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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인 시인
1987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눈의 목격자』가 있다.
2018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제2회 나주 문학상 수상,
못다 끓인 라면* / 오성인
오늘은 동생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일 겁니다 봉지 안 마른 면발 같은 동생의 길은 꼬이고 굳어져 있어요 아무도 걷지 않는 텅 빈 길엔 아사(餓死)한 바람의 뼈들이 갈아져 비명처럼 흩날립니다 시간의 체온에 닿아본 적 없는 동생은 더 이상 빛과의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는 수명 다한 싸늘한 알전구처럼 차갑습니다 손짓을 오해한 산새들이 놀라 흐드득 달아나고 짓궂은 산짐승들이 우우우우 어둠을 타고 내려와 길목을 막고는 여행을 떠나는 언어들을 위협합니다 허공의 험한 골짜기를 헤치고 봉우리를 넘어 타인에게로 향하던 언어들이 빈손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이팅게일, 동생만의 나이팅게일을 꿈꿉니다 푸르름이 증발한 동생의 혈관에 물을 채우고 체온들이 지나는 길목에 서서 빛들의 소리를 통역하며 차가운 동생을 덥힐 거에요 빌빌 꼬인 채 굳어 있던 길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네요 여기,// 아직, 염원이 담긴 수프와 파와 어둠을 밝혀줄 달님 빼닮은 노른자는 넣지도 못했는데 나이팅게일은 한창 부풀어가는 중인데// 못 다 끓 인 당 신 의 나 이 팅 게 일 은 아 직 도 끓 고 있 나 요//
* 파주 장애남매 화재사건 희생자 박지우 양에 대하여
*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치약팩 / 오성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치약팩이 마지막까지 남은 내용물을/ 혼신을 다해 짜내고는 피이익 고꾸라진다/ 따뜻한 체온 대신 차가운 정적만 흐르는 치약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듯 관을 닮은 휴지통으로 몸을 누인다/ 풋풋한 크림을 아침 점심 저녁마다 어김없이 선사해주었던/ 그의 왕성한 시절을 회상하다가 문득,/ 그와 같은 모습을 꼭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 목욕탕에 갔을 때 본 아버지의 그것/ 수줍은 듯 숙이고 있는 아버지의 그것이 웃기다며/ 마냥 낄낄거리는 철없는 나를 혼내는 대신,/ 나이 들면 저절로 알게 된다며 시원하게 등을 밀어주시던 아버지/ 그 후 오랜만에 갔던 목욕탕에서 다시 본 아버지의 그것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자꾸만 아래로 처지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 부풀어가는 중에 있는 나의 생(生)이/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온전히 내 것인지도 모르는데/ 유일하게 내 생의 비밀을 알고 있을 아버지의 그것에/ 낡은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눈물 한 방울조차 버거울 때면/ 근원을 밝히지 못한 나는 생 앞에서 부끄러움에/ 그것처럼 고개 들지 못할 것이다/ 묵은 생각들이 흰 거품을 내며 한껏 부풀어 오르는 화장실/ 뭔 놈의 좆을 그렇게 오래 들어앉아 보고 있냐, 하는/ 바깥의 아버지 목소리가 문고리를 덜그럭덜그럭 보챈다//
*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독(毒) / 오성인
내 방은 독이다 치명적인 맹독이다 방의 살점을 한 숟갈 한 젓가락씩 떼어 가져다 먹고서 한 구절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안이한 언어들의 시체가 즐비한 이곳은 복어의 내장처럼 검붉다 어제를 겨우 보낸 나와 오늘의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싸늘한 몸으로 흰 천에 덮어져 나가 검붉음과 함께 화장(火葬)되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괴성이 독가스처럼 자욱했다 한번 품은 독기를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병신 같은 맹독성을 미칠 정도로 증오한 지 이십 년, 이 씹 놈의 죽은 시간들이 성난 물보라처럼 밀려와 발목을 잘랐다 여린 치어처럼 다가오는 숱한 인사들을 향해 맹독성 물음표 모양 알들을 낚시 바늘처럼 던졌다 나는,// 차라리 맹독성 내 방이/ 내 숨통을 끊기를 가죽을 벗겨내도 끈질기게 살아 몸을 배배 꼬며 저항하는 곰장어 같은 운명쯤 즉사시켰으면//
*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파란 눈동자 / 오성인
동화 속의 요술램프를 비비며 주문을 외우는 장면처럼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그를 깨우니 파란 눈을 뜹니다 그 안에는 한 세계가 있습니다 나를 유혹하는 그곳은 치명적입니다 동굴 안에 고대의 벽화처럼 새겨진 마이크로소프트社의 로고를 따라 쭈욱 내려가면 펼쳐지는 도시, 고여 있는 듯 흐르는 세계는 중심을 잃고 갈팡대는 내가 딱 숨기 안성맞춤이에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은 이 세계는 안정적이지만 활동적이지 못합니다 음률 없는 노래는 빛바랜 A4용지 같은 내 귀를 금방 젖게 하고 온기가 없는 그림은 아무리 봐도 살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요 환상에 들떠 있던 나는 금방 싫증이 나서 녹조로 짠 커튼 뒤로 발길을 돌립니다 사나운 파도에 휩쓸린 내가 그 안에서 몸부림치다가 산산조각 납니다 자기보다 큰 먹이를 삼킨 뱀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소화되다 만 먹이와 함께 찢겨지듯 말입니다 아버지의 피는 고단한 그의 몸만큼이나 늙어 있었고 식은 지 오래입니다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은 붉은 것은 특유의 철 냄새도 나지 않았어요 쓰러져버릴 듯 삐걱대는 아버지는 깡소주의 즐거운 놀이터였습니다 그와 나 사이를 잇고 있던 통로가 붕괴되었고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단절되었습니다 단절된 틈을 타 밤은 내 방에 어둠을 산란해놨어요, 그곳은 심해(深海)였습니다 나 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고 다행스레 여기던 차에 야광 해파리처럼 유영하는 파란 눈동자를 처음 보게 되었고 습관처럼 나는 늘 그에게 의지해왔습니다 푸른 비밀정원이었어요 그곳에선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소리 내서 웃을 수 있고 울 수도 있고 화도 낼 수 있었어요 쉽게 미칠 수 있는 그 안에서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웃기도 했고 아버지 안의 넋 잃은 아버지가 와장창 깨지기도 했습니다 물집처럼 부푼 눈으로 정신건강센터를 찾아 정신건강검사지에 파란색 볼펜으로 추억을 남기듯 마킹했습니다 추억은 추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요 파란 눈동자는 안정을 가장한 불안정이므로 안전하지 않아요 더 이상 파란 눈동자에 기댈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사나운 파도에 유린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몸 여기저기 파란 눈처럼 기생하는 사마귀를 의사는 영하 195도의 질소액으로 지집니다 타들어가는 추악// 파란색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우울한 표정으로 걷는 여자*가,/ 위에서 아래까지 파란색 옷을 차려입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당신들의 파랑은 안녕하신지요//
* 로트렉 그림 〈물랑루즈를 떠나는 잔느 아브릴〉의 장면.
