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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추인 시인

부흐고비 2022. 2. 11. 07:30

김추인 시인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오브제를 사랑한』, 『프렌치키스의 암호』 등과 공저 여행집 『다시 사막에서의 열흘』이 있다. 2016년 제9회 한국예술상, 2010년 만해 ‘님‘문학상작품상, 2016년 한국의 예술상, 2017년 제8회 질마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래시계 / 김추인
한 생이 다른 생을 밀고 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면서 거기 착지할 바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밀리어 끝까지 가 보다 어느 지점에선가는 뛰어 내려야 하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 거꾸로 뒤집히면서 비로소/ 다시 뛰어내릴 수 있는 힘이 축적된다는 거/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의 생이 앞의 생을/ 밀어 주기도 받쳐 주기도 한다는 거// 한 알 한 알 그 지점에 닿기까지 닿아서 낙마하기까지 바닥에 손 짚고서야 가슴 저리게 오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눈부신 나중이 있다고 믿는 일/ 착각의 힘이여 신기루여/ 그대들 없이 무슨 힘으로 날이면 날마다 물구나무설 수 있으리// 하루 스물네 번씩이나 몇십 몇백 번씩이나 뒤집히면서 깨지면서 찰나 또 찰나를 제 생의 푸른 무늬 짜 나가는 것은/ 죽어서도 그리울 개똥밭에서/ 쳇바퀴 돌며 뒤집히고 넘어지는 우리 모래의 시간에도 기다릴 것이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한 번 손잡은 일 없이도/ 함께 세상 끝까지 가 보다 뛰어내리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

모래의 시학(詩學) / 김추인
꽃이 머금은 시를 받아 적네/ 유리새 유리알 노래를/ 시간의 옷 속 켜켜 눌러둔/ 바위의 시/ 억년 바위의 침묵을/ 나, 꺼내어 베껴 쓰고 있네/ 가을비 허공을 그어대며// 나 좀 봐 나 좀 봐봐// 숨길 듯 숨길 듯 슬쩍 내보이는/ 연하게 빗금 치고 있는 비의 발자국을/ 사물의 모서리들을 스캔하네/ 저기 저/ 절로 고운 것들의 말씀을/ 모래알들의 귀엣말을//

과녁 / 김추인
밭고랑 독새풀 하늘 쪽으로 깃을 풀고 있습니다// 허공의 거기를 과녁으로 아는지/ 두렁밭 콩대도 엉겅퀴도 바라보는 곳입니다// 저 빈곳을 향하여 무모하게 쏘는 화살촉들 눈물이 묻어 눈부시고 하늘이 되지 못한 구름송이들 늦은 노을에 물이 듭니다// 강물도 물들다가 저물다가 머리 풀고 다시 하늘로 오르는 그곳입니다/ 땅에 발 딛고 선 것들은 다 과녁 하나씩 붙들고 꿈을 꾸는 듯합니다// 공이 골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신의 화필 / 김추인
우리가 산밭에 당도했을 때/ 어른께서는 첫새벽부터/ 퍼들퍼들 감자밭을 펼쳐 놓으셨다/ 흰 점을 꼼꼼히 찍고 계셨다/ 감자꽃들 희끗희끗 피어나 등성이 쪽으로 오르는데/ 그 너머 원경이 뭉개져 있다/ 밤새 휑한 아래 들녘/ 수억, 시계풀꽃들을 저리 또렷또렷 찍으시느라/ 지쳐 기진하신 게다/ 잠이 부족하셨던 게다/ 멀리 가로수 길도 부연 안개발로 뭉개 놓으셨다/ 그리다 겨우면 뭉개기 기법으로/ 여백 처리를 해 버린 내 그림 같다//

지독한 연애 / 김추인
새장 속에 그가 있다 노획물이다/ 구천을 날고 있는 봉황인 줄 알았다/ 부리 끝도 나래 끝도 곁 주지 않던 놈/ 뒤꿈치 들고 치올려 봐도/ 턱이 닿지 않던 높은 담장 너머/ 깃 치는 소리 풍문만 같았는데// 웬일로 조롱 속에 그가 있다/ 물통 속을 흐르는 구름 한 장/ 바람 두어 잎 걸린 새장에 위리안치 된/ 상형의 문장/ 그의 알몸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거시기도 덜렁 내놓고/ 난장의 세상을 내다보는지/ 바람의 방언을 뱉고 있는지/ 혼자 울 때처럼 편안해져/ 문 열렸는데도/ 나올 생각 않고 쭈그려 앉아 있다// 조롱 밖에는 내가 있고/ 밥도 없는 밥도 모르는 밥만 축내는 우리는/ 참 닮았다 싶은데// 지난한 전투야 계속되겠지만/ 이제 그는 내 밥이다/ 그를 푹푹 떠먹을 수 있을까 만만찮은 놈,/ 날아올라라 휠 휠/ 구름의 문장이여 내 다시 포박해 오도록//

개당귀 ㅡ사라지는 미래 / 김추인
웃지 마라/ 아무 데나 근본을 들이대는 족속이 아니다/ 오지 중에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쯤이 아니면/ 문패를 걸지 않는다// 뭐라-, 날 두고 개당귀라 했느냐/ 당귀와 비스무리해서라 했느냐/ 이름이야 입성하나 더 걸치는 것/ 내 이명은 지리광활,/ 좀 어려우냐/ 새삼 경이 같은 것 찾으러 들지 마라/ 말순이나 말코플로나/ 말순이나 말똥가리나/ 말순이나 말오줌꽃이나 개오줌풀이나/ 조물주 보시기에 모두 같은 각기 다른/ 아기 부처들/ 당신의 열 손가락이다/ 개당귀라 함부로 골라내 버리던 것을/ 참당귀보다 항암 효능 월등하다는 발표 업고/ 천정부지 귀한 몸 취급이냐/ 초부들 날 찾아 지리산을 허대느냐// 몸 말려 너희 병질 치유에/ 쓰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내 생이 바뀌겠느냐/ 내 본시 시푸른 족속, 풀일 뿐이니/ 그 입 다물라//

문이 있는 삽화 / 김추인
문 따는 일로 생애가 저물었습니다/ 노을도 아름답군요/ 맨 처음 알은 어리둥절/ 없는 발밑에도 하늘이 있고/ 어떻게 굴러도 길이 났습니다// 돌아보면 길은 시작만일 뿐/ 문과 계단의 연속이었지요/ 열어 열어도 앞을 막고 서던 문들/ 얼마나 숱한 문을 지나왔는지/ 얼마나 힘겹게 층층 계단 올랐는지// 꽃들의 길도 이리 아득할까요// 다 기억하지 못하는 다행 속에 길들은 잎맥처럼 가지런한 적이 없고 돌기들은 돌부리마냥 걷어찼습니다 계단들의 패대기치는 심술로 자주 시작점에서 다시 기어올라야 했던 유목의 길// 얼마 남지 않았을 문들은 생각합니다 허약과 무기력의 시간들이 예약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제의 길 가운데 신神의 사막은 꽃길이었습니다 몇 구비 구릉들 지나 모래 폭풍 속에 문을 찾는 일도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일도 매혹// 늘 신기루는 지평선 쪽으로 문을 가리켰지요/ 세상에 없는 문을//

