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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손병걸 시인

부흐고비 2022. 3. 15. 14:15

손병걸 시인
1967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1997년경 중도 실명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항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등이 있다. 2006 제10회 구상솟대문학상 본상, 2008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2009 전국장애인근로자문학상 국회의장상, 2011 제6회 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 2011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1 2분기 대한민국 우수문학도서 선정-『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2013 대한민국장애인음악제 작시부문 대상, 2013 중봉조헌문학상을 수상했다. 현 법무부 보호 관찰소 강사.

 



3월 / 손병걸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들을 하곤 해// 그러나 창을 연 건/ 언제나 투명한/ 저 바람의 손끝이야// 막힌 망막을 녹이듯/ 바람은 어디든지/ 있는 힘을 다해/ 틈을 만들곤 해// 안과병동 창 너머/ 씨앗 한 톨/ 언 땅을 뚫고/ 파릇파릇 돋아난/ 키 작은 저 새싹도 그래// 이맘때면/ 저마다의 이름으로/ 혹은, 이름 없이도/ 몸을 여는 모두가/ 새로운 계절이야// 손끝으로도 볼 수 있는/ 온통 푸른 봄날이야//

낙하의 힘 / 손병걸
모든 물질들은 때가 되면 떨어지고/ 떨어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일어난다// 그때도 그랬다, 천수답 소작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쌀독 탓에/ 수백 미터 갱 속, 아버지의 곡괭이질과/ 시래기 곶감 담은 대야이고 눈길을 헤치던 어머니의 힘으로/ 우리 남매는 교복을 입고 푸르른 칠판을 바라보며/ 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 앉아 왔다// 어느덧, 딸내미 책가방도 무거워 가는데/ 떨어지고 떨어지는 허기진 살림 탓에/ 아내는 새벽부터 출근을 서두르고, 나는/ 채 익숙지 않은 흰 지팡이를 펴고/ 늘, 시큰둥한 면접관을 만나러 간다// 떨어지는 힘으로 제자리를 잡는 일이/ 어디 우리네 살아가는 일뿐일까/ 이를 악물고 비바람을 견뎌 온/ 꽃봉오리가 펼친 꽃잎이 떨어지는 힘으로/ 덜 여문 열매가 익어가고, 땅은 또 씨앗을 품듯/ 떨어진 이파리가 겨울나무의 발목을 덮어주며/ 기꺼이 썩어주는 열기로 봄은 돌아오는 것/ 보라, 떨어지는 별들의 힘으로/ 못내 구천을 떠돌던 가난한 영혼들이/ 하늘에 내어 준 빈자리에 자리를 잡듯/ 그 순간, 별똥에 소원을 비는 것도/ 다들 낙하의 힘을 믿고 있는 탓이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 손병걸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손가락 끝에 박힌 눈 / 손병걸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빛의 경전 / 손병걸
점자책을 펼치니/ 와르르 쏟아진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팽팽한 점자처럼 별들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기에/ 거대한 경전을 읊는 것이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삶이/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라고,// 밤새 소곤대는 별들을 따라 걷다 보니/ 짓무른 손가락 끝이 화끈거리고/ 어깻죽지 목덜미가 뻐근하지만/ 몸속에 알알이 박힌 별들 탓일까?// 창문 너머 별빛 점자를 찍어가는/ 가파른 새벽 발소리/ 맨홀 속 은하수, 물소리도 환하다//

하얀 도화지의 소리 / 손병걸
빠끔히 열린 방문 사이로/ 딸아이 그림 그리는 소리 흘러나온다// 하얀 도화지를 간질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소리 소리가/ 소나무 두루미 해바라기 바다가 되어/ 형형색색 살아나는 그림// 오늘은 마음속에 자란 풍경 한 장을 떠올리며/ 살짝 밑그림 그린 뒤/ 손에 쥔 붓의 농도를 고민 중이라 한다// 짙은 지하방 어둠을 지우듯/ 촉촉한 는개 덩달아 유리창에 붓질하는 밤// 비 그친 새벽 소실점 찍힌 하늘이 환히 열리고/ 햇볕 머금은 푸른 강물 일렁이는 도화지에서/ 휘영청 떠오른 무지갯빛 향기로운 소리가 난다//

 