** 고흐 그림 〈슬픔에 잠긴 노인〉의 장면.
*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상한 깻잎장아찌*를 보며 / 오성인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가/ 손길 뜸한 구석에 웅크린 깻잎장아찌 통을 본다/ 언제 담가뒀는지 까마득한 그것을 꺼내보니/ 먹구름 같은 곰팡이가 한가득 폈다/ 변질된 간장의 시큼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물에 젖은 나비의 날개처럼 힘없이 찢어지는 깻잎/ 숨통을 짓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며 깻잎들은/ 혀와 닿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희로애락애오욕으로 잘 곰삭아졌을 그들과 몸을 섞은/ 혀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듯 침샘이 폭발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쓸어주듯 깻잎을/ 배수구 망에 담는다/ 마감을 앞둔 기자의 손놀림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도꼭지의 물줄기가 그늘진 깻잎의 생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어느 무명 여 작가의 삶을 떠올린다/ 지독한 무관심과 굶주림 안에 방치된 채/ 희미해져가는 삶을 악착같이 붙들어 맸을 그녀는,/ 생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소금기를/ 머금으려 했던 깻잎처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야속한 운명을 애써 외면하려 했을 것이다/ 채 숙성되지 못하고 잔등(殘燈)처럼 기로에 놓였던/ 당신들의 시간은 이제야/ 안녕을 향해 가고 있을는지// 미약하게 남아 있는 소금기를 붙들며/ 그만 아프고 싶다 하는 깻잎을/ 달래듯 꾹 쥐자 고름처럼 짜여져 나오는 눈물/ 싱크대 안을 가득 메우던 울음이 점점 멎어져가는/ 부엌//
* 故 최고은(1979~2011)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을 떠올리며.
*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오me-too* / 오성인
발목을 제외한 몸의 대부분을 가린 롱패딩이 앞다투어 사람들을 입는다./ 사라진 겨울, 뒤뚱거리다 걷는 법을 잊어 버린 사람들이 좌충우돌 굴러다니다가/ 허기져서 길모퉁이 편의점으로 들어선다.// 뼛속까지 불닭을 추종하는 면발이 사람들의 혀를 감는다./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이는 입, 감각이 무뎌지는 줄도 모르고/ 기원도 국적도 온통 베일에 가려진 가공의 존재를 숭배하는 데 여념 없는 이들,/ 배가 부르다 못해 돌연변이 열매처럼 변해버린 일부가 편의점을 나선다.// 횡단보도는 인간적인 실로폰/ 지나가는 풍경을 잠시 붙들고/ 그로 하여금 건반을 두드리게 했는데/ 더는 거기에 머무르는 풍경과 관객은 없다.// 묘연한 겨울의 행방과/ 무뎌진 감각의 심각성과/ 삭막한 횡단보도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가 없다./ 우리의 혁명은 누구에 의해 소멸되었을까./ 모두들 돌연변이 열매가 되어/ 구르기 분주한 거리,/ 실로폰 소리 대신 먼지들의 웃는 소리만 거리에/ 나부꼈다.//
* (다른 사람이 성공한 것을) 너도 나도 따라하는.
금학헌 팽나무 / 오성인
소경이라고도 했던, 나주/ 심장부인 목사내아 금학헌/ 앞마당엔 낙뢰를 맞고도 너끈히/ 오백 살을 산 팽나무 있다.// 이미 한 번 치명적 상처 겪어낸/ 경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 떠안고 찾아드는 이들/ 제 혈육처럼 반기는데// 늙은 나무가 만들어놓은 그늘/ 무언의 경전//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것과/ 삶은 고통의 바다 위 뜬 섬이라는/ 사소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치들/ 팽나무는 안다// 별별 산전수전 다 겪었을 老宿/ 어루만지면 손바닥에 고해의 소금/ 한가득 묻어나겠다//
* 故 노무현 前 대통령 유서 내용 일부
나무의 시절 / 오성인
전생이 나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연히/ 손바닥을 뒤집었는데// 한차례 견뎌왔던 시간들이 손가락 끝마다/ 나이테로 남겨져 있다// 몹시 정적인 파문波紋// 그 위에 고단한 누군가가 걸터앉았거나/ 바람에 등 떠밀려 불시착한 생이/ 정착해 새로 터를 일구기도 했을 것이다// 화법은 주로 몸짓과 냄새와/ 색깔로 구분되었고// 사람들은 잎사귀로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예측하거나 불확실한/ 사랑은 논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빨강으로// 이따금 마른 목과 썩은 발이 서로 엉키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손바닥을 쥐고 펼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부딪치고 부서진다// 나무의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나무의 기억을 더듬는 나는//
매미 / 오성인
폭염으로 끓어오르는 한여름/ 길을 걷고 있었다.//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사이 경계석이/ 만든 그늘에 매미 한 마리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죽어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 걸까,/ 생애 팔 할을 음지에서 보내고 온몸에 볕이/ 번지기도 전에 그늘로 돌아간 그는// 곧게 뻗은 입이 선비의 갓끈과 같고/ 이슬과 수액만 먹으므로 맑고/ 해를 주지 않아 염치가 있고/ 집을 갖지 않으며 오고 감이 분명해/ 오덕을 갖췄다던가// 도시에서는 낮밤 가리지 않고/ 소음과 불빛의 기세보다 맹렬히/ 울어야만 겨우 계절을 버틴다는데// 오직, 그는 유일한 자산이자/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그늘만으로/ 폭염보다 요란하게 울었을 것이다.// 고단했을 몸을 근처 풀숲에 놓아주었다./ 그늘이 된 그가 그늘을 베고 눕는다.// 모든 그늘은 누군가 울다 간 흔적/ 내 안에도 그늘이 자라고 있었다.//
민달팽이 / 오성인
