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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고경숙 시인

부흐고비 2022. 2. 9. 08:00

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했다. 제4회 하나.네띠앙 인터넷문학상 대상, 제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제3회 두레문학상, 2011경기예술인상, 2012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을 수상했으며 현재 부천예총 부회장, 부천문인협회 회장, 수주문학상 운영위원장, 부천시 문화예술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모텔 캘리포니아』, 『달의 뒤편』, 『혈을 짚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허풍쟁이의 하품』과 카툰영상시 『어제가 내일에게』 등이 있다.

 



흐미* / 고경숙
위축되었던 여자의 몸에서/ 버섯이 피는 소리/ 그건 혼자 부르는 노래/ 귀 닫아걸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과/ 벌판 끝에서 만난 호수의 푸른 눈물이/ 부둥켜안고 서로를 연민할 때 내는 신음소리/ 지평선 끝으로 무거운 하늘이/ 지상의 죽어가는 마지막 영혼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천천히 내려앉는 소리/ 척추 깊숙이 검에 찔리고도/ 사나흘 화려한 무희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추는 접신몽처럼/ 별들이 쏟아지는 소리/ 여자는 남자가 떠날까 두려워/ 몰래 훔친 남자 목소리를/ 제 목울대에 감추고/ 남자는 목소리를 찾는단 핑계로/ 벌판 밖으로 떠나버렸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떠나가는 남자와/ 남겨진 여자가 함께 부르는/ 결핍의 노래,/ 돌아앉은 세월이 오래일수록/ 여자의 목청은 탕진한다/ 몸이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 죽어도 놓지 않겠다고/ 조용히 뜯는 마두금에 맞춰 노래 부르면/ 흐미, 멀리 말발굽 소리/ 몸 안에서 남자가 오는 소리/ 버섯이 피는 소리//
* 흐미: 몽골의 전통 예술로 2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한 번에 내는 예술

강에서 건진 달 / 고경숙
그날, 사람들은 산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바위 빠진 자리를 보러 강으로 갔어 강물 속으로 둥그런 그림자 드리운 곳이 횃불에 희끄무레 흔들렸지// 누가 달을 밀었나/ 천산에 길을 내준 산신은/ 제 앉았던 자리 풀을 엮어 내주었다며 모른 척하는데/ 말랑말랑한 달의 몸이 견고한 바위가 되기까지/ 고작 반년도 안 걸렸다는데 말야/ 어른들은 근접을 막으며 아이들을 쫓고/ 명리학에 능하다는 노인은/ 오래오래 강을 내려다보고 있네// 구닥다리 옛날사람들 이야기, 벌목꾼들 수근 대는 소문대로 달은 매일 강에서 건지네 오백 년 후 내가 그날처럼 옛날사람이 되었을 때 한번쯤은 그 달에 몸을 얹고 흘러갈 수 있을까 강에서 건진 달처럼 차고 단단한 당신처럼, 벙어리로 하늘에 떠있을 수 있을까.//

​모리스 씨의 초대 / 고경숙
눈보라에 마을이 쓸려가는 저녁이다/ 평소의 보폭보다 조금 빠르게 걸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 웅크린 지붕들의 표정이 들어왔다/ 굴뚝에 매달려 찌푸린 더깨눈이/ 미끄러져 방앗간 덧문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우유 배달이 끊긴 식탁에서 으깬 감자를 접시에 담으며/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안부를 묻는다/ 사각의 창틀 모서리마다 눈 박힌 저녁 풍경이/ 감자처럼 둥그러졌다/ 내다보니 길도 이미 곡선이다/ 바람의 속도가 느려지는 틈을 타/ 눈 쌓인 경사면에 간간히 불 비쳤다 사라지면/ 다져진 길을 따라 눈보라가 강처럼 흘렀다// 인적이 끊긴 마을에 우두커니/ 수평으로 뉘려는 바람에 맞서 버티고 선 그 힘이/ 내 몸무게가 아닐까 하는 무거운 생각, 무거운 몸,/ 망상이 깃발처럼 나목 위에 칭칭 감겼다/ 여전히 눈보라가 쳤다/ 집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웅크렸다/ 길은 자꾸 집 쪽으로 기대섰다/ 여전히 내 등도 눈보라에 떠밀려 이동했다/ 눈보라가 모든 것을 쓸고 가는 풍경,/ 음산한 하늘의 표정도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나비 / 고경숙
나는 애인을 감금했어요/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내 방엔 이미 키나발루 농장에서 사 온 나비 박제가 날개를 쫘악 펴고 걸려있고, 대형 브로마이드엔 인기 연예인들이 나란히 박제되어 있어요 탁상 캘린더 속에 24시간씩 나누어 감금된 날들, 약속이 많아 그중 하루를 꺼내 쓰려면, 대신 어제를 박제시키죠// 급진적인 애인은 자꾸 앞서가요 손을 내밀면 어깨를 안고, 허리를 잡으면 입을 맞추고,// 어머니는 얘야 여자는 쉬우면 안 된다 그러면서 자꾸 무릎이 덮이는 원피스를 입혀요 나는 애인의 양손에 예수님 처럼 핀을 박아요 그리고 시를 써요 혁명적인 애인은 배가 고파서 화가 난대요// 빵을 사 와야겠어요 보름달, 보름달, 하나는 애인의 입에 물려주고 하나는 애인 옆에 나란히 핀을 꽂을래요//

집채만 한 배경 / 고경숙
맥도날드 옆에 차린 수제버거집 간판은 당돌하다 설령 맛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꼭 사 먹어보리라 생각하며 지나간다/ 은영의상실에 은영이는 없고 은영이 엄마가 한 달에 한 개 블라우스를 만든다 단골손님도 늙고 은영 엄마도 늙어 유행 같은 건 따지지도 않는다 좋다 두루뭉술한 허리통에도 끼지 않을 것 같은 주덕구구식 재단 말이다// 미끈한 하지 감자 박스에 눈이 먼저 가는데, 오늘은 사지 마 감자 값 비싸! 내 편인지 네 편인지 모를 야채가게 아줌마, 성씨도 이름도 십 년 넘게 모르지만 나는 엄마 잃은 뒤부터 그녀의 신도다 살림 구단인 척하는 뒷배경이다// 먹고 사는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진 않아/ 살만하다 싶으면, 덜컥 병 걸리고/ 손님 는다 싶으면, 덜컥 가게 빼라 하네// 건네줄 뒷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진 어휘들론 부족한 것 같아 잘 될 거예요, 제 말이 맞아요// 내 말풍선은 허세로 빵빵하지만, 그 말끝에 활짝 웃는 시장통, 우린 서로에게 집채만 한 뒷배경이다//

