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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연홍 시인

부흐고비 2022. 3. 16. 09:00

정연홍 시인
1967년 출생.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졸업했다.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5년 《시와시학》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세상을 박음질하다』, 『코르크 왕국』 출간,

1990년 개천문학신인상 수상.

 




세상을 박음질 하다 / 정연홍
세상이 푸석거렸다 대지는 마른기침을 해대며 먼지를 토했다 땅의 뿌리는 목이 말라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렸다 두두두, 누가 대지를 두드리나? 경쾌한 피아노 소리, 나무들이 귀를 세운다 톱니바퀴 물려 돌아가는 소리 요란하다 하늘의 박음질이 시작되었다 재봉틀이 돌아간다 하늘에서 꽂히는 재봉틀의 긴 바늘이 대지를 꿰매기 시작한다 나풀거리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박음질 되고, 흔들거리던 바위도 단단히 고정되었다 온 세상이 거대한 박음질이다 자투리 바늘은 개울을 따라 흘러가고 박음질이 끝난 대지에 십자수 뜬다 경지정리 된 화폭에 초록의 그림이 살아나고, 들판을 들고 일어서는 정체불명의 생명체 곳곳에 초록의 붓질이 시작되고, 빨강 노랑 파랑의 주머니를 터트리는 뱀 초록의 혓바닥 날름대며 땅을 핥는다 누구인가, 이렇게 큰 화폭을 한번에 그려낼 수 있는 자는//

코르크 왕국 / 정연홍
차창 밖으로 코르크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빨간 하초가 드러날 때까지 사람들이 껍질을 벗긴다/ 놀란 눈의 나무들 유리창 너머 나를 보고 있다// 리스본의 골목길에 파두 가락이 뒹군다/ 길을 묻는 내게 소년이 이스쿠두를 보여 준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포르투갈의 후손들이라니/ 지금은 코르크 마개를 만들며 생을 보내고 있다니// 붉게 짓이겨진 상처도 언젠간 다시 아문다/ 새살이 돋고 딱지도 떨어져 나가겠지만/ 기억이 아물 때쯤 사람들이 다시 낫을 들고 올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 해가 지고/ 닻을 내린 선원들이 왁자지껄 골목으로 들어선다// 낯선 거리에 서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인다/ 작은 창이 있는 카페에서/ 이국적인 여인을 만날 상상을 한다// 뒷골목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선다/ 내일은 비가 그칠 것 같다//

쟁기질은 멈추지 않는다 / 정연홍
아버지가 넘어지셨다/ 경지정리가 끝나지 않은 돌밭/ 숨겨진 돌부리의 이빨에 허리 잘린 보습날/ 검붉은 녹물이 수두두 떨어진다/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버린 경운기// 아버지의 어깨에/ 봄바람이 머물러 있다/ 돌기를 멈추어 버린 심장/ 플라이휠이 마지막 회전을 꿈꾼/ 흔적이 논바닥에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기계소를/ 일으키려 애쓰시지만 숨을 놓아 버린/ 문명의 가축은 깨어날 줄 모른다/ 손짓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착한 소를 닮아 있다//

비정규직·초승달 / 정연홍
뱃가죽처럼 홀쭉하다/ 낫을 품고 있구나/ 만월이 되어 웃을 때까지/ 얼마나 오래/ 외로운 저 철탑에 걸려 있어야 하나//

밥무덤 / 정연홍
다랭이 마을에 밥무덤이 있다// 손바닥만한 논뙈기, 식구들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해마다/ 밥무덤에 하얀 쌀밥을 묻는다/ 무덤이 넙죽 밥을 받아 먹는다// 나도 나에게 매일 밥을 올린다/ 솥무덤에서 지은 밥/ 숟가락무덤으로 퍼서/ 나에게 먹인다/ 내가 무덤이다/ 무덤이 밥을 먹고 자란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양식들/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날 닮은 인간, 얄팍한 지식/ 내가 싼 똥/ 다 무덤에서 나왔다// 오늘도 집무덤으로 퇴근한다//


어떤 기록 / 정연홍
휠체어 위로 소금물이 떨어지고/ 허공의 눈동자/ 유리창 너머 겨울새가 날아간다/ 구름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새처럼 살다 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인간의 발목이 그래서 가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새벽녘엔 변기 물을 내렸다/ 설움이 역류했다/ 붉은 녹물이 떨어졌다/ 철과 산소가 만나면 산화된다/ 세상에 남기는 흔적이다// 우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썩거나 허공으로 날아간다/ 갠지스강엔 매일 장작이 타오른다/ 가트의 철봉에 녹이 슬고 손으로 그것을 닦는/ 사람들이 매일 온다/ 타다 남은 뼈를 강물에 띄우며 뗏목이 떠내려간다// 마음에 담아 두면 언젠간 말이 된다/ 풀이 자라나 무덤을 덮는다/ 땅은 이제 단단해졌다/ 잔디는 씨앗을 틔우고 유전자를 남긴다/ 골짜기에 풀이 자라 그 위로 뱀이 지나간다//

