이 솟는/ 탄력을 숨긴 콜라겐 껍질 아래/ 처음 수태하려고 부끄러웠을 연분홍살,/ 먹이투정 없이 자란 건강한 선홍살,/ 주고만 싶은 우윳빛 살이 퇴적층처럼 쌓여있다/ 손바닥이 데일만큼 달아오르기 전에는/ 절대 고기를 올리지 말 일이다/ 미지근한 불판에서 육즙이 줄줄 빠져나가면/ 맛도 탄력도 달아나 버린다/ 불판 위에 잘 익은 가을을 불러들여/ 단풍잎 뒤집듯 노릿하게 구워야 고기 맛이 난다/ 이때, 깻잎을 곁들인 상추에 밥을 올려놓고/ 된장을 찍은 마늘 위에 삼겹살을 올려/ 한잔 권하고, 그 입에 쏘옥 넣어준다/ 삼겹, 남은 이야기를 함께 굽는다//

낙지볶음 / 김필영
뼈대 없는 가문이라 비웃지 마오/ 갯벌을 맨발로 기어가며/ 악착같이 살았다오/ 영양가 높은 조개를 사냥하던/ 오통통한 다리를 보소/ 지친 소도 벌떡 일어난다는 말/ 옛말만은 아닐 듯하오/ 고추장에 양념 버무린 양파를 볶다가/ 여덟 개 다리를 통째로 넣고/ 흡반이 익을 때까지 살짝 볶아/ 통깨를 뿌려 데운 접시에 올리고/ 오랜만에 그대와 마주 앉으니/ 지친 마음이 벌떡 일어나네//

추어탕 / 김필영
추어鯫魚,/ 고기 어魚자를 이름에 두고/ 수염까지 의젓하게 길렀으니/ 사내로 치면 군자君子쯤 되겠다/ 단풍이 지쳐 들녘으로 내려오면/ 네 가슴도 누렇게 물들었지/ 헛간에 걸린 시래기를 삶아/ 뼈째 갈아 넣고 고왔으니/ 단백질 고수와 섬유질 고수가 만났구나/ 내 오늘 너와 한 몸이 되려하니/ 내일은,/ 태산이라도 들어 올리겠다.//

전煎 / 김필영
비가 내리는 날엔/ 고소한 냄새가 생각나/ 가마솥 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친다/ 애호박은 얄팍하게 썰고/ 동태는 포를 떠서/ 밀가루 분을 발라 계란 옷을 입힌다./ 전을 부치는 일은/ 가을이 익기를 기다리는 일/ 솥뚜껑이 달구어 지면/ 붉은 실고추를 뿌려/ 나뭇잎에 단풍빛깔 물 들 때까지/ 겉이 타지 않도록 기다려야한다/ 찢어지지 않게 잘 뒤집어야/ 가을의 맛도 고소해진다// 순두부 / 김필영
純두부든, 順두부든/ 순두부처럼 보드라운 것이 있을까/ 순두부엔,/ 누나 마음 같은/ 엄마 마음 같은/ 다정하고 포근한 마음이 들어 있다/ 숟가락으로/ 눈송이 한 숟가락/ 목화꽃 한 숟가락/ 뭉게구름 한 숟가락 떠먹는다/ 입안에 들어 온 순간/ 씹을 겨를 도 없이 침샘을 적시고/ 그대 마음이 부드럽게 당겨오듯/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한 마음이 되는,//

콩나물 / 김필영
한 번도 신발을 신어본 적 없는/ 저 맨 발의 무희들/ 어둠에 갇혀 바깥을 꿈꾼다// 먹을 것이라곤, 물 한 모금 뿐/ 고작 일주일의 삶이 이렇게 치열하다니/ 그 물소리 귀 기울이다/ 발끝을 세워 키를 늘이는/ 저 무른 관절엔 마디도 없다// 흑암에서 여문 금빛 꼬막손으로/ 허공을 더듬어 틈을 찾는다// 누군가 쓰린 속을 달래주기 위해/ 또 한줌의 몸이 뽑혀나간다.//

