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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윤인애 시인

부흐고비 2022. 3. 18. 08:58

윤인애 시인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다.

2013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수평을 맞추다』 와

에세이집 『시 훔치는 도둑놈』이 있다.//

 



오작교 / 윤인애
그날은,/ 내가 이승으로 발령받은 날/ 열 달의 연수를 끝내고 첫 출근한 날/ 밤이슬 털고 일어서는 해의 발아래/ 삼일절 태극기가 휘날리고/ 가문 들녘에는 물오른 아지랑이 따라/ 청보리가 남실남실 발목까지 차올랐다고// 어머니의 몸은 소행성의 바깥,/ 푸른 별이어서/ 우리는 별과 별 사이/ 탯줄을 드높게 쏘아 올리고/ 사랑의 말들을 통신했다네// 나의 생일은 오작교/ 저승으로 이직하신 어머니와/ 은하수 통신을 하는 날/ 펄펄 끓는 미역국 한 그릇 받아먹으며/ 이 끝과 저 끝 사이 후드득 떨어지는/ 별똥별 받는 날.//

간을 맞추다 / 윤인애
찌개의 간을 맞추다 문득/ 당신과 나 사이의 맛이 궁금해집니다/ 싱겁고 권태롭거나/ 눈 맞춤조차 인색한, 짜디짠/ 서로를 할퀴어대는 매운맛도 있었군요/ 깊고 시원하게 어우러지는/ 감칠맛은 왜 그리 어렵던지요/ 가까우면 전부를 볼 수 없고/ 멀리 떨어지면 수신이 어려운/ 마음의 거리/ 한 발 앞으로 혹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당신과 나 사이/ 거리의 간을 맞추는 중입니다//

줄 / 윤인애
허기를 채우려고 라면을 먹는 저녁이다/ 뜨거운 국물을 맴돌며 계란이 변명처럼 풀어진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막막할 때/ 가로등 알전구 같은 희미한 미래를 켜면/ 삶의 그림자가 적나라하다/ 무엇을 더하고 빼야 흔들리지 않고/ 외줄타기에 통과할 수 있을까/ 오늘을 닫으며/ 오답 같은 길에 물음표를 밝힌다.//

꽃잎 경전 / 윤인애
긴긴 겨울 동안거를 치른/ 봄,/ 벚나무 가지마다 꽃잎 경전을 펼쳐 놓는다/ 무슨 설법이 저리도 깊으신가/ 정성을 다해 한 잎 두 잎 꽃잎을 넘기시는데/ 개화와 낙화가 출렁!/ 중생들의 눈동자에 환한 꽃등이 켜진다/ 아아!/ 깨달음의 폭발이 속수무책인 계절/ 벚나무 보살의 보시가/ 지상을 가득 채우다//

아주 오래된 복숭아나무가 / 윤인애
우리 집 뒷마당에 살던/ 아주 오래된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어느 해부턴가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꽃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 이별이 내게는 그저 가벼운 것이라서/ 많은 세월 봄이 가는 동안/ 영영 잊어버리고 만 것인데// 한 나무의 기억이 달려나와/ 가슴을 쿵! 후려친 건/ 김선우 시인의 '완경'이란 시를 읽던/ 그 순간이었다//

뽕 유감 / 윤인애
우리 마을 앞산에는/ 벚나무 뺨치게 열매를 많이 맺는 아름드리/ 뽕나무가 산다/ 주렁주렁 오디가 열리는 이맘쯤이면/ 오가는 이들이 주막 인양 들려/ 수다 한 잔 오디 한 점씩 걸치고는/ 손바닥까지 먹보라로 얼큰해지는 곳이다// 하룻비 그치고/ 환한 햇살 속 까만 오디가 눈에 밟혀 서둘러 오르니/ 아뿔사!/ 청춘남녀 한 쌍이 시퍼런 대낮/ 뽕나무 그늘에서 뽕*을 찍고 있다// 바람은 살랑살랑 나뭇잎을 흔들고/ 오디는 툭툭 쏟아지는데/ 먼발치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졸지에 지나가는 행인1이 되어버린 나// 속절없이 내려오는 헛헛한 산길/ 급히 따라온 바람 주모가/ 내 발자국 가득 오디향을 채워준다//
* 영화 <뽕> 제목 차용

개봉박두 / 윤인애
언제/ 꽃길이 열렷던가요, 저/ 허공의 바다에// 그 길 따라/ 까르르/ 쏟아지던 발자국을 지우며/ 넌출, 진초록 물결이 밀물집니다//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 먼 산 뻐꾸기 소리 날아들며/ THE END/ 봄 한 편이 싱겁게 끝났습니다만/ 예매는 하셨나요// 자 기대하시라, 여름!//