발칙한 플라스틱 / 정연홍
플라스틱을 먹는다// 플라스틸 나물 플라식탁 밥 플라식틱 국 플라숯틱 고기 플라소틱 김치 플라수틱 물고기// 플라스틱 밥상/ 플라숙틱 집/ 플라속틱 베개/ 플라순틱 이불// 평생 나만 사랑해 주기로 약속한/ 플라술틱 애인// 플라서틱 자동차를 타고/ 플라사틱 도시를 지나/ 플라ㅅ틱 사출 공장 공원인/ 나// 플라스틱 풀라스틱 푸라스틱 뿌라스틱/ 플라스 인생// 플라스틱 인간/ 플라ㅅㅌ이 지구를 지배한다/ 플라스틱 우주// 플라선틱 비행기가 날아간다// 고래 배 속에서 드론이 발견되었다//

달의 착시 / 정연홍
저 눈깔사탕은 어느 공장에서 만든 것일까/ 어떤 여공이 자기의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한 걸 만들어 낸 것일까/ 혀를 대면 녹아내릴 것 같다// 누군가에겐 달콤하고 누군가에겐 쓰디쓴 알약/ 설탕덩어리를/ 누가 저기에 걸어 놓은 것일까/ 막대기는 어디로 달아나 버린 걸까// C12H22O11/ 포도당과 과당이 결합되어 설탕이 된다/ 공장에서는 오늘도 눈엿(雪糖)이 만들어진다/ 세상이 설탕으로 가득하다/ 달달하다// 사탕을 먹으며 사람들이 깔깔거린다/ 오감이 살짝 마비되는 마약/ 눈보라가 휘청거리는 밤거리, 오늘 밤/ 하늘에서 설탕가루가 쏟아져 내린다//

이소離巢 / 정연홍
최초의 비행은 바람을 만지면서 시작된다/ 낮은 곳엔 바람이 오지 않으므로 새들이 바위로 오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흔들어야 비로소 바람이 온다// 생의 첫 바람을 만져 보는 근육 안쪽/ 팽팽한 긴장으로 살이 떨린다/ 아직은 바람이 연약하다/ 날개를 퍼득이면/ 비로소 바람의 근육이 선다// 한 무리의 바람이 몸을 밀어 올려 주는 순간/ 날개는 바람을 품고 하늘과 평행이 된다/ 바람을 밟고 하늘에 오르면/ 허공은 모두 내 것이 된다//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날개를 펼 수 있다/ 바람의 뼈를 놓치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새는 바람의 주인이다// 바람은 새를 모시려고 우우 운다//

오어사五魚寺 / 정연홍
사람은 본래 물고기였다/ 아가미가 닫히고, 허파가 생겨났다/ 손가락이, 팔이 돋아났다// 신의 계시는 망각되고/ 거짓만 남았다// 직립을 하자/ 하늘은 낮아졌고, 신과/ 동격이 되었다// 잉어 한 마리 날아올랐다/ 스님은 물고기를 환생시켰다// 연못 속에 지어진 절 한 채/ 천 년을 견디고,/ 물고기의 집이 되었다//
* 오어사: 포항시 오천읍 운제산에 위치, 원효과 혜공의 설화가 있는 절.

톱 / 정연홍
아픈 것들은 소리를 낸다/ 벼리고 갈아/ 날 선 아픔이 설움을 비워낸다/ 나무가 썰린다/ 시린 기억은 톱질에도 잘리지 않는다/ 날 하나 세우기 위해 부단히 살았고/ 아들의 날을 세워주기 위해/ 온몸 던져 살아낸,// 무너지지 않는 새 집/ 아무도 부럽지 않을/ 흙집/ 아무도 사가지 않을// 그 터에 있던 매실나무를 벤다/ 번뜩이는 시퍼런 톱날이/ 사정없이 나를 벤다/ 이제는 톱날 세워 줄 사람 없는 쇠붙이/ 챙챙 소리를 낸다// 톱을 놓고 고향을 떠나올 때/ 쇠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상추밭 / 정연홍
갈아엎어 버리고 싶은 시절은 묵정밭 같다/ 초록을 초록으로 알지 못하는 시대/ 쑥부쟁이처럼 키만 자란다// 노동이 노동되는 세상/ 얼마나 부끄러운가// 엄마는 갈아엎어야 한다며/ 금방이라도 괭이를 잡을 심산이다/ 멀대처럼 키만 크고 두꺼워진 상추 잎은/ 노동 현장에 투입된 공권력처럼 거칠다/ 초록도 스크럼을 짜면 무섭다/ 공장 안으로 경찰이 투입된다는 소문은 번지는 속도가 빠르다// 그만 노동운동 엎어버리라고 하시던/ 아버지도 안 계시고/ 햇빛이 총파업 중인 봄날이다// 머잖아 봄날이 짙어지면 잡초는/ 파업 중인 현장으로 나서는 선배처럼 드세질 것이다/ 경운기에 쟁기를 싣고 시동을 걸어야겠다//

