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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병승 시인

부흐고비 2022. 3. 17. 08:35

이병승 시인, 아동문학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1989년 《사상문예운동》으로 문단에 나왔고, 2009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분 당선되었다. 푸른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영화 콘텐츠 대전 등을 수상하며 아동문학을 시작했다. 시집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등과 아동을 위해 낸 책으로 『빛보다 빠른 꼬부기』, 『차일드 폴』, 『내일을 지우는 마법의 달력』, 『초록 바이러스』, 『톤즈의 약속』, 『초능력 배우기』, 『난 너무 잘났어!』, 『여우의 화원』, 『난다 난다 신난다』 등이 있다.

 



내압 / 이병승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른 해도 적신다.//

한, 시간 / 이병승
지하철 왕십리 중앙선역 벤치/ 낯선 여자와 단 둘이/ 전철을 기다리던/ 20분// 환생이 있고 전생이 있고/ 인연이 있다면/ 그녀와 한 풍경으로 보낸/ 이 시간,//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이 낳고/ 함께 늙어가며 보낸/ 한 세월 같아/ 우주라는 시간 속에서//

시 쓰고 혼났다 / 이병승
일기장 한 바닥 꽉꽉 채워 쓰라고 할 때/ 그러나 오늘도 어제와 똑같을 때// 꾸미지 말고 솔직히 쓰라고 할 때/ 그러나 너무 솔직했다고 엄마한테 혼날 때// 자기 생각을 많이 쓰라고 할 때/ 그러나 아무 생각 안 날 때// 읽은 책을 줄거리도 꼭 쓰라고 할 때/ 그러나 밖에서 친구가 부르고 있을 때// 똑딱똑딱 설렁설렁/ 시를 쓴다, 잛게 짧게!// 그리고, 딥따 혼났다//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 이병승
어제는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죽고 싶었다/ 까닭 없이 세상이 지겨웠고/ 까닭 없이 오그라들었다// 긴 잠을 자고 깬 오늘은/ 까닭 없이 살고 싶어졌다/ 아무라도 안아주고 싶은/ 부드럽게 차오르는 마음//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른 형/ 지금은 싱싱한 야채 트럭 몰고/ 전국을 떠돌고/ 남편 미워 못 살겠다던 누이는/ 영국까지 날아가/ 애 크는 재미로 산다며/ 가족사진을 보내오고/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고기반찬 없으면 삐지는 할머니// 살자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까닭이 없다//

아버지의 수첩 / 이병승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첩에는/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4월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운다/ 커다란 개 한 마리/ 흐르는 강/ 빠리의 어느 하늘 밑/ 쟝 꼭도도 그랬을 테지// 나도 가끔은 아버지처럼 시를 쓴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치와 모욕들/ 이런 저런 일들// 아버지도 그랬을 테지 하면서//

7학년 8학년 9학년 / 이병승
놀이터에 아이들만 오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오신다// 70대는 7학년/ 80대는 8학년/ 90대는 9학년// 8학년 할아버지가/ "범구야, 이리 좀 와 보렴." 하면/ 7학년 할아버지가/ "왜요, 형?"/ 하면서 지팡이 짚고 달려가고// 9학년 할머니가/ "철우야, 하드 하나 먹으련?" 하면/ "네, 누나." 하면서/ 8학년 할아버지가 쪼르르 달려간다// 가끔은 누가 누가 더 형이고 누나고 오빠인지/ 싸우다가 토라져 돌아앉기도 한다//

연어 / 이병승
딸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햄버거 집 알바생/ 래퍼처럼 경쾌하게 주문을 받고/ 달인처럼 손가락을 움직인다/ 틈틈이 테이블을 닦는 손걸레질도/ 제집 밥상 닦듯 야무지다// 요리 뛰고 조리 뛰면서도 말갛게 웃는 얼굴/ 그 아이를 보며/ 햄버거 패티와 도살된 소,/ 환경파괴 최저임금 신자유주의를 운운하기 난처하다// 흐르는 강물이 더러워도/ 강줄기를 비틀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저 혼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즐겁고 씩씩한 한 마리 말간 연어// 고민을 고민 없이 끌고 가는/ 싱싱한 웃음 앞에서/ 아, 정답이 따로 없다!//

대천 앞바다 / 이병승
스물 한살 그 시절/ 사상학습을 위한 대천 앞바다를 향한 행군/ 평발의 나로선 무리였지만/ 하늘은 맑고/ 바람은 좋았네/ 이어폰에선 산울림의 노래 소리 하필이면 떠나는 우리님 상여가가 흐르고/ 무엇이 그리 슬펐을까/ 혁명을 생각하며/ 물집에 주저앉으며/ 내 스물 한살 청춘은 무엇에 이를 악물었던 것일까// 바다/ 대천 앞바다/ 싸구려 여관방/ 껌을 씹던 그 여자/ 화염병도 되지 못하고 독한 술도 되지 못했던 소주병/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 앞에서/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싫었을 뿐// 그 후로 20여년/ 내 앞엔 허락된 것도 없었고/ 금지된 것도 없었지만/ 나는 늘 대천 앞바다를 생각하면서/ 대찬 앞바다라고 속발음하여 보곤 하는 것이다//

