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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병률 시인

부흐고비 2022. 2. 14. 08:00

이병률 시인
196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1회 현대시학작품상, 제8회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MBC 라디오의 신해철, 유희열, 이소라의 〈FM 음악도시〉 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문학동네 계열사 「달」 출판사 대표이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이 있다,



거인고래 / 이병률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제주 바다 문어 / 이병률
기다란 철사를 두 겹으로 여러 번 휘어 구붓구붓 구부린다/ 몇 겹의 가파른 고갯길 모양처럼 말이다/ 생돼지고기를 철사 안쪽에 끼우고/ 철사의 안쪽 끝을 바위에 정히 고정시킨다/ 깃발이나 대포처럼 의젓하고 양양하도록// 제주 바닷가에서 문어(文魚)의 문장(文章)을 잡는 법이다/ 소풍을 나온 문어는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 철사 끝 뽀족한 부분부터 먹어들어간다/ 고기를 한껏 입에 넣은 뒤에는 몸을 돌이킬 수 없으니/ 철사까지 온몸 한가득 채운 채 다음 국면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이기도 하거니와/ 철썩철썩 파도가 등짝을 쳐대도 돌아볼 수 없으며/ 뒤꿈치를 들고서라도 정면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뱃속에 넣은 것은 혼돈의 철사 다발/ 몸의 색을 아무리 바꾼다 해도/ 그 마지막을 다 적을 수는 없어서/ 먹물을 철철 흘려 마지막으로 쓰더라도/ 한 번도 단단해보지 못한 삶으로는/ 단단한 문장을 완성하지는 못해서// 물컹해진 스스로를 휘감은 여덟 개 붓은 서서히/ 가만히 이번 생의 힘을 뺀다//

사람의 자리 / 이병률
깊은 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집 앞에/ 한 사내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두 손으로 붙들고 서 있다// 할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의지하려는 것인지/ 매달리는 사실은 무겁다// 사내가 나의 집 한 층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사내가 몇 번 더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나뭇가지는 손이 닿기 좋게 키를 내려놓기까지 했다// 어느 밤에/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그 가지가 허공에 팔을 뻗어/ 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새를 날려 보냈는지/ 아이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는 위층 사내도/ 나처럼 내어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 가지 손끝에서 줄을 그어 나에게 잇고/ 다시 나로부터 줄을 그어 위층의 사내에게 잇다가/ 더 이을 곳을 찾고 찾아서 별자리가 되는 밤// 척척 선을 이을 때마다/ 척척 허공에 자국이 남으면서/ 서로 놓치지 말고 자자는 듯/ 사람 자리 하나가 생기는 밤이다//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좋은 사람들 / 이병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 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망가진 생일 케이크 / 이병률
휜 것은 슬프다// 바나나와/ 못과 반지/ 배수관과 철길// 새우의 허리와/ 눈송이의 산란한 낙하와/ 옷걸이의 모서리까지 치자면// 늘어진 것이 아닌/ 휜 것들의 우아함은/ 죄의 방향을 닮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소란들을 다 담으려는 듯/ 부풀어 오르고 점점 휘어지는/ 어느 근원을 향해 차려진/ 아주 오래된 광기//

시인들 / 이병률
1// 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아무것도 아닌 편지 / 이병률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웅큼 쏟아놓은 어느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채라도 지어올리기를 바라자며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두 사람 / 이병률
세상의 모든 식당의 젓가락은/ 한 식당에 모여서도// 원래의 짝을 잃고 쓰여지는 법이어서/ 저 식탁에 뭉쳐 있다가// 이 식탁에서 흩어지기도 한다/ 오랜 시간 지나 닳고 닳아// 누구의 짝인지도 잃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도// 무심코 누군가 통에서 두 개를/ 집어 드는 순간// 서로 힘줄이 맞닿으면서 안다/ 아, 우리가 그 반이로구나//

당신이라는 제국 / 이병률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사랑의 역사 /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겹 / 이병률
나에겐 쉰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 원도 부치고 오만 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장도열차 / 이병률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서로 / 이병률
옥수수수염 숫자만큼/ 옥수수 알갱이가 열린다는 사실// 수염 없이는/ 알알이 옥수수가 맺히지 않는다는 사실// 나에게 관 하나가 꽂힌 것이/ 저 별로 가라는 신호였듯이// 하나 없이는/ 하나가 올 수 없다는 사실//