곰들의 과자 / 정연홍
아기 곰 두 마리가 과자를 먹고 있다/ 바삭바삭 잘 튀겨진 치킨을/ 뼈째 발라 먹고 있다// 오븐에서 잘 구워 낸 바삭한 플라스틱 과자/ 우기적우기적 두 놈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다가/ 힘센 놈이 한입 베어 문다// 빠지직 소리가 난다/ 어떤 고마운 인간이 이렇게 잘 구워 내었을까/ 어떻게 저런 맛있는 튀김을 북극까지 보낸 것일까// 이빨 하나가 없는 어미 곰도 뭔가 먹고 있다/ 말랑말랑한 우레탄이다/ 노랗게 잘 익었다/ 배불리 먹고 튼튼한 겨울잠을 잘 것이다/ 겨우내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곰들의 잠은 싱싱할 것이다// 북극에 백야가 오고 있다/ 오로라가 곰들의 머리 위에서 발광(發狂)하고 있다//

북천면 / 정연홍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 매일 빵구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야단맞았다/ 면사무소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몰고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 통발 놓고 새벽을 건져 보면 참게가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엔 묘가 많았다/ 우리는 묏등 베고 누워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 뒤란엔 겨우내 써야 할 땔감으로 꽉 찼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는 눈 쌓인 산에서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 뿌려 놓으면/ 토끼와 꿩이 먹었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이 되었다/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 틀어 놓고 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고 등교하였다/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진주로 하동으로 마산으로 순천으로 흩어졌다/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토끼 눈엔 빨간 망개 열매가 열려 있었다​//

북천역北川驛 / 정연홍
완사역 지나면 다솔사역, 다음 역이 북천역/ 완행 열차는 여덟 시 십 분에 도착하였다/ 뽀얀 피부를 가진 시내에서 통근하던 여 선상님/ 담에 크면 색시 삼았으면 했더랬다// 바람이 불면 코스모스가 나풀거리고, 코보와 난 선상님 치마가 뒤비진다,/ 안 뒤비진다 내기를 하곤 했다// 축구부 선상과 결혼해서 열차를 따라 간 하얀 코스모스// 운동회 날 나는 달렸다 축구부/ 남 선상이 미워 달렸다// 일등 상품을 받고 웃지 않았다/ 코보는 코만 훌쩍거렸다// 졸업식 날 울었다 자꾸 서러웠다// 지금은 옥종초등학교 북천분교/ 옛날엔 북천초등학교// 들꽃이 간살부리는 가을에 꼭 가보는 북천역//

신기료장수 길을 꿰매다 / 정연홍
시내버스 정거장 한 켠 신기료장수/ 앉은뱅이 의자 위에 하루의 굽은 등 묶어 두고/ 상처 난 신발들 꿰매고 있다/ 때 절은 공구통 연장들이/ 살아온 날들의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다/ 바늘을 뽑아 올리는 부지런한 손길에서/ 길들의 아픈 부위가 하나씩 아물어 간다/ 사십년 고단한 얼룩의 날들,/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새 길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 튼튼하게 박음질 된 그 길을 따라간// 하동 구례 광양 5일장을 따라/ 평생을 떠돌았을 낡은 구두/ 누구도 꿰매 주지 않던 그의 상처 난 길들이/ 이제는 시장 뒷켠으로 밀려나 있다/ 간간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소문처럼 찾아 주는 이곳/ 더 이상 꿰맬 길 없는 누더기 인생들이/ 서성거리는 오일 장터/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구멍 난 길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진주 / 정연홍
철로엔 콜타르 냄새가 풍겼다/ 06시 10분 완행열차 타고 완사역 지나면/ 진주역/ 3년 내내 기차 통학하였다/ 역마다 열차가 섰고 다라이 인 어머니들이 타고 내렸다/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머스마들이 있었다/ 나는 출입구 손잡이 잡고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였다/ 장면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칠암동 경상대학 지나면 다리 건너 진주기계공업고// 실습 시간엔 밀링을 돌렸다/ 바이트를 연삭기에 갈면 칩이 날려서 보안경을 썼다/ 땡땡이치고 친구들과 막걸리 사 먹곤 했다/ 호송이는 졸업 후 출가 통도사에서 행자가 되었다// 개천예술제에 나가 입선하였고 설창수 선생님을 뵈었다/ 시(詩)보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이 돼라 하셨다/ 어려운 말이었다/ 촉석루 야바위꾼에게 용돈 털리고/ 밤새 남강 다리를 건너 친구 자취방까지 걸었다// 상평 공단 성부공업사에 실습을 나갔다/ 경운기 부품 만들던 작은 회사/ 코를 풀면 까만 콧물이 나왔다/ 잔업하기 싫은 나는 반장에게 찍혀 오래 다니지 못했다// 작은형과 큰형과 동생도 진주에서 학교 다녔다/ 고모는 중앙시장에서 과일 가게를 하였다/ 강남극장은 세 편 연속 상영하던 극장/ 성도식장 아들은 동기였다/ 종종 공짜 영화를 보곤 했다// 군대를 갔고 제대 후 독서실에서 철도직 공무원을 준비하였다/ 책상 칸칸마다 콜타르 냄새가 풍겼다//

