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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장이엽 시인

부흐고비 2022. 3. 11. 16:58

장이엽 시인
196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 《애지》 봄호 신인문학상에 모서리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분야 차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AYAF) 대상자 선정,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삐뚤어질 테다』가 있음.

 



삐뚤어질 테다 / 장이엽
나는 늘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한 때는 오줌싸개여서/ 한 때는 아버지가 목수여서/ 한 때는 키가 작아서 자만할 수 없었다./ 한 때는 초라한 내 행색에 주눅이 들고/ 한 때는 마른 얼굴의 광대뼈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다./ 좋은 것 아홉 가지를 합해도/ 모자라는 하나를 당할 재간이 없었던 그때/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기울어졌을 것이다.// 기울어진 내가 비탈에 선 나무가 되려 한다.// 비대칭의 균형을 선택하기로 한 나무./ 삐뚤어지게 앉아 바람 길을 열어주고/ 삐뚤어지게 엎드려 진달래뿌리와 손가락 걸고/ 삐뚤어지게 누워 잎사귀를 흔들어주면/ 구석구석 골고루 햇빛 비쳐들 터이다./ 잔가지 사이사이로 주먹별이 내려올 터이다./ 모난 돌이 돌탑을 받쳐주듯/ 나를 고여 주는 삐뚤어진 생각의 작대기 두드리며/ 삐뚤어지게 뛰어가 시를 부르고/ 삐뚤어지게 서서 밀어줄 테다.//

등(等) / 장이엽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다.// 열거된 각각의 명사 뒤에서 때로는 '들'로/ 때로는 '따위'로 바뀌어 불리기도 하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손님// 솜털로 채워진 낙타의 귓속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위 그늘에 주저앉아 종일토록/ 바람을 기다리는 노루귀가 되어본 당신이라면/ '등'의 구별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여!/ 행여나 부피를 재려고 실린더 눈금을 읽게 될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말고/ 밑에서 올려다보지도 말고/ 눈높이를 액체 표면과 수평이 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당신 옆에서 간간이 물잔 비우는 나 등을 만나거든/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 등을 만나거든// 당신의 이름을 받쳐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기뻐해 주시라./ 당신의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반가워해 주시라.//

송화가루 한 무더기 날아간다 / 장이엽
소나무에 꽃이 피었다// 검은 고양이 그늘 찾아 숨어들고/ 감자밭 고랑 사이로 홀로 남겨진 주전자/ 햇살을 끌어모아 되쏘아대는/ 정오의 시간// 퍽!/ 폭음이 울리더니/ 송화가루 한 무더기/ 바람을 잡아타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수만 겹 꽃가루의 비행/ 희뿌연 먼지 뿜어내며/ 가물가물 흩어진다// 만개한 꽃송이의 일순간은/ 어찌 저리 짧은가!// 베란다 난간에 걸쳐있던 노란 스웨터가/ 소매 걷어붙인 채/ 요동치는 봄날의 심사를/ 기록하고 있다// 구구저꾸 구구저꾸/ 꽃밥 따먹으며/ 같은 말로 몇 번씩 고맙다고 인사하던 산비둘기도/ 내내 떠날 줄 모르고 맴돌고 있었다//

