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헛글 / 황선유

부흐고비 2022. 4. 15. 08:27

‘나’는 실재의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입니다. 나는 진실의 인물이 아니라 허위의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가상으로 허위로 쓰는 거짓 글로 이른바 헛글이죠. 그렇다고 실존과 진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니 누군가 이 헛글의 행간에 웅크린 참나를 찾아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 안 해도 그만이지만요.

십이월 치고는 포근한 한날의 저녁 어스름에 강둑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곳을 ‘강둑길’이라니 대번에 거짓임을 눈치채겠지요. 대놓고 거짓이니 글쓰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나는 무언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는 당위의 심정으로 이즈음 안팎으로 머리를 죄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떠올려진 것들이 잠시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을 선회하다가 일제히 한곳으로 응집됩니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이 쓴맛으로 변해버리는군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민낯을 현미경으로 본 듯해버렸다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여야만 할까요. 이생에서 어쩔 수 없는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의 오랜 대화가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 적힌 글자만도 못 했다면 그 허망함을 어찌 다스려야 할까요. 그럼에도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밀린 숙제처럼 버거우면 이 막막한 허무에서 헤어나기는 할까요. 함부로 내맡겨진 국면이 어릴 적 시골길에서 만난 그믐밤 어둠인 양 합니다. 내맡겨진 것들이 꼭 이뿐이겠습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탄생이 이미 그러하였듯 항차 죽음도 맨 그러하겠지요.

골똘하니 걷다가 마주 걸어오는 남자와 부딪힐 뻔했습니다. 얼른 옆으로 길을 비켜섰죠. 젊은 남자들은 때때로 무섭습니다. 길가다가 어깨를 부딪쳤다고 욕을 했다느니 폭행을 했다느니 그런 기사를 봤기 때문이죠. 눈부신 젊음을 흉기로 삼는 남자라니.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젊은 남자가 있습니다. 초보운전자였을 때죠. 트럭과 접촉사고가 난 것 같았어요. 마침 퇴근 무렵의 교통정체로 차들이 멈췄습니다. 험상궂은 표정의 트럭기사가 주먹으로 내 차 문을 거칠게 두드렸어요. 너무 무서웠던 나는 도어록을 누르고 꼼짝도 안 한 채 앞만 보았습니다. 차들이 움직이자 트럭기사도 그만 트럭에 타더군요. 얼마를 가다 다시 신호등 앞에 멈췄습니다. 그때였어요. 옆 차선에서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차의 백미러를 바로 세워주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성큼성큼 자기 차로 갔어요. 인사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깜빡이 켤 줄도 몰랐던 나는 운전대만 꽉 붙들고 있다가 바뀐 신호를 따라 옆도 보지 않은 채 와버렸답니다. 그 젊은 남자의 지금이 무척 궁금하군요.

신흥공업사, 태양전파사, 덕진목공소, 진미상회 등 길옆으로는 낮고 낡은 건물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한 간판을 달고 죽 서있습니다. 세월에 밀려 생소해져 버린 이름들, 모퉁이를 돌아 이층에는 전당포라는 글자도 보이는군요. 고개를 돌려 불과 몇 미터 저쪽을 보면 이 도시에서 가장 높다는 금융 건물이 우뚝하고, 국내 최초라는 뮤지컬 극장이 ‘Dream Theatre’ 생경한 간판을 달고 나란히 자리한 참 얄궂은 조화입니다. 어쩌면 내 살아온 날들도 그러하였는지, 아직도 그런 조화에 익숙하지 못하는지, 쥐어 박힌 듯 느닷없는 쓸쓸함도 그 때문인지, 지금 나는 그런 곳 강둑길을 걷고 있습니다.

영화 《Me Before You》의 윌은 아침에 눈을 뜨는 유일한 이유인 루이자를 두고 끝내 스위스 행을 택합니다. 데이비드 구달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스위스 바젤의 한 병원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죠. 국내에도 의사 조력 죽음을 위하여 스위스 디그니타스에 등록한 사람이 제법 있다 하는군요. 영화《Still Alice》의 앨리스는 치매를 앓습니다. 컴퓨터에다 죽는 법을 저장해 두죠. 스러지는 기억을 더듬어 컴퓨터를 켜서 적어 둔대로 서랍을 열어 약을 찾지만 먹는 것을 놓치고 말아요. 영화《The Midwife》에서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는 자주 가던 호수 위에 작은 나룻배만 흔들거리도록 둔 채 사라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늘 산책하던 우즈 강가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녀의 지팡이와 구두만 발견되었다 하죠.

아테네의 그 철학자는 말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서 죽음도 나름대로 좋은 것이니 자신감을 갖고 죽음을 맞아야 한다고. 그의 말처럼 죽음도 삶과 같다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주하는 것이라면, 그곳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면 왜? 어떤 이들은 그토록 쓸쓸해하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떤 이들은 무슨 이유와 권리로 아무 의미 없는 명줄을 잇고 또 이어놓는지. 누가 내 글을 거들떠나 볼까마는 죽어본 적 없는 이의 말은 다 실없답니다.

한참을 걷고 나서 둑길 난간에 기대어 저 아래 강물을 봅니다. 이 시간에 강물을 보고 선 사람이 나 말고는 없군요. 어둠 탓인지 강물은 마냥 음험합니다. 세상의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강물을 음험하다 쓴 글이 있을까요. 아무렴 꽃구름처럼 살아보리라 애쓴 한 수필가가 홀연히 사라진 강물이라 하기는 끔찍이도 비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개를 수그리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군요. 떨어진 눈물방울이 저 아래 강물 표면까지 가 닿았는지 어땠는지.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계역 가는 길 / 노춘희  (0) 2022.04.18
밤을 건너다 / 임정임  (0) 2022.04.15
평생 친구 / 송순애  (0) 2022.04.14
걷기 / 신원철  (0) 2022.04.14
그냥 가는 길 / 이경자  (0) 2022.04.1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