잡채 / 김필영
잡雜이란 이름 첫 글자 때문에/ 부를 때마다 미안하다./ 잡雜이란,/ 잡스러움을 포용한다는 말,/ 뻣뻣한 당면도 끓는 물에 힘을 빼고/ 시금치 당근을 끌어안고/ 양파 버섯과 어우러지듯/ 뒤섞여도 순진한 맛이란 말,/ 누구라도 차별 없이 즐기라는 말,/ 햇살 그을린 살결 같은/ 조선장 빛깔 배인 잡채 한 접시/ 가운데 놓고 둘러앉으면/ 서먹하던 사이도 쫄깃하게 정이 들어/ 두 손을 마주 잡는다//

묵 / 김필영
묵사발이 되는 건 싫다/ 묵 한 사발 가운데 놓고/ 한잔 나눌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 메밀묵이든, 청포묵이든, 도토리묵이든/ 묵은 느림의 결정체/ 앙금을 느릿느릿 저어 끓여/ 천천히 식혀야만 탱탱해지는 묵/ 빨리 먹으려하면 부서지고/ 빈 젓가락만 남는다/ 미끌미끌한 묵은/ 조심스럽게 집어 입에 넣고/ 쑥갓향 참기름 향이 묵에 스미도록/ 입안에서 으깨어/ 묵묵히 먹는 맛이 일품이다.//

꽁치구이 / 김필영
갓 구운 꽁치 한 마리/ 고도의 설계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등선에서 배지느러미 쪽으로 말아 감아/ 줄 당기기 하듯 당겨진 곡선의 내각들/ 바다 속 수압을 견디며 잠수하는데 용이할 것이다/ 물살을 갈랐을 야무진 뺨 위로/ 심해 속을 꿰뚫어 보던 눈을 부릅뜨고 있다/ 뾰족한 머리에서 미끄러진 매끈한 몸통 끝까지/ 마찰계수를 줄여주던 피부에 윤기가 흐른다/ 등과 배의 경계, 암청색 하늘과 맞닿은 은빛 수평선/ 젓가락으로 허공과 바다를 가른다/ 몸을 곧추 세워 고속추진을 도왔을 중심 뼈/ 꼬리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정교하다/ 척추 좌우에 직각으로 뻗은 가로 뼈들/ 거북선 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져 있다/ 저 뼈가 있어 뒤집히지 않고 먹이를 벌었으리라/ 부채살처럼 세운 꼬리지느러미/ 능숙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게 가운데가 잘록하다/ 이 꼬리를 너무 휘두르다 그물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꽁치를 보면 아무래도/ 잠수함 설계자가 모델로 삼았을 공산이 높다.//

돼지국밥 / 김필영
우리 국밥 한 그릇 할까/ 이처럼 편안한 말도 흔치 않다/ 계절에 관계없이/ 복장에 관계없이/ 지갑두께에 관계없이/ 불쑥, 내미는 말이 정겹다/ 값이 싼 돼지국밥은/ 몇 시간 뼈를 우려내고/ 냄새를 비워내는 정성이 깊다/ 푹 삶은 머리고기와 내장이/ 숟가락마다 푸짐히 담겨와/ 소주 한 잔 곁들이면/ 가난도 서럽지 않다/ 그릇바닥을 비울 때까지/ 깍두기가 입안을 개운하게 헹구어주면/ 숟가락 든 손에 힘이 솟는다//

찐빵 / 김필영
하굣길 찐빵집을 지나칠 때면/ 누군가 부를 것만 같아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나친다/ 어떤 친구들은 찐빵에 홀려/ 책가방을 맡기고 먹기도 하는데/ 교과서를 사지 못한 나는/ 텅 빈 가방이 가벼워서/ 종종걸음으로 찐빵집을 지나곤 했다/ 도시락도 싸오지 못한 내게 선생님은/ 가끔씩 찐빵을 사주셨다/ 설탕이 뿌려진 누런 찐빵위로/ 달콤한 팥소향이 모락일 때/ 먹지 않아도 마음까지 훈훈해 오던 길/ 옛 거리를 닮은 학교 앞을/ 우연히 지나노라면 두리번두리번/ 나도 몰래 옛 찐빵집을 찾는다//

