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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평생 친구 / 송순애

부흐고비 2022. 4. 14. 08:36

행복이 가득한 배움의 집으로 가는 길. 어깨에 멘 책가방도 흥겨운 듯 장단을 맞춘다. 신랄한 여름 볕을 잘 받아넘긴 초록 잎들이 형형색색 옷을 입히느라 바쁘게 팔랑댄다. 발걸음도 가볍게 경북대 평생교육원으로 간다.

5년여 동안 동창 모임도 접어둔 채 손주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올봄, 딸의 직장 내 어린이집으로 손주들이 등원하니 내게 시간이 생긴 것이다. 가끔 힘에 부친 적도 있었지만 손주 돌보는 일보다 보람 있는 일은 없다며 자신을 다독여 왔었다.

수필가 언니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메마른 가슴에 감성을 뿌리니 문학의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습윤을 위해 많은 책을 읽으며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했다. 평생교육원 글쓰기 반에서 습작을 시작한 지 두 학기 째이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소녀적 꿈을 꽃피우니 정말 행복했다.

특강반에 말문 트이는 영어 수업이 있기에 이참에 말문이나 터 볼까 하고 수강 신청을 했다. 선생님 말을 삼분의 일도 못 알아듣지만 재미있었다. 방학 끝나면 글쓰기와 영어 수업을 함께 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글쓰기는 주중에 한 번, 영어 수업은 두 번이다. 두 과목을 해낼 수는 있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덜컥 신청을 해버렸다. 하나를 외우면 두 개를 까먹는 데도 재미가 있는 게 신기했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 습작의 시간은 줄고 독서할 책들엔 먼지가 쌓여간다. 주객이 전도를 당하고 있다는 조급함이 슬며시 고개 들었다. 한 달에 서너 편의 작품을 쓰는 언니가 부러웠다. 더듬더듬 겨우겨우 써 내려가던 시간조차 빼앗겨버린 나의 게으름에 언니의 담금질이 날아들었다. 영어 공부는 접기로 했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두 가지를 한다는 건 사치에 불과한 것이리라.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듯 컴퓨터의 검은 화면을 쳐다본다. 잠시 멀어졌던 글쓰기. 풀어내기 어려운 소재들, 습작품을 매만지며 둥글리던 여유조차 소멸된 서걱대는 마음. 화면의 먼지를 닦아내고 전원을 넣는다. 즐거움과 부담감을 한꺼번에 안겨주며 행복과 긴장을 절묘하게 섞어주는 수필 쓰기다. 친구 삼아 동반자 삼아 평생 함께 가고 싶기에 서툰 몸짓이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아본다. 잘 쓰고 싶어 안달이 나고 잘 안되어 복달인 채로 달리다 보면 글쓰기도 내 마음 알고 손잡아 줄 날이 오겠지.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스카프를 날리며 캠퍼스를 걷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옆을 스치는 젊음의 싱그러움을 곁눈질하며 나도 청춘의 대학생이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실로 들어서면 학우들이 반겨준다. 이쯤에서 딴 짓을 멈춘 스스로의 판단이 고마울 따름이다.

해거름을 밟으며 돌아오는 길은 오롯한 사색의 장이다. 시간과 공간의 여유이며 평정의 공간. 나에게는 이 길이 궁극의 공간이다. 같은 어둠의 길이지만 밤하늘을 보면 빛나는 별빛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의 눈을 뜨고 글 속에서 유영하는 것이 행복한 길임을 안다. 이 길을 오래도록 오갈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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