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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머리카락 / 정성희

부흐고비 2022. 3. 2. 09:02

제10회 동서문학상 은상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 다음에는 작고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지는 컴컴한 심연 속으로 숨겨진 세계를 뒤진다.

자연에는 여러 형태의 구가 있다. 맨 위에는 둥근 형태의 천체가 있고, 아래에는 공 모양의 사람머리가 있다. 머리카락은 그 자그마한 원 안에 내면의 정기를 양분으로 삼아 육체와 영혼을,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켜주는 신비스러운 왕관이다. 우주의 모체인 태반에서 나와 우리 몸의 제일 윗부분에 위치한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죽었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과거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저축기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늘지만 질긴 머리카락은 시공을 초월하여 늘 말이 많아왔다. 그 한 올은 전생에서 축적된 업장이 그대로 현세에 각인되어 온 무게와도 같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길고 틈새 없이 빼꼿이 들어선 머리숱 때문인지 남들보다 더 많이 엉키고 설킨 삶을 살아왔다.

머리를 빗을 때마다 고이고 쌓인 하루치의 세속사연이 버거웠는지 자신의 몸뚱이를 털어낸다. 때로는 내 부주의로 아까운 머리카락이 뜯겨져나가거나 뽑혀져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게 가느다란 몸에서 엉키면 잘 풀어지지 않는, 그 앙칼진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뽀송뽀송한 갓난 애기머리는 아무리 빗어도 헝클어지지 않듯이, 인간관계도 처음부터 삐끗하지는 않았을 게다. 하나 살아가면서 상호간의 갈등과 오해로 얽힘이 촘촘해지고 칡뿌리처럼 질겨져서 서로간의 인연이 낯설게 엮어지고 억세졌을 게다.

뿌리에서 낙화된 머리칼은 비명소리마저 익사당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바닥 아래로 떨어진 죽은 시체들 위로 바람이 스치자 산 생명체인 양 꿈틀거린다. 잊혀진 꿈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걸까. 아니면 퇴락한 어제의 자투리인연들이 민들레 씨앗되어 새로운 터를 찾아 날아가고 싶어하는 걸까. 땅바닥에 몸을 펴고 누운 모습은 못내 장렬하다.

물구나무로 서서 떨어져나간 머리카락을 주워 어루만져 본다. 내 곁으로 여러 사람이 스쳐갔고 또 그 숫자만큼의 인연들이 오고갔지만, 저 머리카락과는 전생의 인연 같은 남다른 감정이 인다.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의 굴레에서 엿가락처럼 길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인연이었는데....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그 인연을 유지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붙잡고 싶은 것들은 왜 그렇게 쉬 사라지는지....

부러진 인연에 못을 박아 고정시키면 그 만남이 처음 자리로 되돌아갈까. 아서라 말어라. 코딱지 둔다고 살이 되랴만은, 내게서 멀어질 때마다 마음은 늘 허전하고 못내 아쉬워진다. 떨어져나간 머리카락을 다시 되돌려 붙일 수가 없듯이, 한번 맺은 인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이전의 원점으로 회귀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기에 애꿎은 신의 탓으로 덤터기 씌워 억지를 부려서라도 본자리로 옮겨놓고 싶다.

벌은 생존을 위해 꽃으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꿀을 따고 떠나지만, 그 꽃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러한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진다면, 헤어짐에도 상처에 대한 면역이 생겨 이토록 관세보살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한 가닥의 머리카락은 연약한 끈에 지나지 않지만 한시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가 빠지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메워 보완해주면서 쉼 없이 유전해간다. 떼를 쓰는 욕망에 시달려온 늙은 머리카락이 진 그늘사이로 검은 향기를 담은 어린 싹들이 또 하나의 세력을 뻗치려한다. 잘못된 인연의 흔적을 지침서로 삼아 그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인연이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신의 배려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한 생각 덜어내니 마음 한 켠에 아픔으로 자리하고 있던 아쉬운 인연보다는 아직도 내게 다가올 인연이 많이 남아있음을 신의 또 다른 축복으로 여겨진다.

검은 차도로를 뒤집어 쓴 과년한 머리카락은 대기 속의 바람을 누비며 군무를 추는 듯 날렵한 자신의 몸매를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파도처럼 구불구불 너울거리는 머리카락의 풍요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관능이 엿보인다. 한때 염색과 탈색, 파마와 곧게 펴기를 하면서 자아도취적인 환상에 빠져 인두로 지져지는 고문을 겪어야 했던 여린 머리카락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내 젊은 날의 부질없던 혈기와 무지했던 편견으로 생채기가 난 아까운 인연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 또한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스 헤모니아의 늙은 마녀가 나의 머리에 독이 든 물을 적신 것이 아니라, 인연을 소홀히 했던 바로 나 자신이 나의 머리에 독을 발랐던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태풍이 바닷물을 뒤엎듯, 젊음이 귀밑에 감춰진 세월 속으로 파고든다. 머리 가득 메워준 검은 체취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은 매양 봄이라 생각했던 검은 숲에 하얀 서리를 뿌리며 달아난다. 아무리 잡아보려고 애를 쓰고 소매를 걷어보아도 잡히지가 않는다. 가을이 내린 색 바랜 머리카락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다. 머무를 때와 질 때를 아는 늙은 머리카락의 해탈을 가슴 깊이 심으며 패기만만했던 젊음을 가만히 무릎아래 내려놓는다. 내 의지로는 마음을 헹구지 못하니 귀밑머리 스며드는 흰서리는 어쩌면 거듭남을 허락하신 신의 심부름꾼일지도 모른다. 뱀 껍질처럼 묵은 허물을 떨구어 내는 늙은 머리카락의 되새김질은 허투루 살아온 인연을 단단히 여미게 하는 채찍이 되어 나의 현재를 묻는다. 기왕에 지나간 인연은 돌이킬 수 없지만,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인연이 주어진다. 아침에 창을 열면 또 다른 하루치의 인연을 만나는 것은 살아가는 잉여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 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하나로 스며들 수 있는 그런 넉넉한 품새로 내일의 인연을 품으리라. 하얀 서리는 영혼을 덮어주는 이불이 되어 대장편서사시와 같은 초로의 인생에서 천지의 충만함을 전해준다.

다시 거울 앞에 앉아 빗질을 한다. 세상의 인연을 붙들어 매듯 정성을 들여 머리를 곱게 매만진다. 나이가 들수록, 등이 굽을수록, 목소리가 안으로 잠길수록 머리카락의 엉킴은 가벼워진다. 헝클어진 인연들이 하나둘씩 빗어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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