모모의 소지품 / 장이엽
그러니까 이 강아지에게는 이름이 없다. 애완용 강아지가 아니었으니까 부를 일이 없었다. 아니 인형이니까 이름이 없었다. 아니 거들떠볼 일이 없었다.// 화장대 위, 오랫동안 쓸 일 없었던 빨강 매니큐어 뒤에 버려져 있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작은 봉제인형. 이 녀석과 마주쳤다. 녀석의 눈을 들여다본다. 내려앉은 눈꺼풀 때문에 그럴까, 불거진 눈이 슬퍼 보인다. 가죽으로 덧댄 코에는 콧구멍이 없다. 냄새 맡을 일이 없으니까, 라고 이해했다. 귓바퀴가 고정돼 있다. 덮여있다. 귓구멍도 막혀있다. 그래, 들을 일이 없으니까, 그럼 누구도 이름 불러주지 않은 게 서럽지는 않았겠군. 어라, 입은. 가죽 코를 따라 내려온 인중도 있고 입도 있는데 바느질 선만 있을 뿐이다.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 하고 이해했다. 배를 주물러 보았다. 작은 알갱이들이 만져진다. 다글다글 소리가 난다. 언뜻 배고플 때 들리는 꼬르륵 소리 같기도 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먹어, 먹는다 해도 배설할 수 있는 배설기관이 없으니, 구멍이라는 구멍은 모두 막혀 있으니 어떻게 순환하겠어. 인형에 불과하잖아. 만지작거렸다. 슬프다. 구멍이 없는 일이 이렇게 슬픈 거였구나.// 만지작대다가 강아지 인형의 네 다리에 남아있는 실밥을 보았다. 어딘가에 붙어있었던, 매달려 있었던, 매달려 있었을 때는 매달린 그것이 이 강아지 인형의 입이고 코이고 귀이고 항문이었겠다, 는 생각이 문득. 그렇게 살아냈던 한 시절 있었겠다, 는 생각이 문득. 실밥을 잡아 뽑으며 이것이 이 녀석 탯줄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뜨거운 삶의 흔적 하나가 지금 내 손안에 있다는 생각이 문득.//

 

생략법(省略略) / 장이엽
생략법(省略略)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쉽게 생략했고 생략된 것들에 대해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들의 대화는 생략에서 생략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의견의 전반을 생략으로 표현하는데도/ 그들끼리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생략에 익숙한 이들은 뭐든지 짧게 끝냈다./ 그들은 언제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생략이 서툰 이들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를 뜨기 전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인지/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봐서인지/ 주위를 돌아보거나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숨 쉴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말을 했다.// 몇몇은 나에게도 생략법을 써서 접근해왔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단계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실수로 빠트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뺀 것인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숨어있는 생략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불명의 정체를 생략해야만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생략들 앞에 서./ 소리 없는 소리로 말하고 발 없는 발로 뛰어다니다가/ 제멋대로 팽창하고 재구성된 생략법에 잠식당한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위태롭다.//

입술 옆에 생겨난 콩알만 한 물집 하나 / 장이엽
입술 옆에 콩알만 한 물집이 생겼다./ 깨알만 하던 것이 쌀알만큼 커졌다./ 먹을 때 양치할 때 옷 입을 때/ 요리조리 피해 봐도 자꾸만 스치더니/ 벌겋게 독이 올라 기세가 등등하다./ 며칠을 참고 견디다가 허세로 맞서본다./ 비누칠도 벅벅 하고 쓱쓱 문질러 닦아주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숟가락질도 해보는데/ 콩알만 하던 아픔이 쌀알만큼 작아지는 거다./ 쌀알만 하던 아픔이 깨알만큼 작아지는 거다./ 아픔이란 아픔들이 깨알처럼 작아지면서/ 콩알만큼 탱탱하게 부풀었던 물집이 터졌다./ 터진 자리에 생긴 물컹한 딱지를 보고/ 입술 옆에 묻은 것을 닦아내라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신호를 보내온다./ 나는 딱지를 살살 어루만지며/ 웃음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콩알만 한 물집으로 돋아난 내 슬픔에 대하여/ 쌀알만 한 물집으로 웅크린 내 슬픔에 대하여/ 고개 끄덕이며 도란거리는 사이/ 입술 옆에 붙어 있던 콩알만 한 딱지 하나/ 단단히 굳어지더니 들썩들썩 일어나/ 슬며시 떨어져 나갔다.//