송편 / 김필영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며/ 어머니는 누나들을 불러 모은다/ 두레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말랑한 반죽으로 둥근달을 빚는다/ 콩고물을 한 숟가락 넣고/ 반으로 접으면/ 손바닥 안에서 반달이 떠오른다/ 내가 만든 것은 울퉁불퉁,/ 누나가 만든 달보다/ 엄마가 빚은 반달이 예쁘다/ 김 모락이는 시루에/ 솔잎향 솔솔 피어오르면/ 기다리다 잠이 든 나는/ 꿈속에서 초록달을 만난다.//

 

김밥 / 김필영
김이 까만 손수건을 펼치자/ 돌돌 말려 갇힐 줄 모르고 밥도/ 제 몸을 하얗게 펼친다/ 참기름 볶은 깨에 고소한 밥알/ 소금 간에 속살은 얼마나 쓰렸을까/ 계란부침, 단무지, 당근, 오이채/ 아차, 우엉이 빠져서는 제 맛이 안 나지/ 도마 위에 대발을 풀고 정성을 더하여/ 토막토막 칼날 아래서 피어나는 꽃/ 이 꽃을 가장 멋지게 피우는 방법은,/ 님에게 눈을 감고 입을 벌리게 한 다음/ 내가 먼저 한 입 먹고/ 내 상처의 꽃을 님의 가슴에 심는 일/ 김밥을 먹는 사람은 알 것이다/ 상처도 김밥 속에선 꽃이 된다는 것을//

시래깃국 / 김필영
그늘에 말라서야 얻은 이름/ 시래기는 삶아도 시래기/ 식탁에 오르기 전/ 질긴 껍질을 벗겨야 하니/ 떡잎으로 마른 땅을 가르던 손,/ 땡볕과 폭우를 견디며/ 뿌리를 돌보던 솜털손인데/ 목 잘려 거꾸로 매달린 채/ 한겨울을 낡아 갔으니/ 어찌 질기지 않을 수 있으랴/ 펄펄 끓는 솥에서/ 푸르렀던 날을 기억해내고/ 온유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니/ 잃는 것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시래깃국 한 그릇에/ 시린 발로 둘러앉던 겨울밤이 들어있네//

배추김치 / 김필영
늦가을 안아다 칼로 쪼갠다/ 스스럼없이 제 속을 여는/ 단맛 가득한 배추의 마음/ 밑동을 추운 밭에 두고 온/ 언 마음에 우리는 소금을 뿌린다/ 김장을 담그는 것은/ 배추를 잠재우는 일/ 미나리 쪽파를 썰어 향을 피우고/ 마늘 젓갈을 고춧가루로 버무려/ 겨드랑이 사이사이에 끼워주고/ 처진 그 어깨를 다독여 준다/ 흰 눈 내릴 때까지/ 항아리 속에 긴 잠이 들어/ 아픔이 숙성되어 식탁에 오르면/ 입 안 가득 군침 돌고/ 젓가락보다 손이 먼저 간다//

꼬막 / 김필영
인사동 그 집‘여자만’에 가면/ 손님 중 반은 남자들/ 그중 반은 꼬막을 찾는답니다/ 여기저기 꼬막조개 까먹느라/ 소꿉놀이소리 정겹고요/ 속살을 감싼 열린 입술 사이로/ 개펄내음 솔솔 흘러나옵니다/ 방사륵 굴곡 사이사이/ 밀물과 썰물의 그늘 켜켜이 서려/ 바다가 몸을 열듯 부챗살을 열면/ 촉촉이 젖어있는 조갯살/ 꼬막손으로 담아온/ 순천만의 파도소리/ 눈물로 왈칵, 쏟아집니다//