폭포 / 김추인
물의 변주를 엿본 적 있네/ 제 형상을 풀어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물의 변환을/ 물길 이야기를 따라간 적 있네// 어느 가난한 처마 밑 이야기며 들창 아래서 엿들은 사랑의/ 구음까지 풍문처럼 실어 보내고 싶어/ 앞개울은 저리 도란도란거리나 본데 수런수런 합치나 본데// 몸을 바꾸는 물의 변주를 아네/ 개울이다가 개천이다가 봇도랑 너머서부터/ 제 깊이를 지우고/ 무논이든 묵정밭이든 목숨 길을 틔우다/ 그만 남의 목숨이 되기도 한다는 걸// 세상의 변방을 오래 쓰다듬어본 자의 결단일까// 에둘러 온 거리도 덧쌓은 시간도 일시 멈춘/ 강물의 벼랑 끝 일 초/ 극한의 긴장을 툭- 끊고 뛰어내리는 저기 저 눈부신 낙하를 봐/ 물이 물을 받으며/ 몸이 몸을 받으며// 허공중에 비명碑銘처럼 써 내리는 수직의 문장 한쪽// 말을 버린 사람의 눈이 그 푸른 벽을 읽고 있네/ 행의 마지막을 치장하며 튀어오르는 포말들 물비늘들 은어의 몸짓으로 읽히네만/ 무지개 뜨는 생의 한때는 누구에게도 잠깐이어서/ 이윽고 바다에 이르거나/ 뉘 발가락을 적시거나//

속수무책입니다 / 김추인
봄에는 모두 날아오르고 싶은 게다/ 세상 모든 풀잎들, 숲/ 숯덩이 빛으로 잠겼던 내 생각의 갈기조차/ 죄다 겨드랑이 벌리고/ 꽁지를 치키고 산불처럼 후둑후둑/ 날아오르는 시늉을 한다/ 젊은 신갈나무가 제 팔뚝마다 푸른 문신을 넣고/ 취한 짐승이 어찔 황사길을 넘어간다 비명 같은 사월아/ 두어 번은 더 깜깜 그믐밤을 지새어야/ 저 불의 추종자들/ 날마다 뜨는 일상의 여름으로 내려앉으리/ 당분간은 출렁이는 날갯죽지가 병이다/ 그냥 타거라 내 사랑//

삶의 가운데 / 김추인
그런 날이 있다./ 사는 일이 다/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 추운 때가 있다.// 신발의 흙을 턴다던가/ 발을 한번 굴러본다던가/ 하는 일이 다 헛일만 같아지고// 내가 하얀 백지로 사위어/ 몇 번인지 왔을 언덕을 또 떠나며/ 두고 온 이승처럼 돌아보는 때가 있다.// 살아서도 죽은 것만 같은/ 그런 때가 있다./ 그렇게 사무치도록/ 외진 혼자일 때가 있다.//

탁란 ㅡ행성의 아이들 11 / 김추인
뻐꾹 꾹 뻐꾹/ 어미가 제 이름을 부르고 있다/ 눈도 안 뜬 제 새끼에게 이름을 가르치고 있다// 꾸욱 꾹 뻐꾹/ 기억하거라 뻐꾸기다/ 작고 물색모를 뱁새 , 오목눈이가 아니다/ 그래도 오목눈이의 국어로 보채거라 뻐꾹// 털도 안 난 것이/ 불룩한 눈두덩이로 무얼 짚어보기는 보는 건지/ 한사코 기를 쓴다/ 한 알 한 알 어깨밀이로 오목눈이의 알을 업어/ 둥지 아래로 밀쳐낸다// 옳지 옳지 뻐꾹/ 그것이 세상이니라 뻐꾹/ 영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애타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온산을 흔들고 있다//

난 빨래예요 / 김추인

난 빨래예요/ 집게로 양어깨 꼭 집히운 채/ 납작한 표정으로/ 두 팔 번쩍 들고 널린/ 속옷 같은 빨래예요// 나는 깃발처럼 펄럭일 수는 있어요/ 뿌리도 없이 흔들리며/ 너펄너펄 춤을 출 수는 있어요/ 그을린 하늘, 하얗게 눈 흘길 수도 있어요// 바작이는 가슴, 가면 쓴 얼굴로/ 최후의 눈물까지 버려야 해요/ 허공을 안고 병신춤이나 추는/ 펄럭여도 펄럭여도/ 깃발이 되지 못하는 와이셔츠예요// 난 빨래예요/ 두 팔 번쩍 들고/ 별 수 없이 그을리면서 마르는/ 도시의 얼굴이어요//

냉동고에서 꿈꾸다 / 김추인
나는 새인가/ 새일 것이다/ 깃털이 있으니 날개가 있으니/ 뼛속이 숭숭 뚫렸으니// 새가 아닐 것이다/ 저 창공을 날아본 적 없으니/ 숲에서 횟대에서/ 저들처럼 봄 짝을 불렀던 고음, 기억에 없으니/ 내 새끼들 굶길새라/ 세상의 골목 뒤지며 낟알을 줍기도/ 생고기 한 칼 물어오기도 하지만 그뿐// 열심껏 살을 올리고/ 수놈 없이도 꿈인지 알인지를 낳고/ 그러고도 담 넘지 못하는 비굴을/ 물찌똥으로 부정란 위 얼룩덜룩 쌓기나 할 뿐// 닭모가지도 발모가지도/ 툭툭 쳐내어지면 잠/ 무용의 깃털도 버리고 내장도 똥집도 비우고/ 냉동실에 꿰어 비몽사몽 꿈을 꾼다// 저 울란바트로 초원을 내달리는 닭/ 햇발을 가르고 훨훨 날아가는 닭//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 김추인
무희들이 돌아올 시각이다/ 이정표 하나/ 안전표지 한 조각 없이/ 무사귀환 할 수 있을까/ 하늘빛도 물빛도/ 파릇한 옹알이 눈치 챘지만/ 자고 깨면 새로 당도한 풋것들의 북적거림에/ 등달아 마음이 뜬다/ 취재라도 하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봄의 경계를 쑤셔보지만/ 번번이 그들 착지시점을 놓친다.// 푸른 드레스 밑 흰 맨발이 보고 싶다/ 한밤중 세상의 잠 속을 빠져나가/ 가만가만 서로를 부르는 소리 듣고 싶다/ 오늘밤 눈꺼풀 아래 초막을 치고 엿보면/ 푸른 족속들 흰 발꿈치가 보이지 않을까/ 춤추는 토슈즈 얼핏 드러나지 않을까// 발치고 울타리 치고/ 제 살비듬 하나도 들키고 싶지 않던 여자가/ 웬일로 웬일로/ 철 이른 뜰 앞에서/ 스륵 치맛살을 내린다/ 꽃무덤 둘, 라일락 꽃숭어린가 싶은데/ 깜박깜박 커스 비슷한 것이 뜨고 있다/ 내부로 가는 여자의 통로가/ 좀씩 열릴라는지/ 어쩔라는지//