법성포 덕자 / 장이엽
법성포 굴비에 밀려서 긴 세월 지난하게 살았다는 법성포 덕자/ 어떤 이들은 덕자를 두고 병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참말로, 갸 이름은 덕자랑게! 콕 찔러 주는 한 마디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때로는 서해안 염전에서 갓 올라온 단 소금에 몸을 담근 뒤/ 높은 장대에 매달려 바닷바람을 맞고 싶었고/ 식탁 한가운데 넓은 접시에 앉아 뽐내고 싶은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덕자라는 이름을 찾아 주는 그 마음에 덕자는 덕자인 것이 행복한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위에 할머니 때부터 전해내려 온/ 쥐구멍에도 볕든다는 말,/ 덕자도 안다. 어느 굴곡진 그늘에나 해 뜰 날이 있다는 것을!/ 직선 아니면 굴절 아니면 반사 그것도 아니면 볕은 굴러서라도 들어왔기에//

제3자(第3者) / 장이엽
하루살이가 불빛을 향해 모여들면서/ 거미는 줄을 치기 시작했다./ 거미줄에 잠자리가 걸려들고/ 나비가 잡혔다./ 매미도 달랑거렸다.// 불빛과 무관하던 새들이 행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벽기둥에 바짝 다가서기 위해 파득거리다가/ 거미를 낚아채거나/ 베란다 난간에 앉아 둥글게 말려 있는 먹잇감을/ 콕 찍어 먹기도 했다// 내가 하는 짓이란 발길을 옮기며 주변을 맴도는 일/ 창 안쪽 어둠 속에서/ 하루살이와 거미와 잠자리와 나비와 새의 일순간을 쳐다보는 일// 막대기를 휘둘러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았고/ 발버둥치는 나비의 몸짓도 외면했으며/ 저녁이면 어김없이 환하게 불빛을 밝혀두었으므로/ 어디에도 第3者가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살이가 모여드는 동안/ 거미가 줄을 치는 동안/ 잠자리나비매미가 덫에 걸리는 동안/ 새들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 동안/ 정확히 말해/ 불빛으로 새의 성장에 관여하는 동안// 새는/ 유리창 안쪽의 눈빛을 참고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사육해 어디에 쓰려는지/ 나를 조련시켜 어디에 쓸 것인지...//

나, 가는 길 / 장이엽
폭설이 잦았던 겨우내/ 詩人과 是認사이에서/ 애간장을 태우다가/ 며칠 동안 血便을 보고 말았다./ 처음부터 꼼수 따위는 없었다.//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곰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뎠다는 신화가 떠올랐던 건/ 詩集食口로 살려거든/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 다물고 삼 년/ 엎드려 정진하라는 말씀이었던 것.// 오감은 깨어 있었으되/ 온 마음으로 더듬지 못했던 것인데// 입이 성하면/ 손이 게을러지고/ 눈이 밝으면/ 귀가 어두워지기 마련// 동굴에서 살아남는 물고기가 되기 위해/ 눈을 찌르리라./ 허공을 가르는 새가 되기 위해/ 뼈를 비우리라.// 나가는 길은 없다/ 오직/ 나, 가는 길이 있을 뿐!//

모서리 / 장이엽
모서리라는 말은/ 보이는 것에 대한 한계점이다// 벽과 벽이 만나는 경계여서/ 내 눈이 다른 곳의 사물과 소통하지 못할 때/ 기어이 돌아가서야 만날 수 있는 미래다// 다면체의 전개도를 펼치자/ 나는 종선을 탄 어부가 되어/ 어스름한 저녁바다로 밀려간다/ 출렁이는 잔물결너머/ 아득한 수평선이 어둠에 묻혀 가는데/ 날렵한 각도 앞에서 머뭇거릴 때보다/ 숨겨진 비밀에 콩닥이던 가슴보다/ 좀 더 낯선 두려움과 통증이 정수리로 쏠리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려하는가?// 정면은 시선이 닿는 곳에서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모서리 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하기/ 뒤돌아보기 없기/ 헛걸음에 상심하지 앟기/ 단념을 깨우는 채찍에 두려워하지 않기// 나는 지금 투명한 기둥에 문을 만들고/ 모서리 하나를 통과하고 있다//