아픈 사랑 / 손병걸

고향집 싸리나무 울타리 아래/ 밥풀꽃 한 송이/ 평생을 꿈쩍도 없고/ 제자리에 피어 있다가/ 간신히 찾아온 나비 한 마리/ 끝내 보지 못하고/ 온전히 지고 말았는데// 나비는 제 날개를 꺽지 못했다//

 

손수레 엄마 / 손병걸
어설픈 희망으로 브레이크를 걸지 마세요/ 오늘 한 포대 주워온 빈 소주병 같은/ 헌 옷들을 줍습니다 다림질하듯/ 버려진 폐지를 다반사로 펼치고 묶습니다/ 언젠가 문앞에 쌓아 두었다가 소나기에 엉망이 된/종이 상자를 닮은 살림을 꾸립니다/ 저녁이면 소금꽃 핀 얼굴로 돌아와/ 시커매진 형광등을 갈아 끼우고/ 식은 찌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립니다/ 투병 중인 눈먼 아들 입꼬리가 올라가는/ 훈훈한 방바닥, 미역국 때문에/ 가끔은 밤에도 손수레를 끕니다/ 애당초 먼 훗날의 꿈과는 관계없는/ 생활입니다 깨진 병에 손을 베인 상처가/ 아물 틈 없이 이마의 주름 같은 골목을 뒤집니다/ 얼마 전엔 쇳덩어리 싣고 고장 난 손수레처럼/ 등골이 휜 폭삭 늙은 할머니,/ 깊은 밤 쪼그라드는 몸을 둥글게 말아/ 캄캄한 우주 속에서도 덜컹덜컹 바퀴를 굴리며/ 골골골 찌개를 끓이는 재활용 요리 전문가// 엄마는 스물네 시간 자전하는 지구입니다//

민 / 손병걸
순우리말로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엔/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스며 있다// 얼추 수십수 년은 되었으니/ 들이켠 소주병과 막걸리통이/ 얼마나 될 것이며/ 못질 없는 나무탁자에서/ 떨어진 사발이며 소주잔은/ 또 얼마나 될까// 야트막한 골목을 오르던 예술인과/ '호헌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청춘들이며 동일방직 여공들이며/ 인천항구 부둣가 하역노동자까지/ 그 많던 발길은 어디로 스민 걸까// 잔을 기울일 때마다 사고(思考)의 균형이 무너지듯/ 삐걱거리는 의자의 어지러운 기억만큼/ 없기는 없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목놓아 부르듯/ 발소리들을 기다리며 나만 혼자 엉엉 울다/ 툭 놓쳐버린 소주잔 깨지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후벼파며 잇바디를 흔든다// 한때는 내 몸부터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간혹 인상부터 찡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없다 전설이 된 이야기가 빼곡히 스민/ 벽 속에서 누구라도 뚜벅뚜벅 걸어 나와/ 쌈판이든 술판이든 한판 붙자// 음각된 사랑이 가듯 동지들이 가고/ 어깨를 토닥여주던 늙은 시인도 가고/ 혼자 울다, 혼자 분노하다, 혼자 취해/ 한 세기가 캄캄해져 가는 자정 무렵// 먼발치 발소리의 눈동자가 반짝이듯/ 골목길을 밝혀주는 민(民)주점 주마등 하나//

완전한 아침 / 손병걸
죽자사자/ 밤새 달려간 땅끝 바다// 어둑어둑한 수평선에서/ 시뻘건 해가 불쑥 솟아오르자// 궁극이다 두루뭉술 부풀어 오른/ 엄마의 배를 닮은/ 적나라한 궁극이다// 모든 생의 끝과 시작이/ 다른 말, 같은 의미이려니// 더는 궁싯거릴 수 없다// 어둠 속에서도 햇빛은 있고/ 얼마든지 있고// 누구나 그 자리에서/ 아기 울음 벅찬 아침은 온다//