조개의 꿈 / 김추인
갯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묵黙 묵黙 적寂 묵黙//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불러온 업보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조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중의적 말의 유목에 대하여 / 김추인
말들이 하이에나처럼 험악해지는 시절이라했다/ 허물고 덜어내고 되세우는 도시의 굉음 속/ 낮은 목책은 치장일 뿐/ 요즘 와 말이 슬쩍 나갔다 돌아오곤 한다/ 어떤 말은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말이 처음 눈뜨던 광야가 있었다/ 그곳에 가면 내 말이 있을 것이다/ 풀을 뜯고 초원을 달릴 것이다/ 야생의 눈빛으로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믿지 않았지만 휘파람을 불었다/ 거짓말처럼 멀리서 흙먼지를 풀며 달려오는 말발굽소리/ 모래의 길 하나를 끌고 내 말이 돌아오고 있었다/ 세상을 짚어본 눈빛은 깊고 넉넉하리라// 정강이가 튼튼해진 문장, 밀의 관절이 유연해 보인다//

오래된 밑그림 1 ㅡ흑백풍경 / 김추인
상자 속에서 그가 나왔다// 젊은 아버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가만히 그를 당겨/ 입술을 포갰다/ 더운 숨결대신 애잔한 눈시울/ 그래 그래 내 다 안다/ 얘야 이리 온/ 나보다 젊은 아버지가/ 내 흰 머리칼을 뽑아준다/ 양 입가 주름골 쓸어주시며/ 네가 많이 힘드는구나-/ 사각모를 쓴 아버지/ 자꾸 등을 쓸어준다//

무늬석에 묻다 / 김추인
돌 하나 건져내면 물내난다// 물의 멀고 긴 유적,// 억만 소리의 냄새 지질의 빛의 유전자가 보인다// 백만 년 전 강물의 자모음 들린다// 물속의 돌이 궁구하던 해와 해 사이 밤과 밤 사이를 내다보며/ 새의 문양을 천 년에 한뜸씩 중얼중얼 새겼으리라//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받아 온 별의 노래다 단순침전 형상으로/ 치부하지 말라. 새를 가슴에 품은 자만이 아는 일,// 강물 깊은 늑골 밑을 울린 소리들이 쟁이고 쌓여/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또 겨울./ 겨울강의 체온이 체취가 묻고 씻기고 새겨져/ 모천으로 회귀한 저 물비늘 묻힌 돌// 생 비린내 난다// 잿빛 물돌 속에 갇힌 붉은 새 한 마리,/ 너, 뉘 가슴에서 왔니?//

나를 응시하는 눈이 있다 / 김추인
미행 당하는 기미에 휙 돌아본다 없다// 내 안에 나인 듯 아닌 듯 들키는 이/ 바깥과 안쪽/ 현실의 나와 꿈꾸는 나/ 때때마다 다른 면상이/ 물과 기름 같아서/ 때론 샴 쌍동이 같아서/ 훈장님네 반듯한 딸과 바람 타는 딸이 내 안에서 티격태격 툭하면 목을 비틀고 싸우는 둘의 불화 그런 ‘나’들을 한심스레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있고/ 바라보는 ‘나’의 근심에 안스러워 궁구하는 또 하나의 ‘나’라니.../ 이들만이 아니고/ 가끔 허락도 없이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내 안의 ‘나’들/ 슬픔이와 우울이 사랑이와 명랑이 찬찬이와 덜렁이 팔랑이 부산이 묵묵이 탐심이 헐렁이 한심이 투박이 비단이 시치미 뚝뚝이 쪼잔이 대범이 상큼이 그리고 삐죽이와 넉살이, 숨겨둔 딸년들처럼 무시로 나오기도 하는데// 광화문 교차로/ 숱한 내가/ 죽어도 아닌 것이 아닌 내가// 신호등에 동공을 박고 섰던 처녀인 내가 상남자인 내가 깜박 바뀐 파란불이 지상명령이란 듯/ 삽시간에 부딪치며 스치며 흘끔거리며 조잘대며/ 겨울을 벗지 못한 내가 미리 꺼낸 반팔의 내가/ 환절기 기침을 숨기며 총총걸음으로 느릿느릿 팔랑팔랑/ 길을 건너가고 있다 다들 내안에서 때를 엿보던 것들// 너도 나이고 파릇한 너도 완고한 너도 개같은 너도 너도 나다//

푸른 갈기의 말들을 위한 기도 ㅡ호모아르텍스 Homo artex / 김추인
나의 말들은 어디쯤 달려오고 있을까// 뮤즈들은 협곡마다 숨어/ 여린 화성음의 서정으로 노래 하겠지만/ 내 말들이 알아차리기나 할까// 까불까불 덤불속에서 놀다 낯선 야생에 접질린 다리 끌며/ 길 헤매지는 않을까/ 칼리오페*의 그림자 지나치진 않았을까// 이리 오래일 리 없는데 왜지? 왜지?/ 몸 기울여 귀 나발통 같이 열어도 뜬소문 같은 바람소리만 와랑거리고 내 귀에만 들릴 말발굽소리 아직이다// 오라/ 뮤즈의 음표들을 훔쳐오라/ 억년 바위의 침묵을 엿보고/ 빙원이 품은 바이칼 푸른 달빛에 영혼을 씻어/ 백설의 순결로 오라/ 죽어서라도 오라// 내 기다림은/ 신들의 언덕에 선 만년 바람의 성이다/ 아이야 성문은 활짝 열어두거라 진부한 환대는 사양하리라/ 신전에 내리는 어둑살 너머/ 서풍이 말머리성운을 밀어올리고 있지 않느냐/ 저 홀로 광년의 트렉을 돌아올 신신한 나의/ 말씀이여 시詩여/ 푸른 갈기털 휘날리며 오시라//
* 시와 음악을 담당한 뮤즈

머리 검은 ‘빨간피터의 보고서’ / 김추인
언제 내 연두의 청춘 다 내다 팔았을까// 짱짱하던 몸의 얼개들이 무너지고 있다/ 늘어지는 시간표는/ 출렁이는 속도에 워-워-/ 젊은 날의 시퍼런 치기며 오기도/ 쥐뿔/ 푸른 늑대의 하울링 같은 기억 속의 잔상일 뿐/ 지하생활자, 굼벵이의 몇 년은 지축 쪽/ 23.5° 기운/ 순응의 자세임을 알겠다/ 그는 미라 되기 전 우화를 시도할 것이며/ 인간의 불가능을 실현한 족속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보고서에 기록될 것이다/ “알 하나/ 꼬리가진 올챙이로 네 발 짐승으로 두 발로 달리다 세발로 버텨야 한다는 것 자판기에서 한나절 치의 인스탄트 한 끼를 공급받고 다시 달려야 한다는 것/ 간단없는 노동과 교환되는 탁발은 계속된다 해도 삶의 페달 멈춤 없이 밟고 밟는다“는/ 우리들의 보고서// 머리 검은 ‘빨간피터의 고백’*은 계속 될 것이다//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제목’ 차용

이브의 미토콘드리아 / 김추인
‘악마의 문’*이란 동굴이 있었네/ 문 안은 뼈의 여자들/ 내 어머니의 오래된 어미들이네/ 만년, 어미의 미토콘드리아를 살뜰히도 받아든 나는/ 늘 여기에서 저기로 길을 떠났네// 어머니의 머나먼 할미들이 원적지 아프리카를 떠나 기나긴 길을 끌고 북으로 동으로 발자국을 찍었네 딸이 딸을 업고 동토를 떠돌다 뉘는 얼어 죽고 뉘는 살아남아 짐승이나 짐승 같은 이에 맞서 돌망치 소리 텅- 텅 ‘악마의 문’을 파냈을 거네// 내일은 날마다 내일로 흘렀으므로// ‘악마의 문’을 나선 딸들 온유와 온기를 찾아 앵두꽃 피는 남으로 길을 꺾었으리 길 중에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 걸어서 해 뜨는 반도 땅에 말뚝을 박을 동안 천년 해가 네 번을 돌아오고도 몇백 성상星霜을 사무치게 호명하는 이 있었던지 내 어머니의 딸이 지상에 불려 나왔네 생뚱맞은 딸이 구름이나 좇는 바람의 딸이// 나, 사막을 떠도는 에우리알레**/ 신기루를 찾아/ 구름길을 꿈꾸는 모래의 족속이네/ 훗날에도 먼 훗날에도/ 나, 떠도는 귀신/ 어미의 미토콘드리아를 지고/ ‘가지 않은 길’을 갈 나와 딸과 딸의 딸들//
* 악마의 문 :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쪽, 옛 고구려 땅에 있는 동굴.
** 에우리알레 : 멀리 유랑하는 신화 속 여인.

