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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냥 가는 길 / 이경자

부흐고비 2022. 4. 13. 09:09

부산서 출발하여 섬진강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자축하는 길이어서 어느 때와는 다른데도 말이다. 이렇게 무작정 나서게 된 것이 어이가 없었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얼마 전부터 남편은 먼 거리 운전을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무조건 떠나자는 말이 솔깃하여 그러자고 했다.

떠나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허둥지둥 이것저것을 작은 가방에 챙겨 넣고 출발을 했다. 차창 밖에 보이는 산과 들판에는 봄, 여름, 가을에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색들은 간곳이 없고, 무채색의 회색빛만 널려 있었다. 겨울의 찬 공기와 잎 떨어진 나무, 을씨년스런 풍경이 하나의 그림같이 잘 조화되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 50년 같이 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지는 것인지, 계절의 끝자락인 풍경과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은빛 머리칼 색이 오늘따라 정겨웠다.

젊은 시절에 어렵게 마련한 중고차를 타고 떠난 여행길에 일어난 에피소드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엔진 과열로 연기가 펄펄 피어오를 때가 있었고, 외진 곳에서 배터리가 방진 되어 오도 가도 못해 쩔쩔맸던 일이며, 개구리 소리 요란한 들판에서 어리바리한 솜씨로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던 남편의 뒷모습은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이다. 삶에 미숙하고 가난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순천으로 갈까, 쌍계사로 갈까, 여수로 갈까?”하더니 엉뚱하게 광양항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스스로 놀란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고?”
“몰라 내가 우찌 아노!”
남편은 홱 핸들을 꺾어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나갔다.

옛날 같으면 파닥거리고 쫑알거렸겠지만 지금의 우리 차는 엔진에서 연기가 날 턱도 없고, 타이어 펑크가 날 낡은 중고차도 아니다. 설사 그때보다 더 난처한 일이 일어 난다해도 무에 그리 다급해 하고 쩔쩔맬 일이 있겠는가. 갈 길을 정하지 않고 왔으니 가는 곳곳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다. 광양이면 어떻고 순천이면 어떠랴 남편도 나도 느긋하기만 했다. 어찌 이리도 편안한가 싶었다.

어느덧 우리는 여수까지 왔다. 오동도를 건너는 셔틀버스를 탔다. 긴 다리를 건너 오동도에 닿자마자 출발 때부터 점심은 회를 먹어 보자던 남편은 맞은 편 횟집으로 직행했다. 날이 날인지라 꽤 비싼 회를 주문했다. 수 십 개의 찬 그릇이 나열되었다. 배가 고팠던 남편은 허겁지겁 먹었다. 눈으로 보기에만 화려했지 초장도 그렇고 회도 기대 밖이었다. 우리가 누군가. 회라면 일가견이 있는 부산 사람이 아닌가. 웬만해서는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방에 어둑발이 내렸다. 여수시장에 들러 특산품인 갓김치와 간장게장을 샀다. 집을 떠나 올 때는 적어도 1박2일을 하려고 왔건만 그새 마음이 변했는지 남편은 “자고 갈까, 그냥 집으로 갈까?” 했다. 나는 “집에 가자.”고 해버렸다. 이렇게 결혼 기념 여행은 하루만에 끝이 났다. 여행치고는 참으로 싱겁고 밍밍했다. 결혼한 지 50년이면 반세기나 되는 긴 세월이다. 우리가 앞날을 알고 살아왔던가. 가다 보니 산도, 들도, 물도, 꽃도, 거친 바다도 다 보고 여기까지 왔다.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앞길을 알고 길을 나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도 그러하다 오늘의 여행길 같이 알 수 없는 길을 그냥 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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