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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찬 시인

부흐고비 2022. 2. 16. 07:41

박찬 시인(1948.11.~2007.1.)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월간 《시문학》에 ‘상리마을에 내리는 안개는’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스포츠서울 기자, 서울신문 문화생활팀장과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지병인 간암으로 작고하였다. 시집 『수도곶 이야기』, 『그리운 잠』, 『화염길』, 『먼지 속 이슬』, 『외로운 식량』와 실크로드 문화기행집 『우는 낙타의 푸른 눈썹을 보았는가』를 펴냈다.

 



사람 / 박찬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사람 / 박찬
어디 없는가/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같이/ 일생에 단 한 번 하얗게 꽃 피우고 죽어버리는 대나무같이/ 늘 푸른 마음을 가진…//

화장 / 박찬
이제,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저 나무를 자를 수는 없다./ 곱게 자라는 풀들을 파헤칠 수는 없다./ 살아서 힘겹게 내 자리를 마련했듯/ 지금 펄펄 살아서 꽃피우는,/ 나무와 풀들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썩어 없어질 육신은 불살라/ 산에 들에 강에 뿌리고, 고시레…/ 새들이 고기들이 섭취한 배설물로/ 자연스레 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둥둥 떠도는 흰구름으로, 연기로,/ 나의 흔적을 지워나가야 한다.//

식물이 되어 바라보다 / 박찬
어제는 참 힘든 날이었네. 계곡을 휘돌아 세찬 바람 불고 비 내려 나는 온통 젖어 흔들리고 있었네. 한 자리에서 근 백 년을 살아온, 이를테면 어지간한 비도, 바람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뿌리를 가졌지만, 어제 같은 비바람에는 그래도 뿌리가 흔들릴 지경이었네.// 움직이는 것들은 세상을 가만히 놔두지 않네./ 바람도, 비도, 생각도······.// 용케 견디어낸 밤이 지나고 햇살 반짝이면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하네. 태연자약! 나의 원래 표정이네. 아직도 몸을 타고 물이 흐르네. 그러나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더이상 차갑지 않네. 그것은 차라리 등걸 구석구석, 묵은 때를 씻어주는 아버지 손길 같으네.//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다 보이네. 바람도 비도 새도 찰나의 생각까지도. 움직이는 것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세상 모든 것. 물 무늬 지는 노을빛 하늘, 또는 소리의 향기까지도.//

당혹 / 박찬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소주에 관한 명상 / 박찬
태안 박씨 정삼품 중현공 후취부인 현고유인 순창 설씨 도명화 할머니 돌아가시다. 평생을 술 한잔 입에 대지도 못하면서 술 냄새 향수인 양 온몸에 풍기며 사시다. 그 어른 생전에 술 빚던 술도가 아직도 뒤란 장독대 한 모퉁이에 놓여 있다. 누가 저렇게 닦아놓았을까 이 봄에 햇빛 받아 더욱 반짝거린다.// 잔치 끊일 새 없던 집. 술 잘 빚는다는 소문에 기울어가는 토반집 후취자리 들어 평생을 술만 빚다 가시다. 그 이름 도화주 온 고을에 쟁쟁하던 이름도 예쁜 술. 늙은 서방님 일찌감치 떠나 보내고 자식들마저 전쟁통에 잃어버리고 하얗게 서리 내리는 밤마다 술가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선禪하듯 술을 빚던 태안 박씨 정삼품 중현공 후취부인 현고유인 순창 설씨 도명화 할머니.// 덧없는 사념만 꼬리를 문다./어스름 달빛 내리는 시월의 한 밤.//

 

 

 

외로운 식량 / 박찬
이슬만 먹고 산다 하데요/ 꿈만 먹고 산다 하데요// 그러나 그는 밥을 먹고 살지요/ 때로는 술로 살아가지요/ 외로움을 먹고 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 사실은 외로움만 먹고 살아가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이지요//

 

 


(山嶺)산령을 넘으며 / 박찬
거기에 고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바람 세차고 높은 수많은 사람들 이미 지나가 잘 닦여진 깊은 산에서/ 빠져나가는 고개만 넘으면 바다로 나가는 길이…/ 깊은 산과 드넓은 바다가 그렇듯 가까이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니…// 살아온 삶에 무심했듯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는 고개에도 나는 무심했다 지금껏 그러한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 왔다// 고갯마루에 올라 가쁜 숨을 멈춘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저편의 풍경들…//