이사 / 이병률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밤 열두 시 / 이병률
1// 밤 열두 시는/ 떡복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 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섭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메꿀 길이 없다// 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누(累) / 이병률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득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내 마음의 지도 / 이병률
1// 자주 지도를 들여다 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 속을 헹구워 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 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 몸이 다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보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2//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 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 거라 믿었다//

견인 / 이병률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고갯길, 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 속, 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 줄 수 없다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 붓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쳐다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향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레카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닌가 싶었노라 한다/ 기억으로는 삼 십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 찬란한 폭설의 기억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을 사랑도 분명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이가 아프다던 옆자리의 당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봉인된 지도 / 이병률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을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외면 / 이병률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길래 받으러 문산까지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들어오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그릇이 스르르 미끌어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바라볼수록 한기가 몰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보였다/ 친구는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 놓으며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 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사랑의 역사 /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동유럽 종단열차 / 이병률
왜 혼자냐 합니다/ 노부부가 반절 호밀빵을 건네며/ 창 밖을 바라보던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야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 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정면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고 있던 사내가 아침 되어/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니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거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 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사람에 차창이 얼어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로 가려면 이 칸에 있고/ 프라하로 가려면 앞 칸으로 가라고 차장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서쪽 / 이병률
집 밖에서 자신에게 편지나 우편물을 보낼 적에/ 일본에서는 이름자 뒤에 行이라 쓴다/ 죽기 직전 나에게 편지 쓸 일이 있더라도/ 내 집 방향에선 등 하나 켜놓지 않을 테니/ 行이 마땅하다/ 받게 될 애먼이 없으니 行이면 충분하다// 이 책들을 부쳐야 하나/ 이 옷가지들을 빨아야 하나/ 이국異國으로 원행園行 가서/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여/ 주섬주섬 포장 들고 우체국에 들렀을 적에/ 내 이름자 옆에 무엇이 마땅할까 머리를 쓰다/ 그 순간 벅차고 시름했던 적 몇 번 있지 않았던가// 왼발 오른발 걷는 모습 둘이 모여 行이라는데/ 반겨줄 이 없어도 나를 떠메고 가야만 하는 길이 行일진대// 가 닿는 일이 공치는 일이더라도/ 이마에 行자 하나 붙인 채로/ 산 넘다 인적을 만나거나/ 서쪽 어디쯤에선가 行不이 되거나 하는 일/ 아름답기는 할런가//

고욤나무 / 이병률
폭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하나 넘어져 있다/ 오르는 길에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본다/ 아마도 어젯밤 일이었을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비 내려 그 비를 반가워하다 발을 접질렸을 것이다/ 밑동이 한 바퀴 휜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를 고민했던 상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 오르내리는 길 모른 체 하고 개울 쪽으로 누워 스스로 집이며 몸이며 經인 사랑을 염하고 있다/ 밑둥치에서 놀던 벌레들은 얼마나 놀랬을꼬 얼마를 놀라 얼마를 기어 달아났을꼬 넘어지는 큰 나무를 몇 개 가지로 받아내던 이웃 나무는 가지를 잃고 얼매나 흔들렸을꼬/ 어루만져주고 싶어 명치가 어디께인지를 더듬다 뽑혀나간 손톱을 본다 사력을 다해 허공이라도 잡으려 뻗었다가 빠졌을 손톱 소리 쟁쟁하다/ 폭포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큰 나무가 개울물에 배를 띄우고 있다//

그날엔 / 이병률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 199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늬들 /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장의 먼지 낀 유리창이 밀리고/ 그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거워 놀란 감정의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이른 눈사태가 나고// 유물항아리 속에서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마른 몸으로 도착한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얼굴에 쫓겼던 또 얼굴, 당신의 얼굴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여즉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갸륵한 시간임을//

생의 절반 / 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년 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삼십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아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년이 걸린다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아무것도 아닌 슬픔 / 이병률
아이는 마당에 나와 흙을 집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흙을 털어넣습니다/ 아이는 꿀꺽 흙을 삼키고 나무 옆으로 기어가/ 나무허리에 자기 배를 문지릅니다/ 소화를 시키려는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웃통을 벗어던지더니/ 모래를 쥐어 얼마 안 되는 배꼽에 채워넣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그러더니/ 그네에 앉아 거미줄을 올려다봅니다/ 감옥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맨살에 가 닿자마자 피가 솟구치는/ 지구 저편의 소란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물살에 호청이 흘러가듯 창문 너머/ 아무것도 아닌 한 아이가 소문을 씻어내고 있습니다// 마알간 잔을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낯익은 무늬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이면지를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복도의 물기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나는 누구의 편이 되어본 적 없는데/ 숲도 숲의 편을 들지 않았는데/ 편을 먹어 땅을 넓힌 족속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놀다 간 자리를 들어 허공에 대보면/ 눌린 솜의 결들도 허공의 편입니다/ 포도주로 벌게진 얼굴을 허공에 대보면/ 잔을 드는 사이 퍼졌던 소문들도 죄다 허공의 편입니다//