날아라, 탁자 / 장이엽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시시포스가 있었다./ 머물지 못하는 건 운명이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가속을 붙인 무게는 다시/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일은/ 그에게만 선고된 형벌이 아니다// 바닥에 엎드려 네 귀를 세우는 탁자야!/ 엿듣지 마라./ 굽힌 등을 펴려고/ 돌아눕지 말아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흔들리지 말아라./ 턱밑에 불거진 근육의 긴장을 풀지 마라./ 혀 속에 비밀을 간직한 벙어리가 되어라.// 모서리 세우고 덤비지 마라./ 쉽게 다가서지 말고/ 멀어지지도 말아라./ 머리에 이지 못하거든 가슴에 품어라./ 발목에 힘을 모으고 수평선을 그려보는 너,// 시시포스를 대신한 침묵의 등불을 꺼도 좋다면/ 지평과 나란한 평행을 벗어나/ 23.5도의 기울기를 디디고 솟구쳐 날아올라라.//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 장이엽
나는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어떤 수를 곱해도 그 수 자신이 되는/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어떤 수를 곱하는 0이 되어버리는 0은 싫어/ 곱하는 대로 쑥 쑥 커버리는 3,4,5단은 더욱 싫어/ 그저 곱하는 만큼 보여주는 1단이 좋으니/ 내게 들어와 스미는 1단처럼 명랑한 암송이 좋으니/ 나는 1단이 되련다.//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야!/ 속수무책으로 커지는 숫자 앞에서 기가 죽는 아이야!/ 무럭무럭 자라나는 숫자 앞에서 어깨 움츠리는 아이야!/ 지구를 걸어가는 것은/ 한 발 한 발 헤아리는 일도 필요 없는 짓인데/ 18단, 19단을 외워보려고/ 눈썹을 곤두세우는 아이야!/ 지금은 다만, 물결을 읽어야 할 때./ 그 수 자신이 되는 1단과 뛰어놀아야 할 때./ 발밑 그림자와 손잡아야 할 때.//

담장 밑에서 읽은 국화 소설 / 장이엽
갓 스물에 시집와 오십 년 넘게 함께 살았어도 늘 학 같은 사람이었어야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고 정갈해서 노인병원에서 간병인들한테 아랫도리 뵈 주기 싫다고 볼일도 시원하게 못 봤던 게 늬 아버지였니라 우수 경칩 다 지났는데 그날 아침 웬 눈이 그리 많이 왔던고 그 전날 볕이 따숩고 맑았는데 바람 끝이 보드라워서 인자 겨울 다 지났으니 꽃구경 실컷 하겠다 했더만 저녁나절에 한나 둘 떨어지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이 되어서 그렇게 온 천지를 덮었어야 아버지 화초 가꾸는 정성이야 오죽 했간디 재 만들어 오줌 섞고 묵혀서 한두 번 뿌려준 게 아니여 지난해에 죄다 피었다 지고 난 다음 잘 뵈지도 않는 눈으로 한해살이 씨받아 두더니 땅 뒤집고 붙박이 나무들 밑둥치마다 한 삽씩 푸짐하게 뿌려 줬니라 앞다투어 피었다 다 지고 밭 색깔이 수척해졌는데 가을걷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 이장네 이사 가면서 퍼다 심은 저것이 늦게 사 몽실몽실 몽우리가 오르더니 늬 아버지 병원 가려고 가방 챙기던 섣달까지 활짝 웃고 대문 나가는 걸 전송했니라 겨울 지내고 얼른 와서 저거 거름 맹글어 준다 하고선……. 나는 그런다 새벽이면 늙은 수탉 맹키로 잠 깨서 푸드득 홰도 쳐보고 늦게 지는 새벽 별똥 한 바가지씩 퍼다가 해뜨기 전에 술술 여기저기 뿌려준다 그러면 내가 저 꽃밭 가득 화초도 피워 보고 그 꽃 보러 늬 아버지 오거들랑 냉장고에 사다 놓은 홍어 살이라도 몇 점 저며 저물어가는 가심 속에 뒹구는 이야기나 나눠 볼란다 사는 게 별거 있가니 나오는 순서가 있다 해도 가는 순서는 없니라 서릿발 머리에 이고 뜨건 가심 식히는 가실 국화가 그래서 이렇게 이쁜 거 아니겠냐//