가슴에 묻는다 ㅡ서래봉 / 박찬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너무 멀리 떠나와 이제 윤곽조차 희미해져 벌판 멀리 피어오르는 바람처럼 막막할 뿐이다. 황사바람이 시야를 가려 돌아갈 길 잃어버렸다. 생각을 따라서만 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생각조차 이제는 막연할 뿐이다. 귀신나라나 혹 도깨비나라였다면 그래도 마음대로 상상해낼 수 있으련만,// 그곳에 놀았던 너와 나의 실재가, 오늘은 더욱 나를 막막하게 하는구나// 자식 죽인 어미 그 자식 가슴에 묻듯, 나도 이젠 너를 내 가슴에 묻으려 한다. 따뜻했던 너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 실낱 같은 기억을 위해. 너로부터 멀어져가는 날들의 추억이나 또는 꿈에서라도, 한때 그 속에 놀던 너와 나의 모습을 추억 하기 위해, 이제 너를 가슴에 묻는다.//

서래봉, 또 서래봉 / 박찬
오랫동안 사막만 헤매었네. 언제나 안개에 가려 있는 듯 모습 드러내지 않는 서래봉 그곳에 있는데, 나는 여직 다른 곳으로만 찾아 헤매었네. 정말 오르고 싶었던 것일까. 오르기보다는 차라리, 먼 못에 그리움처럼 두고 그리워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래봉 가는 길 ㅡ서래봉 1 / 박찬
西來唯은 동쪽에 있다/ 붉게 노을이 타는 서산 너머/ 가다 보면/ 그 어디서건 서래봉은 만날 것이지만/ 그러나 서래봉은 동쪽에 있다// 저 혼자만 세상을 밝힌다는 오만한 태양이/ 매일 한 번씩 부끄런 얼굴로/ 죽으러 가는 산, 그 너머 가다 보면/| 그 어디서건 서래봉은 만날 것이지만/ 지는 해를 따라가선 결코,/ 서래봉을 만날 수 없다// 서래봉을 만나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서래봉은 동쪽이 아니다. 서쪽도 아니다// (날으는 새는 방향이 없다)//

이젠 세상에 없다 ㅡ서래봉 2 / 박찬
오랜 응시 끝에/ 그대 모습 밝아 오면/ 나는 또 길 밝힐 등불도 없이/ 미명의 길을 나선다/ 언젠가 가을의 그 불타는 숲,/ 하늘 높이 떠온 세상,/ 차갑게 밝히는 빛 속으로/ 터질 것같이 부푼 가슴으로.// 그러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대 모습 어둠에 묻히긴 전,/ 허둥대는 발길에/ 길은 다시 어두워지고/ 길 밝힐 등불도 없이 떠난 나는 또,/ 어둠 속 헤매다 돌아나온다// 오랜 응시만으론 그대에게 갈 수 없다/ 길 불어 볼 사람조차 이젠 세상에 없다//

보이지 않는 산 ㅡ서래봉 3 / 박찬
구름이 낯게 드리운 날이면/ 산은 가까이 다가온다. 다가와/ 더욱 확실하게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늘 높고 짙푸른 날/ 산은 멀리 달아나고/ 흰 구름만 허공 속을 떠돈다// 산은 왜 가까이 오는 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산은 눈앞에 다가왔다/ 언젠가 그날처럼/ 오늘도 산을 바라본다. 그러나/ 바라만 볼 뿐/ 나는 도무지 산을 볼 수가 없다// (나의 가슴은 아직도 불타고 있다)//

(鬼面)귀면 ㅡ서래봉 4 / 박찬
농부는 써래 같다. 써래봉이라 부른다. 엄마는/ 방 안을 기는 아기의 모습 같다. 애기봉이라 부른/ 다. 그러나 아무도 그 모습 본 적이 없다./ 안개 속, 등 돌리고 서 있는/ 西來의 뒷 모습!// 기슭엔 기화요초 만발하다/ 찬바람도 비켜가는 구름 속, 이따금씩 내보이는 鬼面/ 누구의 닮은 모습//