AI, 까마득한 날에 이미 / 김추인
아무래도 저 못 생긴/ 짚신벌레가/ 내 머나먼 어머니일 것이다// 최 처음의 단세포는/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며/ 다세포의 이종異種들로 도출해낸 산 것들의 거침없는/ 행보를 유추하면/ DNA,// 생명에 부여한 신의 기호를 대 우주섭리의 기적을 뉘 있어 반론 하랴 한 개 점에서 시작되었을 생체의 출발은 뉴런이란 명패를 달기 아득히 먼 전전부터 가지에 가지를 치고 뇌실을 확장해 가던 인지 기능, 그 수천만억 번 서성임(trial and error)이 지능의 첫 모 습일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넘어서는 목숨의 작업은/ 먼 훗날 AI의 선행본일 것// 기계 이전에/ 생체는 스스로 알았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선험적 유기체,// 이제 DNA, 두 가닥 새끼줄을 꽈 스스로의 지도를 기록해 가는 호모사피엔스는 한 개 알로서 잉태순간,/ 생체컴퓨터를 장착하고 출발하는 대자연의 선택받은 아들인 게다//

알들의 오디세이아 1 / 김추인
문 따는 일로 생애가 저물었습니다/ 노을도 아름답군요/ 맨 처음 알은 어리둥절/ 없는 발밑에도 하늘이 있었고/ 어떻게 굴러도 길이 났습니다/ 돌아보면 길은 시작만일 뿐/ 문과 계단의 연속이었지요/ 열어 열어도 앞을 막고 서던 문들/ 얼마나 숱한 문을 지나왔는지/ 얼마나 힘겹게 층층 계단 올랐는지/ 얼음의, 물의, 곤죽의, 강철의 별들/ 별에서 별로 층층 뛰기/ 암벽에서 모래의 시간을 빼고 더하는/ 무위의 일이라니// 꽃들의 길도 이리 아득할까요// 다 기억하지 못하는 다행 속에 길들은 잎맥처럼 가지런한 적이 없고 사방 뉴런이 뻗고 돌기들은 돌부리마냥 걷어 찼습니다 계단 들의 패대기치는 심술로 출발점에서 다시 기어올라야 했던 무수한 알들의 행로/ 얼마 남지 않았을 문들은 생각 합니다 허약과 무기력의 황망한 시간들이 예약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길 중에도 사막은 꽃길이었습니다 몇 구비고 구릉들 지나 모래 폭풍 속에 문을 찾는 일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일/ ‘있어도 없고 없어도 없는 모래알들의 꿈, 고와라’// 늘 신기루는 지평선 쪽으로 문을 가리켰지요/ 세상에 없는 문을//

회귀하는 것들 / 김추인
원지로 나간 길들이 돌아오고 있다/ 아니다하고 떠난 길들이/ 가자가자 부추기던 길들이/ 먼지와 소음의 골목을 나서기면 하면 풀밭이 있으리라 숲으로 닿으리라 한발 한발 옮겨 디딘 길들이/ 죽지를 들썩여 날고 싶던 곤한 행보들이/ 풀이 죽어서 돌아오고 있다/ 가서는 안 오던 길들이/ 소식 끊고 있던 길들이// 먼 곳에서 점멸하듯 멈칫멈칫 돌아오는 길들, 남대천으로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오는 신발들이 많이 헤졌을 것이다 두고 떠났던 이들이 생각나고 이 땅의 부산한 아침이 많이 그리웠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신의 땅이 있으리라 하고 별빛 쏟아지는 땅이면 된다하고 저 시드니나 시카고, 미지의 오지로 나갔던 길들이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돌아오고 있다// 땅 끝 마을을 기웃대던 내 발걸음도 집으로 향하고 있다// 세상은 어디나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는* 오늘/ 모래의 길들이 실소를 머금고 돌아오고 있다/ 울타리 너머 마을을 넘어 전신주 넘어 넘어서 고향을 넘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어 떠돌던/ 세상 모든 나간 길들이 옛집으로 회귀하고 있다//
* 이상의 <오감도>중 차용

떠도는 오감도(烏瞰圖) ㅡ호모사피엔스의 환(幻) / 김추인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잊기 위해 더 걷어내야 할 가벼움이 있습니까 갑옷을 벗어던지기 위해 더 보태야 할 무엇이 있습니까// 몇 개 자모음을 토해 까마귀 울음으로 조합된 그녀의 기둥서방은/ 아직 날개 다 자라지 못한 직박구리의 시詩,/ 갑甲의 무거움을 죽어라 좇고 좇는 을乙 말인데요/ 도로의 방식으로 잿빛 하늘을 질주하는 발이 없는 새는 열세 번째 새가 맞습니까// 세상은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 둘 뿐입니다*// 생의 트랙은 견고해서 동에서 서로, 다시 서으로 서으로/ 팽팽 도는 일과성의 질주방식일까요/ 상자 바깥이 안 보이는데요/ 죽어서야 온전히 무화될 서열의 키/ 죽어서야 온전히 벗을 의식의 갑옷/ 지상의 모든 오늘이 출구가 부재한 까닭이란 거. 맞습니까?// 열세자리의 길다란 전동차를 끌어다 침상에 눕히고서야 바다의 문이 열리는 지 비로소 미역밭을 유영하는 알몸, 순결한 내 꿈속의 그녀일까요//
* 이상의 ‘오감도’ 차용

잠, 어머니 오시는 몽유의 사원 ㅡ생명의 환(幻) / 김추인
사거리 지나 모퉁이를 또 꺾는 것이 몇 번인지 모를 U턴도 낯설지 않은 것이 집으로 가는 길이 맞을 것이다// 저 이쁜 곤줄박이의 부리 아래로 툭- 해묵은 솔방울 일없이 지고/ 바람 갈피에서 누설되는 어린 것들의 못다 뱉은 문장들 궁금하다/ 수수전생을 넘어와도 세상의 봄은 멀고 뒤집히는 활자들 사이로/ 슬쩍 셔트를 내리는 손, 뉘 그림자 인 것이냐/ 오늘은 닫혀도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누가 구시렁거리는가본데// 덜컹거리는 편두통 내려 누이거라/ 발목 잡던 의무 조항들 풀어 놓거라/ 욕봤다-/ 밥상을 들고 건너오시는 죽은 어머니// 몽유의 신기루 한 장 흔들며 내 우거진 잠 속을 열고 오시는 것은 아무리 믿거라 해도 미심쩍기만 한 내 삐딱한 짓거리 때문일 것이다//