이슥한 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민달팽이 하나와 마주쳤다// 그는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읽고/ 그 뒤에 가려진 하루의 무게를 온몸으로 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를 다 읽지 못했다/ 십오층을 출발한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다다르고// 나는 그 앞에서 더는/ 얼굴을 펼쳐 놓을 수 없었다// 표정이 사라진 거울을 그는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날 일 층에 내려갔을 때/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거울도 나도 깊은 밤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비워져 있으므로 늘/ 가벼운 몸이었으므로// 얼굴의 무게에도 힘겨워/ 곧잘 주저앉기 일쑤인 내가/ 사실은 어젯밤/ 그에게 잠시 머무르다 왔었나// 문득 등이 무거워 거울을 보니// 누군가 두고 간/ 표정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숭어 / 오성인
사월,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을/ 거슬러 오르는 숭어 떼/ 여차하면 난파당할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건너 기어이/ 생에 닿으려는 저/ 몸부림// 앙숙의 눈에 띄는 일이 두려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짐승처럼/ 변방을 떠돌기 급급했던/ 날들이 있었다// 저 숭어 떼와 같이 필사적으로/ 운명의 소용돌이를 정면돌파한다면/ 황무지와 다름없는 심장에 다시/ 풀은 돋을까 텅 빈 객석이 채워지고/ 그리하여 멀어진 인연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웬만한 시련은 기꺼이/ 무릅쓰는 숭어// 죽을힘을 다해 보지 않고서/ 내가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기절낙지 / 오성인
얽힌 발을 지닌 물고기라 하여 옛말로 낙제어絡蹄漁라 불렸던 낙지는 수명이 고작 일 년입니다만 그 힘 하나는 허벌나지요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투우 대회를 앞두고 싸움소들 강변 모래밭에서 연신 무거운 수레 끌고 둘레가 한 아름 넘는 나무 밑 둥치 뿔로 치고 걸며 맹훈련하는데요 워낙 고된 나머지 다리 풀려 주저앉기 일쑤이지요 이때, 소의 입에 큼지막한 낙지 하나 넣어주면 생각도 못한 호강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러나 모든 낙지가 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낙지 중의 낙지는 바로 꽃낙지, 겨울잠에 들기 전 영양 비축 들어간 요맘때가 맛이 가장 솔찬하여 요로코롬 어여쁜 이름이 붙었다나요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 있다고 기절낙지란 놈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지요 낙지를 바구니에 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사정없이 문지르면 글쎄 이놈이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어 몽글몽글 거품을 내며 잠에 빠져드는 겁니다 사지가 절단나도 여간해서 아우성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그리 새색시마냥 얌전해질 수 있는지 접시에 가지런히 누운 모습이 정돈된 드레스 같은데요 하여튼 이랬던 것이 삭힌 막걸리로 만든 초장에 들어가면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 흘리며 잠 깨듯 소스라치며 일어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눈으로 한 번, 그 맛에 두 번 놀란다고 하니 어떻습니까 쓰러진 소를 일으켜 세운다는 이야기가 결코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아닌 게지요//
호스피스 / 오성인
간암 말기 선배의 소식을 듣고/ 찾은 호스피스 병동.// 슬픔을 감추는 데 서투른 내가/ 죽음이 임박한 줄 모르는 그의/ 뼈만 남은 손을.// 차가웠다. 단단한 성질만으로는/ 감촉을 덮기 어려운 걸까.// 유독 잔인한 봄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서둘러 떠난/ 앙상한 몸의 벚꽃들.// 음식 조심하고 꾸준히 운동하면/ 괜찮아진대, 라는 말이 아직 너는/ 슬픔에 취약하구나, 라고 들렸다.// 어두운 낮을 가진 사람과/ 환한 밤을 가진 사람 중/ 슬픔을 감추는 데 익숙한 쪽은 어디일까.// 저승은 이승에게 위로가 되는데/ 죽음이 지척인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아무것도 되지 못 하는지.// 오래 길을 걸었다. 위로가 되지 못한/ 풍경들을 읽으며//
재난 / 오성인
별안간 반쯤 남은 커피가 엎질러지고/ 당신은 서둘러 허리를 구부린다// 기울어진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살기 위해 밀치고 부딪치고 짓밟히며 달려 나온다 기습적으로 건물은 기울어지고,// 여러 겹의 티슈를 뽑아 당신은 소리 없이 천천히 번지는 커피를 닦는다 커피는 예고 없이 쏟아졌지만 당신을 밀어내거나 짓밟지 않는다// 비명을 가지지 않은 것들은 슬프고 쓸쓸해요 만일 우리가 가진 비명을 조금 빌려줬더라면 커피와 건물은 불행하지 않았을 거예요ㅡ당신이 말한다// 커피를 머금은 티슈와 떨어져 나온 건물의 잔해가 종량제 봉투에 담겨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저것은 얼마 전까지 우리가 살았던 통증// 내일이면 다시 당신은 통증으로/ 나는 비명으로 불릴 것이다//
바닥에 대하여 / 오성인
할당된 몫을 비우고도 밥그릇/ 핥는 데 여념이 없는 개, 바닥 깊숙이/ 스민 밥맛 하나라도 놓칠세라/ 잔뜩 낮춘 몸// 지금 그의 중심은 바닥이다// 온몸의 감각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는/ 나차웁고 견고한/ 힘// 모든 존재들은 낮은 데서 발원하나// 생이 맨 처음 눈뜨고/ 마지막 숨들이 눕는/ 계절이 첫발을 내디뎠다가/ 서서히 발을 거두어들이는// 최초이며 최후인 최선이거나 최악인// 더는 낮아질 일도 붕괴될 일도 없는/ 낮은 벽, 혹은/ 천장// 낮춘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겪어 내는 일, 혼신을 다해/ 희로애락애오욕을 지탱해 내는 일// 그러므로, 나는/ 낮을 것이다/ 개의 혀가 밥그릇 너머의 피땀까지/ 닦아 내듯, 이생과 그 너머의 생까지/ 두루 읽어 낼 일이다// 기꺼이,/ 바닥을 무릅쓸 일이다//
닫힌 공간의 비가(悲歌) / 오성인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가두고 있는/ 창살, 저것들은 어디에서 적출한/ 뼈일까 골몰한 적 있다// 육신을 지탱하는 본연에서 벗어나/ 족쇄가 된// 뼈를 가두는 뼈// 손끝에 열대 우림 야자수의 감촉이/ 남아 있는 듯 창살을 매만지는 그는/ 얼마나 많은 울음을 뼈에 묻었을까// 원숭이에게 내재된 것이 사실은 흰/ 봉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관람객들은 먹이 주기에 여념 없다// 철창을 앞세워/ 억압이 평화로 구속이 자유로/ 포장되는 일을 함구하고 우리는/ 어디까지 교묘해질 수 있는 걸까// 시선을 교환한다 우리는/ 뼈를 한 마디씩 떼어/서로의 목숨에 붙인다// 뼈 안에서 들려오는 노래/ 먼 열대의 기억으로부터 생성됐을// 핏빛으로 물든/ 옛 도시의 절규 같기도 했다//