기린 / 정연홍
기린의 목은 높은 데 있어서/ 아프리카 초원 어디든 볼 수 있지만/ 뿔은 나쁜 기억들로 자꾸 솟아오르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은 거꾸로 서야/ 예술이 되고/ 발바닥을 펼쳐 보여야 발레가 되지/ 발 구린내를 오래오래 감추고 있다가/ 관중들에게 확 향기를 풍겨 주어야/ 감동을 주지// 오,/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물속에 처박혀/ 헉 헉 발목만 내민 채/ 안녕하세요/ 이게 제 진짜 모습이에요/ 발가락으로 웃으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가면을 쓰고 있지// 칸딘스키는 그림을 거꾸로 보고서야/ 그림을 보게 되었다지/ 거꾸로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화가가 되었다지/ 아방가르드도 그렇게 태어났다지// 거꾸로 보아야 세상도 제대로 보이지/ 사람들이 오른쪽을 보고 있을 때/ 왼쪽을 바라보면 고문관이라는 소리를 듣지/ 난 고문관이 아니야// 세상은 그런 게 아니지/ 사람들은 자꾸 말을 거꾸로 하지/ 나는 거꾸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 건물이 큰 이유는 밀담을 나누기에 좋기 때문이지// 기린은 키가 너무 커 숨을 데가 없지//

수궁가 / 정연홍
깊은 동굴 속 슬픈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때때로 그 짐승은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었는데, 붉은 소리 속에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도 섞여 있다. 평생 동굴속에만 갇혀 산 짐승은 한 번 울면 좀체 그치지 않았다. 우는 것인지, 괴성을 내는 것인지 소리는 나날이 깊어지고, 굵어졌다. 누군가 추임새를 넣는 듯 얼씨구, 소리도 들렸다. 때때로 박쥐들의 날개 소리와 피 냄새가 그 소리에 섞여 하얀색으로 변하였다. 지상의 나무들과 꽃들은 소리의 높낮이를 따라 흔들리거나, 피고 지고 다시 묻혔다. 짐스이 우는 날, 빗소리 같은 북소리도 두, 두, 둥 우렸다 간간이 폭우가 쏟아지고, 폭포로 변한 소리는 슬픈 소리는 물줄기를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달빛으로 변한 온 세상에 빛을 뿌렸다. 사람들이 잠든 마을에도 날아가고, 잠들지 못한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귀신의 울음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죽음의 소리 같기도한,// 누구도 그 슬픈 짐승을 보지 못했다.//

펭귄 잡는 법 / 정연홍
펭귄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알고 남극으로 가야한다/ 펭귄의 천적은 물개와 고래/ 사람을 본 적이 없으므로 착한 이웃으로 생각한다/ 가까이 가면 멀뚱히 쳐다본다// 맨손으로 잡으려고 하다간 부리에 물려 피를 본다/ 날개를 잡으려고 하다간 싸대기를 맞아/ 훈장을 받는다// 그냥 고깔모자 하나를 벗어 씌워주면 된다/ 펭귄이 모자를 쪼다가 스스로 갇히게 된다/ 고깔모자는 펭귄을 잡을 때 쓰라고 만든 모자다// 펭귄의 몸통을 들어 올리면 로켓포를 맞게 된다/ 냄새와 더러움을 남기는 화학탄이다/ 육십 메가 파스칼의 압력은 피멍을 남긴다/ 사람은 칠 킬로 파스칼의 화학탄을 가지고 있다// 펭귄은 두 달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펭귄은 영하 오십 도에서 살아간다/ 펭귄은 날지 않고도 살아남는다// 펭귄을 잡기 전 미안해, 말해보라/ 펭귄은 두 눈을 또르륵 굴릴 것이다//