서래봉 가는 길 / 박찬
잘 닦인 길/ 그 길 향하는 곳/ 도회다/ 막막한 길/ 갈 바 모르겠다// 산을 뚫고/ 바위를 뚫고/ 강도 바다도 건너지만/ 너무 멀다/ 먼 길/ 서래봉 가는......길// 숨을 곳 없다/ 산과 들이 모두 집이다/ 벌나비 날고/ 아침마다 이슬맺고/ 매일 또 스러지는 집// 다시 짓는다//

소리를 찾아서 ㅡ서래봉 가는 길 / 박찬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홀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는 못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

서래봉 가는 길 1 / 박찬
젊어 한때 나의 슬픔은 '인생은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생각 때문. 그러나 그 생각 얼마나 시건방 진 것이었나 생각 들기 시작했을때 나의 부끄러움은 하늘에 닿았다. 지나온 삶이나 남은 삶(이젠 지난 삶이 남은 삶보다 길다) 모두가 젊은 시절의 치기에 다름아님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문득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막막함에 빠지고 말았다.// 한 여름밤 모깃불 연기 피어르는 고향집 마당 맷방석 위,/ 무르팍 베고 누우면 탁 탁 모기를 날려주시는 할머니 부챗살/ 소리에 맞춰 별하나 나 하나......한량없는 별을 헤아리다/ 잠든 시절로 문득 돌아가 있음이여./ 할머니 눈 안에 비치던 그윽한 달빛!//

미르의 세상 ㅡ서래봉 가는길 2 / 박찬
서툰 미장 솜씨로 회칠한 미르의 세상에는, 낡은 영화 포스터만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바람에, 가로등 빛에, 흔들리는 나뭇잎, 미르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기 위해, 떠나는 버스를 손짓으로 세운다. 버스는 인정 많게 모두를 태우고 출발한다. 미르의 세상을 떠나는 버스 차창으로, 희미하게 낯익은 얼굴이 비친다.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적 끊긴 미르의 세상.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 슬프게 흔들린다. 불빛 아래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 있다. 미르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들끼리 알 수 없는 말을 나누다가, 찢어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무심히 귀기울인다.//

눈물 ㅡ서래봉 가는 길3 / 박찬
참고 참다가 별 되어 깜빡이는 초롱한 눈망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삭고 삭자가 하얗게 피어나는 소금꽃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 드넓은 벌판을 호령하며 휘날리는 말갈기, 그 소리 들릴 듯하여, 모래바람 씽씽 일어나는 길 없는 길 헤마다 만나는 신기루 같은 그대, 가슴으로 찬바람 씽씽 넘나드는 벌판 너머 하얀 눈망울 찾아 헤매는 발걸음은 또 얼마나 정처 없는가.//

오십줄 / 박찬
이러다 합죽이가 되겠다./ 지난 세월 너무 옹다물고 살다보니/ 어금니에서부터 하나씩 뽑아낸 것이/ 이제는 오물거린다.// 왜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 왜 큰소리 한번 치지도 않고/ 왜 소리내 한번 울지도 않고/ 왜 벌컥 화 한번 내지도 않고/ 속으로 이만 앙다물고 살았을까.// 별것도 아닌 세상,/ 별것도 아닌 일들인 것을,/ 죄 없는 이만 아프게 했구나./ 그 핑계로 모두 뽑아버렸구나./ 내 나이 오십줄에 벌써……//

적막한 귀가 / 박찬
젊은 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돌아다닐 때 버스에서 만난 한 여자가 물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혼자 다니면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할까?……/ 혼자는 외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른다.……// 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며 / 박찬
끝없이/ 입 안에 서걱이던 모래 같은 말들이 쌓여/ 저처럼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높이 되었구나// 그 가운데로 또 바람 몰려간다/ 다시 입 안에 서걱이는 모래알 같은 말// 말에 속지 말 일이다/ 글에 속지 말 일이다/ 신기루 같은 말에 취해 미끄러져/ 도처에 누워 있는 방부의 시체들// 되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모래펄//

 

