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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의 장편소설 '가족'에 나오는 여주인공 강여사의 남편은 아내가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도 아름다운 것을 왜 굳이 화장을 하느냐고 반대하는 것이었는 데, 노골적으로 간섭을 하지는 않았지만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를 보였다.

반면에 벌써 여러 해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 딸아이와 맞선을 본 어떤 청년은 여자가 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다고 불평을 하였다고 했다.

어쨌든 남자란 제멋대로다. 남이야 화장을 하든 말든 자유일 터인데, 마치 무슨 간섭 특허권이라도 딴 것처럼 말이 많다. 주제넘은 사람들.

` 여자의 심리 또한 미묘하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모양을 바꾸고 왔는데 남편이 아무 소리 안 하면 시비를 건다. 신경이 무디고 아내에게 무관심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바꾼 머리 모양이 먼저 머리만 못하다고 느꼈지만, 굳이 그런 말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 침묵을 지킨 것인데 공연히 시비를 건다. 결국 여자도 제멋대로이기는 매양 일반이다.

남자는 제멋대로 여자에게 요구하고 여자는 제멋대로 남자에게 요구하지만, 서로 그것이 싫지 않다. 요구의 바탕은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요구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절실한 요구는 여자다운 여자로 남아 있어 달라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절실한 요구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여자에게 여자답기를 바라고 남자에게 남자답기를 바라는데 무슨 잘못이 있으랴 싶다. 그러나 이 요구가 말썽이 되어 가끔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한다. 등을 돌린 자세로 여전히 서로 끌어당긴다.

여자에게 여자답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소망이 못마땅한 것은, 남자들 자신을 위해서 여자답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분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에게 남자답기를 요구하는 데 대해 비위가 상하는 것은 '당신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것이 여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은 남자를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많은 데는 무슨 사유가 있을 법하다. 오랫동안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한갓 꽃이나 노리개로 대접했다고 하는 여자들의 불평이 생각난다.

우락부락하고 야성적이어서 겉으로 보기에 남성적인 듯하나 속은 그렇지 못한 남자들이 흔히 여자를 학대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남자다운 남자들은 결코 여자를 꽃이나 노리개로 대접하지 않았다. 만약 세상 남자들이 모두 정말 남자답다면 여자를 학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남자들이 모두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날, 여성은 여성답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염원을 여자들도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굳이 누구를 위해서 여성다워지는 것이냐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울 때, 삶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위해서 아름답고 보람찰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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