격리 / 고경숙
여든여덟 여든아흡 아흔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는 한 번도 마을을 떠나보지 못했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작대기로 마당에 8자를/ 두 개 겨우 긋는데, 거기까지다// 여든여덟 여든아홉 아흔 살이 될 때까지/ 삼 년 동안은 정신줄을 쥐었다 놨다 했으니까/ 세 살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나이// 여든여덟 여든아 아흔 살은/ 죽어도 못 잊을 영감님 만나러 가야 된다고/ 스웨터 껴입고 입은 데 또 껴입는 덧 시간,// 여든여덟 여든아 아흔 살이 지나면/ 혼자만 놔두고 다들 버스 타고 여행 갈까 봐/ 자다가도 벌컥벌컥 방문 열어본다//

어물전에서 / 고경숙
질퍽이는 바닥을 피해 어물전에 들어섰다/ 작은 수족관 속에서 대게 몇 마리 서로 발이 엉켜 뒤틀고 있다/ 양푼 속에선 바지락조개들 간간이 물을 뿜으며 철없이 놀고/ 주인 아지메가 남은 생태 몇 마리를 떨이로 넘기려는지/ 무지막지한 꼬챙이로 아가미를 찍어 벌린다/ 이보요,빨갛지. 눈깔은 또 어떻고.../ 말간 생태 두 눈에 피가 맺혀있다/ 어린 놈이다// 떡판처럼 우직한 통나무 위에 찍어둔 시퍼런 칼날/ 단연 이 어물전에 실세지만/ 난자 당한 도마를 씻느라 바가지 가득 물을 끼얹을 때마다/ 파도소리를 듣는다/ 미끈한 갈치도 고등어도 약간 물간 오징어도/ 그 소리를 들었다/ 더 큰 놈은 없소?/ 주인은 들은 체도 안하고 한 마리 더 얹어준다는 걸쭉한 호객뿐,/ 그래도 팔다 남은 놈 있으면 배 갈라 쫙쫙 소금 뿌려/ 자반으로 넘긴다// 차양 너머로 금빛 노을이 파장을 부를 때쯤/ 사람들은 우루루 기다렸다 모여들고/ 동물이나 사람이나 마주보고 탐색전을 벌이다/ 저 같은 놈 만나 끼리끼리 어울리듯이/ 너희에겐 그게 딱이야!/ 작은 이 시장에 불문율 하나 슬픔처럼 내 걸린다// 돌아오는 길/ 생선가게 뿌연 TV속에서/ 수많은 갈치 고등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비린내나는 대선후보들의 논쟁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주인여자가 껌을 질겅이며 돈을 세고 있었다//

탁본 / 고경숙
사랑에 눈먼 그가/ 돌아서서 나를 기다리네// 인기척 없이 뒤로 다가가 꼭 안으면/ 탕탕 솜방망이로 심장을 두드리며/ 그의 등에 탁본되는 나,// 심장과 심장/ 입술과 입술이/ 이념보다 더 붉게 각인되어// 지체된 사랑에 빠진 내가/ 삶의 제재가 되어버린/ 그의 시선과 음성을 해독하느라/ 절반의 몸이/ 먹물로 흘러내려도 좋으리// 내 몸에 꼭 맞는/ 내 맘에 꼭 맞는//

석류 / 고경숙
발정기에 들어선 원숭이떼가/ 엉덩이를 까고 놀리는 줄 알았다./ 빨간 석류,/ 아니 차도르 쓴 여자의 은밀한 곳처럼/ 검붉다는게 정확하겠지/ '이란産' 딱지 하나씩 엉덩이에 붙이고/ 위장한 여전사들/ 어쩌면 저속엔 투명한 탄환알갱이들이/ 가득 숨겨져 있을지 몰라/ 허름한 시장통/ 경계 느슨한 그 곳에서/ 미제에 물든 내 뱃속을 향해/ 기습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낯선 무리들.//

치렁치렁 / 고경숙
시래기를 엮는 동안에도/ 노모는 다음 일을 지시합니다/ 노랗게 변색할 때까지 눈도 맞고 얼었다 녹았다/ 겨우내 먹을 양식이라니께/ 일 년 먹고도 남을 양, 서너 번 오가며/ 흙벽 처마 밑에 치렁치렁 매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새댁은 또 한 소리 듣습니다/ 야야, 제발 그 머리카락 좀 어찌 해봐라/ 아궁이 앞을 쓸고 다니는 치맛자락은/ 새까맣게 한 단을 덧댔습니다/ 노모는 아예 말문이 막혀 한숨을 쉽니다/ 오십이 다 된 새신랑은/ 어린 아내 손을 잡고 얼른 방으로 들어갑니다/ 힘들지? 한 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합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칠렁칠렁, 칠렁칠렁 밖에 몰라//

혈(穴)을 짚다 / 고경숙
아프다, 까마득하게 먼 기억이/ 강처럼 흐르는 곳 어딘가를 누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벌판 한복판/ 말안장에 얹혀진 돌덩이 하나/ 늘어진 신경 끝으로/ 죽은 장미의 검붉은 체액이/ 길을 내고 있다// 전생의 마지막 귀가다/ 푸른 늑대의 유령이 달 없는 밤에만 나타나/ 여자의 붉은 살을 뜯는다는/ 계곡을 지나며/ 살아 숨쉰다는 안도에/ 호흡이 불규칙해지면,/ 별은 무리지어 이마에 박히고/ 접신하는 주술사처럼/ 동물의 이빨을 목에 건 모래바람이/ 삽시간에 눈과 귀와 입을 막는다// 아프다, 관자놀이 가까이 머물며/ 비속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강 언덕에 화살을 날리는/ 전생에 관해/ 유감스럽다거나 '제발'이라는/ 단순함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것은/ 펄떡이던 강물이 메마르며/ 뜨거운 공기가 헉!/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다, 아프다/ 네가 짚고 간 길을 따라/ 아무리 짚어도/ 계속 허청대는/ 지상에서의 삶.//

부부학 개론 / 고경숙
하릴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 사람구경도 식상해지면/ 발 밑에 킁킁대는 개들 좀 보라지./ 삐적 마른 놈 눈만 불뚝한 치와와는/ 영락없이 제 주인 닮았고/ 긴 털 멋있는 콜리는/ 외제차 타는 도도한 주인처럼 격이 있어./ 시장 바닥에 떠도는 똥개들은/ 술판 기웃대며 거나한 딱 제 주인이지.// 모처럼 부부간에 의기투합했는데/ 지나가던 이웃 할머니 우리보고/ 부부가 닮아서 잘 살겠다네./ 저 화상보다 내가 한 수 위인 줄 알았는데/ 우린 코끝에 검댕 묻은 두 마리 똥개였나 봐.// 여보야,/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 사랑한데이-/ 깨갱 깽 깽/ 신소리 마레이-/ 깨갱 깽 깽.//