나무의 잠 ㅡ생명의 환(幻) / 김추인
살구씨 만하게 졸아붙었을 심장,/ 알 만하네/ 한 잎 한 잎 져내리다 마지막 한 잎으로/ 한 계절을 빗장 지를 때/ 왜 아니겠어 돌아 봐봐/ 20대의 30대의 40대의 빗금 치며 그대 한 뼘씩/ 푸른 연대가 글썽글썽 내려앉던 경계를// 옷을 벗어 내린 적막한 나무들이/ 바람도 없는데 이따끔 뚝 뚝/ 손마디 꺾는 소리를 하네/ 허공을 안은 팔이 쑥스럽기도 할 것이네// 꽃철이 언제였더라// 비리고 떫은 것들 시푸르던 오기 다 어찌하고/ 고독의 풍경으로 서서 나무,/ 제 안에 최면이라도 걸고 싶겠네/ 잠 든다 든다 든다 들었다 레드 썬./ 신기루의 꿈도 괜찮겠네 뭐/ 명주나비 날갯짓소리에 삼동의 잠 깨기까지의/ 살얼음 녹여들고 오는 아 아이들의 발소리 소리/ 학교길 골목이 시끌시끌하기까지의/ 기다림이라는 방식// 떼 까마귀처럼 숲에 내려앉은 바람/ 잠든 나무를 흔들어 보는데/ 푸나무 어린 가지들/ 꿍얼대다 할랑거리다 다시 잠잠 적막이네/ 눈꽃이라도 포개 얹고 싶은 걸까/ 빈가지 가지마다/ 잿빛하늘이 치렁치렁 내려와 앉은 것이//

고요의 음계 ㅡ생명의 환(幻) / 김추인
문득 궁금해지는 고요의 깊이,/ 어느 만큼 깊어질 때 임계의 음역에 깃드는 것인지/ 그 떨림의 경계에서 피었을 꽃을 조우하다.// 꽃이 오는 경계를 생각한다./ 어느 지점에서 사물성과 생명성은 길을 달리하는 걸까./ 원소들이 염기들이 간단없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문득 목숨으로 전환되는가/ 얼마나 오랜 씨알 속의 잠을 견딘 후에야 꽃으로 어린 짐승으로 지상에 오시는가.// 임계점에서 피어날 고요의 순결과 맑음, 그 묵음默音 속 없는/ 음계를 짚어본다.// 미농지 빛 엷은 잠 속에서 나비를 좇는 듯 하느작이는 나울거리는 꽃의 날개짓.// Bb, 판타지풍의 몽환적 고요가 꽃잎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몇 초 사이/ 젖비린내 헤집으며 오시는 어린 목숨을 보다.// 그대 물안개 하늘 오르는 해율(海律) 본 적 있으시던가./ 그 함묵의 깊이로부터 도드라져 나왔을 희디흰 배냇짓/ 뭉클 사무쳐오는 젖내 아득하던 기억 있으시던가.// 일령 아기의 물푸레나무 잎새만 한 잠 곁./ 고요의 옷을 입은 깃 치는 소리는 그냥 희다,/ 우주가 거기 계시다.//

사막의 공식 ㅡ매혹을 소묘하다 / 김추인
사막, 광활이라는 다른 이름/ 사막인지라 바람의 구릉 없이는 사막 아니네/ 사막인지라 열사의 사구 없이는 사막 아니네// 사막인지라 세상 모든 바람들의 꿈, 바람이란 바람은 다 사막으로 오네/ 사막의 모래폭풍 본 적 있으시던가 바람의 튼튼한 정강이힘으로 일어선 견갑골이 양 날개 펄럭이며 뒤집히며 뭉게뭉게 돌진해오는 모래구름떼를// 사막의 바람이 모래산을 옮기네 사구들의 구릉지, 관능의 곡선을 키프로스의 사내*처럼 제 홀로 어루는 바람의 지느러미를 아네// 사막인지라 한 장의 손 편지처럼 멀찌기 뜬 신기루를 읽네/ 내 오랜 외사랑/ 물 그늘로 오는 그의 필체는 빛의 산란이라는데// 사막에서 다시 사막으로 길 위에 서네 나, 사막이 되네//
*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는 피그말리온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ㅡ매혹을 소묘하다 / 김추인
저 소실점 바깥은 여백일 것이네/ 날마다 낯선 하루들이/ 날마다 날선 하루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소름 돋는 백지의 오늘을 디밀어도/ 여린 것들이 날마다 행성을 떠나도/ 방싯/ 그대가 스스로에 말 걸어주는 것은/ 비밀한 주소쪽지 하나 움켜쥔 때문이네/ 오늘은 아니라도/ 술패랭이나 혹등고래의 노래가 닿을/ 여백의 너머에 있을 그 곳/ 그 신신한 주소는/ 그대, 햇살매단 자전거 바퀴살 씽-씽-/ 달려 나갈 눈부신 그곳/ 내일이라는 이름// 기다림이란 절대 고독의 walking man*/ 걷고 또 걷네//
* 자코메티의 브론즈 작품(1948)

오브제를 사랑한 ㅡ매혹을 소묘하다 / 김추인
바람을 지운다/ 소리를 지운다/ 창을 설핏 열어 빛을 소환한다/ 하오의 잔광이다/ 동쪽문은 유리의 켄버스/ 물의 입자들이 캔버스 위에서 응결되는 중이고 보얗게 채색되는 중이고 무거워진 몇 개 물방울들 중력 쪽으로 가파르게 하강하며 긴 발자국을 남긴다 물의 족적, 물의 붓질/ 켄버스 위 몇 개의 길고 투명한 금줄들은 스크레치 기법일 것이다 샤워실에선 더 촘촘해진 김, 아지랑이// 시계소리는 화면 밖에서 뚝딱이게 두어라/ 소녀가 물에서 오고 있으니// 젖은 살내, 〈타올을 든 소녀〉*쪽으로/ 쏠리는 펄럭이는 후각들/ 팔 하나가 불쑥 액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반쯤 가린 무명 타올을 벗겨내며 빛을 조금 더 불러 앉힌다/ 전라(全裸)의 소녀/ 어디선가 휘리릭~ 날아오는 입파람 소리들// 아니다 역시 설렘은 은밀하고 순연해야.. 과한 것은 금기, 팔에 걸치고 있던 무명 타올을 그녀에게 돌려 준다 무채색으로 일어서는/ ‘타울을 든 소녀’/ 아직 더운 김 날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독과 허무의 잿빛, 권옥연의 잿빛은 언제 봐도 눈이 부시다 제 본성의 색감으로 소녀를 감고 도는 추상의 오브제들도 빛난다 움직이는 수증기며 시계소리 그리고 유리를 달리는 물의 발자국들이/ 세상의 덧칠된 시간을 지우며/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절대 미감(美感)의 영속성에 대하여//
* 권옥연 화백의 유화