철탑에 집을 지은 새 / 정연홍
철탑 위 집은 위태롭다/ 까치 두 마리 비닐 천막으로 집을 지었다/ 철기둥 위로 일만 오천 볼트 특고압이 윙윙거리고/ 땅에서는 날아오를 수 없어/ 철탑에 집을 지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다 같은 새인데/ 하늘 한번 날지 못하는 새보다 못한 사람인데// 하늘에는 신이 있고,/ 땅에는 신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법은/ 만인 앞에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집은 흔들린다/ 땅에서 모든 것은 흔들린다/ 붉은 머리띠를 매고 주먹을 불끈 쥐면/ 세상이 흔들리고, 빌딩이 흔들리고// 누가 새 아닌 새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 아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그 자리인데/ 세상의 상처도 그대로인데/ 빌딩 밑 음지를 옮겨 집을 짓고/ 스스로 새가 된 사람들// 하늘을 날아 올라 새가 되어야만/ 새가 있다는 것을 안다/ 부지런히 집을 짓는 새들/ 희망이 부활할 때까지 알을 품는 새들//

공구들 1 / 정연홍
공구라는 이름의 사물이 있다/ 몽키스패너파이프렌치와이어스트리퍼/ 볼트를 조이거나 풀거나/ 파이프를 풀거나 조이거나/ 전선 피복을 벗기거나 자르거나//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이 있다/ 정연홍홍연정연홍정홍정연/ 가족을 꾸려 지구에서 살아간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공구/ 지구에서 대량 생산되는 인간/ 들은 목적이 다르다// 아마존 원주민에겐 그들의 방식이 있다/ 숲이 있어 그들은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아침이면 대로엔 차들이 빵빵거리고/ 철로의 지하철이 철컥거린다/ 색색의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간다/ 빌딩으로 거리로// 일찍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 망가져 못쓰게 되는 공구는 폐기되어/ 고물상으로 팔려간다/ 무덤에 묻히는 인간도 곧 잊혀진다// 새로운 공구가 만들어지고/ 백 년 전의 인간들이 다시 태어난다/ 티벳에는 환생자의 물건을 찾는 행위가 아직 있다//

달의 계곡 / 정연홍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달의 눈물 소금만이 가득하다/ 부르튼 살이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전갈의 독침이 태양을 찌른다/ /그늘 없는 마른 계곡/ 구멍을 파고 벌레가 집을 짓는다/ 먹구름이 땅을 덮는다 바람이/ 먼지를 몰아가자 붉은 빗줄기 쏟아져 내린다 땅 위로/ 상처의 흔적을 밀어 올린다/ 사람은 보여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짐승은 그것이 상처인지 모르고/ 다 보여주며 살아가므로/ 인간처럼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다/ 달의 뒷면 마른 계곡엔/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상처의 안쪽은 자신만이 볼 수 있다/ 달은 하얀 상처를 남긴다/ 달의 계곡에 소금사막이 있다//

box 1 / 정연홍
온다/ 사과 box 감자 box 상추 box 라면 box/ 하루 8시간 내리고 쌓는 것이 나의 업무/ 네모난 box/ 둥근 box는 왜 없는 거지/ box 51개를 옮기고 생각에 잠긴다// 유빙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box/ 입이 없는 box/ 사방이 절벽인 box/ 손으로 들어야 하는 box/ 허리에 힘을 주고/ 어이쌰/ 진열대에 올리고 또/ 올리고// 근육이 box를 받쳐 들어 올리면/ 관절이 box를 받아서 놓는다/ 인간미가 필요 없는 box// 트럭에서 하치되는 box/ 매일매일 내 앞에 쌓이는 box/ 지금 box도 나 같은 box쟁이가 놓고 갔을 것/ 그도 지금쯤 담배 한 대 꼬나물고 있을 것// 각진 box/ 곡선의 유연함이 없다/ 거리엔 사각형 box가 달리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사각형/ box에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자꾸/ 사각형을 닮아 간다//

파놉티콘의 눈 5 / 정연홍
파놉티콘이 꿈속까지 따라옵니다// 까만 잠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먹고 먹고 나의 잠을 다 먹어버립니다/ 10분, 25분, 39분, 43분, 51분,/ 1시간, 3시간, 5시간, 6시간,// 밤이 1cm도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먹을 어둠이 없군요// 까만 밤을 다 먹어버린 파놉티콘이/ 하얀 낮을 토해냅니다/ 줄줄줄 하얀 물감이 나와서 내 방안을 물들입니다/ 나는 하얀 물감 위로 둥둥 떠오릅니다/ 창문이 깨지고 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갑니다// 화단에 떨어진 나는 얼굴이 깨져 피를 흘립니다/ 잠옷을 입고 피를 흘리며 출근합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모두가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합니다/ 찡그린 나는 웃을 수가 없어 억지로 인상을 폅니다// 하얀 물감이 세상을 다 덮어버렸군요/ 태양을 토해낸 파놉티콘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포토그라피 / 정연홍
저 얼굴이 아니다/ 귀신의 그림자/ 애초에 세상에 없던 것/ 빛의 장난/ 가로등이 그린 그림/ 찍히지 않는 내면영혼 없는 그림/ 누군가 나를 복사해 가도 표 나지 않는 서늘함/ 명함 뒤에 숨어 있는 기억/ 공간을 넘어 어디를 가도 나는 알 수 없는 것/ 내 얼굴에 모자를 씌우고 점을 찍어도 알 수 없는 것/ 구름이 영원히 떠 있고 강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 누군가 영원히 죽어 있고 영원히 웃고 있는 것/ 세상을 내다보는 깜깜한 창/ 죽어서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

