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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 / 백송자

부흐고비 2022. 4. 19. 08:38

창호지 문틈으로 빗소리가 모여든다. 빗물을 머금은 흙내음도 토방을 지나 마루까지 올라와 방안을 기웃거린다. 문고리를 풀자 앞산이 두 팔 벌린다. 자연과 경계가 없는 시골의 아침은 싱그럽다.

장화부터 신는다.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다. 긴 장대를 든 남편을 뒤따라 마당을 가로지른다. 무성하던 감나무의 푸른 기운은 된서리를 맞고는 풀이 죽었다. 다행스럽게도 감은 꼭지의 힘으로 매달려 있다. 감나무는 오랜 세월, 대문도 없는 집에 당간지주처럼 서 있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감 따기가 수월하지 않다. 올해는 해갈이를 하는지 예전보다 감이 적게 달렸고 고것마저 죄다 가지 끝에 몰려 있다. 비에 흠뻑 젖은 나무를 오르는 남편이 쭉 미끄러질 듯 위태롭다.

짹짹짹 짹짹짹, 새들이 갑자기 날아든다. 아침을 깨우던 평화로운 소리가 아니다. 분노에 찬 함성이다. 젖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머리 위를 빙빙 돈다. 금방이라도 뭔가 하나 낚아챌 기세다. 감을 따는 우리가 저들의 먹잇감을 빼앗아 가는 무법자로 보인 듯하다. 그간 달달한 홍시부터 아껴가며 쪼아 먹었으리라. 올가을은 마음 놓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리라 여기며 감나무 주변으로 아예 집터를 옮겼을지도 모른다. 병상 일기장에 몇 줄 쓰지도 못했는데 급하게 떠나신 어머님의 부재로 시골집은 텅 비어 있었다.

감 따기를 중단하였다. 탐스럽게 잘 익은 붉은 감이 꽤 남아 있다. 혹여 지나는 이가 감나무 우듬지를 쳐다보면 까치밥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주인장의 게으름을 탓할 정도다. 올해는 새들이 먹이를 찾아 떠돌지 않고 한동안 배부르게 지낼 것 같다. 장화를 벗고 마루에 걸터앉자 그제야 새들은 공격 태세를 풀고 뒤란 너머 숲으로 날아간다.

비가 그치자 감나무 가지마다 새들이 여럿이 찾아온다. 감을 쪼아대며 지저귀는 소리는 맑다. 아마도 열린 곳간에 일용할 양식이 많아 기분이 좋다는 메시지일 듯하다. 새들은 와르르 달려들어 아귀다툼해가며 먹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듯 서로 양보하며 수시로 자리를 뜬다. 제법 큰 새 두 마리는 침입자가 없으니 마음껏 먹고 즐기라며 따뜻한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사방으로 몸을 돌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새들의 생활상을 지켜보며 나도 갖가지 욕심을 걷어낸다. 짓누르던 욕심 덩어리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가을볕 한 줌으로 채운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개운하다. 이대로 인생의 노을이 따습게 물들면 찬 겨울이 와도 떨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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