어둠이 환하다 / 손병걸
직접 보거나 만져 보며/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며 살아왔다.// 눈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을 때도/ 쉬지 않고 눈을 움켜잡았고/ 시력을 완전히 잃어 버리던 그날까지도/ 두 눈동자를 굴려 보며/ 결코, 욕심을 놓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눈은 자꾸 함몰되어/ 검은 눈동자가 허옇게 흉해지고 있지만/ 이즈음에서 나는 꼭 확인하지 않아도/ 믿어 버리는 여유를 배웠다.// 앞으로 걸으며 뒤를 보아야 하는/ 그 걸음은 얼마나 불안한가/ 돌이켜 보면 나의 생은 얼마나 많은/ 확인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었는가// 보일 듯 말듯 그때가 답답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쉽게 믿어 버리며 산다는 것에/ 나의 어둠이 환하다.//

하모니카 / 손병걸
산다는 것이/ 들숨 날숨 몰아쉬며/ 숨이 넘어가도록 땀을 쏟는 일이겠지// 매우 길게 조금 짧게/ 매우 높게 조금 낮게/ 빨랐다 느렸다 쉴새없는 저 곡조는/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겠지// 때론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때론 환한 웃음 짓는 것도/ 숭덩숭덩 뚫린 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 파이고 뚫리지 않고서야/ 어찌 애달픈 곡조가 흘러나오겠어/ 그래 바람 찾지 않는 계곡에/ 어찌 아름다운 노래가 있겠어// 도 하 미 하 솔 하 시 하/ 도 하 하 하 파 미 레 하/ 아무렴 살아있으니 멈출 수는 없는 노래지//

푸른 신호등 / 손병걸
햇살 좋은 오후,/ 오랜만에 나서는 외출이다.// 그날도 지하철 역 앞 버스 정류장/ 보도블록에서 봄볕이 튕겨 오르고/ 까만 눈동자들 와글와글 대고 있었다.// 그 순간, 건너편 신호등에/ 빨간 눈이 감기고 파란 눈이 끔벅일 때/ 일제히 사람들 아스팔트로 뛰어들었지만/ 흰 지팡이를 든 하얀 눈동자의 아저씨는/ 낡은 전봇대처럼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사람들 감전이라도 될 듯/ 주뼛주뼛 빙 돌아 멀어져 가고/ 나는 멈춰선 채 파란 눈짓을 몇 번 더 보았지만/ 끝내 그 아저씨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그 후 십수 년이 지나/ 내 손에도 흰 지팡이가 들려 있고/ 우뚝 선 내 몸을 빙 돌아/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고/ 내 심장에는 낡은 전봇대 하나 박힌 채/ 시도 때도 없이 파란 눈이 끔벅이고 있다.//

시소 / 손병걸
봄볕이 쏟아지는 오후/ 놀이터 한쪽 시소를 향해/ 아장아장 아이들이 모이고 있다.// 시소에 탄 아이들/ 솟구쳐 오를 때마다/ 별을 따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늘,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는/ 어른들의 세상을 생각했다.// 까르르 까르르 놀던 아이들/ 어느새 제각기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슬며시 걸음을 옮겨/ 시소 한쪽에 걸터앉았는데/ 시소는 무리한 꿈을 품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포기하며/ 또 하나의 별을 건지는/ 아름다운 승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모기 / 손병걸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은 듯/ 힘껏 귓불을 찌르는 모기 한 마리/ 문득, 비행소리가 불안하다/ 그래도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옳게 꽂히지도 않는 촉수로/ 금시 또 내 귓불 주위를 앵앵거리는데/ 오늘도 꼬박 밤샐 것만 같은/ 어이구, 저 징그러운 철야근무/ 그래, 넌들 어딜/ 오체투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연명(延命)이야 하고 싶겠느냐/ 쫓기고 쫓겨 다니며/ 생과 사의 계절을 잃어왔던 건/ 비단, 너 뿐만은 아니다/ 산동네 오르는 캄캄한 골목엔/ 타닥타닥 발걸음 소리 끊이지 않고/ 허기 채울 숨 한번 들이켜는 것도/ 잔뜩 휜 허리를 펴고서야 제 맛일진대/ 이 육중한 엄동설한에 어디/ 따뜻한 밥상 한번 펴 본 때가 있었더냐/ 아나,/ 이 피폐한 몸뚱어리라도 뜯어 먹고/ 기어이 우리 함께 꽃향기 가득한/ 저 들판으로 가자꾸나//