조사 '과'에 대한 오해 / 장이엽
말과 말 사이에는 ‘과’가 있었다/ 그 ‘과’를 이어가기 위해 입속에 조각칼을 종류별로 숨겨 놓고/ 비누에 나무에 꽃잎에/ 심지어 하얀 종이의 심장까지 말의 문양을 새겨가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을 살고 있노라는 당신의 말에/ 나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군요 라고 답했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표현한/ 나의 감정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면서/ 당신은 기다란 여백에 화살표를 올려놓고 음 음…하며 배회하고 있었다/ 말줄임표 사이로 감추어진 거리는 얼만큼인가// ‘과’가 징검다리로 놓여 있을 때/ 나는 다리가 짧아 건너뛸 수가 없으면서/ 생각은 이미 넘겨짚음으로 저편까지 건너가/ 당신의 마음을 알겠다고 경솔하게 내뱉어버림으로/ ‘과’ 뒤에 이어질 진실에 대한 오해는 깊어진다// 그럼 바람 한 자락 주머니에 담아 다른 하늘 아래로 잘 가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건네는 작별인사도/ 현실은 외면당한 채 말과 글의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사실을 더 이상 다른 이면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말과 말 사이에는/ 마주보는 창문처럼 맞바람이 쳐야만 한다는 걸//

거처(居處) / 장이엽
수목한계선을 넘지 못하는 눈잣나무/ 바위 사이를 곡예하듯 살아가는 산양/ 바위지대에서만 번식하는 망개나무/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터를 잡는 참갈겨니/ 높은 산 계곡이나 습지를 찾아 자라나는 모데미풀/ 어둡고 축축한 나무를 찾아다니는 팔색조/ 얕은 바다의 파도에 휩쓸리며 살아야 하는 거머리말/ 해안선을 따라다니며 사는 상괭이/ 찬 물속의 금강모치/ 부리로 구멍을 뚫으며 살아가는 오색딱따구리// 우리 산하의 깃대종들이다/ 아니다,/ 발붙일 곳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어느 한 곳/ 도처에 터가 넘쳐도 내 발 디딜 곳은 어느 한 곳// 밥이 나는 곳에 눈물을 삼키고/ 집을 세울 곳에 신념을 묻기도 하면서/ 식물이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거처(居處)를 마련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너무 이쁜 여자 / 장이엽
야야, 이 꽃 좀 봐라!/ 참 곱기도 허다/ 나, 이 꽃 앞에서 사진 하나 박아 도라/ 팔순 노모는 꽃 앞에만 서면/ 아직도 여자다// 좋은 그릇 찬장에 넣고 싶고/ 예쁜 옷 입고 싶고/ 윤기 나는 항아리 장독대에 올리고 싶은/ 여전히 살림살이 좋아하는 여자다// 지 눈으로 보고/ 지 이빨로 깨물어 먹어야 맛나다고/ 지 손발로 움직여야 한다고/ 지 귀로 듣고/ 지 코로 숨 쉬다 가야 한다고/ 뭣이든지 지 힘으로 하는 것이 존 거라고/ 친구들이랑 짜장면도 사 먹고/ 굽은 허리 세우고 훌쩍 마실도 나갔다 오는/ 똑소리 나는 여자다// 어떤 날에는/ 단풍 구경 갔다 오니 불 꺼진 방이 서럽더라고/ 마당 구석에 한 촉 난 꽃이 피었는데/ 먼저 간 양반 생각나 그 앞에 주저앉아 울었노라고/ 자식에게 전화 걸어 흐느낄 줄도 아는/ 참말로 꼭 안아주고 싶은/ 너무 이쁜 여자다//