예지몽 / 오성인
간혹 내 안에 누군가가 비밀리에 살고 있나/ 하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만원 버스를 타고 가다 닭장을 생각할 때/ 돌연 닭을 빼곡이 실은 화물차가 나타나/ 나란히 붙어 달린다든지// 꿈에서 죽은/ 새의 정체를 골몰하며 걸어가는데/ 엉겁결에 죽은 새의 사체와 마주하거나// 영화나 드라마의 줄거리가/ 예상대로 전개되는 일// 불길한 생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일만큼 소름 돋는 것이다// 비밀이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고/ 조금씩 보이는 것에 있는데// 나보다 먼저 내 속을 간파해버리는/ 누군가로 인해 비밀로 불릴 수 없으니/ 닭장차 기사와 죽은 새와 영화의 주인공드은/ 나를 믿을 수 없으니// 어제 검은 나비에게서 심장 하나를 빌렸으나/ 그의 전후 행방이나 심장의 주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에밀레 ㅡ용광로 청년*에 대하여 / 오성인
도대체 어떤 극락이 아이를 미친 불길 속에 넣으라고 합니까 만일 세존의 가르침이 그러하다면 결단코 따르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아이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ㅡ엄마,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나를 낳아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당신 가슴에 맑고 싱싱한 꽃으로 필게 걱정 말아요// 어머니 오늘도 저는 광온(狂溫) 위에 섰습니다 펄펄 끓는 용광로 쇳물이 메두사의 머리카락처럼 날름거립니다 저는 여태껏 누구를 깊게 녹여보거나 누구를 위해 녹아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쉽게 식지 않도록 힘을 기울일 뿐입니다 일평생, 가난한 두 가슴으로 오롯이 저를 품어낸 당신, 강줄기 같은 당신 등에 저는 얼굴을 씻다가 종종 잠이 들었습니다 천도 넘는 온도를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견디겠다 했을 때 말없이 등만 쓰다듬으셨지요 용광로가 폐철을 녹여 새 철을 만드는 정성으로 주저앉은 가슴의 골짜기를 일으켜 세우고, 뼈가 가죽을 밀어내는 메마른 등과 텅 빈 자궁을 채울 것입니다// ㅡ얘야, 어젯밤 꿈에 너를 봤구나 별일은 없니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인 지가 엊그제 같은데 꿈이나 생시에나 내 안을 아낌없이 내주어도 부족하기만 한 아들, 내 아들아// 서른 전, 당신에게 닿습니다 젖물이 들어 있던 자리는 아득히 깊고 넓어 나는 감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제 목소리 어머니 가슴에 꽃 피도록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 2010년 9월 7일 새벽 2시께 충남 당진군 환영철강에서 근로자 A씨가 작업 중 5m 높이의 용광로 속에 빠져 숨졌다.
코로나 / 오성인
병이 돈다// 큰길부터 작은 골목까지 두루 다니며 울려 퍼지는/ 돌림노래처럼 친숙한 이들부터 생소한 이들까지// 감염된다// 병은 박쥐를 먹은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박쥐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박쥐의 맛과 질감과 영양과/ 박쥐를 섭취함으로써 일어나는 몸의/ 변화가 궁금한 사람들이// 박쥐보다 참혹한 병에 걸린다 박쥐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박쥐는/ 참혹하지 않지만// 병은 또 다른 병을 깨운다 그것은/ 박쥐에게 전파되지 않았는데// 누군가 기침을 하자 사전에 약속이라도 했었던 듯/ 시선들이 일제히 벽이 된다 격리된 그가 몸부림치다/ 제압된다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피부색이 같으며 동일한 풍속을 지닌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과 발이 묶이고 코와 입이 막힌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병을 낳고 키운다/ 형체와 색깔과 냄새가 없으므로 병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움직인다// 모두가 병이 되고 있다// 입에 피가 묻은 채 병에 걸린 세상과 사람들을/ 박쥐가 바라보고 있다//
검은 고무신 ㅡ섯알오름 학살터* 희생자를 애도함 / 오성인
이것은/ 살아서는 불리지 못할 이름 대신/ 남기는 증표/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향해 가는/ 군용트럭 짐칸에서 우리는/ 울음을 눌러 삼켰습니다/ 눈물의 뼈를 떼어/ 그 안에 영혼을 묻었습니다/ 눈물의 뼈를 데어/ 그 안에 영혼을 묻었습니다/ 우리가 삼킨 울음이/ 집채만 한 파도로 돌아와 곳곳에 만연한/ 슬픔과 절망을 분쇄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꽃 핀 자리보다 꽃 진 자리가/ 더 처절하게 붉은 동백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서 산 자를 인도하는 일이 더욱 찬란합니다/ 하나 둘 난분분하는 검은 꽃잎/ 덮어지지 않는 뜨거운 이름들//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왕곡식당* / 오성인
갑오년 탐관오리 폭정에 참다못한 민초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주(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분연히 일어나 제폭구민 척양척왜 부르짖으며 땅끝부터 곰나루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했는데요, 다른 고을들과 달리 양반의 세가 솔찬했던 나주는 야속하게도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된 농민군들은 금성관 앞 저자에서 효수되었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깊숙한 산간벽지나 연해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후일을 도모했는데요, 살아남은 일이야 다행스럽지만 먼저 몸이라도 성하고 나서야 독립이든 혁명이든 이어나갈 것 아니겠습니까 매정한 양반들관 달리 인심 넉넉한 밥집 주인들, 관군 감시 따돌리며 물 좋고 토양 비옥해 맛이 기똥차 임금님 자주 찾곤 했던 쌀밥에 쇠고기를 이십사 시간 푹 고아 낸 국물 몰래몰래 대접하며 살아남은 농민군들에게 힘 실어주었더랬지요 영산포 풍물시장 안, 하얗고 진한 사골곰탕으로 이름난 왕곡식당 곰탕 한 그릇 마주하면 백의의 농민군이 연상되어 무담시 눈시울 뜨거워지는 까닭이 이 때문인가 봅니다//
* 전라남도 나주시 이창동 소재, ** 김남주, 「죽창구」 부분.