단풍나무 / 손병걸
그래, 끝을 알고 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싱거운 일인가// 끝내 온몸이 벌게진 채/ 한 잎 두 잎 살점을 내려놓는/ 단풍나무, 너는 온전히 가을이다// 한때는 무모하리만큼/ 꽁꽁 언 세상을 향해/ 연초록 입술을 삐쭉거리던/ 해맑은 모습도 있었다// 한때는 격렬히 달궈진/ 세상을 식혀볼 거라고/ 푸른 꿈을 실어 나부끼던/ 시퍼런 청춘도 있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이/ 다 내려놓기 위한 발버둥처럼/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뻔한 길이라고들 말하지만/ 오늘 아침 세상에 흩어놓는/ 너의 아찔한 피비린내가 없었다면/ 저 바람도 따라오지 않았으리니/ 비로소, 나도 기쁘게 가을이다//

항해 /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폭염 / 손병걸
해수욕장 입구 모래밭에서/ 자동차 한 대/ 제자리에서 헛도는 중이다// 무작정 접어든 길에서/ 한 바퀴도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어디 자동차 바퀴뿐이랴// 시멘트 길바닥에 복사열 이글거리고/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는 발바닥들/ 좀처럼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그때, 해수욕장 입구 슈퍼 아저씨/ 연거푸 양동이 물 바퀴 밑에 붓고서/ 거적으로 젖은 모래를 덮은 뒤/ 천천히 액셀레이터를 밟으라 한다// 괴성을 지르던 자동차/ 간신히 모래밭을 빠져나간 뒤/ 잠시 뒤, 슈퍼 아저씨/ 시멘트 길바닥에 양동이 물 쫙 끼얹는다// 갈 길을 찾은 듯 물길 속으로 뛰어든/ 발바닥 발바닥 밑에서/ 동그란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고/ 아주 잠깐 촉촉해진 지구의 한여름 하루가// 먼 산 너머로 스르르 굴러간다//

맛있는 악수 / 손병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이 온다// 화난 얼굴 찡그린 얼굴/ 우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들이/ 일제히 표정을 바꾸며 온다// 해맑은 목소리들이/ 저마다 손을 내밀며/ 어김없이 내게 온다// 달팽이관을 열면/ 모든 소리가 형체다/ 차 한잔을 나누면/ 빨주노초파남보/ 그윽한 무지개다 간혹/ 는 뜨고도 눈이 부신 칠흑이다// 밤이 더 깊을수록/ 또렷하게 켜지는 이름들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들이 환한 얼굴로 온다// 달빛 속에서 햇빛 속에서/ 강물 속에서 숲속에서/ 먹구름 속에서 허공 속에서/ 맛있는 악수를 청하며/ 내게 온다 앞다투어 달려온다// 떨리는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만지며 나를 흔들며/ 나를 깨우며 파동이 되어 온다/ 볕이 되어 온다 향기로운 표정으로/ 내 몸을 일으키며 멈춤 없이 온다// 까무룩히 꺼져 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연거푸 그들이 온다 온몸으로 온다.//

문제 / 손병걸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청취자 퀴즈가 흘러나왔다// 보기 1, 보기 2, 보기 3, 보기 4// 위 보기 중 정답 하나를 골라 보내주세요// 나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 청취자 퀴즈 말인데요/ 듣기가 맞지 않나요// 다음 날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퀴즈가 흘러나왔다// 듣기 1, 듣기 2, 듣기 3, 듣기 4// 위 듣기 중 정답 하나를 골라 보내주세요//

저녁놀 / 손병걸
하루의 노동을 마친/ 비알밭에서/ 굽은 몸 일으켜/ 남은 힘을 다해/ 산등성이 너머/ 흰 구름 속으로/ 핏물을 수혈하는/ 엄마//

