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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덕계역 가는 길 / 노춘희

부흐고비 2022. 4. 18. 09:09

초록빛 들판을 가로질러 덕계역으로 전철을 타러 가고 있다. 나는 매주 세 번씩 대한노인회 양주시지회에서 운영하는 어르신 한글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이 길을 가면서 초록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르신들은 모두 50~80대로서 한글을 배우는 싱그럽고 포근한 내 어머니 같은 향기로운 초록들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산도, 들도 온통 짙푸른 초록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다. 마치 고향의 들판에 서 있는 것 같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한가한 들녘이다. 길섶에 작은 땅 한쪽엔 참깨 들깨가, 또 한쪽엔 열무와 부추, 토마토와 오이, 고추, 가지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고, 미나리, 얼갈이, 청경채, 깻잎 등, 여러 가지 쌈 채소들이 즐비하다. 밥과 쌈장만 있으면 푸짐한 점심상 한 상이 금방 차려질 것 같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두레박으로 금방 퍼 올린 우물물에 보리밥을 뚝뚝 말아서 된장에 풋고추를 꾹꾹 찍어먹고 싶다.

땅콩은 노란 꽃이 피었고, 해바라기는 큰 키를 자랑하며 해님 따라 돌아가며 웃고 있다. 옥수수와 수수는 누구 키가 더 큰가 내기하듯 하늘을 찌르고 서있다.

호박넝쿨에 노란 호박꽃이 활짝 웃으며 애호박을 하나씩 매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호박꽃을 나이 많은 여자를 비유한다.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가장 큰 꽃만큼이나 커다란 열매가 열린다는 것, 생활의 지혜가 넉넉하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리인지. 특히 늙은 호박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듬뿍 들어 있고 몸에 좋은 물질이 풍부하다. 겨울에 호박범벅에 팥을 듬뿍 넣어서 끼니를 이었던 추억도 소환해 본다. 호박씨를 말려서 간식으로 까먹는 맛을 요즈음 아이들이 먹는 고급 과자 맛에 비길 수 없는 맛이었지.

햇볕이 너무 뜨거워 널따란 호박잎은 양산을 만들어 작은 풀들에게 햇볕을 가리고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식혀주는 어머니의 열두 폭 치마 같은 넉넉함을 본다. 그 주변에 하얀 망초 꽃, 노란 애기똥풀, 색깔이 엷은 달맞이꽃도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나도 봐주세요.’라고 하듯 한들거리며 춤추듯 한데 어우러져 자연이 빚어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지난주엔 강낭콩 꼬투리가 아주 작았는데, 오늘은 콩 알맹이가 볼록볼록하게 알이 영글었다. 하지(夏至)가 지나면 수확을 하겠지. 그 땅엔 또 어떤 씨앗이 뿌려져 가을 그림에 어떤 곡식으로 수를 놓을까?

지난주까지 상추밭에 상추를 수확하지 않고 널브러져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오늘 보니 포기상추가 가지런하게 상품으로 포장된 것이 마치 시집갈 새색시가 꽃단장을 한 듯하다. 오늘, 어느 집 저녁상엔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서 상추쌈에 얹어져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크게 치뜨고 한 입 가득 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는 푸짐하고 행복한 식단을 차리겠지.

한낮의 농로는 뜨거운 기운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햇볕이 뜨거워 양산을 받았지만, 땀이 목줄을 타고 줄줄 흐른다. 이 뜨거운 햇볕도 고추밭에 고추는 빨간 주머니에 금돈 열 냥으로 가득 채워 가겠지.

소나기라도 한 줄기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다. 바로 그 때,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서 나락 논을 일렁이며 초록 파도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가 시원하고 달콤하다. 옛날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가 후끈거리는 고추 밭의 열기를 지나가는 실바람 한줄기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힐 때 마냥 행복했던 추억도 따라온다.

그 옆 넓은 밭에는 추석쯤에 낼 쪽파를 심고 있다. 쪽파를 심는 모습이 기이하여 한 동안 바라보았다. 대개는 밭고랑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파 모를 기울이듯 죽~세워놓고 호미나 괭이로 흙을 덮어 주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밭이랑을 넓게 둔턱을 만들어 부드러운 흙에 손으로 벼 모를 심듯이 꾹꾹 눌러 심는 새로운 파종법의 기술이 개발되어 농부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옛날, 모심기 하던 때가 생각난다. 나도 가끔은 남의 집 품앗이로 갈 때도 있었다.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쁘기 때문이다. 그때는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가정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집안일을 도왔다. 지금은 모를 모두 기계로 심어서 손으로 심는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또 다른 밭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심었다. 고구마는 호박고구마인지 밤고구마인지 알 수 없다. 감자는 꽃이 하얗게 피어서 아마도 캐보나 마나 하얀 감자겠지. 옛날엔 자주감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자주감자는 거의 볼 수가 없다. 감자는 파종할 때 쪼개서 심지만, 캘 때는 뿌리에 주렁주렁 온 가족이 다 함께 따라 나온다. 농부들의 환한 미소가 감자 알맹이의 숫자만큼이나 얼굴 가득 행복 가득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

오늘도 어르신들과 수업을 마치고 기쁨가득 행복 가득 담아 가는 길이다. 우리 어르신들에게도 지금은 뜨거운 뙤약볕의 고난이 있어도 언젠가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처럼, 한글을 잘 읽고 쓸 수 있는 결실의 즐거움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한다.

초록의 친구들과 함께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에 덕계역 가는 길이 고향 길을 가는 것처럼 푸근하고 행복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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