미세먼지 / 오성인
슬프다/ 먼지로 와서 먼지로 살아가는 일이란// 잠시 머무르는가 싶다가도/ 떠도는 먼지/ 위에 거듭 쌓이는 먼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있다 햇살의 손자국에도/ 아르마딜로처럼 웅크린/ 어둠에도// 언제 적부터일까 유구한 먼지의 역사는// 그늘마저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방의 구석 손때와 타액으로 얼룩진/ 책 미완성으로 방치된 원고의 위에도/ 이어진다// 끝끝내 먼지의 역사는 씌어진다// 폐가 온 힘으로 거부해도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다 먼지는// 공기와 햇볕과 잎사귀 대신/ 그늘과 먼지만 먹고 자란 나방/ 하나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한바탕 먼지를 쏟아내고/ 먼지로 돌아간다// 사라지지 않는 먼지를 살아내기 위해/ 먼지로 불려야만 하는// 슬픔을 밀어 넣는 도시가 흐리다//
호야 불닭발* / 오성인
이른 저녁 단골 닭발집에서 독작을 하다/ 젓가락에 매달려 있는 닭발을 본다// 연약한 듯 보이지만 필사적으로/ 젓가락을 횃대처럼 움키고 있는 닭발// 닭의 생명력은 닭발로부터 나온다// 오래 멀리 날지 못하는 날개를 대신해/ 닭을 뛰게 하고 말간 피를 돌게 하고/ 숨을 불어넣고 또 다른 생을 품어내는// 낮지만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발// 끝내는 붙잡혀 뼈만 남기고/ 아니, 뼈마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에게 내어주고 생을 마칠 때까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닭은/ 살아왔을 것이다// 닭보다 긴 다리와 넓은 발을 가졌음에도/ 허방만 짚기 일쑤인 나는 언제 지척의/ 슬픔이라도 제대로 디뎌본 적 있었던가// 호야 호이야― 무르고 여린 발이/ 부끄러운 발을 일으켜 세운다// 닭을 닭이게 했던 물컹하고 오돌한 것이/ 저녁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나를 바라본다//
* 전남 나주시 성북동 소재, *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중.
통풍 / 오성인
발을 내딛을 때마다/ 폐허의 기억이 뼈를 찢는다// 누구에게나 있다 폐허는// 가만 어루만지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묵은 기침을 뱉으며 주저앉는/ 폐가의 담벼락에도 먼지가 내려앉고/ 녹이 슨 자전거에도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놀이터에도//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잡초처럼/ 곧잘 무성해진다// 내 안에도 폐허가 울울창창한데//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아주거나/ 그를 불러보거나 그에게 술 한 잔/ 권한 일이 없다 스스로가/ 폐허의 종족인 줄은 모르고/ 단 한 번도 폐허를 믿지 않은 나는// 바람만 스쳐도 식은땀이 나고/ 그늘에 부딪치기만 해도// 종종 쓸쓸해진다// 생살을 찢는다 오래된 슬픔이/ 질척인다// 낮은 데서 바람 우는 소리가 난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교체 / 오성인
워낙 장사가 되지 않자 간판을/ 바꿔 달았다 장례식장에서 횟집으로// 장의차가 울음을 밀어 넣으며 침묵하던/ 주차장엔 해수를 채운 활어차가 서있다// 고인과 상주를 알리는 전광판이 있던/ 자리에 놓인 수족관 속을 유영하고/ 있다/ 활어들이// 죽음은 장사가 되는가 과연 간판과 함께/ 죽음도 교체된 것인가// 주방으로 모습을 바꾼 빈소에서/ 주방장이 주문 받은 회를 뜬다// 손끝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잎과 꽃은 언제가 끝에서 돋는다// 더 이상 찾아오는 조문객은 없고/ 밤새 조명을 밝혀도 어둡지 않지만/ 작은 동네인 까닭에 여전히/ 장사는 잘 되지 않지만// 죽은은 얼굴이 바뀐 채 흐르고 있다// 남겨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망자처럼/ 제 살점을 집어 입 안에 넣는 사람들을/ 물고기기가 올려다고보고 있다// 칼날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담쟁이 / 오성인
진실을 은폐할 때 문은 벽이 된다/ 벽이 된 문에 목소리들이 붙는다// 저 몸짓,/ 불순한 행위로 치부한 것은 누구인가// 라면보다 부실한 장비에 의지한 채/ 생과 사를 넘나들 때 다른 한편에선/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고 목숨/ 부지하기 급급하던 당신들// 병든 나무의 신음과 벌어진 상처는/ 욕된 세계의 끝을 알리는 징조일까// 자식의 유일한 유품으로 남은/ 포장도 뜯지 않은 컵라면에서/ 누을 떼지 못하는 엄마와 뉴욕에서/ 인천까지 열네 시간 동안 견과류/ 알레르기보다 지독한 모욕을 견뎠을/ 한 집안의 가장, 영문도 모르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젊은 넋// 어떤 절망이나 죽음도/ 실패가 될 수 없다// 기꺼이 온몸 희생할 줄 아는 담장은/ 인간적인데 자꾸만 무엇을 덮으려는/ 벽은 냉담하다// 언젠가는 무너지고야 말 세계/ 혹은 敵, 영원히 견고하지 않을// 낡은 옷에 마음들이 붙는다//
가면 ㅡ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 오성인
브이,/ 이제 지긋지긋한 가면을 벗겠습니다// 하늘의 기분을 의식하지 않아도/ 새들은 편대를 이루고 비행하는데// 하늘보다 좁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일말의 표정도 새어 나가지 않게/ 우리는 가면을 밀착합니다// 고정된 표정// 안정적이지만 부패하기 쉽습니다/ 흐르지 않는 마음에 감금된 몸들// 생존을 위해 거짓 진술을 구사하고/ 생존을 위해 거짓 진술을 강요하는**/ 이곳은 누구를 위한 세계입니까// 하여, 살덩이 너머 감춰두었던/ 신념을 꺼냅니다 무리 지어 날아가며/ 모든 경계와 계급을 허무는/ 새들의 마음으로 손을 맞잡습니다/ 연대라는 눈물겨운 말을 믿습니다// 그러니 브이, 가면을 벗습니다/ 붉은 물감이 웅크린 몸을 피듯// 피가돕니다//
* 앨런 무어가 집필하고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림을 그린, 10개의 이슈로 이루어진 만화. 2005년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2006년에 개봉되었다.