슬픔이라는 구석 / 이병률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야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생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아물지 못하는 저녁 / 이병률
눈발이 쏟아지는 길을 걸어 식당을 찾아냈다. 아무도 없는 식당안을 채우고 있는 소란스러운 냄새, 냄비에 뭔가 끓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고 내심 끓고 있는 냄비에만 마음이 쓰였다. 시장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지 모를 그것이 다 졸아 타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뚜껑을 여니, 두 줄로 포개어져 끓고 있는 두부에 붉은 물이 들고 있었다. 끓으면 넣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놓았을 도마 위의 파 한 뿌리, 그것을 내려다보며 넣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놓았을 도마 위의 파 한 뿌리. 그것을 내려다보며 주인의 부재를 다시 한번 느낄 즈음엔 이미 파를 냄비 안에 집어넣고 난 후였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 숟가락을 들어 찌개 맛을 보고 있는 나./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은 어딜 간 것일까. 객이 냄비를 다 비우고 나서도 오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물기가 내려앉아 얼기 시작한 창문 밖으로 눈발은 그치질 않고 식당 안으로는 문을 닫아 걸어야할 것만 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月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아라//
*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에 나오는 한 구절.

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 / 이병률
三月/ 비워 둔 화분에 고인 빗물이 자꾸 없어지겠구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시간의 기록지 위에/ 또 한 사람을 눕히는구나/ 그대가 까마귀떼 맴도는 바람의 중심에/ 그 사람 입다 간 옷가지들을 걸었구나/ 오지 않은 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그대 모습이/ 저물 무렵 바지랑대에서 빛나는 속옷보다 더 희구나// 四月/ 밤새 별과 그 사이의 어둠과// 집을 찾지 못하는 것들이/ 뒤척이는 소리를 듣느라/ 너의 마음에 결석을 했네/ 헤진 角을 꿰매지 못하는 달 그림자와/ 번호를 지우며 잠을 청하는/ 나무들과 얘기를 하느라/ 한 무리의 짐승들이 떠나는 밤길에 동행하지 못했네/ 七月/ 가을엔 떠날 것이네/ 세상의 옷 벗은 나무들을 사진 찍어 주러/ 짐도 싸지 않고 그렇게 떠날 것이네/ 취기를 빌리지 않고 돈도 갚지 않고 갈 것이네/ 가을과 풍경 사이를 한눈 팔지 않고 직행할 것이네/ 바람 다음에 오는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네// 八月/ 여름 내내 나를 데웠던 윗집 현악기 소리/ 내 살에 와 닿는 울림을 쳐내느라/ 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네/ 더운 바람마저 혈관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날엔/ 누구나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했네/ 몸을 빠져 나오는 찌꺼기들과/ 쥐도 새도 모르게 갉아 먹히는 마음들,/ 그 더미 속으로 목쉬도록 빨려 들어가지 못했네/ 여름엔 지우는 일이 많았네/ 무엇보다 미워하는 일이/ 허무는 일이 많았네/ 十一月// 마음의 등걸에 첫 눈이 쌓이네/ 바람 부는 날이 되어서야/ 기차 소리를 겨우 듣고/ 짤막한 확성기 소리에 밖이 궁금했네/ 누구도 만난 적이 없는 십일월,/ 누구라도 열쇠로 문을 따고/ 어둑신한 내 몸 뒤로 난 길/ 그 한가운데로 내몰아줬으면 했네//