곁 / 고경숙
나의 곁에 머물다 간/ 수없이 많은 사물들을 호명해본다// 유년의 저녁/ 나를 찾아 나선 어머니의 노을빛 음성과/ 서늘한 바람/ 말없이 어느 가을, 함께 하늘을 바라봐주던/ 바닷가의 일몰/ 꼬박 캄캄한 밤을 나와 지새운 고독까지// 시간이 메우는 그 저녁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마주하진 못한/ 서러운 잉여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곁이 된다는 것은/ 환희의 반려이지만//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슬픔이 내재된 철든 몸짓이다// 무턱대고/ 곁을 후비고 들어오는/ 관습적인 무례를 범하지만,/ 대부분은 보헤미안의 피가 흘러/ 어느 날,/ 안녕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지// 누군가의 곁을 위해/ 나는 소망한다// 바람, 너처럼 자유롭지 않고/ 바위, 너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도플갱어,/ 누군가의 서러운 잉여가 되고 싶다.//

발목의 지향점 / 고경숙
그대를 보내고 나는 휘청거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평평한 땅에서 접질리는 왼발은 절망한 심장 쪽으로 자꾸 드러눕고 발등의 멍이 푸른 바다처럼 시퍼렇게 밀물로 들어와 나는 관절 가득 얼음주머니를 얹고 북극을 체험했습니다// 처방은 거짓말 진술에 의존합니다 무리한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라고 당신을 둘러댔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몇 번은 해봤을 것 같은 의사의 안경 너머를 주시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자세와 습관 때문이군요// 명쾌한 처방입니다 당신이 빠진 산책길에서 왼편의 결핍을 발목은 먼저 알아차리고 방황했나 봅니다 배롱나무 가지처럼 촉감 좋던 그대의 팔목에 팔짱 끼던 습관대로 헛헛한 허공에 팔을 걸다 기우뚱 넘어진 일은 예고된 발목의 저항이었습니다// 발목은 심장처럼 뜨겁진 않지만,/ 지향점은 다섯 발가락 오직 한 곳, 그대를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공기놀이 / 고경숙
단단한 바위인 줄만 알았었는데 산산이 풍화돼 공기알 다섯 개로 그는 내 손바닥에 남았다 꽃 같은 이름 부르며 공중으로 하나 던지고 나머지 네 알 에피소드는 가을 대지에 흩뿌렸다 한 알씩 천천히 집고 다시 그 이름, 바람 위로 던졌다 이번엔 행복했던 순간과 눈물로 두 개씩 갈라 집었다 유리파편 같은 이름 구름까지 힘껏 던지며 돌아보니 그가 잘해준 것 세 개와 내가 준 상처 하나 생각났다 서둘러 공기알을 집는다 다신 부르지 않겠노라! 마지막 공기알을 던진 맹세다. 공깃돌 움켜쥔 주먹 안에서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모든 과정을 거친 뒤 가는 단계, 손바닥에 모은 다섯 공기알 조심스레 공중으로 던지고 내려오는 사이, 잽싸게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으로 받으며 손목을 휘감아 잡는 것 그게‘꺾기’다! 다섯 알 다 꺾으면 5년, 심드렁한 나도 함께 꺾어버렸다// 나는 유난히 작은 손 탓에 손등에서 공기알 주르르 흐르거나 꺾다 튕겨나가기 일쑤여서 다른 이들보다 정해놓은 세월을 채우기가 늘 더뎠다// 그를 잃은 시간은 순간이었는데/ 그를 잊는 시간은 억겁이었다.//

마리오네트 주름* / 고경숙
꽃다발 들고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풀썩 넘어진 저녁이 우네 손바닥에 무릎에 붉은 노을 범 벅이 되었네// 도도하게 걷던 두 시의 태양과 힐을 집어 던지고 마른 젖을 물리던 세 시의 나뭇잎들, 그리고 늙지 않는 다섯 시의 그녀가 거리에 있네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고,// 스테이플러에 몇 장씩 묶인 시간이 도움닫기 발판처럼 거리에 널브러져있네// 왼발부터 내디뎠어야 했나 제자리 뛰기를 했어야 했나 잠깐이라도 고민해보았더라면, 저 해를 놓치지 않았을까// 제 다리를 깔고 앉아 출렁거리는 뒤통수, 팔다리가 엉키지 않게 모로 누워있다 음악이 들리면 벌떡, 완벽하게 일어서야 하네// 항구는 밤을 끌고 온 배들의 정박을 돕고 숄 하나 걸치지 않은 어린 집시처럼 이 생 또한 턱 없네// 이 춤을 언제 멈춰야 하나 춤추는 동안 우리는 사랑을 하긴 한 걸까 강처럼 깊게 패인 주름에 입을 맞추네// 미세한 떨림으로 입술근육을 움직여보네 덜렁거리는 턱 근육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늙지 않을래 웃다가 우네// 오, 마리오네트 절름절름 춤을 추네//
* 마리오네트 주름: 마리오네트는 인형극에 사용하는 인형인데 그 중에서 입을 닫고 벌릴 수 있게 만든 인형이 있는데 이게 마치 사람 입가의 피부 처짐처럼 보인다고 해서 마리오네트 주름이라고 한다.