과메기 / 김필영
청어의 젖은 눈을 나란히 놓고/ 꿰어 말린다는 관목貫目에서/ 네 이름이 지어졌으니/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너희는 필시 한 핏줄이다/ 청어가 떠난 포항에서/ 널 닮은 꽁치로 너를 대신한다/ 봄은 아직 먼 바다에서 울고/ 해풍 시린 덕장에 겨울은 길어/ 밤에 얼었다가 낮에 풀리는 살/ 해와 달이 스며들어/ 자르르 기름이 흐르는 너를 잘라/ 물미역 김에 올리고/ 파 미나리 초장에 찍어 취하노라/ 갯바람에 피를 말리며 흘린/ 마지막 눈물을 삼킨다.//

동치미 / 김필영
어머니 잃은 장독대 항아리들/ 옹기종기 마음속에서 숨 쉰다/ 군대 간 형, 소식 더딜 때/ 동치미 항아리 앞에서 어머니는/ 흐르는 마음을 훔치곤 하셨는데/ 겨울바람을 등에 업은 항아리가/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발그레 갓물을 우려내는 동안/ 무 홀로 살얼음 속에서/ 제 살을 익히고 있었네/ 제대한 형이 돌아오던 날/ 동치미를 떠오시는 어머니/ 사발가득 겨울하늘이 동동 떠 있고/ 무 속 같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동치미 맛처럼 웃으셨네//

감자탕 / 김필영
두 알만 들어있어도 이름은 감자탕/ 말만 잘하면 얼마든지 공짜다/ 대 중 소 어떤 것이든/ 주머니(酒money)걱정 없는 날/ 돼지 등뼈 우려낸 국물/ 전골냄비 끓어오르면/ 정이 넘치는 잔은 돌아가고/ 뼈와 뼈 살과 살 사이/ 시래기향에 노곤해진 고깃살/ 겨자장에 찍어 한입 넣으면/ 여기가 어디이고/ 그대는 누구인가/ 오늘만은 서로 지갑 열겠다고/ 가위바위보 소리도 정겨운/ 감자탕집 겨울밤은 깊어만 간다//

설렁탕 / 김필영
첫봄, 임금님이 백성들 앞에서/ 쟁기질 해 보이는 날/ 소 한 마리 잡아 백성들에게 먹였다는/ 선농탕先農湯/ 밥맛과 국수사리 맛도 담백하여/ 임금의 입과 백성의 입도/ 설렁탕 앞에서는 평등하다네/ 가늘게 파 썰어 넣고/ 소금만으로 간맞춘 설렁탕/ 백성을 위해 흘리는/ 임금의 눈물은 거짓이 없기에/ 하늘빛 오롯이 담긴 국물/ 한 그릇 바닥까지 비울 때/ 나는 어느새/ 장딴지 걷어붙인 그 옛날 농부가 되네//

깍두기 / 김필영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간편한 식탁에는/ 깍두기만한 반찬이 없다네/ 국밥 한 그릇,/ 라면 한 그릇 앞에 마주할 때/ 깍두기마저 없다면/ 그 식탁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젓가락 하나로 집으려면/ 육면 모서리를 깍듯이 썰어야 하네/ 소금 간에 잘 절인 무/ 마늘 고춧가루 양념이 찹살풀에 배어/ 알싸한 무가 붉으레 물들면/ 감칠 맛 나는 깍두기가 된다네/ 고독한 사람들 끼니마다/ 깍두기가 깍듯한 애인이라네//

총각김치 / 김필영
얼굴 뽀얀 어린 무/ 상투 틀지 않은 무청을 달았으니/ 총각이 맞긴 맞지요/ 빳빳한 무는 천일염으로 절여/ 찹쌀풀국에 젓갈 넣고/ 갖은 양념에 버무려야 하지요/ 오모가리에 숙성된 총각김치는/ 소리로 먹는 것이라서/ 총각무 한입 깨물면/ 오독대는 소리에/ 처녀 얼굴도 붉어지지요/ 가을마다 총각김치 담가줄/ 처녀가 곁에 없어/ 그는 여전히/ 총각딱지를 떼어내지 못했지요//