오래된 사원 / 이병률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사람 다니는 길마저 막았다/ 뿌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원의 벽돌이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곧 뿌리 자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래 걸려 나를 다 치우고 나면 무엇 먼저 무너져내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여태 이 벽돌 한 장을 나에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집 / 이병률
창 밖에는 비 오구요 그 창 아래 술 마시자 찾아온 친구가 잠들어 있구요 얼마 마시지 못하고 잠든 친구의 잠 위로 젖은 이파리들이 들이치구요 나는 한밤중에 미역국을 끓입니다 아침에 파업시위 하러 가는 친구가 일어나 먹을지 말지 알 수 없는 국입니다 혼자 사는 치들끼리 서로 멀리 살아야 되겠냐며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 와 준 친굽니다 소리 죽여 푸룩푸룩 미역국이 끓는 동안 친구가 지리산에서 따왔다는 매실로 담가 둔 술을 개봉하구요 꼬박 넉달을 기다린 술 병 앞에 혼자라 미안하구요 창밖에는 비 점점 거세어지고 난 저 비를 다 마시는 듯합니다 잘 익은 인연에 수없이 등 돌렸다 싶어 술맛은 소태처럼 쓰구요 친구는 슬픈 등짝을 보이다 허튼 구호를 외치다 자꾸 까무라집니다 창 밖에는 비 오구요 오래된 창 아래 아침이면 미역국을 먹을지 말지 알 수 없는 사람 하나 웅크려 잠들어 있구요// 우리는 스무 살에 시를 쓰기 위해 집 하나를 빌렸다// 그토록 많은 계단을 올랐다니/ 그토록 막막한 높이에 우리가 감금되었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1/ 내가 시름을 데리고 들어간 움막에/ 너는 약을 준비해놓고 잘 자라 했고/ 밤새 망쳐놓은 흰 종이들을 모아다/ 너는 그 무늬들을 외웠고/ 먼 길에서 지쳐 돌아오면 매운 것들을 차려/ 문 밖에 걸어두었고/ 자살한 친구 생각날 때, 눈감을 수 있게/ 한데로 나가주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지만/ 영영 흩어져 돌아오지 않았지만/ 남겨두고 간 신발들을 나, 달래주지 못했고//
2/ 그리고, 정전/ 방 안의 모든 수평을 더듬어/ 너희가 태우다 말았을 심지에 불을 붙인다/ 팽팽한 어둠이 창 너머에서 빨려들어오고/ 어둠 한쪽 구석, 너희가 떼어버린 미늘창이/ 불길하게 자릴 바꾸는 모습을 본다/ 울부짖으며 과거를 누설하는 그을음들이/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아웅다웅하던/ 방의 냄새를 태우고 있다//
3/ 나의 스무 살 연인은 물 밑에 가라앉은 나무,/ 책갈피 사이에도 구겨넣지 못하는 한 그루 나무,// 문 닫아도 밖에 서 있는 타 죽은 나무//

인기척 /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자전거 / 이병률
녹슨 물이 하늘을 덮는 세상 끝나는 날, 집 앞에 세워두었다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닮은 자전거를 사야겠다/ 성을 물려주지 못하는 개미들의 아비 되어 꽃밭의 사정이나 살피다 세상 끝나는 시간, 자전거를 타고 그의 집과 내 집 사이로 난 오르막길 한가운데를 달려야겠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춥겠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내가 알던 말, 이름 곁에 생각난 듯이 자전거를 세워놓아겠다/ 마침내 추운 바람 불고 어둠 시작되는 세상 끝나는 시간, 나는 맘놓고 불러보지도 못한 이름들 곁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겠다//

저울 / 이병률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그건 아마도 저울바늘이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 힘차게 심장을 잘라 저울 위에 올려 놓으면/ 바늘은 한 자리에 멎기 전까지/ 두근 반과 세근 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요동을 친다는 말/ 심장을 더디다 쿵 하고 올려놓고 싶어 눈이 멀 것 같을 때/ 놀랐다 홧홧해졌다가 몸을 식힌라 부산한 심장을/ 흙바닥도 가시밭도 아닌 그저 저울 위에/ 한 몇년 올려두고/ 순순히 멈추지 않는 바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말//

전생에 들르다 / 이병률
내 전생을 냄새 없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았다면/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고개를 드는 바람이었을 것이고// 내 전생에 소리내어 사람 모은 적 있었다면/ 노인의 품에 안겨 어느 추운 저녁을 지키는 아코디언쯤이었을 것이고// 그 전생에 일을 구하여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살렸더라면/ 사원에 연못을 파며 땟국 전 내력을 한스러워하는 노예였을 것이고// 그전 전생에도 방랑을 일삼느라 한참을 떠돌았다면/ 후생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곳에 돌 하나 올려놓았을 것이고// 하여 이 세상에서는 이리도 무겁고 슬프고//