마트로시카 / 고경숙

지나온 길은 언제나 낭패였다/ 조실부모하고 시집와 줄초상 나더니/ 해먹을 거 없어 차린 게 대포집/ 오다가다 눈 맞을 변변한 놈 하나 없었다/ 술살 올라 두루뭉술한 몸/ 앞치마로 받아낸 씨 다른 딸년들/ 못난 어미도 어미라고 빼다 박았다/ 손맛 좋은 큰아, 바지런한 둘째, 싹싹한 셋째 년/ 젖배 곯아 잘잘한 막둥이 보러/ 과부집 문턱이 닳게 드나드는 술꾼들/ 늙으나 젊으나 사내놈은 모두 개라며/ 빈대떡 쭈-욱 찢어 입 틀어막는다/ 일렬로 늘어서 끝 손님 보내는/ 앞치마 다섯 장 깃발처럼 펄럭인다/ 마트로쉬카!/ 씩씩한 그녀, 치마폭에 딸년들 차곡차곡 넣는다.//
* 마트로시카(Matryoshka):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계속 들어가 있는 러시아 목각인형

북향화 ―목련의 전설 / 고경숙
핏기 없는 두 발이 산을 넘을 때/ 저녁이 오고 있었나요/ 북쪽에 있는 그대는 푸른 바다의 神/ 여덟 개의 손으로 바람을 만지고 그 바람이/ 내 어깨를 만져요/ 하늘과 지산의 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모래알이 일렬로 늘어놓아요/ 그래도/ 촛불처럼 꽃등을 들고 나는 그대에게 가요/ 유령이 돌아오는 저녁이 만류하는 그 길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걸어요/ 그대는 어디 있나요/ 거기 그대!/ 그대의 곁까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흩눈으로 울어요/ 지상에서의 마지막은/ 산모롱이 환하게 꽃손짓하는 그곳이에요/ 억겁이 지나 다음 生에는/ 界를 넘어 그대를 찾아 갈 수 있도록/ 하얀 날개옷 표식으로 걸어둘게요// 나를 잊지 말아요//

모던 하우스 / 고경숙
고가사다리 꼭대기가 15층 창문에 턱을 걸고/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반복적으로 흔들면서 취급주의를 당부했다/ 마당을 들고 오던 노모가 저지당하고/ 방2가 되었다/ 사내아이는 자청해서 방3이 되었다// 평면적이 아닌 체적에 잔금을 치른 안주인은/ 방마다 문을 열어젖히고 취향대로/ 핑크, 아이스블루, 베이지 등 공기에 색을 입혔다/ 라벤더 향도 추가했다/ 거실이 광장이지?/ 활짝 열린 밸브는 흥분상태로/ 원탁에 구성원들을 불러 모았다/ 화목하게 화목하게 밥을 먹었다// 비밀번호를 여러 번 고쳐 누르고 반입된/ 방1이 밤늦게 합류했다/ 광장 바닥에 술에 취해 엎어진 채로,/ 안주인은 팔짱을 끼고 내려다봤다/ 방1의 손을 잡고 방2가 안타까워했다/ 날바닥에서 이러면 병 나,/ 비죽 고개 내민 방3이 밀실로 퇴장했다/ 광장엔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골목같이 축 늘어진 방1의 몸이, 시계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렁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 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담고 있다/ 고객님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나는/ L당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아본다/ 들꽃유로 가득이요/ 서둘러 주유기를 꽂고 뒤차로 간다/ 내 뒤 봉고는 콩기름을 주문한다/ 주유원이 탁탁 엉덩이를 치면/ 꽃향기를 내뿜으며 부릉거린다/ 카드전표로 가져온 광광나뭇가지에/ 손도장 꾹 눌러주고/ 출발!/ 손님, 내리막길은 무동력이구요/ 봄은 비과세입니다//

이상(李箱)을 필사(筆寫)하다 / 고경숙
저녁을 필사할 때 바다는 막 해가 지고 있었다/ 나의 외출은 노을의 점도에 달려있다 오늘처럼 붉은 하늘이 묽게 퍼지면 배 손님들이 모이고 나는 바다 쪽에서 횟집을 응시하며 기다린다// 물빛 원피스 바람을 일으키는 애인은 단체손님을 받느라 휘뚜루마뚜루 횟집 주방을 잘박거린다 발목이 지탱하는 하얀 각도에 비해 너무 많은 빛을 하사한 일몰에 대해 뭉크가 횟감으로 올랐다가 하이데거가 오르며 왁자지껄 떠든다 고상한 낚시꾼 놈들이다// 주말의 항구는 숙박을 예견한다 간판 주변으로 반짝이는 꼬마 전구를 세다 아래층에서 신호가 오면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다 이층 나의 방은 새벽 배를 탈 저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항구가 잠들기를 기다려 홀 한쪽에서 새우잠을 자다 새벽에야 올라간다// 불현듯이나 뜻밖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 손님이 없다고 찌푸리며 만 원짜리 한장을 건네는 애인은 시 나부랭이나 끄적이는 내가 싫지는 않은 눈치다 나는 횟집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산다// 내 동선은 일관성이 있다 그림처럼 일어나 그녀와 눈을 피하고, 그녀의 주방에서 걸리적거리지 않을 시간에 요기를 하고, 이층 창으로 내다보이는 바다를 멍청히 바라본다// 부지런한 바다는 벌써 배를 몰고 나가고, 송송 땀 밴 그녀가 설친 잠을 잔다 파도만도 못한 힘없는 내 다리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는지 자꾸 파르르 떹린다//

모텔 캘리포니아 / 고경숙
간이침대에 머문 8월은/ 언제 떠날지 말하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고 떠돌다 온 구름은/ 열린 숙박계 빈칸을 꽉 채우고도/ 비를 뿌렸다/ 섬은 파업 중이다/ 고깃배들도 갈매기떼도 방파제에 늘어서 있는 하루/ 불거진 관절을 끌고 포구로 피신할 때면/ 장기투숙객들은 골방으로 안채로/ 썰물처럼 밀려나야 했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들숨 따라 소식이 전해왔다/ 자고 나면 부푸는 해안선에/ 수초로 흔들리는 사람들/ 젖어서 메마른 바다를 지켜본다/ 습관처럼 음식을 시키고/ 그들이 내놓은 그릇이 섬처럼 떠오른다/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갇힘 사이를/ 흐르는 비,/ 나도 해안도로를 흘러내리며 폐곡선으로 갇힌/ 내 안의 길을 더듬는다/ 이대로 사나흘만 더 내려준다면/ 저 잡념으로 거품 문 파도를 끌어안고/ 바다 건너 가 닿을 수 있을까/ 손에 든 새우깡을 갈매기에 모두 털리듯/ 불량한 카드는 자꾸 기한을 독촉받고,/ 모텔 캘리포니아/ 비에 떠밀려 조금씩 바다로 간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새로운 섬이 된다.//

