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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교의 교사(校舍) 증축 기공식이 기독교식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기도’ 차례가 왔을 때 학교 목사님이 앞으로 나와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며 오른손을 가볍게 들자, 참석자 일동은 곧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경건한 분위기 속으로 몰입하였다.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학교가 꾸준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도록 항상 돌보아 주셨고, 특히 오늘 또다시 큰 건축을 계획하고 이렇게 기공식을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높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는 내용의 기도였다. 억양이 알맞게 배합된 목사님의 굵은 목소리만이 이어질 뿐 그밖에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엄숙한 순간,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고개를 살며시 들며 실눈을 떴다.
내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참으로 진지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신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교만함을 뉘우치며 겸손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었다. 나를 아주 놀라게 한 예외였다. 그 학교에서 영어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 두 사람이 함께 기도는 올리지 않고 고개를 들고 마주 보며 무슨 귓속말을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경건하게, 더 열심히 기도를 올려야 할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라고 믿었던 나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광경이었다.
‘아아, 이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파는 사람들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감기 기운이 있거나 뱃속이 거북해서 병원을 찾아가면, 주사를 두 대쯤 놓고 물약과 가루약을 지어 주는 것이 보통이다. 약 먹는 시간을 어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내일 한 번 더 오라고 이른다. 그러나 아주 절친한 사이의 의사를 찾아가면 여간해서 주사를 놓지 않는다. 물약도 가루약도 주지 않는 친구조차 있다. 감기에는 쉬는 것밖에 약이 없으며, 배탈에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굶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등을 밀어 낸다.
나는 한때 이런 의사들을 무성의하고 인정머리 없는 의사라고 생각하였다. “의사가 병에 걸리면 약이 없다”는 말을 의사의 입에서 들은 적이 있다. 의사는 좀처럼 약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에게도 약을 잘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 을 들었을 때, 나는 약을 잘 주지 않는 의사를 무성의하다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무지의 산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니 부지런히 주사침을 꽂는 의사들에게 의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약과 의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사들 가운데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기도를 믿지 않던 30년 전의 두 선교사를 상기했다. 의사와 선교사, 그들은 서로 거리가 먼 두 유형의 직업인이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때로는 팔아야 하는 고충을 안고 있는 직업인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믿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고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은 역시 팔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직업을 갑자기 바꾸기도 어렵거니와, 믿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굳이 나무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값지다고 믿는 것에 한하여 남에게 권하거나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팔기도 하는 것만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무슨 무슨 주의니 하는 이름이 붙은 사상들이 숱하게 많다. 그 사상 가운데 어떤 것을 진심으로 옳다고 믿으며, 그 사상의 구현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혹 그가 신봉하는 사상이 내 의견과는 맞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그를 한 인간으로서 미워할 수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신념에 충심할 따름이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볼 때 존경받을 만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사상이 진실로 옳다는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 또는 어떤 이해타산에서 하나의 주의 또는 사상을 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들고 나서는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열을 올리기도 한다. 사상을 믿고 그 구현을 위하여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팔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사상을 팔아먹기 위한 상품처럼 대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이름이다. 불성실한 상인들이 상품의 내실보다도 겉모양이나 포장을 중요시하는 것과 비슷한 사정이다.
사상의 내용보다도 그 이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가끔 이름은 그대로 두고 사상의 내용을 엉뚱하게 바꾸기도 한다. 예컨대 ‘민주주의’니 ‘사회 정의’니 하는 이름 속에 딴 내용의 것을 집어넣어 범벅을 만드는 것이다. 가짜 상품에 남의 상표를 붙여서 파는 행 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가장 곤란한 것은 ‘애국’이라는 이름을 파는 사람들이다. ‘나라 사랑’이란 오직 실천의 원리일 뿐이요 결코 상품화할 수 없는 이름이다. 우리는 실천으로써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진심으 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반면, 입으로만 ‘애국’을 부르짖으며 속으로는 딴 생각하는 사람들을 크게 미워한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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