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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잊혀지지 않는 친구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7. 08:22

자주 산책을 함께 하던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북악산에 오르기로 목표를 정했다. 중간쯤 올라가다가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정상으로 이어진 길이 어느 편이냐를 두고 우리의 의견도 둘로 갈라졌다.

서로 제 의견이 옳다고 잠시 맞섰다. 그러다가 친구는 곧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고 내 말을 따르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내가 옳다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인데, 사실 그것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길도 모르면서 고집만 부렸다고 친구가 나를 조롱했을 때, 그런 나를 졸졸 따라온 자네는 나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응수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친구는 아주 여유 있는 태도로 말하였다.

"자네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직접 경험을 통하여 실패를 해봐야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지. 그래서 오늘은 자네의 교육을 위해서 내가 헛걸음을 걷기로 한 걸세.“

친구가 정말 알고도 틀린 길로 따라온 것인지 임기응변으로 재담을 한 것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근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의 말이 명담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는 남이 터득한 지혜를 받아들일 줄 모르며, 직접 경험을 하고서야 세상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패를 하고 겨우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기가 너무 늦기 일쑤이다.

친구는 물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얻은 뒤에 곧 서울대학교에서 전임 강사 자리를 얻었다. 재능이 탁월하고 특히 외국어에 능통했던 그에게 학자로서의 탄탄대로가 열렸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부러움 섞인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이때 친구가 나에게 한 말도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까짓 것 한국에서 일등하면 뭘 해. 우물 안 개구리가 큰들 얼마나 크겠어?“

예나 지금이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우리끼리의 경쟁에 여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일등을 하고 싶은 것이다.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서로 격려하고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 가운데서 일등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장하고 보람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 일등을 노리는 일에만 급급하여 나라 전체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는 비교적 등한하다. 때로는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 남을 끌어내리는 일조차 있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소 궁둥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 주둥이가 되라'는 옛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이웃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위에 있느냐 아래에 있느냐보다도 우리 전체가 어떤 높이에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우리는 항상 나와 이웃 사람을 비교하는 버릇이 있다. 굳이 남을 의식하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나 자신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알뜰하게 사는 일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이웃과의 비교에 공연히 힘만 낭비한다. 시새움이 지나친 것이다.

실력으로 남을 앞지르기 어려운 사람들은 남보다 앞선 것처럼 겉모습을 꾸미는 일에 노심초사한다. 허세에 밀려 내실은 점점 빈곤해지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명담으로 가끔 의표를 찌른 그 친구와 내가 친교를 맺은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그 친구가 본래 고고한 편이어서 좀처럼 남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가 나를 친구로 인정하기까지에는 서로 알게 된 뒤에도 삼사 년이 걸렸다. 겨우 좀 친숙해지자 6.25 전쟁으로 한동안 헤어지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등을 시덥지 않다고 한 자기의 말에 충실하고자 했음인지, 미국 땅에서 영주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면 그 친구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지도 않지만, 내 천성이 게으르고 우정이 미지근한 탓으로 지금껏 서로 소식을 끊고 살아왔다. 비록 편지 한 통의 왕래도 없이 무심하게 지내는 사이이기는 하나,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난다.

나이 삼십이 넘어서 외국 유학을 갔으니, 선진국에서의 물리학으로 일등을 하기에는 때가 늦었었다. 이국(異國)에서의 그의 노후가 쓸쓸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스쳐간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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