**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사용하는 반면, 정치인은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사용한다(Artists use lies to tell the truth, while politicians use them to cover the truth up).”라는 극 중 대사를 패러디 함.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 ―광주 고려인마을 / 오성인
스탄, 도무지 입에 붙을 줄 모르는/ 말의 기분을 알까요./ 한 생을 살아내기 위해 아무르 알타이 파미르// 강과 산맥과 고원, 허공을/ 필연적으로 지나야만 하는 새들,/ 그들은 경계를 지우는 데 능숙합니다만// 어째서인지 오천삼백여 킬로미터 거리는/ 여간 좁혀지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타슈켄트에 이르기까지/ 산목숨들을 짐짝처럼 취급하고 팽개쳤던 독재자와/ 이념은 붕괴된 지 오래인데 여전히/ 파리만도 못한 우리에게 이곳의 여름과/ 겨울은 혹독합니다.// 달나라에 가서도/ 장사를 할 사람들**이라는 말은/ 그들만의 농담, 그늘이 너무 깊어 한낮/ 사막 한가운데서도 어둡기 그지없는/ 우리는 누구고 우리의 조국은 어디입니까.// 개미귀신처럼 백 년 넘는 시간동안/ 끈질기게 발목을 잡아온 화두를/ 풀기 위해 선조들의 자취를 따라/ 무연고 황무지에 벼가 뿌리내리듯/ 우리는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땅에/ 발을 딛습니다.// 월곡, 서러운 마음으로/ 계곡물 같은 달빛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 ‘한국의’라는 뜻, ** 카자흐 속담.
위르겐 힌츠페터* ㅡ푸른 눈의 목격자 / 오성인
씻어 내지 못한 피들로 얼룩진 손톱과/ 머리카락을 그곳에 묻어주세요// 그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푸른 내 두 눈을 의심했어요 봄을 봄이라고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말할 수 없었던 도시 가로수 빈 가지마다 빼곡히 맺힌 핏방울들로 거리는 온통 검붉었어요 이미 끊어진 숨들로 포화한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는 연신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느라 혼이 났어요 도청 분수대는 턱 끝까지 차오른 핏물을 쉴 새 없이 토해 내고 며칠 굶주린 짐승의 어금니인 듯한 진압봉에 의해 으깨진 살점들이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병원은 저승의 관문, 살아남은 자들이 주먹밥으로 목숨을 간신히 부지할 때 밤 열두 시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웃음을 흘리기 바쁘던 당신들은 진정 안녕을 바랍니까 어디로도 누구에게로도 통할 데 없었던 도시, 그저 절규하는 카메라를 다독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제 목숨 이어 가기 급급한 자들보다 의연하고 예리하게 세상을 관통하던 망자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요 코를 찢는 소독약 냄새와 가슴을 짓누르는 곡소리 사이에서 한동안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어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마저 보지 못하고 나는 도시를 떠나야만 했어요// 광주, 라고 발음하면 떨쳐 내지 못한 비극이 한 줄기/ 빛으로 아리게 돋아나요// 내 손톱과 머리카락을 부디 광주의 심장에 묻어 주세요/ 수많은 위르겐과 힌츠와 페터들이 앞서간 자들을/ 따를지니//
* Jurgen Hinzpeter: 1937~2016. 독일의 언론인,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영상에 담아 언론 통제로 인해 국내에서는 보도될 수 없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부분.
디그니타스(dignitas)* / 오성인
내 의지로 오지 않은 이곳에서의/ 여행을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여행하는 내내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과연 죄가 됩니까?// 왜, 혹은/ 어째서와 같은 물음으로부터/ 나는 자주 골몰했습니다// 살아내는 것인지 잠시 경유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는 어째서/ 죽음을 향하여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과 나는/ 행선지가 다른 지하철과 버스로/ 다행과 불행을 오가고, 가끔은/ 냉면 초콜릿 피시 앤 칩스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해지는지/ 미궁을 헤매는 마음으로// 함께 세계를 경유하는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가령// 색과 향으로 침묵을 버티는 나무라든지/ 고단한 물의 등뼈를 어루만지는 물고기들/ 가난을 목숨 삼아 경계를 지우는 새들/ 최선을 다하였으니 초라하거나 사소하거나/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은 것들 없었으니/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나는 떠납니다**// 더 사랑할 것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곳을 떠나 여행을 이어갈 겁니다// 그러니, 죄가 되지 않습니다 슬픔은/ 더더욱 아닙니다// 내가 걸었던 지도의 어디쯤엔가 서 있을, 당신//
* 죽을 권리를 호소하여 의사와 간호사에 의해 조력자살을 하는 스위스의 단체. 의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을 스위스 법원이 허가한 경우에 대상자의 조력 자살을 제공한다. 1998년 5월 17일, 루드비히 미넬라가 설립하였다.
** 베토벤(1770-1827, 57세)의 곡.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iheit> 가사 일부.
데칼코마니 / 오성인
5는 영영 완성되지 않는 데칼코마니// 맞은편의 빈자리는 이미 한번/ 머물렀던 누군가의 흔적// 대검에 찔린 골목과 총상을 입은/ 거리와 마지막 숨을 내쉬던 광장/ 피 범벅된 얼굴을 마주하고/ 피 묻은 몸을 부둥켜안고// 피 묻은 손을 내밀며/ 피의 목소리로 다 잘 될 거야*// 위로를 주고받았던 자리에서// 몸 반쪽이 꺾인 꽃과/ 날개 하나를 잃은/ 새와 나비가 엎드린 채 흐느끼고 있다// 익숙하고도 낯선 저 모습은/ 언젠가 우리가 겪었던 통증//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의 맞은편이/ 마저 그려져서 잃어버린 몸과 날개와/ 통증을 영영 잊어버리면 어쩌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의 비명/ 기억이 지속될 때 그림은 완전해진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가 외발이다//
* Everything will be OK. 2021년 3월 3일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서 군경의 총격에 사망한 19세 여성 치알 신의 티셔츠에 새겨져 있던 문구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상징으로 부상했다.