매생이국 / 김필영
사위 놈 미울 땐/ 매생이국 끓여 먹이란 말,/ 김도 나지 않는 매생이 국 먹다가/ 입천장 홀딱 데이고 알게 되었네// 청정바다에서 아무도 몰래/ 프랑크톤 길러내던/ 초록초록한 실오라기들/ 명주실보다 여리고 가늘어/ 갓난아이 속눈썹처럼 부드럽다네// 겨울산 대나무밭에/ 칼바람 잦아들 때/ 죽엽 같은 마음으로/ 초록바다 한 사발 나눌 때면/ 두마음 초록으로 물들어오네//

아귀찜 / 김필영
말처럼 되는 일 없을 때/ 말 없어도 좋은 친구를 불러/ 아귀찜집을 찾는다/ 굽는 요리는 뒤집기 바쁘고/ 탕요리는 졸아들어 짜게 되니/ 정겨운 눈빛만으로/ 한 잔 나누는 데엔/ 아귀찜이 제격이다/ 접시에 솟아오른 붉은 산/ 고추냉이장에 적신 아귀살/ 매콤한 콩나물 호호 불면/ 쏟아지는 땀방울/ 얼얼한 입에 한 잔 털어 넣으면/ 입천장에서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동태탕 / 김필영
동해의 수평선에 솟아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담은 눈빛/ 탕탕, 도마 위에 토막 나도/ 집요하게 부릅뜨고 있다/ 봄바다로 돌아갈 길은 먼데/ 얼었던 몸 불을 지피자/ 살 속으로 스며드는 홍고추향/ 급냉고에 정지되었던/ 물살을 가르던 기억들이/ 무 대파 두부 속으로 파고든다/ 그물로 붙잡아도 원망 없이/ 끓는 솥에 제살을 풀어/ 천적의 입맛을 달래주는 너는/ 어느 바다의 나그네였더냐//

만두 / 김필영
쉿,/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답답하고 뜨거워도/ 절대, 입을 열어선 안돼/ 만약 입을 열어 속을 보이면/ 그땐 너희들은 끝이야, 알았지!// 예쁜 새댁 고운 입술로/ 왜 그렇게 험한 말을 해야만 했는지/ 묻지 마오/ 김이 나는 찜솥을 열어/ 뜨거운 만두 한 접시 마주하면/ 그때, 만두가 말해줄 테니//

갈비탕 / 김필영
반가운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따뜻한 정을 나누기엔/ 갈비탕이 좋다/ 그 국물의 남다른 맛은/ 갈비뼈 속에서 우러나온 것/ 아기를 품에 재우는 엄마처럼/ 오장육부를 둥글게 말아 감은/ 여문 손가락 같은 뼈이기에/ 그윽한 향미가 깊다/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간지러워 자지러지는 것은/ 그곳에 갈비뼈가 있기 때문이다/ 순한 황소,/ 갈비맛과 향이 고스란히 우러난/ 따뜻한 갈비탕 한 그릇/ 사시사철 보약으로 손색없다//

식혜 / 김필영
겨울하늘이/ 가슴에 품고 있던 눈을 떠나보내고/ 제자리마저 비우고 싶었는지/ 식혜 속에 제 몸을 내려놓았다/ 떫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식혜 밥알처럼/ 가끔은 자신을 비워봄직하다/ 밥알이 단맛을 찬물에 버리고야/ 엿기름과 어우러져 삭을 수 있듯/ 비우고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러안고 서로 삭을 수 있다/ 빈 마음으로 다가가/ 가진 온기로 데우며 죄다 주려할 때/ 서로 달콤하게 맛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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