마음의 폐허 5 ㅡ타클라마칸 사막에서 / 박찬
비가 내린다 미친 바람이 불고 온통 캄캄해지더니/ 홍수처럼 비가 퍼붓는다 그러나 연간 강수량 10mm/ 이 광막한 모랫벌에 지금 내리는 비가 30mm면 어떻고/ 50mm면 또 어떠리 흔적이나 남을까보냐 날이 개면/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이미 다시 타 들어갈 것을.../ 이 땅은 오랜 세월 아무것도 기른 적 없으니 꽃이여/ 필 곳에 가서 피어라 바람이 불면 너에게 날아가/ 흔적을 남길 것이니 꽃이여 피기 좋은 곳에 가 피어라/ 이 가슴은 말라 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으니...//

마음의 폐허 ㅡ타클라마칸 사막에서 / 박찬
먼 곳입니다/ 서쪽으로 수천 리 그러고도 멀리/ 마침내 지평선이 닿아 있는 곳입니다/ 길을 찾아 길을 내고 길을 따라서만/ 겨우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폐허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멈춰버린/ 이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집을 떠나 사람을 떠나 사치한/ 사랑도 떠나/ 그런 것을 그리워하던 마음으로부터도/ 떠나왔습니다 삭막한 땅/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막입니다/ 스스로 떠나와 간신히 찾아온...../ 바람밖에는 없습니다/ 바람만 오로지 스스로의 풍경을 만듭니다// 지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떨어집니다/ 어둠이 오고 땅이 얼어붙고/ 땅이 스스로의 고통으로/ 밤새 소리치는 곳/ 겨우 찾아온 곳의 풍경입니다/ 어둠과 바람만이 존재하는/ 마음속 풍경입니다// 모래언덕 너머 펼쳐진 오아시스/ 낙타 한 마리 낙타풀 씹으며 꾸벅꾸벅 조는/ 한가로운 고독과 한가로운 죽음이/ 서로의 한가함에 지쳐 잠드는 곳/ 나의 한가함도 함께 지쳐/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푸른/ 물이거나 숲을 그려봅니다//

예쁜 꽃 / 박찬
이제 더 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하늘연꽃 / 박찬
보이지 않는데 바람은/ 소리로 제 모습을 보인다/ 보이지 않는데 바람은/ 나뭇잎 날려 제 모습 드러낸다// 산마루 걸친 굼뜬/ 구름 걷혀가는 사이로 비치는/ 하늘연못/ 맑은 물 위로 고개 내민/ 연꽃, 몇 송이/ 벙글어진 흰 속/ 보일 듯 말 듯//

꽃도장 / 박찬
그 가시내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학길 울긋불긋 코스모스길 따라 코스모스처럼 웃으며 재잘대며 집으로 가던 가시내. 빠알간 코스모스 꽃 모가지 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엉큼살큼 다가가 새하얀 교복 등짝에 차알싹! 꽃도장 찍으면, 깜짝 놀라 화난 얼굴로 뒤돌아 보며 초롱한 눈 이쁘게 흘기던 가시내. 히이- 웃으며 등짝에 찍힌 꽃도장을 보며 달아나며…// 너는 이제 내 각시다, 속으로 좋아라, 어쩔 줄 몰라. 흰 교복에 번질세라 등에 찍힌 꽃도장 털지도 못하고 꽃 같은 입으로 궁시렁궁시렁 욕바가지 쏟아 내다가 피식 웃어 버리던 가시내. 꽃 모양도 선명한 코스모스 꽃도장 노란 꽃술 등에 박고도 코스모스같이 웃던 가시내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한번도 생각나지 않던 그 가시내, 오늘 문득 코스모스 길을 가다 생각이 나네.//

불영사, 달개비꽃 / 박찬
이곳에서, 그림자를 찾겠다는 건,/ 말짱, 헛일이다. 그림자는커녕,/ 그림자 비칠 물조차 없다./ 가장자리에 연꽃 몇송이 꽃망울 맺는..../ 방죽,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도 물이라면.../ 그 보다는 푸른 하늘, 산산이 부서져 내려/ 꽃이 된 달개비꽃, 길 따라 자지런히 피어난/ 파아란 꽃잎을 보며,/ 꽃잎에 새겨진 푸른 힘줄이나 볼 일이다./ 비구니의 파르라한 눈동자에 비치는/ 산 그림자나 볼 일이다.//