아일란 쿠르디Alan Kurdi* / 오성인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어머니/ 그리고 형, 당신들에게/ 내 목소리 닿나요// 아버지, 나는 섬에 닿기도 전에/ 섬이 됐어요// 고국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가 사준/ 셔츠와 바지와 양말과 신발은 참 따뜻해요/ 덕분에 처음 발을 디딘 이곳이 전혀/ 낯설지 않아요 마치 식구들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거든요// 코스**, 새로이 지어진 내 이름이에요// 섬이 된 내 안으로/ 총과 칼의 광기를 피해/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고향이 부재인/ 영혼들의 눈물이 하나둘/ 에게 해로 모여요// 인생을 짧게 하는 것은 피를 부르는/ 피와 그 피가 만들어낸 무기와/ 무기 배후의 광기라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해요// 총을 피해/ 칼을 피해/ 모여드는 눈물들 그러나/ 나는 무겁지 않아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뿐인 내 형/ 나는 섬이 됐어요 온힘을 다해 코스, 라고/ 발음하면 멀리서 눈물들이/ 반짝이며 달려와요// 더 이상의 분노도/ 비극도 없는 곳을 찾아/ 그렇게 나는 바다에/ 섬이 됐어요, 코, 스,/ 코스//
* 2012-2015. 쿠르드계 시리아인이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유럽으로 이주하던 중 지중해에서 배가 난파되어 터키 보드룸의 해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터키의 언론사 DHA가 공개한 사진이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 터키 남서부 해안 부근에 있는 그리스령 섬.
*** 코스 섬 출신의 그리스 의학자.
키덜트(Kidult) / 오성인
설계도를 따라가다 보면 잃어버린 유년의/ 심장과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릴 적 내 꿈은 과학자였어 사탕과 함께/ 철인 메칸더 아톰 그랑죠 등의 주제가를 입에 달고 다니며/ 단내를 풍기며―엄마, 내가 만든 코드번호 OS010―I70 로봇을 타고/ 우주여행 갈 수 있어―떠들어 대고는 했어// 설계도는 항상 머리부터 나를 이끌었어 몸통 없는 머리가 무슨 소용이야 그건 너무 시시한 일이지/ 살아있는 머릴 원해// 다리를 만들었을 때 계절은 여러 번 바뀐 뒤였고/ 팔을 겨우 완성했을 때 집의 각도는 기울어있었어/ 머리를 만들다가 엄마의 그림자가 흐느끼는 걸 봤지// 담고 싶지 않은 닮기 싫었던 풍경들을 저장하면 기억장치가 고장 나요 눈은 뺄 거야 청각장치로는 아쉽게도 앞을 볼 수 없어서 나는 철이 쉽게 들지 않았어 엄마와 별을 구경하러 가는 대신 엄마가 별을 구경하자며 불렀지 시들어버린 별들을 말아 넣은 김밥을 어묵국과 함께 주며―로봇은 만들지 않아도 돼, 이게 별이야―엄마는 말하곤 했어// 몸통은 지금 만드는 중이야 아직/ 심장을 찾지 못했어 쿵쿵, 울리던/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잃어버린 나의/ 년은//
발렌타인 ㅡ뤼순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 오성인
해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머니/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이 봄을 부르고 있겠지요/ 얼음을 갈고 갈아 만든 바늘을 빈틈없이 깔아놓은 듯/ 몸을 붙이고 있기 힘든 뤼순 감옥입니다만 고국의/ 사정에 비하면 제법 견딜만합니다/ 배고픈 뱀이 사냥감을 옥죄듯 차디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감방에서 저는 하얼빈에서의 일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침략의 원흉을 처단했다는 기쁨보다/ 오백 년 고목이 허망하게 쓰러져버린 슬픔이 커/ 저는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마른입에서/ 단내가 나는 줄도 모르고 만세삼창했습니다/ 애초에 제 사전에 불효는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정도로 환한/ 고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함이/ 못내 분하고 섭섭해 저는 쉬이/ 잠에 들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이 땅에 다시 봄은 오는지, 봄을 봄이라 말하는 것이/ 죄가 아닌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밤마다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간수로부터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전해 받았습니다/ 세상 어느 옷보다 따뜻한 이것에서 해주 냄새가 납니다/ 한낱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으로서/ 명을 다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도 진정/ 달콤한 날입니다//
슬픈 생일 ㅡ김소형氏* / 오성인
갯냄새에 잔뜩 절여진 몸을 차에 싣고 당신은 선혈이 낭자한 오월의 남도를 내달렸습니다 완도에서 나주 화순 담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도사린 광분한 맹수들의 눈과 전신을 조여 오는 기형의 어둠을 피해 가까스로 집에 당도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격랑의 한복판에 갓 태어난 딸아이의 첫울음을 꼭 안아주었지요 혹여 일말의 냉기라도 스밀세라 문틈까지 막아가며 말입니다 그랬던 당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여린 내 가슴에 남녘의 바다에서부터 지녀온 비린 향기만 남겨두고 한 송이 꽃으로 돌아갔지요 해가 거듭될수록 그윽해지는 당신 체취,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눈물의 뼈를 깎고 다듬어 상像을 빚어내는 일은 잔혹한 오월을 견디는 나만의 방식이었어요 온몸으로 당신을 부르면 한 가닥 촛불이 화답하듯 타오르며 그늘진 내 안을 밝혔습니다 도무지 발길 닿아지지 않는 그곳에도 봄은 왔습니까 이제는 내가 당신의 울음을 안습니다 사, 랑, 합, 니, 다 아버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족.