시간을 위한 거울 오브제 ㅡ매혹을 소묘하다 / 김추인
산그늘과 구름그늘 사이엔 거울이 있고/ 밀밭내와 논두렁 풋콩내 사이 누가 가고 있다/ 네 시와 다섯 시 사이/ 긴 그림자를 끌고 누가 거울 속을 가고 있다// 느티목 그루터기에 앉아 나이테를 읽는 눈/ 길고 연한 하절무늬와 짧고 촘촘한 동절무늬 사이/ 아른아른 유리의 길을 따라가며 읽는다/ 흔들리고 꺾이며 폭풍우와 맞서던 시간을/ 햇살과 물소리와 눈발 비껴나는 시간을// 봄에서 겨울까지 그리고 다시 봄/ 흔들림과 무심, 포만과 궁핍을 베껴본 나무는/ 제 나이테 사이에 시간의 옷을 새기는 것// 초록과 회록 사이에 누가 흔들흔들 가고 있다/ 언제였더라/ 부끄러움과 설렘 사이를 거울이 응시하던/ 풀내 나는 육체의 남녘은/ 몹시 흔들리는 반 추상체의 나무 두 그루// 꿈에서 꿈으로 길을 내던 거울 속 구름의 시간들/ 뇌실 어느 기억의 빗금 사이에 앉아 잔물지고 있겠다/ 아릿아릿 혹은 촘촘촘//

은하를 보는 희야 / 김추인
머리를 들면 유령들 푸르게 닿는다 산 것과 죽은 것들의 무한 광장 ,다섯 살의 칭얼대는 내 유령을 붙들고 내가 자장가를 부르듯 글썽이는 별 하늘엔 헛헛하게도 보였다 안 보였다 멀리서 반짝이는 유령의 별들// 평상 곁엔 모깃불, 쑥연기 감아 도는 여름밤/ 오누이가 누워 하늘이야기를 한다/ “저 별은 희야별 저 별은 오빠별”/ “오빠별은 희야별 보다 키가 커?”/ “그렇지?! 희야가 좋아하는 오빠별은 너무 멀어 몇 십만 년을 날아와 희야 눈에 도착한 거야. 그러니까 쩌-기 오빠별은 죽고 없는 별일 수도 있어요 유령별인 거지”/ “왜? 왜?”// 아홉 살 터울 오빠만 보면 ‘왜?‘를 거푸 뇌던 희야는 머나먼 우주의 나선은하도 수레바퀴은하도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는데 오빠는 일찍이 별이 되셨다/ 오빠 떠나신 날은 바람 세차 은싸락이듯 별들 부서져 내리던 밤//

봄을 기다리는 방백 / 김추인
물조리게를 들고 있는 당신, 녜 물을 주세요 그녀가 기다리니까요/ 주르륵 혹은 점.점.점............. 물조리게를 기울여서 똑똑 노크하세요/ 그녀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꽃,/ 일반 명사인 그녀를 위해서 채송화든 나팔꽃이든 작약이든 아아―/ 말희든 초희든, 꼭 고유명사가 아니면 어때요/ 만에 하나 사양할까봐서라고요/ 오 천만에 '배 고프다' 뇌리로부터 전언이 올 때 밥 들여 보내도 좋으냐/ 위나 장에게 물어본 적 있나요/ 아니잖아요 몸이 기다리니까 몸이 원하니까/ 꽃이란/ 가장 꽃답기를 누군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아주기를/ 그리고 흠뻑 받아 젖기를 그리하여 물 방울방울 머금은 구름꽃,/ 향기로운 꽃구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죠// 사람 하는 짓거리가 다 구름일 뿐이지만/ 사람이 생각하듯이/ 생각한 만큼 주기를 받기를 나누기를 기대하듯이 말이죠/ 그녀에게 샘물을 퍼 주어요// 꽃,/ 한낱 글자에 왜 물을 주냐고요?/ 당신은 너무 따져요/ 논리만 있는 인간치고 하는 일이 없어요/ 분별치 마세요 힘의 논리든 시장의 논리든 전쟁을 부를 뿐이죠/ 전쟁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들/ 과학? 과학자?/ 착각하지 마세요 과학은 따지지 않아요/ 거기 있는 것, 그것일 뿐/ 있는 사실을 드러내고 알려줄 뿐/ 눈먼 수다장이들과는 다르죠// 누구셨더라/ 꽃이란 글자에 물을 흠뻑 주시던 이/ *// 보세요 그냥 돌일 뿐인 별 하나에/ 물 흠뻑 주시는 하느님/ 봄이 오쟎아요 초록별이 눈부시잖아요/ 하느님도 그렇게 생뚱맞으세요// 엉뚱한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세요/ 세상이 재미있어져요 네모진 세상말고 삐뚤빼뚤 물렁물렁한 못난이 세상,/ 잼 있는 세상 당신, 물을 주세요/ 신 초록들이 터져 나올걸요/ 눈물의 웃음의 기원의 사랑의 쓰거운 나의 너의 싱거운/ 싱그런 말간 멀건 비린 물을. 대지는 모두를 안아요// 초 사흘/ 그러니까 오늘이죠. 새벽 3시, 한참 단잠인 제게/ 하느님께서 물을 추루룩 추루룩 퍼 부우셨는데요/ 아차, 오늘이 원고 마감날였나 봐요/ 딱딱한 제 머리통에서 자모음들이 자라 나오더니/ 새나오더니 이렇게 지질맞은 방백 같은 긴 독백 같은 것들이/ 끝간 데 없이 늘어 섰네요/ 잠이 덜 깼거든요/ 퇴고도 하시겠단 걸 말렸어요//

 

스피노자의 아이들 / 김추인
내 안의 긴 벨트가 돌고 있네/ 날마다 죽고/ 순간순간 태어나는 생체의 연결고리들// 생성과 소멸의/ 형성과 망각의/ 저 은하 너머에서 너머로/ 폭죽터치 듯 휘황한 별들의 죽음에 관한/ 짧은 생각들이 내 하루를 들었다 놓고/ 시냅시스 연결망들 하릴없이 부산하네/ 분리 직전, 단풍나무의 잎자루 떨켜처럼/ 내 여린 세포들/ 곧 비듬으로 때로 떠나갈 이것들에 대해/ 나였던 것들에 대해/ 나, 유감을 표하지 않네// 까마득히 지나간 미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거나/ 나, 아무데도 없고 어디에나 있으니/ 뉜들 내가 아닐 것이냐 생각하는 스피노자의/ 혼자 노는 아이는 노상 떠남을 생각하네/ 늘 지금은 말고/ 늘 여기는 말고// 머나먼 스와니를 위하여/ 신기루의 내 사막들은 내일 도착할 것이며 그 그림자의 길이 내가 상자 바깥으로 나갈 유일한 통로일 것이며 너로부터 떠나야 할 존재의 별리방식일 것이네//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네//

눈거풀 / 김추인
세상에서 가장 큰 보자기/ 이것이 내려 덮이면/ 빛 사라지네/ 꽃 사라지네/ 볕살 속 부유하던 먼지 알갱이도/ 내 앞에서 눈 맞추던 너도/ 사라지고 없네// 졸리운 눈거풀 내리면/ 한정 없는 어둠의 나락,/ 깊고 말랑하고 나른해지던/ 아른아른 의식의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던 기류// 먹물 빛 어둠도 어둠이지만/ 어둠도 세상이 덮히는 보자기라지만/ 몇 오락 빛만으로도/ 사물의 그늘 속으로 숨던 거 아는데/ 얇은 입술만 같은 눈거풀이/ 잠금장치 없이도/ 철걱 닫히면/ 우주가 사라진다는 거 아는데// 질끈 눈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내 안의 어린마을을 아네 여섯 살 깡동치마 논두렁에 앉아 작은 꽃별들 갸우뚱 들여다보는... 솜털머리칼 하염없이 날리는.. 내 안의 연두그림 몇 장, 덮이지 않는 지울 수 없는//

