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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안녕, 미소포니아 / 김사랑

부흐고비 2022. 5. 6. 09:10

무작정 집을 나섰다. 마스크만 쓰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니 체한 듯 답답했던 명치끝이 조금은 시원하다.

전망대에 털썩 주저앉아 내려다본 풍경은 내 유년 시절을 품어주었듯이 따뜻하다. 그리움이 출렁이며 춘풍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린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바람은 부드럽게 내 감성을 살찌운다. 물 냄새가 가볍게 코끝을 간질이고 두 눈을 감는다.

호수를 내려다본다. 만수(滿水) 위로 수상가옥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전에 없던 좌대가 낚시꾼을 기다리며, 어릴 적 내 놀던 곳을 가늠해 본다. 아슴아슴한 기억이 저쯤이라고 일러준다. 맞아 저쯤에 우리 집이 있었지, 살짝 들어간 산허리에는 다랑논이 있었고, 그 위로 밭이 있었어, 밭가의 너구리굴도 무서웠어, 그러나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었어, 덜 익은 개구리참외를 따서 앞 지락에 안고 와서 앞니로 껍질을 벗기며 꿀꺽꿀꺽 삼켰지. 붉은 옥수수 대를 꺽 어서 껍질을 입으로 벗겨 들척지근한 물을 쭉쭉 빨아먹으며,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웃음소리가 소나기 소리를 너머서던 곳 바로 저기, 내 집이 있던 곳.

유년 시절로 돌아간 듯,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비 오기 전날에 아스라이 들려오던 기적소리다. 기차는 보지 못하였어도 저 소리는 기적소리라는 걸 안다. 어떻게 단언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소리는 생경해도 산을 넘어 군부대에서 포 소리를 잡아끌고 넘어왔다. 어려서는 이곳 저수지가 학교에서 배운 태평양보다도 더 넓다고 생각했다.

봄, 미선나무 꽃이 벌면, 아버지는 찰벼 씨를 큰 고무 통에 담그셨다. 휘젓는 아버지의 손을 따라 볍씨는 모두 세로로 섰다. 소금물이 가득한 고무 통에는 달걀이 동동 뜨고 하도 신기하여 옆에서 작은 호스 토막을 돌리면, 그 속에서 휘파람 소리가 길게 빠져 나왔다. 앞산 뻐꾸기 사랑 노래가 들리면 들깨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에 알을 놓친 산 꿩이 꿩꿩 애절한 소리로 울었다. 허전한 속을 채우려 풋 밀을 베어 들불에 올리면, 타다닥 익어가는 소리, 도라지꽃 몽우리가 처녀 젖가슴같이 봉긋하면 선머슴 애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두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팡팡 터지는 소리가 좋았다. 은방울꽃이 조로 롱 열리면 누워서 눈 맞춤을 하였고, 여뀌 풀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붉은 복장을 한 근위대처럼 멋졌지, 바람과 들꽃향기는 풋풋한 감성을 그리움을 여심을 키웠다.

그래 저곳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가뭄과 싸웠다. 부자가 마주 서서 한스러운 춤이라도 추듯 물을 퍼 올렸어, 질펀해진 논에 누렁이는 부리망을 쓰고 고통의 하루를 열었어. 이랴 쩌쩌, 이랴 쩌쩌. 워워! 노을이 타는 길을 아버지는 소를 끌고 돌아오셨지.

내 귀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 색처럼 여러 소리가 들어와 둥지를 튼 지 오래다. 아직도 무색무취인 소리를 불러내 쫓아버릴 방도가 없다. 그동안의 여러 병원도 전전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또한 요즘은 마스크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데, 몸에 이상이 생겨 그것마저 불가하다. 그러다 보니 철 지나 쪼그라진 감자가 영락없는 내 꼴이다.

미소포니아, 증상이 찾아든 것은 시어머니와 몌별한 후였다. 오래전 그날, 시골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간호사도 없이 서울 큰 병원으로 올라왔다. 위급한 사이렌 소리를 끌며 구급차가 달렸으나 어머님은 끝내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날 이후 구급차 소리는 내 귓속에 여러 소리를 더 끌어들여 대장간을 만들어 놓고 기세가 등등하다. 몇십 년 넘게 시도 때도 없이 산발적인 소리로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안겼다. 평소에 힘들어하는 내게 살아생전 친정어머니는 남 이야기하듯 두런거렸다.

“그래도 안 들려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것보다 들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낫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시던 어머니도 지금은 곁에 안 계시다. 혼란스러운 청각에 이명까지 얹히니 추녀 밖 연장처럼 몸과 마음이 부식되어 간다. 친구들하고 어쩌다 노래방에라도 가면 한 곡 멋지게 부르고 화면에 지폐도 부쳐보고, 일행이 신나는 노래라도 부르면 탬버린 춤이라도 신들린 듯 추고 싶지만, 마음뿐이고 그곳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

의사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각인된 기억을 봉인하는 것도, 해제하는 것도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유연하게 노력하여 빠져나와야 한다며 성격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음을 강조하며, 매번 같은 소리다. 치료와 약을 먹어 봐도 큰 효과가 없고, 청각과 후각이 예민하여 유별난 사람으로 내몰리기에 십상이다.

몇 개월을 시들시들 지냈다. 남들처럼 마스크를 쓰고 밖이라도 나가서 실컷 걷고 싶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이곳 전망대에 오면 한없이 평온하다. 봄꽃이 활짝 핀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저수지 한가운데 꽃 섬은 여전히 푸르다. 아니 홀로 외로움을 견디며 울창하게 내실을 갖추어서 아름다운 꽃 섬으로 수면에 동동 떠 저수지의 백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향기가 코끝에서 봄물 냄새가 난다. 고비마다 찾아와 마냥 부모에게 넋두리하듯 쏟아내고 돌아서길 여러 번 삶의 버팀목이 되어 다독여주는 호수다.

내 귀에서 작은 소리가 들린다. 연초록 바람 소리 물소리. 고향의 정겨운 소리가 음악처럼 자주 들린다. 머지않아 미소포니아 뒷모습을 볼 수 있겠지 싶다. 오랫동안 고문하듯 성업(成業)이던 대장간이 드디어 폐업 수순을 밟고 있음을, 날마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작아지는 소리를 감지한다.

그리우면 언제나 달려올 수 있던 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엉뚱하게 현대 의료진에게만 매달렸는지, 내 안의 나를 오롯하게 마주하며 위로라도 해 보았더라면 미소포니아는 진즉에 떠났을 것을.

* 미소포니아 증후군: 특정한 유형의 소리에 부정적 민감성을 보이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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