냉온 정수기 / 이병승
차가운 물은 컵을 대고/ 한 손으로 누르면 되지만// 뜨거운 물은/ 허리를 숙이고/ 빨간 단추도 눌러야 해// 누군가의 얼어붙은 마음도/ 따뜻하게 풀어 주려면// 한 손으론 안 되지 공손한 두 손이 필요하지//

콩나물국 / 이병승
어머니는 부엌 뒷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장 봐온 한 무더기 콩나물을 쏟아 부은 후/ 철퍼덕 앉아 일일이 콩나물 대가리를 따냈다/ 가끔은 누이들 불러 앉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손만 움직일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속을 썩이는 날에는 거칠게/ 주룩주룩 빗물 떨어지는 처마 밑을 보면서/ 봄 꽃 한창인 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어머니 손끝에서 콩나물 대가리가 톡톡 끊어졌다/ 라디오 연속극을 따라 무겁게 혹은 가볍게 움직이던 어머니의 손가락/ 호르륵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 같던 손놀림/ 그렇게 어머니는 콩나물 대가리를 따고 국을 끓였다/ 내 눈에는 덕을 수 있는 부위를 따버리는 게 아깝기도 하고/ 그런 시간 낭비가 또 있을까 싶었지만/ 훗날 알았다/ 콩나물국은 대가리를 따고 끓여야 맑은 맛이 난다는 걸/ 어머니가 오랜 시간 공들여 따낸 것은/ 콩나물 대가리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머리를 비워야 생이 맑은 맛을 내는 것처럼//

불독개미 / 이병승
호주의 불독개미는/ 종종 향기로운 꽃그늘에 몸을 숨겼다가/ 날아오는 말벌을 낚아채는 사냥을 한다// 몸길이 2.5센티의 거구/ 2미터 밖의 적을 식별하는 예리한 눈/ 사람도 무력화시키는 맹독의 이빨// 위험이 클수록 먹이도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먹이보단 사냥 그 자체의 짜릿한 쾌감을/ 즐길 줄 아는 불독개미// 그래서 이 놈은 개미굴을 나와서도/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이동한다/ 삶도 사냥도 고독한 혼자만의 길이라는 듯//

 

  아동문학가 이병승의 동심이 가득한 동시


초록 바이러스 / 이병승
카페 온에/ 초록이만 나타나면/ 난 먹통이 된다// 머릿속은 엉망진창/ 손발은 달달달달/ 심장은 벌렁벌렁/ 호호호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하얀 덧니 웃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다//

위로 / 이병승
아빠가 희귀병이라는 은영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며/ 울먹이는 은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은영이 손에/ 힘이 풀리면/ 내가 꽉 쥐고// 내 손에/ 힘이 풀리면/ 은영이가 꽉 쥐고//

튀어나온 못 / 이병승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다고?// 나는 뽀족한/ 못이 아니야// 호기심이야/ 질문이야/ 웃음이야/ 생각이야/ 꼭, 하고 싶은 말이야!//

헬리콥터 / 이병승
학교 끝났다, 오버// 신발주머니 가방/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며/ 달린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발이 땅에서 떠오르는 아이들/ 모두다/ 헬리콥터 되어// 난다, 난다/ 신난다//

안 돼 / 이병승
엄마, 친구 초대해도 돼요?/ - 안 돼// 엄마, 게임해도 돼요?/ - 안 돼// 엄마, 오늘만 학원 빠지면 안 돼요?/ - 안 돼// 엄마, 친구 병문안 가도 돼요?/ - 안 돼// 엄마, 공부해도 돼요?/ - 안 돼// 엄마 도마질 소리 딱, 멈췄다/ - 뭐 한다고?//

소나기 속상한 하늘은/ 무슨 할 말이 많은지// 우르릉 쾅쾅/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번쩍번쩍/ 눈초리 치켜세웠지만// 결국,// 후드득 후드득/ 말줄임표만/ 쏟아냅니다.//

고양이 기사 / 이병승
동네 골목 전봇대 옆 으슥한 곳에/ 무시무시한 까만 봉지 괴물/ 빵빵한 배를 퉁퉁 치며 자고 있어요// 고양이 기사가 발톱으로 가르면/ 빨간 리본의 사과껍질 소녀가 나와요/ 참치 캔 깡통 로봇도 나오고/ 신문지 박사와 샴푸의 요정도 나와요// 썩지 않는 비닐 감옥에/ 천 년 동안 갇혀 있을 뻔했다며/ 고양이 기사에게 박수를 쳐요// 으쓱해진 고양이 기사는/ “뭘, 이까짓 걸 가지고…….”/ 깡마른 생선뼈 아가씨 하나 물고/ 담장 위로 폴짝 사라지지요// 하늘이 반달눈으로 살짝 웃어요//

