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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은사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5. 23:08

동창 옛 친구가 찾아왔다. 시골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 온 지 두어 달 된다고 하였다.

점심을 함께 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화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친구는 "노상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가 집으로 놀러 오라고 명함을 주던데." 하면서 수첩을 꺼냈다. 그가 사용한 '제자'라는 말이 내 귀에는 생경하게 들렸다.

그 제자는 개인 병원을 차린 의사였다. 일요일이니 집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한 듯 친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의사는 외출하고 없어서 그 부인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누구시냐고 묻는 듯 친구는 자기를 '중학교에서 가르친 은사라고 소개하였다.

자기 입으로 '은사'라고 말한 것은 아마 실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를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글자 그대로 '은혜로운 스승으로 자처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 친구에게 어딘지 부러운 면이 있다는 상념이 스쳐갔다.

나도 교편을 잡은 지 그럭저럭 40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러나 '은사'는 고사하고 누구를 가리켜 '제자'라는 말이 얼른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졸업생'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스승과 제자, 그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보다 더 깊고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옛날에는 자식보다도 제자를 더 깊이 사랑한 스승이 있었고, 부모보다도 스승을 더 끔찍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다.

옛날 존경을 받았던 스승들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 젊은이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학덕을 나누기 위해서 가르쳤거나 문하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든 까닭에 선생이 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제자들은 스승의 신세를 지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고, '은사'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생겼을 것이다.

학덕이 높았다는 것과 돈을 떠나서 가르쳤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은 '은사'의 탄생을 위해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 오늘날 스승의 탄생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도 스승다운 스승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옛날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그것이 요청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적은 보수로 봉사하고 있다는 현실은 뜻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미안한 느낌을 안겨 준다. 보수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옛날의 스승들의 경우와 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미안한 조건이 스승의 탄생을 위해서는 도리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나를 찾아온 친구가 사용한 '제자' 그리고 '은사'라는 말을 그 초라한 모습과 연결할 때 약간 어울리는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학 교수도 오랫동안 박봉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최근에는 한국의 일반적 수준에 비추어 가난하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스승'을 위한 조건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성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 현대 생활 속에서 옛날 기준에 맞는 스승의 탄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해마다 수천 명의 입학생과 수천 명의 졸업생이 교대하는 대형 교육 기관에서 우연히 만난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일률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사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안이한 생각일 것이다.

현대에는 현대에 어울리는 사제 관계가 성립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선생과 수많은 학생 가운데서 서로 선택을 하고 선택을 받았을 때 비로소 사제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 오늘의 실정에 맞을 것 같다. 선생의 경우에는 역시 높은 학덕이 선택을 위한 첫째 조건이 될 것이고, 학생의 경우에는 진심으로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자세가 선택을 위한 첫째 조건이 될 것이다.

교실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만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 더 만나야 한다. 존경과 사랑의 정을 안고 다시 한번 만날 때 비로소 사제의 깊은 인연이 맺어진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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