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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정(情)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13. 05:18

최근에 어떤 친구로부터 내 성질이 다정다감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향수(鄕愁)에 가까운 느낌에 젖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다정다감하다’는 성격 묘사였다.

내가 ‘다정다감’이라는 말과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이 적은 통지표 기록에서였을 것이다. 그 말의 뜻을 잘 몰랐으나, 그 무렵 집에서 자주 듣는 ‘계집애 같다’는 말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계집애 같다’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이듯이 ‘다정 다감’도 별로 탐탁스러운 말은 아닐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어린이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것이겠지만, 나의 경우는 동무들에 대한 애착이 좀 심한 편이었다. 대여섯 살 어린 다리로도 나는 꽤 먼 곳까지 동무를 찾아서 '마실가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부엉이 울음소리 들어가며 밤마실을 가기도 하였다. 계집애같이 다정다감한 기질과 그래도 사내 코빼기라고 무서움을 타지 않는 산마을 머슴애의 적극성이 결합 되어서 그런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 내가 무심코 한 낙서 가운데 '우정'이라는 낱말이 자주 있었다. 역시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정에 대한 갈망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매정하고 쌀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때는 염인증(厭人症)에 걸려서 일부러 사람을 피하기도 하였다. 왜 그러한 변화가 생겼는지는 생활의 내력을 더듬어 보아야 밝혀질 일이겠지만, 아마 사람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어떤 실망 또한 환멸에 부딪쳐서 반동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에 대한 실망 가운데서 가장 컸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다. 처음에는 세상 인심에 대해서 그 믿을 수 없음에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깨달았을 때, 인간이라는 종족이 통틀어서 슬픈 존재라는 느낌이 온통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그토록 병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칵테일 파티와 같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나가는 것이 귀찮은 일로 느껴질 정도이니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소수의 친지와 만나는 것은 즐겨 원하는 편이니 크게 염려할 정도의 염인증은 없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떤 심리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째든 다정다감하고 따스함이 지배하던 어린이 시절과는 아주 대조적인 위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정리라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정의 심리가 몹시 미묘하고 까다롭다고 보는 까닭에 차라리 가두어 두거나 멀리하고 싶은 생각에 밀리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뜨거운 정열의 심리가 차가운 이지의 심리로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뜨거운 요소와 차가운 요소가 마음 바닥에 아울러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젊은이 시절에는 대개 뜨거운 마음이 위로 솟다가 나이가 들며 세파에 시달리는 가운데 차가운 마음이 차츰 위로 떠오르는 것이 일반적 추세일 것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그 변화의 폭이 좀 컸다는 점이 문제가 있었다면 있었을 것이다. 정이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세상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이라는 놈 때문에 항상 삶이 피곤하고 번거롭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정이 많다. 정이 많은 까닭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또 서로 미워한다.

어렸을 때 너무나 다정다감했던 까닭에 뒤에는 도리어 매정하고 쌀쌀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 자신의 옛날과 지금을 견주어 보면서, 도무지 모를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보고 다정다감하다고 말한 친구는 나의 젊은이 시절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나의 어디를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던 것은, 아마 나의 옛 모습이 어디엔가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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