이어폰을 나눠 꽂고 / 장이엽
가끔 아이들과 이어폰을 나눠 꽂고 음악을 듣는다./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눕거나 의자에 딱 붙어 앉아/ 건들건들 어깨를 흔들어보고 손가락 장단도 맞추면서/ 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주파수를 찾아가는 한쪽 귀와/ 혹은 기울어지지 않게 균형을 맞추는 한쪽 귀/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다가 불쑥 나누는 몇 마디/ 이거 좋은데, 옛날에는 말이지/ 뜬금없는 궁금증과 대답들이 이어졌다가 끊기다가/ 이어졌다 끊길 때 틈을 채우는 가수의 목소리/ 연주되는 악기 소리 그 너머로 읽히는 각자의 성향들/ 아이는 목젖이 보일 듯 시원하게 뚫리는 고음에 빠져들거나/ 나지막이 속삭이는 우울한 음색만 들으려 하기도 한다./ 나는 낙숫물처럼 또박또박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하고/ 금속성의 맑은 음색을 선호하기도 했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치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함께 음악을 듣는 순간조차 때로/ 혼자만의 여행을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곤 하는 길/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낯선 감정을 관찰하면서/ 일상의 소음을 멀리 두고 서로의 간격을 조절해 간다는 것/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휘파람으로 나는 허밍으로 따로 또 같음을 위하여/ 가끔 이어폰을 나눠 꽂고 음악을 듣는다.//

나는 / 장이엽
나는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원숭이/ 나는 꼬투리 속에 갇힌 콩알/ 나는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나방/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귀뚜라미/ 나는 뿌리 없이 꺾어 심은 마른 개나리/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배고픈 개미/ 나는 바비 인형의 벗겨진 신발 한 짝/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 나는 억새풀의 반짝이는 은비늘/ 나는 사하라 사막에 숨어 있는 모래늪/ 나는 빙하 속에 정박당한 낡은 어선/ 나는 황태덕장에 걸려 있는 눈 뜬 명태/ 나는 사라진 명왕성의 먼지 입자/ 나는 탱탱하게 몸을 조여 울리는 소가죽/ 나는 투망에 잡힌 물뱀/ 나는 앙코르와트의 오래 된 사원/ 나는 악보 안의 4분 쉼표/ 나는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 나는 어항 속 수초 사이를 누비는 체리새우/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와 달리기를 하던 톰슨가젤/ 나는 개망초 얼굴 위로 예고 없이 쏟아지던 소낙비/ 나는 징검다리 사이의 물보라/ 나는 이솝 동화 세상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나는 한 발 한 발 으름넝쿨을 재며 걷는 어린 자벌레/ 나는 천축국을 찾아가는 근두운 탄 손오공//

고무줄놀이 / 장이엽
편 나누기가 늘 공정한 것은 아니므로/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기둥 발목에 걸린 검정 고무줄이 무릎 위로 올라가도/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고무줄을 밟고 월화수목금토일/ 고무줄을 뛰어넘고 월화수목금토일/ 칙칙 떠나갈 수 있다// 번개같이 달려와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방해꾼만 없다면/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씨 房 / 장이엽
아주 작은 방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신다//

 

 

지렁이의 꿈틀처럼 / 장이엽
혼자 우는 게 어때서?/ 혼자 울다 코 막히면 코 풀고/ 혼자 울다 지치면 잠자고/ 혼자 울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혼자 울다 울다가 오줌보 가득 눈물 고이거든/ 혼자서 시를 써야지/ 혼자서 산에 갈 테야!/ 혼자 울며 참았던 오줌발을 날려줘야지// 지렁이를 봐!/ 귀도 없고 눈도 없이/ 뭉툭한 몸매로 꿈틀꿈틀/ 꿈의 틀을 짜는 걸/ 흙 한 입 삼키고 땅속에 바람길을 열고/ 흙 한 입 삼켰다 밀어내는 뱃심으로/ 단단한 지구를 흔들고 있는데/ 애찌러루르르 애찌르르르루/ 풀벌레들 카랑카랑한 목청에 화음도 넣어가며/ 그렇게 맑디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는데//