서울 아리랑 / 김추인
선명하지 못한 네 그림자는/ 늘 회색빛이다/ 우울한 도시여// 네 몽환의 입맞춤에/ 꽃잎 하나씩 태어나/ 나침반도 없이/ 바다로 나가는 알몸의 바리데기들/ 사계절 경보중인 일상의 해역에서/ 더미더미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심쩍은 내일/ 자유의 이름을 위해/ 앞서 간 무덤들을 해체하며/ 어제의 허위를 이장하며/ 참을 수 있는 데까지 견디고 서있는/ 그을은 면상이며 너의 두통/ 아파하고 아파하며/ 돌아보고 있다 푸른 그들은// 열 시간 또는 열 한 시간의/ 노동을 팔아/ 오늘 노획한 꽃 한 묶음 쥐고// 「안녕하세요」/ 이 지상의 목숨임을 큰 소리로 증언하며/ 늦은 밤 안식의 해안에 귀항하면/ 오, 손 안에는/ 꺼멓게 삭은 뼈 한 묶음// 어디 갔니 어디 갔니/ 장미의 신기루/ 열망의 도시여/ 그래도 난 네 품에서 잠이 든다/ 어제나 오늘이나//

생가 / 김추인
그 때는 한창 좋은 팔 월이어서/ 무덤들에서도 연한 살내가 날 듯 했지요// 꽃이라고나 마음이라거나/ 풀잎이나 흔들고 올 풀바람 같은/ 향기로운 것들이 여기와 행장을 수습할 듯한/ 몇십 백 리나 굽이굽이 황무지가 내다보이는/ 브론테의 옛집인데요// 그녀가 거기 서서/ 계단을 오르는 내게 손을 내미는 데요/ 내 팔이 아직 다 자라지 못해/ 그 고운 손을 잡지 못 했지요// 얼마나 더 오래 생의 물살 굽이져야/ 계단 끝 그녀의 방에/ 오를 수 있을지//

소리 / 김추인
어허라 그저는 못 가리/ 담 밖에 황천극락이라 해도 그저는 못 가리/ 하물며 구천 깊은 명부에랴/ 내 짜던 날올 씨올 어찌 다/ 뭉텡이 뭉텡이 실타래 두고 가랴.// 어허라 서천 노을밭 이랑이랑/ 내 삭신 다 삭아 물처럼 흘러가도/ 삼천 삼백 육십 개의 뼈 몽둥이들/ 푸른 불기둥으로 한으로 일어나/ 서발막대 내던지고 무덤 걸어 나오리/ 저 담 밖이 손짓하는 그/ 은한의 정토(淨土)라 한들/ 내 그냥은 못 가리// 명분 없이 어룽지던 청동거울/ 한 생애 묵은 녹을 벗고/ 비로소 은빛 지느러미 출렁이며/ 감청 빛 저 바다 끝을 보기까지는/ 어허라 그저는 못 가리/ 정녕 황천극락이라 해도/ 그저는 내 못 가리.//
* 1985년 《현대시학》 초회 추천작

귀가 / 김추인
일상 만나는 골목길을 두어 번 꺾어 돌아서면/ 황급히 달려와 사방으로 포진하는 어둠/ 여기서 모든 통로는 일단 차단되고/ 보안등 혼자 행인을 검색한다/ 공복의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담배포만한 방범초소 앞을/ 고양이 걸음으로 급히 지나/ 마지막 절차처럼 마주서는 철대문의 침묵/ 당당한 파숫군의 완강한 어깨다/ 낯선 듯 낯익은 듯/ 희미한 외등 아래 덤덤히 떠오르는 주인의 문패/ 「신림 8동 567-11호 ○○○」 / 비밀번호 건네듯 초인종을 누르면/ 기척 없이 덜컥 성문은 열리고/ 기다린 듯 어둠이 우- 앞장을 선다/ 뒤따르던 하루의 끈질긴 미행자들/ 어둠이며 소음이며 무성한 바람의 떼/ 저희끼리 와글와글 현관 밖에 세워둔 채/ 도망치듯 황황히 문을 닫으면/ 비로소 아홉 평의 내 사유 공간/ 늦은 밤 제왕의 환궁으로/ 깨어나 술렁이는 따뜻한 정적이 있다./ 자유의 시종들이 받쳐 든 한 그릇 라면에도/ 가슴 풀리는 넉넉함이여/ 이제 자리에 누워/ 그 옛날 고향 타작마당에나 찾아가 볼 일이다/ 오늘 남은 일은/
* 1985년 《현대시학》 초회 추천작

내게서 말똥내가 난다 / 김추인
차마고도, 설산 넘는 길/ 합파(哈巴) 당나귀들의 미션은/ 무게를 견디는 일이다// 하얗게 아이라인 그린 눈으로/ 실실 웃는 눈매는/ 동키의 생존// 바윗길에 발굽을 다치며 긁히며/ 안장 위의 무게에 속이 끓는지// 철부덕- 내 동공에 말똥 한 덩이/ 싸대기 친다/ 풀 내가 난다// 앞말에 똥싸대기를 맞고서야/ 나를 지고 벼랑길을 가는 늙은 말/ 욱신거릴 말굽을 생각한다// 엉성한 갈기의 목에 수박씨처럼 붙어/ 피를 빠는 쉬파리의 생존도 보인다// 쉬익 쉬익-/ 쑥대로 쫓으며 글썽이는 것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귀에겐지 파리에겐지//

 

말이 달린다 / 김추인
말이 달린다, 갈기에 붙들린 바람이 말 잔등을 치며 별의 가장자리를 달리는 중이다./ 가도 가도 서(西)로 길을 내는 철새들의 허공/ 한 무리의 비늘구름 사이로/ 태양도 저무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말이 달린다.// 바람 높고 조도 낮은 가장자리는 언제나 모퉁이들의 거주지,/ 우주의 바깥으로부터 백조자리 지나 바람 치는 별의 중심을 향해/ 타각타각 허공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말이 달린다./ 성단에서 성단으로 건너뛰며 오래 바라본 겉과 안처럼/ 홀소리와 닿소리 한 몸으로 단단해지리라, 말이 달린다.// 죽어서도 모퉁이가 많은 나는 말을 부리는 시인일 것이다.// 언제쯤 내 말은 멈출 것인가 핏물 밴 말발굽 하나,/ 기억과 잊힘 사이에서 수메르의 점토판처럼 해독되다가 말다가 하겠지만/ 겉과 안 경계에서 내 말은 오오래 광야를 달리며 세상의 바람을 읽을 것이다,/ 말이 달린다.//