8 / 오성인
위아래로대치중인각각의원을지독한이데올로기라규정한다/ 우람해지거나왜소해지지도않은채둘은오래도록대립중이다// 희생은빈번하다각자의영역을수호한다는미명하에/ 원은피를갈구한다비명에죽은이들의/ 피가원을감싸며흐른다// 피의유속이느려지고검붉어질수록/ 뚜렷하고팽배해지는두원의대립// 원과원의가운데/ 지점을끊어내야이지겨운대립이끝난다고/ 여러차례견해를제시했으나그때마다나는하나의/ 원만제거하면된다고주장하는자들에의해불순분자로/ 치부되었다// 보고싶은것만보고듣고싶은것만듣고/ 맡고싶은것만맡고맛보고싶은것만맛보기위해/ 원안의사람들은안경을더욱밀착해썼다/ 사물이크게보일수록풍경들이사라졌고/ 누구도사라진풍경들을말하지않았다// 하나의원을살리기위해다른하나의원과/ 그구성원들이죽어야만하는것이정당한가/ 같은족속들이지만대립의지루함과그로인한괴로움을/ 알길없는o나ㅇ보다아무래도나는0이좋았다/ 0은죄책감이없었으므로// (나의피만은부디저원을감싸며흐르지않았으면한다)// 원과원사이팽팽한교차점당신들이사라졌다고믿는/ 풍경들은저기에있다// 누구도말하지않는풍경들을나는옹호한다//
고구마 ㅡ조시(弔詩) / 오성인
작년 이맘때 여름에 엄마는 두 이모와 밭으로 다녔다 방치되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기에 당신들은 고구마순을 심었다 밭을 고르고 무성한 잡초를 뽑았다 작은 이모 안에도 질긴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뽑아도 뽑아도 조금씩 번지며 자라는 잡초들을 이모는 원망하지 않았다 잡초들과 씨름하다 보면 깎여나간 가슴 한쪽 노랗고 다디달게 채워질 것 아니겠느냐며 이모는 자줏빛 웃음을 흘렸다 마른 흙먼지만 날리던 이모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고구마가 달덩이만큼 컸을 때쯤이면 휑한 이모의 머리에도 녹음(綠陰)이 우거져서 침묵했던 시간들 눈을 뜨며 푸른 별들 돋아날 텐데,// 비가 유난히 내리지 않았던 계절을 버티던/ 고구마 줄기들이 말라갔다, 이모의 전화도/ 어느 순간 희미해져서 밭에는 다시 잡초들이/ 무성했는데// 가을에 낙엽이 된 이모는 자줏빛 웃음 내려놓고 떠났다 이모를 보내고 엄마는 다시 밭에 나갔다 무성해진 잡초들을 뽑고 순을 심었다 엄마 안에// 울음이 우거져 있었다// 통곡처럼 내리는 비를 맞고 자란/ 고구마가 맛있는 법이라고, 맛있겠다고 엄마는 연신 침묵만 흐르는 시간을/ 어루만졌다//
분실 / 오성인
우산을 자주 버스에 두고 내렸다 대신, 누군가가 놓고 간 먹구름을 뒤집어썼다 눈물 한 방울 스며들 수 없을 만큼 몸이 젖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낙타는, 물 없이 이 주는 거뜬히 살아간다 했던가 등 뒤로, 가난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눈물이 혹처럼 솟아있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림자를 놓고 외출한 날에는 치사량 넘는 햇볕을 받았다 가뭄 든 논바닥처럼 살이 갈라지고 뼈가 공명음을 내지 않을 때 눈물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았다 피가 모자라도 초승부터 보름까지 살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울음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했다// 나를 잃어버리는 날이 많았다 눈물에, 가까워질수록 우산과 그림자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소량의 먹구름과 햇볕, 혈액만으로도 고마웠다 당신에게// 이르려면 잃어야 했다//
전복 / 오성인
화물차가 넘어지자 적재함에 앉아 졸던/ 맥주병들이 피 흘리며 나뒹군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운전자가 관자놀이 짚듯/ 핸드폰 버튼을 누른다// 눈 감아도/ 잊히지 않는 실수들이/ 되살아나듯 몽글몽글/ 도로에 피어오르는 거품들// 그런 적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뒤집어 놓고/ 기약 없는 어둠을 형벌로 받았던/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고/ 남몰래 엎드려 울음을 삼켰던// 손바닥을 뒤집을 때마다/ 너울거리는 죄책감// 해초의 순한 마음을 닮고 싶었다// 화물차는 넘어져 있고/ 만취한 도로가 맥주 거품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운전자가 전복처럼 엎드려 있다//
수술 / 오성인
마취제를 맞은 거대한 범 한 마리가 잠들어있습니다 사천삼백오십일 살, 생몰년을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고연령입니다 오늘, 반백 년 넘도록 이놈의 몸 정중앙을 가로지르며 옥죄고 있는 올무를 제거할 겁니다 수술 집도에 지장이 되는 이들은 출입을 엄금합니다 난무하는 억측과 유언비어는 무형의 훼방꾼, 심려하는 척 상처를 방관하고 덧나게 한 것은 누구입니까 호시탐탐 가죽을 노리거나 그 목숨을 취해 출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당신들을 불신합니다 그가 직면한 극단의 상황과 고통은 운명공동체인 우리 몫입니다 불규칙한 맥박을 절망이라 단언하는 것은 직무유기, 괴사의 지경에 이른 피부조직이 손상되지 않도록 먼저 올무부터 들어내겠습니다 살을 가르겠습니다 흥건한 땀방울, 메스를 잡은 손이 떨립니다 침착해야 합니다 썩은 피가 고이고 굳어있는 혈관이 눈에 들어옵니다 커브드 바스큘라 클램프와 프롤린 화이브 제로를 주세요 건강한 혈관 일부를 떼어 이식할 겁니다 상실된 기억이 복구되듯 혈관이 푸름을 찾아갑니다 범의 창백한 몸에, 혈색이 돌아옵니다 뒷다리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에 전이된 악성종양도 뿌리 뽑겠습니다 일이 순조로워 이제야 한시름 놓습니다 열려있는 상처를 봉합하고 항생제를 투여한 뒤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과는 속단 못 하겠는데요, 반만년 동안 크고 작은 병치레 헤아릴 수 없이 겪어 왔으니 무리 없이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따로 놀았던 몸이 하나로 묶이고 새살이 돋을 때, 다시 범은 포효할 것입니다 시베리아 벌판과 지중해 바닷물의 신경이 곤두설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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