사막의 색 / 고경숙
사막에 부는 바람은 色까지도 풍화시킨다/ 이글거리는 赤태양과 검붉은 바위를 호되게 다뤄/ 낙타의 나른한 색과 그 살갗을 닮은 흰 모래를 남긴다/ 모자를 벗고 이목구비 선을 따라 흰 천을 감는 이방인/ 움푹 패인 남자의 눈에 긴 속눈썹을 촘촘히 심은 것은/ 올리브나무의 변형된 색이다/ 어제 넘었던 사구(砂丘) 하나 다시 눈 앞에 놓였다/ 일어섰다 엎어지는 양날의 사구는/ 사막에 구전되는 전설의 검은 호수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거기/ 풍화된 色들의 끝에 시간이 잠들어 있다/ 시간은 인간이 체득한 인내와 분노의 내밀함을 가졌다/ 사막의 白色은 그래서/ 나른한 낙타와 이방인의 걸음같은 색이다/ 사막의 색은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에 얹히는데/ 화병(火病)같은 붉은 언어들은/ 초기의 색으로 급진적이다/ 폭탄을 지고 곧잘 뛰어드는 이유다/ 色이 시간의 자해로 무색의 바람을 키우고/ 없던 사막언덕을 세운다고 나는 믿었다/ 그럴 때마다 오래 걸어야 했고 지쳐서 힘이 들었다/ 나무정령을 찾아 전갈의 걸음으로 천강(天江)을 건너는 일/ 눈썹 위에 달을 얹는 일/ 고작해야 별점으로 앞일을 가늠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 모래바람이 赤色으로 회귀할 때마다 두렵고 외로웠다/ 떨어지는 체온을 막으려 양피를 뒤집어쓰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양의 젖을 빨며 잠이 든다/ 문명이란 여기서 대체 뭐란 말인가/ 전설의 호수가 죽음의 모태라도/ 낙타의 혹을 베는 무모함이라 해도/ 부재의 허상을 찾아 헤매 도는 사막의 바람/ 밀려서 불고 빈 곳을 채우느라 부니까 또 분다/ 우리는 모두 풍화되고 있다/ 혁명보다 더 붉게 사랑하고 하얗게 지는 시간의 끝엔/ 너도, 나도, 나무정령이 머무는 나른한 색, 흰 모래가 된다/ 도무지 바쁠 일 없는 한 무리의 대상을 실어 나르는/ 나른한 색, 사막의 낙타가 된다//

수도꼭지를 갈며... / 고경숙
반짝이는 몸통을 힘껏 조였다/ 그래도 자꾸 주절대는 수돗물/ 남자는 과격하게 테프런 테이프로 둘둘둘둘 말고/ 주등이를 꽈악 조였다/ 입-----------닥쳐.//

킬힐 Kill Heel* / 고경숙
구두굽은 대지의 통점을 자극한다/ 기진한 발바닥으로/ 쿡쿡 찌르고 다니던 그날은/ 봉두난발 핏발 선 대지를 갈아엎고/ 한 웅큼 씨앗이라도 뿌려야 할지/ 세상을 타진하는 의식이었다// 갇혀 있는 것이 어디 두 발 뿐인가 /사발통문에 이름 올린 하늘도 땅도 이미 한통속/ 입 꾹 다문 채 비를 뿌리지 않고/ 익사를 꿈꾸는 논바닥은 신기루를 보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꾸 미끄러지는 세상 지탱하느라/ 온 발가락에 청춘을 건다/ 아프지 마라 진화중이다/ 뼈가 변형되고 발목이 접혀지는 것/ 우러르고 싶은 욕망보단 험한 세상/ 널부러진 똥무더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굳이 더 진술하라면/ 언젠간 대지의 혈관을 찾아 피를 터뜨릴/ 12센티 흉기를 소지하고 다닐 요량이라는 것/ 어쩌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나동그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그땐 우리의 내통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두자//
* 킬힐: 굽이 12센티 이상되는 여자의 하이힐

김포매립지 가는 길 / 고경숙
찌그러진 곳 펴 줌/ 산지직송 배 한 빡스 만원/ 떼인 돈 받아드림니다// 마지막 인생들이 절규하는 그 길을/ 콩벌레처럼 잔뜩 웅크린 자동차들이/ 버려진 꿈을 묻으러 달린다// 멀리/ 인천공항 전용도로가 노을에 물려있다.//

흑인 여인의 초상화 / 고경숙

자 새 옷을 갈아입고 저기 앉아// 여자는 하얗게 빨아 다려놓은 옷을 건네받았다 유모는 손수 터번을 둘러주었다 서너 번 꼬아 찔러 넣은 매듭 아래로 나풀나풀 바람이 흘러내렸다 카리브해를 닮은 실크 드레스가 걸쳐진 의자를 어제 공들여 닦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앉으리라 생각 못했던 듯, 망설이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시월이 다가와 앉혔다// 멀리서 까딱이는 붓끝이 드레스 매듭을 풀었다 금지된 구역, 검은 어깨는 노예선을 타던 바다처럼 흔들렸다 다시 붓끝이 말했다 드레스를 가슴 아래로 내려 봐 시간이 걸렸다 붓끝은 유모를 바라봤다 유모는 여자의 검은 유방을 한 움큼 쥐어 꺼내놨다 여자는 왼 팔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드레스를 잡았다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볼때기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붓끝은 여자의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과 겨드랑이에 꽉 붙인 팔과 유방을 오래오래 보았다// 뽀얗게 덧칠한 젖가슴쯤에서 계절이 멈췄다// 여자의 손에 은브로우치가 들려졌다//
* 브누아 마리 기욤의 그림

회귀점을 돌아 나는 이제 귀가한다 / 고경숙
상류에서 거칠게 내려오던 강물은/ 나이를 먹으면서 힘보다는 순리를 택한다/ 물가에 서면/ 금방이라도 떠내려갈 것처럼 수초들이 딸려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해/ 험난한 밤을 짐작케 했지만/ 밀려들어 간 어둠은 종적을 감추고/ 팡클 가득 단 여배우의 이브닝드레스처럼/ 강물이 차르르 발치께서 자꾸만 옷을 벗는다/ 태양 앞에 화려해지는 저 도도함/ 강물은 밤을 생각하지 않기에 거칠게 흐르지 않는 걸까/ 중년이 아름다운 것은 파문이 아니라 그치지 않는 저 물길 때문이라고/ 나뭇잎 두어 장 허황하게 떠난다// 돌아보면 수평으로 누운 것들은 사나웁지 않았다/ 퍼붓는 빗줄기 속을 미치도록 뛰어다닌 내게 회귀점이 없었던 게지/ 턱 치켜들고 꼿꼿이 서 있는 구두코에 강물이 와닿는다/ 나는 이제 닦지 않으리라/ 먼 산 노을빛이 능선의 윤곽만을 보여줄 때쯤/ 서둘러 돌아올 차편을 걱정하고/ 강물은 완벽하게 전라全裸의 모습이 되었지만/ 썩은 문 박차고 몰려나온 어둠 덕분에/ 더 이상 천박해지진 않았다.//