칸나꽃 질 무렵 / 박찬
백목련 피었다 지고 개나리 지고 진달래 지고 철쭉 아카시아꽃도 지고 밤느정이*냄새 징하던 날, 밤새 동구를 서성이던 여인도 가버린 세월아, 장마 한창이던 여름날 화단에 붉게 피어오르던 칸나, 그 불타는 꽃잎 떨어진 것을 보고서야 칸나의 계절이었음을 알았네. 그 계절도 다 가고 있었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했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잤네. 그렇게 살아온 세월 속, 짐짓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게 되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칸나, 그 붉은 꽃잎 다 떨어지고, 하늘 더욱 푸르러지면, 비로소 알게 될까. 깊어 푸른 것들은 사소한 것들에도 깃들어 있다니.....// 친구여.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예 같음을 이제는 알겠네. 그 리하여 마음속 쓸쓸함, 어찌하지 못해 가을비 내리는 창밖을 무심한 듯 서성일 것이니, 질퍽거리며 걸어온 길, 한 선인(先人)이 있어 말하네. 밤길에 흰 것을 밟지 마라, 물 아니면 돌일 것이니(夜行莫踏白 不水定是石)*...... 취한 뺨 위로 찬바람 빗방울 스쳐내리네.//
* 밤느정이 밤꽃.
* 夜行莫踏白 不水定是石: 경허 선사의 어록 중에서.

매화꽃 전쟁 / 박찬
막 바다를 건너온 상륙군이 땅끝에 진을 치고 있다./ 바다를 건널 때 이미 명령은 받았다./ 머뭇거리지 말고 무차별 진격하라고./ 정찰 보낸 척후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부터 동백군(冬柏軍)들이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펴/ 지칠대로 지친 동장군이 본대를 이끌고 철수한 지 오래다./ 이제 남은 건 본대를 놓친 낙오병뿐이다./ 그러므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된다./ 아직 그들이 계획하는 최후의 일격이 남아 있다는 정보지만/ 대세를 그르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로 희망을 설치할 필요도 없다. 그냥 진군만 하면 된다./ 가는 곳마다 불을 놓아라./ 지나는 마을마다 샅샅이 꽃불을 놓아라./ 주민들은 우리를 환영할 것이다./ 의기양양한 우리를 맞으며 그들도 따라 양양해질 것이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선발상륙대 외에도/ 우리 매화군(梅花軍)의 뒤를 이어 속속 상륙하고 있다는 전갈이다./ 빨리 진격하자.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자, 진격 앞으로!//

그리운 잠 2 / 박찬
서산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은 쓸쓸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일터를 나서는 일은 쓸쓸하다/ 뒤늦게 떠오르는 하현달을 보는 일은 쓸쓸하다/ 먼산을 먼 하늘을 응시하는 눈이 참 쓸쓸하다/ 길게 그림자 드리워지는 뒷모습이 참 쓸쓸하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는 일이 참으로 쓸쓸하다/ 쓸쓸한 발걸음의 끝에 오는 잠이며 편안하여라/ 쓸쓸한 시선의 끝에 쏟아지는 잠아 편안하여라//

그 시절 / 박찬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를 시들어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데// 그 시절 시들듯 그도 시들어갔네// 마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심사(心詞) / 박찬
가슴에 품은 것 꺼내어 보면/ 어떤 건 칼이 되고 어떤 건 꽃이 되고// 혼아 떠도는 혼아/ 가슴까지 다 타 없어진 혼아// 가슴이 없으니 품을 것 없겠네/ 칼이 되고 꽃이 되는 가슴도 없겠네// 타고난 하얀 재밖에 없겠네//

 

물방울은 홀로일 때 아름답다 / 박찬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얼마나 미세한 모습인가./ 잔 바람에 떠는 그의 가슴에 푸른 하늘이 숨어 있다./ 배경으론 커다란 산 하나// 스스로는 배경이 되지 않는,/ 저렇게 힘없는 것이 세상을 키우고 있다.//