의병의 편지 1 ㅡ이름 없는 뼈 / 손병걸
강기슭에서 뼈가 발견되었다 아무도 이름을 알 수 없었다/ 푸석푸석한 뼈는 할 말이 없고 나라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오래전 무너진 돌무덤 속에 의로운 침묵은/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간간이 쟁쟁했다/ 는개비가 내리고 축축이 젖은 바람은/ 푹 파인 상처 같은 돌 틈에 고이고 고였다/ 그 순한 침묵의 뼈는 켜켜이 흐르고 흘러/ 시푸른 강물처럼 역사를 완성했다/ 나는 오늘 펼쳐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으며/ 새삼 문장이 명백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시린 강물에 손을 씻듯 상형문자를 어루만지는 오후/ 강기슭 배롱나무에서는 꽃향기를 쏟아놓지만/ 핏빛 일렁이는 모래톱에서 의병의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무너진 돌무덤을 휘감던 물의 파열음은/ 성곽에서 뜨거운 기름이 튀는 소리처럼/ 귓전에서 먹먹하게 붉다/ 지나면 아름다운 그림 같은 단 한 줄의 역사/ 이름 없는 뼈들이 활자로 일어서는 글귀쯤에서/ 나는 죽음을 함부로 듣고 해석한 날들을 후회한다/ 단 한 번도 스스로 목숨을 내놓을 충의忠義가 없었던/ 번지르르한 내 이름 석 자가 깊은 강 수심 속에 잠긴다//

화살표 / 손병걸
낯선 건물 난간에/ 점자 화살표 하나 있다// 그 화살표 따라가다 보니/ 오로지 앞으로만 걷는 것이/ 세상살이 같기도 한 것인데/ 일순, 화살표 끊긴 자리/ 느닷없이 길은 지워지고/ 아,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한걸음조차 내딛을 수 없어/ 한참을 망설이던 발걸음/ 슬쩍슬쩍 옮겨 보지만/ 턱턱 앞을 막아서는/ 콘크리트 벽이 두껍다// 그래도 뚫어야 겠지/ 내 몸으로 뚫어야 겠지/ 길을 열어야 겠지/ 내 발끝으로 열어야 겠지/ 거꾸로 날아가는 화살이 있던가//

검은 꽃 / 손병걸
빛이 사라졌다/ 침대로 둘러싼 발소리/ 말끔히 빠져나간 병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찔러대도/ 열리지 않는 두 눈동자/ 나의 어둠이 단단했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몰라/ 흰 지팡이 따라나선 길/ 이제는 끝이구나! 주저앉아 버렸을 때/ 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기// 얼떨결에 뻗은 손/ 손가락 끝에 닿는/ 가느다란 꽃대 끝 꽃 한 송이// 어둠을 움켜쥔/ 뿌리의 힘!//

새벽비는 그치고 / 손병걸
시치미 딱 떼듯 말끔해진 골목길/ 튕겨 오르는 햇볕을 밟고 가다/ 간밤에 떨어진 눈물이 떠오르는 거야// 새벽녘, 창문 너머/ 펑펑 울어대는 하늘에/ 누구나 그만한 멍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거 아니겠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네 보았거든//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한세상 산다는 건/ 남몰래 흘린 눈물 자국 지우기 위해/ 딱 그만큼의 햇볕을 만들어 가는 거//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한세상 산다는 건/ 썩지 않을 아픔 하나씩/ 가슴 속에 꼬옥 끌어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걸음을 내딛는 거//

음각 / 손병걸
순식간에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와/ 어듬을 밝혀 준 당신// 나는 행여나 당신이 떠날까 봐/ 긴 시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나/ 당신은 굳게 닫힌 시건을 풀고/ 행선 모를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허공만 더듬는 오늘 아침 문득/ 서로 어루만져 온 희로애락의 문양이/ 손끝마다 새겨진 등고선 같아서/ 높은 산, 바람이 소용돌이를 치듯/ 내 몸을 통째로 흔든다// 시리고 뜨겁고 크고 작고 가볍고 무거운 바람/ 저 숱한 바람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듯/ 시력이 없는 내 눈앞에서도 멀쩡히 불고/ 사방이 막힌 공허에도 당신이/ 거푸 분다 뜨겁게 분다// 끌어안은 심장, 언어의 마음, 그리고 나부끼는 머리칼/ 차분한 눈길, 손목, 그 체온, 부드러운 목소리/ 해맑은 표정, 발목, 하얀 목덜미, 달콤한 키스/ 이제야 온전히 알겠다 한 몸이란/ 시간이 엉켜 온 체위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내 몸을 빠져나간 당신이/ 산 너머 먹구름 속으로 스민다 해도/ 텅 비어 버린 내 몸속을 휘도는 바람은/ 분다 열 손가락 끝에 음각된 순간/ 내 안으로 불어닥친 그 환한 태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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