오래된 과수원 / 고경숙
물 묻은 대지가 빛을 조절해 반짝이는 모습을/ 나뭇가지는 턱을 괴고 바라본다/ 사선의 구도로 엄숙한 교회 탑 하나 들어와/ 원색의 애달픔 더할 때/ 한가로운 시간/ 자꾸 발을 헛디디고/ 보낼 사람 다 보내고 홀로 남은 과수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을 꾼다// 낡은 집은 배경이 부드러워/ 언덕을 흔쾌히 감싸고/ 치매 걸린 노인이 거니는/ 고흐의 산책길에 가끔 바람이 놀러올 때/ 김 오르는 퇴비 더미 헤집어 분뇨 몇 방울 더해놓고/ 닭 몇 마리 구구구 달아나는,/ 부스스 꿈에서 깬 나무들/ 메마른 유두에도/ 하얗게 수줍은 꽃들이 터지는...//

미당문학관엔 바람이 산다 / 고경숙
바다를 막고 섰는 질마재 넘어/ 마른 흙먼지가 장기판을 엎어버리는 선운리/ 넓지 않은 시인의 집앞에서 촌로들/ 묻지도 않은 얘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자리였다느니/ 답사차량 땜에 길을 넓혀야 한다느니/ 그들의 변은 끝이 없다가 결국/ 미당의 시 얘기를 꺼내자 뚝 그쳤다// 유모말 안 듣는 아이 같았다 미당은,/ 1층 전시실에서 2층으로, 옥탑 관망대로/ 답사객을 따라다니다가 휘-익 바람불면/ 풍장을 치른 것도 아닌데 금세 무형이 되곤 했다/ 바람은 아직도 노시인을 못다 키웠다/ 회벽에 흩어져있는 오래된 시니피앙/ 나는 종일토록 흔적을 찾았다/ 떠나기 전, 세계의 산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더니/ 노시인은 이미 고독한 산행을 시작한 것일까// 땅거미 몰려와 바다와 벽촌의 경계를 허물 무렵/ 옥탑 관망대에 올라선 사람이 보였다/ 폐교 개조 후 흰 칠을 한 그 집, 히말라야 정상에/ 죽어서도 오르고 싶었던 바람이 불었다.//

산사(山寺)에서 / 고경숙
사천왕상이 죄 많은 중생들/ 머리통을 짓누르며 팔다리를 비트는 동안/ 법당 앞 불두화 하얗게 머리 조아렸네/ 삼라만상의 진리가 경전 속에서/ 계곡물로 흘러내리네/ 잔망스런 바람이 산의 허리를 돌아/ 풍경(風磬)에 머물고 어느 것 하나/ 불가(佛家)에 들지 않은 것이 없네/ 발라먹은 생선가시처럼/ 편애 당했던 삶의 여백들/ 이곳에서 시간의 흔적은 풀어져 없어지고/ 업보(業報)는 스스로 소멸하네/ 부처의 눈동자는 정면을 보지 않거늘/ 어지러움에 외면하고 싶다면/ 이 모든 것 차라리 눈을 감게나!/ 자네 먼저 해독(解讀)되게나!/ 청맹과니어도 좋겠네/ 하산하는 명아주 지팡이 소리가/ 점점이 피안(彼岸)일세.//

나는 진화한다 / 고경숙
자작나무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아침이면 나무줄기에 힘차게 등을 치며/ 근육을 다지던 해는, 이 저녁/ 女性으로 지고 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소진한 몸 노을로 풀어져/ 붉은 이불호청 위에 나뭇잎 몇 장/ 길을 따라 눕는다/ 저 해는 어제 졌던 해의 再起가 아니다/ 男性으로 태어나 女性으로 소멸하는/ 하룻날 兩性의 삶이다/ 고될 때마다 性을 맞바꾸며 진화했던/ 내 어버이의 아름다운 혼돈이다// 자작나무 사이로 해가 지는 저녁이면/ 내 턱에 까칠한 수염이 돋는다/ 손마디 불뚝거리며 근육이 뭉친다/ 지금은 내 女性에 작별을 고할 때,/ 진화를 꿈꾸며 떠나는 낯익은 노변에/ 하얗게 화관을 쓴 메밀밭 여린 밑동들/ 비둘기의 빨간 발로 종종대며 서있다/ 경계를 뛰어넘은 진화가 완벽하게 질서를 이루는 곳,//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 이불호청 같은 노을 한 자락 끌어당긴다.//

불온한 풍경 / 고경숙
불우했던 저녁은/ 하늘에 핏빛 노을을 불 지르고 달아났다/ 기진맥진한 산들이 사지를 늘어뜨리고/ 바다로 빠진다/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은/ 풍경의 외곽을 좁혀왔다/ 짠내 나는 바람이 그물코를 빠져나와/ 내걸린 망둥어 몸통을 관통하는 소리/ 숲을 치고, 문짝을 치고, 들판을 향한다/ 종일 빛에 우호적이던 작물들은/ 흰 비닐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저항했다/ 사방은 이제 명도 제로/ 문명은 없다/ 밤이 길까?/ 가끔 갯벌 밖으로 능쟁이 몇 마리/ 정찰 나왔다 사라진다/ 지리멸렬한 해안선을 따라 술 취한 파도/ 한소리또하고한소리자꾸또해도/ 휘청이는 것 바다뿐이 아니어서/ 속 깊은 갯바위, 밤새 그 주사(酒邪) 받으며/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어제가 내일에게 / 고경숙
흔들리는 별빛을 관념으로 읽고/ 침묵이 허공을 다스리는 시간,/ 문장들 몇은 수몰되고/ 몇몇은 봄을 맞으러 나갔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아니, 환한 그대를 지키기 위해/ 허기진 매의 눈으로/ 도도한 강줄기 따라 활공滑空하는/ 내 언어는/ 새벽처럼 차고 장미처럼 뜨겁다// 수없이 물에 적고 지워버린/ 어제가, 그리고 오늘이/ 궤적軌跡으로 문득 어느 별에 닿아/ 누군가 그 별빛, 작은 의미로 읽어준다면// 나/ 지친 사냥꾼의/ 선명한 표적이 되어도 좋으리./ 천만년 잠을 자는 화석이 되어도 좋으리.// 그림자 거두어 함께 걷는 아침/ 그대도... 거기 있으라!//
* 부천타임즈 창간 8주년기념 축시