눈부신 산란 / 장이엽
닭장 실은 차가 지나간다/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고약했다/ 털 빠진 모가지 위로/ 희번덕대는 붉은 눈알들이/ 허공으로 끌려가는데/ 층층층 높이도 쌓아올린/ 쇠창살 사이/ 구석 군데군데에/ 가만히 모셔 놓은 하얀 알들/ 눈부신 산란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속삭임이다/ 애틋하기도 하여라/ 웅크려 앉아/ 기어이 알을 품고 있는/ 엄마 닭도 보였다//

계란판의 곡선이 겹치는 동안 / 장이엽
트럭 위에 계란판을 쌓고 있는 남자/ 호잇~~짜 후잇~~짜 추임새를 넣어 가며/ 흔들 산들 리듬을 타고 있다/ 아슬아슬 높아지는 탑에 음표를 걸어 주는 저 흥겨운 몸짓,/ 멀뚱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계란판 쌓는 데도 수가 있어요/ 곡선허고 곡선이 만날라도 리듬이 필요하당 게요/ 신명은 없고 신중만 있으면 알이 다 깨져 버리지라// 야무진 입매로 지나가던 곡선 두 줄이 활짝 열린다/ 신념이 신명을 받아들이지 못해 뻣뻣하게 굳어 가던 나/ 오래된 철심 하나 뽑아내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생각 접기 / 장이엽
나는 내 감정을 오려낼 줄 몰라/ 생각을 줄이면 단순해질 텐데/ 종이를 접고 오려서 무늬를 만들다가/ 알록달록한 내 머릿속도/ 반으로 접고 눌러 가위로 오려 내고 싶어진다/ 토닥토닥 만작만지작거리거든/ 날개활짝 편 나비 한 마리 나왔으면/ 풀칠해서 벽에 붙여놓거나/ 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고는/ 생각 없이 누워서 바라봤으면/ 나 어찌할 줄 몰라/ 꽃 속으로 들어갈 줄을 몰라//

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에게 당부함 / 장이엽
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은/ 어린 나를 빗댄 엄마의 표현이었다// 이웃에서 가져온 음식은 단박에 알아채고/ 제 숟가락 아니면 밥을 안 먹고/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입에 대지도 않아서/ 김장김치 한 독을 따로 버무르기도 했던/ 밥상머리에서 부터 까탈을 부렸던 나는/ 말뚝을 갉아대며 날 뛰었던 뿔 달린 염소// 물려 입어야 하는 옷가지며/ 끼어들 수 없는 오빠/ 언니들의 사생활/ 횟가루가 묻어 있는 아버지의 작업복 바지/ 막걸리 냄새가 베여 있는 연장 가방/ 품앗이에 바쁜 엄마/ 그걸 빤히 들여다보았던 내 빨간 눈// 임신 사실조차 모르고 죽을병에 걸렸다고/ 요양하다 낳은 네 번째 딸이/ 뭐 그리 대수로웠으려고, 생각하며/ 나는 나를 너무 멀리 떼어놓았다// 만약 아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아무 김치나 잘 먹는 아이였다면/ 빨간 눈이 없었다면 뿔을 잘라버렸다면/ 나는 지금과 좀 다른 나로 살 수 있었을까//

수국은 헛꽃을 피웠네 / 장이엽
수국이 헛꽃을 피운 것은 참꽃 때문이었네 암술 수술 총총 박힌 꽃무리가 너무도 작아 벌 나비가 찾지 못할까 봐 보이지 않을까 봐 언덕배기 바람 많은 그곳에 서서 꽃잎 하나하나 다 정하게 보듬어 안고 바다를 보면 파란 물을 들이고 노을을 보면 빨강 물을 들이고 탐스러운 헛꽃 송이들 하늘 아래 활짝 펼쳐 놓은 채 오가는 이 눈 코 입 멈춰 세우며 참꽃 열매 뭇별처럼 알알이 영글어가도록 기다려 주었네 휜 등줄기 야위어 삭아질 때까지 지키고 있었네// 제자리에 서 있으려는 몸부림이 그저 삶이었네 비워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실천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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