입하(立夏) 즈음 / 윤인애
이보게 무심한 사람아!/ 진달래꽃 함뿍 흐드러지면/ 꼭 한번 봄나들이 가자더니/ 여직 소식이 없네 그려/ 윤삼월이라/ 꽃소식도 늦을 거라 했지만/ 고사리순 꺾는 아낙의 등 뒤로/ 연분홍 진달래는 벌써/ 봄을 접었다네/ 꽃자리 툭툭 털고 일어나/ 산비탈을 내려가는, 저/ 무정한 꽃잎들을 좀 보시게/ 노랗게 피어난 애기똥풀이/ 드문드문 참견하며 흔들거리고/ 송홧가루 날리는 숲,/ 그늘에 숨어 여름을 도모하는/ 푸른 것들은/ 제 몸을 꼿꼿이 세우며/ 봄을 배웅하고 있다네.//

여름 유감 / 윤인애
겁 없다 겁 없다/ 참 부모하기도 하지// 입하(立夏)를 건너와 경계를 마구 허무는 저 맹랑한 것들!// 무작정 쏟아져 내리는 햇살/ 앞다투어 담장을 뛰어넘는 넝쿨장미/ 끝없이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까지// 번지고 번지며 맹렬하게 한철 불붙는 생명들이여!!// 내 청춘도 그러했던가// 순식간에 차오르는 여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다시/ 가던 길을 놓치고 말았다//

시월 / 윤인애
억새와 억새 사이로/ 은빛 바람이 흐른다/ 흐르는 것은 어디서나 강물이 된다면/ 뒷모습처럼 쓸쓸한 저 바람을/ 고추잠자리 투명한 날개 위에 얹으리/ 잠자리들은 붉은 날갯짓으로/ 은빛 강물을 끌고 하늘로 오르고/ 푸른 하늘 조각을 실어 내리며/ 가을날 풍경의 퍼즐을 맞추겠지/ 산들은 일제히 동맹을 맺고/ 나무들은 저희들끼리 슬몃슬몃/ 노랗고 빨갛게 번진다/ 본전히 비워야 물들 수 있는 계절/ 나도 이제 한여름 무성했던/ 푸른 옷 벗어놓고 흘러흘러/ 당신에게 닿으리//

수상한 일 / 윤인애
우리 동네 배롱나무 댁은/ 가을이면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가/ 여름이면 다시 돌아온다/ 돈 많은 사내라도 생겼는지/ 해마다 꽃살림을 수북수북 늘려서 온다더라/ 풍문에 낚인,/ 달과 별이 담 너머로 기웃거리고/ 바람과 비도 모르는 척 그 길로 지나간다는데/ 오늘은 나도 담 모퉁이에 몸 낮추고/ 힐끔힐끔 엿보다가 돌아왔다//

폐쇄된 정거장 / 윤인애
외다리 안전 요원 왜가리가/ 물주름을 접었다 펼쳤다 신호등을 밝히던 이곳은 한때/ 흐르는 것들의 정거장이었다// 잠자리는 사뿐사뿐 키 큰 나무들은 첨벙첨벙, 흰구름은/ 뭉게뭉게 하늘은 제 높이를 자랑하러 종종 이 정거장에서/ 내렸다 보름에는 밤 깊도록 둥근 달이 내렸는데 한 번은/ 나도 제일 환한 달을 데려다가 마음이 순한 시인에게/ 추석 선물로 보낸 적이 있다 마을의 토박이 배롱나무가/ 외설적으로 꽃 소문을 뿌리고 떠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라오기도 하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이 한없이 따뜻하던/ 시절이 이 정거장에는 있었다// 누가 폐쇄했을가? 이 우주 정거장// 눈먼 새털구름이 맴돌다 날아가고/ 귀머거리 바람이 먼 길 왔다 머뭇머뭇 돌아간다/ 더 이상 아무도 내리지 않는 곳,/ 오래전 생태 연못이라 했으나 좀비 연잎을 피해/ 녹조 위에 모여 앉은 노숙조(鳥)들이/ 구월의 시나리오에 기담전설을 써 내리고 있다//

저 환한 꽃빛이 / 윤인애
아파트 둘레길에 일렁일렁/ 맥문동 꽃이 환하다/ 다뜻한 보랏빛이다// 햇살 품은 저 꽃 무릎에/ 나비도 앉았다 가고/ 꿀벌도 앉았다 가고/ 매미의 허물은 아예 눌러앉았다// 누가 놓고 갔을가/ 이토록 향기로운 의자를// 다음 생에는 나 또한/ 맥문동으로 태어나도 좋으리/ 달달한 꽃빛으로 한 세상 피어// 내게로 오는 인연들이/ 나비로 앉았다 가시게/ 꿀벌로 앉았다 가시게 아예/ 매미의 허물로 눌러앉으시게//

어떤 보시 / 윤인애
백팔배 올리는 스님을 본다/ 절 한 번에 하나의 번뇌를 벗은 듯/ 제자리다/ 끊지 못할 전생과 후생의 윤회 속에/ 백팔번뇌는 깊어만 가고// 모든 것이/ 한순간 꿈결에 새겨진 무늬라고// 깇은 밤/ 내 몸에 뜨거운 지문을 남기며 살 오른/ 모기 한 마리 맹렬한 날개짓으로/ 이생을 건너간다//