비오는 날의 산조(散調) / 김추인
누가 오시는가/ 뉘 우현금(雨絃琴)을 뜯으며 오시는가/ 서천으로부터 찰방찰방 건너오고 계시는가/ 파문 지는 둥근 발소리 물 내 난다/ 깊어지다 빨라지다 이윽고 숨을 죽이듯 적막하게 닿는 비/ 주렴으로 선 수직의 현들 있다/ 빼곡히 선체로 목이 메는 것들이 있다// 바람의 손가락이 뜯고 있을 비의 현琴, 비의 선율, 천상에서 지상까지 이어지는 것은/ 침묵 다음의 음계다. 흐느끼듯 머금듯 삼켜지는 구음/ 솨-스스흐 스흑스흑 스스/ 무흐 무흐 무흐흐 무흐/ 세상을 주류하는 구름아 바람아/ 죄다 여기 빗속에 너희 울음을 묻은 것이냐/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강물은 강물소리로 늪은 늪의 소리 결로/ 어린 영혼을 쓰다듬듯/ 세상을 염송하듯 듣는 이나 들으며 빗소리는 이어지고 풀어지고 가없이 반복되고 있다/ 우루무치에서 내리지 못한 비// 투루판에서 백년 삼켜진 빗소리/ 아-화염산에서 천년 머금기만 했던 빗소리의 기억으로/ 짓소리* 홑소리* 끄을며 끊으며 범패 울듯 범패 음유하듯/ 침묵도 소리도 아닌 소리로 남의 심금을 뜯어내고 있다// 비의 숲을 내다보는 직박구리도 제 노랠 잊고 빗소리에 젖어있다// 산밭 지나 싸리밭 지나/ 은사시 나뭇잎들 짚으며/ 미뉴엣 풍으로 닿는 작은 음표들의 발자국/ 흩날리다 그치다 다시 날리는 울기 좋은 날의 우현금 소리를 아시는가/ 들어본 적 있으시던가/ 살구나무 가지 곁에 선 고요도 무채색으로 빗소리에 젖어있다//
* 짓소리 범패가운데 가사가 산스크리트어로 긴 소리. 장성(長聲)
* 홑소리 ;.범패(梵唄)에서, 단성(單聲)

일반 상대성이론의 실체 / 김추인
소심이 피더니 난향이 한 방 건너 두 방 건너 예까지 닿는다// 저들은 향의 유전자를 어디 숨겼다가 꽃에 얹어 발현시키는 것일까/ 실내공기는 정지되어 있고 ‘이만치‘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향기의 미세입자가 자취 없이 날아와 내 후각세포를 건드린다?// 아닐 것이다 소심의 질량과 내 체 질량으로 해서 휘어지는 공간, 나와 소심화분 사이,/ 그 우묵한 웅덩이 속으로 향기의 입자가 흘러들었을 따름이라고/ 내 지적 호기심이 아인슈타인을 베끼고 있다//

노을을 인화하다 / 김추인
갈대숲 가지런하다/ 노을 때문일 것이다/ 누ㅡ가 물감 통을 엎어뜨렸나/ 다홍의 서천// 길게 펼친 수면이/ 번질번질 석양에 젖을 동안/ 우리는 오뚝오뚝 늘어선 몽구스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모래등성이 위에서 지는 해를 보낸다/ 붉노을의 중심에 시선을 박고 선/ 사내들의 실루엣/ 해의 심장에서 꺼낸 유서라도 본 듯 먹먹해져/ 사막소나무 뒤서서 말을 잊었더랬다// 발자국을 지우며 낮게 날아가는/ 새 등짝이 빤득거린다/ 노을을 슬쩍 바른 모양이다// 치명적인 아이다르의 이 그림 한 쪽/ 일상이 사무치게 서걱일 때/ 내 기억을 찢고 나와 부추기리라/ “떠나라고- ”//

부하라*의 아침 / 김추인
아무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미나렛과 모스크 사이의 간극/ 이와 저의 사이/ 망루와 기도의 사이/ 상징과 효용의 거리를 좁히며 나라가 민족이 문명이 섞이며 부서지며 벌어진 틈마다 모래 날고 바람 새고 끙끙대는 세상의 신음이 샌다는 것을 몇이나 기억할까.// 어느 유적지에서도 끌과 정을 부리던 장인(匠人)의 이름자 본적 없다. 명령자와 노역자 사이 어처구니같이 낡고 있는 중얼거림만 있을 뿐, 한참 더 약아진 시장통을 돌아 나오며 무슨 일로 바보현자, 나스레딘 호자의 나귀방울소리가 못내 듣고 싶은 건지// 억만 시간의 지층 틈바구니에 낀 내가/ 틈새 비집고 들온 햇빛살/ 손바닥에 받으며/ 젖니처럼 말갛게 돋던/ 유년의 아침을 기억해내곤 웃는다.// 캄캄한 수 세기 전의 아침들이 설산너머에서/ 오래 걸어와/ 흙집 문턱에 어린 햇발들로 바글대는 산책길.//
* 실크로드상의 우즈베키스탄 유적도시

자벌레 / 김추인
실크로드 중간거점 사마르칸트는 우즈벡의 푸른 오아시스.// 비단이 오가던 길이라선지 포플라인가? 들여다보면 뽕나무네!/ 포플라 잎사귀만한 뽕잎 보며 지출을 줄이는 나무의 사막살이를 본다 싶은데/ 아흐- 오백 살도 더 늙었을 거대뽕나무 고목의 우듬지가 궁금했던 걸까.// 아득한 높이를 향해/ 쉼 없이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자벌레를 보네.// 롯데타워, 아스라한 높이에 매달려 고물거리던 벌레 한 마리 생각나네/ 별박이노랑자나방 유충만 같았는데 맨손으로 빌더링에 골몰하던 여제는/ 유리벽 위에서 허공을 틀어쥔 것이 내 눈엔 형광펜자국 같은 자벌레였지 아마// 여직도 뽕나무 고목 위, 구부렸다 폈다를 궁구하는 자벌레를 보네./ 오르고 재는 일이 미심쩍은지 이따금 멈춰 좌우 머리를 내두르곤/ 다시 자(尺)질을 하네.// 마지막 높이의 뽕잎으로 세상에 없는 실크라도 뽑을 듯이//

내일의 친구들에 고(告)함 / 김추인
진화의 끝에 선 ‘휴머드’*들이여/ 잊지 말거라./ 너희의 조물주는 호모사피엔스임을// 그대, 무성생식의 무한분열로 행성을 내달린다 해도 유한분열의 우리를 넘어선다 해도 너희 절대 넘보지 못할 인류의 참살이를 찾기까지 우린, 날마다 사과나무를 심으리란 걸// 절창 한 편 내게로 오기 전까진 나, 죽지도 못하리란 걸// 뱉고 뱉고 뱉어서/ 쓰고 쓰고 또 지워서/ 갈고 갈고 또 갈아/ 쇠공이 하나 바늘 되도록 마음결 다스리는 일이/ 너희 인조인류의 엇 박 칠 심장까지 돌려세울 바늘 하나 만드는 일이란 걸// 망막에 렌즈를 넣거나 깨진 어금니 임플란트 얹어 질긴 육고기도 잘 씹어 삭히는 우리는 모두 파이보그*,/ 그대들과 별무차이란 것도 친구들이여 잊지 말거라// 가까운 내일, 사이보그*들과 파이보그들이 인조인간들이 호모사피엔스들과 정다이 삶을 나누고 산책하는 풍경화 하나 그려보는 일로/ 내 오늘이 환하다는 거 알란가 몰라// 알파고의 불안 이후/ 사람을 믿고 싶은/ 내 상상력이 소묘한 꿈이란 걸//
* 휴머드: 로봇 같은 인조인간.
* 파이보그: 인공뼈, 인공장기로 보완한 사람.
* 사이보그: 생체에 기계장치를 이식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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