큰 꽃 보러 갔다가 / 이병률
애초에 이 몸 작고 가볍고 무딘 짐인 줄 알았습니다 허나 가볍지 아니하고 작지 않은 척 저 쏟아지는 꽃들을 다 받치고 서보니 사람이 밞고 지나며 어지르는 일 죄만 같습니다 함양 지나 산청 지나 남원 지나 거창 창녕 지나 무주 지나 저 굽이굽이를 헤치고 살던 사람들 낯을 대하니 저녁 물가에 코를 들이대는 일처럼 그저 비립니다 비비고 비벼 비린 속살입니다// 꽃 보러 갔다가 꽃이나 밟듯// 좋은 사람들 맺은 인연으로 꿀을 훔쳐 돌아오는 날 꼭 열 달을 숨어 살다 배를 갈라야 할 때를 만난 것처럼 영 운전하기 뭣한 밤 길, 차를 몰다 눈감아버렸습니다 동공 안으로 날개 펼친 꽃들이 치꽂혀 눈뜨지 않았습니다 바퀴 타는 내가 나고 어둔 밤하늘에 창칼이 부딪쳐 불꽃이 튀는데도 저는 버젓이 살아 자꾸 뒤돌아보는 목숨입니다 큰 꽃대처럼 꼿꼿이 피 흘리고 서서, 질질 오좀을 흘리고 서서 애당초처럼 마냥 작고 가볍고 무딘 꽃잎 되어 이 슬픔 따라 어디 먼 데로 실려가 잘 삭아도 좋겠다 생각하는 봄 언저립니다//

탄식에게 / 이병률
네가, 내 간을 뜯어가듯 조금이었음 한다// 이빨의 기운을 믿어 나를 물고 내 속을 후려치지 않았음 한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늪이 다 마르고 말라 몸 갈라지면, 모래가루 복받쳐 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 한 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음 한다//

풍경의 뼈 / 이병률
단양 역 지나/ 단성 역 네 평 대합실에는/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국화 화분이 많습니다/ 정 중앙에 탁구대도 있고/ 연못도 있고/ 역기도 있고/ 자전거도 들여다 놓고// 잉꼬도 두 쌍/ 늙은 쥐도 두 쌍/ 물고기도 두 쌍/ 살아있는 것들은 다 짝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上行 두 편/ 下行 한 편/ 열차 시각표 빈칸에는 적요만 도착합니다// 역무원 두 사람이/ 물 끓는 난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희끗희끗 내리는 눈송이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속절없는 풍경 안에 넣어야 할까요//

화분 / 이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화양연화(花樣年華) / 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콘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나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황금 포도 여인숙 / 이병률
1// 혼자 죽을 수는 없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겠노라고/ 한 눈빛이 한 눈빛에게 말을 걸자/ 눈빛이 눈빛을 따르는 해질녘 과일시장/ 먹겠다며 산 반 상자의 포도를 물린 여자는/ 역에서 기차표 두 장을 끊어 사내를 따르게 했고/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창 밖으로 수십 마리 비둘기가 따른다/ 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아니, 난 다시 태어나지 않으렵니다// 더이상 말도 눈빛도 교환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죽자고 한 손을 묶고 있을 뿐/ 뒤를 당부할 일 없으므로 이름도 모른다/ 기차 선반 위에 가지런히 두고 내린 두 사람 가방 위로/ 수십 마리 감정이 내려앉아 가방 속을 어를지라도/ 먼 길이 혼자가 아니라면 그 얼마나 마땅히 다시 돌아올 길인가//
2// 당신 그리 되어 화장하던 날, 마음가짐 몸가짐을 못 하겠는지/ 당신이 머리카락인지 나뭇잎인지를 뚝뚝 잘라/ 화장터 사방으로 내버리던 날/ 한 사람은 당신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지/ 젊디젊은 분한테 어쩌다 이런 변이/ 우리 아들도 밤길 운전하다 사고로 그만/ 아직 결혼을 못 올렸는데 둘이 같이 잘 살으라고/ 영혼이라도 결혼식이라도 올려주자고/ 가마 속으로 두 시신이 밀려들어간다/ 생에서는 알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영혼이/ 여인숙으로 들어가 나란히 꽃으로 타고 금으로 타니/ 베고 누울 것 없어도 되겠다/ 당신과 당신의 당신을 감싼 흰 보자기를 묶거나 풀 즈음/ 생은 몇 방울 포도물로 번져도 되겠다//

별의 각질 / 이병률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 이 부러진 가지 끝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으로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 듯 천천히// 도저히 겹쳐지지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을 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져있는 천칭의 한 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과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져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 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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