꽃구경 / 이병승
벚꽃 휘날리는 강변길/ 다녀온 우리 가족// 동생은 솜사탕이 맛있었다 하고/ 누나는 새 운동화 사 달라고 하고/ 엄마는 살 빼야겠다 하고/ 아빠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고/ 나는 번데기가 맛있었다 하는데// 멍멍이는 코에 묻은/ 벚꽃 떼려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때린다는 것 / 이병승
벽에 못을 박는다/ 벽도 아프고/ 못도 아프고/ 망치도 아프고/ 못 잡은 손도 아프고/ 망치 쥔 손도 아프고/ 튀는 못도 아프고/ 부러진 못도 아프고/ 윗집 아랫집 귀도 아프고//

15층 아파트 계단 내려가기 / 이병승
엘리베이터 괴물이 꿀꺽 삼켰다/ 내 동생은 내가 구해야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동굴로/ 부리나케 뛰어내려간다/ 마법의 책과 지도가 든 배낭을 메고/ 모퉁이마다 도사린 괴물들/ 마법의 숫자 버튼을 눌러 물리친다// 쇠사슬 괴물 14/ 녹슨 바퀴 괴물 10/ 박스 괴물 11/ 그릇 괴물 9/ 먼지 괴물 7/ 초록눈 괴물 6/ 그림자 괴물 3/ 메아리 괴물 2// 마침내 지하세계/ 괴물의 입을 향해 주문처럼 외친다/ “벌려라, 입!”// 내 동생 도끼눈으로 나온다/ “오빠!! 너무해!!”//

비밀 일기장 / 이병승
과자 먹으며/ 일기 쓰다 잠들었어요// 아침에 개미가/ 꼬물꼬물// 앗!// 개미가 읽을 줄 모르니 다행이에요/ 읽었어도 말할 줄 모르니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앵앵거리는 저 파리/ 앵앵거리는 저 모기/ 뭔가 수상해요// 울고 싶은 내 마음/ 혹시 읽었을까요?//

석구 / 이병승
작년엔 홍석구였는데/ 올해는 박석구가 됐다/ 성만 바뀌었을 뿐인데/ 키가 한 뼘은 더 커지고/ 말도 없어지고/ 어딘가 아파보였다/ 등도 굽고 땅만 보고 다닌다/ 우리한테 석구는/ 그냥 석구일 뿐인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이병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나무는 꼼짝도 않는데/ 언제 컸을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나무는 꼼짝도 않는데/ 언제 꽃 피웠을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나무는 꼼짝도 않는데/ 언제 열매 맺었을까?// 나도 그렇게 컸다는데//

지구의 일기 / 이병승
나는 더워서 입기 싫은데/ 엄마는 자꾸 옷을 입혀요/ 두껍고 딱딱한 콘크리트 옷// 나는 뛰놀고 놀고 싶은데/ 꼼짝 말고 있으래요/ 머리 깎아야 한다고/ 소나무 전나무 갈대 솜털까지/ 자꾸만 깎아요// 나는 아파서 살살 하라는데/ 아빠는 등을 너무 빡빡 밀어요/ 때도 아닌데 구멍 나게 밀어요/ 곰보딱지 같다고 집들을 밀어요/ 산도 밀어요// 나는 따가워서 싫은데/ 엄마는 뭘 자꾸 발라요/ 농약도 바르고 제초제도 바르고/ 냄새 고약한 폐수도 발라요//

등굣길 / 이병승
아침에 꼭 있다// 침 흘린 자국 허연 아이/ 도깨비 뿔처럼 머리카락 삐죽삐죽 솟은 아이/ 왕방울 눈곱 단 아이/ 졸면서 비틀비틀 가는 아이/ 왕왕 서럽게 울면서 가는 아이// 나?/ 나는 또 신발주머니 놓고 왔다/ 헤헤//

여동생 / 이병승
참새가/ 호르륵 호르륵/ 날아갈 때마다/ 파닥파닥/ 쫒아다니는// “오빠, 같이 놀자!”// 개미가/ 획획 방향을 바꾸며/ 지그재그로/ 갈 때마다/ 꽁무니 졸졸/ 쫓아가는// “오빠, 나도 데려가!”//

선풍기 / 이병승
철망 안에 갇혀서/ 뺑글뺑글 도는 게/ 갑갑하다고/ 더운 바람만/ 훅훅// 학교 집 학원/ 학교 집 학원/ 하면서 뛰어다닌 나도/ 훅훅// 엄마 몰래 살짝/ 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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