처서 / 박찬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 평소 도장을 파면서 생계를이어가다/ 사람이 죽어야 집 밖로 나왔다/ 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에는/ 속옷이며 광목셔츠 같은 것들이/ 우리가 살던 집 마당으로 날아들어왔다/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회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밤의 강가에서 / 박찬
내 젊은 날의 슬픔은,/ 짐짓, 인생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 다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것// 세상모르고 살아온 어느 불혹의 밤/ 불현듯 떠오르는 그 밤의 강/ 출렁이는 빛 물결에서 꿈결처럼 보았네// 산은 산,/ 그 안에 담겼을 이치를, 온갖 은유를/ 그러나 비유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안개 속에서 커 보이던 나무 하나,/ 안개 걷히자 앙상한 뼈만 남아 죽어 있네//

화곡동 1 ㅡ반전(反轉) / 박찬
업가業家가 업자業者가 되어 돌아오던 날/ 아내는 배가 아팠다./ 딱총 사건 이후 경제는 낙엽처럼 떨어져 가/ 주머니 속엔 부스러진 잎사귀만 가득/ 멋쩍게 대문을 들어서는 내게/ 핼쑥한 얼굴로 멋쩍게 맞다가 아내는 배가 아팠다./ 초여름 낮의 길고 긴 병실 앞에서/ 오락가락 풋내나는 담배만 맥없이 사루고/ '공주가 더 예쁘죠'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한 귀에서 한 귀로 바람처럼 스쳐 간다/ 병실 창밖으로 공을 굴리는 아이들/ 시간도 소리 없이 굴러가고/ 잠을 깬 아내의 충혈된 눈에서도/ 소리 없이 굴러내리는 것/ '괜찮아 나는 딸이 훨씬 좋으니까'/ -나의 참말에 손을 내미는 아내야/ 나는 안다. 당신의 배보다 지금은 당신의 가슴이/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散骨을 하며 ㅡ어머님께 / 박찬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맑습니다/ 산색 더욱 푸르러 여름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집을 한 채 지어주셨으나 저는 당신에게 집 한 채 지어드리지도 못합니다/ 너무 오래 한 곳에 머물러 고단하고 싫증이 났을 터이므로 저는 당신을 훠이훠이 풀어드립니다// 더러는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십시오/ 더러는 주린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가 먼 땅에 다시 태어나십시오/ 더러는 빗물에 씻겨가 물색 산천어와 노니십시오/ 더러는 나무와 풀도 기르십시오/ 그리고 더러는 꽃으로 피어 가을날 저희들 찾아오는 길 따라 손을 흔들어주십시오/ 당신은 꽃을 많이 기르고 싶다 하셨지요//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

존재의 이름 / 박찬
정의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는 순간 정의는 온데간데없다 평등이 손을 들고 나서는 순간 평등은 사라지고 없어라 공정이여 너는 어디에 있는가 대답 대신 맹한 바람만 휘몰아친다 사랑을 사칭하는 사람아 매미는 날아가고 빈 껍질만 고목에 달라붙어 있다// 술에 취하면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추상 속에서야 존재하지 않는 것 뭐 있으랴 문자로나 소리로나 존재 하는 이름일 뿐// 가을이면 은행잎 노랗게 물들고 겨울이면 하얀 눈 온 산을 덮는다 두꺼운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 여름이면 뜨거운 양철지붕을 식히며 우두둑 소낙비 내리는데...... 믿어야 하리 이 행성 사라져버리는 그날까지는 적어도.....//

오래된 숲 3 / 박찬
그대 눈동자 푸르러 바다가 푸르고 그대 긴 머리칼 넘실댈 때마다 파도 또한 넘실댑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거기에 앉아 있으시렵니까 수평선 너머 사라진 쪽배 돌아오지 않고 물 끝 바라보는 그대 눈동자만 점점 더 푸르러갑니다.// 바다는 깊어 푸르고 하늘도 깊어 푸르고 그대 마음 또한 깊어 푸르러집니다 나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 안에 뭇 생명들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젖은 땅속으로 하얗게 내리는 실뿌리 이끼와 버섯 이름 모를 것들이 아무 걱정도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 밤하늘의 별빛 그대 머리 위에 눈부십니다 새 한 마리 날아와 온 하늘을 뒤덮는다 한들 누가 있어 그것을 알 것입니까 그곳에 앉아 그대로 풍화돼버린다 해도 그대 그렇게 앉아 있는 뜻 그 누가 알기나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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