느릿느릿 어느 날 / 윤인애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인내심이라는 빽 하나 든든하게 세웠다는 말이라는데/ 문득, 외롭다/ 발음하는 순간,/ 돌멩이 같은 말 하나가/ 심중에 단단히 박아둔 뼈 하나를 쓰러트리며 간다/ 창밖에는 가랑비. 길 나서는 사람 몇/ 드문드문 떨어지는 매미 소리에 오늘은/ 맑음 쪽으로 점을 쳤는지/ 우산 없이 잘도 간다/ 슬픔이 지나간다는 마음의 예보도 저리 선명했으면/ 느릿느릿 하루가/ 달팽이 천 리 걸음인 그런 날이 있다.//

선물 / 윤인애
지난해 추석/ 두 시간 거리에 사는 시인께/ - 보름달이 참 밝습니다/ 문자를 띄웠더니/ 이곳에 달이 오지 않아 쓸쓸하다고/ 날아든 답장이/ 홀로 비은 술잔 같다/ 마침 내게는 두 개의 보름달이 있어/ 연못에 걸린 달을 급행으로 보내주고/ 빈자리에는 흰 구름 한덩이 걸어 두었다/ 도착했노라,/ 소식을 듣던 깊은 밤/ 시인의 마을에서는 달도 시를 쓰는지/ 계수나무 아래서 은유를 즐기고/ 떡 방앗간 토끼도 별을 빚는다는데/ 이번 한가위에는/ 교통체증으로 복잡할 하늘길 피해/ 덜 여문 달이라도 서둘러 부쳐야겠다.//

첫눈 소묘 / 윤인애
눈 내리고/ 파닥파닥 튀어오르는/ 빛들의 아우성을/ 하나로 묶은, 저/ 부드러운 구속이/ 눈부시다// 함께 발자국을 놓았던 사람이/ 저리도 황홀했을까/ 한 폭의 진솔에 번지는/ 금기의 추억/ 날카로운 햇살이 수를 놓는다// 한 땀/ 한 땀이 아프다//

새벽 통신 / 윤인애
꿈의 입구였을까// 풀벌레 소리에 잠귀를 열었다/ 지금은 새벽 3시 58분/ 정처 없는 생각들이 밀물지고 쩔물지고/ 그리운 날들의 수평선이 아득하다/ 어느 시골집 장독대 옆에는 아직/ 맨드라미 분꽃이 호황이라는데/ 면 들판을 바라보는 아이야/ 어제 본 하늘은 뜬금없이 높더라// 뒤척뒤척, 한 계절이 돌아눕는다/ 지금은 바로 그러한 때/ 끝내 해독할 수 없는 마음들은 이제/ 포맷해야겠다//

길 / 윤인애
길을 걸어요/ 풀잎마다 송송 맺힌 물방울 속에/ 태풍이 휩쓸고 간 상처들을 감추고 있네요/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태양이 빛나고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면 또다시/ 어둡고 습습한 기억들을 말리겠지요/ 걷고 있는 등 뒤로/ 고단한 발자국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지요/ 이 길이 끝나면 반갑게 달려나와/ 손잡아 줄/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심지(心志)를 세우다 / 윤인애
잠시 정전으로 칠흑 같던 밤/ 촛농에 파묻혀 끝내 불꽃을 피우지 못하는/ 내 마음 같은 심지를 파내며/ 초의 마음을 읽는다// 제 몸을 열어 심지의 길을 터주고/ 심지는 불을 밝혀 어둠에 길을 내는/ 몸과 마음의 뜨거운 합일// 초심이 놓쳐버린 결심들이여!/ 화르르 타올랐던 인연들이여!// 오래전 연통이 끊어진 길들에게 편지를 쓰고/ 발신인 주소를 초심이라 적으며/ 첫 마음에게 엎드려 절하는 밤/ 초 한 자루가 경전이다.//

손부처 / 윤인애
스쳐가는 세월에게/ 얼마나 많은 보시를 한 것일까/ 거칠게 일그러진 저/ 손주름// 좌판 위의 가난한 행빛들이/ 힘겹게 한낮을 밀고 가는데// 세월에 눌려 굽은 등 추스르며/ 한 줌 더 얹어주던 나물의 무게가/오래도록 가슴에 체증으로 머문다//

사랑을 변주하다 / 윤인애
한밤중 자전거를 타고 연못 길을 돈다/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자전거는 달린다/ 반달도 제 그림자를 달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온다/ 켜켜이 내리는 안개는 밤 그림자다/ 먼발치로 나무며 가로등이/ 제 그림자를 연못에 던져 놓는다/ 나도 그대가 있는 쪽으로 슬며시/ 마음을 던져놓고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자/ 바람은 그 소리가 제 그림자인 양/ 푸른 나뭇잎 사이로 끌고 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들은 모두 어둠 속에 숨었다// 깊은 밤 잠 못 드는 아주 오래된/ 나의 사랑이여!/ 끝내 부치지 못한 그대의 긴 그림자/ 이 밤 내게로 드리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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