아프리카 2 / 정연홍
아프리카 초원에 동물들이 전력 질주한다/ 사자가 얼룩말을 추격하고/ 아이들이 맨발로 뛴다/ 가느다란 다리가 기린을 닮았다/ 기린은 긴 다리로 사자의 턱을 으스러뜨린다/ 사자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진다// 수만 마리 누우 떼가 언덕을 뛰어내려 간다/ 앞발이 꺾이고 강바닥에 처박히고 앞의 놈이/ 앞의 놈을 밟고 지나간다/ 악어가 매복해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독수리가 죽음의 냄새를 맡고 하늘 위에 떠 있다// 새끼 누우 한 마리/ 엄마를 찾아 들판을 달린다/ 초록의 잡풀이 세렝게티 들판을 덮어 버린다/ 블랙맘바 한 마리가 발을 스치며 빠르게 사라진다/ 버펄로 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린다// 건기의 아프리카, 아이 하나/ 절룩이며 강으로 가고 있다/ 때 묻은 물통 하나 아이를 따라가고 있다//

천남성天南星 / 정연홍
운남성 옆 작은 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처럼 이쁜 마을 일거라 상상했다 직접 그를 보고 두 번 놀랐다 작고 치명적인 꽃이었다 그가 꺾어준 열매는 핏물이 번지는 산삼꽃이었다 극양(極陽)이었다// 장희빈이 먹은 사약이 그것이었다니,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사약을 마신다 끈을 놓아 버리고 어둠 깊이 침잠하는 느낌이란,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그럴 때마다 천남성이 내게로 왔다 첫 남성이었다 절망적인 극약으로 위장한 당신 나는 소량의 싸이나를 먹으며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뿌리는 호랑이 발바닥이었다 우린 발바닥만 믿는 족속들이다// 잎이 지면 깨닫게 된다 뿌리를 뽑아보면 호랑이가 나왔다 내동댕이쳐도 죽지 않았다 첫 남성은 치명적이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또렷해졌다 화가 오키프는 꽃만 그리다가 꽃처럼 시들었다//

뼈의 감옥* / 정연홍
새들은 북쪽으로 날아간다 침대 위에는 노란색 유리병이 있다 한 방울씩 몸속으로 액체가 스며들고 잠든 여자는 얼굴을 찡그린다 의사는 거즈로 피를 닦는다 여자가 여린 호흡을 한다 몸속에 쇠붙이 창살이 자란다 살 속의 근육은 살을 파먹고 단단한 뼈들은 기억을 파먹고 몸속에 뿌리를 내린다 새들은 날개를 어깨죽지에 붙이고 죽은 척한다// 눈을 뜬 여자의 얼굴이 햇빛보다 하얗다 어제보다 하나 더 창살이 늘었다 희망 없는 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손을 내민다 자라나는 뼈의 감옥처럼 그녀의 절망도 자라났다 도시의 언덕은 쓸쓸하고, 새들은 구름 위를 날며 아래를 내려다 본다 사람들은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가늠하며 내일을 점친다// 누구나 몸속에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자란다 그것을 숨기려 하지만 기둥까지 감출 수는 없다 감옥을 벗어나려는 몸짓마저 가둔다 촘촘히 늘어난 창살은 한 여자의 생을 통째로 가둬 버린다 자기 몸의 간수가 되어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이 되는 병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은 새들의 말을 알아 듣는다//
* 뼈의 감옥: 근육이 뼈가 되는 병

촉지도 1 ㅡ소리를 차는 사람들* / 정연홍
소리를 발로 차네요/ 귀로 보고 눈으로 들으며/ 딸랑딸랑,을 차는 일은 신나죠/ 헛발질로 남의 엉덩이를 차기도 하지만/ 화내는 이 아무도 없지요/ 오프사이드가 없어 누구나 신나게 달리죠/ 운동장에서의 생은 아웃이 없지요/ 우리는 잘 달리고, 잘 찹니다 잘,/ 보이네요!/ 너무 잘 보여 안대까지 하지요// 소리를 차는 마음에는/ 만 개의 눈이 있어/ 만개(滿開)된 세상을 보지요/ 만개된 검은 꽃/ 세상은 온통 꽃밭이죠/ 꽃밭 속의 축구공은 멋대로 튀어 달아나버리지만/ 소리를 보고 소리를 차지요//
* 소리를 차는 사람들: 시각 장애인 축구단

