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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무장아찌 / 최병진

부흐고비 2022. 4. 19. 08:36

새벽 전례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채소 반찬을 샀다. 입맛 잃은 아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무장아찌도 샀다. 아내는 의외란 듯이 “어쩐 일이에요! 해가 서쪽에 뜨려나? 그렇지 않아도 깔끔하고 담백한 것이 먹고 싶은데 잘되었네.” 했다.

아내의 입맛이 나와 엇비슷해지는 것을 보면 그동안 은연중에 서로 입맛까지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아침 식사에는 느끼한 것보다 간편하면서 연하고 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 철 따라 봄에는 쑥국, 나박김치, 콩나물국, 여름에는 오이냉국, 열무물김치 가을에는 명탯국, 무생채 겨울에는 동치미, 백김치 등을 먹는다.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려 가을 서늘한 기온에 자란 무는 사람 몸에 들어가 열을 식히고 마음도 차분하게 해 준다. 무는 물의 저장고다. 가을무는 봄에 바람 들기까지 몸에 물을 담아 둔다. 무는 얼른 생각하면 맛이 없는 것 같다. 그야말로 무맛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무 맛은 담백하면서 짜릿할 정도로 시원하다. 아삭한 식감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해 주는 그야말로 신선들이나 먹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나는 무와 인연이 많다. 무는 어릴 때 간식이기도 했고 허기를 잠시 면해주는 역할을 했다. 소년시절 시골 진외가에서 동짓달 긴긴밤에 무를 먹었다. 겨울밤 흙구덩이에서 꺼내다가 껍질을 깎아 밤참으로 먹을 때 그 맛은 오늘날 아이스크림에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다디단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면 입안이 텁텁하지만 무는 뒷맛까지 깔끔하다. 어른들은 겨울 무는 동삼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감기에 걸리면 무 속을 파내고 꿀을 넣고 쪄서 무즙을 먹기도 했다.

아내는 병원 입원실에서 식사 때마다 “소태맛이야.” 하며 수저를 놓았다. “모든 음식이 무맛이야.” 밥 한술 뜨기가 바쁘게 음식 맛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내의 입맛을 살릴 수 없었다. 아내의 동치미는 내 입맛을 살려내는 특효약인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했다. 입맛을 잃자 자리를 털고 일어날 힘까지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 아내가 퇴원을 했다. 집에 돌아와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집에 햇빛이 드는 듯했다. 내가 사 온 무장아찌를 맛을 본 아내는 비위에 맞지 않아 손사래를 쳤다. 나도 먹어 보니 별맛이 없었다. 아무렴 아내가 담가 먹던 무장아찌 같으랴. 사 온 무장아찌는 대접을 못 받고 밥상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는 무장아찌에 간장을 부었다. 무장아찌가 간장그릇에 몸을 담그고 있기를 며칠이 지났다. 버려야 되나 싶어 하나 집어 먹어 보니 먹을 만했다. 무슨 양념을 더했는지 모르지만 밍밍하던 맛이 가시고 감칠맛이 났다.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제껏 아내는 우리 가족들의 입맛을 챙겼고 맛없고 밍밍한 우리 집 분위기에 맛을 살린 사람이다. 맛없는 장아찌에 맛이 배듯이 아내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가면 마술처럼 집안 분위기가 변했다. 부지런히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먹이고 나눠주던 사람이 나이 들고 건강이 안 좋아지자 밑반찬 만드는 일도 뜸해졌다.

밭에서 막 뽑은 무처럼 싱그럽던 아가씨가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면서 무장아찌처럼 세월에 절여졌다. 예전처럼 힘을 못 내지만 우리 가족에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아내를 생각하며 새삼스레 무장아찌 맛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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