바지를 널다 / 고경숙
빨랫줄에 하반신을 건 그가/ 바람을 입는다/ 두 갈래 길 발을 찾아 끼우며/ 생의 분기점마다 선택에 익숙했던,/ 12인치 통로 속으로 남자가 걸었던/ 길의 끝에 동그란 하늘이 있다/ 철없이 벚꽃 아래 빙글대던/ 뻑뻑한 자동차 유리창에 꽃비 내리던 날/ 와이퍼로 거칠게 헤치고 가던 그의 계절에/ 봄이 오긴 한 걸까/ 바지 속 좁은 세상을 따라/ 발을 끼우고 힘차게 일어서면/ 발밑은 항상 차가운 땅,/ 돌려 입어도 과히 잘못될 것 없는/ 통치마처럼, 가끔은/ 얼마나 펄럭이고 싶을까/ 어제 내내/ 땀으로 범벅된 남자가/ 솔기마다 뭉쳐 아직도 젖어있다.//

가을, 허수아비 / 고경숙
느티나무 그늘/ 두다 만 장기판 앞에 받쳐둔/ 집배원의 자전거가/ 낮술 취한 평상 위에/ 고지서 몇 장 던진다// 입 벌린 가방이 덜렁,/ 시커먼 문짝 열어젖히고/ 들판 기다리는 정미소를 지나/ 어깻죽지에 막대 꿰찬 허수아비도 지나/ 바람이 마을을 지나오는 동안,/ 만장처럼 소맷자락 흔들어도/ 기별 없는 것들은 있어// 온몸에 덧기운 사연/ 지평선 끝까지/ 깨금발로 뛰어가 전하는/ 외발의 허수아비/ 해마다 무게중심 잃고/ 자꾸 기우는 어깨위로/ 참새떼 업신여기는 서러운 가을날,// 페달을 힘겹게 저으며/ 길 끝으로 사라지는/ 가을은/ 정녕 안녕하신가//

미궁에 빠지다 / 고경숙
악마가 뜯어낸 창살사이로/ 반 년치 달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당신이 만지작거리던 모자 끝에/ 깃털하나를 꽂기 위해 죽었던 새는/ 목통을 펄떡이며 바다를 건너왔다/ 타로점을 보던 인도여자가/ 친친 독사를 감고 손을 뻗는 이곳은/ 교교한 달빛이 점거한 차가운 밀실/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것 같은/ 안개 속 기억은 꿈의 예감과 일치해서이다/ 여명까지 불과 얼마를 남겨두고/ 창백해지는 당신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이지러졌다 피어나고/ 불같이 타다 사그라드는/ 달의 칼날에 베인 수많은 팔목에서/ 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진다/ 탄탄한 밤을 건너오며 수없이 죽고/ 수없이 되살아날/ 피보다 진한 바람의 체액// 아무도 거두어 갈 수 없는 여기,/ 지상에 존재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대와 내가 미궁에 빠질 수 있는/ 영원한 은닉처.//

첩실기(妾室記) / 고경숙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동거가 시작됐다/ 음습한 곳에 난 종기처럼/ 주인영감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만/ 그녀를 풀어보았다/ 침목처럼 누워 바라보는 별빛이/ 흔들흔들 화물차 몇 량을 보내고/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태어났다/ 조용히 숨죽이는 호흡 아래/ 철로에서 몇 차례 넋을 잃었다/ 바람에 동승하고 싶었다/ 술지게미 같은 안채의 내방이/ 그 집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하게 선 긋고 가는 밤이면/ 감나무 이파리도 후드득거리며/ 등짝을 쳤다/ 서러운 너머의 것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분 젖통을 찾아 그녀를 풀던 새벽녘,/ 영감 대신 화물차 한 량 온몸으로 받으며/ 침목처럼 그녀가 거기 누워 있었다//

한국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 / 고경숙
1. 낮잠에서 깬 아이//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기다리지만,/ 이 기다림의 끝이 어딘지 짐작할 수 없다// 내 울음을 받아줄 준비는 되었는지,/ 아님 호되게 볼기짝을 후려칠 것인지,/ 그렇담 이 울음을 어디서 끝내야 좋을지,/ 끝낼 계기는 무엇으로 잡을 건지/ 잠 덜 깬 의식은 늘 아지랑이 속이다//
2. 왕따천국// 계보를 따져보면 모두 같은 할애비의 자식이거늘/ 그들이 둘러친 담장은 생각보다 높다// 백화점 세일매장 맨 뒷줄에서/ 몇십만 원씩 하는 스카프를 둘러보는/ 여자들의 향수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나를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아직 모른다//
3. 어머니의 노래//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면 어머니는/ 늘 해조곡을 부르셨다/ 기분이 좋은 거다/ 기분이 좋다는 의미는/ 아이들이 등록금 독촉을 받고 되돌아오지 않고,/ 쌀 서너 말이 자루에서 배부른 잠을 자고,/ 연탄 100장이 광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내 노래가 배고프지 않고/ 내 시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도 어머니처럼 전사이고 싶다// 목련이 뚝뚝 떨어진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저 몇 장의 꽃잎보다 적다/ 가난한 내 시가 물커지기 시작하는/ 꽃잎 위에 여전히 버티고 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꽃을 뭉개며 지나간다//

도장 / 고경숙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고 새로 도장 파던 날/ 하체가 고정된 남자의 손놀림을 들여다본다/ 도장 속에 하얀 길이 있다/ 내 이름 석 자 주변에 홈 파인 세월 뒤로/ 길은 허물어졌다 다시 솟고/ 둥그러졌다 날 서있다/ 잎새 다 떨구고/ 작은 재목으로 내려앉기까지/ 나무의 긴 생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을까/ 허공으로 후-욱 도장밥 불어버리면/ 구름으로 바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눈물 같은 슬픔들아,/ 나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 남자가 마지막 확인시켜준 백지에 찍혀있는/ 수많은 빨간 이름들, 지금쯤/ 나처럼 스산한 이 거리를 거닐고 있겠지만/ 결국 돌고 돌아도 동그란 원 속인 세상/ 자랑으로 혹은 구속으로/ 함께 가야할 많은 날들/ 주머니 속에서 너를 익히며/ 한참을 걷다 뒤돌아보면/ 도장포 안의 굽은 아저씨 모습,/ 이 거리가 찍어놓은 도장처럼 노을 속에 선명하다//

모란 / 고경숙
한옥 대문을 열면/ 어머니는 툇마루 근처에서// 빨래를 개키시거나/ 수돗가에서 채소를 씻곤 했었다// 돌아앉은 빨간 블라우스 자락이/ 물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바람떡 / 고경숙
아무나 주물렀다 놓고 가도/ 앞가슴 한껏 부풀리고/ 버선코 내려다보는/ 저 속 없는 년//