촉지도 2 ㅡ점자點字 / 정연홍
어둠에게 처음 갇혔을 때/ 혼자였다 예고 없이/ 세상은 나를 빼앗아 가버렸다/ 쇠창살보다 두꺼운 검은 적막은/ 나를 절망케 했다/ 햇빛을 잃어버린 날들은/ 춥고 무서웠다/ 죽음보다 깊은 무력감이/ 나를 찔렀다// 칼은 뱃가죽을 뚫지 못했다/ 칼 한 자루로 결정되지 않는/ 생의 갈림길/ 구멍 난 자국으로/ 햇빛이 뚝, 뚝 떨어져 내리고/ 나는 혓바닥으로 핥아 먹었다/ 달고 맛있는 피// 세상에는/ 점(點)으로 된 길이 있다/ 손가락 끝으로 보는 촉각의 길,/ 짚어 가는 곳마다/ 길이 환하게 열린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헤맬 염려가 없으므로/ 어둠속을 떠돌지 않아도 된다// 그 길 위에 서서/ 다시 세상을 내려다 본다//

촉지도 3 ㅡ배 / 정연홍
그 섬에 사내가 살고 있다/ 우물도 없고, 인가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 갇혀/ 몇 년째 유폐되어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손바닥만한/ 섬을 떠나기 위해/ 길을 찾고 배를 만드는 일/ 어디선가 파도소리 들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바다와 구름이 잡힐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도 자주 넘어졌다/ 길은 빛을 숨기고 자꾸 몸을 말았다/ 끊어진 길 끝에 서서/ 세상을 향해 손 내밀었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다/ 손끝으로 바람이 만져졌다/ 바람의 향기는 코끝에 오래 남았다// 구름의 흔적을 쫓아/ 손가락으로 보며 걸었다/ 촉감의 길은 빛에 현혹되지 않으므로/ 헤맬 염려가 없었다/ 혼자 가는 먼 길 쓸쓸하지 않았다/ 만지며 걷는다는 것은/ 엄마 손을 잡았던 것처럼 편안했다/ 촉감으로 선명한 길이 보였다/ 바다 너머 파란 도시가 보였다/ 촉지도는 한 척의 배가 되었다/ 세상을 향해 돛을 올렸다//

죽방렴 / 정연홍
저것은 언제부터 하늘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나 천 년이 넘었다는 저 놈은 사철 짠물에 당당히 서 있다 지족해협, 그곳에 삼각살 그물이 펼쳐져 있고, 원형의 불통이 있다 썰물에 쓸려온 멸어(蔑魚)들을 가두어 그물로 건져내는// 참나무 말목은 갯벌에 천 년 동안 박혀 있다 대(代)가 몇 번 바뀌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천 년 전의 사람들 오늘도 살고 있고, 내일도 살고 있을 것이다 대나무발 촘촘히 바다에 내리고 달빛도 잡고// 걱정 많은 밤에는 파도가 비바람을 몰고 왔다 섬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날 비린내 종일 불어오는 나날 죽방렴도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였다 밤새 번개가 치고, 태풍이 지나갔지만// 다시 천년이 흘렀다//

1234567 / 정연홍
아라비아 숫자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텍스트의 복잡한 사상도/ 숫자로 정의할 수 있다/ 나는 수시로/ .ZIP 파일로 압축되어 광케이블을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엔터만이 보낼 수 있다/ 성명나이직업/ 누군가의 손으로 흘러들어 간다// 나는 주인공이다/ 무대는 지구/ 아파트를 나서면 레이저 조명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면 두 번째 조명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세 번째 조명이/ 나를 조명한다// 슈퍼 스타/ 아이돌보다 조명빨이 세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화각이, 새로운 눈이 나를 담아간다// 파놉티콘의 눈/ 지구의 원형감옥에 카메라 앵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1234567/ 이것이 나이고// 업그레이드되어/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염소와 함께 잔 적이 있다 / 정연홍
작은 방 한편에 합판을 덧대고 볏짚을 깔았다./ 어미 염소와 아기염소를 옮겼다./ 마른 풀을 먹이면 한약 같은 까만 똥을/ 누었다. 합판 너머로 아기염소의 젖 먹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음 메 에/ 자기 전 늘 어미를 불렀다./ 똥 냄새는 견딜 만 했으나, 지린내가 방 안에 진동했다./ 종종 오줌이 합판 벽을 적시며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전생에 염소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기 염소의 눈은 사람의 눈과 닮았다./ 자세히 보면 사람 얼굴이다./ 섬사람들은 염소를 잡으러 포수를 동원했다./ 섬에는 한동안 총소리가 요란했다./ 그 겨울 우리 식구와 염소는 한 가족이 되었다./ 밤에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쩌엉 울렸다. 아기염소는 겨우내 새록새록 잠만 잤다.//

