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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밤을 건너다 / 임정임

부흐고비 2022. 4. 15. 08:30

밤은 어디에나 공평하게 내린다. 하루의 끝,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에 싸여 천변을 걷는다. 고요한 은색 물줄기가 엎드린 채 흘러간다. 도시의 노란 불빛은 현란한 무늬결이 되어 물 위를 떠다니고 옅은 습기를 머금은 간들바람이 살랑 코끝을 간질이며 스쳐 간다. 끈질기게 질척대던 늦더위는 흔적조차 없다. 여름은 그저 오래된 꿈같다.

친숙했던 풍경은 밤의 베일 너머에서 매번 다른 감상을 전한다. 뚜렷한 경계를 짓지 않는 어둠, 선명한 컬러로 처리되던 것도 색을 잃고 점점 한데 섞여 뭉그러진다. 예민한 촉수처럼 먼저 달려 나간 내 안의 어떤 감각이 그 윤곽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익숙한 듯 낯선 밤의 테두리. 나는 어쩐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를 움직이던 한낮의 동력은 어느새 저만치 비켜난다.

하천을 낀 산책로는 공장지대와 대단지 아파트를 가로질러 길게 놓였다. 나누어진 두 개의 세계. 양쪽으로 갈라져 줄지은 건물들은 밤늦도록 쉽사리 불을 꺼트리지 않는다. 때로는 어슴푸레한 달빛을 대신하기도 하면서. 이곳은 살기 좋은 소도시의 구색을 위한 조촐한 안배일까. 하루 밥벌이에서 풀려났어도 아직 집에는 이르지 못한 나는 빈칸 채우기에 급급했던 오늘을 거슬러 밤의 동선을 따른다.

봄과 여름, 앞다투어 화려하게 피어나던 꽃들의 행렬은 온데간데없다. 문득 물길 옆 키 작은 풀숲에 눈길이 머문다. 검불 더미같이 엉성하지만 옅은 자줏빛 꽃을 달고 있는 그것은 달뿌리 풀의 군락이다. 갈대를 닮은 기다란 이파리가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인다. 어떤 것은 습지에 잠겨 있지만 어떤 것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 쪽으로 한참 뒤엉켜 나와 있다. 그들의 영역에 발을 잘못 디딘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땅속 깊숙이 뿌리내린 오연함이 아니어서 더 눈길을 끄는 걸까. 땅 위를 날듯이 하며 사방으로 세를 넓혀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마치 금방이라도 겅중대며 달려 나갈 것만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난다. 살아있으니 이토록 맹렬하구나. 생의 방식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주저함 없이. 왠지 모르게 다정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생긴다. 바람이 불면 그들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다붓다붓 수런댄다.

펼쳐진 길 위에 희끄무레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밤은 점점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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