해묘(海猫) / 고경숙
메꽃 숨죽은 바닷가에서/ 한낮을 보내는 일은 비가입니다/ 모래 한 움큼 들어 배 떠난 수평선을 틀어막아도/ 금세 짠물이 고이는 하루,/ 함석쪼가리 위를 요란스럽게 지나가며/ 제풀에 놀랍니다/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부러진 낚싯대/ 땅을 딛고 일어설 것처럼 풍경을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허술한 블록담장에 단출하게 널어놓은 미역 줄기,/ 빨래집게를 물고 있는 박대 몇 마리에게/ 난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허공에/ 피를 말리고 있을까요/ 섬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저항없이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이곳에선 또 보자는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비릿한 것들 땅바닥에 볼 대고 헐떡이던,/ 그 한쪽 눈으로 마지막 하늘을 응시하던 것처럼/ 나도 이제 눈 지그시 감습니다/ 무시로 세찬 바람 불면 메꽃 하염없이 흔들려/ 마을 구판장에 주전부리 채워지지 못하고/ 먼 곳에서부터 온다던 민박 손님도/ 발이 묶입니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잠자다 돌아누웠다/ 고개 들었다가 다시 파묻으며/ 섬도 나처럼 여전히 허탕입니다//

도리뱅뱅* / 고경숙
1// ​햇볕 두 마지기를 마저 팔았다는 통보에/ 흐느끼는 어깨를 살짝 잡아주었다/ 바람은 울게 내버려두라며/ 유유자적 얼음을 지쳤다/ 남의 일이라고 저러는 건 아니지/ 강변에서 물기없는 수초들이 고개를 저었다// 도리뱅뱅 도리도리 뱅뱅// 쩡쩡 얼음의 두께가 두꺼워지면/ 정말로 안전할까?/ 어둠은 강의 유전자 편집을 묵인하고/ 식솔들은 보이지 않는 별을 세며 잠들었다/ 거사시간은 동틀 무렵이야/ 끌로 구멍 깨는 소리가 들리면 필사적으로,//
2// 날자/ 날자/ 날자/ 날자// 손바닥만한 구멍에 얼굴을 디민 눈,눈//​
3// 히히 주모자를 색출하지는 못할 거야/ 말갛게 속이 비었다고 속까지 없을까/ 손에 손을 잡고 사발통문 드러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이란,// 쩡쩡 하늘의 두께도 두꺼워지고 있다/ 저긴 정말정말 안전할까?/ 손 놓치지 마/ 또 다른 강물 속으로 이제 간다/ 빨갛게 치장을 하고/ 춤을 춘다,빙어// 도리뱅뱅 도리도리 뱅뱅/ 도리도리 뱅뱅 도리뱅뱅//
* 도리뱅뱅: 사발통문처럼 빙 둘러놓고 튀겨 양념하는 빙어요리

시뮬레이션 게임 / 고경숙
6인 병실 구석침대에 사내가 누워있는 걸 알 수 없게/ TV 수상기를 매단다 의사의 처방도 투약도/ 간호사들이 체온을 재러오는 일도 없앤다/ 육신 멀쩡한 보호자들이 얼마 후 있을 대선후보들의 토론을 보며/ 지방색을 드러내기에, 어긋난 대화를 서둘러 닫는다// 흰 벽쪽을 보게 눕힌다 옆 침대로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메트로놈 삼아/ 손장단을 치는 사내, 가끔 벽에 암호처럼 악보 몇 줄 그려준다/ 착란의 흔적이라 하기엔 너무 선명하다겠지? 직립의 음표들,/ 음역이 넘나드는 창문 너머 단풍의 진한 각혈을 손질한다/ 신께 무상으로 증여받은 유전자들을 사내 날마다 소포장해 버릴 때마다/ 누구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도 입을 다문다/ 시한을 정한다는 것은 병력의 시비를 따지고들 때 얘기라/ 이 병동에선 반칙이다/ 준엄한 의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 사내의 혈색이 너무 비극적이라 고치려다 만다// 병실전화가 울린다 때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사내의 침대를 비상엘리베이터로 깊숙이 내려보낸다/ 바람을, 어둠을 뒤따르게 한다//

미궁에 빠지다 / 고경숙
악마가 뜯어낸 창살사이로/ 반 년치 달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당신이 만지작거리던 모자 끝에/ 깃털하나를 꽂기 위해 죽었던 새는/ 목통을 펄떡이며 바다를 건너왔다// 타로점을 보던 인도여자가/ 친친 독사를 감고 손을 뻗는 이곳은/ 교교한 달빛이 점거한 차가운 밀실/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것 같은/안개 속 기억은 꿈의 예감과 일치해서이다// 여명까지 불과 얼마를 남겨두고/ 창백해지는 당신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이지러졌다 피어나고/ 불같이 타다 사그라드는/ 달의 칼날에 베인 수많은 팔목에서/ 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진다// 탄탄한 밤을 건너오며 수없이 죽고/ 수없이 되살아날/ 피보다 진한 바람의 체액// 아무도 거두어 갈 수 없는 여기,/ 지상에 존재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대와 내가 미궁에 빠질 수 있는/ 영원한 은닉처.//

휴전선 두루미 / 고경숙
시베리아에 유배된/ 내 조상에 대해 묻지 말라// 여기는/ 천적의 눈을 피해/ 필사적인 짝짓기로 실체를 확인하는/ 아나키스트들만이 사는/ 황무지/ 지뢰밭에 발 담그고도/ 나는 글을 몰라 철조망만 흔든다/ 잿빛 긴 목은/ 곡사포처럼 태양을 조준한 채// 휴면하던 풀들이 일제히 사열을 시작하고/ 죽음처럼 숨죽인 비열한 독수리떼/ 몇 알의 곡기로 목구멍을 어른다/ 숨통을 조이지 마라/ 절대 강자는 없다/ 수십령 생애동안/ 오직/ 사랑했던 것들만 기억하련다/ 북을 두드려라 두드려/ 마지막 힘을 다해/ 부리로 철조망을 갉으며/ 진격이다/ 하늘이 원무한다// 여기는/ 고립된 육지속의 섬/ 농약먹고 박제되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두루미 한 마리/ 자동소총에 머리를 기대고/ 신새벽/ 자유를 지킨다.//

2020년 1월 휴전선 비무장지역(DMZ)의 접경지역인 강원도 철원군 철원평야에 두루미 한 쌍이 먹이를 찾고 있다. 하늘엔 다른 두루미 무리가 날고 있다. 한겨레21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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