쇠죽을 끓이며 / 정연홍
아버지는 오늘도 쇠죽솥 아궁이에 불 지피신다/ 마른 솔잎 밑불 만드시고/ 솔가지 꺾어꺾어 얹으신 후/ 장작개비 몇 개 던져 넣으신다/ 매운 연기에 눈물 몇 방울 훔치시고/ 후후 입부채로 불 일으키신다/ 어설프게 타오르던 장작도/ 활 활 온몸을 태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저와 같은 것임을/ 가족 위해 온몸 던지는 가장이 저와 같음을/ 타오른 불길은/ 따뜻한 한 솥의 밥이 되고 쇠죽이 되고/ 구들장 어둠 속 거쳐간 저 불길은/ 밤새 노동으로/ 지친 노부모의 허리를 지져 줄 것이다/ 금세 달아 올랐다가 식어 버리는/ 현대식 보일러의 그 간사함 보다/ 은은하고 깊게, 뼈 속으로 스며들어 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저와 같음이 아닐까/ 기름을 넣어 주어야만 불붙는 보일러보다/ 장작 몇 개비만으로도 밤새 구들장을 데워주는!!//

자본의 아침 / 정연홍
자본이 자본을 만나 자본을 낳고, 그 자본이 다른 자본을 만나 또 다른 자본을 낳고, 마침내 세상은 자본의 천국이다.// 자본에 따르지 않는 자/ 자본을 거역하는 자/ 반역죄로 잡혀 간다.// 출근을 한다. 공장으로./ 컨베이어를 타고 특근을 하고 월급을 타고 시장을 보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가고 십 년 만에 아파트를 사고.// 자본주의는 평화와 민주라는 단어를 숭상한다./ 전경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철탑에는 사람이 새집을 짓고/ 큰 집에는 뺏지 단 사람들이 싸우고.// 해와 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바람이 쯧쯧 소리를 낸다./ 욕망으로 뭉쳐진 도시에 홍등이 반짝거리고/ 사산된 아이들이 날아다닌다.// 가장들이 귀가하는 집은 각진 납골당./ 뼈를 뉘여 고단한 이승의 하루를 잠재운다./ 새벽, 하루의 지령이 담긴 메시지가 배달된다./ 주검들이 벌떡 일어나 출근을 서두른다./ 새로운 자본의 아침이다.//

색(色)연필 / 정연홍
시인은/ 하늘의 얼굴을 그리는/ 형형색색의 연필// 물안개 피는 호숫가에선/ 은빛 이슬 머금고// 싱그러운 숲속에선/ 초록빛 편지를 쓰고// 노을 흥건한 나루터에선/ 연짓빛 음성을 싣고// 그리움 묶인 휴전선에선/ 청동빛 울음 담는다// 세월의 백지 위에서//

하늘 엘리베이터 / 정연홍
바람 부는 날 나무에 귀를 대면/ 하늘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소리 들린다/ 와이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부동의 몸짓,/ 육체의 무게를 가볍게 줄이려고 바람이 불 때마다/ 깨금발을 모은다/ 지하 가장 깊은 곳에서 퍼올린 수만 볼트의 전류,/ 나이테는 끝없이 회전하여 전기를 충전하고/ 톱니바퀴를 돌린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하늘로 올라간다/ 내리는 손님도 없고 정거장도 없다/ 종착지도 없이 올라간다/ 수만의 잎들이 손을 흔든다// 지상의 것들 비웃으며,/ 목매 단 사람의 죽음까지 싣고 수직으로 올라간다/ 달리다가 바퀴 빠져나간 엘리베이터/ 방전된 엘리베이터, 간간이 보인다/ 죽어서도 하늘 오르려는 욕망 놓지 않는다/ 말라 죽은 엘리베이터에서 윙,/ 전류가 흐른다//

계단론 / 정연홍
1// 집이 산으로 올라간다/ 녀석의 허리 어깨를 믿고// 달동네 지나/ 뒷산 봉우리까지 올라간 집도 있다/ 올라가기만 하면 척척/ 어깨를 갖다 대는 기특한 것들// 다시 집들이 내려오거나/ 사람들이 올라갈 적에도/ 순순히 넓은 어깨를 내어준다//
2// 한번올라간사람이좀체내려오지않을때도있다그런사람은누군가의어깨에매달려내려오기도한다따각따각발자국소리가어깨에매달려내려오기도한다따각따각발자국소리가어깨에찍힐때마다사람의몸무게를사람의발놀림을받아준다// 그를 비웃는 땅 아래 녀석들이/ 고속승진으로 하늘을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오늘도 누군가의 지친 발목을 단단히 받쳐 일으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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